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혹은 거짓

조선의 마지막 황녀,
그녀의 진짜 모습

조선의 마지막 황녀,<BR />그녀의 진짜 모습

글 편집실

 

조선의 마지막 황녀, 그녀의 진짜 모습

영화 <덕혜옹주>

 

최근 영화·드라마·소설 등 다양한 대중문화 영역에서 역사 콘텐츠가 활발하게 제작되고 있다.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역사인식을 환기하고, 역사는 지루하고 어렵다는 선입견을 바꾸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물에 대한 관심이 커져감과 동시에 ‘역사왜곡’ 문제도 잇따르고 있다. 작품 속 표현들을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로 여길 수 있다는 것.

‘진실 혹은 거짓’에서는 대중매체에서 다뤄지는 독립운동의 모습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허구인지 짚어봄으로써

올바른 역사인식을 돕고자 한다. 그 첫 번째 선정작은 영화 <덕혜옹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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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영화 덕혜옹주 속 덕혜옹주와 고종 / 실제 덕혜옹주의 모습


Q. ‘덕혜’라는 인물 설정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덕혜는 고종이 늦은 나이에 얻은 고명딸이자, 조선의 마지막 옹주다. <덕혜옹주>에서처럼 어린 덕혜는 고종의 예쁨을 받으며 자랐다. 강제 퇴위 후 실의에 잠긴 고종에게 덕혜는 큰 위안이 되어 주었다. 고종이 승하한 뒤 덕혜옹주는 1925년 3월 24일 일제의 압박에 홀로 도쿄 유학을 떠나게 된다.

14세 나이에 낯선 이국땅에 발 디딘 그녀는 이후 어머니마저 여의고, 쓰시마 백작 소 다케유키와 혼인하여 딸 정혜를 낳았다. 결혼할 무렵에는 조현병(정신분열증)이 점차 심해졌다. 마침내 광복한 고국에 돌아온 것은 1962년. 51세 나이에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채였다. 일찍이 부모를 잃고 타국에서 홀로 지내온 세월, 그리고 정신병까지 그 삶에는 숱한 곡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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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인들을 위해 학교를 세운 옹주?

영화 속 덕혜옹주는 일본에서 지내는 동안 늘 조국을 그리워한다. 조선 어린이들을 위해 한글학교를 세우고, 보육원에서 직접 노래를 만드는 등 백성들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덕혜옹주가 세웠다는 한글학교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직접 작곡했다는 동요는 실제로 ‘쥐’라는 제목으로 당시 유행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옹주가 쓴 시에 일본 작곡가들이 곡을 붙인 이 동요는 우리말이 아닌 일본어로 불렸으며, 정치적인 목적으로 보급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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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황실, 항일운동 위해 망명을 시도하다?

<덕혜옹주>의 역사왜곡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특히 조선황실의 망명 시도가 가장 심하다고 꼬집는다. 영화에서 덕혜옹주와 영친왕은 김장한과 독립운동가들의 도움으로 망명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만다. 실제로는 어땠을까? 1927년 영친왕 내외가 세계 유람에 나섰을 때 독립운동가들은 이들이 상하이에 들른다는 소식을 입수, 영친왕을 납치해 독립운동에 합류시킬 계획을 세운다. 영화 속 장면은 이러한 역사적 기록을 변형해 만든 것이다.

실제로도 영친왕 납치 계획은 밀정의 밀고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영화에서 보여진 것과는 달리 영친왕은 망명 의지는 고사하고 일제의 비호를 받으며 유럽 각국을 관광하며 호사스러운 여행을 이어갔다. 민중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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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영화 덕혜옹주 속 조선황실 / 실제 조선황실의 모습


Q. 황족에 대한 존경심 vs 배신감

황족들이 독립운동에 가담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영화 속 덕혜옹주는 조선인들에게 존경 받는 인물로 그려졌지만, 실제로는 망국에 책임이 있는 조선황실이 일본에서 호의호식하는 것에 대한 반감이 높았다. 특히 영친왕은 일제에 순응해 안온한 삶을 영위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헤이그의 한 호텔에 묵고 있을 때, 독립운동 진영으로부터 한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 ‘전하를 일제에서 탈환해 상하이나 노령으로 모시고 갈 계획도 세웠으나, 전하의 마음이 약하셔서 일본 군인을 앞세우고 다니며 구라파 여행만 즐기고 계시니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까!’ 그러나 영친왕은 일제가 패망한 뒤에도 당장의 생활에 급급할 뿐이었다. 광복이 오자, 일본 내각에 “아무쪼록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대우해줄 수는 없느냐”고 애걸했다는 증언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