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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독립운동가

나라를 구하기 위해
궐기한 의병들

오덕홍·김일언·정래의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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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침략에 끝까지 저항한 호남의병과 산남의진

1907년 7월 일제는 헤이그특사파견을 구실로 광무황제를 강제퇴위 시키고 정미7조약을 강요하며 대한제국 군대마저 강제 해산시켰다. 군대 해산 이후 해산군인이 의진에 합류하면서 각 지역의 의병들은 부대 간 연합과 연계를 추진했다. 그 결과 의진 규모가 확대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본격적인 의병전쟁이 전개되었다.
그중 전라도에서는 기삼연(奇參衍)을 비롯한 호남 서부지역 양반 유생들이 1907년 10월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결성해 항쟁을 이어나갔다. 경상도에서는 정환직(鄭煥直)이 광무황제의 밀지를 받아 1906년 3월 산남의진(山南義陣)을 결성한 이후 1908년 8월 해산될 때까지 치열한 의병투쟁이 지속되었다. 오덕홍은 호남의병, 김일언·정래의는 산남의진에 참여해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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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신표(信標)(좌), 의병이 사용한 화승총(우)

나주에서 활동한 유격의병장 오덕홍

오덕홍은 1885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났다. 전라도에서는 호남창의회맹소가 해산된 이후에도 1908년 전해산(全海山)이 대동창의단(大東倡義團)을 결성해 일본군의 탄압에 지속적으로 항쟁했다. 오덕홍은 1909년 일제의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으로 호남의병의 세력이 위축되자 나주에서 독자적으로 의병을 결성했다. 그는 30여 명의 유격부대를 이끌고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거나 밀고 행위자를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던 중 1909년 9월 23일 나주군 아계면 일동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순국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 애족장을 추서했다. 


* 남한대토벌작전   : 일제가 의병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자 이를 완전히 탄압하기 위해 1909년 9월 1일부터 실시한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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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에 피체된 호남 의병장들 (1909)

산포수로 이름을 떨친 산남의진 우포장 김일언

김일언은 1907년 4월 산남의진에 우포장(右砲將)으로 선임되어 일본군과의 교전과정에서 활약했다. 그는 산남의진이 8월 18일 경북 청하군 죽장면에서 일본군과 교전할 당시 일본군 척후병(斥候兵) 1명을 사살하였고, 8월 24일에는 일본군 영천수비대 1명을 처단했다. 같은 달 29일 입암전투에서는 조암으로 이동해 매복하는 등 작전을 수행했지만 교전 끝에 정용기 의병장을 비롯한 산남의진의 주요 병력이 전사했다. 이후 김일언은 산남의진의 3대 의병장 최세윤(崔世允)을 보필하여 소규모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10년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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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일지』_LH토지주택박물관 소장

의병정신을 이어나간 산남의진 우익장 정래의

정래의는 1872년 경북 영일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산남의진의 우익장(右翼將)으로 임명되며 의병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정환직, 최세윤 의병장 하에서 좌익장,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경북 흥해·영해·청하군 등지에서 활동했다. 정래의는 1908년 8월 산남의진이 해산된 이후에도 산남의진 생존자 모임인 참동계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이어나가려 했지만 밀정의 밀고로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고문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다가 1927년 10월 기소중지로 풀려났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22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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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의진의 4차 결성지였던 거동사(巨洞寺)(좌), 정래의 집행원부 (1927)_국가기록원 제공(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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