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오늘 세계의 그날

잃어버린 10년과
동학농민운동

잃어버린 10년과<BR />동학농민운동
    


글 강응천 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역사저술가



잃어버린 10년과

동학농민운동


  

1884년 자주적 근대화를 시도한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조선 왕조는 활력을 잃어버렸다. 일본의 지원에 의존했던 급진개화파는 민중의신뢰를 상실하고, 청군을 불러들여 위기를 넘긴 수구 세력은 원칙도 소신도 없이 기득권을 지키는 데 급급했다. 열강의 검은 손길은 점점 더 조선의 목을 죄어 왔다. 청과 일본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가운데 부동항을 찾는 러시아도 틈새를 파고들었다. 부패하고 무능한 권력과 탐욕스러운 외세가 조선을 사지로 몰아가던 1894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농민들이 일어났다.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들고 일어난 동학농민군과 조선의민중에게 갑신정변 실패 이후의 세월은 잃어버린 10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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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에렉투스의 두개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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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릴리엔탈과 그가 세계 최초로 발명한 비행기 '글라이더'가 그려진 우표



인류, 날아오르다

1891년, 네덜란드의 해부학자이자 지질학자인 뒤부아는 인도네시아 자와섬의 솔로강 유역에서 중대한 발견을 했다. 아래턱뼈 조각과 두개골, 넓적다리뼈로 이루어진 고인류의 화석을 찾아낸 것이다. 뒤부아가 이 화석에 붙인 이름은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직립한 원숭이 사람)’였다. 원숭이과 짐승에서 인간으로 발전하는 진화의 중간 단계에 있는 화석이라는 뜻이다. 화석은 작은 두뇌, 송곳니가 겹쳐 있는 치아 등 유인원의 특성뿐 아니라 현생인류와비슷한 특징도 가지고 있었다. 완전한 직립 자세로 걸어다녔으리라 추측하게 하는 넓적다리뼈가 그중 하나였다. 훗날 이 화석은 유인원이 아니라 고인류라는 사실이 밝혀져 ‘자와 원인(原人)’으로 불리고 ‘호모 에렉투스’라는 학명을 얻었다. 오늘날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류는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뿐이지만 옛날에는 자와 원인, 네안데르탈인 등 우리와는 다른 종(種)의 인류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다양한 요인이 작용하는 진화 과정에서 이들 다른인류는 모두 멸종하고 우리만 살아남았다.
호모 사피엔스를 유일한 인류로 살아남게 한 요인은 무엇일까? 많은 학자들이 생각하고 학습하는 능력을 이야기한다. 인간은 특유의 사고력을 통해 자연의 세계를 탐구하고 모방해왔으며, 끝내는 자연을 극복하고 이용한다. 호모 에렉투스라는 인류 진화의 연결 고리가 발견된 1891년, 자연을 모방하고 이를 뛰어넘는 인간의 능력은 또 한 번의 신기원을  이룩했다.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의 모습을 관찰하고 연구한 끝에 마침내 인간 스스로 하늘을 날아올라 중력의 법칙을 극복하게 된 것이다. 비행은 인류의 숙원이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신화의 주인공 이카로스를 통해 그 꿈을 꾸었고, 르네상스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비행체의 과학적 원리에 접근했다. 마침내 꿈을 현실로 바꾼 주인공은 독일의 공학자 오토 릴리엔탈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새의 비행을 관찰한 끝에 1889년 새가 하늘을 나는 과학적 원리를 책으로 펴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양쪽에 10m 길이의 날개를 단 비행체를 만들었다. 아직 동력이 될 모터는 달지 않았다. 이 비행체는 기류의 흐름을 읽고 팔다리를 이용해 무게중심을 잡으며 활강하는 방식으로 하늘을 날았다. 공중을 미끄러지듯 난다고 해서 이 최초의 비행체에는 ‘글라이더’라는 이름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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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사회 개혁 운동을 이끈 호세 리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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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참정권운동을 주도한 뉴질랜드의 여성운동가 케이트 셰퍼드



인류의 공존을 향하여

멸종한 다른 인류에 비해 현생인류가 우월했던 또 한 가지는 언어 능력이었다. 고도로 발달한 발성 기관에서 나오는 다양한 음성 기호들은 수많은 사람 사이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학습을 통해 얻은 지식을 빠른 속도로 전파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사람들의 공감 능력을 증진하고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발달시켰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인류는 스스로 공동체의 범위를 좁히고 같은 인류끼리 차별하거나 적대하는 잘못을 범해 왔다. 좀 더 빨리 발달한 국가가 후진국을 침략하고 지배하는 제국주의는 그러한 잘못의 최신 버전이었다. 그런가 하면 육체적으로 힘이 세다는 이유만으로 남성이 여성 위에 군림하는 남성우월주의는 그러한 잘못의 가장 오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신구의 불평등은 현생인류를 살아남게 만든 공감 능력에 위배되는 현상이었다.

1890년대에는 이러한 반인륜적인 불평등 상태를 극복하려는 인류의 노력에도 조금씩 시동이 걸렸다.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움직임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났다. 1892년에는 필리핀의 호세 리살이라는 젊은이가 이 움직임에 동참했다. 필리핀은 에스파냐의 탐험가 마젤란이 그곳에 도착한 이래 300여 년 동안 에스파냐의 식민 통치를 받아 왔다. 호세 리살은 마닐라에서 비폭력 단체인 필리핀민족동맹을 만들고 사회 개혁 운동을 벌여 나갔다. 그는 이미 10년 전 에스파냐 유학 시절부터 필리핀 유학생 단체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자신의 조국은 필리핀이라고 외쳐 온 혁명가였다. 에스파냐 식민 정부는 리살을 다피탄섬으로 추방했으나 그가 뿌린 반제국주의투쟁의 씨앗은 결코 죽지 않았다.

남녀평등을 향한 인류의 오랜 노력은 1893년 들어 중대한 결실을 맺었다. 그해 11월 23일 뉴질랜드에서 세계 최초로 여성이 투표권을 행사한 총선거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여성 투표권자의 약 65%가 투표에 참여했다. 1793년 프랑스 여성운동가 올랭프 드 구주는 “여성이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의정 단상에도 오를 권리가 있다”는 말을 남긴 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정확히 100년 만에 여성참정권운동의 위대한 승리가 실현된 것이다. 승리의 주역은 1870년대부터 뉴질랜드의 여성운동을 주도한 케이트 셰퍼드였다. 남성 의원들은 여성이 있어야 할 곳은 가정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셰퍼드는 여성도 남성처럼 법률의 영향을 받는 시민이므로 당연히 입법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고 맞섰다. 나아가 여성은 남성에게 없는 섬세함으로 정치 구조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잠자고 있던 ‘세상의 절반’을 깨워 남녀가 공존하고 협력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나갈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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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백산봉기 기록화



조선의 운명, 하와이의 운명

공존을 향한 인류의 투쟁은 1890년대의 한반도도 비껴가지 않았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두 가지 점에서 세계사의 흐름과 코드를 맞추고 있다. 동학농민군의 조직적 기반이 된 동학은 각급 교단의 지도자를 뽑을 때 여성 교도에게 남성 교도와 동등한 선거권을 주었다. 뉴질랜드처럼 국가적 차원에서 참정권을 준 것은 아니지만 여성에게 투표권을 준 사례로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앞선 것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은 1892년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당한 동학 교주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고 동학을 합법화하라는 요구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주로 동학교도가 참여했으나 점차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분노한 일반 농민의 참여가 두드러지고 외세를 몰아내자는 구호도 등장했다. 1894년 2월에는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혹한 수탈에 맞선 민란이 일어났다.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가 부당한 탄압을 가하자 민란은 농민군의 봉기로 확대되었다. 그들은 황토현에서 관군을 전멸시킨 데 이어 5월 말에는 호남의 중심인 전주성마저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농민군의 기세에 놀란 정부는 강화조약을 제안하는 한편 청에 농민군 진압을 위한 군대 파견을 요청했다. 청이 이에 호응해 군대를 파견하자 일본도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인천항에 자국 군대를 들여보냈다. 농민군은 청·일 군대가 조선 땅에 주둔할 명분을 없애기 위해 정부와 화약을 맺고 전주성을 비워주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철수하기는커녕 경복궁을 점령해 자국에 유리한 개혁을강요하고, 청군을 공격해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농민군은 다시 봉기했으나 이제는 정부군뿐 아니라 일본군을 상대로도 전쟁을 벌여야 했다.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은 체포되어 사형당하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정치·경제적 침략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

같은 시기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아름다운 섬 하와이에도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하와이왕국을 통째로 차지하려는 미국 사탕수수 업자들의 선동으로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하와이왕국은 1875년 이미 미국을 제외한 어떤 나라와도 외교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조약을 맺고 사실상 미국의 속령이 된 바 있었다. 하와이왕국의 마지막 왕인 릴리우칼라니 여왕은 이에 강력히 저항했다. 그러자 미국인들이 해군의 도움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왕국을 무너뜨리고 백인들의 하와이공화국을 탄생시킨 것이다. 4년 뒤인 1898년 7월 4일 하와이는 결국 미국에 병합되고 말았다. 우리가 연인들의 이별가로만 알고 있는 <알로하 오에>는 릴리우칼라니 여왕이 비통한 심정으로 하와이에 이별을 고하는 노래였다.


희망은 살아 있다

청일전쟁을 마무리하고 조선을 일본의 손아귀로 움켜쥐기 위한 시모노세키조약은 1895년 4월 17일 체결되었다. 그보다 조금 앞선 4월 8일, 난센이 이끄는 프람(Fram)호 북극탐험대가 북위 86° 14´ 지점에 닿았다. 20여 일 동안 개썰매와 카약을 타고 북쪽으로 달린 끝에 북극을 정복한 것이다. 프람호는 난센이 직접 설계해 건조한 배로, 전진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뿐인 인류를 분열과 대립으로 몰아넣는 제국주의의 광풍 속에서도 하늘을 날고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는 인류의 꿈은 포기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하나둘 현실이 되고 있었다. 세기말의 혼돈이 계속되는 중에도 인류의 희망은 아직 살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