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일제의 무단적 식민통치에 항거하는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4월 11일에는 3·1만세운동의 항일 독립 의지를 계승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을 선포하며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항일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함께 할 동지와 자금 확보가 절실했다. 이를 위해 임시정부의 재원 지원과 동지 확보를 위한 독립운동 단체가 전국 각지에서 조직되었다.
황해도에서도 대한국민회 지부 등 다양한 단체가 조직되어 임시정부의 국내 항일전초대로 활약했다.
해주 출신 오수남은 1920년부터 주비단과 제화교 등의 항일단체에 가입해 임시정부 군자금을 모집했다. 1921년에는 다시 대한독립단을 조직해 해주지역뿐 아니라 황해도 일대를 두루 다니며 군자금과 동지를 모집하고 밀정을 처단했다.
이들의 항일투쟁이 황해도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지자, 일제는 이들을 잡기 위해 도내 모든 주재소원을 총동원하여 마을마다 이 잡듯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좁혀오는 포위망에 오수남 등 독립단원들은 1921년 6월 체포되었으며, 모두 징역 2년~6년이라는 가혹한 중형을 언도받았다.
오수남은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을 받고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의 공적을 기려 202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기념관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무명의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자, 2018년부터 독립운동가를 발굴하여 국가보훈부에 유공자로 포상 추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