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춘천의병장으로
을미의병의 주역이 되다

춘천의병장으로 <BR />을미의병의 주역이 되다

글 학예실

 

춘천의병장으로 을미의병의 주역이 되다

이소응(李昭應, 1852. 8. 7 ~ 1930. 3. 25)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광복회와 공동으로 이소응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춘천의병장으로 백성들을 이끌었던 그는 을미의병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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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응


춘천의병을 이끈 항일의 선봉장

이소응은 1852년 강원도 춘천시 남면 강촌에서 태어났다. 7세 때 처음으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22세 때 유중교(柳重敎) 문하에 들어가 화서학파의 일원이 되었다. 이후 이소응은 유중교와 유중교의 재종질인 유인석을 스승으로 모시며 평생토록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1896년 1월 20일 이소응은 춘천의병의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각 읍에 격문 ‘효고팔도열읍(曉告八道列邑)’을 보내 이를 통해 국모를 시해하고 단발을 강요하는 것을 꾸짖고, 나라의 원수들을 처단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킨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1월 28일 개화정책에 앞장선 춘천관찰사 조인승을 잡아 처단하였다. 정부는 관찰사 처단 소식을 듣고 1개 중대를 급파하였다. 춘천의병은 2월 3일 가평에서 관군과 맞서 싸웠으나 패퇴하여 춘천으로 퇴각하였다. 이소응은 지평군수를 찾아가 원병을 요청하였지만, 오히려 구금되고 말았다. 다행히 유인석 휘하에서 활동하던 정익 등에 의해 구출된 후 제천으로 내려가 유인석이 이끌던 제천의병에 합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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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춘천의병의 본영이 있었던 관찰사 건물 터(현재 강원도청) / ‘효고팔도열읍(曉告八道列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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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의병의 정신적 지주 유인석


서간도 망명과 순국

1898년 유인석을 따라 서간도로 건너간 이소응은 퉁화현 오도구로 망명하였다. 그해 여름 함께 망명했던 동지들과 항일의지를 다지는 의체(義諦)를 약정하였고, 10월에는 퉁화현 팔왕동(현 집안현 패왕조)으로 이주하였다.

1900년 말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자, 그는 유인석과 함께 귀국하였다. 귀국 후 원주로 돌아와 지내다가 제천의 모정?남동막 등을 거쳐 1905년 공전리에 정착하였다. 이곳에서 화서학파의 존화양이(尊華攘夷) 정신을 담은 자양영당(紫陽影堂) 건립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경술국치로 인해 더 이상 국내에 머물 수 없게 되자, 1911년 다시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망명 후 회인현 대황구에 머무르다가 1915년 관전현 문화사 만구로 이주하였다. 1927년에는 근대화의 물결을 피해 강평현 제7구 민가둔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에서 존화양이의 의리를 지키며 살다가 1930년 79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소응의 유해는 1934년 제천으로 반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활동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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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자양영당(紫陽影堂) / 이소응 묘소(제천시 봉양읍 공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