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터전

윌로스 한인비행학교의
설립과 활동(1)

윌로스 한인비행학교의 <BR />설립과 활동(1)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윌로스 한인비행학교의 설립과 활동(1)


Ⅳ. 3·1운동 이후 재미 한인 사회의 변화 ④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 미주 한인들은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뉴욕 소약국민동맹회의와 파리강화회의를 대비한 선전·외교활동에 주력하였다. 3·1운동 발발 이후에도 이러한 활동 방략은 계속되었는데, 이러한 때 노백린에 의해 군사운동이 일어났다.


한인비행학교의 설립

1916년 12월 호놀룰루에 도착한 이래 박용만의 군사운동을 돕던 노백린이 3·1운동의 영향으로 한성 임시정부에서 군무부총장으로, 상하이의 통합 임시정부에서 군무총장으로 선임된 후 미주지역에 군사운동의 바람을 일으키면서 군사활동이 재개되었다. 노백린이 군사 분야의 총책임자인 군무총장으로 선임된 것은 구한말부터 정통 무관으로서의 풍부한 군사 경험을 갖고 있어서 향후 항일무장투쟁의 최적임자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노백린은 한성임시정부에서 군무부총장으로 선임된 소식을 듣고 1919년 8월 13일 집정관 총재로 선임된 이승만에게 장차 워싱턴 D.C.를 방문하겠다는 전보를 보냈다. 그런 후 그해 9월 11일 상하이 임시의정원에서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으로 선임된 사실을 통보받자 노백린은 하와이를 떠나 북미지역으로 향하였다. 미국에서 군무총장으로서 자신의 책무를 다한 후 상하이로 건너갈 생각이었다. 그는 1919년 9월 30일 호놀룰루를 떠나 10월 5일 밴쿠버에 도착하였고 곧 시애틀로 이동해 본격적인 미국 순방을 시작하였다.

노백린은 미국 순방을 시작할 때 미주 한인 동포들에게 “우리가 갈 길은 곧은 길, 우리가 가질 목적은 한 목적, 우리는 그 길에 서서 그 목적을 향하고 나아갈 뿐이라. 끝에 한 사람이 남아 있기까지 한 방울 피마저 흘리기까지 아니 싸우지 못할 것이요 아니 다투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말한 후 “차라리 독립싸움에 죽은 자유혼”이 되자며 독립전쟁론을 설파하였다. 또한 그는 군무총장의 명의로 1920년 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포고」 제1호를 공포하고 2,000만 명의 남녀는 일인까지 조직적이고 통일적으로 ‘광복군’이 되기를 맹세하고 결단하자고 호소하였다. 그의 호소에 감명받은 김종림·이재수·신광희 등 쌀 농장주들은 노백린을 도와 미국에서 군사활동을 추진하기로 결심하고 1920년 2월 20일 캘리포니아주 윌로스에 한인 비행학교를 설립하였다.

육군 무관으로 활동한 노백린이 군사 경험이 전혀 없는 비행학교를 설립한 데는 재미 한인들의 준비된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1919년 5월 국내 3·1운동의 소식에 충격받은 한인 청년들이 독립운동을 준비할 목적으로 청년혈성단을 만든 후 비행술을 배우고 있었다. 청년혈성단은 독립의 대사업을 이루기 위해 새로 건설한 임시정부에 열성을 다해 충성할 것과 학술 또는 군사상의 기예를 배워 독립운동에 기여하겠다는 취지로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애국청년 단체였다. 청년혈성단에는 한인 청년 23명이 참여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이용근·이용선·이초·장병훈·한장호는 레드우드 비행학교에 입학해 비행술을 배웠고 최자남은 미 해군 비행학교에 입대하였다. 이들이 비행학교에 입학한 것은 청년혈성단의 설립 취지에 따라 독립의 대사업을 위해 군사상의 기예를 배우기 위함이었다.  다음으로 미주한인사회는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새로운 군사 무기로 등장한 비행기의 가치와 비행 전술의 효과를 깊이 인식하고 비행사 양성이 장차 독립운동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였다. 윤병구는 1919년 9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취임식에서 “청년 중 자격 있는 자들을 우선 비행기 제조학과 무선 전신학, 그리고 최근의 전술전략을 배우도록 장려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신한민보』는 ‘한국 독립과 조종술’이란 사설(1920.6.4.)을 통해 공군력이야말로 근대 군사학 가운데 가장 필요한 요소 중 하나이고, 일본의 공군력이 미약한 상태에서 지금 우리가 먼저 한인 비행사를 양성한다면 장차 독립전쟁에서 승리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또한 노백린은 육군 무관 출신으로 비행기에 대해 문외한이었지만 비행사 양성이 향후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최신 군사전술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새크라멘토의 미국 신문 기자들을 상대로 한 회견에서 그는 “군단 비행학교 설립의 목적은 한인 청년들에게 장차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얻는데 도움이 될 비행술을 가르치기 위함”이라 하여 비행술을 한국 독립을 위한 최선의 수단으로 생각하였다. 

이로 보면 노백린이 비행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던 것은 비행학교를 설립하는 데 필요한 인적 자원의 확보, 쌀농사로 부를 축적한 김종림을 비롯한 북가주 지역의 한인들의 확고한 재정 지원, 여기에 비행술을 독립전쟁을 위한 최신 군사전술로 인식한 노백린과 재미한인사회의 호의적인 여론 등에 힘입었다고 할 수 있다.


한인비행학교의 교육과 운영

윌로스 비행학교를 시작한 후 비행기가 도입되기 전까지 노백린은 주로 육상 군사훈련 위주로 교육하였다. 1920년 6월 22일 첫 번째 비행기를 도입하고 이틀 후 두 번째 비행기를 도입하였으며 이후 또 1대를 더 구입해 총 3대의 비행기를 갖추면서 본격적인 비행교육과 훈련에 들어갔다. 제대로 된 정규 비행훈련을 위해 레드우드비행학교의 책임자이자 교관으로 활동 중인 프랭크 브라이언트(Frank K. Bryant)를 초빙해 비행교육을 맡겼다. 레드우드 비행학교에서 비행술을 배운 장병훈·오림하·이용선·이초·이용근·한장호는 부교관으로 참여하였다. 이들 6명이 윌로스 비행학교에 참여한 것은 노백린이 1920년 2월 5일 직접 레드우드 비행학교를 방문해 그들을 격려하고 향후 계획을 공유하면서 이루어졌다. 

윌로스에 비행학교를 처음 시작할 때 참가한 학생 수는 24명이었고, 한때 30명까지 증가되었으나 7월 비행사 양성소 개소식 때 25명을 유지하였다. 교사(校舍)는 플린트학교를 임시로 사용하였다가 폐교로 방치되어 있던 퀸스학교로 옮겼다. 교육 과정은 비행기를 구입해 본격적인 비행술을 가르치기 전까지 노백린에 의해 사격과 제식훈련 등 기초적인 군사훈련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기본 군사교육 외에 무선통신, 비행기 정비, 영어와 민족 교육도 병행하였다. 

비행학교에 필요한 모든 재정은 쌀의 왕으로 불릴 정도로 쌀농사로 많은 돈을 번 김종림이 주로 담당하였다. 그는 비행학교를 위해 4만 에이커 규모의 부지를 제공하였고 비행기 구입과 교육을 위해 20,000달러의 재정을 부담하였다. 그 외 윌로스와 그 인근 지역에서 쌀농사를 하던 이재수, 신광희, 이암, 윤응호 등이 재정을 후원하였다. 김종림을 포함한 이들 후원자들은 1920년 7월 25일과 26일 비행가 양성사 장정과 비행가 양성사 취지서를 발표하여 조직적인 후원활동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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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훈련을 받고 있는 비행학교 학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