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체절명의 한국사

14세기 후반
위기의 시대

14세기 후반 <BR />위기의 시대
글 김종성 역사작가


14세기 후반 

위기의 시대



환절기가 되면 인체가 외부 바이러스에 취약해지듯, 국제질서의 과도기에는 국가가 외부 침략에 노출될 가능성이 커진다. 14세기 후반, 원나라의 세계 패권이 약해지면서 명나라가 동아시아 최강으로 떠오른 시절도 그러한 환절기였다. 이 시기에 외부 침략에 맞서 한민족을 지켜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살펴본다. 

홍건적·왜구의 침략

몽골 초원에서 출발해 중국대륙으로 옮겨간 몽골제국은 동아시아에서 명멸한 강대국들 중에서 역대 최강이었다. 강대국이었던 만큼 나라가 몰락할 때도 파장이 컸다. 원나라가 몰락하고 세계질서가 급변하던 시기에 동아시아는 일대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소용돌이의 진원지인 중국대륙에서는 한족들의 반란으로 홍건적이라는 군사조직이 활개를 치고, 이런 속에서 주원장·장사성·진우량 같은 군웅들이 활약하였다. 이 흐름이 1368년 명나라 건국으로 이어지고, 원나라 왕실이 북쪽 초원으로 쫓겨 가는 사태를 초래하였다. 이로 인한 영향이 이웃 지역들에서도 나타났다. 한반도에서는 1392년에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졌다. 같은 해에 일본에서는 일왕이 2명 공존하던 분열의 시대가 끝나고 남북조 통일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였다. 오늘날 오키나와로 불리는 유구열도에서는 1406년에 삼국통일이 일어났다. 

동아시아 전체적으로 국가 시스템이 동요하는 속에서 한민족은 두 방향의 외부 침략을 받았다. 대륙에서는 홍건적, 해양에서는 왜구가 한민족을 침략하였다. 몽골 정부군과 여진족 군소 집단들도 한민족을 위협했지만,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이 대표적이었다. 

이런 속에서도 한민족의 자기방어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가동되었다. 1351년에 등극한 공민왕의 개혁도 이런 시스템에 기여하였다. 공민왕의 개혁으로 신진사대부라는 신흥 세력이 성장하고 이들이 결국 조선을 건국하게 되지만, 공민왕 때 형성된 새로운 기운은 한민족을 외부 침략으로부터 지켜주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런 기운이 국가 시스템으로 편입됐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16세기 임진왜란이나 19세기 구한말 때처럼 민간의 의병이 나서지 않아도 되었다. 14세기의 외부 침략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했는데도 민간 의병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은 이 시기에 공적인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창에 찔리면서도 진격한 최영
이러한 상황에서 정규군을 이끌고 외부 침략에 맞서며 영웅으로 급부상한 인물이 최영 장군이다. 그는 ‘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격언으로도 유명하지만, 『고려사』 최영 열전에 따르면 격언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최영이 16세 때 아버지가 죽기 전에 유언하기를 ‘너는 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고 하였다. 최영은 이 말을 깊이 간직하고 재물에 마음에 두지 않았다”고 최영 열전은 말한다.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재물에 마음을 두지 않는 대신, 그는 나라를 지키는 데 온 마음을 다하였다. 
1316년에 무인 가문이 아닌 사대부 가문에서 출생한 최영은 양광도(경기·충청) 부대에서 근무하다가 왜구 격퇴에 공을 세워 임금 경호원인 우달치로 발탁되었다. 그는 홍건적의 침략으로부터 공민왕 정권을 지키는 데 공을 세웠다. 홍건적에 점령된 개경을 두 번이나 탈환했을 정도다. 공민왕은 반몽골 정책을 펼치기 전에 몽골의 요청으로 장사성 반란군을 토벌하는 데도 참가하였다. 이때 벌어진 수십 차례 전투에서 그는 지휘만 잘하는 장수가 아니라 전투도 잘하는 장수임을 입증하였다. 장사성 부대와의 전투에서는 몇 번이나 창에 찔리면서도 전투를 승리로 마무리하는 강인함을 발휘하였다. 국내에서 벌어진 왜구와의 전투에서도 그는 용감성을 보여줬다. 부하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자 최선봉에서 돌진하다가 왜구 병사가 쏜 화살이 입술에 꽂혔는데도, 그는 태연하게 화살을 쏘아 그 병사를 쓰러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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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장군묘 입구에 있는 최영 장군의 상상화


여진족 군단을 끌고 온 이성계
이 시기에 고려 본토 출신인 최영과 쌍벽을 이루며 영웅으로 급부상한 인물은 이성계다. 최영과 달리 이성계는 고려 왕조의 주변부에 근거지를 뒀다. 이성계 가문은 몽골제국의 관할을 받던 철령 이북의 쌍성총관부에 거점을 두고 있다가 공민왕이 이곳을 수복할 때부터 고려왕조에 협력하였다. 
이처럼 이성계와 최영은 출신지는 달랐지만, 외세 침략에 맞서 무패 전적을 기록하였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였다. 이성계 역시 홍건적으로부터 개경을 탈환하는 데 공을 세웠고, 공민왕을 폐위시키고자 몽골이 보낸 1만 군대도 격파하였다. 또 여진족과 왜구의 침략 역시 대파하였다. 우왕 때인 1380년에 왜구를 상대로 거둔 황산대첩은 유명하다. 
최영이 고려 주류 출신이고 이성계가 비주류 출신이라는 점 외에 이들을 구별 짓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 최영은 정규군을 기반으로 한 데 비해 이성계는 사병 부대를 기반으로 하였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성계의 근거지인 쌍성총관부가 여진족 거주지였으므로 그의 사병 부대는 여진족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여진족 사병을 보유한 이성계가 고려왕조에 충성하는 상황은 여진족 유력자들이 고려 왕실에 가담하도록 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음력으로 세종 19년 8월 7일 자(양력 1437년 9월 6일 자) 『세종실록』에 따르면, 이성계의 최측근인 여진족 이지란은 최소 500호 이상의 여진족 가구를 거느린 세력가였다. 이 외에 주매·금고시첩목아·허난두·최야오내 같은 10여 명의 이성계 측근들도 세력을 거느린 유력자들이었다. 고려 왕실에 대한 이성계의 충성이 여진족 유력자들의 고려 왕실 지지를 유도하였던 것이다. 
고려 말에는 정규군 병력이 충분치 않았다. 혼란기에 노비로 전락하는 양인들이 많았고, 이들 중 일부는 귀족이나 유력자들의 사병으로 편입되었다. 이성계의 사병 부대는 고려 정규군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였다. 


사비 털어 민족을 지킨 최무선

이 시기에 한민족 수호에 기여한 또 다른 결정적 요인은 고려 군사력을 발전시킨 화약 기술의 개발이다. 이 기술을 도입한 최무선에 관해 조선 『태조실록』의 최무선 졸기는 “천성적으로 기술과 머리가 좋고 계책이 많으며 병법을 말하기를 좋아하였다”고 말한다. 

전쟁과 무기에 관심이 많아 청년기에 국영 군수공장인 군기시에 취직한 그는 화약 및 화포 국산화를 위해 40대 중반을 넘은 나이에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열정을 발휘하였다. 하지만 중국이 기술을 내줄 리 없었다. 그는 빈손으로 귀국하고 말았다. 원나라뿐 아니라 명나라에서도 기술을 얻을 길이 없었다. 고려 정부는 기술 국산화보다는 완제품 수입 쪽으로 생각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무선의 집념은 빛을 발하였다. 그는 고려를 방문하는 중국인들을 직접 만나 화약 기술자를 수소문하였다. 정부에서도 이미 포기한 뒤였기 때문에 자기 비용을 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중국인 기술자 이원(李元)을 찾은 그는 자기 집에서 옷과 음식을 제공하면서 수십 일간 기술을 배우는 데 성공하였다. 그런 다음 정부 관리들의 퇴짜를 맞으면서도 수없이 설득한 끝에 화통도감 설치를 관철시키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국산화에 성공한 화포는 1380년 진포 해전에서 왜구 선박 500척을 격파하는 데 기여하였다. 『삼국지』의 적벽대전 못지않은 대승이었다. 사비를 털어 화약 연구에 매진한 최무선의 눈물겨운 노력이 맺은 결실이었다. 

14세기 후반의 한민족이 나라를 지킨 것은 한민족 구성원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싸웠기 때문에 가능하였으며, 우수한 인재의 활약도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 최영 같은 용감한 전사가 출현하고, 이성계가 여진족 군단을 끌어오고 최무선이 사비를 털어 신기술을 확보하는 등 우수한 인재가 시의적절하게 나타나 나라에 공헌한 것도 크게 작용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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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에 전시된 이성계의 오라산성 전투 상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