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체절명의 한국사

강감찬,
동아시아를 지키다

강감찬,<BR />동아시아를 지키다

글 김종성 역사작가


강감찬,

동아시아를 지키다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은 고려를 지킨 호국 영웅으로 평가받지만, 그가 실제로 역사에 미친 영향은 그보다 컸다. 강감찬의 활약은 한국사를 넘어 동아시아사에까지 뻗쳤다. 귀주대첩을 전후한 동아시아 정세를 통찰해 보면, 그가 한국의 명장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명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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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대첩 민족기록화(전쟁기념관, 한국문화정보원 제공)



고려와 요나라의 긴 신경전

강감찬은 고려 건국 30년 뒤인 948년 출생했다. 아버지 강궁진은 왕건을 도운 건국 주역이었다. 강감찬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급성장을 지켜보며 성장했고, 35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 했다. 현종 대에 정권 실세가 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 60세 무렵이었다. 강감찬이 거란족을 격파한 것은 70세가 넘었을 때의 일이다. 문과 급제자인 그가 장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문관이 무관을 지휘하는 관행 때문이었다. 글을 쓰는 것으로 말년을 보내다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강감찬 시대에 고려는 동아시아 신흥 강자인 요나라의 압력에 시달렸다. 요나라 입장에서는 중국의 송나라(북송)를 공략하자면 고려부터 제 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고려를 그냥 두고 남진을 했다가는 기습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993년, 제1차 침공을 단행했지만 안융진전투와 서희의 외교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대신 요나라는 고려와 송나라의 사대관계를 끊고 고려를 신하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한편, 고려는 평안도 여진족을 몰아내고 강동 6주를 건설하는 것에 대한 요나라의 양해를 받아냈다. 그러면서도 고려는 송나라와 은밀히 접촉했다. 999년에는 일시적으로 양국관계가 회복됐다. 요나라는 불완전하게나마 고려를 신하국으로 두고, 1004년에 송나라를 침입해 형제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매년 조공을 보내도록 했다. 중국 정복을 보류하되 매년 조공을 보내도록 함으로써 송나라가 딴 마음을 품을 가능성을 차단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010년, 요나라는 제2차 고려 침공을 단행했다.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확실히 끊어놓기 위함이었는데, 고려 현종으로부터 “친조(親朝)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되돌아갔다. 신하국 군주가 황제국을 친히 찾아가 알현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으로, 외교적 굴욕이나 다름없었다. 국가 간에 맺은 이만한 약속이면 대개 지켜지기 마련이지만, 현종은 약속을 어겼다. 이는 요나라가 1014년, 1015년, 1017년 세 번에 걸쳐 고려를 침공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고려는 녹록지 않았다. 요나라가 번번이 군대를 되돌리는 상황이 반복됐다.


요나라의 마지막 침공, 귀주대첩

993년에 시작된 기나긴 장기전에 마침표를 찍은 것은 요나라의 제6차 침공이었다. 소배압 장군이 강동 6주의 반환과 고려 임금의 친조를 요구하며 10만 대군을 몰고 왔던 이 사건으로 지긋지긋한 대결 국면에 종지부를 찍었다. 일부 학술 논문과 백과사전 등은 제6차 침공이 1018년에 일어났다고 기록하지만, 『고려사』 현종세가(현종편)는 “(무오 9년 12월)무술일에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으로 침공하여 왔다”고 말하고 있다. 음력인 무오 9년 12월 10일(무술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019년 1월 18일이다.

압록강 왼쪽 끝부분 의주에서 남쪽으로 6km 내려오면 해발 408m의 백마산이 있다. 이곳에 고려 최북단 군사기지인 흥화진이 자리했다. 흥화진을 점령해야 거란군의 남하가 가능했지만, 거란군은 실패했다. 그런데 실패했으면 철군해야 하거늘, 마음만 급한 나머지 흥화진을 그대로 둔 채 평양 쪽으로 남하했다. 남진하는 그들 앞에 삼교천이란 하천이 나타났다. 흥화진과 삼교천 나루까지는 약 8km. 거란족이 이 거리를 이동하는 동안 강감찬은 기발한 작전을 생각해냈다. 삼교천 나루에서 2km 떨어진 상류 지역에 제방을 쌓는 것이었다. 소가죽에 흙을 넣어 제방을 쌓고 하천물을 막자, 삼교천 나루에는 물이 거의 없게 됐다. 강감찬은 소가죽 제방이 있는 곳과 강 양쪽 두 야산에 군대를 배치했다. 이러한 준비는 거란군이 삼교천으로 이동하는 동안에 끝이 났다.

삼교천 나루에 도착한 거란군은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하고 무작정 도강했다. 거란군 상당수가 하천에 들어섰을 무렵, 강 양쪽에 매복해 있던 고려군이 일제히 봉화를 올렸다. 소가죽 제방 쪽에 보내는 ‘제방을 터뜨리라’는 신호였다. 거란군이 봉화를 보고 당황할 때, 거대한 하천물이 그들을 향해 밀려들었다. 거란군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강감찬은 공격 명령을 내렸다. 강 양쪽에 숨어 있던 고려군이 공격을 개시하고, 제방 쪽에 있던 고려군도 삼교천 나루로 진격했다. 하천에 갇힌 거란군을 향해 세 방향에서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거란군의 대열이 흐트러지고, 결국 고려군이 승리를 거뒀다. 살아남은 거란군은 급한 나머지 흥화진 쪽으로 되돌아갔으나, 그곳에서 또다시 공격을 받았다.

거란군은 압록강 쪽으로 철수했다가 전열을 정비해 다시 남하했다. 이번에는 고려군이 밀렸다. 거란군은 기세등등하게 평북과 평남의 경계인 청천강과 평남과 황해도의 경계인 대동강을 넘었다. 그러나 개경 근처에서 다시 후퇴하더니, 삼교천 인근인 귀주까지 물러가게 되었다. 이때 거란군은 고려군을 귀주 일대로 유인해 양쪽에서 협공하는 작전을 세웠다. 강감찬은 그 기미를 알아채고 오히려 거란군을 포위하며 공격에 들어갔다. 기상 조건도 고려군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바람이 고려군의 등을 밀어주었고, 하늘에서는 비까지 내렸다. 덕분에 고려군은 손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 10만 명이었던 거란군은 수천 명밖에 남지 않았다. 귀주대첩은 이렇게 역사의 한 장을 기록했다.


동아시아 세력 균형의 형성과 평화

고려와 요나라의 대결은 그렇게 끝이 났다. 참패당한 요나라는 고려와 화친을 맺고, 고려와 송나라를 치기보다는 현상에 만족하기로 했다. 요나라가 더 이상 남하하지 않음에 따라 한반도와 만주, 중국에는 세력 균형이 형성됐다. 송나라도 강감찬 덕분에 전쟁을 피하게 된 것이다. 이때 형성된 세력 균형은 거란족이 약해지고 여진족이 강해진 뒤에도 계속 유지됐다. 훗날 동아시아 최강이 된 여진족도 한반도-만주-중국의 세력 균형을 깨지는 못했다. 이 구도는 몽골족 칭기즈칸이 등장하기 전까지 약 200년간 동아시아의 평화를 지탱했다. 강감찬을 고려를 지킨 호국 영웅에서 나아가 동아시아 평화를 지킨 국제적 명장으로 보는 이유다.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단 실무자 서긍은 귀국하여 작성한 『고려도경』이란 보고서에서 평소 민간에서 수행하다가 외침이 생기면 전쟁에 자원하는 고려 승군(재가화상)에 관해 설명하며 “이전에 거란군이 고려에 패배한 것도 바로 이들 때문이라고 한다”고 서술했다. 고려 승군들이 요나라와 전쟁에 자원해 전공을 세웠다는 것이다. 역사학자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승군의 내력을 모르면 고구려가 당나라 30만 대군을 물리친 원동력뿐 아니라 명림답부가 이끈 혁명군의 중심이나 강감찬이 거란을 격파한 요인을 알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강감찬의 절묘한 전술과 더불어 그의 작전을 소화해준 승군, 관군의 실력이 동아시아 평화를 가져오고, 강감찬을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으로 만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