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

3·1운동 아이콘, 유관순의 부모님
유중권과 이소제를 아시나요

3·1운동 아이콘, 유관순의 부모님 <BR />유중권과 이소제를 아시나요
글 김형목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3·1운동 아이콘, 유관순의 부모님 

유중권과 이소제를 아시나요


3월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유관순이다. 열여덟 어린 나이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옥사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유관순의 부모님은 어떨까? 유중권과 이소제는 위대한 독립운동가 유관순의 부모이자, 그들 역시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가였다.

101주년 3·1독립운동을 맞이하다

2019년은 3·1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그날의 의미를 되새겼다. 다채로운 기념행사와 학술회의로 시대 변화에 부응한 역사 인식을 크게 심화시킬 수 있었다. 더불어 건전한 민주시민으로서 각자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는 결정적 계기였다. 자유와 독립을 향한 열정은 소수의 영웅만이 아니라 한민족이 혼연일체가 된 역사적인 산물이었다. 특히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재조명과 평가는 한국사를 새롭게 인식하는 에너지원으로 다가왔다. 

3·1독립운동 결과는 민주공화제를 지향한 임시정부를 탄생시켰다.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중추 기관으로서 일제와 투쟁하면서 민주주의 실행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은 어려운 투쟁을 극복한 한민족이 이룬 장엄한 서사시이다. 결국 3·1독립정신은 1세기가 지나 세계사 속에 우뚝 선 오늘날 대한민국의 든든한 정신적인 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친일세력 발호에 분개하다
우리에게 유중권과 이소제 부부는 조금 생소한 인물이다. 이들은 3·1독립운동 아이콘, 유관순 열사의 부모님이다. 유관순 열사의 부모님은 관련 분야 연구자들만 알고 있는 정도여서, 그 이름은 약간 당혹스럽기까지 하다.아버지 유중권(1863~1919)은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에서 유빈기와 전주이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장하여 청주한씨와 결혼하여 1897년 딸 유계출을 낳았으나, 출산 후 부인이 질병으로 사망하는 비운을 맞았다. 슬픔을 달래며 이소제(1875~1919)와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1899년에는 장남 유우석이 태어났다. 이어 유관순(1902~1920), 유인석(1904~1971), 유관석(1911~1944) 등을 낳아 다복한 가정을 이루었다.그는 양반이었지만,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다.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무기력한 생활에 안주하거나 돈을 버는데 몰두하지 않았다. 을사늑약 이후 친일세력인 일진회원 발호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이들은 일본인을 앞세워 토지 수탈과 더불어 아우내장터 유통권을 장악하는 등 온갖 행패를 서슴지 않았다. “일진회 목천군 지회장은 거리를 다니며 재물을 토색하고 북면에 사는 이 주사를 붙잡아 두드려 패서 금전과 미곡 등을 빼앗으니, 이 주사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칼로 목을 찔러 사경에 이르게 되었다”라는 신문 기사에서 당시 상황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더욱이 1907년 일본군은 의병 토벌을 구실로 주민들 집과 교회를 불태우는 동시에 사람들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유중권은 이 광경을 목격하면서 치를 떨었으나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아우내 지역 변화를 주도하다
을사늑약 이후 식민지화에 대한 위기의식은 지역사회로 크게 확산되는 분위기였다. 서울에 거주하는 세력과 연계된 계몽론자들은 자강단체 지회 조직에 앞장섰다. 이들은 기호흥학회 지회 설립 인가에 노력을 기울였다. 본회는 유병필의 동의로 1908년 8월 통상회에서 시찰을 중지하고 설립을 인가했다. 임원과 조직 등을 보고하자, 9월 27일 특별총회를 통하여 지회장을 승인했다. 당시 지회원은 81명에 달할 정도로 컸다. 지회는 지회장, 부회장, 총무, 서기, 교육부, 재정부, 회계, 간사, 찬무원, 평의원 등으로 구성되었다.
지회의 주요 활동은 역시 사립학교 설립에 의한 근대교육 보급과 강연회·연설회를 통한 민지 계발에 있었다. 목천 지역에도 1907년에 보성학교·진명학교·병진학교(후에 흥호학교로 바뀜) 등이 설립되었다. 유중권은 흥호학교 운영에 참여하는 한편 장남 유우석을 이 학교에 입학시켰다. 또한 국채보상운동에도 의연금을 내는 등 국권 회복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당시 목천군수는 흥호학교를 방문하여 “국가의 기초”란 연설로 임직원과 학생 등을 격려했다.한편 공주를 거점으로 활동한 케이블과 사애리시 등의 선교 활동도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유관순 할아버지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한편 지령리교회를 세웠다. 유씨 일가는 가치관의 변화와 더불어 여성 인권에 관심을 보였다. 일가에게 근대교육은 국권을 회복하는 지름길로 인식되었다. 유관순이 영명여학교와 이화학당에서 근대학문의 수혜를 누릴 수 있었던 배경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alt

병천리 성공회 여자 성도(1910년대)

alt

케이블 선교사(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alt
지령리교회 신자들 국채보상운동 참여자 명단 (『대한매일신보』, 1907.08.16.)


지방으로 확산되다
서울·평양·정주·원산 등지에서 시작된 3·1독립운동은 지방으로 ‘쓰나미’처럼 파급되었다. 목천 지역에서는 3월 14일 목천보통학교 학생 120여 명이 교정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인근 천안 지역은 3월 20일 직산 양대리 시장에서 봉화를 올렸다. 광명학교 교사와 학생, 직산 금광 광부 등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쳤다. 27일에는 600~700명이 다시 직산 시장에서 시위행진을 감행하는 등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성환에서는 31일 밤에 수천 명이 모여 시장을 활보하는 등 독립에 대한 염원을 표출했다. 이러한 소식은 곧장 인근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아우내 만세운동은 홍일선·조인원·김교선·유중권·유중무 등에 의해 계획되고 있었다. 이들은 아우내 장날인 4월 1일을 만세시위 날로 정하여 각자 임무를 분담하였다. 한편 유관순은 이화학당 여학생으로 ‘5인 결사대’를 조직하여 서울에서 시위행렬에 가담했다. 휴교령과 함께 기숙사가 폐쇄되어 사촌 언니 유예도와 함께 기차로 3월 13일경 고향에 내려왔다. 그는 부모님과 숙부에게 서울 상황을 소상하게 알렸다. 그리고 사촌 언니와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민들 참여를 권유하는 동시에 태극기 등을 만들었다. 유중권과 조인원 등은 3월 31일 저녁에 천안 길목인 수신면 산마루와 진천 고갯마루에 횃불을 올려 내일의 거사를 알리도록 했다.


아우내 장터가 핏빛으로 변하다
마침내 4월 초하룻날이 밝았다. 초봄이라 기온이 낮아 약간 쌀쌀한 날씨였다. 유중권과 이소제 부부를 비롯한 마을 주민들은 아침밥을 먹고 일찍 장터로 향했다. 정오가 조금 지났을 무렵 홍일선·김교선·이백하 등은 장터에 오는 주민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부탁했다. 장터를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참여를 적극적으로 권유하였다. “어디 가세요? 오늘 독립만세를 부릅니다. 장터를 떠나지 마세요.” 오후 1시경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태극기를 든 조인원이 나타났다. 그는 곧바로 쌀가마니에 올라서서 주머니에서 꺼낸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이어 유중권·유중무 형제와 조병호 등은 앞장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호응함으로 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병천 헌병주재소 소장과 부하 등은 현장에 출동하여 해산을 종용하였으나 시위행렬은 멈추지 않았다. 헌병들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시작하자 부상자가 속출했다.
유관순은 헌병에게 달려들어 사격을 못 하도록 저지하였다. 시위대는 부상자에 대한 응급조치와 동시에 순국자의 시신을 주재소로 운구했다. 시위대 100여 명은 주재소에 도착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다시 외쳤다. 사상자 발생에 대한 항의와 구금자 석방을 요구하면서 유치장 벽을 파손했다. 이 과정에서 유중권은 헌병의 총검에 옆구리와 머리를 찔려 빈사 상태에 빠졌다. 유중무는 형을 업고 주재소로 가서 치료해달라며 항의했다.
군중들이 주재소로 계속 몰려와 참여 인원이 3천여 명으로 증가했다. 시위대는 헌병의 탄약함을 잡아당기고 ‘소장을 죽이라’고 외치면서 소장을 끌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헌병이 권총을 몇 발 쏘며 저항하자 시위대는 피신하거나 주재소 반대편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헌병들은 시신을 주재소 밖으로 내던졌다. 만행에 격분한 유중무는 두루마기 끈을 풀어 헌병에게 항의하면서 형을 주재소 사무실로 옮기려고 했다. 헌병보조원이 이를 저지하려 하자 “너는 보조원을 몇십 년 하겠느냐?”며 질책하였다. 유관순도 아버지 중상을 확인하고 “자기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하는 데 어째서 총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이소제도 주재소를 찾아가 불법적인 행위를 질책하다가 총탄에 희생되고 말았다. 
이날 일제의 잔혹한 탄압은 다음을 통해 엿볼 수 있다.

“1일 오후 1시 병천시장에서 약 3천 명의 군중이 구한국기를 선두에 세우고 독립운동을 개시하여 동지 헌병주재소에 내습하여 폭행을 극렬히 하고 그치지 않아 발포 해산했다. 다시 일어날 우려가 있어 헌병 하사 1명과 보병 장교 이하 6명이 급행하여 경계 중 오후 4시에 다시 주재소에 쇄도하여 철조망을 파괴하고 구내에 난입하여 소방기구를 탈취하여 고야마(小山) 헌병오장을 붙잡아 가려고 하며 격투 끝에 오장을 탈환하고 응원대의 협력하에 발포 해산시켰다.” 

평화적인 시위를 일제는 총칼로 진압하는 야만성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만세운동을 진압한 후에도 탄압은 계속되어 주민들을 공포 속으로 내몰았다.


alt

병천 헌병주재소


참된 삶이란 무엇인가
중상을 입은 유중권은 집에서 치료를 받다가 다음날 4월 2일에 순국하였다. 부부의 아름다운 인연은 일제에 의한 참혹한 순국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불행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유관순은 부모님 순국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주동자로 ‘낙인찍힌’ 현실에서 사촌 언니와 함께 일제 감시를 피해야만 하는 운명에 놓였다. 일제 군경은 수시로 찾아와 가족들을 괴롭혔다. 이제 자신조차 숨을 곳도 없었다.

오빠 유우석은 공주 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공주 감옥에 구금되었다. 그곳에서 유관순과 유우석은 운명적으로 만났다. 남동생들은 할아버지마저 사망해 고아 신세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1920년 9월 유관순은 싸늘한 죽음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무덤마저 사라져 원혼이 구천을 떠돌고 있다.

흔히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유관순 일가는 이를 그대로 보여주는 전형이다. 외형상으로 너무나 정확한 표현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희생적인 인생 항로는 역사 무대에서 다시 빛을 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