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역사

일제 침략자들의
음모

일제 침략자들의<BR />음모
글 은예린 역사작가


일제 침략자들의 음모


105인 사건


대중선동의 귀재인 나치 독일의 선전 장관 파울 괴벨스는 다음과 같은 끔찍한 어록을 남겼다. “우리가 어떤 나라에 쳐들어가면 그 나라 국민은 자동적으로 세 부류로 나눠지는데, 한쪽은 저항 세력(resistance), 다른 한쪽은 협력 세력(collaborator)이며, 그 사이에 머뭇거리는 대중(masses)이 있다”고 하였다. 괴벨스는 침략 대상국 국민들에게 자신들의 부가 약탈되는 것을 참고 견디게 하려면 대중이 저항 세력을 돕지 않고 협력 세력에 가담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일제, 한민족 말살정책을 펼치다

불행하게도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인 일제강점기에도 괴벨스의 주장과 일치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말았다. 안중근이나 이봉창 등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저항 세력으로, 이완용을 위시한 을사오적과 노덕술 등의 수많은 협력 세력이 존재하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대중들은 온갖 착취와 혼란을 겪으며 힘들어하고 있었다. 지우고 싶지만 지울 수 없는 비참한 우리 역사의 치욕스러운 흙탕물은 일제 침략자들보다 그들에게 협력한 친일파의 매국행위였다. 같은 민족이 서로 끌어안고 보듬으며 일제를 물리치기엔 너무 버거운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친일파는 오직 자신들의 출세와 기득권을 위해 조그마한 개인적인 양심마저 내팽개쳤다. 저들은 독립운동가들에게 같은 민족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잔혹한 고문도 서슴지 않았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침략하면서 친일파들과 작당하여 경제적 침략과 더불어 정신적으로도 불구가 되도록 더러운 계략을 꾸미기 시작하였다. 식량과 토지의 강제적 약탈을 시작으로, 젊은이들의 노동력을 강제로 착취하고, 여성들을 전쟁에 동원하여 군인들의 희생양으로 삼았다. 심지어 사람을 의학 실험의 도구로 삼는 등 차마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만행을 일삼았다. 이와 더불어 우리의 말과 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민족말살정책을 병행하였다. 각종 사건을 조작하여 무고한 우리 민족을 고문하고 살인하는 행위는 다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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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인 사건으로 압송되는 신민회원들(1911. 9.)



지록위마로서 공포 분위기를 조장하다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고사성어를 떠올려 보자.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는 것이다. 곧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만들어 강압적으로 인정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 일제 침략 세력과 친일파는 진실이 아닌 사건을 조작하여 사실로 인정하도록 한민족을 괴롭혔다. 

강제병합 직후 어수선한 상황에서 조작된 대표적인 사건은 ‘105인 사건(일명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이다. 일제는 처음에 식민지 근대화론을 펼치며 미개한 조선을 발전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흑색선전을 반복적으로 강변하였다. 식민지 노예교육 등을 통하여 청소년들에게 이를 무의식중에 받아들이도록 대대적인 선전과 조작에 혈안이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사건을 조작하여 대중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폭압적인 공포 분위기 만연으로 한반도는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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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으로 끌려가는 신민회원



일제는 신민회 세력에 주시하다

을사늑약 이후 서북지역은 신민회와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교육 계몽운동이 크게 확산되었다. 일제는 항일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 12월에는 군자금을 모금하다 잡힌 안명근의 사건을 확대·날조하는 등 서북지역 배일기독교인과 신민회 회원을 체포한 안악사건을 조작하였다. 대한제국의 최대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 조직을 탐지한 후 탄압하기 위한 105인 사건이다.

신민회는 1907년 초에 안창호·양기탁·이승훈 등이 조직한 항일단체였다. 목적은 독립사상의 고취, 국민 역량의 배양, 청소년 교육, 민족 자본 육성 등을 통한 민족 실력 양성이었다. 일제는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풍문을 조사하던 중 평양·선천·정주 등에서 기독교학교 교사와 학생 등이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고 날조하였다.

일제는 1910년 8월 이래 신민회 본부의 지휘로 다섯 차례에 걸쳐 ‘총독 암살 계획’이 추진되었다고 강변하였다. 평양·선천·정주 등 9개 도시에서 사건 날조에 필요한 자금과 무기를 구입하는 등 준비 작업을 수행하였다. 압록강철교 개통식 참석을 위한 데라우치 총독의 서북지방 방문을 계기로 대원들이 준비한 단총으로 총독 암살을 도모하였다고 암살미수죄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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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탁 / 임치정 / 선우훈



조작·날조로 105인 사건을 확대하다

일제는 1911년 9월부터 총독 암살미수사건으로 윤치호·양기탁·임치정·이승훈·유동열·안태국 등 전국적으로 600여 명을 검거하였다. 각본에 맞추어 피의자들에게 진술을 강요하면서 잔인한 고문으로 허위 자백도 받아내었다. 이를 105인 사건이라 지칭함은 이 사건에 강제로 연루되었던 피의자 가운데 제1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이 105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조선음모사건(朝鮮陰謀事件)’·‘선천음모사건(宣川陰謀事件)’·‘신민회사건’이라고 불렸다. 영문으로는 ‘The Korean Conspiracy Case’라 하였다. 

피의자 체포는 1911년 9월 3일부터였다. 평북 선천 신성중학교에서는 아침기도회를 마치고 각자 교실로 들어가려는 때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교사 7명과 학생 20명 등을 포승하고 수갑에 채워 서울로 압송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일어났다. 3개월이 지나 경무총감부 제1헌병대 유치장에서 본격적인 심문과 고문이 시작되었다. 악의에 찬 위협은 물론 곤봉으로 온몸을 무수히 때렸다. 고문을 받은 선우훈(鮮于燻)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심문을 맡은 일경의 첫 마디가 ‘네놈은 혈기 있고 강력한 놈으로서 신민회원이다. 기독교 신자로 우리를 가리켜 왜놈, 왜놈 하면서 우리말을 무엇이든지 듣지 않고 서양 놈의 말이면 죽을 데라도 잘 가는 놈인 줄 안다. 너는 지난 석 달 동안 유치장에서 매일 성경을 읽고 통감부에서 어떠한 악형을 할지라도 불복하자는 결심을 했다는 것도 안다’고 하면서 주먹과 곤봉으로 마구 때렸다.” 

고문은 갈수록 더욱 악독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고문의 종류는 70여 가지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혹독하고 잔인하였다. 잠을 못 자게 하거나, 수 십 일을 굶긴 후 산해진미를 바라보게 하여 배고픈 고통을 참지 못해 옷 속의 솜을 뜯어먹거나 깔고 자던 썩은 짚을 씹어 삼키기도 했다는 고백이다. 또 지독한 냄새가 나는 약물을 코 안에 넣어 정신을 잃게 하였고, 온몸에 기름을 바른 후 불로 단근질하기 등이었다.

일제는 고문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하여 여러 방법을 동원하였다. 극소수를 제외한 피의자들은 허위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고통을 받은 사람은 피의자들만이 아니라 가족들도 견디기 어려운 고초를 겪었다. 가장을 잃은 가정은 생활고로 집을 팔거나 가족들이 흩어지는 고통을 당하였다. 피의자 중 김근형(金根瀅)·정희순(鄭希淳)은 심문 과정에서 사망하였다. 

암살 미수는 처음부터 없었던 일로 신민회를 무장 암살 단체로 몰아 일망타진하기 위한 일본이 꾸민 조작극이었다. 일제는 겉으로 공정성과 합리성을 내세웠지만, 사실상 그것은 날조된 연극과 같은 재판이었다. 이 사건은 담당 검사가 충분한 조사도 없이 구성한 의구심 짙은 사건에 불과했다. 판사들의 판결 또한 저들이 의도한 대로 편파적으로 진행되었다. 일본 측이 제시한 증거는 관련된 조선인들의 자백이었다.

1912년 6월 경성지방법원에 선 123명의 순수한 한국인들의 참혹함은 누굴 원망해야 하는가? 이 사건을 규명하는 재판의 시작은 법정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이들의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 “기존의 증언은 진실이 아니오, 우리의 몸이 바로 그 증거요.”

법정에 선 조선인들은 강요된 허위 자백임을 주장하며 반인륜적인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였으나 123명 중 105명은 유죄를 선고받게 된다. 사실이 아니지만 사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 되고 말았다. 다음은 ‘양기탁·임치정·주진수·안태국 등 16명의 보안법 위반 판결문’ 내용의 일부이다.

“서간도에 단체적 이주를 기하고 조선 본토에서 상당히 자력(資力) 있는 다수 인민을 동지(서간도)에 이주시켜 토지를 구매하고 촌락을 만들어 신영토로 삼고, 학교 및 교회를 배설하고, 나아가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문무(文武) 쌍전(雙全) 교육을 실시하여 기회를 타서 독립전쟁을 일으켜 구(舊) 한국의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일제가 신민회의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과 무관학교 설립을 차단하기 위해 105인 사건을 조작한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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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 관계 인사 판결문(1911. 9.)



왜 일제는 허구적인 사건을 조작했을까

일제는 강점 직후 자국의 ‘완전한 식민지’로 개편하기 위해 무소불위의 ‘무단통치(武斷統治)’를 자행하였고 국권 강탈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이 고조되는 분위기였다. 이에 일제는 예상되는 한인들의 항일민족운동 사전 차단을 당면한 최대 과제로서 인식하였다. 무장운동에 대한 토벌작전과 근대 법령 정비를 빙자한 애국계몽운동 탄압 등은 이러한 의도와 맞물려 있었다. 한국 강점을 전후하여 국내외에서 전개된 의열투쟁 등에 조직적인 비밀결사가 배후에 존재한다고 인식하였다.

105인 사건을 조작한 이면에는 반일의식이 강한 서북지방 기독교 교세 확장 방지와 그들의 배후 세력인 미국 선교사들 축출에 있었다. 이는 미일 양국 사이에 심각한 외교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과 무관하지 않았다. 다수 외국인 선교사를 연루시킴으로써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는 세계적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1910년 전후로 급속히 냉각되었던 양국의 관계 변화는 당시 국제질서 재편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105인 사건 이후 신민회 조직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결코 와해되지 않았다. 회원들은 오히려 항일의식을 계승해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신민회 회원들이 3·1운동의 민족대표로서 참여한 것은 이를 방증한다. 이들 선각자가 보여준 백절불굴의 나라사랑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