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오늘 세계의 그날

신간회와

민족통일전선의 시대 

우리의 오늘 세계의 그날

    



글 강응천 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역사저술가



신간회와 민족통일전선의 시대

  




침략과 압제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가능한 한 모든 힘을 모아야 한다. 한국, 중국, 인도 등 식민지와 반식민지의 반제국주의 운동 세력은 1920년대 들어 이념과 종교를 넘어 광범위한 통일전선을 모색했다. 중국이 국공합작을 성사시켰고, 인도가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제휴를 실현했다. 동방의 민족주의 세력과 연대해 고립을 벗어나려던 소련은 국공합작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러한 통일전선의 흐름은 한국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1927년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독립과 사회 개혁을 위해 힘을 합쳐 결성한 신간회가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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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진영을 하나로 만드는 운동, 민족통일전선


인종 간의 대립 이상으로 20세기 세계를 어둡게 만든 것은 계층 간, 계급 간 대립이었다. 그러한 대립은 식민지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미쳐 좌익 사회주의 진영과 우익 민족주의 진영의 분열을 낳았다. 1927년 2월 15일 서울기독교청년회관(YMCA) 강당에서 창립된 신간회는 그러한 진영 간 대립을 극복하고 독립운동에 힘을 모으려는 시도였다.
신간회는 회장 이상재, 부회장 홍명희 등 주로 명망 있는 민족주의자를 지도부로 추대하고 사회주의자들이 각 단위 조직에 대거 참여함으로써 민족통일전선을 이룩했다. 강령으로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단결을 공고히 함,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등을 채택했다. 신간회가 결성된 가장 중요한 배경으로는 민족주의자 내부에 대두된 자치운동을 꼽을 수 있다. 1920년대 초반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실패하자 송진우, 최린, 최남선 등 일부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일제와 협조하는 자치운동으로 돌아섰다. 자치운동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고 일본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정치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으로, 사실상 조선의 독립을 포기한 운동이었다. 이에 민족주의 진영 내부에서 반발이 일어나 안재홍, 홍명희 등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와 연합을 추진해 6·10만세운동을 거치면서 신간회의 결성에 이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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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창립 1주년 기념사진(1928.02.15.)


두 진영을 하나로 만드는 운동, 민족통일전선


인종 간의 대립 이상으로 20세기 세계를 어둡게 만든 것은 계층 간, 계급 간 대립이었다. 그러한 대립은 식민지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미쳐 좌익 사회주의 진영과 우익 민족주의 진영의 분열을 낳았다. 1927년 2월 15일 서울기독교청년회관(YMCA) 강당에서 창립된 신간회는 그러한 진영 간 대립을 극복하고 독립운동에 힘을 모으려는 시도였다.
신간회는 회장 이상재, 부회장 홍명희 등 주로 명망 있는 민족주의자를 지도부로 추대하고 사회주의자들이 각 단위 조직에 대거 참여함으로써 민족통일전선을 이룩했다. 강령으로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단결을 공고히 함,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등을 채택했다. 신간회가 결성된 가장 중요한 배경으로는 민족주의자 내부에 대두된 자치운동을 꼽을 수 있다. 1920년대 초반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실패하자 송진우, 최린, 최남선 등 일부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일제와 협조하는 자치운동으로 돌아섰다. 자치운동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고 일본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정치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으로, 사실상 조선의 독립을 포기한 운동이었다. 이에 민족주의 진영 내부에서 반발이 일어나 안재홍, 홍명희 등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와 연합을 추진해 6·10만세운동을 거치면서 신간회의 결성에 이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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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에 이어 중국국민당 지도자가 된 장제스.

반공주의자였던 장제스가 공산당을 불법화하면서

국공합작이 결렬되었다

           
   

흔들리는 민족통일전선의 원조, 국공합작


아시아 민족통일전선의 원조는 중국의 국공합작이었다. 제국주의 열강과 봉건 군벌에 맞서 반제반봉건 운동을 펼치던 중국의 정치세력은 국민당과 공산당으로 나뉘어 있었다. 쑨원이 이끄는 국민당은 민족주의 정당이고 천두슈, 리다자오 등이 이끄는 공산당은 사회주의 정당이었다. 1921년 창당한 공산당은 그해 일제와 군벌을 타도하고 민족혁명을 이룬다는 취지로 국민당과 합작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는 식민지해방투쟁에서 민족주의 세력의 역할을 인정한 소련의 입장도 반영됐다. 국민당도 제국주의와 군벌에 반대하는 노선을 걷던 참이라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1924년 1월 국민당은 소련과의 연대, 공산당 포용, 농민과 노동자 원조라는 정강을 채택해 공산당과 협력을 공식화했다. 그에 따라 리다자오, 마오쩌둥 등 공산당원이 당적을 유지한 채 국민당에 입당해 주요 간부직을 맡음으로써 중국판 민족통일전선인 국공합작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국공합작의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민족통일전선 조직인 신간회가 출범한 1927년 바로 그해에 국공합작은 파탄을 맞이했다. 쑨원이 사망한 뒤 국민당의 지도자가 된 장제스는 반공주의자였다. 그해 3월 공산당과 상하이 노동자들은 군벌이 장악하고 있던 상하이를 해방하고 장제스의 입성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러나 공산당 세력이 커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장제스는 노동자 무장대와 총공회(노조)를 해산시키고, 공산당을 불법화하는 정변을 단행했다. 이후 중국 전역에서 공산당 사냥이 시작됐고, 리다자오마저 베이징에서 군벌 장쭤린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다. 당시 우한에는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가 협력해 세운 국민당 정부가 있었으나, 장제스는 난징에 새로운 정부를 세우고 우한정부를 압박했다. 이에 왕자오밍 등 우한의 국민당 세력마저 반공으로 돌아서자,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 세력은 국민당에 대한 무력 반격에 나섰다. 3년 넘게 이어오던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합작이 파탄으로 끝나고, 양측은 무력을 동원한 내전에 돌입했다.
그해 8월 1일 난창에서 공산당 군대와 국민당 군대 간에 최초의 교전이 일어났다. 일주일 뒤에는 추수철을 맞아 후난성, 장시성 일대에서 공산당이 대대적인 추수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장제스는 우한정부를 흡수해 난징에 단일정부를 세우고 대대적인 공산당 토벌을 벌였다. 잇따른 봉기에서 대패한 공산당은 저장성 징강산으로 숨어들어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시아는 민족해방을 위해 싸운다


중국에서 민족통일전선의 예기치 않은 분열이 일어났지만,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아시아 여러 민족의 해방투쟁은 그칠 줄 몰랐다. 제국주의에 비해 힘이 약한 민족해방 세력들이 여러 형태로 힘을 합치는 민족통일전선도 계속 확산되었다. 1928년 인도의 민족 지도자 네루는 인종, 종교, 계층 등의 분열을 극복하고 인도독립연맹을 결성했다. 그리고 영국에 대한 독립운동을 더욱 거세게 벌여나갈 것을 안팎에 엄숙히 선포했다.
인도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영국 편에서 참전했고, 영국은 그 대가로 자치권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인도는 총 110만 명의 병력을 투입하며 전력을 다해 영국을 도왔다. 그러나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자치권 인정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인도인들의 반감을 불러왔다. 인도독립연맹은 그러한 인도인의 불만이 결집된 결과였다. 네루는 인도독립연맹을 토대로 세력을 결집해 민족운동의 최고기관인 인도국민회의 의장에 진출했다. 그는 비폭력평화주의자인 간디와는 달리 독립을 위해서는 다소 폭력적인 운동도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네루를 중심으로 한 인도의 독립운동 세력은 영국과 타협 없는 투쟁을 벌여 나갔다.
네덜란드의 식민지인 인도네시아에서도 독립운동의 전열이 재정비되었다. 1927년 젊은 독립운동가 수카르노를 수반으로 한 인도네시아국민연합이 출범한 것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그동안 한편에서는 이슬람 세력을 중심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공산당을 비롯한 사회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전개되어 왔다. 그러나 힘의 분산으로 인해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인도네시아국민연합은 수카르노가 민족주의 깃발을 내걸고 그 아래에 민족주의 세력, 이슬람 세력, 사회주의 세력을 모두 아우르는 조직으로 탄생했다. 이처럼 인도네시아의 독립 역량을 결집한 국민연합은 곧 국민당으로 전환해 네덜란드를 상대로 본격적인 정치투쟁을 벌여 나갔다.



유럽은 질병의 공포와 맞서 싸운다


1928년, 영국의 세균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은 병균을 죽이는 기적의 항생물질 페니실린을 발견, 의학혁명에 시동을 걸었다. 플레밍은 포도상구균을 연구하던 중 우연히 페니실리움 노타툼(Penicillium notatum)이라는 푸른곰팡이를 관찰하게 되었다. 그는 푸른곰팡이 근처에 포도상구균이 유독 보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끝에 푸른곰팡이가 포도상구균을 죽이는 항생물질을 분비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플레밍은 이 물질을 페니실린이라 이름 붙이고, 푸른곰팡이를 배양해 각종 세균을 접종했다. 그 결과 페니실린이 모든 세균에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폐렴, 매독, 임질, 디프테리아, 성홍열에 효과가 있음을 증명해냈다.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지만, 그는 이미 10년 전부터 항균물질을 연구해왔다. 런던대학교 성메리병원에 근무하던 1918년, 세균에 감염된 환자들의 치료 방법을 연구한 것이 출발점이었다. 1921년에 항균물질인 라이소자임(Lysozyme)을 발견하고, 이듬해 「조직과 분비물에서 발견된 놀랄 만한 항균물질」이란 논문을 영국학술원에 발표했다. 그러한 연구 성과가 쌓여 페니실린의 위대한 발견이 이루어진 것이다. 플레밍은 페니실린이 임상적으로 얼마나 사용 가능한지를 꾸준히 실험해 나갔다. 살아 있는 동물, 즉 실험용 쥐와 토끼에 주사해 그 부작용을 살피고 페니실린의 추출과 농축을 위한 방법을 개발했다. 그 후 페니실린은 인체 조직이나 면역 체계에 해를 끼치지 않는 효과적인 항생물질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아시아의 수많은 인류가 유럽의 제국주의 지배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싸우고 있을 때, 바로 그 유럽의 실험실에서는 인류를 질병의 공포에서 해방시킬 의학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두 가지 ‘해방’이 하나의 흐름으로 합류하는 것은, 1920년대에는 아직 요원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