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터전

미국 언론의 3·1운동 보도

미국 언론의 3·1운동 보도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미국 언론의 3·1운동 보도

Ⅲ. 3·1운동의 발발과 재미 한인의 독립운동 ③


국내에서 민족 대표들이 비밀리에 3·1운동을 준비할 때 정동감리교회 목사 현순은 해외에서 외교와 통신을 담당할 목적으로 2월 23일 서울을 떠나 3월 1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최창식, 신규식, 이광수, 신헌민, 김철 등과 교류하던 중 3월 4일 아침 국내 3·1운동 발발 소식을 들었다. 그 즉시 상하이 거류 한인들을 소집해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3·1운동 소식을 전 세계에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내외 주요 한인 대표자들을 상하이로 불러 모아 향후 진로와 방책을 협의하고, 독립운동을 통할할 최고기관 설립을 모색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미국 언론의 3·1운동 보도와 확산
현순의 전보는 3월 9일 새벽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와 호놀룰루의 하와이지방총회에 도착했다. 이 소식을 전달받은 중앙총회장 안창호는 3월 9일 오전 11시 중앙총회 임원진과 협의한 후 곧바로 미국의 각 언론사에 3·1운동 발발 소식을 알렸다. 그 결과 3월 10일부터 미국 전역의 주요 언론들은 3·1운동 발발 소식을 일제히 보도하기 시작했다.3·1운동 소식이 전파된 후 미국 언론들은 이후 국내의 통신원과 선교사들이 전한 소식을 기반으로 3·1운동의 세부 소식과 아울러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한 일제의 만행을 속속 보도하였다. 그러던 중 The Sacramento Bee (The Daily Bee의 후신)의 발행인 겸 편집장이자 연합통신(AP) 아시아 지국장이던 맥클래치(V. S. McClatchy; 1857~1938)가 3·1운동 영문 독립선언서를 가져와 처음 미국 언론에 알렸다. 
당시 맥클래치는 부인과 함께 중국과 만주의 안동현을 거쳐 여행차 한국에 왔는데, 그때가 3월 3일부터 3월 6일이었다. 이 짧은 기간 동안 그는 한국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실상을 직접 목격했다. 또 한국에서 활동 중인 구미의 여러 외국인을 만나 한국 정세에 관한 생생한 소식을 듣고 확인하였다.
맥클래치는 서울에서 영문 독립선언서를 입수해 비밀리에 도쿄로 가지고 갔다. 도쿄에서 The Japan Advertiser와 연합통신사(AP)에 영문 독립선언서를 보도하도록 했으나 일본 당국의 삼엄한 검열 때문에 성사시키지 못했다. 그러다가 미국 본토로 가기 위해 하와이 호놀룰루에 잠시 체류하던 중 비밀리에 휴대한 영문 독립선언서를 현지 The Pacific Commercial Advertiser (Honolulu Advertiser의 전신)에 소개하였다. The Pacific Commercial Advertiser는 3월 28일 자에 처음으로 영문 독립선언서를 보도하였고, 아울러 맥클래치의 3·1운동 증언 내용을 1면 전면 기사로 실었다.
The Pacific Commercial Advertiser가 ‘MANIFESTO’란 이름으로 처음 밝힌 영문 독립선언서는 이후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 배포된 영문 독립선언서의 원형이라 할 정도로 완벽한 문장이다. 이 영문 독립선언서가 누구에 의해 작성되어 어떻게 그에게 전달되었는지는 맥클래치 도 분명히 밝히지 않아 불분명하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독립선언서가 해외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총독부를 비롯한 일본 당국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검열할 만큼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3·1독립선언서는 중국의 『민국일보』가 3월 9일 자에 처음으로 중국어로 된 선언서를 보도한 이후 『신문보』 3월 10일, 『익세보』 3월 11일, 『원동보』 3월 18일 순으로 중국 언론에 보도되었다. 『민국일보』 3월 28일 자에서 한국인들이 독립선언서를 한국어 외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 등 4개의 언어로 만들어 배포했다고 한 것을 보면 적어도 초기엔 네 가지 언어로 작성되었고 이후 계속 번역된 것으로 보인다.
맥클래치는 1919년 4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마자 AP통신을 이용해 전 미국 언론에 긴급으로 영문 독립선언서와 3·1운동의 실상을 알렸다. 그리고 미국 언론은 4월 3일 자부터 독립선언서의 원문을 소개하며 3·1운동의 실상을 비중 있게 보도하였다. 그의 영향 때문인지 4월부터 미국 언론의 한국독립운동 보도는 매우 활기를 띠었다. 맥클래치는 독립선언서를 널리 알린 것 외에 3·1운동의 실상을 담은 글을 작성해 San Francisco Examiner에 보냈다. San Francisco Examiner는 그의 글을 4월 6일 자 1면 전면에 실었다.
맥클래치가 전한 영문 독립선언서와 3·1운동의 실상을 담은 기고문은 3·1운동 소식에 목말라 하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겐 최대의 희소식이었다. 『신한민보』는 4월 8일 그가 소개한 영문 독립선언서를 한국어로 번역해 처음으로 재미 한인사회에 소개하였다. 그런 후 San Francisco Examiner에 기고된 그의 글을 3회에 걸쳐 한국어로 번역해 소개하였다. 맥클래치의 활동은 당시 미국 언론뿐만 아니라 전 미주 한인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컸다.
한편 3월 29일 자 상하이 특별 전보로 ‘대한국민 공화정부’ 수립 사실이 하와이와 북미의 한인사회에 전해지자 대한인국민회는 곧바로 그 내용을 미국 언론에 알렸다. 미국 언론들은 3월 30일 자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사실을 시시각각 보도하기 시작했다. 임시정부 수립 보도는 영문 독립선언서의 보도와 같이 3·1운동이 단순한 일회성의 일시적인 독립운동이 아니라 장차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한국인의 강한 열망과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좌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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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cific Commercial Advertiser(1919.03.28)에 실린 영문 독립선언서와 3·1운동 보도


미국 언론의 일본 야만성 폭로와 ‘3·1혁명’ 
미국 언론들은 시시각각 전해지는 국내 3·1운동 소식에 주목하며 특히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의 사주를 받은 일본 군경의 무자비한 만행과 연약한 한국인 여학생들에 대한 야만 행위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고 재한 미국 선교사들의 체포 소식과 그들에 대한 가혹행위, 특히 한국인 기독교인과 기독교회에 대한 일제의 만행에 관심을 갖고 집중 보도하였다. 이 가운데 The Washington Post 3월 15일 자에 평화로운 만세 시위에 참가한 한국인 여학생의 팔을 무자비하게 자른 일본의 만행을 폭로한 ‘Girl's Hands Cut Off’ 기사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만든 독립의연금 영수증에 실린 팔이 잘린 채로 만세 시위를 하는 여학생의 그림은 이러한 보도에서 나왔다.

미국 언론 보도에서 특별히 주목할 부분은 3·1운동의 비폭력적 평화 시위를 단순히 ‘Revolt(반항 또는 반란)’로 보지 않고 ‘Revolution(혁명)’으로 보도한 점이다. 즉, 한국인의 3·1독립운동을 일제 식민통치에 전면 항거한 거대한 혁명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미국 언론들의 시각은 오늘날 우리가 3·1운동을 어떤 자세로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것으로, 향후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고 평가하는 데 제대로 반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