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립운동가의 초상

독립을 위한 투쟁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독립을 위한 투쟁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글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교수


독립을 위한 투쟁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의열투쟁 하면 흔히 혈기 왕성한 청년의 활약을 떠올린다. 의열투쟁의 주인공이 대부분 청년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독립을 바라는 마음에 남녀노소가 따로 있을 수 없듯이, 독립을 위한 투쟁에도 남녀노소가 따로 있지 않았다. 강우규와 남자현, 그들은 환갑이 넘은 나이에 식민권력을 향해 의열투쟁을 감행한 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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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민노인동맹단 명부

  



독립투쟁에 나이는 필요 없다


한반도가 만세 소리로 가득했던 1919년 3월 26일,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독립운동 단체가 탄생했다. ‘살날이 많지 않기에 더욱 독립이 간절했던’ 노인들이 60세의 김치보를 단장으로 하는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이하 노인동맹단)을 만들었다. 노인동맹단은 46세 이상이라는 나이 제한을 두었을 뿐 회원 자격은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3·1운동의 열기가 서서히 식어갈 무렵 노인동맹단은 만세시위와 외교투쟁을 벌였다. 먼저 1919년 5월 경성에 들어와 만세시위를 감행했다. 노인동맹단은 독립운동가 이동휘의 아버지인 이승교를 비롯한 7명을 경성으로 파견했다. 그들은 일본에 보내는 문서 2통, 취지서 수백 매를 들고 경성에 들어와 5월 31일 오전 11시 종로 보신각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연설을 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이승교, 정치윤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추방당했고 안태순, 윤여옥, 차대유 등은 실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한편, 노인동맹단은 1919년 6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
강문백과 연병우를 보내 단장 김치보 외 20명이 연명한 독립요구서를 제출하는 등 외교투쟁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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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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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규 의거 『LA Times』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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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규 의거지(현재 서울역 광장)



청년에게 희망을 주고자


청년에게 희망을 주고자 노인동맹단은 만세시위와 외교투쟁과 함께 의열투쟁을 감행했다. 3·1운동으로 하세가와 총독이 물러나고 새로 총독이 부임한다는 소식에 그를 저격하기로 한 것이다. 64세의 강우규가 나서기로 했다. 
강우규는 1855년생이다. 평안남도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에서 태어났다. 20대 말에 함경남도 홍원으로 이주해 잡화상을 경영했다. 이때 비록 나이는 18살이나 어렸지만 그가 믿고 따랐던 이동휘의 영향으로 영명학교와 교회를 세우는 등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강우규는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하자 망명을 결심했다. 이듬해 봄, 북간도의 두도구로 이주한 후 만주와 연해주 등을 돌아다니다 1915년 연해주 하바롭스크에 정착했다. 1917년에는 다시 길림성 요하현으로 이주해 러시아와의 접경 지역에 신흥동이라는 마을을 개척했다. 신흥동은 100여 호가 넘는 한인마을로 자리 잡으면서 독립군의 주요 근거지 역할을 하게 된다. 강우규는 이곳에서 광동학교를 열어 교장으로 활동했다.
1919년 3월 4일 3·1운동 소식을 들은 강우규는 신흥동에서 400~500명을 모아 만세시위를 벌였다. 4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이승교 등 노인동맹단 간부들을 만났다. 강우규는 노인동맹단이 결성 직후 단원 모집을 위해 파견한 전단위원을 통해 노인동맹단에 가입한 것으로 보인다.  
1919년 6월 14일 강우규는 수류탄 1개를 품고 에치고마루라는 일본배를 타고 원산에 들어왔다. 강우규가 경성에 나타난 것은 8월 5일이었다. 그로부터 1주일 후인 8월 12일 사이토 마코토를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한다는 발표가 났다. 그가 부임하는 날짜, 즉 거사일은 9월 2일이었다. 강우규는 신문에 난 사이토의 사진을 오려 얼굴을 익혔다. 8월 26일에는 남대문역 부근 여인숙으로 거처를 옮기고 역 주변을 답사하며 본격적인 준비에 나섰다.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사이토 총독 일행이 탄 기차가 남대문역에 도착했다. 환영 행사를 마친 사이토가 마차를 타고 총독관저로 향하는 순간, 강우규는 총독의 가슴을 향해 힘껏 수류탄을 던졌다. 사이토는 비껴갔지만 폭탄의 위력에 3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는 현장에서 체포되지 않았으나 보름 후인 9월 17일 순사인 김태석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1920년 5월 27일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고 그해 11월 29일 서대문감옥에서 65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다. 생을 마감하던 순간 강우규는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자신의 몸을 던져 청년에게 독립의 의지를 심어주고자 했던 노인 강우규, 그야말로 진정한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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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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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현의 임종을 지키고 있는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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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 터(현재 화원소학교)




언젠가 독립은 반드시 온다!


61세의 나이로 폭탄테러를 감행했던 남자현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만일 너의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너의 자손에게 똑같은 유언을 하여 내가 남긴 돈을 독립 축하금으로 바치도록 하라. 


언젠가 반드시 독립이 될 것이니, 자신의 몸은 비록 세상에 없지만 남겨 놓은 돈으로라도 독립을 함께 축하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담긴 유언이다.
남자현은 1872년생으로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에서 유학자인 남정한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19살이 되던 해에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답곡리에 사는 김영주와 결혼했다. 하지만 남편은 을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김도현의진에 속해 싸우다 이듬해 전사했다. 이후 남자현은 유복자를 기르며 직접 길쌈과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했다. 남자현은 40대 중반의 나이인 1917년 친인척들이 망명해 있는 만주로 건너갈 준비에 들어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남자현은 경성에 있었다. 이때 기독교인으로서 남대문교회를 중심으로 한 만세시위 계획에 참여했다. 그리고 아들 내외와 만주로 망명을 떠났다.   
만주에서 남자현은 서로군정서와 통의부에 이어 정의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주로 독립운동가를 후원하고 교육계몽에 힘쓰며 의열투쟁을 펼쳤다. 1926년 정의부 주도로 만든 조선혁명자후원회에는 발기인과 중앙위원으로 참여했다. 1927년 안창호를 비롯한 300여 명의 독립운동가가 중국 경찰에 체포되어 이 중 47명이 길림감옥에 갇혔을 때는 옥바라지를 하며 구명운동을 펼쳤다. 길림여자교육회 부흥을 위한 총회를 준비하고 사회를 보는 등 여성 교육과 계몽 활동에도 참여했다. 54세가 되던 1927년 4월에는 국내에 잠입해 경성에서 사이토 총독을 저격할 계획을 세웠으나 시도에 그치고 말았다. 1931년 10월 만주 지역 독립운동계의 최고 지도자 김동삼이 체포되어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에 구금되었다. 남자현은 그의 친척으로 위장해 면회를 다니며 연락책 역할을 했다. 김동삼이 신의주로 호송될 때는 구출 작전을 준비했으나 갑자기 날짜가 바뀌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남자현은 환갑이 되던 해인 1932년에는 홀로 외교투쟁을 벌였다. 그해 9월 일본의 만주 침략을 조사하기 위해 리튼을 단장으로 한 국제연맹조사단이 파견되었다. 남자현은 왼손 무명지 두 마디를 잘라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는 다섯 글자의 혈서를 써서 리튼조사단에 전달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이듬해에는 다시 의열투쟁을 계획했다. 만주에 파견된 일본 전권대사인 무토 노부요시를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거사 예정일은 만주국 1주년 행사가 열리는 3월 1일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월 27일 무기를 전달받고 행사장이 있는 신경으로 떠나려다 하얼빈 교외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하얼빈 일본총영사관 감옥에 갇힌 남자현은 단식 투쟁을 벌였다. 이로 인해 사경을 헤매게 되면서 결국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며칠 만인 8월 22일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남자현은 죽기 전 중국 돈 200원을 독립이 되면 축하금으로 내놓으라고 유언했다. 이 돈은 해방이 되고 1946년 3월 1일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삼일절 기념식에서 김구와 이승만에게 전달되었다. 1933년 8월 22일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는 순간 ‘여걸’이자 ‘전율할 노파’로 불리던 남자현은 마지막으로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니라’는 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