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역사

희망찬 미래 향해 하나 된 여성
근우회의 탄생

희망찬 미래 향해 하나 된 여성<BR />근우회의 탄생

글 김혜진 경성대학교 강사


희망찬 미래 향해 하나 된 여성

근우회의 탄생


근우회 창립과 활동



독립운동사에서 여성들은 다소간 소외돼 있었다. 여성에게는 아내, 또는 어머니라는 제한된 역할만이 주어졌고, 그것을 미덕으로 삼았다. 주어진 미덕을 벗어던지고 치열한 역사의 현장에 뛰어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성에 대한 시대의 부조리를 깨닫고 독립운동과 여성운동에 뛰어든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에게 해방은 조국의 미래이자, ‘나’라는 여성의 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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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27년 6월 19일 자에 실린 근우회 발회식(1927.06.17.)



시세 변화를 자각한 여성들

19세기 한반도에 근대라는 새로운 물결이 밀려들고, 일본은 제국주의를 기반으로 한 침략의 야욕을 드러냈다. 당시 한반도 여성들은 여성해방과 민족해방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를 위해 여성 스스로 근대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여학교 설립에 앞장섰다. 이러한 근대교육을 바탕으로 여성들도 민족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1890년대 중후반 이후 여학교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독립신문』,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의 언론은 아동과 여성의 교육이 즉각적으로 시행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서울 북촌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찬양회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순성여학교 설립을 계획했다. 초기에는 취지에 공감하여 뜻을 모으던 회원이 500여 명에 달할 만큼 관심이 뜨거웠으나, 안타깝게도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농후했던 시대에서 상황과 운영의 문제로 순성여학교 설립은 여성교육사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다만 여성들이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행동에 나섰다는 것, 즉 여성해방의 문제를 스스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1886년 설립된 이화학당은 우리나라 여성교육의 효시였다. 근대교육에 관한 법령이 제대로 마련되지 못한 현실에서 선교사들이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이후 정신여학교·일신여학교·영화여학교·영명여학교 등이 설립되어 우리 여성교육 발전에 이바지했다. 개신교계 여학교의 운영은 여성들이 개신교에 우호적이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을사늑약을 전후로 여학교 설립을 위한 다양한 여성단체가 만들어졌다. 여자교육회, 진명부인회 등이 대표적이다. 이와 더불어 여성 개인에 의한 여학교 설립도 확산되었는데, 숙명여학교와 진명여학교를 설립한 엄귀비와 정화여학교를 설립한 김정혜가 있다.여학교가 설립되면서 여성들도 근대교육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당시 여학교 입학은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남성들과 동등하게 일상생활을 누릴 수 있음을 인정받는 특혜나 다름없었다. 여성들의 교육 수혜는 새로운 사회를 경험하는 생활 현장으로 다가왔고, 이들은 사회활동과 더불어 교사나 간호사 등 전문직으로도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여성은 사회구성원이라는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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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에서 만세운동을 하는 여학생들



나라의 주인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다
근대교육은 여성들에게 사회활동 참여와 함께 민족운동 주체로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의 적극적인 참여는 여성해방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국채보상 취지서가 발표되자 남성 주도에 격분한 여성들은 단체를 조직하는 등 사회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나라를 위하는 마음과 도리에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 부인들을 논외로 한다 하니 대저 여자는 나라 백성이 아니며 화육중일물(化育中一物)이 아니오.”

이들은 남녀평등론에 의한 사회적 존재로서 역할 분담과 의무 수행을 주장했다. 국채보상운동은 여성이 참여하면서 한 차원 높은 국민운동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마침내 여성이 조직체를 만들어 국가적인 위기를 함께 극복할 수 있는 주역으로 등장한 계기였다. 국채보상운동에서의 경험은 사회적인 책임을 인식하는 한편 여성운동을 확산시키는 결정적인 밑거름이 되었다.
이러한 각성을 바탕으로 여성들은 여성단체를 조직하고 구국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여학생을 비롯한 각계 여성들의 자발적인 3·1운동 참여가 이를 증명한다. 더욱이 「2·8독립선언서」, 「대한독립여자선언서」에서 드러나듯 이미 여성들도 남성과 동등한 국민의식을 갖고 있었다. 3·1운동 중 여성들의 활약이 돋보였던 만세운동을 살펴보면 개성 만세운동, 부산 일신여학교의 3·1운동,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등이 있다. 여기서 여성종교인, 여교사, 여학생 등이 전면에 나서 활약했고, 이는 다양한 독립운동단체의 결집과 운동 방향을 모색하는 새로운 에너지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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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우회 도쿄지회 격문(1928.05.20)



하나 된 여성단체를 조직하다 

3·1운동으로 여성은 앞으로 전개될 독립운동에 남성과 동등한 국민의 자격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인식을 정립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여성들의 독립의식을 고취할 수 있는 교육이 선행되어야 했다. 다양한 여성계몽단체가 만들어졌는데, 기독교 중심의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구분되었다. 기독교 여성들은 근대 지식과 교회를 바탕으로 교육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사회주의가 유입되면서 여성운동에도 변화가 일었다. 1924년 무산 여성의 해방을 규약과 강령으로 내세운 조선여성동우회가 등장하기도 했다.1926년은 일본 제국주의의 경제침탈이 노골화되고 잔혹한 폭압 정치가 이어지던 시기였는데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으로 좌우 노선이 나뉘어 그 역량이 분열되었다. 이에 민족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재건을 위해 분열된 항일민족운동을 통합하자는 민족유일당운동이 활발해졌다. 1927년 2월, 그 결과로 신간회가 탄생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이 여성운동에 영향을 주어 만들어진 단체가 바로 근우회다.


역사 있는 후부터 지금까지 인류사회에는 다종다양의 모순과 대립의 관계가 설립되었다. 유동무상하는 인간관계는 각 시대에 따라 혹은 이 부류에 유리하게 혹은 저 부류에 불리하게 되었나니 불리한 처지에 서게 된 민중은 그 시대의 설움을 한껏 받았다. 우리 여성은 각 시대를 통하여 가장 불리한 지위에 서 있어 왔다. 사회의 모순은 현대에 이르러 대규모화하여 절정에 달하였다.…(중략)…전쟁의 화는 갈수록 참담하여 가며 확대하여 가고 빈국과 죄악은 극도에 달하였다. 이 시대의 여성의 지위는 비록 부분적 향상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환상의 한 편에 불과하다. 조선에서는 여성의 지위가 일층 저열하다. 미처 청산하지 못한 구시대의 유물이 오히려 유력하게 남아 있는 그 위에 현대적 고통이 겹겹이 가하여졌다. 그런데 조선여성을 불리하게 하는 각종의 불합리는 그 본질에 있어 조선사회 전체를 괴롭게 하는 그것과 연결된 것이며…(중략)…그러나 일반만을 고조하여 특수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고로 우리는 조선여성운동을 전개함에서 조선여성의 모든 특수점을 고려하여 여성 따로의 전체적 기관을 갖게 되었다니 이와 같은 조직으로서만 능히 현재의 조선여성을 유력하게 지도할 수 있는 것을 간파하였기 때문이다…(하략).   


윗글은 근우회의 선언문으로, 여성층의 단결과 지위 향상을 목적으로 내걸었다. 근우회는 조선 여성들의 억압이 여전하며 현대에 이르러 그 정도가 절정에 이른 것은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으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조선 여성들이 처한 특수성을 고려해 여성들만의 하나 된 단체가 만들어져야 함을 피력했다.

좌우를 떠나 여성들의 하나 된 단체를 지향하며 만들어진 근우회는 여성 계몽을 위해 다양한 여성교육을 실시했다. ① 여성의식 향상을 위한 강연회와 토론회 ② 회원모집 및 회원 간 친목을 위한 야유회, 체육대회, 척사(擲柶, 윷놀이)대회 등 ③ 여성의 기술교육을 위한 강습회 ④ 학교기부금이나 어려운 동포구제를 위한 사업 ⑤ 문맹 퇴치를 위한 부인야학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기관지로 『근우』를 창간하여 여성운동의 발전 방향도 제시했다.

근우회의 선언문과 강령, 활동은 여성을 ‘현모양처’로만 바라보았던 당시 사회에 대한 도전장이자 여성해방의 희망이었다. 나아가 여성들을 하나로 통합하려 했던 화합의 장이기도 했다. 그래서 근우회는 근대 여성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특히 도쿄지회 조직은 해외와 정보 교류를 모색하는 등 소통을 위한 현장이었다.


근우회 행동강령

◎ 여성에 대한 사회적·법률적인 일체의 차별을 철폐한다.

◎ 일체의 봉건적인 인습과 미신을 타파한다.

◎ 조혼을 폐지하고 결혼의 자유를 확립한다.

◎ 인신매매 및 공창(公娼)을 폐지한다.

◎ 농민 부인의 경제적 이익을 옹호한다.

◎ 부인 노동의 임금 차별을 철폐하고 산전 및 산후 임금을 지불하도록 한다.

◎ 부인 및 소년공(少年工)의 위험 노동 및 야근을 폐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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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우회 기관지 『근우』(1929.05, 창간호)



서울 여학생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근우회의 주요 활동 중 하나는 여학생들의 동맹휴교에 대한 조사와 지원이다. 학생들은 사회적으로 불의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적극적으로 투쟁에 나섰는데, 그 때문에 일경의 감시와 탄압을 받아야 했다. 1927년 6월, 근우회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휴교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다가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또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1930년 서울에서는 근우회의 주도하에 여학교 중심의 제2차 학생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서울 여학생 만세운동은 광주학생항일운동을 계기로 일어났으나, 여학생이 주도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을 비롯해 배재고등보통학교 학생들도 시위를 벌였다. 근화, 배화, 동덕, 정신 등의 여학생들도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일경은 시위에 참여한 여학생들을 마구잡이로 연행했으나 1930년 1월 15일 시작된 시위는 다음 날인 16일까지 이어졌다. 이 사건으로 만세시위를 주도한 근우회의 허정숙과 박차정이 기소되었다. 이때 근우회에 대한 일제의 탄압도 가중되어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고 1931년 신간회가 해소되며 근우회도 같은 해 3월 31일 해소를 결의하게 되었다.

근우회는 한국의 여성운동단체를 통합하고 단결하기 위해 설립된 최초의 단체로, 협동전선의 의미를 실천했다. 또한 여성들을 계몽해 사회의 구성원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여성교육 보급에 노력을 기울였고, 여성들의 모순된 현실을 타파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며 사회적인 인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근우회의 이 같은 정신과 활동은 현재를 살고 있는 여성들에게도 화합을 통한 진정한 여성 리더십을 일깨우는 희망의 등불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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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우회 강령과 규약(1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