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함성, 독립의 희망
요동치는 세계와 전쟁광이 된 일제

글 박영규 작가
요동치는 세계와 전쟁광이 된 일제
1930년대에 이르러 국제정세가 다시금 뒤흔들렸다. 주범은 다름 아닌 독일과 일본이었다. 독일은 유럽 국가들을 하나둘씩 장악하며 세력을 넓혀 갔고, 일본 또한 아시아에서 같은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이들은 삽시간에 전 세계를 전쟁터로 만들었다.

6대 총독을 지낸 우가키 가즈시게 7대 총독을 지낸 미나미 지로
1930년대 세계를 덮친 침략전쟁
독일은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국제조약에서 불리한 처지가 됐다. 이에 불만을 품은 독일 국민들은 과거의 영화를 기대하며 나치와 히틀러를 선택했다. 히틀러는 가장 민주적인 헌법으로 평가됐던 바이마르 헌법을 폐기하고 스스로 총통에 올라 1인 독재정권을 수립했다. 주변 약소국에 대한 침략 정책도 함께 세워졌다. 독일은 먼저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폴란드를 침공하여 유럽전쟁을 일으킨 뒤 북유럽의 노르웨이·네덜란드·벨기에 등을 장악했다. 이어 침략전쟁에 박차를 가하며 프랑스로 진주하였다. 그들은 파리에 무혈입성하여 허수아비 정권으로 하여금 비시정권을 수립하도록 했다. 독일에 나라를 빼앗긴 유럽 각국들은 영국으로 건너가 망명정부를 형성하고 독일에 대항했다. 이처럼 유럽 전역이 독일에 의해 전쟁터로 전락하는 동안 미국은 중립을 선언하고 방관의 자세를 취했다. 아직 대공황의 후유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일본 역시 전쟁광이 되어 중국 대륙으로 전선을 확대하고 있었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장악하고 청나라의 허수아비 황제 푸이를 앞세워 만주국을 세웠다. 이후 여러 차례 중국 침략의 기회를 엿보던 그들은 상하이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특히 상하이 홍커우에서 일어난 윤봉길 폭탄 투척 의거를 빌미로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 전쟁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일본 내 전쟁을 반대하는 온건 세력들이 목소리를 내면서 일본 군부는 쉽게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에 급진 세력이 총리를 암살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일본은 계속해서 전쟁에 집착하였고 결국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만다.
당시 한국은 일본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와 미나미 지로(南次?), 두 총독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우가키는 이미 1927년에 임시로 조선총독을 대리한 적이 있었다. 그는 육군대신을 지낸 후 육군대장으로 예편하여 1931년 다시 제6대 조선총독이 되었다. 미나미는 조선군 사령관 출신으로 1936년 제7대 총독에 부임했다.

이봉창 선서 장면(1931)

윤봉길 의거 직후 기념식장(1932) /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설운 피난살이
이 무렵 독립운동 단체는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일본이 만주를 장악하는 바람에 더 이상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없었고, 상하이까지 뻗친 일본군의 손길을 피해 피난을 떠나야만 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독립군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1932년 1월 한국애국단 소속 이봉창이 도쿄 사쿠라다몬 앞에서 일본왕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투척하여 일본 내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같은 해 3월에는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이 중국의용군과 합작해 만주 신빈현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한인애국단의 최흥식과 유상근이 다롄(大?)으로 들어가 만주 일본 대사관을 공격하려다 실패한 일도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마찬가지로 한인애국단 소속인 윤봉길이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상하이사변 승리 축하연 행사장에서 폭탄을 던졌다. 이 일로 일본군 장성과 주요인사 1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사건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중국 국민당 당수 장제스는 중국군 백만 대군이 하지 못한 일을 윤봉길이 해냈다며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공언하였다. 반면 프랑스는 자신들 조차지에 머물고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을 체포하여 일본 경찰에 넘기는데 혈안이 되었다.
안창호 또한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붙잡히는 상황이 전개되기도 했다. 상하이를 떠난 임시정부는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피난 생활을 지속했다.
윤봉길 의거는 독립군에게 역경을 안겨 주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활로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혁명군과 중국의용군이 연합, 의거에 고무된 이들 한중연합군은 만주에서 일본군과 만주군 연합군을 공격해 흥경성을 점령했고, 백정기·이강훈·이원훈 등은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를 암살하려다 실패해 검거되었다. 한편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는 장제스에게 뤄양군관학교 한인훈련반 설치를 약속받고 5천 원의 지원금을 받는 등 중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략으로 임시정부와 독립군은 나날이 궁지에 몰렸다. 1934년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이 일본군에 의해 피살되는가 하면, 항저우를 떠난 임시정부는 다시 후난성 창사와 광저우를 거쳐 중국국민당 본부가 있던 충칭으로 향했다.
피난살이가 이어지는 가운데 임시정부 내부에서도 균열이 일었다. 요인들은 뿔뿔이 흩어지기 일쑤였고 파벌 싸움은 격화되어 임시정부를 등지는 인사들도 생겨났다. 설상가상으로 내부 반란까지 일어나 임정 요인인 현익철이 죽고 김구와 유동열이 중상을 입었다. 1940년 9월 충칭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간판을 정식으로 내걸고서야 힘겨웠던 피난살이가 끝이 났다. 이때 중국 국민정부는 충칭 교외에 한인촌을 건설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고, 덕분에 임시정부 요인들과 구성원을 비롯한 가족들까지 거주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하지만 임시정부가 피난하며 옮겨다니는 동안 독립운동 1세대 거목들을 차례대로 잃었다. 이회영·이동휘·신채호·김동삼·안창호·양기탁·이동녕 등 그 이름만으로도 ‘독립’ 두 글자를 연상시키는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대거 명을 달리했던 것이다. 그들은 한국 독립운동의 주춧돌이었고, 젊은 열사들의 별이었으며, 암흑 속에 갇힌 한민중의 촛불이었다.
그러나 세월의 풍파를 빗기지 못하고 일제의 탄압과 총칼에 제 육신을 내주며 차가운 이역 땅, 또는 감옥에서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황국신민서사 강요전단


창씨개명이 되어 성명이 제적된 호적
나라를 빼앗기고 이름을 빼앗기다
국내 사정도 척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국내 지식인들 중 일부는 일제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변절을 선택하기도 했다. 미나미는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조선민족말살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국민총력운동과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전개하면서 한국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모든 행사에서 ‘황국신민서사’를 제창하도록 강요한 것도 그였다.
미나미의 민족말살정책은 1940년 2월 절정에 이른다. 한국인들로 하여금 일본식 성씨를 만들고 이름을 바꾸도록 하는, 이른바 창씨개명 작업을 실시한 것이다. 미나미는 창씨개명이 한국인과 일본인을 동등하게 대하기 위함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없애려는 술책에 불과했다.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었더라도 한국인과 일본인을 명확히 구분하여 대우했고 호적상으로도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차별은 유효했다.
따라서 창씨개명의 진짜 목적은 한국인의 뿌리를 없애버리고 일본의 종노릇을 하기 위한 것에 더 가까웠다.
한국인 대다수는 미나미의 거짓말에 쉽게 속지 않았다. 당시 자발적으로 창씨개명을 한 한국인은 고작 7.6% 한국인들이 창씨개명을 거부하자 일본은 학생과 직장인에 대한 강제 창씨개명을 진행하고 유명 인사와 권력을 앞세워 압박과 회유를 반복했다. 이를 통해 전 국민의 80%가 일본식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창씨개명 대신 자결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었다. 미나미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들의 호주와 성씨를 강제로 바꾸었다. 형식적으로 모든 한국인이 창시개명을 한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박영규
1996년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내면서 저술활동을 시작하여, 1998년 중편소설 『식물도감 만드는 시간』으로 문예중앙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문학, 철학, 역사 분야에 걸쳐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역사서로는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 『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