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과 한인애국단’해설서 ■ 사이버 전시관 이용 방법 독립기념관 홈페이지-전시-상설전시-제5전시관-사이버 전시관 오른쪽 아래의 5_023 사진 선택 – 표시된 전시물을 살펴보며 관람 의열투쟁은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에 맞서 자유와 평등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독립운동의 한 방법 이었습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 척박한 상황에서 적은 인원과 비용으로 최대한 효과를 얻기 위해 의열투쟁을 선택했습니다. 1919년 성립된 의열단은 ‘정의로운 일을 맹렬 하게 하자’라는 뜻으로 단장 김원봉을 중심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한인애국단은 1930년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만든 ‘특무 대’로 단장은 김구였습니다. 의열투쟁은 아무에게나 총을 쏘거나 아무 곳 에 폭탄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일제 식민지배의 책임이 있는 사람이나 일제의 중요한 기관을 대 상으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의열단과 한인애국단 은 각각 처단하고 파괴해야 하는 대상을 정하여 일반 사람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였습니 다. ○ 사이버 전시관 위치: 5_021, 5_023, 5_026 ○ 학습지: 의열단과 한인애국단 2쪽
- 박재혁 의거 부산에서 태어난 박재혁 의사는 학생시절부터 친구들과 함께 비밀단체를 만들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 의열단 단 장 김원봉을 만나게 되며 의열단원이 되었습니 다. 1920년 박재혁의사는 많은 의열단원들이 체포 되었던 부산경찰서를 폭파 대상으로 의거 준비 하였습니다. 당시 부산경찰서장이 중국의 오래된 책에 관심이 많다는 정보를 듣고 책장수로 변장 하여 서장을 만났습니다. 서장을 마주보고 앉은 박재혁의사는 책을 꺼내는 척하며 보자기에서 폭탄을 꺼내어 서장에게 던졌습니다. 매우 가까 운 거리에서 폭탄을 던져 서장은 큰 부상을 입 고 사망하였습니다. 박재혁 의사도 큰 부상을 입은 채 붙잡혀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일본인의 손에 죽을 수 없다’ 며 감옥에서 단식투쟁을 하다 27세의 젊은 나이 에 순국하였습니다. 이 의거는 의열단의 첫 번째 성공으로, 의열단 이 앞선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이후 의열단은 다음 의거를 계획하 고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추진해 나갈 수 있었습 니다. ○ 사이버 전시관 위치: 5_023 ○ 학습지: 의열단과 한인애국단 3쪽 - 김상옥 의거 김상옥 의사는 1923년 1월 서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건물을 파괴하고 몇 명의 일본인에 게 부상을 입힙니다. 김상옥의사가 폭탄을 던진 ○ 사이버 전시관 위치: 5_023 ○ 학습지: 의열단과 한인애국단 4쪽
종로경찰서는 일제 경찰권력의 중심이자 우리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대표적인 곳이었습니다. 김 상옥의사는 의거 후 동지의 집에 피신해 있다가 일본경찰 400명의 포위를 당하게 됩니다. 하지 만 뛰어난 총 솜씨로 혼자서 400명을 상대하며 3시간동안 거리에서 추격전을 벌였고 일본경찰 십 여 명을 사살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 한발로 자결하며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 러나 한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은 뛰어난 총 솜씨 로 일본 경찰을 상대했던 영웅 같은 김상옥 의 사의 이야기를 알지 못했습니다. 김상옥 의사의 용기와 뛰어남이 한국 사람들에게 알려져 독립 운동의 자극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일본이 언 론을 통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개월 후 조선일 보에 기사가 실렸을 때 온 국민은 김상옥의사의 활약에 통쾌해 했으며 의열단의 활동은 국민들 의 독립의지를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이봉창 의거 이봉창 의사는 일본인 상점에서 일하며 민족차 별, 임금차별을 겪었고 이런 차별을 겪지 않기 위 해 일본으로 건너가 ‘신일본인’이 되어 살기로 합 니다. 그러나 차별과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독립이 되어야만 해결된다는 것을 깨닫고 일 본인으로 살고자 했던 이봉창의사는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됩니다. 1930년 이봉창의사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찾아 가 한인애국단에 첫 단원으로 가입하고 1931년 1 월 일본 도쿄 경시청(수도 도쿄의 안전을 담당하 는 곳) 앞에서 왕궁으로 돌아가는 일왕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왕을 뒤 따르던 마차에 폭탄이 터지며 일왕처단에는 성공 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붙잡히고 맙니다. 일본사람들은 자신들이 신이라고 믿었던 일왕에 게 폭탄을 던진 사건에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일 ○ 사이버 전시관 위치: 5_025 ○ 학습지: 의열단과 한인애국단 5쪽
본 신문은 경시청의 수비가 허술한 것이 들통 날 것을 우려해서 경시청이 아닌 다른 곳에서 폭탄을 던졌다고 거짓으로 보도했습니다. 이봉창의사의 의거로 당시 일본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 수 있 는 부분입니다. 이 의거는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일제의 상징 인 일왕을 처단하고자 한 첫 번째 의거였습니다. 이때 사용된 폭탄은 성능을 더 강화해 윤봉길의사 의거에 사용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때 중국역시 일본의 침략을 당하고 있어 이 사건이 성공하지 못한 것을 함께 아쉬워하였습니다. - 윤봉길 의거 1932년 4월 29일 일본은 일왕의 생일과 상하 이 침략에 성공한 것을 축하하는 기념식을 열었 습니다. 행사장은 중국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이 었고 이곳에는 당시 일본군 만 명을 비롯하여 침략전쟁을 이끌던 군인, 외교관들이 참석하였습 니다. 한인애국단원 윤봉길의사는 행사장에 들어 가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를 향해 폭탄을 던졌 습니다. 윤봉길의사가 던진 물통모양의 폭탄이 터지며 시라카와를 비롯한 일본의 고관들이 중 상을 입었습니다. 윤봉길의사의 대담한 의거는 일제의 지배를 거부하는 민족의 뜻을 분명히 보 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인들도 윤봉길의사 용 기에 감동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 정부는 우리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어 려움에 빠져 독립운동의 열정이 사라지고 있던 시기 독립운동의 상황을 완전히 바꾼 아주 중요 한 사건이었습니다. ○ 사이버 전시관 위치: 5_027, 5_031 ○ 학습지: 의열단과 한인애국단 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