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역사

한국의 흡혈귀와
구세주

한국의 흡혈귀와<BR />구세주
글 은예린 자유기고가


한국의 흡혈귀와 구세주

오적암살단 의거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한국은 외교권을 잃었다. 일본에 나라를 바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이 부당한 늑약에 찬성한 자는 다섯 명. 사람들은 이들을 ‘을사오적’이라 불렀다. 한국의 적은 한국인의 손으로 처단함이 마땅했다. 이듬해 한국에서 친일파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비밀결사가 결성됐다. 오적암살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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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 처단을 기도한 자신회 동지(1907)



부끄러운 역사의 한 페이지, 을사늑약과 을사오적

그저 망각의 늪에 빠져 잊어버리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비참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떠올려 본다. 우리는 일본에게 반드시 반성과 사과를 받아야 한다. 1905년 쓸쓸한 가을, 조선의 역사를 관장하는 수레바퀴는 멈추고 말았다.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것이다. 일본과 운명을 함께한 ‘을사오적’이 이에 협조하면서 한국이란 나라는 세계 지도에서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을사오적은 한국의 상류층 엘리트로, 부끄럽게도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바닥난 인물들이었다.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등이 바로 파렴치한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일제가 강제로 국권을 빼앗는데 협조한 대가로 ‘조선귀족령’에 따라 일제 작위를 수여받았다. 그리고 그것에 상응하는 부와 명예, 권력을 평생 보장받았다. 그들이 누린 호의호식은 한국인의 눈물과 피, 고통과 바꾼 몫이었다. 이후 한국인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창살 없는 감옥” 속에서 살아야 하는 운명에 직면하였다. 나아가 협박과 강제에 의해 위안부로, 징용으로, 징병으로, 심지어 생체 실험 대상이 되어 인간 이하의 멸시와 학대를 견디며 피눈물 속에서 살았다.

일제강점기에 사실상 일본인보다 우리 민족을 더 괴롭히고 부끄럽게 했던 금수와 같은 존재는 을사오적을 포함한 친일파들이었다. 그들은 일제에 대를 이어 충성을 맹세하며, 피를 나눈 민족의 가슴에 생채기를 냈다. 조국을 찾겠다고 목숨 바친 애국지사를 밀고하고 가혹하게 고문하는 등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렇게 암울한 시대에 같은 민족이 서로 껴안고 힘을 모아도 부족했지만, 현실은 버겁기만 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한 항일 비밀결사들이 결성되었다. 이른바 ‘오적암살단(五賊暗殺團)’과 ‘자신회(自新會)’이다. 이들은 1906년 조직되어 비록 짧은 시간 활동하고 사라져버렸지만, 나약한 조국을 향한 그들의 사랑과 애국심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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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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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회의’ 모형. 1908년 발행된 소설 『금수회의록』에 기반한다. 
소설은 당대 사회를 비판하는 우화로, 을사늑약과 을사오적 및 일본을 규탄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긴 오적암살단의 활동, 기산도와 김석항의 애국충절

오적암살단의 일원인 기산도, 김석항, 김일제, 나인영, 홍필주 등은 용기 내어 을사오적을 향해 칼을 던졌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을사오적을 처단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의로운 항거에도 을사오적은 승승장구했다.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당시 기산도는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인 이근택의 집을 습격해 그의 가슴에 칼을 꽂았으나, 이근택은 중상에 그치며 치료 끝에 목숨을 부지했다. 체포된 기산도는 “오적을 살해하려는 사람이 어찌 나 혼자이겠느냐? 탄로 난 것이 그저 한스러울 뿐이다”라고 당당하게 자신의 굳은 의지를 밝혔다. 그는 김석항을 비롯한 인물들과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석방되어 의병활동을 전개하고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으며 민족운동에 투신하다가 계속되는 옥고로 병사하고 말았다. 오적암살단을 지휘하던 김석항도 고문으로 옥사하는 비극을 맞았다.


“…(전략)…충성심이 부족하여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옥중에서 목숨이 다하게 되었다. 죽음을 맞이해도 눈을 감을 수가 없고 원통한 영혼은 떠나지 않으니 다시 국권의 회복과 역적들의 처단을 볼 것이다.”


이는 김석항이 남긴 유언의 일부이다. 그는 죽음 앞에서도 오직 나라의 독립만을 외쳤다.



자신회 주춧돌 나인영과 동지들의 활동 

1907년 2월 나인영과 오기호를 중심으로 비밀 항일결사대 자신회가 조직되었다. 자신회는 200여 명의 회원으로 이루어진 비밀결사체 중 하나였다. 이들의 을사오적 처단은 번번이 미수에 그쳤는데, 1907년 3월 25일 다시 거사를 계획한다. 을사오적을 포함, 궁내부대신인 이재극까지 육적을 처단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강력한 무기로 호위하는 감시망 속에서 계획은 다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자신회 회원인 이홍래가 그나마 권중현을 저격했으나 또한 실패했다.  

을사오적 척살의거가 실패로 끝나자 재차 거사를 도모하고자 박대하 등에게 행동대원 모집을 지시하였다. 와중에 체포된 서창보(徐彰輔)는 의거 전말을 토로하였기 때문에 무고한 동지들만 고통을 당하는 위기에 봉착했다. 나인영과 오기호 등은 부득이 최동식(崔東植)을 시켜 자현장(自現狀)을 작성하게 하고 이광수와 김영채에게 뒷일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4월 1일에 자현장과 관계문서를 휴대하고 최인식 등과 함께 평리원에 자수했다. 7월 3일 평리원에서 각각 유배형 10년과 5년을 선고받았으나 12월 27일 특사로 석방되었다.

을사오적 척살의거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매국대신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국민들 사이에서는 거사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분하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군대해산을 거부한 대한제국 군인들은 의병진에 합류하는 등 전술적인 변화와 더불어 항일전 선봉장으로서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시민들도 상가를 철시하는 등 이에 동조하였다. 그리고 의열투쟁이 새로운 독립운동 방법론으로 정립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맞았다. 정재홍 자결 순국, 박승환 자결 순국, 전명운·장인환의거, 안중근의거, 이재명의거 등은 이러한 정신을 계승하는 가운데 전개될 수 있었다.

이후 나인영과 오기호 등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종교를 창시하는데, 그것이 대종교이다. 나인영이 바로 대종교 제1대 교주로 잘 알려진 나철이다. 민족 지도자들은 종교 차원을 넘어 항일 독립운동에 나서기 위해 대종교에 입교했다. 당시 독립운동가 중 대종교 관련 인사가 상당수였다. 나철, 김교헌, 윤세복 등은 교주로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또한 서일, 박은식, 신채호, 이동녕, 이상룡, 이상설, 김좌진, 박찬익, 김두봉, 신규식, 안희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우국지사와 독립운동가가 대종교인이었다.

이밖에 자신회 회원 중 서정희를 비롯한 일부는 광주지역 3·1운동에 참여하였고, 일제치하에서 고생하는 우리 농민을 위해 계몽운동을 주도하며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전개해갔다. 나인영은 일제의 살벌한 감시 속에서 대종교 활동과 을사오적을 암살하려는 시도를 지속했으나 실패하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유서를 남긴 채 54세 나이로 자결했다. 하지만 만주벌에 든든한 토대를 마련한 대종교는 무장단체 중광단의 뿌리가 되었다. 중광단은 청산리전투에서 우리가 승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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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회를 조직하고 대종교를 창시한 나인영(나철)



을사오적의 죽음과 오적암살단의 의의 

오적암살단의 칼끝에서 빗겨난 을사오적은 당시로는 꽤 장수한 나이까지 살며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 이근택 55세, 이지용 59세, 박제순 59세, 이완용 69세, 그리고 이홍래의 저격을 피한 권중현은 무려 81세까지 살았다. 그들이 눈 감는 순간까지도 나약한 국민과 모진 고문을 견디며 목숨을 조국에 바쳤던 독립운동가는 운명의 심판을 기대했지만, 야속하게도 을사오적의 운명을 가른 선택은 성공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성공은 일제가 점령한 한국에서 그들이 살아있을 때까지만 유효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는 명언을 기억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역사의 심판을 지속하는 대화는 그들이 관 속에 들어간 후부터 지금까지 각종 역사서와 언론을 통해 ‘매국노’, ‘민족 반역자’, ‘친일파’라는 엄중한 비판으로 이어지고 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 않았던가?비록 오적암살단의 마지막이 자결과 사형으로 맺어지며 패배자처럼 보였을지라도, 그들의 기개는 을사오적을 비롯한 친일세력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드높은 기상과 의지를 국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음을 표하고 싶다.

무엇보다 의병운동과 동시에 계몽운동을 접목시킨 형태로 의열투쟁을 전개한 것은 그 의미가 특별하다. 을사오적 암살에는 실패했지만 이후 독립운동의 기반이자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여 민족해방운동을 이끌었던 점에서 더욱 값진 활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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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왼쪽부터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