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체절명의 한국사

나당전쟁으로
한데 뭉친 한민족

나당전쟁으로<BR />한데 뭉친 한민족
글 김종성 역사작가


나당전쟁으로 

한데 뭉친 한민족


신라와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는 손 잡았지만, 나중에는 반목하고 전쟁까지 벌였다. 역사는 이 일을 나당전쟁으로 기억한다. 이러한 갈등의 조짐은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660년부터 나타났다.


alt

매소성전투 기록화(전쟁기념관 제공)


당나라의 야심과 연합의 위기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은 “당나라 사람들이 백제를 멸망시킨 뒤 사비성 언덕에 진영을 꾸리고 은밀히 신라 침공을 계획하고 있음을 (신라 조정이) 알게 됐다”고 말한다. 이에 대비해 신라에서는 태종무열왕 김춘추 주재하에 긴급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신라군을 백제 부흥군으로 변장 시켜 당나라군을 공격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김유신은 여기에 동조하면서 “개는 주인을 무서워하지만, 주인이 제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어려움에 직면하여 어찌 자기 목숨을 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며 군사행동을 제안했다. 이러한 움직임이 당나라 군영에 포착되고, 당나라군은 일부 병력만을 남긴 채 철군했다고 『삼국사기』는 말한다. 그래서 이때는 충돌이 발생하지 않았다.

나당연합은 백제 멸망 12년 전인 648년에 신라 사신 김춘추와 당나라 태종(당 태종) 이세민의 합의로 결성됐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편에 따르면, 이때 양측은 ‘평양 이남은 신라가, 이북은 당나라가 갖자’는 데 동의했다고 한다. 합의 당사자인 당 태종은 안시성전투의 부상으로 후유증을 앓다가 649년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660년에는 그의 아들 고종이 황제로 있었다. 당 태종이 사망한 뒤였지만, 여전히 양국의 약속은 유효했다. 그렇기 때문에 당나라는 백제 땅을 신라에게 넘겨야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백제 고토를 넘기기는커녕, 도리어 신라 땅까지 빼앗을 움직임을 보였다. 그래서 신라 조정에서 선제공격론까지 나왔던 것이다.

신라는 당나라가 신라 땅을 빼앗지 못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당나라가 백제에 도독부라는 행정관청을 설치하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당나라는 이런 식으로 형식상으로나마 백제 땅을 자국 행정구역에 포함시켰다. 물론 도독만 임명했을 뿐, 백제 유민들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지는 않았다. 백제 유민들은 토착 세력의 지배하에 놓였다. 그 뒤 당나라의 야욕이 신라를 향해 다시 표출됐다. 백제가 멸망하고 3년이 지난 663년, 당나라가 김춘추의 아들인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에 임명한 것이다. 할 수 있다면 신라 땅까지 빼앗았겠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았기에 계림주대도독을 임명하는 선에서 그쳤다. 이 같은 조치가 신라 국권에 영향을 주지는 않았으나, 당나라의 야심을 명확히 드러내는 일임은 분명했다.


신라와 당나라의 충돌

신라와 당나라는 상호 불신을 해소하지 못한 상태에서 또 한 번 나당연합을 가동했다. 668년 고구려 침공을 위해서였다. 연합의 재가동은 결국 고구려 멸망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백제 멸망 뒤에 그랬던 것처럼 이들의 동맹은 동요했다. 당나라는 고구려 땅에 도독부보다 한 단계 높은 도호부를 설치했다. 나아가 평양 이남을 신라에게 넘기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이로 인한 긴장 상태가 양국관계를 험악하게 만들었고, 나당전쟁의 발발로 이어졌다.신라는 한민족을 통합하고 싶은 열망이 강했다. 그 열망이 아무리 강렬하다 해도 동아시아 최강 당나라의 벽부터 넘지 않으면 안 됐다. 당나라를 상대로 아무 때나 전쟁을 벌일 수는 없었다. 조건이 성취돼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 조건이 고구려 멸망 즈음에 당나라 서쪽에서 형성됐다. 티베트 고원의 움직임이 바로 그것이다. 당나라가 백제·고구려 침략에 눈을 돌린 사이, 티베트 고원의 토번 왕국은 당나라 서쪽의 토욕혼 같은 국가들을 공략하며 세력을 급속히 팽창시켜갔다. 토번의 기세는 고구려 멸망 즈음해서 한층 더 거세졌다.
토번의 중앙아시아 공략이 당나라와 중동·유럽을 잇는 비단길(실크로드·오아시스길)을 위협했기 때문에 당나라는 토번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원전 2세기에 한나라가 개척한 비단길은 세계 최대 무역로로 성장하면서 중국의 번영을 가능하게 했다. 이 길을 빼앗기면 당나라의 국제적 지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나라는 동쪽의 백제·고구려에 투입했던 역량의 상당 부분을 토번이 있는 서쪽으로 돌렸다. 고구려 멸망 이듬해인 669년에 안동도호부 도호 설인귀를 토번과의 전쟁에 차출한 것도 그 때문이다. 당나라가 서쪽으로 눈길을 돌리면서 신라는 좀 더 유리한 조건에서 나당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다.


매소성전투에서 발휘된 한민족의 단결력

나당전쟁은 676년 당나라가 고구려에 설치했던 안동도호부와 백제에 설치했던 웅진도독부를 한반도 밖으로 이동시킴에 따라 종결됐다. 안동도호부와 웅진도독부를 폐지하지 않고 한반도 밖으로 옮긴 것은 자국의 실패를 감추기 위한 상징적 조치였다. 이 조치로 인해 나당전쟁이 종결됐다고 볼 수 있지만, 전쟁의 발발 시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670년에 신라의 선제 공격으로 발발했다는 견해가 우세하지만, 669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671년이나 672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고구려 멸망 뒤에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고구려 유민 연합군 대 당나라·말갈·거란 연합군의 충돌이 잦았다. 이 때문에 ‘신라가 말갈군과 싸운 것도 나당전쟁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느냐’ 등의 문제를 놓고 학설이 대립하게 된 것이다. 
어느 전투를 최초로 봐야 하는가를 두고는 논란이 벌어질 만하지만, 당나라·말갈·거란 연합군이 패배를 인정하고 철군하도록 만든 결정적 전투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거의 없다. 전쟁의 향방을 가른 결정적 전투는 아주 명확히 기억되고 있다. 음력으로 문무왕 15년 9월 29일(양력 675년 10월 23일)의 매소성전투가 바로 그것이다. 매소성전투에서 당·말갈 연합군인 말갈족 추장 이근행의 20만 명 병력이 격파됐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편은 “이근행이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매소성에 와서 주둔하므로 우리 군대가 공격해서 쫓아버리고 전마 3만 380필을 획득했으며, 그 밖의 병기를 얻은 것도 이와 비슷했다”라고 말한다. 당·말갈 연합군의 주력은 말갈군과 거란군이었다. 매소성전투는 이 연합군의 기를 꺾는 역할을 했다. 
반면 영웅적인 희생들도 있었다. “말갈이 적목성을 에워싸니 현령 탈기가 백성을 거느리고 맞서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모두 함께 죽었다. 당나라 군대가 석현성을 포위하여 빼앗으니 현령 선백과 실모 등이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다”고 위 문무왕 편은 말한다. 
나당전쟁에서 신라인들만 목숨 걸고 싸운 게 아니다. 고구려 부흥군도 힘을 다해 싸웠다. 부흥군의 뜻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여기서 발휘된 한민족의 단결력은 동아시아 최강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더 많이 밀어내는 데 기여했다. 또한, 이 전쟁은 대조영이 고구려 멸망 30년 만인 698년에 발해를 세우고 고구려 고토 대부분을 수복하는 데도 간접적인 역할을 했다. 신라가 한반도에서 당나라를 추방하지 않았다면, 대조영은 건국 과정에서 당나라의 견제를 좀 더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당전쟁으로 인해 한반도와 만주에서 당나라의 영향력이 감소했고, 이것이 신라·발해의 남북국시대가 펼쳐지는 데 기여한 측면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