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터전
하와이 이민과
한인사회의 형성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하와이 이민과 한인사회의 형성
① 미주 한인사회의 형성과 독립운동 기반 구축
한국독립운동의 역사를제대로 알기란 쉽지 않다. 활동 범위가 무척 다양하고 양도 방대하기 때문이다. 한국독립운동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올바르게 알리기 위해 본 시리즈를 기획했다. 특히 그동안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미주지역 한인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과 독립운동을 조명하고자 한다.

최초의 하와이 이민선 갤릭호
공식 이민 이전의 도미(渡美)
1882년 5월 조미수호조약 체결 직후 한국인들이 미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에 갔다가 유학을 목적으로 정착한 유길준을 비롯해 갑신정변 실패로 미국에 망명한 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이 이 시기에 미국으로 갔다. 미국 이민국에서 발표한 것에 따르면 1894년부터 1902년까지 미국에 입국한 한국인의 수는 약 200여 명이다. 이들 가운데 샌프란시스코로 입국한 수는 145명이고, 이중 89명은 인삼상인이며 나머지 44명은 유학생이었다고 한다. 인삼상인들은 중국인이 많이 모여 사는 캘리포니아 주와 워싱턴 주에서 주로 활동했다. 나중에는 호놀룰루와 뉴욕, 쿠바의 하바나까지 진출해 장사에 열을 올렸다. 인삼상인들이 미주로 진출한 까닭은 인삼 판매 수익이 높았기 때문이다. 또 1896년부터 1900년까지 주한 미국공사를 지낸 이범진과 상하이에서 홍삼무역을 관장하던 민영익의 적극적인 비호도 영향을 미쳤다. 1871년 주미 조선공사관 보고에 따르면 당시 미국 유학생들은 21명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갔으나 김헌식과 신성구처럼 미국에 정착하는 경우도 있었다. 갑신정변 실패로 미국에 망명한 서재필은 1890년 6월 19일 자로 한국인 최초미국 시민권자가 되었고, 뒤이어 1892년 11월 18일 서광범이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이처럼 공식 이민 이전 한국인들은 미주 각지로 진출해 활동하였으며, 몇몇은 미국에 정착하거나 시민권을 얻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의 미국 진출은 집단적이고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상업이나 유학을 목적으로 한 한시적인 이동에 그쳤다. 그 수도 매우 적은 데다가 분산되어 있어, 집단 활동을 통해 민족 정체성을 확보할만한 여건도 형성되지 않았다.

초창기 이민가정 형성과 한인사회 발전에 기여한 사진신부들
미주 한인사회의 시작
한국인들의 본격적인 미주(美洲) 진출이 시작된 것은 1903년 1월 13일 102명의 한인들이 대한제국 유민원에서 발급한 집조를 받아 호놀룰루에 도착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1905년 8월 8일 하와이 이민이 공식 중단될 때까지 7,921명이 하와이로 건너갔다. 이들은 하와이섬·마우이섬·오아후섬·카우아이섬 등 4개 섬에 산재한 30여 곳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다. 사탕수수 농장 1개소에는 많게는 500~600명에서부터 적게는 몇십 명씩 분산 고용되었다. 임금은 하루 10시간 노동 기준으로 남자가 65센트, 여자와 아이들은 50센트 수준이었다. 이렇게 한 달 평균 25일 중노동을 하고나서 그들이 받은 월급은 고작 16달러에 불과했다. 고된 노동과 농장주의 불합리한 요구에 시달리는 가운데 한인들은 자신들의 사회를 형성해갔다.
이와 별개로 멕시코 이민은 1905년 4월 4일 인천항을 떠나 5월 9일 멕시코 살리나크루스에 1,033명의 한인들이 도착하면서 시작됐다. 멕시코 이민자들은 베라크루스·유카탄·메리다 등지 20여 곳 농장에서 일했다. 이들의 이민생활은 하와이보다 더 열악했다. 고된 노동조건은 물론이거니와 4년간 가혹한 계약노동에 묶여 있었다. 한국인들은 하와이 내에만 머물지 않았다. 1903년에서 1910년 사이 하와이에서미 국 본토로 이주한 수는 약 2,000여 명이었고 한국으로 되돌아 간 사람도 1,000여 명에 달했다. 미국 본토로 이주한 동기는 사탕농장보다 탄광이나 철도 건설 등 도시 노동자의 임금이 더 후했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레스·솔트레이크·덴버 등미국 각지에 한인사회가 형성됐다.
1905년 8월 이민이 중단된 뒤에는 사진신부와 유학생들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1910년 11월 28일 최초의 사진신부 최사라가 호놀룰루에 도착한 이래 1924년 미국 정부에 의해 동양인 이민이 완전히 중단될 때까지 하와이에 도착한 한국인의 수는 951명이었다. 115명의 한국인들은 다시 미국 본토로 갔다. 이 시기 입국한 한국인 중 약800여 명이 사진신부였으며 나머지는 대부분 유학생들이었다. 사진신부의 등장과 함께 한인들은 새로운 가족 공동체를 꾸릴 수 있었고, 덕분에 한인사회도 활기를 띠었다. 해방 직전까지 하와이에 6,000여 명, 미국 본토에 1,700여 명, 멕시코와 쿠바에 850여 명 등 총 8,550여 명의 한인들이 미주지역에 자릴 잡았다. 이들은 1만 명도 채 되지 않는 극소수 민족으로서 한인사회를 형성하고 나라를 위한 구국활동에 앞장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