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로 읽는 역사

백 년 전 한국인의 국경 넘나들기

백 년 전 한국인의 국경 넘나들기



글 김경미 자료부 학예연구관



백 년 전 한국인의 국경 넘나들기

집조, 여권, 여행증서, 호조




여권은 한 나라의 정부가 발행하는 것으로, 외국에 가려는 사람에게 그가 자국의 국민임을 증명하며 외국 정부에 보호를 의뢰하는 문서이다. 외국을 여행하는 데 이러한 여행권 제도가 만들어진 것은, 각 국가 사이의 국경이 분명하게 그어지고 ‘국민’과 ‘외국인’을 구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의 신민이었던 한국인들은 국제사회에서 자신을 증명해 줄 국가를 잃었을 때 자신을 누구라고 말하며 국경을 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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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의 대한제국 집조(1902.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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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삼의 하와이 이민 대한제국 집조(1904.06.07.)



안창호의 대한제국 집조


안창호는 미국 유학을 위해 1902년 9월 4일, 갓 결혼한 이혜련과 인천항을 떠났다. 이때 그가 가진 여권은 대한제국의 외교업무를 담당하는 부서인 외부(外部)에서 1902년 8월 9일 제51호로 발급한 ‘집조(執照)’였다.자료01 집조는 원래 관청에서 발급하는 증명 서류를 통칭하는 일반 명사이지만, 한국에 여행권제도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 여행권 역시 여행자의 신분을 관청에서 확인해 주는 증명서의 한 종류로서 집조라는 명칭을 사용한 듯하다.
집조에는 “본국 평안도 평양에 사는 사인(士人) 안창호가 인천항을 통해 미국 워싱턴 등지로 가려 한다”며, 안창호가 대한제국의 신민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그가 미국으로 여행하는 데 편의를 보아달라는 요청이 담겨있다. 그런데 자료01에서 볼 수 있듯이 한문으로 쓰인 집조가 미국에서 어떻게 통할 수 있을까?
집조의 뒷면에는 서울에 있던 주한 미국 총영사관에서 1902년 8월 23일 자로 집조의 소지자인 대한제국 신민 안창호에게 발행해 준 비자가 영문 타이프로 찍혀있다. 같은 날 총영사관에서는 안창호의 집조를 영어로 번역하고, 제52호로 발급된 이혜련의 집조가 안창호와 동행하는 부인의 것이라는 사실을 첨부한 문서도 발급해 주었다. 안창호는 이러한 증명서를 갖고 일본에서 미국을 향해 태평양을 건넜다.
미국에 도착한 그의 집조에는 2개의 미국 이민국 인장이 찍혔다. 1902년 10월 7일 자로 밴쿠버의 미국 이민국에서 찍은 것과 1902년 10월 14일 자로 샌프란시스코항 미국 이민국에서 찍은 것이다. 이를 볼 때, 안창호는 홍콩-요코하마-밴쿠버 노선을 운행하던 캐나다퍼시픽기선회사의 증기선을 타고 캐나다 밴쿠버를 거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갔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밴쿠버에는 미국 이민국 직원이 주재하며 캐나다를 통해 미국으로 가는 여행자들의 입국 심사를 했다. 이곳에서 ‘대한제국의 신민 안창호’로서 입국허가를 받은 후 다시 샌프란시스코에서 최종 입국허가를 받았던 것이다. 이 안창호의 집조는 1918년 8월 27일 멕시코 방문 후 미국으로 재입국 허가를 받을 때 마지막으로 사용되었다.


김도삼의 하와이 이민 대한제국 집조


한국인들이 여권을 가지고 대규모로 해외로 나간 것은 1900년 초의 하와이 노동이민이었다.  1903년 1월 13일 첫 이민선 갤릭호로부터 1905년 8월 8일 마지막 배 몽골리아호까지 11개의 증기선을 타고 64회에 걸쳐 총 7,415명의 이민자가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 자료02는 그 이민자 중 한 사람인 김도삼의 집조이다. 1904년 6월 7일 대한제국 외부에서 발행한 이 집조에는 오른쪽에 한문, 왼쪽에 영문과 불문이 있다. 1903년 11월 대한제국 외부에서는 그동안 한문으로만 인쇄했던 집조를 바꾸어 영어와 불어 번역본도 함께 인쇄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집조에는 평안도 삼화군에 사는 김도삼이 인천항을 통해 미국 하와이 등지로 가고자 하며 김도삼은 37세이고 처 1명과 아들 2명을 동반한다는 내용이 한문본에만 적혀있다. 그래도 “The Imperial Korean(대한제국)”이라는 영문을 통해서, 하와이의 이민국 담당자는 집조 소지자가 한국인(Korean)이라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미국 이민국의 입항 명단에는 한국인 김도삼(37세)과 김도삼 아들 1(5세), 김도삼 아들 2(1세), 김도삼 부인(29세)이 1904년 7월 11일 아메리카마루를 타고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집조에는 미국 이민국의 입국 확인 도장이 아무것도 찍혀있지 않지만, 그들은 무사히 하와이의 땅을 밟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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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의 사진신부 일본제국해외여권

(1917.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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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극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여행증서

(1920.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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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의 중화민국 호조(1929.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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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의 사진신부 일본제국해외여권


김도삼은 부인과 자식을 동반한 가족이민이었으나, 대다수의 하와이 이민자는 독신 남자였다. 당시의 입항 명단에서 확인된 6,739명 중 총각은 2,143명, 홀아비가 1,554명, 결혼을 했으나 혼자 온 사람이 2,214명, 그리고 부인, 자녀와 같이 온 세대주가 363명이었다. 1908년 미국과 일본 간의 협정으로 이민자의 가족만 미국 정착이 허가되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한국인들도 가족을 데려오거나 사진을 보고 결혼을 하는 ‘사진신부’를 맞이하여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1910년부터 1924년 사이에 약 800명의 사진신부가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
1917년 경상남도 창원군에 사는 강형준의 차녀로 18세 1개월 된 강희근도 사진신부로 하와이로 가는 배를 탔다. 강희근이 갖고 있던 여권자료03은 그를 부인으로 초청한 이명섭이 하와이 호놀룰루 일본 영사관에서 신청한 것으로 일본제국 외무대신의 명의로 발급되었다.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 후인 1906년부터 이미 여권 발행권을 갖지 못했고, 국권을 상실한 후 한국 내의 여권 발급업무는 일본 외무성을 대리하여 조선총독부가 담당했다. 강희근은 그가 살고 있던 경상남도의 경무부에서 여권을 받았다.
1917년 2월 7일에 발급된 여권은 ‘이민전용여권’으로 ‘이민(移民)’이라 쓰인 도장이 찍혀있으며 “결혼을 위해 미국령 하와이로 간다”고 적혀있다. 소지자의 인적사항은 주소와 가족관계, 연령 뿐 아니라 신장이 5척 2촌 2부이며 얼굴이 둥글고 눈이 작고 입이 작으며 눈썹이 엷고 머리카락이 짙다는 등 특히 얼굴의 특징이 자세하게 기록됐다. 소지자 본인의 이름은 자필로 쓰게 되어 있는데, 여권에는 한자로 쓴 이름 아래에 도장이 찍혀있다. 1910년 10월의 「외국여권규칙」에 의하면 직접 서명할 수 없는 사람은 대서하게 하고 본인이 인감도장을 찍도록 규정했다. 여권의 다른 면에는 영문과 불문이 인쇄되어 있으며, 영문 인쇄 면에 일문으로 기록된 내용이 모두 영어로 옮겨져 있다.
미국 입국 조건을 갖춘 이 여권의 하단에는 1917년 4월 2일 자 호놀룰루 입국 허가 인장이 찍혀있다. 강희근은 비록 ‘일본제국 신민’으로 하와이에 입국하여 결혼생활을 시작했지만, 그로부터 2년 후인 1919년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독립운동금’으로 10달러의 의연금을 내며 고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김정극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여행증서


1919년 3·1운동 후 중국 상하이에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해외에 있는 한인들을 대표하는 정부로서 여행권을 발급했다. 자료04는 1920년 4월 22일 대한민국 외무총장 대리 차장 정인과의 이름으로 발행된 여행증서 제14호로, 김정극이 미국 유학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나이 25세, 주소 평안북도 용천군, 직업 학업 등의 내용과 함께 김정극의 사진이 붙어있다. 1915년 독일에서부터 시작된 여권 사진은 소지자의 외모를 기술하는 대신 사진으로 증명할 수 있도록 했다. 증서에는 영어와 불어, 러시아어 번역 면이 있지만, 영어 번역 면에 정인과의 영문 사인과 발행 날짜만 적혀 있을 뿐 김정극에 대한 정보는 빈칸으로 남아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각 나라에서 여행권제도가 강화되면서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이 여행증서가 국제적으로 인정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김정극은 5월에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가게 되는데, 1920년에 학생들이 임시정부의 주선으로 중국에서 운영하던 유법검학회의 일원으로 중국 여권인 호조(護照)를 발급받아 상하이에서 프랑스로 갔던 경로를 따랐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정극은 대서양을 건너 뉴욕에 상륙하여 1931년 4월 말까지 10여 년간 미국에 체류하며 독립운동 활동을 했다.



안창호의 중화민국 호조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중국에서 활동하던 안창호는 1923년 7월 중화민국 국적을 취득하고, 호조를 발급받아 1924년 말 미국으로 갔다. 1926년 5월 중국 상하이로 돌아온 안창호는 1929년 2월 1일 자로 상하이에 있는 중화민국 외교부 장쑤(江蘇) 지점에서 다시 호조를 발급받았다.자료05 필리핀을 방문하여 독립운동 기지 개척을 위한 이상촌을 물색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로서 미국은 식민지에서도 여행권제도를 실시하고 있었다.
이 중화민국 호조는 총 24면으로 표지에 국명이 표시된 책자형 여권이다. 1920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여권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여권의 형식을 통일하기로 한 뒤, 각국의 여권은 낱장형에서 오늘날과 같은 책자형으로 바뀌었다. 1면에는 중화민국 외교부에서 안창호의 중국식 이름인 ‘晏彰昊(안창호)’에게 필리핀 여행을 위해 호조를 발급한다고 쓰여 있고, 2면에는 안창호의 사진과 함께 그의 인적사항이 “나이 51세, 직업 교원, 출생지 장쑤, 국적 중화민국, 신장 5척 8촌”으로 기록되었다. 5면의 영어 번역 면에는 1면과 2면의 내용이 기입되어 있다.
안창호는 ‘중화민국 국민’의 신분으로 1929년 2월 9일 상하이에서 미국 배를 타고 필리핀의 마닐라 항에 도착하여 3월 30일까지 50여 일간 필리핀 각지를 시찰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1932년 상하이에서 윤봉길 의거가 일어났을 때 갑자기 체포된 안창호는 더 이상 중화민국 국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국내로 압송되었다.
100년 전 한국인들이 사용했던 집조, 여권, 여행증서, 호조 등의 여행권에는 대한제국의 신민이었던 그들이 나라를 잃고 일본제국 신민, 중화민국 국민으로 자신의 신분을 바꾸며 국경을 넘어야 했던 모습이 담겨있다. 또한 그 속에는 그들이 언제나 한국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한국인으로서의 자신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도 담겨있다.





※ 자료는 안수산(Susan Ahn Cuddy), 김성구(Ethan S. Kiehm), 강희근, 김신 님이 기증해 주셨습니다.

독립기념관의 연구와 전시, 교육을 위해 소중한 자료를 기증해 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참고


김도형 「도산 안창호의 ‘여행권’을 통해 본 독립운동 행적」,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2, 2015.

김도형 「한국 근대 여행권(여권) 제도의 성립과 추이」, 『한국근현대사연구』 77, 2016.

이덕희 『하와이 이민 100년 그들은 어떻게 살았나?』, 중앙M&B,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