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

김순애, 김규식의
자유와 평화

김순애, 김규식의<BR />자유와 평화


글 김형목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김순애, 김규식의

자유와 평화



최근 들어 남북한 사이 화해 분위기가 다시 경색되고 있다.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했던 선각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임이 절실한 오늘날이다. 김순애와 김규식은 평생 독립운동에 스스럼없이 온몸을 던졌던 선각자들이다. 해방 이후에는 남북분단 체제를 막는 것만이 진정한 독립이라 생각하고 실천하였다. 이들 부부가 살아온 가시밭길 같은 인생 항로는 무한한 신뢰에서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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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애와 김규식의 결혼사진(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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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김순애


김순애, 근대교육 수혜로 민족의식을 일깨우다

김순애는 1889년 5월 12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서 아버지 김성섬과 어머니 안성은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으로 서울의 명문가 집안이었다. 증조부는 낙향 후 황무지 개간과 가축 사육 등으로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여 ‘김참판댁’이라 불렸다. 아버지도 ‘만석꾼’이라 불릴만큼 대단한 자산가였다. 일찍이 서양선교사와 인연을 맺은 서상륜·서경조 형제는 이곳에 개신교를 전파했다. 이때 그의 아버지와 큰오빠도 개신교를 받아들이고,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는 등 민중계몽과 민족교육에 매진하였다.

김순애는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뒤 어머니, 오빠 김필순과 함께 서울로 가서 정신여학교에 입학하였다. 김필순은 세브란스의학교에 다니며 안창호를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와 밀접하게 교류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민족의식과 현실 인식을 심화하며 자연스럽게 나라사랑 정신을 형성하였다. 민족교육의 수혜로, 김순애의 집안은 독립운동가를 다수 배출한 명문가로 자리매김하였다. 둘째 오빠 김윤오는 서우학회 발기인, 셋째 오빠 김필순은 중국 동북지역과 내몽고 치치하얼에서 독립운동자금 및 기지를 제공했다. 언니 김구례의 남편 서병호는 신한청년단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여동생 김필례는 YWCA 창설자이자 민족교육을 실천한 교육운동가, 조카 김마리아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장 등을 역임한 여성독립운동가이다.

정신여학교(연동여학교 후신)는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설립되었으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근대여성교육의 ‘메카’였다. 한국 역사와 지리 등을 통해 나라를 생각하는 동시에 올바른 여성을 양성시켜야 한다는 책임감도 갖게 되었다. 엄격한 기숙사 생활에도 동생 김필례와 함께 있어 그 어려움과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김순애는 1909년 졸업하고 부산 초량소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그곳에서 학생들에게 한국사를 비밀리에 가르치는 등 항일의식 고취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탐지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될 위기에 놓이자, 오빠 김필순과 함께 중국 동북지역으로 망명했다.


김규식, 불우한 가정환경을 나라사랑으로 이겨내다

우사 김규식은 1881년 아버지 김지성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경남 동래부에서 무역 업무를 담당한 아버지는 일본 상인의 횡포를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유배형에 처해졌다. 4세가 되던 해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올라갔으나, 얼마 후 어머니마저 사망하여 큰아버지에게 맡겨졌다. 큰아버지는 김규식의 양육이 어려워지자 그를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의 양자로 입양시켰다. 이후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가 연이어 사망하며 천애 고아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선교사 부부는 김규식에게 친아들과 같은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었다. 그 역시 불우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관립영어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는 등 학문적인 열정을 보였다.

생계를 위해 독립신문사에 입사한 뒤 영어사무원과 취재기자로 활동하였다. 이어 언더우드의 도움으로 미국 로녹대학에서 유학하며, 한글의 우수성과 한국을 알리는 많은 기고문을 썼다. 특히 영어·프랑스어·라틴어 등 어학에서 출중한 실력을 발휘했다. 러일전쟁의 발발과 일본의 승리를 예견할 만큼 국제정세에도 밝았다. 프린스턴대학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러일전쟁이 발발한 직후 귀국하였다. 그리고 YMCA학관·배재학당·경신학교 등 기독교계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항일의식을 일깨웠다. 김규식은 교육가로서뿐만 아니라 국권회복을 위한 계몽활동도 병행하는 ‘청년운동가’로서 명성을 날렸다.

‘105인사건’으로 국내 활동이 여의치 않자 1913년 상하이로 망명했다. 12월에는 신규식과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한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듬해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즈음하여 몽골 울란바토르에 군관학교 설립을 계획했다. 설립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으나 실행되지 못했다. 국내에 있던 아내가 외몽골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하다가 폐병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917년 7월에는 김성(金成)이라는 이름으로 ‘대동단결선언’에 참여하며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과 단결을 촉구하였다. 김규식은 독립운동가로서 다양한 이명을 사용하기로도 유명하다.


영원한 동반자 김규식과 부부가 되다

한편 김순애는 상하이를 거쳐 난징 명덕여자학원에서 수학했다. 재학 중 형부 서병호의 중매로 평생 동지가 될 김규식과 1919년 1월 조촐한 결혼식을 치렀다. 김규식은 김순애의 오빠 김필순과 막역한 친구이자 동지이기도 했다. 망명지에서의 결혼은 운명적이나 뜻을 같이하는 동지적 결합을 의미한다. 김순애는 곧장 김규식과 상하이로 근거지를 옮겨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국제정세는 요동쳤다. 여운형·조소앙·김철 등은 상황을 예의 주시하면서 신한청년단을 조직하였다. 부부는 망설이지 않고 가입하여 직접 활동에 나섰다. 이때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신한청년단은 강화회의 파견 대표로 김규식을 선정하였다. 파견 목적은 일제 식민지 통치 실상의 폭로와 한민족 독립 염원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데 있었다.

상하이 부두에서 신혼부부는 생과 사를 넘나드는 이별 아닌 이별을 했다. 동시에 김순애는 선우혁·김철 등과 국내로 파견되어 대대적인 독립운동 전개와 독립자금 지원을 요청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19년 2월 부산에 도착하여 백신영, 대구에서 김마리아, 광주에서 김필례, 서울에서 함태영, 평양에서 김애희(송죽결사대 김경희의 동생) 등을 만나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를 파견한 소식을 전하였다. 또한 이에 호응하는 방안으로써 한국인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알리는 독립운동을 펼치도록 요청했다.


자신의 임무에 혼신을 다하다

김순애는 함태영으로부터 이미 종교계를 중심으로 3·1운동이 계획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다 잘못되면 파리에 있는 김규식의 사기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그러면 민족 대업 완수에 지장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에 따라 3·1운동을 목전에 두고 오빠가 있는 헤이룽장성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만세시위를 추진하다가 일본영사관에 감금되었으나, 중국인 관원의 도움을 받아 상하이로 무사히 탈출했다.

김순애는 조국독립에 여성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일환으로 이화숙·이선실·오의순·박인선 등과 함께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했다. 회장으로 피선된 그녀는 선전활동과 독립자금 모금에 전력을 기울였다. 또한 서병호·이희경·안창호 등과 대한적십자사를 조직하여 독립전쟁에 시급한 현안인 간호원 양성과 임시정부의 국제적인 위상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듬해 부설기관인 간호원양성소에서 간호원을 배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김순애는 김규식이 파리로 떠난 후 그의 장남인 김진동을 장자커우에서 데려와 정성을 다해 양육하며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한편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참석한 김규식은 파리한국통신부를 개설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외무총장으로서 한국독립에 관한 청원서와 「한국독립과 평화」라는 홍보물 등을 배포했다. 이러한 대표단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열강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국인의 요구를 철저히 외면했다. 김규식은 파리주재 외교관을 초청하여 한국인의 독립 열망을 알렸다. 그러나 결국 파리위원부 임무를 이관룡에게 위임하고 미국을 거쳐 상하이로 되돌아왔다. 미국에서는 순회강연회 등을 통해 막대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국제관계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다

김규식은 태평양회의와 극동피압박민족대회 대표 파견에 적극적이었다. 민족대회에는 총 144명이 참가하였는데, 이중 한국인이 50여 명이나 되었다. 김규식은 레닌을 만나 한국독립운동 지원을 약속받았으나, 레닌 사망과 국제정세 변화로 성공하지 못했다. 한중호조사 창립 2주년즈음하여 「3·1정신과 5·4운동정신」을 발행해 한중 연대를 강조하였다. 

김순애는 중국에서 효과적인 독립운동 추진을 위해서는 중국과의 연대가 중요함을 알고, 실천하였다. 직접 중국인학교를 찾아가 한중문제를 연설하는 등 중국인 청소년에게 한국이 처한 현실을 널리 알렸다. 1930년대 한중 연대는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았다. 미국의원단 방문 시에는 한국부인회를 대표해 한국독립을 호소하였다.

다나카저격미수사건으로 상하이에서 미국인 스나이더 부인이 유탄에 맞아 사망하는 유감천만한 일이 발생하였다. 이는 임시정부의 위상을 추락시킬 수 있는 불상사였으나, 김순애는 영문으로 간절한 애도의 뜻과 함께 기념품을 스나이더에게 전달했다. 스나이더는 “고상하고 혁혁한 귀회의 결의를 나는 늘 기억할 것이며, 이를 세상에 알리는 동시에 귀회에 대하여 감사해 마지않습니다”라는 내용의 답장을 보내왔다. 가해자에게 호의와 감사를 보낼 수 있도록 한 외교적 수완은 독립운동사에서 찬란한 빛을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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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평화회의에 파견된 대표단. 앞줄 오른쪽 끝이 김규식(1919)



대동단결만이 독립운동의 초석이다

임시정부는 운동노선을 둘러싸고 내홍에 휩싸였다. 민족유일당운동도 온전한 결실을 맺지 못한 채 분열되었다. 김규식은 이념적인 대립을 뛰어넘어 대동단결을 호소했다. 1935년 난징에서 민족통일전선의 5당 통합인 민족혁명당 창당은 그의 노력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 충칭에 안착한 후 김구와 김원봉은 좌우 통합에 합의하여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연대와 통합이 이루어졌다. 쓰촨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김규식은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이어 민족혁명당 중앙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었으며, 임시정부 부주석에 취임함으로써 대통합에 성공했다. 이러한 노력은 일제 패망과 함께 해방을 맞이하는 에너지원이 되었다.

김순애는 분열된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위해 대한애국부인회 회장을 사임하고 남편과 같이 임시정부를 유지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1930년 한국독립당 산하 한인여자청년동맹 결성이나 1943년 한국애국부인회 재건 등은 이러한 목적을 관철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대동단결이 독립운동의 가장 견고한 기반임을 거듭 밝혔다. 「자유한인대회 선언문」에서는 “한국은 마땅히 독립국이 되어야 하고 한민족은 마땅히 자유민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 부부의 염원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완전한 자유와 평화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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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애국부인회 회원들. 왼쪽부터 최선화, 김현주, 김순애, 권기옥, 방순희(1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