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 독립운동가 이신애
둘, 의친왕 탈출 사건

하나, 독립운동가 이신애<BR />둘, 의친왕 탈출 사건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

글 김형목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

 

이신애, 독립운동으로 여성에게 자긍심을 일깨우다

 

3·1운동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5월 말경에 이르러 거의 침체에 직면했다. 독립운동가들은 이러한 상황을 예상하고 이미 여러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새로운 분위기를 조성하여 지속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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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애




경찰관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 소리가 고창되다

한성정부를 비롯한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 등 독립운동을 총괄하는 임시정부가 수립·통합되었다. 천장절에 즈음하여 10월 31일에는 연통단·중앙청년단·독립청년단·애국청년단 등과 연합한 청년들이 식민지배를 비판하는 전단을 동대문 밖에 살포했다. 서울 장안에는 다시 한 번 긴장감이 흘렀다.

이어 11월 28일 오후에는 안국동에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이 올랐다. 바로 식민지배 최전선인 경찰관주재소 앞에서였다. 만세 함성과 아울러 지나가는 행인에게 선언서가 배포되었다. 당시 주인공은 이신애와 그의 동지인 박정선·정규식·박원식 등이었다. 일경들은 이들은 물론 이에 호응하는 행인들마저 모두 체포하였다. 소식은 입소문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독립만세운동은 스스로를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배후 세력을 파악하기 위한 혹독한 고문과 심문이 시작되었다. “왜 독립만세를 불렀느냐?” 주동자로 지목된 이신애에게 협박과 회유가 오가며 취조가 이어졌다. 그럼에도 그녀는 전혀 주눅이 들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다. 조금도 주저함 없이 독립운동에 대한 평소 입장을 밝혔다. 마치 심문자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한 자세로. “우리들은 독립만세를 부른다고 해서 (당장) 독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만세를 부르면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여 하나 된 시위운동을 통해 독립을 이루리라 생각하였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독립만세를 제창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닌가. 무슨 이유와 설명이 필요한가? 당당한 태도에 오히려 취조하는 경찰이 당황할 정도였다.

 

이신애, 그녀는 누구인가

이신애는 1891년 1월 20일 평북 구성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일찍이 기독교를 수용한 집안 분위기로 근대교육의 수혜를 받았다. 개성과 원산 여성교육의 요람지인 호수돈여학교과 성경여학교에서 수학하고, 이후 교사와 전도로 활동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혼신을 다했다. 헌신적인 활동에 감격한 많은 학생과 교인들이 그녀를 따랐다. 이신애는 항일운동 투신을 결심한 후 여학교를 사직, 서울로 올라왔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함께 적극 참여하였다. 이는 독립운동에 본격 투신하는 시발점이었다. 5월경에는 여성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을 위한 독립운동자금 모집에도 열성적이었다. 동지들과 교류 및 소통은 점차 대담한 활동으로 이어졌다. 강우규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처단하기 위해 서울에 왔을 때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비록 이 의거는 실패하였으나 청소년들에게 항일의식을 북돋는 기폭제가 되었다. 식민당국자들이 우왕좌왕하던 10월 초순에는 항일비밀단체인 민족대동단에 입단하는 한편 식민지배의 실상을 폭로하는 선전활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민족대동단은 의친왕 이강을 상하이 망명시켜 망명정부를 수립하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무사히 압록강을 건너 안둥(현 단둥)에 도착하는 듯 했으나, 끝내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 많은 단원들이 체포되면서 민족대동단은 위기에 직면했다. 이신애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동지들과 제2의 만세운동인 안국동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결국 체포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미결수로 옥고를 치르던 중 이듬해, 3·1운동이 첫돌을 맞이했다. 이에 이신애는 유관순 등과 함께 옥중투쟁을 주도하였다. 모진 고문이 이어지는 등 무자비한 보복이 가해졌으나 결코 중단하지 않았다. 병보석 직후 유관순이 순국한 사실은 당시 얼마나 잔인한 고문이 자행되었는지 짐작케 한다. 이후로 옥중투쟁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주요 투쟁방략 중 하나로 자리매김 하였다. 이신애는 징역 4년을 언도받고 복역하다가 출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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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대동단사건 공판 광경 / 대동단 제2차 독립선언서



민족대동단 여성대표로 활약하다

‘세계 개조의 민족자결은 천하에 드높고, 우리나라의 독립국과 자유의 소리는 나라 안에 울려 퍼진다. 3월 1일에 독립을 선언하고 4월 10일에 정부를 수립했으나 간악한 저 일본이 시세의 추이를 살피지 못한다. 오로지 표범과 이리의 야만성으로 무자비한 억압을 일삼았다. …(중략) 만일 일본이 끝내 뉘우침이 없으면 우리 민족은 부득이 3월 1일의 공약에 의하여 최후 1인까지 혈전을 불사한다.’

민족대동단이 일제에 혈전을 불사한다는 선언이다. 이신애는 의친왕 이강과 총재인 김가진 등과 더불어 여성대표로서 역사 무대에 우뚝 섰다. 또한 여성뿐만 아니라 남자들도 민족대동단 단원으로 포섭하는 등 한민족 대동단결에 전력을 기울였다. 온갖 고초에도 전혀 흔들림 없이 오직 조국독립만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고 실천했다. 그녀의 인생역정이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둘]

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

 

일제를 놀라게 한 의친왕 탈출 사건

 

의친왕 이강(1877-1955)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로, 어머니는 귀인 장씨다. 순종의 배다른 동생이자 영친왕의 배다른 형인 그는 영친왕의 어머니 귀비 엄씨의 견제로 1894년(고종 31년) 일본으로 갔다가, 1896년까지 영국·프랑·독일·러시아·이탈리아·미국 등을 전전했다. 그러던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고, 미국 유학 중이던 이강은 1900년 ‘의친왕’에 책봉,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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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왕 이강



일제의 감시 속 탈출을 꾀하다

1905년 의친왕은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일제의 감시 속에서 지냈다. 일제가 의친왕을 항일 의지가 높아 순종이나 영친왕보다 위험한 인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술로 세월을 보내며 감시를 따돌렸다.

대한제국이 멸망하면서 의친왕의 작위는 ‘이강 공(公)’으로 강등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의친왕을 국내에서 탈출시켜 상하이로 망명시키기로 계획하였다. 이 일이 성공한다면 한일합방의 부당성을 해외에 알리고, 군자금을 모으는 데 도움이 되어 독립운동이 더욱 활발해지는 계기가 될 것이었다. 1919년 9월 임시정부는 공작원 이종욱을 비밀리에 서울로 보냈고, 그는 독립운동의 비밀조직인 대동단의 전협 단장을 만나 의친왕의 탈출 계획을 알렸다.

임무를 전달받은 전협은 대동단원 이재호가 의친왕과 가깝게 지내는 정운복과 친하다는 것을 알고 그를 통해 의친왕에게 접근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11월 9일 밤 11시, 공평동의 비밀 가옥에서 의친왕을 마주하였다. “우리는 전하를 상하이로 탈출시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하려고 합니다.” 전협의 말에 의친왕은 망설임 없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좋소. 임시정부로 가겠소.” 의친왕은 일제의 눈을 피하고자 턱에 수염을 붙이고 허름한 옷을 입어 변장했다. 인력거에 의친왕을 태운 전협은 새벽녘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에 있는 다른 비밀 가옥으로 향했다.

대동단에서 의친왕의 탈출을 돕는 사람은 정남용과 이을규였다. 수색역에서 만주 안둥역까지 기차로 이동한 뒤 정남용은 서울로 돌아가고, 이을규가 의친왕을 상하이까지 모시기로 했다. 구기리의 비밀 가옥에서 의친왕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우리 집안은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주인 노릇을 했소. 2천만 백성들이 조선 독립을 위해 애쓰고 있는데, 주인이 모른 척할 수야 없지 않소? 일제는 고종 폐하를 독살했소. 따라서 그 원수를 갚지 않으면 안 되오. 나는 주인집의 한 사람으로서 조선 독립을 위해 보통 사람보다 열 배, 스무 배 더 노력할 것이오.” 이에 정남용이 말했다.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전하께서 강화 회의나 국제연맹에서 조선의 독립운동에 대해 증언하신다면, 일제의 무단정치가 잘못되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날 것입니다.”

의친왕은 망명을 떠나기 전 ‘조국 동포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인 『유고문(諭告文)』을 남겼다.

‘통곡하면서 우리 2천만 민중에게 고하노라. 이번 중국행은 하늘과 땅끝까지 이르는 깊은 원수를 갚으려 함이다.

…민중은 한뜻으로 나와 함께 궐기하자.’

일제의 고종 독살을 폭로하고 2천만 조국 동포에게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의친왕이 망명에 성공하면 이 유고문을 상하이와 서울에서 의친왕의 이름으로 동시에 뿌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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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단장 전협



일제에 충격을 안긴 사건으로 기억되다

11월 10일 오전 11시 의친왕 일행은 열차를 타고 수색역을 출발, 평양역으로 가 만주 안둥역행 열차로 바꿔 탔다. 그즈음 서울은 발칵 뒤집혀져 있었다. 일제는 의친왕이 사라진 것을 알고, 국내는 물론 일본?만주?시베리아?상하이까지 긴급 수배령을 내렸다.

의친왕 일행이 안둥역에 도착한 것은 11월 11일 오전 11시쯤. 접선 장소는 임시정부 교통국 역할을 하던 무역회사인 이륭양행(怡隆洋行)이었다. 안둥역에서 도보로 30분 거리에 있어 이곳에 닿으면 망명은 거의 성공적이었다. 이륭양행 소속의 배를 타고 상하이로 가기로 했던 것. 하지만 운이 따르지 않았다. 일경이 쫙 깔린 안둥역을 빠져 나오는데, 안둥역장이 의친왕의 얼굴을 알아본 것이다. “이강 전하 아니십니까. 안둥까지는 어쩐 일이십니까?” 변장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알아보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 아닙니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의친왕은 극구 부인했지만 그곳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뒤따라온 일경들은 의친왕과 정남용을 체포했다. 이을규는 간신히 역을 빠져 나갔지만 끝내 그도 붙잡히고 말았다.

의친왕 탈출 사건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일제를 놀라게 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조선총독부 경무부장 지바는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통치비화』에서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전하께서 만에 하나라도 상하이까지 탈출하시게 되었다면, 불온 조선인들은 기필코 전하를 받들어 독립운동에 더욱 기세를 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조선 통치상 커다란 동요를 가져왔을 것이며, 세계 여론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위기일발 직전에 이를 막을 수 있어서 무엇보다도 국가를 위해 다행스런 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신현배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