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일본군과 맞서 싸운
한국광복군 총사령 지청천

일본군과 맞서 싸운<BR />한국광복군 총사령 지청천



글 전시부



일본군과 맞서 싸운

한국광복군 총사령 지청천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및 광복회와 공동으로 지청천을 2019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지청천은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투신,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한국광복군 총사령을 역임하는 등 우리 독립군의 선봉에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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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군사기술을 습득하고 항일무장투쟁의 길에 들어서다


지청천은 1888년 1월 25일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났다. 관명은 석규(錫奎)이고 아명은 수봉(壽鳳)이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전통 한문을 배우다가 신식 학문을 배우기 위해 배재학당에 입학했고, 황성기독교청년회에 참여하면서 민족의식을 길렀다. 일제의 침략에 맞서 군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1908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09년 9월 통감부의 압력으로 대한제국 군부가 폐지되고 학교도 문을 닫으면서 지청천은 일본 육군유년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 도중 1910년 8월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일본 육사 예비 과정에 있던 한인 유학생 사이에서는 학업을 지속하는 것을 둘러싼 동요가 일어났다. 지청천은 근대적 군사훈련을 습득한 뒤 일본군을 탈출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끝까지 학업을 이어 나갔다. 
일본 육군유년학교를 거쳐 1914년 5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중위로 재임하던 그는 1919년 국내에서 일어난 3·1운동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에 참여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국내로 돌아와 남만주로 망명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몸을 담았다. 이때 지청천은 일본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이름을 청천(靑天)으로 바꾸었으며, 성도 흔하지 않아 남의 눈에 띄기 쉬운 지씨(池氏)에서 어머니의 성을 따른 이씨(李氏)로 고쳤다.



총사령으로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에 서다


남만주로 망명한 지청천은 서간도 유하현에 있는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활약하였다. 신식 군사교육을 받은 교관이 부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입학 지원자들이 증가하였다. 그러나 1920년 일제가 만주 독립군을 탄압하면서 신흥무관학교가 폐쇄되자 지청천은 재학생을 주축으로 결성된 서로군정서 병력을 이끌고 러시아로 이동했다가 만주로 다시 돌아왔다. 정의부 군사위원장과 총사령 등을 겸하며 독립군을 이끌었고 1928년에는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 등 3부 통합운동에 노력하였다.
1930년에 한국독립군을 조직하고 총사령에 부임한 그는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중국항일의용군과 연대하여 일본 간도파견군과 만주 전역에서 전투를 펼쳤다. 그중 1933년 6월 중국항일의용군과 연합하여 일본군 ‘간도임시파견대’를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 대전자령 전투는 ‘군수물자 노획’이라는 측면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거둔 최대 성과였다.
중국 관내로 활동 근거지를 옮긴 지청천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군무장 등을 맡았다. 1940년 9월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창설된 한국광복군 총사령으로 취임하였다. 지청천은 사병모집과 훈련, 선전과 정보 수집을 이끌었고 연합군과 합작하여 인면전구공대 파견, 독수리 작전 등을 추진하였다. 그의 장남 달수와 차녀 복영도 한국광복군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1947년 4월 환국한 그는 1948년 5월 총선거에서 전국 최다득표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1948년 8월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초대 무임소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2대 국회의원, 국방위원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1957년 1월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평생을 무장투쟁과 독립전쟁에 헌신한 지청천의 공로를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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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청천(池靑天)

1888.01.25. ~ 1957.01.15.

서울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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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육군사관학교 한국인 유학생 단체 사진 

일본 육군유년학교를 거쳐 1912년 12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제26기생으로 입교하였다. 1914년 여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6개월간의 견습사관 생활을 마치고 같은 해 12월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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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자령 전투에 관한 조선군사령부 발표(『조선중앙일보』, 1933.07.09.)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제공) 

대전자령 전투에서 간도 임시파병대는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입었으나

조선군 사령부는 부상 병대 2명, 화물 자동차 1대 소실 등으로

피해를 축소해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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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후 한중 대표들의 기념사진  

1940년 9월 17일 충칭 자링빈관에서 열린 성립전례식에는 총사령부

직원을 비롯해 임시정부 요인들과 의정원 의원, 한국독립당 인사들,

그리고 중국 각 기관을 대표하는 인사와 충칭 외교사절 및 신문사

대표 등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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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청천 총사령과 왕계현, 김학규 

한국광복군 총사령 지청천과

총사령부 부관 왕계현(왼쪽),

제3지대장 김학규(오른쪽)의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