그때 그 역사

독립전쟁사의
금자탑

독립전쟁사의 <BR />금자탑
글 은예린 역사작가


독립전쟁사의 

금자탑


청산리전투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 이후 나라를 되찾기 위한 염원과 노력은 각계각층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망명한 이들은 장차 다가올 독립전쟁에 대비하여 독립군 기지 건설에 노력을 기울였다.


독립군 양성의 요람, 무관학교가 설립되다

독립군들의 독립전쟁을 실천하려는 계획은 신흥무관학교 설립과 운영으로 이어졌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훗날 항일 무장투쟁을 이끄는 주도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서간도는 망명 인사들에 의해 독립군 근거지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이에 국내외 청년들은 이곳으로 결집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향한 의지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고조되는 분위기였다.  

교육열이 높았던 재만 한인사회에서 문무를 겸비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에 대한 신뢰는 대단하였다. 졸업생 중에는 압록강 대안인 서간도뿐만 아니라 두만강 대안의 북간도 지역의 민족학교에 파견되어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선구자로서 시대적인 책무에 혼신을 기울였다. 이들은 낮에는 학과를 가르치고 밤에는 한인 청년들에게 군사교육을 실시하는 등 독립전쟁에 만전을 다하였다. 졸업생들이 파견된 지역은 유사시에 독립군으로 재편될 예비군이 준비되어 있었다.

북로군정서도 사관연성소를 설립하고 교관 이장녕·이범석·김홍국·최상 등과 함께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사훈련을 진행하였다. 상등병 이상 사관생들에게는 현대 전쟁의 전략전술 등 군사교육과 훈련을 병행하였다. 사관연성소 사관생 298명이 1920년 9월에 졸업한 직후 청산리로 이동하였다. 이들이 부르고 부르던 군가에는 불공대천의 원수 일제를 타도할 의지가 충분히 반영되었다.


3·1운동 이후 독립군 세력이 결집하다

국권 상실을 전후하여 간도와 연해주 지방으로 옮겨온 의병 출신의 지사와 교민들은 민족 독립을 위해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하였다. 3·1운동 직후 독립군 세력은 대폭 강화되어 대담하게 국내 진입 작전까지 감행하였다. 1920년 6월 7일에 독립군을 추격하여 만주 허룽현(和龍縣) 봉오동 골짜기까지 침입한 일본군 1개 대대를 홍범도·최진동·안무 등이 지휘하는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연합부대가 몰살시켰다. 봉오동전투에 큰 충격을 받은 일본군은 독립군과 독립운동가들을 토벌하는 이른바 ‘간도지역 불령선인 초토 계획’을 수립하였다. 만주 군벌 장쭤린(張作霖)은 일본군 파견 장교의 감시하에 중국군을 출동시켜 한국 독립군 토벌을 약속하였다. 그런데 중국 관헌의 간부 일부는 일본군의 강요에 굴복한 중국군의 독립군 토벌에 찬성하지 않았다. 

한국인 교민단체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와 중국군 군영장 멍푸더(孟富德) 사이에 비밀 협정에 의한 타협이 성립되었다. 요지는 독립군 부대들이 근거지를 이동하여 일본군 눈에 띄지 않은 밀림지대로 이동하고 그 대신 독립군을 토벌하거나 추격하여 방해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독립군단들은 8월 하순부터 근거지를 이동하였다. 옌지현(延吉縣) 명월구에서 활동하던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먼저 근거지를 이동하여 9월 21일경에는 허룽현 이도구 어랑촌 부근에 도착하였다. 안무의 국민회군도 근거지를 이동하여 9월 말경에 이도구에 도착하였다. 봉오동에 근거지를 두었던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독립군은 북방으로 이동하여 9월 말경에 나자구 지방에 도착하였다. 다른 독립군 부대 등도 근거지를 이동하여 이도구 부근으로 속속 도착하였다. 왕칭현(汪淸縣) 서대파에 근거지로 했던 북로군정서는 마지막으로 사관연성소 졸업식을 마친 다음 9월 17~18일 근거지를 이동하여 10월 12~13일에 허룽현 삼도구에 도착하였다. 

일제는 직접 간도에 출병하여 독립군 토벌을 결정하였다. 주지하듯이 간도는 중국의 영토로 일본군은 간도에 출병할 구실이 없었다. 이에 마적단을 매수하여 10월 2일 훈춘(琿春)을 습격해서 일본영사관을 방화한 ‘훈춘사건’을 일으켰다. 이를 구실로 국제조약을 어기고 간도 출병을 단행하였다. 일본군이 동원한 총병력은 25,000여 명의 대규모 병력이었다. 

일본군은 작전 목표를 2단계로 설정하였다. 제1단계는 1개월 이내에 독립군 무장대를 철저히 색출하고 토벌을 되풀이하여 독립군 전원을 섬멸한다는 내용이었다. 제2단계는 제1단계가 끝난 후로부터 다시 1개월 이내에 촌락에 잠복한 독립군과 민간인 독립운동가를 철저히 색출하려는 의도였다. 청산리 독립전쟁은 이러한 목적으로 출동한 일본군 아즈마(東)지대가 독립군 부대를 포위·섬멸하려는 수색작전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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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경내에 있는 김좌진 어록비



적막한 가운데 총성이 울리다

한편 김좌진 부대는 계속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면서 전쟁을 자제하려 하였다. 그러나 추적을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일본군과 일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10월 21일 김좌진과 이범석의 지휘 아래 비전투원들과 전투요원들로 나누어 구성된 독립군 부대들은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바로 위쪽의 고갯마루와 계곡 양쪽에 매복하여 전투태세를 갖추어 공격 준비를 시작하였다. 청산리계곡은 동서로 약 25㎞에 달하는 긴 계곡으로, 계곡 근처는 사람들의 이동이 힘들 만큼 험악한 삼림지대였다.

오전 9시경 일본 측의 야스가와(安川)가 이끄는 부대가 계곡의 좁은 길을 따라 이범석 부대의 지점으로 들어섰다. 이 순간 독립군들은 일제사격을 가해 그들을 전멸시켰다. 다시 야마타(山田)가 지휘하는 본대가 그곳에 도착하면서 독립군과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지만, 유리한 지형을 이용한 우리 독립군의 승리였다. 

결국 일본군은 2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남기고 돌아서며 전투의 실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김좌진은 이범석에게 패주하는 적을 뒤쫓지 말고 부대원을 이끌고 갑산촌(甲山村)으로 철수하라 지시하였다. 이때 이도구 완루구(完樓溝)에서는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홍범도 부대는 중앙으로 진격한 일본군의 한 부대를 공격한 후 일본군의 다른 부대를 비롯해 중앙의 일본군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하였다.

전투는 오후 늦게 시작되어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졌고, 일본군 400여 명이 거의 전멸하였다. 22일 새벽 갑산촌에서 합류한 김좌진 부대와 그곳 주민들로부터 부근의 천수동(泉水洞)에 일본군 기병대가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그곳으로 이동하여 일본군 기병 중대를 파멸시켰다. 이때 김좌진은 일본군의 반격이 있으리라 예상하고 부대원을 어랑촌 부근의 고지로 이동시켜 공격해오는 일본군을 막아냈다. 부근에 있던 홍범도 부대도 김좌진 부대를 도와 일본군과 전투에 참가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에도 맹개골전투, 만기구전투, 쉬구전투, 천보산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하였다. 독립군은 연일 벌어진 혈전에도 사기가 충천하여 ‘일당백’ 정신으로 선전하였다. 청산리 독립전쟁의 마지막 전투는 고동하에서 10월 25일 한밤중부터 26일 새벽까지 홍범도의 독립군이 야습해 온 일본군을 도리어 반격해 큰 타격을 주었다. 밀림전에 숙달된 홍범도 부대는 미리 매복하였다가 대대적인 반격으로 습격해온 일본군 2개 소대를 거의 전멸시켰다. 독립군은 10월 26일 낮부터 안투현(安圖縣) 방면으로 철수작전을 전개하여 청산리 독립전쟁은 일단 멈추게 되었다.

1920년 10월 박영희·강화린·오상세·백종렬·김훈 등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북로군정서의 중견간부로서 청산리대첩에 참여하였다.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출신 200여 명으로 조직된 연성대는 대장 나중소(羅仲昭)와 부관 최준형(崔峻衡) 등의 일사불란한 지휘하에 혈전을 펼쳤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함께 일본 정규군 1,200여 명을 사살한 청산리대첩은 신흥무관학교와 사관연성소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장교들이 지휘하여 이룬 쾌거였다. 

한편 상하이 『독립신문』은 청산리 독립전쟁에서 일본군의 전사자에 대하여 ‘김좌진 부하 600명과 홍범도 부하 300명은 대소 전쟁 10여 회에 왜병을 격살한 자 1,200명’이라고 보도하였다. 북로군정서의 서일(徐一) 총재는 임시정부에 일본군 전사자를 약 1,250명으로 부상자를 약 200명으로 보고하였다. 중국의 『요동일일신문(遼東日日新聞)』은 일본군 전사자를 약 2,000명이라고 추산하였다. 반면 독립군 측의 피해는 전사자 약 130명과 부상자 약 220명이라고 보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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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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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로군정서 서일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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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항일 전적비



혈전(血戰)에 의한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일깨우다 

자랑스러운 청산리전투는 이제 100주년을 맞이한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10여 차례 이어진 치열한 이 전투는 대한독립군과 북로군정서 등으로 구성된 연합 부대에 의한 우리의 빛나는 숨결이 담긴 대승리였다. 이 전투는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독립전쟁이었다. 

일본군은 전투의 승리를 인정하기보다 강력한 보복을 단행하였다. 독립군에게 대패한 일본군은 잔인하고 끔찍한 방법을 동원하여 한인사회를 파괴하고 한인들을 무참하게 학살하였다. 이때 한족회 교육위원회 권기일과 삼광학교 교장 김동만이 순국하였다. 독립군과 한인사회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자 1920년 말 독립군 부대는 러시아 자유시로 옮겨갔다. 여기에서도 당시 국제 정세에 따른 러시아의 독립군 무장해제와 자유시에서의 독립군단들의 갈등으로 ‘자유시참변’이 일어나고 말았다.위기 상황에서도 독립군들은 다시 힘을 합쳐 독립운동 단체 통합에 힘을 모았다. 주목할 만한 일은 1922년 8월에 남만주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군단인 대한통의부가 결성된 사실이다. 여기에 김동삼이 총장을 맡아 항일투쟁을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독립군들은 험난하고 고단한 상황에서도 독립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혹독한 추위와 극심함 굶주림을 이겨내며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모든 일은 나라의 광복을 위해 이름 없이 숨진 수많은 독립군과 그들의 승리를 위해 숨어서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민초들의 피와 눈물이 있었다.

청산리대첩은 일본군의 간도 출병작전을 완전히 실패로 내몰아 저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한민족에게는 독립정신을 크게 고취하고 독립에 대한 희망과 확신을 심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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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항일대첩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