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숨은 역사

천(千)의 얼굴을 가진 국제도시
인천광역시

천(千)의 얼굴을 가진 국제도시<BR />인천광역시

글·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


천(千)의 얼굴을 가진 국제도시
인천광역시


인천은 광대(廣大)한 도시다. 섬을 포함한 땅 넓이도 그렇지만 발전 속도가 예사롭지 않다. 변화가 미덕일 수는 없지만 글로벌 시대에 발맞춰 이곳도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고 있다. 천혜의 자연과 전통이 살아 숨 쉬는 동시에 현대의 발전까지 아우르고 있어 다양한 재미를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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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차이나타운

        

한국 속 작은 중국, 그 속에 우리 역사

인천은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다. 그래서 예부터 중국인들이 유난히 많이 몰려들었다. 인천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차이나타운은 중국의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개항 이후 모여들기 시작한 화교들은 선린동과 북성동 일대에 상가와 집을 짓고 그들만의 생활문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한국전쟁 이후 쇠퇴의 길을 걷나 싶더니, 시(市)의 적극적인 활성화 정책으로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다. 거리 곳곳마다 문전성시를 이루는 중국집부터 삼국지의 명장면인 적벽대전이 그려진 벽화와 공자 동상 등은 중국을 가지 않아도 중국의 다양한 문화를 느낄 수 있으며 기념품 가게도 수두룩하다.

차이나타운에서 이어지는 돌계단을 따라 오르면 자유공원으로 이어진다. 인천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대한민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으로, 노을과 야경이 아름답기로도 유명하다. 공원에 자리 잡은 맥아더장군상과 한미수교100주년기념탑·석정루·연오정·학익고인돌·충혼탑·홍예문·인천역사자료관·제물포구락부 등은 인천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상징한다.

1919년 3월 9일 자유공원에서는 기독교 신자와 학생 등 300여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강제 해산 당했다. 당시 인천은 일본 도쿄(東京)에서 시작된 2·8독립선언 소식이 국내로 전달되는 통로이기도 했다. 일제의 감시도 그만큼 삼엄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지역 종교 대표자 20여 명이 한성정부 수립을 선포하기 위해 엄지손가락에 흰 종이나 헝겊을 두르고 이곳 자유공원에서 비밀리에 모임을 가졌었다. 오늘날 이곳은 더위를 피해 그늘을 드리운 벚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휴식을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차이나타운 한쪽 주택가에는 독립운동의 역사가 담긴 유적지가 하나 있다. 스무 살의 청년 백범 김구가 1896년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 장교 쓰치다를 살해한 치하포 사건으로 수감됐다가 탈옥했던 인천감리서 터다. 사형을 선고받고 감리서에서 탈옥한 김구는 다시 서대문감옥에 갇혔다가 3년 뒤 인천감옥으로 이감된다. 당시 감리서는 개항장 사무를 관장하던 기관으로, 원래 동구 화도진에 있던 것을 이듬해 중구 내동으로 옮겼다. 행정·통상·사법 기능을 총괄했던 곳으로 개항장 재판소와 감옥도 갖추고 있었다. 지금은 인천감리서 터임을 알리는 안내판만 남아 있다.

김구에게 인천은 제2의 고향과도 같다. 황해도 해주에 살던 그의 부모는 김구를 따라 인천에 터를 잡았다. 그의 부친 김순영은 감옥에 갇힌 아들을 구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어머니 곽낙원도 객줏집에서 일을 도우며 옥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대한)민국 28년(1946)을 맞이하자 나는 38선 이남 지방순회를 시작했다. 제1차로 인천을 순시했는데, 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라 할 수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김구는 1945년 11월 말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고국으로 돌아와 지방순회를 하면서 가장 먼저 인천을 찾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한지 햇수로 27년 만이었다. 이렇듯 김구와의 인연이 깊은 까닭일까, 인천대공원 숲속에는 김구와 그의 어머니 곽낙원의 동상이 나란히 서서 아픈 역사의 교훈을 후세에게 알려주고 있다.

차이나타운: 인천광역시 중구 차이나타운로 59번길 12

인천자유공원: 인천광역시 중구 자유공원남로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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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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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감리서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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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와 곽낙원 여사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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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래시장에서 출출함 달래고 월미도로

차이나타운이 있는 신포동 일대는 재래시장이 발달했다. 신포국제시장은 그 역사가 100년이 넘는다. 시장 골목에 들어서면 매콤하고 달콤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너도 나도 사가려고 길게 줄을 서 기다리는 바삭바삭한 닭강정부터 속이 텅 빈 공갈빵, 화덕에서 구운 만두까지 입맛을 다시게 하는 먹거리가 즐비하다.

신포국제시장에서 출출한 배를 채우고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월미도로 건너가 보면, 시원하게 펼쳐진 인천 앞바다와 바이킹 등 아찔한 놀이기구가 있는 월미테마파크, 섬 한편에 자리한 한국이민사박물관 등이 있다.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는 하와이를 시작으로 멕시코·쿠바·브라질 등으로 이어진 우리나라 이민자들의 애환 어린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박물관 오른쪽으로 보이는 인천항의 내항은 분주하다. 중국을 오가는 여객선과 대형 화물선, 선적을 기다리는 수많은 자동차와 철제품을 보면 삶의 활력이 솟는다. 내항 안쪽에는 인천항과 갑문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전시한 인천항 갑문홍보관이 있는데, 이곳 5층 전망대에 오르면 갑문과 내항 일대를 바라볼 수 있다.

신포국제시장: 인천광역시 중구 우현로 49번길 11-5

한국이민사박물관: 인천광역시 중구 월미로 329 / 032-440-4710 / mkeh.incheon.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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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포국제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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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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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민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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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종도에 우뚝 솟은 백운산

영종대교를 건너 인천공항 쪽으로 향하다 보면 왼쪽으로 완만한 산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아침저녁으로 구름과 안개가 짙게 끼고 저녁노을이 비칠 때면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샘물을 마시며 놀고 간다고 전해지는 백운산이다. 제법 가파른 산길을 따라 정상에 오르면 인천국제공항과 인천 앞바다에 떠 있는 섬들이 그림처럼 다가온다. 송도와 공항을 잇는 인천대교와 신공항고속도로, 영종대교도 한눈에 들어온다. 백운산을 기준으로 북쪽이 운북동, 서쪽이 운서동, 남쪽이 운남동인데 하루가 다르게 고층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해넘이 시각에 맞춰 오르면 수평선을 물들이며 스러지는 서해 낙조도 볼 수 있다.

백운산 허리쯤에는 천년 고찰 용궁사가 자리 잡고 있다. 절 앞마당에는 수령 1,300여 년을 헤아리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그 역사를 짐작케 한다. 용궁사는 신라 문무왕 10년인 670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창건 이후 구담사 또는 백운사라 불리다가, 1854년 흥선대원군이 중건하면서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런 사실은 흥선대원군이 쓴 ‘용궁사(龍宮寺)’란 현판에서 잘 드러난다. 현판 글씨 옆에 석파(石坡)라는 대원군의 호와 중건 시기가 함께 적혀있어 대원군이 쓴 현판임을 알 수 있다. 용궁사 뒤편 산길을 넘어가면 약수암이란 작은 암자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바다 전경 또한 일품이다.

용궁사: 인천광역시 중구 운남로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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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산 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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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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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와 한강을 잇는 아라뱃길 따라서

경인 아라뱃길은 서해와 한강을 이어주는 길이 18km의 물길이다. 23층 전망대에 올라 아라뱃길과 여객터미널·서해갑문·영종대교 등을 바라보면 가슴이 탁 트인다. 아라뱃길을 제대로 느끼려면 유람선을 타거나 물길과 나란히 달리는 자전거가 좋다. 이곳은 4대강 국토 종주 자전거 길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아라뱃길 옆의 계양구 장기동에도 인천 지역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된 상징물이 있다. 1910년대 인천의 대표적인 오일장(3, 8일장)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황어장터가 그것이다. 3·1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장이 섰던 자리에 기념탑과 기념관을 세웠다. 기념관 내부에는 황어장터 만세운동에 대한 기록들과 기미독립선언서·당시 신문기사·애국지사들의 재판기록들이 전시되어 있다. 황어장터라는 명칭은 옛날 이 일대에서 잉어과의 민물고기인 황어가 많이 잡히고 거래된 데서 유래됐다. 1919년 3월 24일 심혁성 지사의 주도로 계양 주민 600여 명이 일제의 탄압에 항거, 이곳에서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한편, 인천지역의 독립운동은 이곳 황어장터를 위시해 동구·남구·강화도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발상지가 된 동구의 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에는 이를 기념하는 석비가 세워져 있다. 강화도는 전국적으로도 손꼽히는 만세운동이 펼쳐졌던 곳으로 강화 출신 독립운동가가 무려 31명에 달한다. 고학년 학생들이 항일 동맹휴학을 일으키고 거리로 나와 독립만세를 외쳤던 창영초등학교 구 교사(校舍)는 고풍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긴다. 1922년 붉은 벽돌로 길게 지었는데, 지붕에는 아랫방을 밝게 하기 위해 지붕창이라 부르는 도머(Dormer)창을 두었고 현관과 1층 창문은 반아치로, 2층은 수평아치로 마무리한 것이 초기 근대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황어장터 3·1만세운동기념관: 인천광역시 계양구 황어로 126번길 9 / 032-430-7948

창영초등학교 구 교사: 인천 동구 금창로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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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뱃길 옆 자전거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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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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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영초등학교 구 교사(校舍)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 겸 수필가. 현재 『월간 비타민』, 『건설경제신문』, 『서울우유』, 『냉동공조신문』에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다. 여행 저서로는 『여름 이야기』, 『7가지 테마가 있는 여행』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