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외국인 한국독립운동가,
누구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외국인 한국독립운동가, <BR />누구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외국인 한국독립운동가, 

누구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1945년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았지만,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사건, 해결되지 못한 문제, 기억해야만 하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사를 과거에 머문 역사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다루며, 오늘도 신문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독립운동 및 일제강점 이슈를 소개한다.


우리가 몰랐던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들

지난 2월, 두 명의 외국인 한국독립운동가가 주목을 받았다. 하나는 마지막 외국인 생존 한국독립유공자였던 중국인 쑤징허(蘇景和)가 향년 102세로 별세했다는 소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였던 맥큔이었다. 쑤징허는 1940년대 중국 난징(南京) 내 일본군의 동향을 수집하고 한국광복군의 모병·입대 청년 호송 등의 다양한 비밀임무를 수행한 공을 인정받아 1996년에 독립장을 받았다. 맥큔의 한국 이름은 윤산온인데, 1905년 9월 선교사로 한국에 건너와 3·1운동 지원, 신사참배 거부운동 등 한국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바를 인정받아 1963년 독립유공자가 되었다.

이렇듯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외국인들이 적잖은데,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들을 잘 모른다. 그리하여 한국독립유공자로 서훈받은 외국인들의 현황을 살피고, 이들을 대내외에 알리며 기릴 방안 몇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외국인 한국독립운동가의 현황

2020년 2월 현재 외국인 독립유공자는 모두 70명이다. 나라별로 중국 33명, 미국 21명, 영국 6명, 캐나다 5명, 아일랜드·일본 각 2명, 프랑스 1명 순이다. 건국훈장 훈격별로는 대한민국장 5명, 대통령장 11명, 독립장 34명, 애국장 4명, 애족장 13명, 건국포장 3명 등이다.

외국인을 독립유공자로 처음 포상한 것은 1950년 삼일절을 맞아 주미한국대사관에서 우리나라 독립과 자유를 위해 희생적 봉사를 한 미국인 10명, 영국인 2명 등 12명에게 대한민국 최고훈장인 ‘태극훈장’을 수여하면서부터이다. 당시 1949년 4월 공포된 ‘건국공로훈장령’이 시행되고 있었지만 외국인의 경우에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대상자는 헐버트·베델·스태거즈·밀러·알렌·모우리·해리스·윌리엄·더글라스·돌프·윌리엄스·러셀 등이었다. 이 가운데 일제의 한국 침략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미국 의회에 일제 식민통치의 잔학성을 폭로한 헐버트, 영국 신문기자로 한국에 건너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고 일제 규탄 기사를 게재하였던 베델, 주한미국공사로서 한말 독립운동을 지원한 알렌,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모우리 등을 제외하고는 대개 이승만이 미국에서 활동할 당시 도움을 주었거나 임시정부 승인을 위해 애쓴 분들이다.

이후부터는 ‘태극훈장’ 대신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캐나다 의료 선교사로 한국에서 활동하고 귀국 후 임시정부의 승인에 힘썼던 애비슨이 1952년 4월 외국인으로서는 처음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이어 1953년 11월, 대만의 장제스 총통이 뒤를 이었다. 당시 이 훈장을 받은 국내 인사는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 단둘 뿐일 정도로 그 수가 적었다.

잠시 주춤하던 외국인 서훈은 10년이 지난 1963년, 중국 안둥의 ‘이륭양행’에 임시정부 교통국 사무소를 설치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한 쇼와 위에서 언급한 맥큔이 공훈을 인정받으면서 다시 이어졌다. 1966년에는 중국인 쑹메이링(宋美齡)·천궈푸(陳果夫)·천청(陳誠) 등이, 1968년에는 쑨원(孫文)·천치메이(陳其美)·천리푸(陳立夫)·뤼텐민(呂天民)·황쥐에(黃覺)·후한민(胡漢民)·장지(張繼)·린썬(林森)·류융야요(劉詠堯)·모덕후이(莫德惠)·황싱(黃興)·주칭란(朱慶瀾)·쑹자오런(宋敎仁)·장췬(張群)·궈타이치(郭泰棋)·마수리(馬樹禮)·탕지야오(唐繼堯)·다이리(戴笠)·그리어슨·스코필드·바커·피치·마틴 등 23명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다. 중국인들은 1910년대 초 신규식과 함께 동제사를 조직, 활동하였거나 국민당 출신으로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광복군 창설·운영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준 인물들이고, 서양인 대부분은 3·1운동과 관련한 경우이다.이후 외국인 독립유공자 서훈은 부정기적으로 이뤄졌다. 숫자도 크게 줄었다. 1969년에는 천주교 난징교구 총주교로서 한국독립운동을 후원하였던 위빈(于斌)이, 1970년에는 중국 국민정부 입법원장으로 임시정부 승인을 촉구하고 한중문화협회를 창립한 쑨커(孫科)가, 1977년에는 광복군 창설과 물자를 원조한 쉐웨(薛岳)·주자화(朱家?)가, 1980년에는 한중문화협회 간부였던 쓰투더(司徒德)·왕주이(汪竹一) 등이, 1996년에는 쑤징허와 1932년 윤봉길의거 후 김구의 피난을 도왔던 추푸청(?補成)이 독립유공자가 되었다. 1999년에는 제주도에서 도민들의 항일의식 고취에 힘썼던 도슨·스위니·라이언 등 천주교 신부들과 광복군을 지원하였던 후쭝난(胡宗南) 등이 선정되었다. 2004년에는 한국인 독립운동가를 변호하였던 일본인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2010년에는 군산에서 3·1운동을 주도하였던 린튼, 2014년에는 영국 신문기자로 취재한 내용을 책으로 발간하여 일제의 침략상을 세계에 알린 맥켄지 등이 공훈을 인정받았다. 

2015년에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10명이 대거 독립유공자에 선정되었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린 영국인 기자 스토리, 1919년 이후 외교 무대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거나 한국친우회를 조직, 활동한 톰킨스·벡·화이팅·토마스·구타펠·스펜서·마랭 등과 임시정부 승인과 한미협회 회장을 역임한 크롬웰 등이다. 2016년 독립운동가 김성숙의 부인이자 충칭에서 임시정부 외무부 부원으로 활동하였던 두쥔후이(杜君慧),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하고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에 참여하였던 리수전(李淑珍), 2018년 일본에서 박열과 함께 무정부주의 활동을 펼쳤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까지 연이어 독립유공자가 되었다. 2019년도에는 해당자가 없었다.


세계인이 도왔던 한국의 독립운동을 기억하는 법

앞서 언급한 외국인 한국독립운동가들 가운데 국민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외국인 독립유공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결과다. 이에 대한 문제점과 대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들을 기리는 다양한 추모 행사를 개최했으면 한다. 1995년 8월에 해방 후 처음으로 외국인 독립유공자 합동 추모식이 열렸지만 일회성에 그쳤다. 이들을 기리는 추모 시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외국인 독립유공자 가운데 국내에 묘지가 있는 인물은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힌 베델, 헐버트와 국립묘지에 있는 스코필드 3명뿐이다. 국립묘지에 위패만이라도 봉안하고 합동 추모 시설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둘째, 1992년부터 국가보훈처가 시행하고 있는 ‘이달의 독립운동가’ 12명 중에 외국인을 최소 한 명이라도 포함했으면 한다. 2013년 7월에서야 헐버트가 처음 선정되었고, 이후에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외국인은 베델(2014.08.), 쇼(2015.04.), 스코필드(2016.03.), 피치(2018.01.), 맥큔(2020.02.) 등 다섯 명에 불과하다.

셋째, 외국인 독립운동가의 독립운동 지원 활동을 알리는 단행본 편찬이나 논문 작성에 적극적인 재정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 이들과 관련한 논저는 몇몇 인물에 집중되어 있다. 대한민국장을 받은 5명 가운데 쑨원·장제스 정도의 저술이 있지만, 그것도 역서이다.

넷째, 중국인 사회주의자로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했거나 1930~1940년대 한중연합군 및 조선의용대와 함께 활동했던 중국군의 발굴도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지금까지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중국인들은 대개 국민당 출신들이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한반도를 넘어 전 세계에서 전개되었고, 해당국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우리의 독립을 돕기 위해 기꺼이 헌신적 봉사를 아끼지 않은 외국인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국의 독립운동이 제국주의에 맞섰던 세계 평화운동의 하나였음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