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해설서 ■ 사이버 전시관 이용 방법 독립기념관 홈페이지-전시-상설전시-제6전시관-사이버 전시관 오른쪽 아래의 사진(커서를 이동하여 번호확인)선택 후 표시된 전시물을 클릭하여 관람 -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수립 1919년 3월 1일 우리민족은 전 세계를 향해 조선이 독립 국가이고, 조선인이 자유 민족임을 선언했습니 다. 그리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이를 알리기 위한 시 위가 이어졌습니다. 국내에서 이렇게 시위가 퍼지고 있던 1919년 4월 상해에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독립운동가들 이 모였습니다. 이날 새로운 나라와 함께 나라를 운 영하는데 근본이 되는 헌법도 만들었는데 이를 ‘임 시헌장’이라고 합니다. 임시헌장의 제1조는 ‘대한민 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밝혀 4000년이 넘는 우리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이 주인인 나라가 세워졌 음을 알 수 있습니다. 3·1운동이 곧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일로 이어진 것입니다. ‘대한독립선언서’에는 3·1독립선언서와 함께 임시헌 장이 실려 있어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사이버 전시관 위치: 6_020 화면애서 뒤로 돌림 ○ 학습지: 김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2쪽 중국으로 가기 전 김구의 삶 김구는 가난한 상민집안 출신으로 과거에 합격해 양반이 되려고 했지만 시험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 후 관상학1)을 공부하는데 자신의 얼굴에는 좋은 것 이 하나도 없고, 가난하게 산다는 것을 알고 매우 실망을 합니다. 과거에서 떨어진 것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을 받았던 김구는 책의 마지막 구절을 보고 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얼굴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 ○ 사이버 전시관 위치: 6_021 ○ 학습지: 김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3쪽
이 마음 좋은 것만 못 합니다’ 마음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겠다는 결심은 김구가 독립운동을 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 임시정부의 문지기 김구 김구는 3·1운동이 일어나자 44살의 나이에 상하이 로 갑니다. 선생이 안창호에게 임시정부를 지키는 문지기를 시켜달라고 하자 안창호는 ‘경무국장’의 일 을 맡겼는데 경무국은 지금의 경찰청과 같은 곳입니 다. 임시정부에서 우리 독립운동을 방해하거나 정보 를 빼내는 사람이 없는지 감시하는 일을 주로 하였 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군창설 3·1운동 후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독립 전쟁을 선택하고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를 해나갑니 다.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노백린은 “앞으로의 전 쟁의 승리는 하늘을 지배하는 자가 가져갈 것이다” 고 말하며 공군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 때 전투기가 처음으로 등장하면서 그 위력 을 실감했기 때문이죠. 임시정부는 우선 조종사를 키우기 위해 미국 캘리 포니아 윌로우스에 한인비행사 양성소를 세웁니다. 그 어느 활동보다 많은 돈이 필요했는데 캘리포니아 에서 ‘쌀의 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백만장자 김종림 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동포들 의 도움과 노백린 장군의 열정적인 지휘아래 양성소 가 세워졌지만 연이은 홍수로 김종림의 쌀농사가 피 해를 입으며 1년 만에 문을 닫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포기하지 않고 박희성, 이용근 같 은 훈련생은 미국의 비행학교에 입학해 결국 비행가 자격증을 따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임시정부는 이들 을 ‘육군 비행병’으로 임명해 이후 전쟁을 대비했는 데 임시정부가 일본과 전쟁할 때를 기다리며 끊임 없는 준비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사이버 전시관 위치: 6_023 오른쪽 이동 ○ 학습지: 김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4쪽
임시정부 이동시기 김구 피난처 윤봉길의 의거 성공 후(1932년) 김구는 일본의 추격 을 피해 상해를 떠나 피신을 합니다. 당시 김구 체 포에 일본은 60만원의 현상금을 걸었는데 지금의 250억에 해당하는 거액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한 현상 금을 보면 김구가 당시 독립운동의 중심인물이었다 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임시정부는 중국 국 민당 정부의 도움을 받아 항주, 가흥에 피신하였는 데 추푸청(褚輔成)이라는 중국인이 큰 도움을 주었 습니다. 김구는 가흥에 있을 때 추푸청(褚輔成)의 양아들 천통성(陳桐生)집에서 지냈는데 신분을 들키지 않으 려고 광동성이 고향인 중국인 행세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가흥까지 일본의 추격이 이어졌고 매우 위험 할 때에는 자신이 있었던 2층 왼쪽 방에서 비밀통로 를 통해 1층으로 빠져나와 호수에 떠있던 배를 타고 호수 위에서 생활하였습니다. 이 호수는 ‘남호’라는 호수인데 호수의 많은 유람용 배들은 주로 여자들이 배를 저었습니다. 김구는 ‘주아이바오’라는 중국 여 성의 도움으로 배안에서 생활하였습니다. 김구는 자 신이 쓴 ‘백범일지’라는 책에도 이 여성에 대한 고마 움을 표현하였는데, 임시정부가 충칭에 도착하기까 지 약 8년은 이와 같은 많은 중국인들의 도움이 있 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 사이버 전시관 위치: 6_027 ○ 학습지: 김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5쪽 한국 광복군 창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사천성 충칭에 도착한 1940 년 정규군대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합니다. 일제가 중 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을 일으키며 전쟁을 확대해 나가고 일제의 패망이 예상되자 임시정부는 더욱 적극적인 군사 활동을 합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한국광복군은 연합국과 함께 전쟁 에 참여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합니다. 또 중국에 ○ 사이버 전시관 위치: 6_029 ○ 학습지: 김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6쪽
1) 얼굴을 보며 운명을 판단하는 학문 있던 미군과 함께 국내로 직접 들어와 일본군을 몰 아내고 영토를 찾으려는 작전의 훈련을 마치기도 합 니다. 이렇듯 한국 광복군은 전쟁에 참여해 우리의 힘으로 나라를 찾으려 노력하였습니다. 광복과 환국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과 함께 대한민 국 임시정부는 충칭에서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약 35년간의 일제강점기가 끝나던 그토록 바라던 광복 의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임시정부의 독립운동가 들은 기뻐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우리가 계획했던 군사활동을 다 실행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죠. 이때 김구는 ‘주석’을 맡고 있었으며, 어느덧 70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27년간 중국에서 독립 운동하는 중에 부인, 어머니, 큰아들을 잃었고 안창호, 이동녕 등 많은 독립운동가 선배들도 잃는 큰 아픔을 겪어 야 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독립을 확신할 수 없었던 그때, 일제 의 침략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나라를 다시 찾을 때 까지 50년이 넘는 시간동안 독립 운동한 분들이 없 었다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떨지 여러분들도 생각 해 보시기 바랍니다. ○ 사이버 전시관 위치: 6_030 ○ 학습지: 김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