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숨은 역사

볼거리, 배울거리
다채로운 겨울을 만나다

볼거리, 배울거리<BR />다채로운 겨울을 만나다

글·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

 

볼거리, 배울거리

다채로운 겨울을 만나다

전라북도 고창

 

정유년(丁酉年) 새해가 밝았다.

새 마음으로 힘차게 시작하는 정초, 몸과 마음에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기 위해 서해바다를 낀 전라북도 고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불어오는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 대지에는 온통 흰 눈이 쌓였다.

마치 동화 속 한 장면 같은,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색다른 풍경을 두루 감상하며 마침내 다다른 곳은 ‘고창읍성(모양성, 사적 제145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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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내린 고창읍성 둘러보기

눈 내린 고창읍성은 고즈넉했다. 발자국을 남기며 가만가만 둘러보기 시작했다. 조선 초기에 축조된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원형을 가장 잘 간직한 성으로 꼽힌다. 성 둘레에 튼튼하게 쌓아올린 석재는 대부분 자연석이다. 동·서·북에 3개의 문을 두고 적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성벽의 일부를 네모지게 또는 반달꼴로 쌓은 것이 특징이다. 성문 앞에는 옹성(甕城)을 둘러쌓아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주민들이 유사시에 성안으로 들어와 함께 싸우며 살 수 있도록 4개의 우물과 2개의 연못을 만들어 놓았다. 축성 당시 동헌과 객사 등 22동의 관아 건물이 있었으나,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고 일부만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14동의 성곽 건물들은 1976년부터 복원·정비한 것들이다.

높이가 6미터에 달하는 성둑에 올라서면 고창읍내와 넓은 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고창읍성은 성곽 밖, 성벽 위, 성안 솔숲길 등을 선택하며 답사를 돌 수 있다. 특히 이곳에는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성밟기놀이가 있는데, ‘머리에 돌을 이고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에 간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온다. 인적 드문 숲길을 거닐면 호젓하고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가 하면, 성곽을 따라 걸으면 시원스럽게 펼쳐진 읍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고창읍성: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모양성로1 / 063-560-2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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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 함성과 판소리 울려 퍼지던 곳

고창읍성은 곳곳에 생각지 못한 역사를 품고 있다. 1919년 3월 21일 김승옥·오동균·김창규 등의 주도하에 고창청년회원, 고창보통학교 학생 2백여 명이 이곳 읍성 북치광장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3·1독립 만세 터’를 알리는 비석 앞에 서서 그날의 역사적 순간을 상상해 보았다. 하늘과 땅을 울리던 함성이 저 너머에서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듯해 눈을 떠보니, 바람소리만이 귓전을 스치고 있을 뿐이었다.

다른 한편에는 이 고장이 낳은 판소리의 대가 신재효의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신재효는 이곳에서 춘향가·심청가·박타령·가루지기타령·토끼타령·적벽가 등 여섯 마당의 가사를 정리하고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오늘날 고택 옆에는 한국의 판소리를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는 판소리박물관이 신재효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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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들의 지혜가 엿보이는 옛 무덤

고창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인돌의 고장이기도 하다. 고인돌은 수 천 년 전의 공동묘지다. 몇 개의 받침돌 위에 한 개의 넓고 커다란 덮개돌을 얹어 놓은 선사시대의 무덤양식이다. 2천여 개에 달하는 고인돌은 고창을 세계 도시로 각인시켰다.

고인돌박물관에서는 선사시대의 생활상과 고인돌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다. 박물관에서 가까운 아산면 상갑리와 고창읍 매산리에는 고창군 일대에 흩어져 있는 고인돌 가운데 500여 기의 고인돌이 밀집해 있다. 고창 고인돌은 크기와 형태에 따라 북방식(탁자식)·남방식(바둑판식)·주형지석·위석식·지상석곽식 등으로 나뉜다. 특히 지상석곽식은 고창에서만 볼 수 있는 고인돌로 여러 장의 판석으로 무덤방을 만들었다. 많고 많은 고인돌 가운데 고창읍 도산리의 한 마을 뒤편에 서 있는 북방식 고인돌 한 기와 동양에서 가장 크다는 운곡 지석묘 한 기가 눈길을 끈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도산리 고인돌은 넓은 판석 2개를 세로로 세우고 그 위에 상석을 얹은 형태이다. 수천 년 역사를 침묵으로 보여주고 있다. 고인돌박물관에서 4km 거리에 있는 운곡 지석묘는 높이 5m, 둘레 16m, 무게는 무려 300여 톤에 달한다. 어떻게 만들어 옮겨왔는지 현대과학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다.


고창고인돌박물관: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고인돌공원길 74 / 063-560-8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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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이 배출한 인물

고창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미당(未堂) 서정주 시인이 있다. 서정주가 나고 자란 고향마을(질마재) 폐교 터엔 미당시문학관이 들어서 있다. 이곳엔 그가 남기고 간 시와 유품, 생전의 모습 등이 전시돼 있다. 서정주는 산문시 『질마재 신화』에서 이곳 선운리를 자세하게 써 놓았다. 총 45편으로 구성된 대표작이다. 이 시집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린 한국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거니와 시구 곳곳에서 보이는 방언과 구어는 서정주 자신의 내밀한 경험과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다.

서정주 생가에서 3km 남짓 떨어진 고창군 봉암리에는 대한민국 2대 부통령을 지냈으며 동아일보사와 고려대학교를 설립한 인촌(仁村) 김성수 생가가 있다.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대지 안에 낮은 담을 두르고 큰 집과 작은 집이 나란히 배치돼 있다. 집에 딸린 안채·사랑채·곳간·행랑채 등 여러 채의 건물은 규모가 어떤지를 보여준다. 친일 행위로 논란이 되기도 했던 김성수는 일제강점기 시절 민족개량주의를 주장했는데 오늘날 매우 의미심장한 말로 들린다.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려면 조선인이 스스로 자각, 깨우쳐서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 기술을 배워서 익히고, 식품과 생산품을 자체 조달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력을 키워야 한다.”

이밖에도 항일독립운동가 근촌(芹村) 백관수와 조선 영·정조 때의 실학자 이재(?齋) 황윤석도 고창이 배출한 걸출한 인물이다. 성내면 조동리와 덕산리에 있는 두 사람의 고택은 아직도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뜻있는 분들의 발걸음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황윤석은 문학·경제·종교·천문·지리·풍수·의학·언어 등에 능통했던 학자로서, 『이재난고』·『자지록』·『산뢰잡고』 등 3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미당시문학관: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질마재로 2-8 / 063-560-8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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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으로 보고 느끼다

‘호남의 내금강’으로 불리는 선운산과 그 아래 포근히 안긴 선운사는 고창의 명소다. 변산과 곰소만을 사이에 두고 치솟은 선운산은 천왕봉·여래봉·인경봉 등 크고 작은 봉우리가 띠를 두르듯 이어져 있고 산자락 깊숙이 진흥굴과 도솔암 등 명소들이 박혀 있어 언제 찾아도 그윽한 맛을 풍긴다. 선운산은 도솔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불가의 도솔천에서 나온 말로, ‘미륵보살이 머문다’는 뜻이다. 선운(禪雲)이란 이름도 고찰 선운사에서 따온 것이다.

이번에는 내륙을 벗어나 바다로 가본다. 상하면 자룡리에 펼쳐진 구시포 해변. 물이 밀려 내려간 모래밭은 마치 사막 같다. 북쪽 방파제 뒤로 나 있는 너른 모래밭은 명사십리로 불린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득하다. 바람이라도 불면 모래가 파도처럼 몰아친다.

구시포에서 명사십리 옆길을 따라 해리면 쪽으로 향했다. 궁산저수지가 보이는 삼거리에서 동호해변으로 우회전해 계속 가면 오른쪽에 해리염전이 보인다. 바둑판처럼 나누어진 염전의 허름한 소금창고들은 시간의 흐름마저 되돌린 듯 쓸쓸한 풍경이다. 여기서 해안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갯벌마을(서전마을)이 나온다. 물이 빠지면 1,200ha의 갯벌이 펼쳐지는 곳이다. 여느 갯벌과는 조금 다른데, 펄이 단단해 한번 발이 빠지면 좀처럼 잘 빠지지 않는다. 드넓은 이 갯벌에서는 연간 4,000여 톤의 바지락을 거둔어, 전국 최대 수확량을 자랑한다.


선운사: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선운사로 250 / 063-561-1422


겨울의 고창은 볼거리, 배울거리가 다채롭다. 발걸음이 머무는 곳마다 나긋나긋 이야기를 들려주는 곳, 내려앉은 눈이 다 녹아버리기 전에 올 겨울은 전북 고창을 방문해보는 건 어떨까.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 겸 수필가. 현재 『월간 비타민』, 『건설경제신문』, 『서울우유』, 『냉동공조신문』에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다. 여행 저서로는 『여름 이야기』, 『7가지 테마가 있는 여행』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