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숨결

천상에 꽃이 피었네
소백산국립공원

천상에 꽃이 피었네<BR />소백산국립공원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천상에 꽃이 피었네

소백산국립공원



계절의 여왕 5월, 이맘때 소백산국립공원은 천상화원으로 탈바꿈한다. 코로나19 여파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일상이 된 요즘, 호젓한 숲길 속 천상화원을 감상해보는 것은 어떨까. 번잡한 도시,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고 싶다면 산만한 게 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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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속에 파묻힌 등산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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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코스인 깔딱고개와 계단길



누구나 소백산을 찾을 이유가 있다

소백산국립공원(비로봉 1,439m)은 당일치기 산행이 가능하다. 수도권에서 2시간 남짓한 곳에 있다. ‘소백산(小白山)’ 이름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흰 백(白)이다. 예부터 백은 ‘희다’, ‘높다’, ‘거룩하다’는 뜻을 가졌다. 일상에서 얻기 힘든 깨끗하고 맑은 에너지가 소백산에는 가득하다. 이것이 소백산을 자주 찾는 진짜 이유다. 

소백산 정상에는 유난히 바람이 많다. 탁 트인 지형 탓이다. 특히 겨울에는 거침없이 불어오는 칼바람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성난 칼바람이 아무리 위세가 등등해도 따뜻한 봄볕 앞에서는 꼬리를 감출 수밖에 없는 법. 파릇파릇 새싹이 돋고 봉우리와 봉우리를 연결하는 능선에 신록이 물들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화사한 꽃 잔치가 벌어진다. 소백산에는 수많은 꽃이 피었다가 지기를 반복한다. 그중에서 이맘때 꼭 챙겨봐야 할 꽃이 철쭉꽃이다. 

국립공원 소백산에는 7개의 탐방코스가 있다. 그중 희방사코스가 대표적이다. 등산 초입부터 시원한 희방계곡과 폭포가 나서서 땀을 식혀주고, 연화봉까지 수풀이 하늘을 가려 뙤약볕을 피해 산세를 만끽할 수 있다. 


장쾌한 물줄기, 희방폭포

소백산국립공원의 대표 탐방코스인 희방사코스는 희방매표소에서 출발한다. 이곳에서 3km 정도를 오르면 연화봉 정상이다. 희방사코스의 매력은 시원한 물줄기로 유명한 희방폭포에 있다. 폭포까지 약간 가파른 길을 올라야 하지만 본격적인 등산에 앞서 몸을 풀기에 좋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폭포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온다. 아니나 다를까. 폭포 앞에 서면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시원한 물줄기가 곧추선 듯 하늘과 땅을 이어준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기둥 같다. 폭포가 떨어지는 가장자리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물빛이 검푸르다. 등산객들은 소백산이 보여주는 첫 번째 장관에 정신이 팔려 사진 촬영에 여념 없다. 

희방폭포 이후부터는 숨이 깔딱 넘어갈 만큼 난코스가 기다린다. 등산로에는 큰 바윗돌이 줄을 맞춰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다. 한발 한발 오르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가슴은 더 많은 산소를 받아들이기 위해 가쁜 숨을 몰아쉰다. 잠시 멈춰 뒤를 돌아보니 꽤 올라왔다. 등산의 묘미는 빠른 걸음이 아니라 느리게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 높은 고지에 올라서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깔딱고개’라는 이름보다 ‘느림고개’라고 부르는 게 옳겠다. 그동안 속도 때문에 놓치고 살았던 것을 회복하는 고개가 깔딱고개요, 느림고개다. 깔딱고개를 오르면 쉬어가기 좋은 곳에 벤치가 있다. 한고비를 넘겼으니 다시 힘을 내라는 뜻이려니 생각하고 좀 더 힘을 내어 올라본다. 

깔딱고개를 안전하게 오르려면 등산 스틱이 필수다. 스틱은 체중을 분산시켜주고 비탈길이나 계곡 등지에서 균형을 잡는 데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돌길에서는 무릎보호에 특효이니 꼭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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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으로 떨어지는 희방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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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떨어진 연분홍색의 철쭉꽃



연분홍 철쭉꽃의 고운 자태

숲은 변화무쌍하다. 좀 전까지 이어지던 비탈길은 어디 갔는지 찾아볼 수 없고 완만한 경사를 가볍게 오르내릴 수 있는 산책길이 이어진다. 희방폭포에서 1.4km 구간이다. 연화봉까지 남은 거리는 1.2km. 느린 것 같지만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 절반을 오른 셈이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철쭉꽃도 이 구간부터 만난다. 도심에서 보는 핏빛의 붉은 철쭉이 아니라 진달래처럼 여리고 가냘픈 연분홍 철쭉꽃이다. 만개한 철쭉꽃이 환하게 웃기도 하고 땅바닥에 떨어져 밟히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나뭇가지에 불시착한 채 꽃잎을 축 늘어뜨린 철쭉꽃도 있다. 밟고 지나가기에 미안해서 애써 다른 길로 돌아간다. 화려했던 짧은 시절을 보내고 땅바닥에 나뒹구는 모습이 애잔하다. 

연화봉을 앞두고 마지막 고비가 닥친다. 평온의 숲길이 끝나고 다시 나무계단이 눈 앞에 펼쳐진 것이다. 이 구간만 지나면 드넓은 평전을 만날 수 있다. 등산길에 철쭉나무가 서로 뒤엉켜 꽃 터널이 되었다. 푸른 나뭇잎과 조화를 이룬 연분홍색 철쭉의 형언할 수 없는 고운 자태다. 꽃에 정신 팔려 힘든 것도 잊은 채 발걸음을 옮긴다. 어느 순간부터 하늘을 덮고 있던 나무가 사라지더니 드디어 하늘과 맞닿은 곳에 도착한다. 능선이 거침없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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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봉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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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잎과 조화를 이룬 연봉 철쭉꽃



연화봉에 오르면 구름처럼 쉬어가리

연화봉에는 짙은 안개가 자욱하다. 천상에 발길을 들인 것 같다. 먼발치에 국립천문대가 보이고 주변에는 녹색 융단을 깔아놓은 듯 푸르다. 비록 안개가 산 전체를 뒤덮었지만 부드러운 능선이 안개 속에 모습을 드러낸다. 연초록과 연분홍 철쭉꽃의 조화가 매력을 한껏 발산하고 있다. 

“엊그제 비가 많이 왔어요. 그래서 꽃이 많이 떨어졌어요. 더군다나 오늘은 안개 때문에 영 그림이 좋지 않네요.” 매년 철쭉꽃이 만개할 때마다 사진 촬영을 온다는 한 사진가가 오늘은 허탕이라며 볼멘 소리를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산이 높으니 구름도 안개도 이곳에서 쉬어 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더군다나 안개는 불청객이 아니다. 철쭉꽃을 보기에는 이보다 편안한 빛이 없다. 강한 햇빛이 내리비쳤다면 연분홍색의 철쭉꽃은 허여멀겋게 탈색되어 볼품없었을 것이다. 

제2연화봉 가는 길목에 소백산 국립천문대가 자리한다. 첨성대를 본뜬 천문대가 인상적이다. 깊은 숲속 어디선가 뻐꾸기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우리나라 산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새소리가 뻐꾸기 소리다. 길섶에는 민들레가 솜털 같은 홀씨를 머리에 이고 있다. 그늘진 곳에는 큰앵초꽃도 피었다. 큰앵초꽃은 5~6월경에 철쭉꽃과 함께 꽃망울을 터트린다. 발길을 돌려 등산했던 희방사로 하산 길을 잡는다. 등산은 언제나 아쉬움을 남긴다. 화창한 하늘 아래 춤추듯 위용을 뽐내는 소백산 주 능선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도 하산하는 발걸음은 가볍다. 희고, 깨끗하고, 거룩한 에너지를 가슴에 담아가기 때문이다. 소백산은 언제나 우리에게 변함없는 너른 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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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객들이 국립호텔이라 부르는 연화봉대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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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봉 평전의 숲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