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 애국부인회 서기로서 역할을 다하다
둘, 전염병을 쫓으려 한 웃지 못할 방책

하나, 애국부인회 서기로서 역할을 다하다<BR />둘, 전염병을 쫓으려 한 웃지 못할 방책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

글 조은경 독립기념관 학예연구사


신의경,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서기로서 역할을 다하다


고어에 이르기를 나라를 내 집같이 사랑하라 했거니와 가족으로서 제 집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집이 완전할 수 없고 국민으로서 제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나라를 보존하기 어려운 것은 아무리 우부우부(愚夫愚婦)라 할지라도 널리 알 수 있다. 아! 우리 부인도 국민 중의 한 사람이다. 국권과 인권을 회복하려는 목표를 향해 전진하되 후퇴할 수는 없다. 의식 있는 부인은 용기를 분발해 그 이상에 상통함으로써 단합을 견고히 하고 일제히 찬동해 줄 것을 희망하는 바이다.
-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설립 취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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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감옥소에서 가족에게 보낸 옥중 서신(19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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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대국감옥소 복역동지들

(숫자 순서대로 김영순·황애덕·이혜경·신의경·장선희·이정숙·백신영·신마리아·유인경)


           

여성들이 모여 항일운동을 결집하다
애국부인회 간부들은 나라사랑을 자신의 몸처럼 여기라는 굳은 신념을 갖고 군자금을 마련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냈다. 이러한 활동은 일경에 발각되어 1919년 11월 28일 애국부인회는 급습을 받았다. 무장경찰과 형사 10여 명은 정신여학교에 들어와 임원진을 강제로 연행하였다. 이 가운데 애국부인회 간부들은 첫째로 동지들의 이름을 팔지 말자, 둘째로 회의 내용을 누설하지 말자, 셋째로 어떠한 희생이라도 각오하고 책임은 간부들이 지자는 당찬 결의를 한다.


굳건한 독립운동 의지를 밝히다
굳은 각오는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수많은 회원들이 잡혀갔다. 당시 조선총독부 고등경찰보고서에 따르면 검거된 회원은 세브란스 간호원 29명, 정신여학교 교원 11명, 동대문 부인병원 간호원 13명, 기타 27명 등 80명에 달하였다. 그중 간부는 회장 신마리아, 부회장 이혜경, 총무부장 황에스더, 서기 김영순·신의경, 재무부장 장선희, 적십자부장 이정숙, 결사대장 백신영 등이었다.
검거되기 일주일 전 신의경은 외동딸이 잡혀갈 것을 염려하는 어머니의 말에 자신의 굳센 의지를 밝혔다. “어머니 지금 우리는 열강에 독립을 호소하고 나라를 찾을 때입니다. 국민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나서야 합니다.”


어머니의 백절불굴 정신을 계승하다
신의경은 1897년 2월 21일 아버지 신정우와 어머니 신마리아 사이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정신여학교에 재학하던 그녀는 졸업 후엔 혁명운동에 몸 바치리라 결심했다. 어머니는 그녀의 은사이자 열렬한 후원자였다. “우리 어머니가 부유한 재산을 남겼더라면 다 방종했을 것이다. 일찍 어머니를 잃은 우리들은 갖가지 시련을 감내해야 했다. 어머니가 남기신 것은 자립심과 백절불굴의 정신이었다.”
여성교육자 신마리아는 원래 광산 김씨지만 남편의 성을 따서 ‘신’씨가 되었다. 그녀는 정신여학교 졸업 후 모교의 학감으로 있으면서 성경과 수학을 가르치는 한편 여성교육과 교회봉사에 진력했다. 미국 유학으로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현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에서 수학하여, 1900년 6월 한국 최초로 여의사가 된 박에스터(본명 김점동)가 신의경의 이모이기도 하다. 이러한 가족관계는 신의경이 일찍이 민족문제에 눈을 뜨게 된 요인이 되었다.


수감 중에 어머니가 타계하다
어릴 적부터 유달리 병치레가 잦던 외동딸 신의경이 구속되자 어머니와 할머니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특히 정신여학교 교감이던 어머니는 교무실에서 금지옥엽으로 키운 딸과 사랑하는 제자들이 체포되는 상황을 지켜봐야 했다. 딸이 대구감옥소에 수감 중이던 1921년 6월, 어머니 신마리아는 4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신의경은 어머니의 죽음을 3개월 뒤 출소하고 나서야 알게 되고 실신하였다. 충격은 너무도 크게 다가왔으나 그녀는 고난 속에서도 굳은 신앙심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꿋꿋이 걸어 나갔다.
신의경은 1922년 한국YWCA 발족 후 헌장제정위원, 1923년 서기, 1926년 부회장, 1927년부터 1934년까지는 연합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여성운동 활성화를 위한 일환으로 지방회 조직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한편 일제는 한일 기독교 일제화운동의 일환으로 기독교계에 압박을 가하고 지도여성들에게 각종 협력을 강요하였다. 신의경은 이에 1939년부터 모든 공직을 사임하고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광복 이후 좌우합작운동에 나서다
신의경은 1946년 6월 홍은경·이숙경·박양무·김성실 등을 규합하여 독립된 조직체로서 한국YWCA 재건을 서둘렀다. 굳건한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여성단체의 면모를 확립하기 위해 특히 회관을 마련하는 데 주력했고, 바쁜 와중에도 입법위원으로 2년간 정치에 참여하였다.
목숨을 걸고 혁명운동을 주도했던 신의경은 극우와 극좌의 대립에 편승하지 않았다. YWCA 내부에서는 “김구 선생과 같이 오로지 통일을 주장하며 중간노선을 걸었다”고 그녀를 공산당으로 모함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전혀 굴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행동했다. 그녀는 YWCA 활동 외에도 대한예수교 장로회 여전도대회 회장·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중앙위원 등을 지냈다. “사회로부터 고립, 박해와 곤욕 속에서도 두세 사람만 마음이 맞으면 못할 것이 없다”는 명언을 남긴 그녀는 1988년 1월 91세 나이로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둘]

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


전염병을 쫓으려 한 사람들의 웃지 못할 방책


1921년 4월 27일자 <동아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경성부 위생계에서는 전염병을 예방할 목적으로, 병균 전파의 제1요인인 파리를 사들이게 되었다. 한 마리에 3리씩의 정가를 주고 1921년 4월 25일부터 사들이기 시작했는데, 파리를 팔러 온 사람들이 5백여 명에 이르렀고, 이들이 잡아온 파리는 무려 14만 마리였다.
조선총독부 경성부 위생계는 이처럼 전염병을 예방할 목적으로 사람들로부터 파리를 사들이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파리에 매긴 값이 불러일으킨 변화
파리는 콜레라·장티푸스·이질 등 무서운 전염병을 옮기는 해충이었기에 위생계의 계획은 파리를 돈을 주고 사들여 그 수를 줄이려 한 것이었다. 그런데 첫날 접수를 받아 보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파리를 팔기 위해 몰려들었다. 덕분에 위생계 관리들은 사람들을 맞느라 다른 일을 할 수 없었고, 예상보다 많은 돈이 파리를 사들이는 데 들어갔다.
“이거 참 야단났습니다. 첫날이 이 정도라면 파리를 사려고 준비한 돈이 금세 바닥나겠어요.” “그럼 어쩌지? 파리를 사겠다고 광고를 다 했는데, 사람들에게 이제 그만 오라고 할 수도 없잖아.” “다른 방법을 찾아야죠. 차라리 파리 값을 크게 내리는 게 어떨까요? 한 마리에 3리씩 주던 것에서 1리씩 주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덜 오지 않을까요?” “그래, 그 방법밖에 없겠어. 값을 내리는 거야.” 관리들은 머리를 맞댄 끝에 결정을 내렸다.
다음날부터 위생계는 파리 한 마리 값을 1리로 내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별 소용이 없었다. 파리가 돈이 된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첫날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오히려 예산보다 수십 배나 더 많은 돈을 지출하게 된 것이다. 결국 위생계는 파리를 사들이는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주민들의 항의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파리를 사들인다고 실컷 광고해놓고 이틀 만에 그만두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말입니다.” “이런, 그럼 어쩌지? 한 마리에 1리씩 쳐도 지출이 어마어마한데 말이야….” “할 수 없이 값을 더 내려야죠 뭐. 파리 한 홉에 5전씩 매기는 거예요.” 이리하여 위생계는 이전보다도 값을 더 내려 파리를 사들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값을 너무 내렸는지 파리를 팔러 오는 사람이 크게 줄어들었다. 위생계 관리들은 울상이 되었다.
“이렇게 호응이 없으면 이 일을 계속 시행할 수 없는데….” “그렇다고 다시 예전 가격으로 올릴 수는 없잖아요. 차라리 이번 기회에 계몽운동으로 홍보 방식을 바꾸지요. ‘파리 잡아 병 쫓고 돈 버니, 누이 좋고 매부 좋다’ 하는 식으로 떠들면 사람들의 관심을 다시 끌 수 있지 않을까요?” “오, 그거 좋은 생각이야. 그러면 파리 값이 싸도 문제가 되지 않겠지.”
위생계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계몽운동은 큰 호응을 얻어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갔고, 대대적인 파리박멸운동이 전개되었다. 어떤 도시에서는 현금으로 주지 않고 추첨권을 나눠주고 1등은 5원, 2등은 3원, 3등은 2원을 주는 식으로 등수별로 당첨자를 뽑아 상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일본인이 기르는 고양이가 귀신 쫓는 방법이 되다
1914년에는 조선에 성홍열이 기승을 부렸다. 한국인들은 이 전염병이 콜레라와 함께 일본인들이 갖고 들어온 병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일본인이 기르는 고양이를 죽여 그들을 저주하면, 그 일본인이 앓아눕게 되고 성홍열이 멀리 달아나리라 믿었다. 이에 사람들은 일본인이 사는 집에 숨어들어 앞다투어 고양이를 잡아 죽였다. 당시 고양이 학살죄로 일경에 붙잡혀온 사람이 백여 명이나 되었다. 그 뒤로 우리나라에 사는 일본인들은 집에서 고양이를 기르지 않게 되었다.
1907년 경무청·경무서가 경시청·경찰서로, 경무관·총순·순검이 일본식인 경시·경부·순사로 이름이 바뀌고, 순사 주재소에 일본 순사가 근무하기 시작할 때의 일이다.
경상도 거창 깊은 산골에 사는 김신섭이라는 사람에게는 다섯 살 난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학질에 걸려 버렸다. 그는 아들의 몸에 붙은 학질 귀신을 떼어내려고 참봉 댁을 찾아가 부탁을 했다. “참봉 어른, 학질 귀신은 놀라게 해야 몸에서 떨어진다면서요? 학질 귀신이 놀라 달아날 내용의 글을 몇 자 적어 주십시오. 그러면 그 글이 적힌 종이를 아들 녀석의 이마에 붙이겠습니다.”
참봉은 알았다면서 종이에 이렇게 적었다. ‘거창 경찰서 안의 주재소 순사 후루카와 곤베’. 그는 일본 순사가 귀신보다 무서운 존재이기에, 학질 귀신도 순사라면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달아날 줄 알았던 것이다. 일본 순사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았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주재소로 끌고와 잔혹하게 고문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일본 순사라는 이름만 들어도 겁에 질려 부리나케 달아났고, 우는 아이도 울음을 뚝 그쳤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남도 지방에는 당시 가장 무서운 사람이었던 순사의 이름을 적어 돌림병 귀신을 쫓으려는 풍습이 널리 퍼져 있었다.

           


          

신현배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