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만주지역에서
독립군 양성에 힘쓴
박영희

만주지역에서 <BR />독립군 양성에 힘쓴 <BR />박영희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만주지역에서
독립군 양성에 힘쓴

박영희


alt

박영희(朴寧熙)

1896. 12. 28. ~ 1930.

충청남도 부여

건국훈장 독립장(1977)



청산리전투 승리에 기여하다

박영희는 1896년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났다. 망명 후 만주에서 활동할 당시에는 박두희(朴斗熙)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고향에서 신명의숙을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휘문의숙을 다니던 그는 신명의숙 은사이자 훗날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역임한 이세영과 함께 1913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서간도 합니하(哈泥河)에 위치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지식을 습득하고 졸업 후에는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부임하였다.

1920년 무렵부터 독립군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는 가운데, 박영희는 북로군정서 사령관인 김좌진의 부관 겸 사관연성소 학도단장으로 활동하며 독립전쟁을 이끌 정예군 양성에 매진하였다. 박영희의 지도 아래 사관연성소에서 1920년 9월 약 300여 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고, 이들은 교성대(敎成隊)로 편입되어 청산리전투의 주력군으로 활약했다. 박영희도 부관으로서 청산리전투에 참전하여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데 기여하였다.


alt

박영희



alt

박영희가 학도단장으로 활동하였던 북로군정서(대한군정서) 사관연성소(1920)



독립군 양성에 힘쓰다

청산리전투 이후 박영희는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여 러시아로 이동했다가 자유시참변 이후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3년 무렵 북만주 소수분(小綏芬) 지역에 학술강습소를 열어 생도들을 모아 독립군을 양성하고, 상하이에서 발행한 잡지 『배달공론』에 「군사학강의」를 연재하며 군사지식 보급 활동을 이어나갔다. 

1924년 대한독립군단에서 활동하던 그는 1925년 북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한 신민부가 조직되자 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군사부 위원장인 김좌진을 보좌하였다. 또한 신민부 산하의 독립군 간부양성기관인 성동사관학교 교관으로서 신민부 군사조직에 필요한 핵심 인재를 양성하였다. 이외에도 친일인사 처단, 국내 진입작전을 위한 특수 부대 파견활동에도 앞장선 박영희는 1930년 군자금 모집을 위해 러시아에서 첩보활동을 펼치다 순국하였다. 정부는 독립군 양성과 무장투쟁에 헌신한 그의 공훈을 기리며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

박영희가 학술강습소를 열어 학술과 무술을 가르치고 있음을 전하는 

『신한민보』 기사(1923. 10. 4.)

alt

박영희가 비밀지령을 받고 국내로 입국하였다는 소식이 담긴 

『동아일보』 기사(1927. 2. 18.)




alt

『배달공론(倍達公論)』에 실린 「군사학강의」(1923. 9.)

_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

alt

박영희의 서명이 담긴 독립운동 선전문 「불온문서 우송의 건(不穩文書郵送ノ件)」(1925. 3. 4.) 






al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