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터전: 미주편

1917년 박용만의

뉴욕 소약국민동맹회의 참가와 외교활동

1917년 박용만의 뉴욕 소약국민동맹회의 참가와 외교활동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1917년 박용만의

뉴욕 소약국민동맹회의 참가와 외교활동

1910년대 재미 한인의 군사·외교운동 3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7년 10월, 미주한인사회는 뉴욕에서 약소민족의 대의를 모아 대전 종결 이후를 대비할 목적으로 최초의 국제회의인 소약국민동맹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에 고무되어 박용만을 대표로 보냈다. 박용만은 명연설로 식민지 한국인의 참상과 일본의 불법적인 식민통치 실상을 알려 대회 참가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나아가 미주 한인들은 한국독립을 위한 국제정치 변화에 대한 안목을 점차 넓혀 나갔다.


  

alt

소약국민동맹회의를 개최한 뉴욕 맥알핀 호텔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이후 한반도는 긴 침묵과 함께 깊은 암흑에 빠졌다. 그런 가운데 1911년 신해혁명,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1917년 러시아혁명의 발발로 1910년대 국제사회는 격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 재빨리 대응한 쪽은 약소국 민족들이었다. 1917년 6월 뉴욕에서 소약국민동맹회(회장 F. C. Howe)를 결성한 것이다. 설립 목적은 전 세계 약소민족들을 위한 항구적인 의회를 설립해 장차 있을 국제회의 때 약소민족들의 발언권과 정당한 제 권리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위해 그해 10월 29일부터 31일까지 소약국민동맹회의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재미 한인사회는 뉴욕에 소약국민동맹회가 결성되었다는 소식을 『American Leader』의 사설 「Small Nations Leagued Together」(1917. 06. 28.)로 알게 되었다.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이대위는 7월 7일 해당 잡지사에 소약국민동맹회에 대해 문의했으나 잘 모른다고 회신해서 더 이상 진행하지 못했다.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에서 박용만을 대표로 선출


그러던 중에 하와이지방총회장 안현경이 1917년 10월 11일 자로 이대위에게 보낸 공문에서 귀 총회와 상의하지 못하고 박용만을 소약국민동맹회의 대표로 선정해 보내니 참조해 줄 것을 알렸다. 대회 소식을 기다려왔던 이대위는 이 공문을 받고 무척 난감했으나 이미 하와이에서 대표를 선정해 출발시켰다고 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한인소년병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의 설립, 『신한민보』·『신한국보』·『국민보』의 주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한 박용만(1881~1928)을 소약국민동맹회의 한인 대표로 천거한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평소 외교의 중요성을 알고 이를 중시했던 이승만이 직접 나서지 않고 항일무장투쟁론을 주장해 온 박용만을 대표로 내세운 것은 무엇때문인가. 그 이유에 대해 명확히 드러난 것은 없다. 1917년 당시 이승만은 대외 직책이 하와이지방총회의 서기 겸 재무이자 한인여학원 경영자였으나 실질적으로 하와이 한인사회를 지도하고 있었다. 이런 그가 박용만을 천거한 것은 1915년 내부 충돌로 소원했던 박용만 지지자들을 포용해 하와이 한인사회를 재결집시키려는 의도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떤 이유로 박용만을 천거했든 간에 이번 일로 하와이 내 이승만의 입지는 더욱 단단해졌다. 소약국민동맹회의 대표 파견을 위해 이승만이 추진한 의연금 모금활동에 전 하와이 한인들이 한마음으로 참여하였다. 그 결과 당초 계획한 500달러를 훨씬 초과해 2,000여 달러를 모금하였다. 이는 이승만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한 큰 호응이었다. 박용만을 외교대표로 뽑으면서 이승만이나 이승만 지지자들로 구성된 하와이지방총회나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기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박용만은 호놀룰루를 떠나 10월 24일 샌프란시스코, 10월 27일 뉴욕에 도착했다. 그는 이번 국제대회 참가를 위해 면밀하게 연설문을 작성하였고 하와이만의 대표가 아닌 해외 전체 200만 한인을 위한 대표자로 활동했다.



박용만의 명연설과 의의


박용만은 10월 29일 뉴욕 맥알핀 호텔에서 열린 개회식 첫날 다섯 번째로 등단해 연설했다. 그의 연설은 25개 참가국 대표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만큼 명연설이었다. 그는 연설에서 한국인의 모든 행복과 자유를 무자비하게 빼앗아간 일본 정복자들의 진실을 고발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인은 수렁에 빠진 민족의 구원을 스스로 해결해 나갈 것이고 일본이 자행한 불법적인 병합은 한국인에게 새로운 국가 건설의 기회를 준 것으로 설명했다.
“일본은 옛 군주주의 체제의 국가를 전복해 주었는데 이것은 어쩌면 한국인들이 준비되었을 때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새 정부를 만들기 위한 미래의 일들을 애석하게도 일본이 일부 대신해 주었을 뿐이라는 심정을 전합니다.”
박용만은 세계 자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데 일본은 매우 위험한 나라라고 주장했다. 한국인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독립이 필요한 만큼 세계 약소민족들에게 정당한 생존권을 주지 않는다면 전 세계에 항구적인 평화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102년 전에 행한 그의 연설은 참가한 약소국 민족 대표들을 감동시켰다. 『The Survey』는 1917년 11월 10일 자 「Through Liberty to World Peace」란 기사에서 박용만의 연설에 특별히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한국인을 비롯해 아일랜드인, 핀란드인, 인도인, 리투아니아인, 러시아계 폴란드인의 대표들이 참석하지 않았다면 이번 대회는 완전히 그 목적에서 실패했을 것이라며 한국인 박용만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였다.  
대회를 마친 박용만은 12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한 환영 행사 때 “우리가 이 동맹회에 참여함으로 갑자기 한국의 독립을 얻어올 것이 아니로되, 어느 날이든지 한국이 독립하려면 실력은 있다 치더라도 외교, 군사의 활동을 진행함이 필요하다”고 연설했다. 외교의 중요성을 역설한 그의 연설은 그동안 항일무장투쟁론에 주력했던 그간의 이력을 감안할 때 매우 진전된 의식 변화였다.
1910년대 들어 처음으로 국제회의에 참가한 경험은 이후 재미 한인들에게 국제정세 변화에 대한 안목을 키워주었고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신속히 대응하는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