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역사

1930년대 조선에서 일어난
집념의 조선총독 처단 시도

1930년대 조선에서 일어난<BR />집념의 조선총독 처단 시도


글 윤소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학술연구부장


1930년대 조선에서 일어난

집념의 조선총독 처단 시도


조안득의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 처단 의거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관료들은 남산에 있는 조선신궁에 참배하여 새해를 맞이했다. 1936년 1월 1일, 이 날을 이용하여 당시 제6대 조선총독으로 있었던 우가키 가즈시게를 처단하려 했던 청년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조안득. 그러나 역사는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2020년의 새해를 맞이하며, 조안득의 독립운동 족적을 따라가 본다.


일제강점기 한국 침략의 수장을 노린 의열투쟁의 계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국권 피탈을 저지하지 못하고 중과부적인 상황에서 한국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선택된 방식 중 하나가 의열투쟁이었다. 그중 한국 침략의 수장인 일제의 최고 고관을 목표로 한 의열투쟁은 1909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의거와 함께 1919년 사이토 마코토 총독 처단을 기도한 강우규 의거, 1926년 송학선의 사이토 마코토 총독 처단 미수 의거 등이 잘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그 후에는 어떠했을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1930년대 중반부터 1945년까지 일제의 끝을 모르는 군국주의적 팽창 도발로 탄압과 통제가 극심했기 때문에, 국내에서 독립운동은 거의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1935년 국내에서 또 한 번의 조선총독 처단 의열투쟁이 일어났다. 그것도 무려 다섯 차례에 걸쳐 집요하게 시도되었다. 그 무대는 고양군 신공덕리 58번지에 있던 용일양조소로, 처단 대상은 제6대 총독인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1868~1956)였다. 거사를 주도한 인물은 일제강점기 국내에서 태어나 ‘식민지 교육’을 받은 가난한 하층민 청년 조안득이었다. 그는 1925년 치안유지법 제정 후 더욱 촘촘해진 일제의 사찰망에도 걸리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었다.


alt

조안득이 살았던 어성정의 집



1930년대 조선과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는 1890년 육군사관학교를 제1기생으로 졸업하고 1924년 육군 대신에 취임했다. 1927년 정우회 정권이 수립되자 육군 대신을 사직하고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대신하여 임시총독대리로 조선에 부임했다. 재임 기간은 1927년 4월부터 1927년 10월까지 사이토 총독이 워싱턴군축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 출장을 간 사이였다. 우가키의 정치 성향은 일본의 군인칙유에 명시된 것처럼 일왕에 대한 절대복종이었다. 그는 메이지유신 이래 조슈 군벌 세력이 일본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것에 비판적이었는데, ‘천황주의’ 이데올로기를 가진 일본군 내부의 우익 청년 장교들은 이러한 성향의 우가키를 내각 총리로 추대하여 1931년 3월 20일 이른바 ‘3월사건’이라 불리는 쿠데타를 모의한 적도 있다. 이런 와중에 우가키는 일본 내의 구설수를 피해 조선총독직을 수락하고 1931년부터 1936년까지 제6대 총독에 재임하게 된 것이다. 

당시 국내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전국적인 확산과 1930년 1월 부산 방직공장 노동자 파업, 1930년 8월 평양 고무공장 노동자 파업이 일어나고,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의 산하단체가 증가하는 등 대중단체운동이 격화했다. 1931년부터 1935년까지 혁명적 농업조합운동 관련 사건은 103건(4,121명), 혁명적 노동조합사건은 70건(1,759명)에 달했다.

당시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을 탄압하는 법적 장치는 치안유지법이었다. 이에 따르면 조선독립을 기도하는 운동은 조선에 대한 일본 지배를 배제하는 것이며, ‘천황통치권’ 하의 제국영토의 일부를 그 통치권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므로 ‘정치의 변혁’(제령 제7호), ‘국체변혁’(치안유지법)에 해당한다”고 하여 탄압했다. 법은 1928년 6월 29일 개정되어, 국체변혁과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할 것을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한 자에게 최고형 사형이 구형되도록 했다. 1930년대 전반의 독립운동은 사형을 각오한 투쟁이 아닐 수 없었다.

우가키는 부임 전, 조선의 상황에 대해 관계는 침체되어 있고, 인민은 음울하며 사업은 부진한 상황이라 진단했다. 이 공기를 일신하지 않으면 조선의 장래는 낙관할 수 없다고 일기에 적었다.(『宇垣一成日記』 2, 1931.06.25.) 그래서 정치적 슬로건으로 내세운 것이 ‘내선융화’, ‘농공병진’, ‘농촌진흥’이다. 그렇지만 정책적 효과는 미미했다.

1930년대 전반 조선의 상황은 불경기와 실업자 증가, 토막민 증가로 요약된다. 『조선급만주』 1933년 1월호 「조선에 소용돌이치는 실업자 무리」 기사에 따르면 경기불황에 디플레이션이 가중되어 총체적 난국인 상황에서 실업자가 폭증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alt

조안득 의거의 처단 대상이었던 제6대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


조안득 의거는 어떻게 세상에 알려졌을까

조안득 의거 사건이 발각된 계기는 1935년 말, 용산경찰서 형사가 용일양조소 부근 이발소에서 어떤 이가 폭탄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용일양조소의 노동자를 조사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인물을 특정하지 못하고 요시찰 인물 중에서도 의심 가는 이가 없어 속수무책이던 일경은 1935년 12월 28일 얼굴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조안득(조득렬) 외 6명을 우가키 암살 미수사건으로 체포했다. 일경 측은 사건의 중대성에 비추어 즉시 보도 통제를 단행했다.

사건이 일반에 공개된 것은 1936년 8월 18일 자 신문을 통해서다. 우가키 총독이 이임하고 관련 보도 금지가 해금되었기 때문이다. 『경성일보』,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 등이 기사를 게재했지만,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동아일보』의 2면에 걸친 상세한 호외이다. 조안득을 비롯한 관련 인물의 사진과 조안득의 부인, 조안득의 주거, 용일양조소 사진 등 관련 사진이 풍부하게 활용된 기사였다. 다른 신문사와 달리 이 같은 자세한 보도가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 취재기자였던 우승규(禹昇圭)의 활약 덕분이다. 우승규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청년당원으로 활동하다가 1931년 귀국하여 여러 신문사의 기자를 전전했다. 그 자신이 일제 요주의 인물로서 사찰 받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우승규는 용산경찰서를 출입하다 우연히 조안득의 검거 소식을 듣고, 자비를 들여 조안득의 조선총독암살미수사건을 조사했다. 우승규 기자의 활약으로 밝혀진 조안득과 그의 거사 내용은 이랬다.


alt

우승규가 취재·보도한 조안득 의거 기사(『동아일보』, 1936.08.18.)



평범한 청년과 의열운동가 사이

조안득은 수원에서 과부의 세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30년대 초 가족 모두가 서울로 이사 와서 큰형 수복은 간장 회사 영업사원으로, 둘째 형 천복은 지방행정학회 인쇄 직공으로, 조안득은 용일양조소 배달부로 일했다. 그러나 경제 불황의 여파로 두 형 모두 실직하고 말았다. 조안득이 홀어머니와 조카들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그의 아내 서금순(徐今順, 당시 19세)은 일본인 가정에서 가정부로 일했다. 『동아일보』에 실린 조안득의 어성정(御成町)의 집 또한 여러 개의 쪽방으로 이루어진 보잘것없는 주택의 한 칸에 불과했다. 조안득과 그 가족의 삶은 1930년대 전반기 ‘식민지 조선’의 비참함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조안득은 안중근 의거와 송학선 의거를 염두에 두고 우가키 총독 처단 의거를 준비했다. 그는 용일양조소의 수석 서기이자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이금진으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으면서도 점진적인 노동운동보다 급진적인 의열투쟁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일제 측 조사 자료에 의하면 조안득이 1935년 9월경, 조선신궁이 있는 남산에서 조선인 거리와 대비되는 휘황찬란한 일본인 거리를 내려다보고 한층 더 조선통치에 반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하얼빈 역두에서 이등공을 암살한 안중근을 모범으로’ 삼아 폭발물을 사용하여 조선총독 처단을 결심하게 되었다.

먼저 용일양조소의 술을 배달받아 주점을 운영하는 인진명(47)에게 물고기를 잡고 싶다고 거짓말을 하여 다이너마이트와 도화선을 요청했다. 인진명은 중석광산(重石鑛山)의 화약취급 주임이었다. 이에 인진명은 성냥의 유황으로 간단한 폭탄을 만들 수 있다고 알려주었고, 조안득은 유리병을 활용해 10월 말경까지 총 4개의 폭탄을 제조했다. 유리병은 아내 서금순이 일본인 가정에서 얻어온 빈 병을 재활용한 것이었다.

조안득은 총 다섯 차례 총독 처단을 시도했다. 첫 번째로 1935년 10월 14일 대구에서 열린 조선군사단 대항연습을 참관하고 경성역으로 돌아오는 우가키 총독의 처단을 계획했으나 인진명에게 도화선을 받지 못해 미처 시도할 수 없었다. 두 번째는 1935년 10월 16일, 총독부 고관들이 동대문 밖을 통해 이동한다는 이야길 듣고 실행에 옮기려다 경계가 심해 실패했다. 세 번째는 11월 18일 도쿄에 갔다가 귀성하는 우가키 총독을 노렸다. 이때 그는 사전에 용일양조소 배달부 최영진(30), 서부지점 배달부 구승회(26) 및 윤학수(28)를 동지로 포섭하고 이들의 도움을 받아 폭탄을 갖고 경성역에 잠복하면서 귀빈실을 지켜봤다. 그러나 총독의 부인이 병환 중이어서 직접 플랫폼에서 자동차를 타고 철도우편국 옆 수하물 출입구로 빠져나가는 바람에 실패했다. 다시 12월 14일, 신문에서 우가키 총독이 오후 2시 52분 온양온천에서 경성역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본 조안득은 두 번째로 만든 폭탄 세 개를 가지고 경성역으로 갔다. 그리고 남대문통 세브란스병원 통용문 철책 부근 보도 위에 서서 폭탄을 던질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안개가 심하고 경계가 삼엄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계속되는 실패로 이러다가 아무것도 안 될 것이라 생각한 그는 마지막 계획을 세웠다. 1936년 1월 1일, 총독이 반드시 남산 조선신궁을 참배할 것이라 보고, 자신의 집 위에 있는 조선신궁 가는 길에서 의거를 결행하기로 한 것이다. 신궁 가는 길 어귀에서 실패할 경우, 인근 잔디밭에 불을 지르고 경계망이 어지러워질 즈음에 기어코 총독을 죽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12월 28일 새벽에 체포되고 만 것이다.

일제 당국은 조안득의 폭탄을 압수해 그 위력을 실험했는데, 폭탄은 10간 정도의 범위까지 파멸시킬 정도로 강력했다. 조안득은 10년 형을 받았다가 다시 7년 6월형으로 감형받았다. 그의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다음의 기사를 주목할 만하다.


다시 옥문에서 나온 그들에게 현실은 너무나 차디차서 ‘처’는 간데없고 생계는 막연하고 사회에서 버림받고 경찰의 감시는 아직도 거세었다. 하는 수 없이 조안득 씨는 해방 전 해 노무자 모집에 응모하여 북해도로 건너가 왜놈의 노예로서 철도부설공사를 비롯하여 자유 노동에 종사하다가 1945년 11월에 그리운 고국으로 다시 찾아왔다. …(중략)… 해방이 와도 장안에 떠나갈 것 같은 만세와 환호성 속에서도 오늘날까지 누구 하나 그들을 돌보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생활의 곤경은 예나 이제나 다름없이 궁핍했다. (「여기에 있다. 버림받은 애국자」, 『한성일보』, 1950.06.03.)


조안득은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감옥살이를 한 뒤 세상으로 나왔지만, 일제의 감시망 속에서 1944년에 훗카이도 철도노동자로 전전하다 기사의 제목처럼 ‘버림받은 애국자’로 해방을 맞이했다. 기자가 소감을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우리는 누구의 지시나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고 우리들의 곤란한 생활은 왜놈 때문이라는 복받치는 반감 그대로 27세 내외의 젊은 청년끼리 거사를 계획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다만 옛일을 회상하면서 평생을 묵묵히 노동자로서 조국에 바칠 뿐입니다. 생활고요? 그야 나만이 못 뚫는 수난인가요. 다수의 동포 형제들이 참고 참아 나가야할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그의 술회는 우리에게 깊은 감회를 남긴다. 조안득은 ‘정의’를 ‘맹렬하게’ 실천한 의열운동가였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을 ‘의거’라 주장하지 않았고, 공을 다투지도 않았다. 역사가 자신을 기억해주지 않음에 섭섭해하지도 않았다. 단지 역사의 불의에 눈감지 않고 의로움을 실천한, 그 자신은 평범하다고 했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청년이었다. 여전히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가 많다. 조안득의 의거가 안중근 의거, 강우규 의거, 송학선 의거를 잇는 일제 고관 처단의 ‘의열투쟁’임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것은 오롯이 우리 국민의 몫이다.


alt

조안득이 제작한 폭탄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