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국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에 대한 '국적법'예우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특임교수
국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에 대한 ‘국적법’ 예우
1945년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았지만,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사건, 해결되지 못한 문제, 기억해야만 하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사를 과거에 머문 역사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다루며, 오늘도 신문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독립운동 및 일제강점 이슈를 소개한다.
비로소 조국으로 돌아온 독립운동가의 후손들
2019년에 들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국외 독립운동가 후손들에 관한 기사를 자주 접한다. 올해 3월까지만 해도 39명이 새롭게 국적을 취득했다. 이는 대한민국 국민이 되는 요건을 정한 ‘국적법’에 의한 것이다. 독립을 하고 74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그들이 겨우 국적을 취득하게 된 이유와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경술국치 후 국내에서 활동하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운동기지 개척과 무장투쟁을 목적으로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넜다. 그리고 이들은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그 가운데는 사망하여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거나, 해방 후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를 놓치기도 하였다. 특히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귀환길이 가로막혀 적지 않은 독립운동가와 가족이 중국인으로 살아가야 했다.
이후 40여 년이 지난 1992년, 한중수교가 이뤄지면서 비로소 그들의 귀환이 가능해졌다. 세월이 흐른 만큼 세상을 떠난 독립운동가보다 그 유가족의 귀환이 먼저 이루어졌다. 1989년 1월 독립운동가 김동삼의 유족이 최초로 영주 귀국하였다. 정부는 ‘국적판정’이라는 절차를 통해 그들이 대한민국 국민임을 인정했다. 1994년 12월에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 또는 가족의 생활 안정과 복지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을 별도 제정하였다. 그들의 영예로운 생활을 유지·보장할 수 있는 실질적인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취지에서였다.
하지만 ‘국적판정’은 영주 귀국이 소수에게만 적용되어 동포사회에 불만을 초래했다. 그뿐만 아니라 본래 거주하던 나라의 공민을 우리 국민으로 취급하여 외교적 마찰을 일으켰다. 이에 1997년, 우리 정부는 특별히 중국과 러시아 동포를 외국인으로 간주해 귀화나 국적회복을 통해 대한민국 국민이 될 수 있도록 법을 바꾸었다. 2010년 개정된 ‘국적법’에서는 독립유공자 후손의 경우 그들의 배우자나 직계비속 등은 나이에 상관없이 언제든지 국적회복을 신청할 수 있고, 복수국적도 허용되었다. 2018년 12월 ‘국적법 시행령’이 개정되면서 법무부 장관의 국적회복 허가 후에 재외공관장 앞에서 국민선서 제창 및 국적회복 증서를 받으면 즉시 대한민국 국적회복이 허가되었다. 정부는 이들의 정착을 돕기 위한 지원금도 지급하고 있다.
2019년 6월 현재까지 독립유공자 후손 1,900여 명이 대한민국 국적을 획득하였다. 그들의 이전 국적은 중국이 90% 이상으로 압도적이고, 그다음으로 러시아가 많다. 우즈베키스탄·쿠바·카자흐스탄·미국·우크라이나·투르크메니스탄·일본·캐나다 출신도 있다. 아쉬운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지만, 정착이 어려워 원래 살던 나라로 되돌아가는 후손도 적지 않다는 점이다. 후손들에 대한 예우를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국적을 잃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독립유공자의 국적법 회복은 이보다 더뎠다. 1912년 3월, 일제가 조선의 호적을 정리하려고 제정한 ‘조선민사령’ 때문이다. 해방 이후 정부는 ‘조선민사령’을 근거로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독립운동을 위해 일제 치하 시기 중국이나 연해주 등지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은 무국적자가 되고 말았다. 그 후손들 또한 재산상속은 물론 교육 혜택과 직업 선택의 기회도 얻지 못하는 ‘법적 사생아’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사학자·언론인으로 활동하며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던 단재 신채호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신채호는 1910년 4월 중국으로 망명하였기 때문에 당시 호적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1936년 2월 뤼순감옥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하고, 유골은 고향인 청주 남성면으로 귀향했지만 ‘무국적자’라는 이유로 매장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해방 후 정부는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1962년 3월, 신채호에게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여전히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무국적자였다. 1978년 그의 묘소 옆에 사당을 지어 영정을 봉안하고 기념관이 세워지는 동안에도 국적회복을 위한 노력은 없었다. 신채호의 후손은 외가 호적에 이름을 올린 채 살다가 대법원 청원을 통해 ‘신채호’라는 이름 석 자를 큰아들 신수범(사망) 호적에 올렸다. 그러나 호적등본은 큰아버지 이름으로만 뗄 수 있었다.
신채호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 상당수가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분들이 일제가 만든 제도 때문에 독립 후에 국적 없는 유령이 된 것이다. 이상룡·홍범도·김규식·이상설 등을 비롯한 300여 명의 독립운동가가 무국적·무호적 상태였다. 1932년 6월, 생을 마감한 이상룡은 1911년 1월 서간도로 망명하여 활동했다. 그로부터 80년 만인 1990년에 그의 유해가 중국 흑룡강성에서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무국적자 신분을 벗어나지 못했다.
2005년 8월, 한나라당 임인배 의원을 비롯한 여야 의원 20명의 서명을 받아 ‘국적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내놓았다. 핵심 골자는 ‘순국선열로서 일제 통치하에서 국적을 갖지 않거나 외국의 국적을 보유한 상태로 사망한 자에 대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내용이다. 또한 열린우리당 김원웅 의원 등 여야 의원 38명도 ‘국적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주된 내용은 ‘독립운동에 기여한 조선인으로서 일제 때 무국적 상태로 있다가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사망한 자는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자로 본다’는 것이다. 두 법안은 국적회복 대상을 무국적자로 할 것인지, 국외 국적자까지 포함할 것인지에 대한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근본 취지는 같았다. 그러나 법은 해를 넘겨 자동 폐기됐다. 이미 법적으로 독립운동가를 우리국민으로 여겨왔으며 사망자에게 소급해서 국적을 부여하는 일은 ‘국적법’ 체계를 뒤흔들 수 있다는 법조계의 주장이 강했기 때문이다. 정부도 조선족·고려족 등의 국적 문제로 비화할 것을 우려했다.
그리하여 정부는 2009년 2월,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에 의한 가족관계등록 사무처리규칙’을 제정하여 무국적 독립운동가들도 ‘가족관계등록부(옛 호적부)’에 등재될 수 있도록 하였다. ‘국적법’을 개정하는 것보다 쉬운 방법을 택한 것이다. 당시 국가보훈처는 가족관계등록부는 생존해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작성되는 것이지만, 법 개정을 통해 “현재까지 등록부가 존재하지 않은 독립유공자들이 등록부를 만들 수 있도록 하여 명예선양과 그 후손들의 자긍심 고취 등의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며 의미를 강조했다. 이에 2009년 4월 신채호·이상룡 등 62명의 독립운동가가 가족관계등록부를 통해 해방 64년 만에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받았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풀린 것은 아니다. 아직도 무국적의 독립운동가가 있고, ‘국적법’이 개정되지 못해 경술국치 이전 독립운동가의 재산권을 후손들이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신채호의 며느리 이덕남의 말이 묘한 여운을 남긴다. “친일파들은 당시 조선의 귀족이었잖아요? 국적도 있고 호적도 척척 올리고 후손들에게 물려줄 땅도 수십만 평에 이르죠. 친일파 재산을 환수해도 한이 안 풀리는데, 있는 땅에서 조상의 넋을 기리며 살고 싶은 이 소망마저 짓밟히니 정말 이민이라도 가고 싶습니다.” 일본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아직도 일제시기의 법령에서는 독립하지 못했다는 씁쓸한 감정을 지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