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살피다

교육, 어둠을 밝힌 등불이 되다

교육, 어둠을 밝힌 등불이 되다

글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


교육, 어둠을 밝힌 등불이 되다


독립운동사는 교육운동사라고 일컬어도 될 만큼 ‘교육’은 구한말 위기부터 1945년 광복까지 우리나라가 당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1883년 한국 최초의 근대학교인 원산학사와 외국어교육기관 동문학(同文學) 등 사립교육기관이 세워진 것을 시작으로, 1895년 고종이 ‘교육입국조서’를 발표하여 한성사범학교·한성소학교 등이 설립되면서 국가 차원에서의 본격적인 근대교육이 시작되었다.

           


           

한국 근대교육이 시작되다

보빙사(報聘使)가 국내 최초로 미국 등 서방세계에 파견되면서 헐버트(Homer B. Hulbert)·길모어(George W. Gilmore)·번커(Bunker D. A) 등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로써 1886년 상류층 자제를 대상으로 한 육영공원 탄생에 기여하는 등, 미국의 도움을 통해 각종 근대 문물을 도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독립운동사에서 교육운동은 크게 3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애국계몽운동의 차원에서 발전한 점이다. 즉, 교육운동은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 둘째, 개신교 선교사들이 주도한 점이다. 특히 여성교육의 발전은 기독교적 개화사상의 유입에 크게 힘입었다. 마지막으로 무관학교 설립을 활발하게 시도한 점이다. 독립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량은 군사였기 때문에 군사교육은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

        

alt

헐버트(Homer B. Hulbert)

alt

보빙사

alt

육영공원 수업 모습


           

국권 수호를 위한 교육운동을 전개하다

20세기 초 국권 회복을 위해 일어난 애국계몽운동은 부국강병, 즉 나라가 강해져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었다. 주요 방법론으로 교육과 산업의 부흥을 주장했는데, 이는 근대교육을 기반으로 민족 경제의 기틀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이때 전국적으로 많은 학교가 세워졌는데, 무려 5,000여 개교나 운영되는 상황이었다. 1908년 일제가 ‘사립학교령’을 통해 이를 규제했음에도 불구하고, 1910년 강제병탄 당시에도 2,000개가 넘는 사립학교가 존재했다. 이중에는 특히 개신교 계열의 사립학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1907년 초등교육기관 654개에 학생 수는 1만 명을 넘었고, 중등교육기관은 18개교, 1,591명이었다. 당시 공립학교가 60개교에 학생 수 2만 명 정도였으니 그 비중이 얼마나 큰지 가늠할 수 있다. 1910년을 기준으로 보아도 종교 계열 사립학교 800여 개교 가운데 천주교 46개, 불교 5개를 제외하면 모두 개신교 계열의 학교였다. 또한 이 시기 개신교는 선교사들의 영향력을 넘어 한국인들이 중심이 되어 자생적인 활동이 추진하기 시작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1909년 백만명구령운동과 같이 목회자를 중심으로 한 내세 지향적·전도 중심적 활동이 벌어지면서, 안창호로 대표되는 개신교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등장해 구국운동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비단 개신교 진영이 아니더라도 교육운동은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서북학회·기호흥학회 등 학회를 조직해 애국계몽활동을 하고, 보창학교·대성학교·양정의숙·보성학교 등 여러 민족주의 계열 학교가 들어섰다. 이밖에도 회보와 잡지의 발행을 통한 다양한 구국활동이 진행되었다.

        

교육을 통해 여성의 권리 신장을 주장하다

한국 근대사는 여성에 대한 이식이 바뀌는 시기이기도 했다. 여기에는 동학과 천주교 등 새로운 종교의 등장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동학은 첩을 거느릴 수 있는 축첩(蓄妾)제도를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여성의 재혼을 용인하는 등 여성문제에 적극적이었다. 또한 남녀가 동등하게 함께 입도식을 하는가 하면, 성별에 상관없이 서로를 ‘접장(接長)’이라는 존칭으로 불렀다. 천주교는 교리적으로 남녀평등을 가르쳤는데, 미사를 드릴 때 남녀가 동석할 수 있었다. 뒤늦게 유입된 개신교 역시 남녀가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개신교는 한국의 축첩제도와 여자가 다시 결혼하는 것을 제재하는 과부재가(寡婦再嫁)금지법을 반대했다.1886년 여성 선교사 스크랜턴(Mary F. Scranton)은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설파하며 배재학당 옆에 이화학당을 설립했는데, 초기에는 학생 모집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개신교 신자조차 자신의 딸을 학교에 보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모집한 학생들 중에는 교복이 손목·발목이 드러나 노출이 심하다는 이유로 자퇴하는 경우도 있었다. 학당은 고아 등을 모아 학생 수를 7명으로 간신히 늘렸다. 이후 명성황후가 ‘배꽃같이 순결하고 배같은 결실을 맺으라’는 뜻으로 ‘이화(梨花)’라는 이름을 지어주면서 이화학당은 비로소 정착할 수 있었다. 한편 1898년에는 서울 북촌에 사는 400여 명의 여성이 장옷(쓰개치마)을 벗어던지며 여성운동단체 ‘찬양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독립협회가 주도한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식사를 제공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이듬해에는 여성이 교육·정치에 참여하고 직업을 가질 권리를 요구하며 순성여학교를 세웠다. 이어 1908년 순종의 칙령으로 ‘고등여학교령’를 공포해 서울에 한성고등여학교(현 경기여자고등학교)가 설립되었으며, 개성에는 부자 과부 김정혜의 주도로 정화여학교가 설립되자 김진홍·이현준 등이 평생 모은 재산을 아낌없이 기부하였다.        

 

alt

백만명구령운동 중 평양에서 열린 부흥집회(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제공)

alt

스크랜턴(Mary F. Scranton)

alt

이화학당


        

무관학교 설립으로 광복군이 탄생하다

대한제국이 무관학교를 설립했다거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 신민회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독립군 양성을 위한 활동은 훨씬 오래전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임시정부하의 뛰어난 역량을 가진 독립운동가들은 개인 역량으로 독립군 양성 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신규식이나 여운형은 중국의 우페이푸(吳佩孚) 등이 지휘하는 군벌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한인 청년들이 군벌 산하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임시정부는 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상하이에 육군무관학교를 세웠는데, 6개월간의 초급장교 양성과정에서 1920년 상반기 19명, 하반기 24명 배출을 끝으로 안타깝게 폐교했다.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했으나 이 역시 비행대 편성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1919년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은 중국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했다. 단원 상당수가 국민당과 함께 북벌에 참가했기에 국민당 입장에서도 김원봉과 의열단을 지원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리하여 장제스(蔣介石)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1932년 중국 난징에 ‘조선혁명간부학교’가 만들어졌다. 공식 명칭은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 간부 훈련반 제6대’로, 국민당의 단기간부훈련소 신설반인 것처럼 위장했다. 학교는 일본과 중국의 외교관계를 고려해 학교운영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설립 초기에는 중국 외교부와 육군참모본부, 심지어 군사위원회 판공청 당사자들조차 그 존재를 모를 정도였다. 만 3년간 운영된 조선혁명간부학교는 3기에 걸쳐 총 125명의 인재를 배출했다. 국민당은 그동안 매월 경상비 2,000~3,000원·수시 필요경비 1,000~1만 원·기타 운영비 400~1,000원 등 각종 운영자금 전액과 화기·탄약·피복 등을 지원했다. 학생들은 군사학뿐 아니라 별도 신설된 정치학, 자연과학을 포함해 경제학·사회학·철학·혁명학·물리학·화학·지리학까지 다양한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다.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일전쟁 이후 충칭(重慶)에 정착해 비로소 결실을 맺었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을 거행한 것이다. 임시정부·임시의정원·한국독립당 그리고 중국기관의 대표 인사들, 충칭에 있는 외교사절과 신문사 대표까지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광복군창설위원장은 김구, 총사령관은 지청천이 맡았다. 지청천은 신흥무관학교 교관 출신으로 만주 무장투쟁의 독립군을 양성하고, 1930년대에는 대전자령전투를 비롯해 북만주에서 중요한 전과를 올린 인물이었다. 교육으로 나라는 세운다는 이념은 이처럼 독립운동가들의 치열한 투쟁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alt

여운형

alt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에서 연설 중인 김구

alt

지청천

           

망국의 시기 우리 민족은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배움에 대한 열정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 더욱 뜨겁게 타올랐고, 이는 일제강점이란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다.

           


           

심용환

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역사교육학을 전공했다. 현재 팟캐스트 <진짜 역사 가짜 역사>를 통해 재미있고 올바른 역사 이야기를 전파하고 있으며, CBS와 공동으로 <심용환의 근현대사 똑바로 보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단박에 한국사』, 『역사 전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