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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

독립운동의 주체가 된
여학생들

 

글 독립기념관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

 

독립기념관은 2018년부터 독립운동가를 발굴하여 국가보훈부에 유공자로 포상 추천하고 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분을 존중하고 기억하는 정부의 의지와 국민적 관심을 담은 것이다. 

2023년 매월 독립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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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운대에 울려 퍼진 여학생들의 독립만세 소리

1920년 3월 1일 새벽, 인왕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필운대에서 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숙사 생활을 하던 강원도 양양 출신의 김경화, 서울 출신의 이수희가 중심이 된 배화여학교 학생들의 3·1운동 기념 만세시위였다. 동틀 무렵 두 사람은 빨래를 널러 가는 척하고 학교 뒷산 필운대로 올라갔다. 배화여학교 건물 뒤에 있는 필운대는 조선시대 문신 백사 이항복의 집터 부근 바위로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두 사람이 올라가자, 사전에 계획된 것처럼 다른 학생들도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언덕에는 40여 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모여 들었다. 학생들은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며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여학생들의 독립만세 소리는 고요한 새벽 정적을 깨고 멀리 퍼져 나갔다.


3·1운동의 기억, 기념하기

배화여학교는 1898년 미국 남감리회 선교부 조세핀 캠벨(Josephine Eaton Peel Campbell) 선교사가 설립한 미션계 사립학교(그리스도교 계통의 선교를 목적으로 설립된 학교)이다. 1910년부터 배화학당 혹은 배화여학교로 불리다가 1926년에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로 승격되었다. 현재 종로구 필운동에 위치한 배화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이다. 계몽운동가 남궁억이 1910년부터 8년간 교사로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 고취에 힘을 기울인 학교이기도 하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 3·1운동 당시 배화여학교 학생들도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학생대표를 중심으로 선언문을 등사하여 준비하고, 전교생을 동원시킬 연락망도 조직했다. 나라를 찾기까지 끊임없이 만세를 부르겠다는 굳은 각오였다. 학교 당국에 알려져서 실제 운동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으나 배화여학생들의 항일정신은 다음 해 기념일 투쟁으로 이어졌다.

일제시기 독립운동가들은 ‘기념일 투쟁’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고 재현하여 역사적 전통을 만들어갔다. 그 최초의 사건이 3·1운동이다. 3·1운동에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당했지만, 그 정신은 기억과 기념으로 재현되어 역사화 되었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1920년 3월 1일 독립선언 1주기 기념식을 거행하여 희생자를 기리고 독립운동의 투지를 다졌다. 국내 활동가들뿐만 아니라 일본과 미주 등 독립운동 단체가 있는 곳은 어디서나 3·1운동을 기념했다. 3·1운동에서 주축이 되었던 학생들도 독립운동의 불씨를 살리려는 의지로 기념식을 거행했다. 


혹독한 취조, 멀리 미국까지 알려지다

배화여학교 학생들의 만세소리가 이어지자, 관할 종로경찰서에서 즉각 출동했다. 경찰은 시위 학생 전원을 학교 기도실에 가둬 놓고 한 명씩 불러내 심문을 시작했다. 신문기사는 당시 상황에 대해 ‘경찰은 선동 주모자를 극력 탐색 중이고 엄중히 취조를 계속하고 있다’라고 썼다. 주모자 색출을 위해 학생들을 어떻게 다루었을지 짐작이 가는 표현이다. 그러나 협박과 위협 속에서도 학생들은 단 한 명도 경찰의 심문에 굴복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조사에 응하지 않자 결국 경찰은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고, 특히 ‘반항적인’ 학생을 중심으로 총 24명을 연행했다.학생들은 오랜 시간 혹독한 취조를 받은 후 검사국으로 넘겨졌다. 

사람들은 어린 여학생들이 포승줄에 묶여 서대문감옥으로 이송되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았고, 어떤 사람들은 만세를 불러 호응해주기도 했다. 24명의 학생 전원이 구속 기소되었는데, 당시 이렇게 많은 여학생이 무더기로 구속된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배화여학교 학생들의 재판 소식은 장안에 화제가 되어 『매일신보』 등 여러 언론에서 대서특필되었고 멀리 미주지역 신문인 『신한민보』에도 관련 기사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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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20.3.8)

징역형을 선고받은 어린 여학생들

배화여학교 학생 24명의 판결은 4월 5일 이루어졌다. 이들의 판결문에는 “만세를 고창하여 3·1독립운동에 찬성한다는 의사를 표현하려고 시위운동을 벌였다”라고 쓰여 있다. 3·1운동 정신을 다시 환기하고 이어가겠다는 의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구속 기소된 학생은 서울 출신 4명을 포함하여 강원, 황해, 경기 등 각지에서 올라와 학업에 정진하던 학생들이었다. 운동을 주도했던 김경화가 만 18세로 가장 나이가 많고, 대부분은 15~16세였으며 만 14세인 학생도 3명이 있었다. 

지금의 중학생 정도인 어린 여학생들이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엄혹한 경찰 심문과 힘겨운 감옥생활을 겪게 된 것이다. 학생 24명은 징역 6개월 내지 1년을 선고받고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경찰은 주모 학생을 퇴학 처분하고 엄중히 처벌할 것을 학교 측에 요구했으며, 당시 교장이었던 스미스(Bertha A.Smith)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여성의식의 성장, 확산된 항일정신

다른 사회운동 분야도 그렇지만 여성들의 정치의식은 3·1운동 전과 후로 나뉠 만큼 3·1운동을 계기로 크게 성장했다. 3·1운동에 농민, 노동자, 지방 유생, 종교인 등 모든 계층이 참여했지만,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학생층이었다. 도쿄 재일한국유학생의 2·8독립선언은 3·1운동의 기폭제였다. 또한 학생들은 3·1운동의 계획 단계부터 참여하여 만세운동을 촉발시키고 대중화하는데 선도적 역할을 했다. 

근대교육을 받고 성장한 여학생들 역시 만세운동 과정에서 대단히 용감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3·1운동의 상징으로 언급되는 유관순 열사를 비롯하여 각 학교 여학생들이 시위운동에 참여했다. 이 경험을 통해 여성들은 근대적인 국가관과 민족관을 인식하면서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의 주체로 성장하게 되었다. 배화여학교 학생들의 ‘3·1운동 기념일’ 투쟁은 3·1운동의 연장선에서 여성들이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 대표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의 의미

2023년 현재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17,748명 중 여성은 639명에 불과하다. 여성들의 활동은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을 뿐 아니라 활동 이후 행적을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에 포상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은 여성 독립운동가를 한 명이라도 더 발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3·1운동 기념일’ 투쟁으로 구속된 배화여학교 학생 24명을 발굴하여 포상 추천하였으며, 그 중 19명에게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