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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사용법

혐오 사용법

글 장근영 심리학자


혐오 사용법


혐오는 기쁨·슬픔·분노·두려움·놀라움과 함께 인간의 6대 기본감정에 속한다. 지난해 동안 SNS를 뜨겁게 달군 감정이 있다면 바로 ‘혐오’가 아닐까.

싫어한다는 말을 ‘극혐’이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싫어하는 유형 혹은 단체의 사람을 벌레라고 가리켜 ‘~충’이라고 일컫는 게 일종의 유행처럼 퍼졌다.

‘여혐(여성혐오)’ 논란이 일었고, 그에 맞서 ‘남혐(남성혐오)’도 떠올랐다.

끊임없이 새로운 혐오의 대상을 찾아 격렬하게 미워해온 2016년. 새해에는 이런 ‘혐오’의 감정을 좀 더 건강하게 사용하면 어떨까.



가장 빠르게 학습하는 생존본능

혐오가 우리의 본능적 감정이라는 건, 이 감정이 인류의 생존에 필요불가결한 역할을 해왔음을 의미한다. 누구나 한번쯤 어떤 음식을 먹고 체하거나 배탈이 난 경험이 있으리라. 한번 크게 탈이 나고 나면, 다음엔 그때 먹었던 음식을 생각하기만 해도 역겨워진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미각혐오 학습’이라 부른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동물이 이렇듯 단 한 번 만에 무언가를 학습하는 경우는 혐오라는 감정을 느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혐오가 빨리 학습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기억하지 않으면 내 몸을 아프게 만드는 음식을 다시 먹게 되고, 결국 또 다시 목숨에 위협(?)을 느끼게 될 것이 아닌가. 이렇듯 혐오란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대상에게 느끼는 가장 기본적인 정서다. 먹고 탈이 났던 음식이나, 나를 다치게 했던 물건이나 상황, 혹은 심리적으로 상처를 주는 사람에게 우리는 혐오를 느끼고 그것을 기피하게 된다. 이러한 감정을 느끼거나 배우지 못한 선조들이 멸종하는 동안, 혐오를 습득한 선조들은 살아남아 자손인 우리에게 생존의 비결을 남겼다. 



‘나’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방법

앞서 말했듯 혐오는 생존에 필수적인 감정이자, 본능이다. 그러나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로 진화하면서 혐오는 그보다 더 많은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인류는 이제 단순한 생존을 넘어 자신이 누구인지 그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보통 ‘누구냐’는 질문에 ‘어디에 속한다’로 대답한다. 어디에 속하는지를 말하기 위해서는 ‘어디에는 속하지 않는지’ 인식해야 한다. 필자를 ‘40대 후반의 한국인 남자 심리학자’ 라고 정의한다면, 이 정체성 속에는 내가 45세 이전이 아닌 45세 이후 연령에 속하며 여자가 아닌 남자이고 다른 나라 사람이 아닌 한국 사람이자 사회학 또는 철학이 아닌 심리학을 업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만약 어디에 ‘속하지 않는지’가 분명치 않으면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도 흐릿해진다. 대한민국 땅에서 같은 한국인들끼리 발붙이고 있을 땐 내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잘 느끼지 못하지만, 미국에 있으면 이를 뚜렷하게 인식하게 되는 점도 이와 마찬가지다.

즉,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는 아닌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둘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할수록 ‘나’라는 존재는 더욱 명확해진다. 여기서 차이를 분명히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혐오다. 나와 다른 집단을 차별·배척·적대시하는 것. 인간에게 있어 혐오는 나와 남을 구분하고,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위협을 느낄 때 더욱 커지는 혐오감

사회적 지위를 보장하는 방법으로도 혐오가 이용된다. 신분이 뚜렷이 구분되던 봉건사회에서는 당시 귀족이 평민이나 노비에 대해 혐오감을 거리낌 없이 드러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처벌 대상이었다. 누군가를 대놓고 혐오할 수 있다는 건, 나와 상대가 다르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내가 상대보다 더 힘이 세거나 지위가 높음을 의미했던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자존감이 낮고 자기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은 사람들일수록 혐오가 가장 매력적인 자기표현 수단이 되었다. 심리학자 무자퍼 셔리프(M. Sherif)의 실험을 살펴보자. 그는 미국 오클라호마에서 사는 청교도 집안의 12살짜리 백인 남자 아이 22명을 선정해, 이들을 독수리 부족과 방울뱀 부족으로 갈라놓았다. 그러자 고향·나이·인종·종교까지 같은 아이들이 단지 다른 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서로 혐오하며 다투기 시작했다. 여기서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두 집단이 갈등을 그치고 협력을 논할 때 나타났다. 화해를 극렬히 반대하는 아이들은 모두 자기 집단에서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는 아이들이었다. 셔리프는 그 아이들의 심리를 이렇게 추론했다. ‘자신이 비록 소속 집단에서는 가장 낮은 지위이지만, 적어도 상대 집단보다는 우월하다’는 인식이 있다는 것. 그런데 화해를 하면 마지막 자존감마저 위협받게 되니 반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혐오를 올바로 사용하는 첫 번째 단계는 혐오의 원인을 파악하는 일이다. 혐오하는 대상이 있다면 내가 왜 혐오감을 느끼는지 생각해보자. 실질적으로 내게 어떠한 해를 끼치고 있나? 만약 아무런 해도 미치지 않는다면, 그 대상을 혐오하는 건 그저 감정을 소모하는 일일 뿐이다. 우리가 혐오감을 드러내기에 적절한 상황은 내 삶이 흔들리는, 내 존재가 위협 받는 경우여야 한다. 혹여 그동안 엉뚱한 대상을 혐오해온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이제는 그 감정의 화살을 진정 혐오해야 할 대상으로 돌리는 것이 어떨까.




장근영

심리학자 겸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책연구소인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서 활동하며 대학에선 매체심리학·발달심리학 등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 오디세이』, 『팝콘심리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