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

최선화와 양우조
독립운동가 부부의
육아일기

최선화와 양우조<BR />독립운동가 부부의<BR />육아일기

글 김형목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최선화와 양우조

독립운동가 부부의육아일기



최선화와 양우조는 김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약했다. 타국에 세워진 임시정부와 그 일원으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일은 험난했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가정을 일구며 자신의 삶을 살아갔다. 최선화와 양우조 부부가 쓴 육아일기 『제시의 일기』는 이러한 임시정부 사람들의 절박하지만 일견 평범했던 삶을 기록하고 있다.


‘가정의 달’에 부부 독립운동가를 말하다

여성독립운동가는 아내·며느리·어머니·동지로서 오늘날 ‘워킹맘’과 견주는 ‘슈퍼우먼’이었다. 그런데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는 그중 아주 일부만을 언급할 뿐이다. 이들은 험난한 우리 근현대사의 주역이자 오늘날 대한민국의 터전을 가꾼 위인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생계를 위해 경제활동은 물론 조국독립을 위한 막중한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려 국내로 잠입하는 모험도 감행했다. 이들의 희생정신은 독립운동을 견인하는 토대가 되었다. 독립운동 동지로서 맺어진 부부 인연은 아름다운 ‘들꽃’으로 탄생하는 벅찬 순간을 맞았다.


양우조, 외교활동으로 임시정부를 알리다

양우조는 1897년 3월 평안남도 평양에서 아버지 양기영(楊基永)과 어머니 박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명진(明鎭)이며 호는 소벽(少碧)이다. 중국에서 활동할 때는 양소벽, 양묵(楊墨) 등 이명을 사용했다. 이외에도 데이비드 영(David J. Young)이라는 영문 이름을 썼다.여덟 살 때부터 서당에서 전통교육을 받았고, 1912년부터 1914년까지는 근대교육을 수학했다. 기독교 입교는 서양문화와 근대사회를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 유학길에 오른 양우조는 재미대한인국민회와 재미한인유학생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이어 흥사단에 입단,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29년 다시 상하이로 건너온 그는 안창호·이동녕·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에 참여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찰특파원에 선임되었다. 혁신사를 창립해 교민사회 문화사업도 실시하였다. 이는 민족 정체성을 북돋는 활동의 일환이었다.

이듬해 월간지 『한성(韓聲)』을 발행하는 한편, 『삼민주의』(1933)와 『손문학설』(1935) 등을 번역·출판했다. 그리고 임시정부 재무부 화남특파원으로서 임시정부 군자금 조달에 힘썼다. 한국광복군 결성 당시에는 총사령부 참사 겸 정훈처장으로 광복군 발전에 이바지했다. 국제사회에 임시정부를 알리는 일에도 열성적이었는데, 충칭 한국인기독교청년회 이사 겸 덕육지육부장으로 있다가 1946년 5월 귀국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이듬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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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저우에서 양우조(1932)



최선화, 독립운동에 나서다

최선화(이명 최소정)는 인천에서 태어나 여학교에서 근대교육을 받으며 생장했다. 1931년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양우조를 소개받았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 애정을 확인한 두 사람은 결혼을 결심했다. 집안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으나, 최선화의 할아버지가 결혼 성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최선화는 상하이 간호전문학교 유학을 구실로 ‘통행증’을 받아 비교적 쉽게 중국으로 갔다. 1937년 3월, 김구의 주례로 진장 임시정부 청사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부터 양우조의 독립운동에 대한 최선화의 내조도 시작되었다. 신혼생활은 낯선 광저우에서 보냈다.

최선화는 흥사단에 가입한 후 임시정부에서 한국혁명여성동맹 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나중에는 한국애국부인회 서무부장으로 선출되었다. 남편 양우조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할 때 최선화는 이를 묵묵히 지원하며 동지로서 내조했다. 1991년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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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화 양우조 부부(1937.03.22.)



임시정부 이면사를 섬세하게 기록하다

『제시의 일기』는 최선화와 양우조가 쓴 육아일기로 당시 임시정부 가족들의 일상사와 인간적인 모습을 담은 귀중한 기록물이기도 하다. 중일전쟁 당시 일본의 공습을 피해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동하는 긴박함과 위험을 시기별로 생생하고도 정확하게 기록했다. 그리고 암울한 질곡 속에서 독립을 염원하는 희망의 불씨도 확인할 수 있다.

1938년 7월 4일 아침 10시 정각에 딸이 태어났다. 아기의 이름은 제시로, 영어 이름이다. 아기가 장차 성장했을 때 우리나라가 세계 속에서 당당하게 제 목소리를 내길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담았다. 8월 30일 일기에서 “오늘 비로소 얼굴을 마주하고 정면으로 제시를 안아줬다. 언제부터인지 제시는 스스로 머리와 목을 바로 세우고 있다”라고 적었다. 딸이 아팠을 때는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연약한 자신의 모습을 언급하기도 했다.

제시가 백일이 되는 10월 11일에는 백일잔치 대신 기념사진을 찍었다. 긴장감과 경제적인 궁핍함에서도 여러 사람으로부터 축하를 받을 수 있는 처지에 행복함을 표현하였다. ‘지극정성’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어쨌든 딸에 대한 그들의 무한한 신뢰와 기대감은 이 같은 정성을 쏟을 수 있는 에너지원이었다.

12월 15일 류저우에서 최선화와 임시정부 일행은 일본군 공습을 피해 천연동굴로 황급히 뛰어들었다. 곧이어 대대적인 공습이 이어졌다. 겁에 질린 일행이 머뭇거리며 동굴 밖으로 나오자 처참한 광경이 펼쳐졌다. 지내던 집 주변은 불바다를 이루고, 참혹하게 죽은 시신도 보였다. 일기에서는 무자비한 폭격으로 인류역사상 엄청난 참사가 일어났다고 언급했다. 동굴은 위험하다면서 숲속이나 나무 밑에 숨었던 피난민들은 저공비행을 하며 이루어진 기관총 난사에 대부분 사망했다. 시시각각으로 자행되는 공습으로 쉽게 불안감을 떨칠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불안한 피난 생활에도 때때로 망중한을 즐겼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으로부터 긴장감을 해소하려는 것이었다. 


우리 식구 3명은 저녁에 공원으로 산보를 가려고 나오다가 용성중학교 여학생 주최로 ‘구망극사’에서 연극을 한다는 광고를 보았다. 흥미 있는 일이었다. 중국에 체류한 지 약 5년이 넘었지만 한 번도 중국의 연극은 본 적이 없었다.…(중략)…박수 소리를 들은 제시는 기분이 좋아 쉬지 않고 박수를 치며 재롱을 부려 옆에 앉은 손님들에게서 칭찬을 많이 들었다. 기다리는 동안 우리 제시가 대신 볼거리를 제공한 셈이다. 


1940년 3월 14일 일기에는 하루 전 작고한 이동녕(李東寧)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동녕은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에 대한 교민들의 충격은 컸다. 최선화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제 생명이 우리에게 주는 의무를 완수하고 가신 석오 선생님, 그분의 든든하고 커다란 자리를 느끼게 되었다”는 고백에서 이러한 심정을 가늠할 수 있다. 그는 선생이 돌아가시면서도 화합을 유언으로 남기셨다고 말하며, 생전 독립을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동녕 선생님께서 독립의 서광이라도 보고 돌아가셨으면 좋았으리란 안타까움도 덧붙였다. 비통한 심정은 빈소를 뜬눈으로 지키다 귀가한 양우조도 마찬가지였다.일기에는 당시 한인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 가사도 나온다. 가사는 망명 생활 중 한인들의 정서를 그대로 표현하는 동시에 진정한 염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백두산이 높이 솟아 길이 지키고

동해물과 탕하수 둘러 있는 곳

생존 자유 얻기 위한 삼천만 

강하고도 씩씩한 빛 띠고 있도다

한 깃발 아래 힘 있게 뭉쳐

용감히 나가 악마 같은 우리 원수

쳐 물리치자!

우리들은 삼천만의 대인 앞에서

힘차게 싸우는 선봉이다.


9월 13일, 치장에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양우조는 한국광복군 성립전례식 준비를 위해 충칭으로 떠났다. 한가위를 목전에 두고 둥근 보름달이 심란함을 더했다. 공습경보가 있어 최선화는 제시를 안고 들에 나가서 2시간 동안 괴로운 잠을 청하곤 했다. 이국땅에서의 피난 생활은 그의 여린 마음을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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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화, 양우조 부부가 쓴 『제시의 일기』 중 일부. 제시가 백일을 맞았던 날의 기록이다



여권 신장에 앞장서다 

최선화는 남편의 항일운동을 후원하고, 자녀를 양육하며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와중에도 여성의 존재감을 알리는 활동을 지속했다. 특히 미주지역과 정보 교환에 적극적이었다.


이 전시를 당한 한국 여성들은 반듯이 할 일을 위하여 한국애국부인회를 다시 건설하고자 오랫동안 활동한 결과로, 금년 일월 말에 완전한 조직을 마치고 1천5백만의 조선 여성은 지구의 어느 곳에 몸을 붙이고 있던지 “나는 한국의 여성이다. 나는 조국광복의 책임을 지고 있다. 왜적은 나의 원수다. 한국의 1천5백만 여성은 굳게 뭉치어서 국가를 독립시키고 민족을 해방시키자!” 하는 구호로 용전합시다. 이 소식을 널리 발표하시어 해외에 계시는 일반 동포의 성원이 크고 특별히 여성사회에 긴밀한 연락을 맺어서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도록 지도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대한민국 25년 2월 17일 최소정.   


염원은 2년 후에 이루어졌다. 절박하고 간절한 소망이었던 조국 해방이 왔다. 1945년 8월 10일 일기에는 “상오 10시(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일본이 무조건으로 동맹국에 투항했다는 소식이 충칭에 도착한 것은 오늘, 10일 저녁 8시쯤이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웬일인가 밖을 내다보니 사람들이 일본이 망했다고 한다. 이 소리를 듣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 오며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가슴이 뛰고, 너무 어지러워 자리에 가서 잠시 누워야 할 정도였다. 이런 식으로 일본의 패망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었다”며, “벅찬 감동이 다가오는 순간 현기증을 느낄 만큼 좋았다. 방송을 들으면 착잡한 생각에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라고 당시의 심정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어진 소식은 절망적이었다. 8월 13일의 순간적인 기쁨은 커다란 실망으로 되돌아왔다. 신탁통치에 관한 소식이 임시정부 가족들을 긴장시켰다. 바람과 달리 ‘진정한’ 해방은 아니었다. 더욱이 급변하는 시국으로 제시를 학교에 입학시키려던 계획도 중단되고 말았다.


독립운동가, 아내, 어머니 최선화

귀국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충칭에서 상하이로 이동한 뒤 1946년 4월 26일 귀국선에 올랐다. 그리고 29일 부산 앞바다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기나긴 ‘피난 생활’은 끝났어도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힘든 앞날이 남아 있었다. 약 10년간의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지만 현실은 이상과 너무 멀었다.

최선화는 독립운동가의 아내, 그리고 독립운동가 동지로서 제 역할에 충실했다. 또 다정다감한 어머니이기도 했다. 그는 비록 전투에 참여하는 등 역사 무대에서 크게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