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중국 하이난섬의 일제 강제징용 희생자 유해 봉환

못 하는가,  안 하는가?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BR />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그림 같은 해변·기암괴석·야자수…, 남국 정취가 물씬 풍기는 열대지대로 ‘동양의 하와이’로 불리는 중국 하이난섬. 이러한 찬사와 달리 그곳에는 일제강점기에 강제징용된 한인들의 유해가 방치되어 있다. 이번 호는 여전히 ‘역사의 냉대’를 받는 그들의 얘기를 하고자 한다. 


‘천인갱’이라 불리는 조선인 천 명이 묻힌 곳

중일전쟁이 한참이던 1939년 2월, 일제는 남방 침략의 거점을 만들고자 하이난을 점령하였다. 그 뒤 일제는 중국·홍콩·타이완 등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한인들을 강제동원하여 비행장·항만 등을 건설해 군사기지를 만들고, 철광석 등의 자원을 약탈하였다. 또한 일제가 설치한 일본군 위안소에 적지 않은 한인 여성들이 끌려왔다. 이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1943년 봄부터 패망 직전까지 한인 2천여 명을 하이난으로 끌고 왔다. 전쟁에서 다급해진 일제는 자원착취를 강화하고자, 서대문형무소 등 전국 12곳(평양·신의주 등 북한 수형자 1,100명 포함)의 감옥 수형자들까지 ‘남방파견보국대(조선보국대)’라는 이름으로 동원한 것이다. 일제는 “하이난에 가면 형량을 감해준다”, “높은 월급을 준다”라면서 그들을 속였다.  

이들은 발목에 족쇄를 찬 채 10명 혹은 20명씩 한 개조를 이뤄 일본군의 총칼 아래 석록광산·전독광산 등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일본군은 그들이 조금이라도 불복하면 매질하였고, 도망치다 붙잡혀온 이들은 고문에 생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매일 고된 노역이 끝나면 그들을 군영에 감금시켰고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으면 모두 한곳에 매장했다. 특히 일제가 패망 직후 하이난 싼야시(三亞市) 애현 지역에 고립된 일본군은 한인 징용자 1,200여 명을 난딩촌(南丁村) 기슭에 끌고 가서 총알을 아낀다며 이들을 칼로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그곳에 집단매장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군이 물러간 뒤, 그곳 주민들 사이에 종종 귀신을 보았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들 대부분은 여족(黎族)임에도 그들의 원혼을 달래주고자 마을 이름을 ‘조선촌(朝鮮村)’으로 고쳐 불렀다. 1975년에 이곳은 ‘삼라촌’으로 바뀌었지만, 촌민들은 여전히 ‘조선촌’이라 부른다. 마을 입구에는 ‘조선촌 천인갱(朝鮮族 千人坑; 조선인 천 명이 묻힌 곳)’이란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이외에도 그들의 작업장이었던 석록광산·전독광산 근처에는 중국 정부가 세운 ‘만인갱(萬人坑)’이란 표지판과 이들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여럿 세워져 있다. 


광복 후 50년이 지나서야 알려진 참상

이들의 참상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광복 후 50년이 지나서였다. 1995년 하이난성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는 싼야시 주민 중 70세 이상 노인 50여 명을 구술 조사한 뒤에 「철제하적성풍혈우(鐵蹄下的腥風血雨; 말발굽 아래서 일어난 피바람과 같은 혈우)」라는 자료를 발간하였고,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98년 3월 그 자료가 국내에 전해지면서 비로소 그러한 사실이 알려졌다. 1998년 8월, 석록광산에서 5년간 강제노역에 시달렸던 장달옹(당시 태평양전쟁 강제연행 한국생존자협의회 미주 회장) 씨가 KBS-2TV <해남도에 묻힌 조선 혼> 프로그램에 출연해 당시의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실은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그런데 정부가 아닌 하이난에서 망고사업을 하던 서재홍 씨가 1999년 9월 1일, 싼야시 정부의 허가를 받아 그곳에 ‘일구시기수박해조선동포사망추모비(日寇時期受迫害朝鮮同胞死亡追慕碑; 일제시기 박해를 받아 숨진 조선동포 추모비)’와 비문을 세웠다. 또한 그는 삼라촌민위원회와 ‘천인갱’ 주변 땅 3만3천㎡를 30년 도급 계약을 맺었다. 2001년 1월 그는 한국에서 유해 발굴 전문가 등을 초청하여 두 달 남짓 유해를 발굴한 결과, 한인 유해 109구를 수습했다. 일부 유해의 손목에는 철사로 만든 수갑이 채워져 있었고, 두개골에는 굵은 쇠못이 박혀 있었다. 그 가운데 104개 유골은 화장하여 단지에 넣어 보관실에 진열하고, 비교적 보존이 잘된 유해 5구는 유리관에 넣어 보관하였다. 이는 2001년 3월 MBC <하이난 섬의 대학살> 프로그램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민간에서 시작한 희생자 유골 봉환 추진

하지만 하이난섬의 ‘천인갱’은 정부와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그러다 서재홍 씨가 자금난으로 5년간 토지사용료를 내지 못하면서 도급 계약이 취소되었다. 이때 하이난 집단학살에 관심을 보인 것은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이하 ‘모임’)이었다. 이 모임은 1997년 9월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시민들이 결성한 단체인데, 1998년 6월 하이난을 방문하여 참상을 확인하였다. 이후 모임은 2002년 4월 김대중 대통령에게, 2003년 5월에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하이난 학살의 진상규명과 유해 봉환 등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답변을 듣지 못했다. 또한 이들은 2004년 9월 일본 정부에도 진상규명을 요청했지만 소용없었다.     

그 후 2003년 3월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이를 근거로 2004년 11월 위원회가 공식 출범하자, ‘모임’은 위원회에 공동 발굴과 진상규명을 제안했다. 당시 ‘천인갱’ 일대가 중국의 개발업자에게 넘어갈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2005년 1월 정부가 일본·중국·동남아 등지의 강제동원 희생자들의 유골 봉환을 위해 일본 측에 실태조사를 제의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런 가운데 ‘모임’은 이를 더는 방치하면 안 된다고 판단하여 2006년 5월 독자적으로 발굴을 시도하였다. 이를 통해 진상을 밝히고 한국 측의 전면적 발굴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위원회가 실태조사를 통해 2006년 「조선보국대 진상조사보고서」를 작성하여 113명의 피해자를 확인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다가 발굴은 하이난성 정부에 의해 중단되었고, 2008년 여름 ‘조선촌’을 횡단하는 고속도로 건설이 시작되면서 ‘천인갱’ 주변은 파헤쳐지고 말았다. 이 무렵 한국 정부가 추모비 건립을 검토하였지만 실행되지 못했다. 


진상규명과 유해 발굴·봉환은 국가의 책무

그 뒤 또다시 하이난은 잊혔다. 2012년 8월 대한민국 예비역 영관장교연합회가 「중국 해남도 조선촌 천인갱의 진실을 알린다」라는 책자를 발간하고, 2015년 8월 KBS 1TV에서 ‘천인갱, 70년의 기다림’ 프로그램이 방송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부 차원에서 하이난에 대한 추가 진상조사 없이 2015년 12월 위원회는 해산됐다. 그 사이에 ‘천인갱’ 부지는 예전보다 20분의 1에 불과한 1천6백㎡로 쪼그라들었고 근처에는 고속도로와 고속철도가 들어섰으며, 코앞까지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나마 남아 있던 ‘천인갱’ 주변의 담장은 곳곳이 허물어졌고 현지 주민이 몰래 버린 관들이 쌓였으며, 추모관 바로 옆에는 돼지우리가 지어져 심한 악취까지 진동했다. 더욱이 유골함 절반은 텅 비었고 유리관에 모셔져 있던 유골 5구는 모두 사라졌다.      

이런 중에 2018년 국내의 중소 부동산 시행업체 ‘다담’ 회사가 발 벗고 나섰다. 다담은 재단법인 ‘천인갱’을 설립하고 그나마 남아 있던 '천인갱'을 보존하고자 토지이용료를 지급하는 한편, ‘하이난천인갱희생자추모회’를 조직하여 진상규명과 유해 발굴·봉환 등에 애쓰고 있다. 위원회 사업을 넘겨받은 행정안전부 산하 과거사 관련 업무지원단은 진상조사 기능이 없다며 유해 발굴은 민간단체에 떠넘기고, “진상조사가 안 된 강제징용피해자 유해는 정부가 나서서 수습할 수 없다”라는 주장만 반복한다. 민간 차원에서 추진 중이던 발굴·유해 봉환은 현재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중단된 상태다.         

일제강점기 국외로 강제동원된 인원 125만여 명 중 20만여 명이 돌아오지 못했다. 지금까지 위패라도 돌아온 경우는 1만 2,000여 명으로 6%에 불과하고 이마저도 대부분은 민간단체가 봉환해온 것이다. ‘천인갱’은 한인 강제징용피해자의 집단매장지로 유일한 곳이지만, 그곳 개발붐에 언제 사라질지 모를 일이다.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진상규명과 유해 발굴·봉환 등 그 어느 것도 이뤄질 수 없다. 나라 없는 식민지인으로 머나먼 타지에 끌려와 학살당한 원혼들을 달래는 일은 우리 후손들의 몫이자 국가의 존재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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