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숨결

45일간의 짧은 전쟁
그 역사의 흔적
고립무원의 남한산성

45일간의 짧은 전쟁<BR />그 역사의 흔적<BR />고립무원의 남한산성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45일간의 짧은 전쟁

그 역사의 흔적

고립무원의 남한산성



고립되어 구원을 받을 데가 없다는 뜻의 고립무원(孤立無援). 우리는 삶을 통해 고립무원과 같은 경우를 시시때때로 경험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문제 한가운데 놓였을 때, 내 생각의 틀에 갇혔을 때, 혹은 억울한 누명에 휘둘릴 때도 그렇다. 인간의 삶이란 고립무원의 연속인지도 모를 일이다. 380년 전에도 구원의 손길이 전무했던 곳이 있었다. 병자호란(1636.12.~1637.01.)의 중심지였던 남한산성이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45일의 항쟁. 그 능멸과 치욕의 순간들이 지금은 눈에 뒤덮였지만, 역사는 우리네 삶을 통해 반복되고 있다. 소설 『남한산성』과 함께 그곳으로 문학기행을 떠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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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행궁의 정문인 한남루


서울의 마지막 보루, 난공불락의 요새 남한산성

남한산성을 배경으로 역사를 재조명한 작품들은 많다. 그 가운데 소설 『남한산성』은 ‘우리말을 예술로 승화시켰다’라고 평가받는 김훈 작가의 소설이다. 김훈 작가는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첫 장을 넘긴 이후부터 마지막 장까지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을 만큼 몰입시켰다. 병자호란과 남한산성에서의 항쟁, 익히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럼에도 김훈 특유의 냉혹한 문체는 독사에게 물려 온몸에 독이 퍼지는 것처럼 가슴을 아프게 했다. 소설 속에서 역사는 이미 끝난 과거가 아니었다. 역사의 톱니바퀴는 지금도 여전히 회전하면서 현재를 지배한다. 미래 또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예로부터 경기도에는 수도 서울을 방어하는 네 곳의 요새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동쪽 요새인 광주의 남한산성이다. 남한산성이 자리한 남한산(해발 535m)은 여러 지역에 걸쳐 있다. 넓게는 서울 송파구와 경기도 하남시, 좁게는 광주시와 성남시를 연결한다. 약 7km에 이르는 남한산성은 대부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속한다. 서울에서 약 24km 떨어진 곳이다. 광주시는 약 80%가 산이며 평야는 20%에 지나지 않는다. 산골짜기에는 물이 많아 하천을 형성하였는데 물길은 한강으로 흘러간다. 

남한산성은 삼국시대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었다. 백제 시조 온조대왕(미상~28)의 사당인 숭열전이 산성에 있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민족은 남한산성에서 여러 차례 국난을 이겨나갔다. 고려의 대몽항쟁이 대표적이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인조(1595~1649)가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했다. 집권 2년 차인 1624년부터 1626년의 일이다. 그 결과 성의 둘레가 6,297보, 옹성 3개, 대문 4개, 암문 16개, 우물 80개 등에 달했다. 왕이 거처할 227칸의 행궁도 함께 지었다. 조선의 역대 왕들은 여주에 있는 영릉에 참배 갈 때 남한산성 행궁에 머물며 군사훈련을 시키기도 하였다. 이처럼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도성을 지키는 보장지로 인식되었고, 유사시 예비 수도 역할을 담당하였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을 통해 제 역할을 다했다. 병자호란 당시 왕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이 남한산성에 피신하여 청의 13만 대군에 맞서 45일간 항전하였다. 

소설에서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해 겨울은 일찍 와서 오래 머물렀다. 강들은 먼 하류까지 옥빛으로 얼어붙었고, 언 강이 터지면서 골짜기가 울렸다. 그해 눈은 메말라서 버스럭거렸다. 겨우내 가루눈이 내렸고, 눈이 걷힌 날 하늘은 찢어질 듯 팽팽했다. 그해 바람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습기가 빠져서 가벼운 바람은 결마다 날이 서 있었고 토막 없이 길게 이어졌다. 칼바람이 능선을 타고 올라가면 눈 덮인 봉우리에서 회오리가 일었다. 긴 바람 속에서 마른 나무들이 길게 울었다. 주린 노루들이 마을로 내려오다가 눈구덩이에 빠져서 얼어 죽었다. 새들은 돌멩이처럼 나무에서 떨어졌고, 물고기들은 강바닥의 뻘 속으로 파고들었다. 사람 피와 말 피가 눈에 스며 얼었고, 그 위에 또 눈이 내렸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김훈의  『남한산성』 중(학고재 출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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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산 능선에 칼바람이 숨죽이고 몸을 숨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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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문은 비밀스러운 문으로 적의 눈에 띄지 않게 만들어졌다. 사진은 서암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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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 뒤로 남한산 능선이 앙상한 공룡의 등뼈처럼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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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에 봄이 더 기다려지는 것은 비단 나무만이 아닐 것이다



새하얀 눈으로는 치욕의 역사를 덮을 수 없다 

남한산성 트레킹은 모두 5개 코스다. 각자 체력이나 시간 여건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1코스는 문화재와 성곽길을 즐기기 좋은 코스로, 3.8km 구간에 80분 정도 소요된다. 산성종로(로터리)에서 출발~북문~서문~수어장대~영춘정~남문을 거쳐 산성종로(로터리)로 복귀한다. 2코스는 가장 짧은 구간이다. 산성종로(로터리)에서 영월정~숭열전~수어장대~서문~국청사를 지나 산성종로에 이르는 2.9km에 60분 남짓 걸리는 구간이다. 5코스는 성곽을 일주하는 코스다. 7.7km 구간에 3시간 30분 이상 소요된다.

모든 코스의 시작 지점이라 할 수 있는 산성종로(로터리)는 언제나 붐빈다. 주변에 식당이 많다. 수도권의 대표적인 나들이 명소로 알려진 까닭이다. 길을 나서서 처음 도착한 곳은 북문이다. 정조 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한 뒤 전승문(全勝門)이라 하였다. 다시는 병자호란과 같은 치욕을 당하지 말자는 뜻이다. 북문 성곽을 따라 서문으로 가는 길은 1km가량 걸린다. 길이 가파르다. 특히 눈이 내린 다음 날에는 아이젠이 필수다. 성곽 아랫길로 가면 좀 더 수월하다. 서문 못미처 성 밖으로 돌출된 옹성이 있다. 옹성에 서면 한강과 하남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어 우익문(右翼門)이라 불리는 서문에 도착한다. 인조가 이 문을 통해 삼전도에서 청에 무릎을 꿇었다. 

성곽은 험준한 주변 산세에 기대어 튼튼하게 지어졌다. 성벽은 종이 한 장도 허락하지 않을 기세다. 인조가 제대로 몸을 숨긴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추위와 배고픔, 아니 그보다 더 무서운 고립감과 공포감은 임금을 성 밖으로 끌어내고야 말았다. 성문지기처럼 서 있는 느티나무가 쓸쓸하고 애잔해 보이는 것은 삼전도의 눈물을 알기 때문일까. 

발걸음을 재촉해 서장대라 불리는 수어장대에 이른다.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수축할 당시 4개의 장대가 있었는데 현재 유일하게 남은 장대다. 45일간의 항전 기간 중 인조가 이곳에서 직접 군사를 지휘하였다고 전한다. 당시에는 단층 누각이었으나 영조 27년(1751)에 2층으로 증축하고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걸었다. 성곽을 따라 1km 남짓 걸어가면 지화문(至和門)인 남문이다. 남한산성의 사대문 중 규모가 가장 웅장하다. 병자호란이 닥치자 인조가 서울을 버리고 이 문을 통과해 성으로 들어갔다. 

남한산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임이 분명하다. 축조 이래 단 한 번도 적군을 안으로 들이지 않은 철옹성이다. 다만 시대를 읽지 못하는 위정자들이 화를 자초하여 숨어들었고 겁에 질려 스스로 나왔을 뿐. 역사의 오물은 눈으로 덮인 듯 보이지만, 봄이 오면 금세 드러나고 만다. 고립무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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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가 청에 항복하기 위해 나갔던 우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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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가 군사를 지휘했던 수어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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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치욕스러운 역사를 

되풀이 하지 말자는 뜻으로 지은 전승문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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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가 한양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입성한 지화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