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고종의
밀지와 함께
의병을 일으킨
산남의진 대장
정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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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고종의 밀지와 함께

의병을 일으킨

산남의진 대장 정용기


정용기(鄭鏞基)

1862.12.13. ~ 1907.09.02.

경상북도 영천

건국훈장 독립장(1962)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및 광복회와 공동으로 정용기를 2020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정용기는 경상북도 영천에서 의병 부대 ‘산남의진’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맞서 싸우며 항쟁했다.


고종황제의 뜻을 받들어 의병을 일으키다

정용기는 1862년 충절가문으로 알려진 영일정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으로 인해 공부를 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다녀야 했지만, 1887년 아버지 정환직(鄭煥直)이 벼슬에 오르자 함께 상경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되며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고종은 정환직을 불러, 군주를 대신하여 장수가 적에게 맞선 중국 고사 ‘화천지수(華泉之水)’에 대해 이야기하며 밀지(密旨)를 내렸다. 이후 정환직이 관직에서 물러나자 정용기도 함께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1906년 영천으로 간 정용기는 영천창의소를 설치하여 의병을 모으기 시작하였고, 권세가를 비롯한 각종 통문이나 격려문을 지어 의병으로 나설 것을 호소하였다. 같은 해 2월 정용기는 의병 1,000여 명의 추대로 의병 대장이 되었고, 영남지역 의진이라는 뜻의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이름으로 정하여 본격적인 항쟁을 준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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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창의지(山南倡義誌)』 중 

정환직이 고종에게 밀지를 받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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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의 무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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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일지』 중 입암전투 관련 내용



산남의진 대장으로 의병투쟁을 이끌다

1906년 4월 아버지 정환직이 경주에 구금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정용기는 급히 경주로 향했지만, 이는 산남의진을 막기 위한 관군의 계략이었다. 결국 정용기는 경주진위대에 체포되어 대구경무소에 구금되었고, 대장을 잃은 산남의진은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산되었다. 4개월이 지나서야 풀려난 정용기는 ‘일제가 만든 외채를 국민의 손으로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여 영천군 국채보상단연회의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봄 정용기는 산남의진을 다시 조직하였고, 소규모 지역 의병부터 군인 출신까지 많은 이들이 뜻을 함께하였다. 7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산남의진은 포항 청하와 영천 자양 등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9월 포항 죽장으로 이동하여 입암계곡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 일본군에게 역습을 당해 정용기를 비롯한 많은 의병이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정용기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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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 관련 내용(『대한매일신보』, 1907.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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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망화천지수(朕望華泉之水)전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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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재(忠孝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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