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살피다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글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학교를 가니 선생님이 군복을 입고 학생들을 가르친다. 독립군은 경성 시내를 몰래 오가며 활동을 벌이고 한편에서는 여성들이 위안부로 끌려간다.”

한 드라마에서 묘사된 일제강점기 모습이다. 시대상황에 대한 고증이 부족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사실이 아니라곤 할 수 없지만 시대가 중첩되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우리나라를 집어삼키고자 그 방법을 다양하게 바꾸어왔다. 육체를 억압하는가 하면, 온갖 회유와 세뇌로 정신을 지배하려 했으며, 우리 민족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들고자 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던가. 우리는 일본이 대한민국을 어떻게 집어삼키려 해왔는지 보다 자세한 이해를 통해 앞으로의 미래에 같은 역사를 반복되지 않도록 명심해야 한다.




           

alt

(왼쪽부터) 『황성신문』 창간호 /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일본 헌병대


1910년대

1910년부터 1919년 3·1운동 전까지 일명 ‘무단통치시대’에는 육군 장군이 총독으로 파견되고, 총독 밑에 경무총감과 정무총감이 있는 형식이었다. 총독으로 지낸 이들 대부분은 육군 출신으로 본국에서 막강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한 인물들이었다.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육군 장성 출신으로 이미 1901년 가쓰라 다로 내각에서 육군상을 지냈고, 1916년에는 본국 수상이 되어 시베리아 출병을 주도했다. 3·1운동 이후 문화통치를 주도했던 사이토 마코토 총독은 해군 제독 출신으로, 일본에서 외무대신·문부대신·총리대신을 역임했다. 1930년대 후반 민족말살통치를 자행했던 미나미 지로 총독 역시 와카쓰키 내각에서 육군대신을 역임, 관동군 사령관·만주국 전권대사·관동 장관 등을 지냈다.

1910년대는 이런 육군 군벌들의 스타일이 그대로 조선 식민통치에 적용된 시기다. 당시 ‘헌병경찰제’로 일반 경찰이 아닌 군인 경찰이 식민지를 운영했는데, 이들은 단순 치안뿐 아니라 세금 관리부터 민사소송, 심지어 마을 미풍양속까지 관여했다. 무엇보다 심각했던 것은 이들에게 ‘즉결처분권’과 ‘태형’이라는 권한이 주어졌다는 점이다. 영장 없이 체포하여 최대 4개월간 구금할 수 있는 권리를 준 것인데, 이로 인해 경찰에 의한 인권 유린의 전통이 시작됐다.

태형의 경우 하루 80대까지 때릴 수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1911년에는 1만여 명, 3·1운동 직전에는 4만여 명이 태형을 당했다. 가로수를 꺾으면 5대, 웃통을 벗고 일하면 10대, 집 앞 청소를 안 하면 10대, 무허가로 개를 잡으면 40대, 학교림을 벌목할 경우 50대, 덜 익은 감을 판매할 경우 80대 등 강력한 군인 경찰 통치가 자행되었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보장되지 않았다. 『황성신문』, 『제국신문』 등 민족 신문들이 모두 폐간되었고 『대한매일신보』는 『매일신보』라는 이름으로 일제의 기관지가 되어 버렸다.






alt

(왼쪽부터) 친일파 이광수 / 민족적 경륜(『동아일보』, 1924년 1월)


1920년대

3·1운동의 영향으로 일제는 통치 방식의 전환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다방면에서 이전과는 다른 행정조치가 내려졌다. 문관 총독도 임명이 가능하게 법을 손질하고, 헌병경찰제에서 보통경찰제로 전환하였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발행을 허가하여 일정 부분 언론의 자유를 보장했다. 또한 지방 행정기관인 도·부·군·면에 협의회를 설치하고, 투표를 통해 인사를 선발하는 등 부분적인 지방자치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기만적이었다. 문관 총독은 단 한 명도 임명된 사례가 없고 계속해서 육군 출신의 총독들이 부임했으며, 보통경찰제로 전환했지만 오히려 경찰의 숫자나 장비, 유지비가 증가하는 등 경찰을 통한 통치는 지속되었다. 신문은 발행을 허가하였으나 검열을 강화했다. 기사를 삭제하거나 정간 조치를 취하는 등 지속적인 언론탄압을 이어가다가 그마저도 결국 1940년대에 다시 폐간시켰다.

한편 문화통치시대에 일제가 가장 중점을 둔 사업은 ‘친일파 양산’이었다. 자치나 참정권 행사의 기회를 주는 등 우리 국민을 회유하여 원활한 식민통치를 꾀한 것이다. 이에 대표적으로 호응한 이 중 한 명이 이광수다. 상하이에서 『독립신문』의 주필을 맡고 있던 그는 일제에 포섭된 연인 허영숙과 재회하게 되면서 결국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등지고 귀국하였다. 이후 『동아일보』를 통해 조선 내에서 허(許)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글 ‘민족적 경륜’을 발표했다. 이로써 일제 식민통치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타협을 통해 자치권을 얻자는 자치론이 탄생했다.



alt

 (왼쪽부터) 친일파 최린 / 신간회 창립 1주년 기념사진(1928년 2월 15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자 천도교 대표 인물인 최린 역시 비슷한 시기 일제에 회유되어 이광수와 같은 길을 걸었다. 참정권운동은 당시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민족주의 진영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이광수와 수양동우회를 비롯하여 상당한 역량을 보였던 소장파 민족주의자들이 자치론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안재홍 등 비타협적 민족주의 노선은 새롭게 등장한 사회주의 독립노선과 연대하여 신간회를 창립하는 등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해 나갔다. 그리고 자치론을 주장했던 이들은 1930년대로 들어서면서 사실상 모조리 친일파로 전락했다.






alt

(왼쪽부터) 일본어 강제 교육 / 신사 참배하는 한국인 학생들


1930~1940년대

1931년에는 만주사변이 일어났다. 관동군이 내각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군사작전을 감행하여 만주를 장악,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만주국 황제로 세우며 어용 정권이 세워졌다. 이후 1937년 중일전쟁 발발, 1941년에는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당시 파견된 미나미 지로 총독은 부임기간 동안 파격적인 정책 전환을 추구했다. 바로 황국신민화정책과 병참기지화정책의 추진이었다.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과 조선은 하나다!’ ‘일선동조(日鮮同祖)! 일본과 조선은 같은 조상을 두었다!’ 이러한 구호 아래 우리 민족은 천왕이 추진하는 대륙 침략에 참여해야 했다. 민족 차별은 기본이고, 교육제도부터 임금체계까지 모두 차별할 때는 언제고 하루아침에 ‘하나’가 되었다니!

일제는 이후 신화적·역사적 왜곡을 자행하였는데, 한 예로 일본 신화의 주인공인 아미테라스 오미카미의 못난 남동생이 단군이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황국 신민으로서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해야 했으며, 신사 참배와 궁성 요배도 강요하였다. 또한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과 함께 조선어와 조선사 교육이 금지되었다.

동시에 전쟁이 본격화된 만큼 적극적인 공업화 정책을 펼쳐 나간다. 주로 한반도 북부 지방에 중공업 시설을 적극 유치하는 방식이었는데, 이는 군수 물자를 생산하기 위한 조치였다. 전쟁이 가속화될수록 수탈의 정도는 극심해졌다. 식량을 배급받아 끼니를 해결했고, 미곡은 제값을 받지 못하고 공출되었다. 일제는 무기 제작 등에 필요한 쇠붙이를 얻기 위해 쇠붙이 공출도 강행하였다. 부엌칼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몰수한다는 계획 하에 쇠로 된 살림살이라면 무조건 빼앗아갔다. 이러한 무지막지한 공출 대상에는 인력도 포함되었다. 징병·징용·위안부까지 끔찍한 인권 유린이 벌어졌다.





alt

(왼쪽부터) 독립기념관 기공식(1983년 8월 15일)독립기념관 전경



광복 이후

1945년 우리나라는 마침내 독립하였으나, 일본은 광복 이후에도 우리 역사를 날조하거나 은폐하고 자신들의 침략 사실을 미화·축소하는 등 역사왜곡을 그치지 않았다. 이러한 행태는 각종 교과서에 버젓이 적용되었다. 일본은 초·중·고교 역사 교과서에 우리나라의 고대사부터 근대사·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역사 전반을 왜곡 기술하였으며, 특히 가장 심하게 왜곡한 부분은 현대사였다. 예를 들어 한국 ‘침략’을 ‘진출’로, 신사 참배 ‘강요’를 ‘장려’ 등으로 왜곡 기술하는 식이었다. 또한 독립운동 탄압을 ‘치안유지 도모’로, 조선어 말살정책을 ‘조선어와 일본어를 공용어로 사용’ 등으로 호도하는 식이었다. 일본의 역사왜곡은 비단 우리나라에 국한되지 않고 과거 일본의 침탈로 큰 해를 입었던 아시아의 여러 나라도 포함되었다.

이에 1982년 7월 일본이 왜곡된 역사를 교과서에 싣는 것을 대대적으로 규탄·성토하는 ‘일본역사교과서왜곡사건’이 일어나면서 전국적으로 반일운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일본 정부는 역사왜곡 사실을 시정하겠다고 약속하면서 격랑을 가라앉히고자 했으나, 우리 국민들에게는 이 사건이 역사의식을 고취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1982년 8월 28일 독립기념관 건립 발기대회를 열었던 것. 독립기념관 건립은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지켜온 한민족의 역사를 유념하고자 광복 이후 계속 제의된 사안이었으나, 국내외 정세의 혼란으로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었다.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았지만 일본의 역사왜곡이 불씨가 되어 광복 37년 만에 비로소 본격 추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국민의 정성어린 성금을 모아 마련한 자금으로 공사에 착수, 마침내 1987년 8월 15일 독립기념관이 개관하였다. 독립기념관은 이후 우리의 국난극복사와 국가발전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보존함으로써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오늘날 전시·학술·교육·문화 등 다양한 사업을 통해 국민의 올바른 국가관 정립을 충실이 이행해왔다.

한국 독립운동은 한국인만의 독립운동사만이 아니라 세계인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싸운 반제국주의 투쟁의 역사였다. 일제강점기를 비롯하여 광복 이후에도 우리 역사와 민족정신은 끝없이 위협 받아왔다. 올해로 독립기념관이 개관 30년을 맞은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금 우리 역사를 결코 잊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시 세워야 할 것이다.




심용환

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역사교육학을 전공했다. 현재 팟캐스트 <진짜 역사 가짜 역사>를 통해 재미있고 올바른 역사 이야기를 전파하고 있으며, CBS와 공동으로 <심용환의 근현대사 똑바로 보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단박에 한국사』, 『역사 전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