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숨결
오래된 시간을 잇는 길
화성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오래된 시간을 잇는 길
-화성-
경기도 서남단에 자리한 화성시. 오산, 수원, 안산, 평택과 이웃하고 경기 북부지역을 제외한 경기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1시간이면 충분히 닿는 거리에 위치한다. 화성을 여행하려면 동선을 효율적으로 짜는 것이 포인트다. 이번 화성 여행은 융건릉을 시작으로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지를 거쳐 바다가 품은 아름다운 섬 제부도로 떠나본다.

융건릉으로 들어서는 초입에 소나무숲이 깊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융릉 전각
과거는 쉼이 되고, 현재는 문화가 되다
첫 여행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융릉과 건릉이다. 융릉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를 합장한 능이고, 건릉은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합장릉이다. 이른 아침인 탓에 능을 찾은 사람은 많지 않다. 숲길에는 호젓한 정취가 감돈다. 키를 가늠하기 어려운 소나무들이 하늘을 떠받들 듯 높다랗게 자랐다. 산새들의 지저귐에 숲이 깨어나고, 찬연한 아침 햇살에 간밤의 이슬은 증발한다. 뒤따르는 이나 앞서는 이가 없으니 홀로 걷는 듯하다. 장중한 숲의 풍광은 영화 <사도>에 고스란히 담겼었다. 그 덕분에 영화가 개봉된 이후 찾는 사람이 늘었다고 한다. 능원 깊은 곳에 이르자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쪽은 융릉, 반대쪽은 건릉이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당연히 아버지 능인 융릉부터 찾는다. 사후에 장조로 추존된 사도세자는 신분이 변함에 따라 무덤 역시 묘, 원, 능으로 한 단계씩 격상됐으니 사나 죽으나 시류에 따라 격변하는 것은 변함없어 보인다. 융릉은 정자각과 능의 배치가 다른 조선 왕릉과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정자각과 능은 일직선에 위치하지만, 융릉은 능에서 조금 비켜섰다. 뒤주에서 죽은 아버지를 위해 그리했다고 한다. 융릉을 뒤로하고 건릉으로 발길을 옮긴다. 이곳 역시 숲이 깊다. 한 줌의 빛이 솔잎에 부딪혀 바늘처럼 예리하게 흩어져 꽂힌다. 수백 년 전의 역사가 고요히 숨죽인 능원은 더 이상 왕의 전유물이 아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휴식과 치유의 숲이다.

화성 제암리 학살사건을 촬영하는 스코필드 선교사 조형물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
과거가 세월에 묻히면 옛날이 되지만 기억한다면 역사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를 되짚어보는 여행은 특별하다. 올해는 3·1만세운동 100년이 되는 해다. 경기도 화성에서 기록으로 남은 3·1만세운동의 흔적이 있다. 융건릉에서 발안 방면으로 향하면 발안삼거리에 이른다. 발안천이 흐르는 곳에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이 있다. 두렁바위라 불리는 이곳은 1919년 3·1만세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난 곳이다. 그날을 기억이라도 하듯 길가에는 태극기가 휘날린다. 제암리문화관을 지나자 3·1운동 순국기념탑이 마중을 나온다. 탑이 서 있는 자리는 100년 전 제암리교회가 있던 곳이다. 탑 주변에는 3·1 운동 순국기념관과 23인 순국묘지 및 상징 조각물, 3·1 정신교육관, 스코필드 선교사 동상 등이 조성되어 있다.
스코필드 선교사는 한국을 조국처럼 아끼고 사랑한 캐나다 선교사였다. 그가 우리 땅에 발을 디딘 것은 1916년 11월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로 파송을 받으면서다. 선교사인 동시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세균학 교수로 부임한 그는 3·1만세운동 사진을 찍고 취재한 외국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때 촬영한 사진을 여러 해외 언론에 기사와 함께 투고해 일제의 만행을 폭로했다. 특히 화성 제암리교회 방화·학살 사건을 해외에 알리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제암리 학살사건은 제암리 주민들이 발안장터에서 격렬한 만세운동을 벌이자 만세운동 주모자 명단을 입수한 일본 헌병 30여 명이 4월 15일 오후 2시경 제암리교회에 주민을 감금시키고 교회에 불을 지른 후, 교회를 향하여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23명을 학살하고 가옥 30여 채를 불태운 사건이다.
기념관은 제1, 2전시실로 나뉜다. 제1전시실에는 1919년 화성지역에서 전개된 3·1만세운동의 배경과 전개 과정 그리고 4월 15일 일본 군경에 의한 제암·고주리 학살, 유가족들의 증언, 그 후의 기록들을 사진과 유물, 인터뷰 영상으로 전시하고 있다. 출토유물은 유해 발굴지에서 함께 출토된 단추, 깨진 병, 교회 건물 잔해들이 대부분이다. 안타깝게도 사체는 교회 건물이 불타 무너지면서 뒤엉켜 붙어 신원 확인이 불가능했다고 한다. 제2전시실에는 ‘학살, 끝나지 않은 역사’를 주제로 기획전 ‘제노사이드(Genocide: 국민·인종·민족·종교집단을 전체 혹은 부분적으로 파괴할 의도를 가지고 실행된 행위)’가 열리고 있다. 사진과 기록들을 천천히 돌아보는 동안 인류의 어두운 단면과 비극이 극명하게 드러나 마음이 무겁다.

산책하기 좋은 제부도 제비꼬리길


빨간 등대는 제부도의 랜드마크이다
화성의 명품 걷기 길을 만나다
수도권에서 가까운 섬이라 하면 제부도가 먼저 떠오른다.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찾는 예쁜 섬이다. 제부도는 육지와 다리로 연결돼 있지 않지만 ‘모세의 기적’이라 부르는 바다 갈라짐 현상으로 차량이 오갈 수 있다. 그래서 섬인 것을 어색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항상 갈라지는 것이 아니니 섬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제부도에는 제비꼬리길이 있다. 다녀온 사람마다 명품길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제부도선착장에서 출발해 해안 데크길을 지나 탑재산 능선을 따라 출발지로 되돌아오는 코스다. 총거리가 약 2km 안팎으로 걷기에 수월한 데다 1시간 정도면 바다와 숲길을 모두 즐길 수 있다. 이 점이 제비꼬리길을 명품길의 반열에 올렸다.
제부도를 코앞에 두고 모세의 기적을 기다린다. 육안으로 보기엔 물이 빠진 것 같지만 입도를 막은 바리케이드는 아직 요지부동이다. 안전을 확인하고 나서야 바리케이드가 올라간다. 길게 늘어선 차량이 순식간에 섬에 빨려 들어가듯 이동한다. 현대판 모세의 기적은 걷거나 마차를 타지 않고 자동차로 이동한다. 육지에서 엑소더스를 시작한 사람들은 일제히 차 창문을 내린다. 바닷바람을 쐬기 위해서다. 제부도는 육지와 2km 남짓 떨어졌지만 바람의 맛이 다르다. 육지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쾌하다. 찰싹거리는 낮은 파도는 수런거리고 갈매기들은 편대로 축하비행을 한다.
제비꼬리길은 제부도선착장 등대주차장에서 출발한다. 여행자들은 의례히 붉은 등대에서 기념사진을 남긴다. 그리곤 방파제에 잇댄 낙조전망대에서 서해를 가슴에 품는다. 이제 본격적인 걷기에 나선다. 나무데크가 설치된 해안산책로는 900m 정도 이어진다. 만약 해질녘이라면 붉게 물든 서해를 벗하며 걸을 수 있다. 아직 일몰을 보기엔 이른 시각. 몇 걸음 가지 않아 포토존과 전망대가 보이고, 쉼터 의자가 놓였다. 잔잔한 해수면을 따라 수평선이 아득하다. 정적을 깨는 얄미운 녀석은 갈매기다. 새우깡에 길들었는지 사람만 보면 ‘꽥꽥’ 고함을 지르며 저공비행을 한다. 산책로에는 제부도와 화성을 상징하는 다양한 조형물들이 설치돼 있다. 제부도에 서식하는 생물들, 제부도에 얽힌 전설들, 갯벌의 신비 등 소소한 읽을거리가 있어 가다서기를 반복한다. 어느덧 산책로는 제부도 남쪽에 자리한 제부도해수욕장에 닿는다. 밀가루보다 더 고운 모래가 해안가에 뒤덮였다. 그 앞으로 자갈과 갯벌이 바다와 한 몸이 되었다. 바다와 마주한 도로변에는 음식점들이 줄 서듯 이어져 있다. 대부분 바지락칼국수와 조개구이, 회를 취급한다. 먼발치에서 호객할 뿐 가까이 오지는 않는다. 탑재산 숲길에 들기 전, 도로변에 있는 제부도 아트파크를 먼저 찾았다. 제부도 아트파크는 컨테이너 6개로 구성된 전시·조망·휴게·공연이 모두 가능한 복합문화공간이다. 운이 좋으면 수준 높은 공연이나 작품을 무료로 감상할 수도 있다고 하니 노려볼만하다. 무엇보다 서해의 감성과 감각적인 건축물이 조화를 이뤄 지역의 명소다.
다시 제비꼬리길에 올라섰다. 길은 이전과 다른 숲길 산책로다. 탑재산은 해발 66m로 나지막하다. 해송이 우거져 조망은 좋지 않지만 숲 특유의 상쾌함은 바다에서 느낄 수 없는 묘미다. 탑재산전망대에 이르자 숲길이 막바지에 이른다. 제부도선착장은 물론이고 제부도 진입로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루의 마감이 일몰에 있듯, 여행의 마감 역시 일몰 감상으로 마침표를 찍으련다. 제부도 일몰 포인트는 궁평항과 전곡항 어느 곳이든 괜찮다. 두 곳 모두 서해의 낭만이 고스란히 녹아 있으니. 전곡항은 요트와 보트가 접안해 이국적인 멋이 흐르고, 궁평항은 포구의 서정미가 가슴에 깊이 아로새겨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