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

독립전쟁 현장에서 영원한 동지가 된
김학규와 오광심

독립전쟁 현장에서 영원한 동지가 된 <BR />김학규와 오광심

글 김형목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독립전쟁 현장에서 영원한 동지가 된 

김학규와 오광심 



중국으로 망명해 교사 생활을 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심어주던 김학규는 교사 생활을 접고 무장투쟁에 뛰어들면서 오광심과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이후 김학규와 오광심은 광복이 되는 순간까지 독립투쟁 최일선에서 함께 활약한다. 광복 이후에도 조국과 동포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이들 부부에게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군사학을 배우며 독립군으로 성장하다

김학규는 1900년 11월 평남 평원군 서해면에서 4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을사늑약과 경술국치 등을 직접 겪으면서 강한 항일의식을 가졌다. 일제의 강제 병합 즈음 중국 퉁화현에 정착하여 독립군 양성 요람지인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학을 배웠다. 이곳에서 배운 군사학은 후일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든든한 정신적인 기반이 되었다.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서로군정서 한국의용대 소대장으로 교민 보호에 진력하였다. 이 단체는 류허현 고산자에서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기존 단체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1920년 6월 이후에는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여 일본군과 교전하는 한편 친일파 등을 처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독립전쟁의 실전경험을 쌓았다.

일제는 독립군을 후원하는 한인 동포에 대한 무자비한 살육을 서슴지 않는 이른바 ‘경신대토벌’ 작전을 감행하였다. 일본군의 포위에서 탈출한 김학규는 펑톈의 영국인이 운영하는 문회고급중학에 입학·졸업하였다. 재학 시절에 집중적으로 공부한 중국어는 후일 항일투쟁을 전개할 때 중국군의 지도자들을 만나 협상하고 신임을 얻는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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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광심과 김학규



민족교육과 독립전쟁을 병행하다

김학규는 1927년부터 류허현 동명학교 교사로서 한국인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일깨웠다. 교육 활동은 항일투쟁 전선에서 이탈이 아니라 중장기적인 독립운동 노선이었다. 병식체조 등 군사교육으로 장차 독립군을 양성하려는 목적이었다. 문무쌍전에 입각한 민족교육은 항일적개심을 고취하기 위함이었다. 

1929년부터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에 가담하여 독립전쟁 현장에 다시 나섰다. 조선혁명군 참모장으로서 흥경현전투와 쾌대무전투 등에서 승리를 견인할 수 있었다. 괴뢰정부 만주국 설립 즈음에 김학규는 중국의용군 사령관 당취오와 면담하여 한중연합에 의한 공동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굳건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한중연합세력은 일본군과 치열하게 전투하여 신빈현과 영릉가 전투 등에서 일본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반면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세로 조선혁명군도 큰 피해를 보았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중국 관내의 독립운동 단체에 원조를 요청하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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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제3지대장 시절의 김학규



한국광복군 지대장으로 최전선에서 활약하다
김학규는 1935년 7월 민족혁명당 결성식에 조선혁명당 대표로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과 조선혁명당 만주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에는 중국 육군중앙군관학교 특별반에서 군사교리를 연구하고 군사훈련을 받았다. 중일전쟁을 계기로 분열된 독립운동 단체의 대단결을 촉구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임시정부의 외곽단체인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결성은 이러한 상황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김학규는 임시정부의 군무부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어 독립전쟁에 대한 계획안, 군사 인재 양성을 위한 방안, 군사상 필요한 서적 연구와 편찬 등에 매달렸다.1940년 9월 17일에는 한국광복군이 충칭에서 창설되었다. 총사령부 참모장 대리로 임명된 후 시안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적후방 공작을 추진하였다. 제3지대장에 임명되어 초모공작으로 많은 광복군을 확보할 수 있었다. 본부를 안후이성 푸양에 설치하여 중국군과 연락·협조로 선전공작과 정보공작 등을 실시하여 적군에게 많은 혼란을 주었다.
한국광복군은 특히 태평양에서 일본과 교전하며 북진하던 미국과 공동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미국도 항일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독립운동 세력을 활용하고자 하였다. 1945년 1월부터 광복군과 미국전략첩보국의 합작훈련에 대한 교섭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제2지대장 이범석은 미국과 협력 작전을 교섭하였다. 협력 작전은 주로 한국 영토에 대한 첩보와 침투, 일본 본토에 대한 침투 등이었다. 
한편 미군은 일본에서 탈출한 학병의 능력에 주목하였다. 김학규는 쿤밍으로 가서 미 제14항공대 사령관에게 한미공동작전에 관한 계획을 설명하여 세부 계획과 구체적인 실시 방안까지 합의를 보았다. 이리하여 미국으로부터 무기와 보급품 등을 지급받아 3개월 동안 군사훈련이 시작되었다. 주된 훈련은 무전훈련이었다. 독도법·암호문 해독법·폭발물 취급기술·요인납치·야간습격 등도 병행되었다. 안타깝게도 일본의 항복으로 결국 국내로 진격해보지 못한 채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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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전략첩보국 대원들과 김학규



여성독립군으로 다시 태어나다
오광심은 평안북도 선천군 신부면에서 1910년 3월 15일에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남만주로 이주하여 정의부에서 설립한 화흥중학 부설 사범과를 졸업하였다. 이듬해 한족회에서 설립한 배달학교와 류허현 삼원보의 동명중학 부설 여자초등학교에서 항일의식을 일깨우는 민족교육 시행에 노력하였다.
1920년대 후반 남만주지역의 독립운동 세력은 국민부를 중심으로 통합되었다. 산하에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을 조직하여 대일항전을 본격화하였다. 오광심은 배달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조선혁명당에 참여·활동하다가 일제의 만주 침략을 목격하면서 교사를 그만두고 조선혁명군 사령부 군수처에서 근무하였다. 더불어 조선혁명군 유격대와 한중연합 항일전에서 지하 연락 활동을 전개하는 등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때 조선혁명군 참모장인 백파 김학규와 부부이자 영원한 동지로서 인연을 맺었다.
일제의 만주침략과 만주국 설립으로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항일세력 활동은 상당히 위축되는 분위기였다. 조선혁명군의 대표로 선발된 남편은 농부로 변장하고 오광심은 남루한 농촌부인으로 꾸몄다. 문제는 현 상황에 대한 200여 쪽에 달하는 보고서를 어떻게 가지고 가느냐였다. 오광심은 검문검색에 발각되지 않도록 이를 전부 암기하여 보고했다는 이야기는 전설 같기만 하다. 단둥·칭따오·베이징 등지를 거쳐 난징에 도착한 부부는 조선혁명군의 대일항전 상황과 인력 및 물자 보급의 필요성 등을 역설하는 등 지원을 요청하였다.


광복군은 남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오광심은 1935년 7월 관내지역 독립운동 단체 사이 통일정당인 민족혁명당 결성에도 참여하여 부녀부 차장으로 활동하였다. 중국 관내지역을 이동하던 임시정부가 충칭에 안착한 후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자 총사령부에서 사무 및 선전사업을 담당하였다. 한국독립당의 외곽단체인 한국혁명여성동맹에도 함께 하였다. 광복군 총사령부가 시안으로 이동하자 시안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겨 여자 광복군 대원인 지복영·조순옥 등과 함께 기관지 『광복』 간행에 전념했다. 발간 목표는 ‘광복군의 사업 진행과 임무를 여러 동지·동포에게 소개하는 동시에 우리 혁명의 정확한 이론·전략·전술을 연구하고 토론하고자 한다’였다.1942년 2월에는 징모 제6분처의 대원으로 안후이성 푸양에서 지하공작을 통해 광복군의 모병 활동에 나섰다. 오광심은 한국광복군에 여성의 참여를 촉구하였다. 여성의 위대함을 망각하지 말자고 강조하면서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자고 호소하였다.

“광복군은 범 삼천만의 광복군이며 삼천만 가운데 일천오백만의 여성도 포함되어 있는 줄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광복군은 남자의 전유물이 아니요, 우리 여성의 광복군도 되오. 우리 여성들이 참가하지 아니하면 마치 사람으로 말하면 절름발이가 되고 수레로 말하면 외바퀴 수레가 되어 필경은 전진하지 못하고 쓰러지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혁명을 위하여 또는 광복군의 전도를 위하여 우리 여성 자신의 권리와 임무를 위하여 이 위대한 광복군 사업에 용감히 참가합시다. 그리고 총과 폭탄을 들고 전선에 뛰어 나아가 우리 여성의 피가 압록강·두만강 연안에 흘리며 이 선혈 위에 민족의 자유화가 피고 여성의 평등 열매를 맺게 합시다.”



광복이 아닌 또 다른 족쇄는 현실이었다
오광심은 광복 이후 상하이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주호판사처 처장으로 활동하는 남편을 도왔다. 한인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안전한 귀국을 위한 다양한 노력도 병행하였다. 1946년에는 센양으로 가서 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1948년 4월에 조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전후로 국내 상황은 미소 강대국에 의한 냉전체제 격화로 분단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귀국 이후 김구와 함께 단독정부 수립 반대 노선과 통일국가 수립에 매진하였다. 친일파 처단을 위한 반민특위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이승만과 친일민족반역자 세력은 한국독립당과 김구를 제거할 흉계를 꾸몄다. 이들은 안두희를 시켜 김구를 암살한 후 암살 배후자로 김학규를 체포하였다. 훗날 당시의 심경을 「혈루의 고백」에 고스란히 남겼다. 군사재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다가 한국전쟁 당시에 다행히 탈출하여 은거하다가 이승만정부가 붕괴된 이후에야 복권되었다. 
오광심은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구걸해야 할 정도로 살림살이가 어려워졌다. 이들 부부는 철저히 파괴된 삶을 살았다. 부부에 대한 박용옥 교수의 평가는 매우 적절하고 아련하다. “젊은 날 조선혁명군으로 또한 한국광복군으로 대륙의 산하를 누비며 빛나는 활동을 하면서 조국 광복을 위해 찬란한 청춘을 송두리째 바쳤던 이들의 열정에 대해 해방된 조국은 아무것도 보답하지 않았다.” 
그렇다. 오광심은 모든 고난을 감내하며 묵묵히 남편을 지킨 ‘수호신’이었다. 영원히 변치 않는 진정한 동지로서 말이다. 오광심이 남긴 자작 시에는 그녀의 조국 광복을 향한 열정이 따뜻하게 녹아있다. 

비바람 세차고 눈보라 쌓여도
님 향한 굳은 마음은 변할 길 없어라.
님 향한 굳은 마음은 변할 길 없어라.
어두운 밤길에 준령을 넘으며
님 찾아가는 이 길은 멀기만 하여라.
님 찾아가는 이 길은 멀기만 하여라.
험난한 세파에 괴로움 많아도
님 맞을 그날 위하여 끝까지 가리라.
님 맞을 그날 위하여 끝까지 가리라.

정부는 김학규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오광심에게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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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현충원에 안장된 김학규와 오광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