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터전

윌로스
한인비행학교의
설립과 활동(2)

윌로스 <BR />한인비행학교의 <BR />설립과 활동(2)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윌로스 한인비행학교의 

설립과 활동(2)


Ⅳ. 3·1운동 이후 재미 한인 사회의 변화 ⑤


3·1절 경축식 참가와 노백린의 꿈

노백린이 윌로스에 한인비행학교를 설립하려 할 때 가장 큰 난관은 재정이나 인력의 부족이 아니라 주변 미국인 사회의 부정적인 편견과 반발이었다. 윌로스를 포함하여 14카운티보호협회 회장 밴 버나드(Van Bernard)는 한인들의 비행학교 설립을 일인들과 마찬가지로 장래 캘리포니아 백인사회를 위협할 화근으로 간주하고 강력히 비난하였다. 이에 노백린은 “군단의 설립 목적은 한인 청년들에게 장차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얻는 데 도움이 될 비행술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설명하고 난관을 극복하였다. 

한인비행학교는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3·1운동 제1주년 행사에 참가하여 처음으로 한인사회와 미국사회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1920년 3월 1일 3·1운동 발발 1주년을 경축하기 위해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새크라멘토에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추진하였다. 노백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의 자격으로, 그리고 비행학교 학생들은 제복과 무장을 갖추어 ‘사관학생대’의 이름으로 참여하였다. 당초 행사 날 아침에 레드우드 비행학교에 재학 중인 한인 비행사와 교관 브라이언트가 특별 순서로 축하비행을 하는 것으로 계획하였으나 당일 많은 비로 취소되어 아쉬움을 주었다. 이날 기념행사에는 400여 명의 남녀들이 모였다. 노백린은 오전 1부 순서인 시가행진 때 중앙총회에서 마련한 자동차에 탑승하지 않고 20명의 ‘사관학생대’와 함께 도보 행진을 하였다. 오후 2부 행사 때는 10명의 비행학교 생도들이 3·1운동 때 만세시위로 희생을 당한 고국의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만세 춤을 선보였다.

새크라멘토의 3·1절 제1주년 경축행사 때 ‘사관학생대’의 일원으로 참가한 최능익은 “나는 몇 날 전까지 교회 일을 보던 자이올시다. 동족의 속죄 구령에 힘을 다하는 일이나 총과 칼을 배우는 일이 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 줄로 생각하여 사관생도가 되었음”을 밝혔다. 그러면서 남의 도움을 바라지 않고 내 손으로 벌어서 생계와 훈련비를 충당해가며 독립을 위한 사업에 뛰어들었음을 밝혀 참석자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최능익의 언급대로 한인비행학교의 훈련 경비는 학생들 스스로가 부담해야 했다. 중앙총회는 비행학교에 재정을 지원하며 자체 사업으로 만들려 하였으나 예산 부족으로 계획으로만 그쳤다. 비행학교의 경비는 김종림 등 윌로스와 인근의 한인 실업가들의 지원으로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생도들은 일당 5달러 25센트를 받는 농장 노동으로 돈을 벌어 생계비와 훈련비를 충당하였고 노동하지 않는 날에는 노백린의 지도 속에 군사훈련을 받았다. 더구나 시급한 숙소도 마련되어 있지 않아서 준비가 될 때까지 노백린이나 학생들 모두 천막에서 지냈다. 

열악한 상태에서 노동과 군사훈련을 병행하였으나 노백린의 포부는 매우 컸다. 1920년 6월 22일 첫 비행기가, 이틀 후 두 번째 비행기가 도입되자, 레드우드 비행학교 교관 브라이언트를 교관으로 초빙해 전문적인 비행훈련을 맡겼다. 1920년 5월 19일 노백린은 상하이의 국무총리 이동휘에게 보낸 편지에서 향후 지략을 갖춘 비행사를 양성하는 것은 물론 10대의 비행기를 구입해 독립전쟁에 활용할 비행대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리고 중국 내 장차 한인비행학교를 설립할 꿈도 갖고 있었다.


대한인비행가양성소의 개소와 폐소

노백린의 주도 하에 지상의 군사훈련과 비행훈련을 착수해 토대를 갖춘 비행학교는 1920년 7월 5일 ‘대한인비행학양성소’란 이름으로 성대한 개소식을 거행하였다. 비행학교를 시작할 때 특정된 이름도 없이 ‘노백린군단’, ‘사관학생대’, ‘사관양성소’, ‘한인비행학교’ 등으로 불렀으나 이제야 비로소 ‘대한인비행가양성소’란 정식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200여 명이 참가한 개소식 때 교관 브라이언트와 오림하는 축하 비행을 하였다. 개소식을 마친 노백린은 군무총장의 직임을 다하기 위해 윌로스를 떠나 1921년 2월 2일 상하이로 갔다. 그의 후임으로 중앙총회 총무 곽림대가 임시 감독을 맡았다. 1920년 7월 25일 김종림은 송덕용·강영문·이재수·신광희 등과 비행가 양성사를 설립하여 총재가 되었고, 향후 2년 동안 비행가양성소의 유지와 발전을 돕는 데 앞장섰다. 레드우드 비행학교에서 비행술을 배운 후 교관으로 윌로스에 온 한장호는 7월 말경 교관과 학생 16명이 참가한 대한인비행가구락부(KAC)를 만들어 결속을 다졌다. 

그런데 학교 운영을 맡은 곽림대가 최윤호와 함께 켄터키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1920년 9월 윌로스를 떠난 데다 그 해 10월 발생한 대홍수가 한인들의 쌀농사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인력의 부족에 재정 압박까지 가중되자 비행가양성소를 운영하기 어려워져 교관과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 데다 비행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레드우드 비행학교에서 비행시험을 보던 박희성이 추락사를 겪고 중상을 입었다. 비행가양성사 총재로 비행학교의 실질적인 후원자였던 김종림은 1921년 4월 「청원서」를 북미지방총회장 최진하에게 보내 더 이상 비행가양성소를 운영할 수 없는 현실을 알리고 폐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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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로스 비행학교의 훈련 생도들



비행학교 설립의 영향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노백린이 비행학교를 시작할 때부터 큰 관심을 갖고 지지를 보냈다. 1920년 3월 2일 개회한 임시의정원에서 국무총리 이동휘는 「대한민국임시정부시정방침」 14개항을 제시할 때 “미국에 기량이 우수한 청년을 선발 파견하여 비행기 제조와 비행 전술을 학습함”과 동시에 ‘비행기 대 편성’을 당면의 방침임을 밝혔다. 비행기를 활용한 독립전쟁의 방략을 임정이 처음으로 제시한 것이었다. 또 그는 노백린의 비행대 설립 구상에 적극 찬동을 표하고 이르쿠츠크 지방에 비행기를 활용한 군사훈련 계획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선전용으로 활용하기 위해 비행기와 비행사를 확보하려 하였던 노동총판 안창호는 당초 계획이 사정상 중단되자 김공집, 박현환 등 20여 명의 한인 청년들에게 비행술을 비롯한 군사학을 공부하도록 중국 광동정부와 교섭에 나섰다. 그 무엇보다 임시정부는 1921년 7월 18일자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비행학교에서 훈련받고 비행사 자격증 딴 박희성과 이용근을 육군비행병 참위(소위)로 임관함으로써 그간 이루어낸 비행학교의 성과와 공로를 치하하였다. 

3·1운동의 영향으로 윌로스에 한인비행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한 경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정책 수립과 해방 후 공군 창설에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영향을 주었다. 첫째, 임정 군무(軍務)를 대표한 군무총장 노백린의 주도와 재미 한인들의 적극적인 협력과 성원 속에 순수 자력으로 비행학교를 설립·운영함으로써 임정은 향후 군사계획을 수립할 때 큰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둘째, 비행학교 설립과 운영의 경험은 해방될 때까지 임시정부가 공군 건설의 꿈을 깊이 간직하고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셋째, 해방 이전 독립운동가들이 꿈꾼 공군 건설의 열망은 해방 직후 대한민국 공군을 창설하는 역사적인 기원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