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어느 독립운동가의 일그러진 초상

어느 독립운동가의 일그러진 초상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특임교수



어느 독립운동가의 일그러진 초상




1945년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았지만,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사건, 해결되지 못한 문제, 기억해야만 하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사를 과거에 머문 역사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다루며, 오늘도 신문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독립운동 및 일제강점 이슈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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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에서 일제의 밀정으로 등장하는 염석진

  


독립운동가 곁에는 밀정이 있었다


2015년 <암살>이란 영화가 개봉했다. 독립운동 관련 영화를 이렇게 흥미롭게 만들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꼈다. 일제강점기 친일파 암살단과 이들을 쫓는 작전이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을 놓지 않게 했고, 재미까지 더하여 1,200만 명이 관람했다. 특히 일제의 밀정 염석진이 반민족행위로 재판을 받을 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윗옷을 벗어 재끼고 뱉어낸 마지막 대사가 긴 여운을 남겼다.


“내 몸속에 일본 놈들의 총알이 여섯 개나 박혀 있습니다. 1911년 경성에서 데라우치 총독 암살 때 총 맞은 자리입니다. 구멍이 두 개지요? 여긴 22년 상해 황포탄에서, 27년 하바롭스크에서, 32년 이쯔고 폭파사건 때, 그리고 심장 옆은 33년 전에! 내가 동지 셋을 팔았다고 하셨는데, 그 친구들 제가 직접 뽑았습니다! 그 젊은 청춘들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은 모릅니다! 내가 어떤 심정으로 그들을 보냈는지! 그건 죽음을 불사하는 항전의 걸음이었습니다, 재판장님!”


반성은커녕 본인이 억울하다고 호소한 염석진에게 방청객들은 욕을 하고 고무신을 던졌다. 염석진이 죽는 순간까지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은 것이다. 한때는 독립군이었지만 죽음에 직면한 순간, 신념 따위를 저버리고 가장 초라한 자신의 초상과 맞닥뜨린 뒤 일제의 밀정이 되었다. 변절과 동시에 밀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는 계속 밀정 노릇을 해야만 했다.
사전적으로 밀정이란, ‘적국·가상적국·적대 집단 등에 들어가 몰래 또는 공인되지 않은 방법으로 정보를 수집하거나 전복 활동 등을 하는 자’로 정의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얼마나 많은 밀정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독립운동단체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밀정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수가 많았다. 그래서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하이 임시정부로 보내려고 했지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었다. 독립군이 일본군을 습격하기도 전에 계획이 탄로 나 실패하는 일도 부지기수였고,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일본 군경에 피체되어 옥고를 치르기 일쑤였다.



밀정은 어떻게 독립유공자가 되었나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 독립운동과 관련된 영화나 방송이 특히 많이 제작, 방영되고 있다. 그런데 한 방송사가 이와 대척점에 있는 밀정에 주목한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내보면서 사회에 적지 않은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일본과 중국 기밀문서를 분석하여 895명의 밀정 혐의자 실명을 공개한 것이다. 물론 이들 모두의 실체를 확인한 것은 아니며, 그렇게 하는 것 또한 거의 불가능하다. 당시 여러 개의 가명을 썼고, 대부분의 밀정은 첩보 활동을 전개하여 드러나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해방 이후에는 신분세탁을 했기 때문에 밀정이었는지 알 수 없었던 측면도 있다.
밀정 가운데에는 처음부터 일제에 고용돼 월급을 받는 이들도 있었지만,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의 회유에 변절한 사람들도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동지였던 우덕순, 김좌진 장군의 비서, 의열단장 김원봉의 부하, 봉오동전투의 주역인 홍범도의 수하 등이 대표적이고 심지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에서도 존재했다. 상하이에 독립운동가보다 밀정의 숫자가 더 많았다고도 한다. 물론 이들 가운데는 실제 밀정이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는 인물도 있다.
그런데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들 상당수가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서훈 심사가 부실하고 친일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1960년대에 포상을 받은 경우도 있지만, 1990년대에도 이러한 사례가 있다. 그렇다고 관련 부처나 심사를 담당했던 전문가들의 책임이라 묻기도 어렵다. 자료가 발굴되지 않아 독립유공자 선정 과정에서 결격 사유를 찾거나 밀정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 쉽지 않았던 이유가 분명하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일제와 싸우다 목숨을 잃은 독립운동가는 15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지만, 현재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것은 1만 5,000여 명에 불과하다. 그러다 보니 정부가 독립유공자 발굴에 소홀하지 않았느냐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중복 포상되거나 친일 경력자도 독립유공자에 포함되어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정부 입장에서는 언제, 어디서, 어떤 자료가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 마냥 심사를 미룰 수도 없다. 정부는 좀 더 많은 독립유공자를 발굴해야 하고 그만큼 검증도 철저해야 하는 이중 부담을 안고 있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새로운 자료들이 발굴되어 독립유공자의 결격 문제가 제기될 가능성은 언제든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때그때 사안에 따라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한다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격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 매뉴얼이 필요하다. 사전에 정부 차원에서 팀을 꾸려 독립유공자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있어야겠고, 친일 문제가 발견되면 적법한 절차에 따라 서훈을 박탈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준 마련이 시급하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원칙을 세워야 논란을 잠재울 수 있다. 자칫 행정소송에 휘말릴 수도 있지만, 문제점이 발견되었어도 판단을 미루거나 분명한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비판은 더욱더 커질 게 자명하다.
독립운동가들이 바라던 자주독립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만큼 이들의 공훈은 지금을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어야 하고 역사적으로 보다 분명해야 한다. 이는 전체 독립유공자의 명예, 신뢰와 직결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