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을 맞아
'국군의 날' 의미를 되새기다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을 맞아 <BR />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을 맞아 

‘국군의 날’의미를 되새기다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1940년 9월 17일, 중국의 임시 수도였던 충칭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창설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 성립된 지 20여 년 만이었다. 임시정부의 정규군이었던 만큼 김구 주석은 “광복군은 한·중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며 창설 취지를 천명하였다.


대한민국의 국군의 날 제정

한국광복군은 연합군인 영국군과 합동으로 인도-미얀마 전선에 참전하였고, 미군과 합작해 국내진공작전을 위한 OSS 특수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광복 이후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정통성에서 밀려나 있었다. 1987년 제6공화국 헌법에서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잇는다고 명시했지만 국군만은 그렇지 못했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국군의 날’에 대한 논쟁이다.

우리나라에서 국군의 날 제정은 해방 후 창군 과정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1950년대 중반까지는 육·해·공 3군의 국군의 날이 각기 존재했다. 육군은 조선경비대가 창설된 1946년 1월 15일, 공군은 육군에서 독립한 1949년 10월 1일, 해군은 조선해안경비대의 모체인 해방병단이 창설된 1945년 11월 11일에 각기 기념식을 치렀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1955년 8월, 육군은 제3사단이 38선을 돌파한 1950년 10월 1일을 기념일로 바꿨다. 1년 뒤인 1956년 9월, 정부는 각 군의 창설 기념일을 통합하여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하였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부는 이에 대해서 3군 단일화, 국군의 사기, 국민의 국방 사상 함양, 재정 절약 등의 차원이라 했지만 국가의 방침인 반공주의의 일환이었다.


정권별 국군의 날에 대한 논쟁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열린 국방군사연구소 국방학술대회에서 처음으로 국군의 정통성 문제가 거론되었다. 발제자로 나선 조항래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는 “광복 후 미군정 시기에 한국군의 창설과 정통성 계승에 있어 우여곡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군의 창군 인맥과 이념을 통해 볼 때 한국군은 광복군 이념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정통성 또한 계승된 것이 너무 당연하다”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의 주장은 학술대회였던 만큼 사회적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군의 정통성 문제가 국군의 날 변경 논쟁으로 귀결되었다. 2000년 9월 한국광복군 창군 60주년 기념학술회의에서 김삼웅 대한매일 주필과 한시준 단국대학교 교수 등은 주제 발표를 통하여 “통일시대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현행 국군의 날은 한국광복군 창군 기념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의병→독립군→광복군’으로 이어지는 우리 군의 역사적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정훈감 전 육군, 표명렬 군사평론가는 어느 일간지에 “광복군은 임시정부의 자랑스러운 정식 군대다. 때문에 국군의 날은 국군의 정신적 전통과 이미지 결정에 매우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며 이를 정상화하여 진정한 역사 바로 세우기를 다시 시작하자고 주장하였다. 김재홍 경기대 교수·오마이뉴스 논설주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헌법 전문에 명시한 점만 보아도 최소한 임정의 광복군이 오늘 우리 ‘국군의 어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라면서 같은 주장을 펼쳤다. 

이 문제는 국회로까지 확산하였다. 2000년 10월 제16대 국회 국감장에서 박상규 의원(민주당)이 “38선을 돌파한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한 것은 군의 이념적 연원, 정통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창설일을 포함해 항일 의병, 독립군, 광복군 등의 창설과 관계있는 날을 국군의 날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힘입어 그해 11월에는 처음으로 의원 21명이 국군의 날을 9월 17일로 변경할 것을 촉구하는 입법 청원을 하였지만 반대 목소리에 흐지부지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노무현 정권에서도 지속되었다. 2004년 국군의 날 변경을 주장하였던 예비역 장성이 재향군인회 등 여러 군 관련 단체로부터 제명될 뻔하기도 하였지만, 그 문제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제기되었다. 그해 8월에는 여·야 의원들이 참여하는 ‘제2기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 총회에서 국군의 날을 한국광복군 창설일로 변경하는 일을 9월 정기국회에서 통과시키기로 하였지만 관철하지 못했다. 다만 그해 계룡대에서 열린 56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광복군과 국방경비대 등 국군의 모태 부대들이 옛 복장으로 행진하여 국군의 정통성 회복 차원에서 의미가 있었다.

이는 2005년 이후 노무현 정권 내내 반복되었다. 2005년에 평화재향군인회가 국군의 날 변경에 발 벗고 나서자 재향군인회는 이를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국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궤변’이라고 비난했다. 2006년에는 시민단체도 국군의 날 변경에 한목소리를 내는가 하면, 여야 국회의원들이 ‘국군의 날 기념일 변경 촉구 결의안’을 발의했으나 이 또한 통과되지 못하였다. 반대 측 인사들은 10월 1일이 민족상잔과 치욕의 날이라는 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민족상잔의 주범을 격퇴한 것이 왜 ‘치욕’인지 묻는가 하면, 이를 바꾸려 하는 것은 ‘북쪽의 심기’를 의식하는 것이라 주장하기도 하였다. 특히 군 관련 인사들은 10월 1일이 50년 이상 계속되어온 국군 기념일이라며 반발하였다.


한국광복군 창설에 대한 정통성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뒤에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정부 차원에서 국군의 날을 광복군 창건일로 한다는 것에 거부감을 나타냈다. 1998년 건군 50주년 기념우표에 국군의 모습 대신 광복군과 백두산 천지를 그려 넣어 국군의 뿌리를 조명하고 국토수호라는 국군의 사명을 부각하였지만, 2008년 건군 60주년에는 육·해·공군의 모습만이 기념우표에 담겼다. 그런가 하면 그해 10월 1일 국군의 날 행사에서는 예전과 달리 행진 대열에서 광복군이 빠졌다. 보수 측 인사들은 국군의 날 변경 주장에 좌파 성향을 덧씌워 이념 공세로 변질시켰다. 그래서였는지 2010년 9월 한국광복군 창립 70주년 행사에서 국군의 날 개정을 촉구하는 정도로 그쳤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러한 목소리는 다시 커졌지만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2017년 8월 국방부 업무 보고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국군의 날 변경을 검토해 볼 만하다”는 취지로 발언한 뒤에 10월 1일은 반공사상을 고취하고 분단을 고착화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그해 10월 여당 국회의원들은 ‘국군의 날을 임시정부 광복군 창설일로 변경해야 한다’는 결의안을 냈지만, 야당 인사들이 독립 세력과 건국 세력을 편 가르기하고 소모적 갈등을 조장한다며 반발하면서 유야무야 되었다.

다른 나라의 국군의 날은 독립된 날을 기념하거나 외세에 크게 항거한 날, 국가 정치 운영 형태가 바뀌는 날, 또는 정규군 형태의 국군이 만들어진 날 등을 기념일로 삼는다. 유럽 국가나 여느 선진국의 경우는 세계대전 승전 기념일, 혹은 국가 자체의 역사적인 날을 국군의 날로 정하였다. 특히 식민지를 경험한 폴란드는 1920년 바르샤바 전투에서 이긴 8월 15일을, 베트남은 까오방성(Cao Bang)의 숲에서 일본군에 맞서 선전 해방군이 조직된 날인 1944년 12월 22일을 국군의 날로 정하고 있다. 이들 나라는 대외 투쟁과 독립에 가치를 두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이와 동떨어져 있다. 

올해 2020년 8월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을 맞아 여당 국회의원이 또다시 ‘국군의 날 기념일 변경 촉구 결의안’을 발의했다. 벌써 다섯 번째이다. 1987년 제6공화국 헌법에서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잇는다고 천명한 것처럼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 역시 한국광복군에 있다. 이는 이념의 문제를 떠나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찾는 것이며 통일로 한 발짝 다가서는 길이다. 더는 이데올로기를 이용한 정치적 소용돌이에 한국광복군의 정통성이 퇴색되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