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 특집
독립운동의 가치를 재조명하다
뜨거웠던 여름날의 독립운동
국가보훈부에서는 2025년 광복 80주년을 기념하여 ‘이달의 독립운동’으로
6월은 ‘6·10만세운동’, 7월은 ‘광복회 조직’, 8월은 ‘일장기 말소사건’을 선정하였다.
각 사건의 역사 자료를 함께 들여다보며, 독립운동의 다양한 측면을 살펴보자.
융희황제의 인산(장례) 광경(1926.6.10.)

6월 - 6·10만세운동

1926년 융희황제의 승하를 계기로 일어난 6·10만세운동은 1919년 3·1운동, 1929년 광주학생운동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3대 민족운동으로 평가된다. 1926년 4월 25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융희황제가 만 52세 나이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자 전국 곳곳에서 추모의 물결이 일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융희황제가 승하한 지 두 달이 되어가는 시점인 1926년 6월 10일인 인산일에 6·10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이 먼저 3·1운동과 같은 ‘제2의 만세시위운동’을 구상하며 시위를 추진하였고, 준비 과정에서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천도교 세력이 참여하며 조직적 연대를 이루었다.

융희황제의 인산을 보도한 기사, 『동아일보』(1926.6.10.)

거사 직전인 6월 6일에 일제에 의해 계획이 발각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려던 당초의 계획과는 다르게 서울을 중심으로 인산일 당일의 짧은 기간 동안 학생들 위주로 시위가 전개되었다. 비록 일제의 철저한 탄압으로 큰 규모로 전개되지는 못했지만, 6·10만세운동을 계기로 이후 좌우합작 민족협동전선 ‘신간회’가 설립될 수 있었다. 더불어, 시위 과정에서 학생들이 독립운동의 주체로 등장하게 되면서 학생운동 조직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고 학생운동 역량이 질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어 이후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다.

『고헌실기(固軒實記)』(박상진 의사가 광복회를 결성한 이후부터 순국할 때까지의 활동과 광복회의 내력을 기록한 책자)

7월 - 광복회 조직

광복회는 1915년 7월 대구에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이다. 한말의병 계열과 계몽운동 계열이 연합 결성된 단체로,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조직된 광복단과 1915년 대구에서 조직된 조선국권회복단이 중심이 되었다. 광복회의 창립 목적은 국권을 회복하고 독립을 달성하는 것으로,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해 무력이 준비되면 일제와 전쟁을 치른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광복회가 결성된 이후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업은 군자금 모집이다. 군자금 마련을 위해 국내 자산가로부터 의연금을 모집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친일 세력은 이를 일본 경찰에 신고하였으며, 광복회는 이들을 민족의 적으로 간주하여 친일 세력들을 처단하는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의연금 모집을 위해 발송한 통고문이 발각되고, 일제 경찰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 1918년 1월 주요 인물들이 체포되어 조직이 크게 와해되었다. 체포된 광복회원 중 사령관 박상진을 비롯한 5명이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했고, 다수의 회원이 체포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국내 독립운동조직이던 광복회는 1920년대 광복단결사대와 주비단으로 계승되었으나 큰 활동을 펼치지는 못하였다. 광복회원들은 1945년 8월 해방이 되면서 광복회 정신을 되살려 건국사업에 참여하고자 재건 조직을 결성하기도 하였다.

1936년 제 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대회에 출전한 손기정 선수가 결승지점을 통과하는 모습(1936.8.9.)

8월 - 일장기 말소사건

‘일장기 말소사건’은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남자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日章旗)를 삭제해 보도한 사건이다. 1936년 8월 독일 베를린에서 거행된 올림픽 대회에 일본 대표단원의 일원으로 소수의 우리 선수가 몇 개 종목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마라톤 부문에는 손기정과 남승룡 두 선수가 우승 후보로 지목 되었고 각각 금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손기정의 기록은 2시간 29분 19.2초라는, 당시 세계 기록 2시간 30분의 벽을 깬 세계 신기록이다. 당시의 민간지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는 연일 대대적으로 손기정의 우승을 보도하였다.

그런데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는 월계관을 쓴 손기정의 사진을 입수하여 각기 8월 13일에 『조선중앙일보』 조간 제4면과 『동아일보』 지방판 조간 제2면에 게재하면서 손기정의 유니폼 가슴에 그려져 있는 일장기를 지워서 실었는데, 이때까지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동아일보』가 다시 8월 25일 제2면 기사에서 손기정 유니폼의 일장기를 지워서 실었는데, 이것을 일본 관헌이 발견하고 문제 삼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8월 29일 무기 정간 처분을 당하였고, 『조선중앙일보』는 자진 휴간 후 폐간하였다.

6·7·8월
독립운동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그날의 역사 자료
권오설 수형기록카드(1928)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6·10만세운동 - 권오설 수형기록카드(1928)

1926년 6월 7일, 6·10만세운동을 3일 앞두고 체포된 권오설의 수형기록카드이다. 권오설은 6·10투쟁 특별 위원회를 조직하여 천도교, 조선공산당, 조선노동총 동맹, 학생 등 종교와 이념을 초월한 연대를 이루고 대규모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중 체포되어 1930년에 옥사하였다. 권오설이 체포된 후 전 지역에 대한 일제의 감시는 한층 더 삼엄해졌지만, 1926년 6월 10일, 융희 황제의 인산일을 기해 6·10만세운동은 일어났다.

홍종현 수형기록카드(1926)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6·10만세운동 - 홍종현 수형기록카드(1926)

6·10만세운동에 참가했던 홍종현의 수형기록카드 이다. 홍종현은 1926년 6월 10일 융희황제의 상여가 지나가자, 혈서로 쓴 깃발을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3·1운동 당시와 마찬가지로 보안법 위반 으로 징역 10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홍종현은 법정에서 조상과 자손을 위해 자신 한 몸을 희생했음을 주장하였다.

광복회 관련 판결문(1920.11)

광복회 조직 - 광복회 관련 판결문(1920.11)

공주지방법원의 사형선고에 대한 박상진·김한종 의사의 상고를 기각한다는 내용의 경성고등법원 판결문이다. 1915년 대구에서 결성된 광복회는 1910년대 대표적인 독립 운동단체로, 광복회를 이끌던 박상진과 김한종은 이 판결로 사형이 확정되었고 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순국하였다.

1936년 『동아일보』에 실린 일장기가 삭제된 손기정 선수의 모습

일장기 말소사건 - 1936년 『동아일보』에 실린 일장기가 삭제된 손기정 선수의 모습

『동아일보』는 1936년 8월 25일 자 지면에 베를린 올림픽 대회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우고 사진을 보도하였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는 8월 29일 자부터 무기 정간 처분을 당하였다.

광복 80주년 특집은 공훈전자사료관, 독립기념관 교육정보서비스 등에서 발췌한 역사적 근거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