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아버지와 두 아들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BR />아버지와 두 아들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광복을 위해목숨을 바친

아버지와 두 아들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및 광복회와 공동으로 유찬희, 유기석, 유기문 부자를 2020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유찬희는 중국 북간도와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 한인사회 안정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아버지 유찬희의 독립정신을 이어받아 장남 유기석과 차남 유기문은 중국 관내를 거점으로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정부는 세 부자의 공적을 기려 2008년 유기석에게 독립장을, 2010년 유찬희에게 독립장, 유기문에게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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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찬희(柳纘熙)

1884.08.08.~1930.02.13.

황해도 금천

건국훈장 독립장(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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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석(柳基石)
1905.01.12.~1980.11.27.
황해도 금천
건국훈장 독립장(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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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문(柳基文)

1910.~미상

황해도 금천

건국훈장 애족장(2010)



한인사회 안정과 민족운동에 헌신한 유찬희
유찬희는 1884년 8월 8일 황해도 금천에서 태어났다. 서북학회에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다 국권침탈 후 탄압이 심해지자 1913년경 중국 연길현 쥐쯔제(局子街)로 망명하였다. 이곳에서 간민회(墾民會)에 참여해 한인 보호와 계몽에 힘쓰는 한편, 무역회사를 운영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북간도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고 조선독립기성총회와 충열대(忠烈隊)를 조직하여 자금 모집에 앞장섰다.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도 참여하여 총기구입의원, 참모장, 재무부장을 차례로 맡아 독립군을 재정적·군수적으로 지원하였다. 이후 연해주를 거점으로 한인사회 안정과 민족의식 고취를 도모하다 1930년 서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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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방랑기-유기석 회고록』(국가보훈처, 2010)에 수록된 가족사진. 왼쪽에서부터 어머니 이안라, 두 누이(신덕, 신영), 아버지 유찬희, 유기문, 유기석 순이다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아나키스트 유기석

유찬희의 장남 유기석은 1905년 1월 12일 황해도 금천에서 출생하였다. 가족과 함께 이주하여 1919년 북간도의 만세운동에 가담하였던 그는 1920년 상하이로 건너왔다. 그곳에서 흥사단에 입단하여 원동위원부에서 활동하였고, 1924년 베이징 유학 중 아나키즘을 수용하며 독립운동의 사상적 방략으로 삼았다. 

유기석은 1930년 상하이에서 유자명(柳子明) 등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고 본격적으로 의열투쟁에 나섰다. 그는 1932년 동생 유기문 등과 함께 톈진에서 일본총영사관과 일본군사령부를 파괴하는 ‘톈진투탄의거’를 결행하였고, 중일전쟁 발발 후인 1938년에는 일본군함 폭침과 상하이 지역 일본 책임자 처단 등을 전개하였다. 이후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여 난징에서 제3징모분처 대장으로 초모활동을 펼치고, 광복 후 집필과 후학양성에 힘쓰다 1980년 서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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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흥사단 원동대회 기념사진(1924.02.18.)



형과 함께 의열투쟁에 투신한 유기문

유찬희의 차남 유기문은 아버지를 따라 북간도와 연해주 등지에서 거주하며 학업을 마치고 1931년 중국 천저우에서 형인 유기석을 만나 아나키즘을 수용하였다.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하여 의열투쟁조직인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1932년 12월 ‘톈진투탄의거’에 직접 참여하였다. 그는 유기석이 베이징에서 가져온 폭탄을 전이방(田理芳)과 함께 일본총영사관 관저와 일본 기선에 투척하여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널리 알리고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1935년 흑색공포단이 전개한 친일 변절자 처단 의거에 참여하는 등 의열투쟁을 이어나갔으나,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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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석의 논설 「무산계급 예술신론」

(『중외일보』, 1928.04.05.,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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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친일 변절자 처단 의거 개정 관련 기사

(『동아일보』, 1936.02.05.,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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