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国独立運動史研究所 独 立 紀 念 館
목 차 008 / 034 / 064 / 106 / 142 / 제1주제 세계사적 저항운동의 관점에서 본 윤봉길의거 다무라 미츠아키(전 호쿠리쿠대학교 교수) 제2주제 윤봉길의 사상과 한국독립운동사적 위상 김도형(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제3주제 윤봉길의거에 대한 국내외 언론의 반응 - 국내와 구미 언론을 중심으로 홍선표(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제4주제 윤봉길 의사의 가나자와 순국과 현양사업 김상기(충남대학교 교수, 매헌연구원 원장) 토론문 「세계사적인 저항운동의 관점에서 본 윤봉길의거」에 대한 검토문 정아영(리츠메이칸대학교 교수) 2017년 12월 2일(토) 반전평화운동의 표상, 윤봉길의거 020 / 051 / 084 / 124 / 144 / 第一主題 世界史的な抵抗運動の観点からみた尹奉吉義挙 田村光彰(元北陸大学教授) 第二主題 尹奉吉の思想と韓国独立運動史的な位置(要約) 金度亨(韓国独立運動史研究所首席研究委員) 第三主題 尹奉吉義擧にたいする国内外メディアの反応 - 国内と欧米メディアを中心に 洪善杓(韓国独立運動史研究所責任研究委員) 第四主題 尹奉吉義士の金沢での殉国と顕彰事業 金祥起(忠南大学教授ㆍ梅軒研究院院長) コメント 「世界史的な抵抗運動の観点からみた尹奉吉義挙」へのコメント 鄭雅英(立命館大学教授) 2017年 12月 2日(土) 反戦平和運動の表象としての尹奉吉義挙 150 / 194 / 244 / 266 / 제1주제 1930년대의 쓰루 아키라의 반전 평화운동 가츠무라 마코토(리츠메이칸대학교 코리아연구센터 센터장) 제2주제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 한국 언론의 보도를 중심으로 이규수(히도츠바시대학교 한국학연구센터 교수) 제3주제 일본에서의 반전평화운동의 현재적 의미 -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한 동북아 평화연대의 발자취와 현재 모리 가즈토시(가나자와 시 의원) 제4주제 동아시아 평화운동과 한국민주화 운동의 현재와 과제 서승(리츠메이칸대학교 전 교수) 2017년 12월 3일(일) 반전평화운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과제 172 / 221 / 254 / 281 / 第一主題 1930 年代における鶴彬の反戦平和運動 勝村誠(立命館大学コリア研究センタ-長) 第二主題 人権弁護士布施辰治と韓国の独立運動家たち - 韓国メディアの報道を中心に 李圭洙(一橋大学韓国学研究センタ-教授) 第三主題 日本における反戦平和運動の現在的な意味 - 歴史認識を基礎とした東北アジア平和連帯の歩みと今 森一敏(金沢市議員) 第四主題 東アジア平和運動と韓国民主化運動の現在と課題 徐勝(元立命館大学教授) 2017年 12月 3日(日) 反戦平和運動の過去と現在そして課題
윤봉길의사 순국 85주년 한·일공동학술회의 윤봉길의거와 세계평화운동 반전평화운동의 표상, 윤봉길의거 공동주최: 독립기념관, 가나자와 준비위원회(윤봉길의사친우회, 월진회 일본지부), 리츠메이칸대학교 코리아연구센터, 히도츠바시대학교 한국학연구센터 일 시:2017년 12월 2일(토) 13:00~17:30 장 소: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가나자와대학교 새터라이트 프라자 3층 회의실 | 프로그램 순서 | 사회 : 박민영(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통역 : 배영미(오사카대학교 준교수) 개회사 및 축사 제1주제 | 세계사적 저항운동의 관점에서 본 윤봉길의거 발표 다무라 미츠아키(전 호쿠리쿠대학교 교수) 토론 정아영(리츠메이칸대학교 교수) 제2주제 | 윤봉길의거의 한국독립운동사적 위상 발표 김도형(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위원) 토론 가츠무라 마코토(리츠메이칸대학교 코리아연구센터 센터장) 제3주제 | 윤봉길의거에 대한 국내외 반향 발표 홍선표(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토론 이규수(히도츠바시대학교 한국학연구센터 교수) 제4주제 | 윤봉길 의사의 가나자와 순국과 일본에서의 윤봉길의거 현창 과정 발표 김상기(충남대학교 교수, 매헌연구원 원장) 토론 후루하타 도오루(가나자와대학교 교수) 종합토론 좌장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尹奉吉義士殉国85周年日·韓共同学術会議 尹奉吉義挙と世界平和運動 反戦平和運動の表象としての尹奉吉義挙 共催:韓国独立紀念館·金沢準備委員会(尹奉吉義士共の会·月進会日本支部) 立命館大学コリア研究センタ ·ー一橋大学韓国学研究センター 日時:2017年 12月 2日(土) 13:00~17:30 場所:金沢大学サテライト·プラザ3階集会室 | プログラム | 司会 : 朴敏泳(韓国独立運動史研究所責任研究委員) 通訳 : 裵玲美(大阪大学準教授) 開会の挨拶 第一主題 | 世界史的な抵抗運動の観点からみた尹奉吉義挙 報告 田村光彰(元北陸大学教授) コメンテータ ー 鄭雅英(立命館大学教授) 第二主題 | 韓国独立運動史上における尹奉吉義挙 報告 金度亨(韓国独立運動史研究所首席研究委員) コメンテータ ー 勝村誠(立命館大学コリア研究センター長) 第三主題 | 尹奉吉義挙に対する国内外における反響 報告 洪善杓(韓国独立運動史研究所責任研究委員) コメンテータ ー 李圭洙(一橋大学韓国学研究センター教授) 第4主題 | 尹奉吉義士の金沢における殉国と解放後の遺骸発掘及び顕彰 報告 金祥起(忠南大学教授ㆍ梅軒研究院院長) コメンテータ ー 古畑徹(金沢大学教授) 総合討論 座長 金竜達(韓国独立運動史研究所所長)
世界史的な抵抗運動の観点からみた尹奉吉義観 7 제1 주제 第一主題 세계사적 저항운동의 관점에서 본 윤봉길의거 世界史的な抵抗運動の観点からみた尹奉吉義挙 다무라 미츠아키(전 호쿠리쿠대학교 교수) 田村光彰(元北陸大学教授)
세계사적저항운동의관점에서본윤봉길의거 98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1. 들어가는 말 제1 윤봉길의 저항을 레지스탕스로 본다. 제2 여기서 레지스탕스란 점령자가 병합자에게 타격을 주는 ‘모든 활동’을 포함한다. 제3 ‘모든 활동’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이 저항은 세계사적 의의를 지닌다. 이 글은 이 점에 초점을 맞추어 윤봉길 의거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의 다른 점령국과 비교하여 검토해 보고자 한다. 2. 침략과 합병의 논리: 일본의 ‘이익선’ 독일의 ‘생존권’ 일본의 메이지 시대는 국내적으로 두 개의 내전인 무진전쟁(戊辰戦争)과 서남전쟁(西南戦争)을 거쳐 성립한다. 대외적으로는 점령과 병합의 역사로 관철된다. 1869년 메이지 정부는 아이 누모시리(=아이누의 조용한 대지)를 홋카이도로 개명하고 이 대지를 합병한다. 1974년 류큐왕 국을 일본의 영토로 합병할 의도를 목적으로 대만으로 출병한다. 이듬 해 강화도 부근 외국 선 금지해역을 넘어 무단으로 진입해 측량을 하는 것으로 ‘섬 포대를 도발한다. 포격을 받자 (생략) 조선의 요새도 격파하여 많은 수비대원을 죽였다’1. 1879년 무력으로 류큐왕국을 병합 한다. 세계사적 저항운동의 관점에서 본 윤봉길 의거 다무라 미츠아키 | 전 호쿠리쿠대학교 교수 일본과 아시아의 관계는 일본의 무력행사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무력행사를 정당화하는 논리는 19세기후반 제국주의로부터 출발하며 자국의 국경선을 넘는 ‘이익선’‘생존권’을 맘대 로 설정하였다. 타국의 영토를 병합하는 근거로 삼는 병합 프로세스가 어떠하였는지 일본과 독일의 경우로 살펴보겠다. 1889년 일본에서는 12월 24일 야마가타 아리토모 총리대신이 시정방침 연설에서 일본의 국경선(주권)을 넘어 ‘이익선’을 지킬 것을 시사한다. 조선을 시야에 둔 ‘이익선’이 일본의 독 립을 위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후 일본은 한반도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두 전쟁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쳐 대만, 대한제국, 남사할린 등을 식민지로 만든다. 1931년 1월 나 중에 외무상이 되는 마쓰오카 요스케는 일본과 식민지를 ‘자위’하기 위해서는 중국 동북부(만 주)가 ‘생명선’이라고 주장하며 이후 ‘이익선’ 과 ‘생명선’은 아시아 태평양 전역으로 확대되고 ‘대동아공영권’까지 이어진다. 1933년 독일에서 히틀러는 1월 30일 정권을 장악한다. 2월 3일 국방군사령관이 되기 전 비밀연설에서 유럽 동부지구에 새로운 ‘생존권’을 설정할 방침을 시사한다. 1937년 11월 5일 히틀러 총통은 처음으로 지도자들에게 구체적인 전쟁계획을 발표한다. 이에 의하면 러시아 로부터 영토를 뺏고 주민을 배제하고 추방하여 얻은 신영토를 게르만민족을 위한 병합지로 한다는 ‘동방생존권’을 계획하고 원료와 식량을 뺏는다고 하였다. 1938년 독일은 오스트리아 로 진군하여 병합한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자위’를 위해 체코 영내의 독일인 거주지역인 수데텐 지방과 폴란드를 필요불가결한 ‘생존권’으로 포괄했다. 20세기 일본과 독일은 병합지 주민의 양해도 이유도 대지 않고 타국의 영토를 자의적으로 ‘생명선’‘생존권’으로 확대하여 무력으로 병합해갔다. 선발 제국주의 국가인 서양열강과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 독일도 ‘협정’, ‘협상’으로 서로 연결해 이해와 권익을 도모했다. 3. 독일, 한반도, 프랑스, 폴란드의 레지스탕스 제국주의 시대 점령국에서의 저항에 대해 주로 나치 지배하의 독일, 일본지배하의 조선, 그 리고 나치 지배하의 프랑스와 폴란드를 중심으로 논한다. 자원약탈 문제는 이미 연구가 집적 1 Bruce Cumings 저, 横田安司, 小林知子 번역, 『현대 조선의 역사』, 明石書店, 2003년, 157항.
세계사적저항운동의관점에서본윤봉길의거 1110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되어 있으니 여기에서는 주로 점령지배자가 병합지에서 헌법과 의회를 시행하지 않고 민중 에게 비판과 저항이라는 합법적 수단을 보증하지 않았던 점에 착안점을 두겠다. 1) 독일 레지스탕스: 헌법과 의회 없는 독재 국가에 저항하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 침공을 개시,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다. 두 달 뒤 11월 8일 한 사람의 가구장인이었던 게오르그 엘저(Johann Georg Elser)가 히틀러를 살해 할 목적으로 맥주 공장 대리석 기둥에 시한폭탄을 설치한다. 히틀러는 폭탄이 터지기 13분 전에 자리를 뜨고 옛 동료 7명과 웨이트리스 1명이 사망하고 60명이 부상한다. 히틀러 암살 계획 42건 중 가장 성공에 근접했던 사례이다2. 엘저가 암살을 시도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는가. 엘저를 심문한 기록에 따르면 첫째 독일 이 시작한 전쟁의 확대를 막고 ‘더 이상의 비참한 유혈참사’를 저지하기 위해서, 둘째 ‘다른 어느 나라도 병합하지 않는다’는 그러한 독일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에 의한 한국 ‘병합’과 ‘유혈참사’에 대하여 허용할 수 없는 폭거가 될 것이라고 했다. 엘저가 대항했던 독일은 어떠하였는가. 1933년 히틀러는 1월 30일 권력을 장악한 이래 바 이마르 헌법을 빈껍데기로 만드는 정책을 줄줄이 시행했다. 대통령이 기본적 인권을 일지정 지 시킬 수 있는 ‘대통령 긴급령’을 차례로 포고했고, 2월 17일 경찰에게 각자의 판단에 따라 자유롭게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2월 28일 ‘대통령 긴급령’은 주거 불가 침성, 우체통신의 비빌, 사상 신조, 결사의 자유가 골자인 자유권을 폐했다. 동시에 ‘보호검 속’을 도입해 비밀 국가경찰은 구체적인 범죄행위가 없어도 현장경찰관은 ‘국가의 적’이라 하 여 일체의 형사수속을 밟지 않고 구속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10월 까지 8개월간 10만 명이 ‘보호검속’되었고 6백 명이 살해되었으며 좌파-리버럴한 당 기관지 이외의 신문에 대해 ‘발 행정지 명령을 빗발치듯 난발’하게 된다3. ‘대통령 긴급령’에 따라 처음으로 다하우에 강제수용소가 만들어진다. 히틀러 정책을 비판 하거나 저항하는 좌파는 ‘보고감찰’처분 대상이 되었으며 ‘보호검속’을 당했다. 탄압대상이 2 Will Berthold : Die 42 Attentate auf Adolf Hitler, Wilhelm Goldmann, 1981 (번역서:田村光彰, 志村恵, 中 祢勝美, 中祢美智子, 佐藤文彦, 江藤深 번역 『히틀러 암살계획 ·42』, 社会評論社, 2015) 3 1933. 2. 21, 『신 취리히 신문』. 된 그들은 형사수속이 생략되었으며 신병의 구속기간, 장소도 등도 일체 알려지지 않았다. 즉 ‘예방적으로 구제’되어야 할 살충대상이 된 것이다. 이후 강제수용소는 독일과 점령/병합 지에 3천에서 6천 개 정도 만들어지며 공산당, 사회민주당, 자유주의자. 기독교인, 유대인, 로마계 시민, 여호와의 증인 등이 이곳으로 보내진다. 살해된 자는 판명된 수만해도 6백만 명이다. 무엇보다 심한 것은 야당의 의석을 뺏은 후에 성립시킨 ‘전권위임법’이다. 이 법률은 입법권을 행정권에 위임한 것으로 의회의 동의 없이 모든 법의 성립을 정부에 위임한다는 것 이다. 이는 의회에 의한 의회 스스로의 ‘자살’ 과도 같다. 제2조 정부가 정한 법률은 ‘독일 헌 법; 바이마르 헌법을 배반함을 허용한다’고 하여 행정부는 헌법을 위반한 법률을 제정할 수 가 있었다. 헌법 스스로의 ‘죽음’이다. 엘저가 저항한 독일은 민의를 구현하는 시스템을 전혀 갖지 못하는, 기본적 인권이 압살 된 ‘헌법과 의회 없는 독재국가’ 였던 것이다 저항운동은 서구에서는 일반적으로 ‘레지스탕스’ 유럽 남동부에서는 ‘빨치산’이라 불리며 군사, 무력을 포함하는 모든 저항운동을 의미한다. 보수당 출신의 바이제커 대통령은 독일 점령하의 ‘전 레지스탕스, 노동조합, 공산주의 레지스탕스’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4. 2) 엘저의 ‘폭력적 저항’의 평가 독일의 엘저에 대하여 표하는 경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공통된 점은 고등학교 역사교과에 나타난 ‘용기있는 저항자’5라는 평가이다. 둘째 베를린 국립저항운동 기념관 상설전에서는 ‘폭력적 저항에서 확실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을 피하고자’ 했다는 기술이다. 셋째 히틀 러 체제에 목숨을 걸고 저항하였다. 강제수용소에 들어가거나 망명하거나 한 사람들의 흐름 을 잇는 좌파의 제 정당은 물론이고 보수파도 엘저를 ‘시민적 용기’, ‘자유의 기본가치와 인권 을 지키는 모범’6이라고 칭찬하였다. 2003년 독일 정부는 엘저 얼굴이 들어간 기념우표를 발 행했고 가장 우파인 기독교사회동맹(CSU)도 우표 발행에 찬성을 표했다. 또한 2015년까지 행정단위별로 몇십여 곳에 건설되는 52개의 도로, 공원, 광장, 학교 등에 엘저의 이름이 달 4 바이제커의 연설, 永井清彦 역, 『광야 40년』岩波書店, 1986, 11항. 5 W.예가 외, 『독일의 역사 현대사』, 明石書店, 2003, 370항. 6 2008년 9월 24일 베를린 일제 흉상 제막식전에서 보수정당 기도교민주연맹 원내총무 볼프강 쇼이블레(현 국회하원의원)의 연설.
세계사적저항운동의관점에서본윤봉길의거 1312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고 그를 기렸다. 이는 독일의 전후반성의 하나이다. 3) 레지스탕스란 ‘모든 활동’을 말한다 독일 국립저항운동기념관은 ‘폭력적 저항’이 어떻게 정당화되는지 기술하고 있다. 폭탄으로 히틀러 암살을 기도한 사람이 어떻게 해서 ‘시민적 용기’를 보인 레지스탕스의 일원이 되는가. 일반적으로 권력을 가진 자는 못가진 자 사이에서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발생하므로 정책 비판자들이 비판할 자유를 스스로가 보증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음 문장은 계몽사상가이며 두 번이나 바스티유 감옥에 투옥된 볼테르에 의한 말이다. ‘나는 당신 의견에 반대한다. 그러 나 당신도 주장할 할 권리에 대해서는 목숨을 바쳐 지킨다.’ 권력에 다른 의견을 제창할 권리 를 헌법이 보장하고 국회는 그 권리를 행사하는 대표적인 하나의 장이다. 그러나 히틀러시대는 ‘보호감찰’, ‘보호검속’ 처분이 있어 비판하는 자는 구체적인 행위가 없어도 강제수용소에 보내어지고 살육을 당했다. ‘헌법과 의회가 없는 독재국가’는 패전까지 이어졌으며 이러한 나치체제에서 국민은 헌법과 의회라는 민주주의적 제도로서 저항하고 체 제를 바꿀 수단을 박탈당한다. 전후 서독은 나치 시대를 반성하여 헌법에서 저항권과 그 조건을 정한다. 조건은 ‘다른 구 제수단이 불가능한 경우’이다.7 독일 브레멘 주 헌법은 다음과 같이 저항은 의무라고 했다. ‘인권이 공권력에 의해 헌법을 위반하고 침해당할 경우 각자의 저항은 권리이며 의무이다’(19 조). 저항이 의무이기도 하다는 시점은 획기적이다. 유타 림바흐(Jutta Limbach) 전 독일헌법 재판소 장관은 ‘저항이란 본질적으로는 통상의 합법질서의 타파이다’라고 서술했다8. 게오르 그 엘저는 스스로에게 ‘전쟁의 확대에 의한 더 이상의 유혈사태의 참사’를 막는 의무를 부과 하고 나치 시대의 ‘합법질서’ 타파를 지향한 것이다. 나치 정권체제는 ‘다른 구제수단’ 즉 일 체의 언론 표현수단을 앗아갔으므로 엘저를 ‘합법질서’를 파괴하도록 내몬 것이다. 민중으로 하여금 ‘폭력적 저항’으로 맞설지는 공권력이 ‘다른 구제수단’을 보증할지의 여 부 조건에 따른다. ‘폭력적 저항’은 상황에서 분리해 논할 수 없다. 아래에서도 논하지만 유럽 12개국이 공동으로 처음 집필한 공통역사교과서 (유럽의 역사)에서 프랑스의 대 독일 레지스 7 1968년6월 24일 제17회 개정법률에서 부가. 8 2003년 1월 13일 「게오르그 엘저 주간」개막식. 탕스는 ‘레지스탕스는 스트라이크 방해활동, 테러, 스파이 공작 등 점령군에 타격을 가할만 한 모든 활동을 이용했다’9고 씌어 있다. 헌법도 의회도 정지당한 프랑스는 연합군의 침공에 힘입어 자력으로 레지스탕스가 무력 개방했다. 4) 한반도에서의 레지스탕스 일본지배하의 조선에서는 제국주의 점령국 병합국에 대해 어떠한 저항을 보였는가. 1910년 일본의 한국병합은 일본이 그간 획득한 다양한 권익을 조약상 문서로 최종 확인함 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의 영토와 시설(교통, 통신)을 군사목적으로 사용하였고, 대한제국의 외교 재정분야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 걸쳐 일본이 추천한 고문을 채용하였으며, 외교 사법 입법 모두를 장악했다. 군대를 해산시킨 것은 1907년이다. 같은 해 7월 27일 일본은 이완용 내각에 보안법을 제정시킨다. 이 탄압법은 앞서 일본에서 제정한 치안경찰법을 도입한 것으 로 경찰관은 안녕질서 유지를 위해 집회, 운동, 군중을 ‘제한, 금지 또는 해산’(제2조) 시킬 수 있다. 경찰관이 현장 판단으로 제한 해산할 수 있는 이 악법은 앞서 서술한대로 ‘대통령 긴급 령’을 토대로 현장 경찰관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함과 동일하며 헌병 경찰제도를 도입해 한국 경찰제도를 해체시킨다. 1925년 4월 22일 일본에서는 천황제와 사유재산을 부인하는 자를 체포하는 탄압입법/치 안유지법이 시행되고 5월 8일 칙령 제 175호 ‘조선, 대만 및 사할린’10에도 시행된다. ‘만주’에 서는 1932년 반만항일운동에 대해 잠행징치반도법(暫行懲治叛徒法)을 제정하고 군인, 경찰관 이 현장재량권으로 검거자를 재판없이 살해할 수 있는 ‘임진격살(臨陣格殺)’11을 도입했다. 이 법이 만주국 치안유지법이다. 치안유지법은 일본본토 보다도 독립운동이 가장 광범위하고 치열하게 전개된 한반도, 만주에서 확대 해석되어 가장 가혹하게 확대 적용된다. 본래 국체 (천황제)의 변혁과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대목에 적용할 요건이었으나 이 요건이 확대되 어 독립운동까지 적용된 것이다. 일본에서는 치안유지법을 적용해 사형판결이 내려진 것은 없다. 나카자와 씨(中澤俊輔)에 9 『유럽 역사 유럽공통교과서 제2판』, 東京書籍, 1994, 346항. 10 中澤俊輔, 『치안유지법』, 中央公論社, 203항. 11 中澤, 『치안유지법』, 중앙공론사, 2012, 210항.
세계사적저항운동의관점에서본윤봉길의거 1514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따르면 ‘정확한 사형집행자 총수는 불명확하나 1930년~31년 사이 제5차 간도공산당 사건으 로 18명 사형’12이라고 한다. 송검률도 한반도가 가장 높다. ‘조선에서 치안유지법 검거자 2만 5천여 명 중 검사국에 송검된 자는 7천여 명이다. 일본국내 송검률의 1.5배 정도’13이다, 1919년 7월 25일, 3·1독립운동의 직후에 조선총독부 학무과장 유게 고타로(弓削幸太郎) 는 「소요와 교육」이라는 글에서 청년교사를 대상으로 강연을 하고 있다.14 이 글에 의하면, 3·1독립운동의 원인은 총독부정치에 대한 불평, 민족자결주의, 그리고 ‘근본원인은 일부 조선인의 독립에 대한 욕구이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독립 욕구는 독립을 억압하는 측이 빈틈을 보이면 즉각 발생’하므로 항시 억압을 계속 하라’고 말하고 있다. 독립 욕구는 ‘자신 은 조선인이라는 자각이 있는 한’ 없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독립 욕구는 ‘인간 자연의 본 성’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인간 자연의 본성’이 독립 욕구라고 지적하면서도 그 ‘자연의 본성’을 소멸시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 그 자체의 말살, 조선민족에 대한 홀로코스트이다. 5) 치안유지법하의 윤봉길과 전권위임법하의 게오르그 엘저 윤봉길이 처해있던 조건은 다음과 같은 헌법과 의회 부재, 법률이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조 선총독이 명령(제령)을 내려 사법, 입법, 행정 모두를 수중에 넣은 억압정치 시대로 전권위임 법이 지배한 나치 시대와 마찬가지다. 치안경찰이 확대해석 적용되는 치안유지법 체제하에 서 지배와 동시에 인간 내면에 까지 칼을 들이대 민족의식을 도려내는 인종차별과 민족말살 정책이다. 이는 유대인, 로마인 전체를 향해 대량학살(홀로코스트)를 자행한 나치 독일과 공통 된다. 2015년 국사 수정주의자들이 발행한 중학생용 역사교과서에는 1919년 일본정부가 국 제연맹에서 인종차별을 철폐한다는 ‘획기적인’제안15을 해서 ‘공감을 불러 모았다’16고 서술했 다. ‘획기적’, ‘공감’이란 프로파간다에 지나지 않는다. 12 中澤, 『치안유지법』, 206항. 13 萩野富士夫, 『특고경찰』, 岩波書店, 2012, 70항. 14 大野謙一, 『조선교육문제 관견』, 朝鮮総督府学務課内朝鮮教育会, 1936, 74~88항. 15 中学校歴史教科書, 『새로운 일본 역사』, 育鵬社, 2015, 215항. 16 中学校歴史教科書, 同 1908년 태어난 윤봉길은 일본의 가혹한 탄압, 마음 속 의 민족의식까지 도려내어 제거하고자 하는 억압통치 가운 데에서 서당에서 배우고, 이어 1918년 공립보통학교에 입 학했다. 3·1독립운동 후 일본인화를 강제하는 학교를 자 진 퇴학했다.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 등에 의해 피폐한 농촌의 재건을 지향하며 계몽활동에 매 진했다. “조선 일반 국민의 무지가 일본의 탄압과 수탈보 다 무섭다.”17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지도자 들 가운데에는 독립이 계몽과 자강활동만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고 하여 무장독립투쟁의 길을 선택하고 중국 동북지역 에서 활동했다. 윤봉길은 상하이로 망명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서 일본육군이 거행한 ‘제1차 상해사변’ 승리 축하식전에서 폭탄의거를 결행했다. 이 행동은 유럽의 공통 역사교과서라 기술하는 것처럼 레지스탕스의 ‘모든 활동’의 하나이다. 그런데 폭탄으로 부상을 입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은 약 1개월 후에 사망했다. 당시의 일본정부는 공식 견해로 “전쟁 중 병사(病死)”18라고 기술했다. 이 점에서 추측해보면, 윤봉길 의 전쟁 중의 전투 상대가 된다. 일본정부는 윤봉길을 테러리스트로 간주하지 않았다. “폭탄을 품은 병사”인 것이다. 불가 리아정부는 1944년 ‘폭탄을 던진 병사(敵彈兵)’ 우표를 발행했다.19(그림1) 윤봉길을 ‘적탄병’으 로 생각해 볼 수 있다. 6) 프랑스에서의 레지스탕스 다음은 ‘모든 활동’의 전형적인 예가 되는 프랑스의 대 독일 저항운동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1940년 6월 14일 나치 독일은 파리에 입성하고 프랑스를 삼분할 한다. 독일은 ① 독일과 프 랑스 국경지역(알자스 로렌)을 병합한다 ② 북 중부를 점령하고 직접 지배한다 ③ 남부는 나치 17 金学俊, 李琇恒編, 河田宏監修, 朴淳仁역, 『윤봉길』, 彩流社, 2010, 50항. 18 아시아역사자료 센터, 레퍼런스코드:B02030474600. 19 原亨編 저, 『우표로 보는 전쟁과 평화 사진자료』, 일본도서센터P&S, 2008, 215항. 그림 1 척탄병(불가리아 정부 발행)
세계사적저항운동의관점에서본윤봉길의거 1716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에 협력하는 페탄 원수를 수장으로 하 는 정권(비시 정권)이 대신 지배하게 했 다 ④ 알제리 등 프랑스 식민지를 비시 정권에 편입시킨다. 남부지역 페단 원 수는 의회를 무기한 정지하고 프랑스 공화국 헌법이 갖는 자유, 평등, 우애 를 버리고 ‘가족(가부장제)’, ‘노동(사제 격차노동, 노동조합 해산)’. ‘조국(국민주권 을 부정하고 조국/국가 절대시)’을 슬로건 으로 내세웠다. 나치 독일은 비시 정권 의 협력을 얻어 물자, 사람, 재산, 자 원을 약탈했다. 독일 본국에서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의무 노동법’을 제정하였고20, 프랑스인 65만 명을 독 일로 연행해 강제노동을 시킨다. 유대인을 잡아 강제수용소로 보내고 8만 3천 명 학살한다. 1942년 11월 11일 독일은 남부지역도 침공하여 프랑스 전역을 점령 합병시킨다(그림2). 의회 도 헌법도 사장시킨다. 점령 직후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활동이 시작된다. 파리 동남부 샨비니 지방에 독일 베를린 국립저항운동기념관에 버금가는 프랑스 자료관 ‘국립저항기념박물관’이 있다. 기타 프랑스 전역에 약 3백여 개의 국공립 레지스탕스 기념박물관이 있다.21 여기에서 레지스탕스에 대한 설명은 무력투쟁을 포함한 ‘점령군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모든 활동’이라 하였고, 이것이 레지 스탕스의 국제기준이다. 레지스탕스 역사를 조감하면 프랑스 독립운동사는 런던의 드골 파의 망명정권과 프랑스 국내 레지스탕스가 마침내 통일을 이루어 ‘전국저항평의회 CNR’을 결성하고 독립을 무장봉 기로 성공시키는 과정이다. 1940년 드골은 6월 18일 망명지에서 프랑스 국민에게 메시지를 20 역사교육자협의회, 『저항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教育史料出版会, 1993, 24항. 21 Jean-Francois Muracciole저, 福本直之역,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역사』, 白水社, 2008, 166항. 그림 2 독일의 점령지역하의 프랑스 보내 ‘무력투쟁’22에 의한 철저항전을 주장하고 ‘무기기술자 여러분 나와 함께 싸워주기 바란 다’23고 호소했다. 레지스탕스는 체포된 동료 구출 및 그 가족을 지원하고 투쟁자금을 마련해 독일군 시설의 파괴할동, 열차폭파, 친 독일파와의 투쟁, 독일군 동정을 살피는 정보수집, 탈주 루트의 확보 와 확장, 직업증명서 신분증명서 위조 등의 ‘모든 활동’이 포함된다. 스트라이크도 유효한 수 단이다. 특히 1941년 남부 점령지에서 일어난 대규모 스트라이크는 석탄저장고를 점령군으 로부터 지켜내는 싸움으로 기록되어 있다. ‘나치 고급장교 암살’24도 감행한다. 야마모토 씨 (山本耕二)에 따르면 런던에 있는 망명정부는 프랑스 국내에 ‘자유 프랑스’를 조직하고 A정보 망 B탈주망 C실행망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25. A독일군의 동향, 무기장비 상태, 군수공장 보급기지의 위치 등을 망명정부에 전달하고 독일의 영국공습을 파탄시킨다 B탈주 후에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독일군과의 싸움에 복귀한 프랑스인이 몇천만 명이다 C프랑스 국철을 이 용하는 독일군 열차의 폭파, 군사시설의 파괴 등이 목표였다. ‘모든 활동’에는 많은 사람들의 합법적인 협력이 불가피했다. 7) 폴란드에서의 레지스탕스 폴란드의 대 독일 레지스탕스는 먼저 두 개의 봉기가 유명하다. 나치 친위대는 자기들이 만 든 게토에 유대인을 감금, 해체, 불태우는 등의 수용자 살해와 강제수용소 이송을 시작한다. 1943년 4월 19일 유대인으로 구성된 ‘유대인 투쟁연맹’이 빈약한 무기로 압도적인 화력과 군 사력을 지닌 독일 점령군에 저항(게토Ghetto 봉기)을 시작하나 한달 정도로 진압된다. 1972년 12월 7일 서독 수상인 빌리 브라이트가 무장봉기를 기리는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양손 을 모아 묵도하는 모습은 지금도 세계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다. 일본의 정치지도 자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독일지도자의 전후 반성이다. 1993년 4월 19일 독일 바이츠 제커 대통령은 바르사바 게토 봉기 50주년 기념식전에 성명을 내고 봉기한 사람들의 용기를 22 Muse'e de la Re'sistance nationale de Champigny-sur-Marne(Champigny-HP) 23 Vercors 저, 森乾역, 『침묵의 저항』, 藤森書店, 1978, 14항. 24 山本耕二, 『엄마와 아이가 같이 보는 조국 프랑스를 구할 레지스탕스에 바친 청춘』, 草の根출판, 2001, 36항. 25 山本耕二 같은 책,25항
세계사적저항운동의관점에서본윤봉길의거 1918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성공하리라는 희망이 없음에도 사람들은 생명의 가치와 자유를 위해 온 힘을 바쳤습니다’. 다른 하나는 1944년 8월 1일에 시작하는 바르샤바 시민과 폴란드 국내군의 ‘바르샤바 봉기’이다. 최근 연구에서는 이 두 봉기가 제각각 일어난 것이 아니라 상호 지원이 이루어 졌다고 한다.26 폴란드에서도 레지스탕스는 ‘모든 활동’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8) 나가는 말 - 윤봉길 의거와 세계사적 의의 다음은 윤봉길의 레지스탕스 활동에 대한 세계사적인 의의에 대해서이다. ① 중국에서의 평가: 목숨을 건 의거로 일본에 대한 중국 조선국의 협동투쟁에 공헌 ② 일본에서는 치안유지법이 조선에서 보다 가혹하게 적용된 사실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 다. 따라서 이 탄압법하에서 싸운 조선, 만주 등에서의 독립운동은 주목받기 어렵다. 일본의 서적에서는 주로 일본지배하의 애국계몽운동, 자강운동이 다루어지고 ‘모든 활동’은 이차적 이다. 예를 들면 중학교 역사교과서에서 독일에 대한 저항은 ‘무력 등에 의한 저항운동(레지 스탕스)’27이라 하여 ‘모든 활동’을 시사하고 있으나 일본에 대한 저항은 단순히 ‘저항운동’28이 라고만 기술되어있다. 저항의 국제기준은 무력투쟁을 포함한다. 윤봉길뿐만 아니라 그 이전 의 조선의 의병투쟁은 프랑스의 반 나치 레지스탕스나 엘저와 마찬가지로 국제수준이다. 계 몽운동은 대단히 중요하나 이를 넘어선 ‘모든 활동’으로 이어진 윤봉길은 세계독립운동사에 서 제국주의열강에 저항했다는 큰 의의를 지닌다. 강화도 사건으로 비롯되는 70년간의 도발, 경제침략, 착취, 수탈, 처참한 탄압, 고문, 학살, 치안유지법과 헌법 없는 총독부 체제하에서 이들에게 대항하여 꺽이지 않고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건 노력은 세계사에 빛난다. 현대에서 헌법과 의회를 무시하고 국민에게 비판과 저항의 여지를 보증하지 않는 공권력 26 Michael Berger : Unter Waffen(Neue Forschungen über das Ausmass des Warschauer Ghettoaufstands, Jüdische Allgemeine, 2008. 11. 20. 27 『새로운 사회 역사』(중학교 사회과용), 東京書籍, 2015, 207항. 28 『새로운 사회 역사』, 같은 책, 211항. 은 ‘모든 활동’에 직면할 것이며 민중에 의해 ‘저항이 의무’가 될 것을 의미한다. ‘모든 활동’을 부정적으로, 어쩔 수 없었던 방법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다. 정의 공정의 실현이라는 적극적 인 시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 점령하에서의 팔레스타인은 보다 좋은 예이다. 윤 봉길의 독립정신과 ‘모든 활동’은 국경을 넘어 세계사적인 의의를 지닌다.
20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世界史的な抵抗運動の観点からみた尹奉吉義挙 21 世界史的な抵抗運動の観点からみた尹奉吉義挙 田村光彰 | 元北陸大学教授 1. 初めに 尹奉吉の抵抗を、第1にレジスタンスととらえる。第2にそのレジスタンスとは占領者、併合 者に打撃を与える「あらゆる活動」を含む。第3に「あらゆる活動」を含む点でこそ抵抗は世界 史的意義をもつことを他の占領国との比較で論じたい。 2. 侵略と併合の論理:日本の「利益線」、ドイツの「生存圏」 日本の明治時代は、国内的には二つの内戦(戊辰戦争と西南戦争)を経て成立したが、対外 的には占領や併合の歴史で貫かれている。明治政府は、1869年、アイヌモシリ(アイヌの静 かな大地)を北海道と改め、この大地を日本国に併合した。1874年、琉球王国を日本の領 土に併合する意図をもち、台湾に出兵する。翌年、江華島付近で外国船の立ち入り禁止海 域に進入し、無断で測量し、「島の砲台を挑発し、砲撃を受けるや(略)朝鮮の砦も撃破し、 守備隊の多くを殺した」1。さらに1879年、琉球王国を武力で併合。日本のアジアとの関係 は、日本側の武力行使から始まった。 1 ブルース·カミングス著、横田安司、小林知子訳『現代朝鮮の歴史』明石書店、2003年、157頁 こうした武力行使を正当化する論理として、19世紀後半からの帝国主義は、自国の国境 線の向こう側に、勝手に「利益線」や「生存圏」を設定した。そしてこれらを他国の領土を併 合する根拠とした。この併合のプロセスを、日本とドイツで叙述したい。 日本では、1889年12月24日、山縣有朋総理大臣が施政方針演説で、日本の主権線(国 境線)の向こう側の「利益線」を守ることを説いた。朝鮮を視野に入れた「利益線」が、日本の 独立のために必要だという。次に日本は朝鮮半島の支配権を求めて争った二つの戦争であ る日清·日露戦争を経て、台湾、大韓帝国、南樺太などを植民地とした。1931年1月、後 の外相、松岡洋右は、日本とこれらの植民地を「自衛」するためには、今度は中国東北部(満 州)が「生命線」である、と主張した。「利益線」や「生命線」は、さらにアジア·太平洋全域に 拡大され、「大東亜共栄圏」にまで膨らんだ。 一方、ドイツではヒトラーが1933年1月30日に政権を掌握した。2月3日、国防軍司令官 を前に秘密演説を行った。欧州の東部地区に新しい「生存圏」を設定する方針を示した。 1937年11月5日、ヒトラー総統は具体的な戦争計画を初めて指導者たちに発表する。これ によれば、ロシアから領土を奪い、住民を排除し、追放し、この新領土をゲルマン民族の ための併合地にする「東方生存圏」を計画し、原料·食糧を奪い取るという。1938年、ドイツ はオーストリアに進駐し、これを併合。ドイツとオーストリアの「自衛」のためには、チェコ領 内のドイツ人居住地域であるズデーテン地方が、次にポーランドが必要不可欠であるとし、 これらをドイツの「生存圏」に取り込んだ。 20世紀、日独は併合地の住民の了解も断りも一切なく、「生命線」「生存圏」を恣意的に拡 大し、他国の領土を武力で併合していった。先発帝国主義国の西洋列強も、後発帝国主 義国の日独も、「協定」「協商」を互いに結びあい、利害、権益を互いに認め合う。 3. ドイツ、朝鮮半島、フランス、ポーランドのレジスタンス 以下に帝国主義時代の占領国に対する抵抗を、主としてナチス支配下のドイツに、次に日本 支配下の朝鮮に、最後にナチス支配下のフランスとポーランドに焦点を当てて論じたい。資 源の掠奪問題は、既に研究が蓄積されているので、ここでは主として占領支配者が併合地に 憲法と議会を施行せず、批判と抵抗の合法的手段を民衆に保証しなかった点に着目したい。
22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世界史的な抵抗運動の観点からみた尹奉吉義挙 23 1) ドイツのレジスタンス: 憲法と議会なき独裁国家に抵抗して ドイツは、1939年9月1日、ポーランド侵攻を開始し、欧州側での第2次世界大戦 が始まる。約2ヶ月後の、1939年11月8日、一人の家具職人ゲオルク·エルザーが、ヒト ラーを殺害する目的でビール酒場の大理石の柱に時限爆弾を仕掛けた。ヒトラーは、炸裂 の13分前に会場を去った。彼のかつての老同士7人とウェイトレス1人が死亡し、60人が怪 我。ヒトラー暗殺計画42件のうち、最も成功に近かった一件である2。 では、この暗殺未遂者の動機は何か。エルザーを尋問した記録によれば、第1に、ドイツ が引き起こしている戦争の拡大を止め、「今以上のもっと悲惨な流血の惨事」を阻止し、第2 に、「如何なる外国をも併合しない」ドイツの誕生を望んだことであった。彼によれば、日本 の韓国「併合」と「流血の惨事」は許されない暴挙となるであろう。 ではエルザーが相手としたドイツとは、どんな国家であったのかを略述したい。 ヒトラーは、1933年1月30日に権力を掌握して以来、ヴァイマル憲法を骨抜きにする政策 を矢継ぎ早に施行した。大統領が、基本的人権の一時停止を可能にする「大統領緊急令」 を次々に布告した。2月17日、警官には各自の判断で、自由に武器が使える権限が付与さ れた。2月28日の「大統領緊急令」は、住居の不可侵性、郵便通信の秘密、思想信条、結 社の自由など主として自由権を廃絶した。同時に「保護検束」を導入し、秘密国家警察が、 具体的な犯罪行為がなくても、一切の刑事手続きを踏まずに、現場の警察官が「国家の敵」 を強制的に拘束できた。以降10月までの8ヶ月間で、10万人が「保護検束」され、600人が 殺害されている。左派·リベラルの党機関紙以外の新聞にも「発行停止命令が雨あられと乱 発され」た3。 「大統領緊急令」に基づいて、ダハウに初めて強制収容所が造られる。ヒトラーの政策を 批判し、抵抗する左派·リベラルは、「保護観察」処分の対象とされ、またも「保護検束」され た。弾圧対象になった彼ら、彼女たちはここでも刑事手続きを省略され、身柄の拘束期間· 場所などは一切示されなかった。すなわち<予防的に駆除>された。害虫扱いである。以 2 Will Berthold : Die 42 Attentate auf Adolf Hitler, Wilhelm Goldmann, 1981 (翻訳書:田村光彰、志村恵、 中祢勝美、中祢美智子、佐藤文彦、江藤深訳『ヒトラ ー暗殺計画·42』社会評論社、2015) 3 1933.2.21 『新チュ リーッヒ新聞』 降、強制収容所はドイツと占領·併合地に3千~6千箇所も造られていき、共産党、社会民 主党、自由主義者、キリスト者、ユダヤ系·ロマ系市民、エホバの証人らが送り込まれた。 判明しているだけで、6百万人が殺害された。極めつきは、野党の議席を奪った上で成立さ せた「全権委任法」である。この法律は、立法権を行政権に委任した。すなわち議会の同意 なく、すべての法の成立を政府に委ねた。これは議会による議会自身の<自殺>である。 第2条は、政府が決めた法律は「ドイツ国憲法(ヴァイマル憲法:田村)に背反することが許され る」、と定め、行政府は憲法に反した法律を制定することができた。憲法自身の<死>であ る。エルザーが闘ったドイツとは、民意を生かすシステムを全くもたない、基本的人権が圧 殺された<憲法と議会なき独裁国家>であった。 抵抗運動は、一般に西欧では「レジスタンス」、東南欧では「パルチザン」と称される。これ らは軍事·武力を含む全抵抗を意味する。保守党出のヴァイツゼッカー大統領は、ドイツ占 領下の「全レジスタンス、労働組合、共産主義のレジスタンス」に敬意を表した4。 2) エルザーの「暴力的抵抗」の評価 ドイツでのエルザーに対する敬意を見てみよう。第1に共通するのは、高等学校歴史教科書で 「勇気ある抵抗者」5という評価である。第2にベルリン国立抵抗運動記念館·常設展では、「暴 力的抵抗で、確実に迫って来る第二次世界大戦の勃発を避けよう」としたと記されている。 第3に、かつてヒトラー体制に命をかけて抵抗し、強制収容所に入れられたり、亡命をした人 々の流れをくむ左派諸政党は言うまでもなく、保守派も、エルザーを「市民的勇気」「自由の 基本価値と人権の守り手として、私たちの模範」6であると賞賛する。2003年にドイツ政府は エルザーの顔入りの記念切手を発行した。最右派のキリスト教社会同盟(CSU)も切手の発行 に賛意を表わした。また、2015年までに数十の市町村が、エルザーの名前をつけた52箇所の 道路、公園、広場、学校等を建設し、彼を顕彰している。ドイツの戦後反省の1つである。 4 ヴァイツゼッカー演説、永井清彦訳『荒れ野の40年』岩波書店、1986、11頁. 5 W.イェーガー他『ドイツの歴史 現代史』明石書店、2003、370頁. 6 2008年9月24日 ベルリンでエルザー胸像の除幕式典で、保守政党·キリスト教民 主同盟院内総務 (当時)ヴォルフガンク·ショイブレ(現国会下院議長)の演説.
24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世界史的な抵抗運動の観点からみた尹奉吉義挙 25 3) レジスタンスとは「あらゆる活動」である ドイツ国立抵抗運動記念館が紹介する「暴力的抵抗」はなぜ正当化されるのか。爆弾でヒト ラーの暗殺を図った男が、なぜ「市民的勇気」のレジスタンスの一員なのであろうか。 一般に権力をもつ者は、持たない者との圧倒的な力の差も一因となり、自らの政策の批 判者に、批判をする自由を保証しなければならない。啓蒙思想家で、2度もバスティー ユ監 獄へ投獄されたヴォルテールが言ったとされる次の言葉は有名である。「私はあなたの意見 には反対だ。だがあなたがそれを主張する権利は命をかけて守る。」権力に異論を唱える権 利は、憲法が保障し、国会はその権利を行使する場の代表の一つでもある。 だがヒトラー時代には「保護観察」「保護検束」処分で、具体的行為がなくても、批判者は 強制収容所に送られ、殺戮された。「憲法と議会なき独裁国家」は敗戦まで続いた。 国民はこのナチス体制に、憲法や議会という民主主義的制度で抵抗し、ナチス体制を変 える手段を剥奪されていた。 戦後、西独はナチス時代を反省し、憲法で抵抗権とその条件を定めた。条件は「他の救 済手段が可能ではない場合」である7。ドイツの一州であるブレーメン州の憲法は、次のよ うに抵抗は義務でもあると謳う。「人権が、公権力により、憲法に違反して侵害される場合 は、各人の抵抗は権利であり義務である」(19条)。抵抗が義務でもあるという視点は画期的 である。ユッタ·リンバッハ元ドイツ憲法裁判所長官は「抵抗とは、本質的には、通常の合法 秩序の打破である」と述べた8。エルザーは、自らに「戦争の拡大による更なる流血の惨事」 を防ぐ義務を課し、ナチス時代の「合法秩序」の打破をめざした。ナチス政体は「他の救済 手段」すなわち、一切の言論·表現手段を奪うことでエルザーを「合法秩序」の打破に追い詰 めた。 民衆が「暴力的抵抗」に訴えるかどうかは、公権力が「他の救済手段」を保証するか否 か、という条件に関わる。「暴力的抵抗」それ自体を状況から切り離して論ずることはできな い。後にフランスの対独レジスタンスで触れるが、欧州12カ国が共同で作成した、初の共 通歴史教科書『ヨーロッパの歴史』は、「レジスタンスは、ストライキ、妨害活動、テロ、ス 7 1968年6月24日の第17回改正法律で付加. 8 2003年1月13日「ゲオルク·エルザー週間」開会式.. パイ工作など、占領軍に打撃を与えそうなあらゆる活動を利用した」9と書いている。憲法も 議会も停止されたフランスは、連合軍の侵攻を追い風に、自力でレジスタンスが武力開放 した。 4) 朝鮮半島でのレジスタンス 帝国主義時代の占領·併合国に対する抵抗を、日本支配下の朝鮮で考えたい。 1910年の日本の韓国併合は、それまでに日本が獲得してきた様々な権益を最終的に条 約上の文言で確認したに過ぎない。朝鮮の領土と施設(交通·通信)を軍事目的に使用し、次 に、大韓帝国の外交、財政分野を初めとするあらゆる分野に日本推薦の顧問を採用させ、 更には、外交、司法、立法すべてを日本が掌握。そして軍隊を解散させたのは1907年であ る。この年の7月27日、日本は李完用内閣に保安法を制定させた。この弾圧法は、既に日 本で制定されていた治安警察法の導入である。安寧秩序の保持のため、警察官は集会、 運動、群衆を「制限、禁止しまたは解散」(第2条)することができる。警察官が現場の判断 で、制限·解散ができるというこの悪法は、先述したドイツの「大統領緊急令」に基づく現場 の警察官の絶大な権限と同じである。さらに憲兵警察制度を導入し、韓国警察制度を解体 した。 1925年4月22日、日本では天皇制と私有財産の否定を取り締まる弾圧立法·治安維持法 が施行された。5月8日、勅令第175号で「朝鮮、台湾及び樺太」10にも施行された。「満州」 では1932年、反満抗日運動に対して「暫行懲治版徒法」を制定し、裁判なしで、軍人、警 察官が現場の裁量で検挙者を殺害できる「臨陣格殺」11を導入した。この法律は「満州国」版 治安維持法であった。治安維持法は、日本本土よりも独立運動が最も広範囲に、鋭く展開 された朝鮮半島、「満州」で、拡大解釈され、最も過酷に拡大適用された。本来、国体(天 皇制)の変革と私有財産制度の否認を適用の要件としたが、この要件は拡大され、独立運動 にまで適用された。 9 『ヨーロッパの歴史 欧州共通教科書 第2版』東京書籍、1994、346頁. 10 中澤俊輔『治安維持法』中央公論社、203頁. 11 中澤『治安維持法』、中央公論社、2012、210頁.
26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世界史的な抵抗運動の観点からみた尹奉吉義挙 27 まず、日本では治安維持法の適用で死刑判決は皆無である。だが中澤俊輔氏によれば、 「正確な死刑執行者の総数は不明だが、1930~31年の第5次間島共産党事件では18名が死 刑」12となっている。送検率も朝鮮半島の方が高い。「朝鮮における治安維持法検挙者2万5 千人余のうち、検事局に送検された者は7千人余にのぼる。これは日本国内の場合の送検 率の1.5倍弱」13である。 1919年7月25日、3.1独立運動の直後に朝鮮総督府学務課長·弓削幸太郎は、「騒擾と教 育」と題して青年教師に向けて講演をしている14。これによれば、3.1独立運動の原因は、総 督府政治に対する不平、民族自決主義、そして「根本原因は一部朝鮮人の独立欲である」 と述べている。この「独立欲は、独立を押さえる側が隙を見せると直ちに発生する」ので、常 に押さえ続ける方針をとれという。 独立欲は「自分は朝鮮人であるという考えがある間」は無 くならない。なぜならば、独立欲は「人間自然の性」だからであると説く。「人間自然の性」が 独立欲だといいながら、その「自然の性」を消滅させ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人間そのもの の抹殺、朝鮮民族のホロコーストである。 5) 治安維持法下の尹奉吉と全権委任法下のエルザー 尹奉吉が闘った時の条件とは、以上のように、憲法と議会の不在と、本来これらにより作ら れる法律が存在せず、代わりに朝鮮総督が命令(制令)を出し、司法·立法·行政のすべてを 手中にした圧政であった。全権委任法が支配したナチス時代と同様である。治安警察や、 拡大解釈·適用された治安維持法体制ががんじがらめに支配し、同時に、人間の内面にま で刃を向け、民族意識を切り取ろうとする、人種差別と民族の抹殺政策であった。この点 でユダヤ人、ロマ族を民族全体として大量虐殺(ホロコースト)をしたナチスドイツと共通点が ある。だが2015年、歴史修正主義者たちが発行した中学生用の歴史教科書は、1919年、 12 中澤『治安維持法』、206頁. 13 萩野富士夫『特高警察』岩波書店、2012、70頁. 14 大野謙一『朝鮮教育問題管見』朝鮮総督府学務課内朝鮮教育会、1936、74~88頁. 日本政府が国際連盟で、人種差別撤廃の「画期的な提 案」15を行い、「共感を呼びました」16と書く。「画期的」「共 感」とはプロパガンダに過ぎない。 1908年生まれの尹奉吉は、日本の過酷な弾圧、心の 中の民族意識までえぐり出し、捨て去ろうとする圧政の中 で、書堂で学び、次に1918年、公立普通学校に入学し た。3.1独立運動後、日本人化を強いる学校を自主退学 した。朝鮮総督府の土地調査事業や産米増殖計画などに より疲弊した農村の再建をめざして、啓蒙活動に取り組ん だ。「朝鮮の一般国民の無知が日本の弾圧や収奪より恐 ろしい」17と知ったからだ。しかし、当時の指導者たちの中 には、独立が啓蒙·自彊活動だけでは達成できないとして、武装独立闘争の道を選び、中 国東北部で活動した。尹奉吉は、上海に亡命し、韓人愛国団一員として、日本陸軍が挙 行した「第1次上海事変」勝利祝賀式典で、爆弾を投げた。この行動は、欧州の共通歴史教 科書が書くように、レジスタンスの「あらゆる活動」の1つである。 ところで爆弾で負傷した白川義則大将は約1ヶ月後に死亡した。当時の日本政府は 公式見解で「戦病死」18と記した。ここから類推すると、尹奉吉は戦争中の戦闘相手と なる。 日本政府はテロリストとしては見なさなかった。「爆弾を抱えた兵士」なのである。ブルガ リア政府は、1944年、爆弾を投げる兵士=「敵弾兵」の切手を発行した19【図1】。 尹奉吉は「敵弾兵」と考えることが可能である。 15 中学校歴史教科書『新しい日本の歴史』(育鵬社)、2015、215頁. 16 中学校歴史教科書、同. 17 金学俊著、李琇恒編、河田宏監修、朴淳仁訳『尹奉吉』彩流社、2010、50頁. 18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レファレンスコ ドー:B02030474600. 19 原亨編著『切手が語る戦争と平和ー写真資料』日本図書センターP&S、2008、215頁. 【図1】
28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世界史的な抵抗運動の観点からみた尹奉吉義挙 29 6) フランスにおけるレジスタンス 次に、「あらゆる活動」の典型的な例であるフランスの対独抵抗運動にふれたい。1940年6月 14日、ナチスドイツはパリに入城し、フランスは3分割された。ドイツは ① 独仏の国境地域 (アルザス·ロレーヌ)を併合し ② 北·中部を占領し、直接支配をする ③ 南部の支配を、ナチ スに協力するペタン元帥を首班とする政権(ヴィシー政権)に肩代わりさせた。④ アルジェリア 等のフランス植民地をヴィシー政権に組み込んだ。南部地域のペタン元帥は、議会を無期 限に停止し、フランス共和国憲法の持つ自由·平等·友愛を捨て、「家族」(家父長制)、「労 働」(親方·徒弟の格差労働、労働組合の解散)、「祖国」(国民主権の否定と、祖国·国家の絶対視) をスローガンに掲げた。ナチスドイツはヴィシー政権の協力で、物資、人、財産、資源の 掠奪を行った。ドイツ本国での労働力不足を補うために、「義務労働法」を制定し20、65万 人のフランス人をドイツへ連行し、強制労働をさせた。ユダヤ人をとらえて強制収容所へ送 り、8万3千人が殺戮された。1942年11月11日、ドイツはこの南部地域にも侵攻し、フラン ス全土を占領·併合する【図2】。議 会も憲法も葬り去られた。 こうした圧政に対して、フランス国 民のレジスタンスは占領直後から始ま る。ドイツのベルリン国立抵抗運動記 念館に匹敵するフランスの資料館は、 パリ東南のシャンピニにある「国立抵 抗記念博物館」である。その他にフラ ンス全土には、約300の国公立のレジ スタンス記念博物館がある21。これら の博物館はレジスタンスとは武力闘争 を含む「占領軍に打撃を与えそうなあ らゆる活動」であることを示している。 20 歴史教育者協議会『抵抗をどう教えるか』教育史料出版会、1993、24頁. 21 J=F ·ミュラシオル著、福本直之訳『フランス·レジスタンス史』白水社,、2008、166頁. 【図2】 これがレジスタンスの国際水準である。 レジスタン史を鳥瞰すれば、フランスの独立運動史は、ロンドンのド·ゴール派の亡命政 権とフランス国内のレジスタンスがやがて統一し、「全国抵抗評議会CNR」を結成し、独立 を武装蜂起で成功させる過程である。ド·ゴールは1940年6月18日、亡命地からフランス国 民にメッセージを寄せる。「武力闘争」22による徹底抗戦を主張し、「兵器の技術者の諸君、 私とともにたたかうために集まってほしい」23と呼びかける。 レジスタンスには、逮捕された仲間の救出やその家族の支援、闘争資金の捻出、ドイツ 軍施設の破壊活動、列車の爆破、親独派への闘い、ドイツ軍の動静の情報収集、逃走ル トーの確保と拡張、職業証明書、身分証明書の偽造など、「あらゆる活動」が含まれる。ス トライキも有効な手段であった。とりわけ南部の占領地で行われた1941年の大規模なスト ライキは、石炭貯蔵庫を占領軍から守る闘いとして記録されている。さらに「ナチス高級将 校の暗殺」24も実行。山本耕二氏によれば、ロンドン亡命政府が、フランス国内に組織した 「自由フランス」は ① 情報網 ② 脱走網 ③ 実行網を備えていたという25。① では、ドイツ軍 の動向、兵器の装備状態、軍需工場·補給基地の位置などを亡命政府に伝え、ドイツの英 国空爆を破綻させた。② では脱走後に再び戦列に復帰し、ドイツ軍との戦いに参加したフ ランス人が何千もいたという。③ の実行網では、フランス国鉄を使い移動するドイツ軍列車 の爆破、軍事施設の破壊などが目指された。「あらゆる活動」には 多くの人々の合法的な協力も不可欠であった。 7) ポーランドにおけるレジスタンス ポーランドの対独レジスタンスでは、とりわけ2つの蜂起が有名である。ナチス親衛隊は、 自らが造ったゲットーにユダヤ人を閉じ込め、今度はこれを解体し、焼き払い、収容者の 殺害と強制収容所への移送を始めた。1943年4月19日、ユダヤ人からなる「ユダヤ人闘争 22 Muse'e de la Re'sistance nationale de Champigny-sur-Marne(Champigny-HP) 23 ヴェルコール著、森乾訳『沈黙のたたかい』藤森書店、1978、14頁 24 山本耕二『母と子でみる 祖国フランスを救え レジスタンスにかけた青春』草の根 出版会、2001、36頁. 25 山本耕二 同書、25頁.
30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世界史的な抵抗運動の観点からみた尹奉吉義挙 31 同盟」が貧弱な武器で圧倒的な火力と軍事力のドイツ占領軍への抵抗(「ゲットー蜂起」)を開 始し、約1ヶ月後に鎮圧された。1972年12月7日、西独首相ヴィリー·ブラントが、武装蜂 起を讃える記念碑の前で両膝をつき、両手を組んで黙祷した姿は、今日もなお世界中の人 々の心に焼き付いている。日本の政治指導者には全くない、ドイツ指導者の戦後反省であ る。1993年4月19日、ドイツのヴァイツゼッカー大統領はワルシャワ·ゲットー蜂起50周年記 念式典に声明を寄せ、蜂起した人々の勇気を次のように賞賛した。「成功の見込がないにも かかわらず、人びとは生命の価値と自由に尽くしました。」もう一つは、1944年8月1日から 始まるワルシャワ市民とポーランド国内軍の「ワルシャワ蜂起」である。最近の研究では、両 蜂起はバラバラに行われたのではなく、相互に支援がなされたことが知られてきた26。この章 では、レジスタンスとは、ポーランドでも「あらゆる活動」を含むことを確認し、次のテーマに 移りたい。 8) 尹奉吉義挙の世界史的な意義 ここで尹奉吉のレジスタンスの問題に戻ろう。以下に世界史的な意義にふれたい。 ① 中国からの評価。命をかけた義挙は日本に対する中国·朝鮮軍の協同闘争に貢献 した。 ② 日本では治安維持法が、朝鮮でより過酷に適用された事実がほとんど知られていな い。したがってこの弾圧法下で闘った朝鮮、満州などの独立運動が着目されない。日本の 書籍では主として日本支配下の愛国啓蒙運動、自彊運動が取り上げられ、「あらゆる活動」 は二次的である。一例を挙げれば、中学校歴史教科書では、対独抵抗には「武力などによ る抵抗運動(レジスタンス)」27と書き、「あらゆる活動」を示しているが、対日抵抗には単に「抵 抗運動」28と記すだけである。だが抵抗の国際水準は武力闘争を含む。尹奉吉のみならず、 その前の朝鮮の義兵闘争は、フランスの反ナチレジスタンスやエルザ とー同様に国際水準に 26 Michael Berger : Unter Waffen(Neue Forschungen über das Ausmass des Warschauer Ghettoaufstands、 Jüdische Allgemeine、2008.11.20. 27 『新しい社会 歴史』(中学校社会科用)東京書籍、2015、207頁. 28 『新しい社会 歴史』 同、211頁. ある。啓蒙運動は大変重要だが、これを超え、「あらゆる活動」に進んだ尹奉吉は、帝国主 義列強に抗した世界の独立運動史に大きな意義を持っている。江華島事件から始まる70年 間の挑発、経済侵略、搾取、収奪、凄惨な弾圧、拷問、虐殺、治安維持法と憲法なき総 督府の命令下で、これらに立ち向かい、ひるまず、祖国の独立のために命をかけた人々の 努力は、世界史に輝く。 現代においてこのことは、憲法と議会を無視し、国民に批判と抵抗の余地を保証しない 公権力は、「あらゆる活動」に直面させられ、民衆の「抵抗が義務」となることを意味する。 その際、「あらゆる活動」を否定的に、やむを得ない方法として理解するのではなく、正義· 公正の実現として積極的にとらえるべきであろう。イスラエル占領下のパレスティナはよい 例である。尹奉吉の独立精神と「あらゆる活動」は、国境を超え、世界史的な意義を持って いる。
尹奉吉の思想と韓観観立運動史的な位置 33 제2 주제 第二主題 윤봉길의 사상과 한국독립운동사적 위상 尹奉吉の思想と韓国独立運動史的な位置 김도형(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위원) 金度亨(韓国独立運動史研究所首席研究委員)
윤봉길의사상과한국독립운동사적위상 3534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1. 들어가는 말 윤봉길은 25세의 짧은 삶을 살았지만,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의거는 우리 독립운동의 역 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음에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윤봉길의거로 침체에 빠진 한국독립운 동에 새로운 활로를 열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 의거로 한국민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 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의거는 일제 침략에 겁을 먹고 감히 저항조차 꿈꾸지 못하고 있던 4억 중국민들에게 반일의식과 항일투쟁의 의지를 불어 넣으며, 중국 항일투쟁의 시발 점을 제공하였다. 또한 한국독립운동계는 홍구공원의거 이후 활기를 되찾았으며, 임시정부 는 중국정부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항일투쟁을 전개할 수가 있었다. 중국민은 일본의 침략에 순응하지 않고 반일투쟁에 나서게 되었으며, 중국정부 또한 일본과의 전쟁을 본격적으로 준 비하게 되었다. 이처럼 윤봉길의 홍구공원의거는 한국독립운동의 역사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역사에도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그런데 윤봉길의 홍구공원의거에 대한 역사적 전개에 대해서는 기 존의 많은 연구를 통해 세세한 부분까지 밝혀졌지만, 그가 의거를 일으키게 한 그의 사상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연구가 없는 것 같다. 물론 윤봉길이 25세의 짧은 삶을 살다보니, 그의 생 각과 사상을 자신이 직접 밝힌 글이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봉길은 의거 이전부터 의거 이후까지 자신의 견해를 시(詩)와 약간의 글을 통해 남기기도 하였으며, 의거 이후에는 일제로부터 조사를 받을 때에도 자신의 사상에 대해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윤봉길의 사상과 한국독립운동사적 위상 김도형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위원 따라서 윤봉길이 홍구공원의거를 일으키기까지 그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독립운동 사상과 의거의 독립운동사적 위상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 발표에서는 윤봉길이 성장과정에서부터 홍구공원의거를 단행하기까지 그의 사상 형성 에 영향을 준 인물들에 대해 살펴보고, 또 구체적으로는 그가 받은 사상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밝혀보고자 한다. 그는 어릴 때 가정에서 어머니로부터 자애로운 박애주의를 교육받았 으며, 17세까지 주로 서당에서 전통적인 유교사상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청소년기라고 할 수 있는 17~18세부터는 일본어를 독학으로 습득하는 한편, 근대적인 계몽사상에 매우 심 취되어 있었다. 그리고 22세 때 광주학생의거를 보고는 본격적으로 식민지배의 모순을 자각 하게 되면서,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통해 독립을 쟁취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193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군이 되어 독립운동의 전선에서 열렬하게 투쟁을 하 고자 하였다. 1931년 5월 중국 상해(上海)에 온 윤봉길은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기관 들이 매우 침체되어 있음에 실망하고 있을 무렵, 김구를 만나 그의 사상과 독립운동 노선 및 방략에 깊은 감화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김구가 단장으로 있는 韓人愛國團에 들어가 그가 꿈꾸던 열렬한 독립투쟁을 전개하고 싶었다. 윤봉길이 중국으로 망명하였을 때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생각은, 민족 독립을 하루라도 앞 당길 수 있는 직접적인 독립투쟁에 투신하는 것이었다. 그때 마침 일제는 상해사변이 발발 한 직후이고, 일왕의 생일과 승전을 기념하는 행사를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 행사에 참여한 일제 침략의 수뇌들을 모조리 처단하여 한국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 만방에 알리고, 일제 침략에 대해 응징을 하고자 하였다. 윤봉길은 김구가 준비해 준 폭탄을 가지고 홍구공원에서 일제 침략자들이 승전에 취해 있을 때, 투탄의거로 그들의 축제의 장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한 몸을 희생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독립을 하루라 고 앞당길 수 있다는 희망에서 기껏이 홍구공원의거를 단행하였던 것이다. 윤봉길이 역사적인 홍구공원의거를 단행하게 되는 데에는, 그가 가졌던 생각과 사상이 있 었으며, 또한 그 자신의 독립운동에 대한 분명한 견해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윤봉길의 성장과정에서부터 의거에 이르기까지의 사상적 변화와 그의 독립운동 상에 차지하는 역사적 위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윤봉길의사상과한국독립운동사적위상 3736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2. 청소년기 수학과정 누구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어린 시절에는 부모와 가정환경에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윤봉길도 어릴 때부터 부모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음에 틀림이 없다. 『千秋義烈 尹 奉吉』이라는 전기에 의하면, 윤봉길의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기대를 대단하였다고 한다. 그 래서 유식한 편이 아닌 家長을 거느린 어머니는 아들만은 남부럽지 않게 교육시켜 의젓한 사 람으로 만들고자 놀라운 집념을 보였다고 한다.1 그의 어머니는 윤봉길의 학문에 큰 기대를 걸고 열성으로 교육시켰다. 예를 들면, 윤봉길의 어머니는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어 훈육하였 는데, 조선시대 충신인 成三問에 대한 얘기를 통해 어린 윤봉길에게 큰 배움이 되었고 깨달 음이 되게 하였다.2 세조의 왕위찬탈을 끝까지 반대하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죽음에 이 른 ‘성삼문’이라는 인물은, 어린 윤봉길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다. 한 인간이 성장하는 데는 어릴 때 가정에서 받은 교육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는 선천적으 로 타고난 氣質이 보다 중요하다. 윤봉길의 경우에도 어릴 때의 교육보다는 타고난 성품이 남달랐다. 왜냐하면, 그가 홍구공원의거 이틀 전인 1932년 4월 27일 밤에 김구에게 준 「이 력서」에 그의 성향의 일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이력서」에 의하면, 어릴 때 별명이 ‘살가지(狸)’, 즉 ‘삵, 살쾡이’였다고 한다.3 비록 몸집은 작지만 매우 민첩하며, ‘삵’ 과 같이 용감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그 「이력 서」에는, 동년배와 다툼에서 패한 적이 없고, 또 接長에게 맞아도 눈물 한번 흘린 적이 없 으며, 서당 훈장이 종아리를 치더라도 두 눈을 크게 뜨고 쳐다 보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어릴 때부터 간담이 있고 배포가 큰 아이였음에 틀림이 없다. 아무튼 윤봉길은 어릴 때부터 다른 아이들과는 확실히 다른 아이였다. 그는 일곱 살 때부 터 백부가 훈장으로 있던 서당에서 천자문을 수학하였으며, 11살 되던 1918년 봄 덕산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식민지 교육의 부당한 처사를 그냥 그대로 받을 수 있는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교육’을 더 이상 받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고 보아야만 한다. 윤봉길은 식민지 교 1 任重彬, 『千秋義烈 尹奉吉』, 人物硏究所, 1975, 62쪽. 2 任重彬, 『千秋義烈 尹奉吉』, 88쪽. 3 「윤봉길의 이력서」(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매헌윤봉길전집』 제2권, 2012, 30쪽). 육을 그만 받기로 결단을 내렸다. 일제의 교육이 서당만 못하다고 생각 하게 되었던 것이다. 덕산공립보통학교를 그만 둔 후 시량리 솔밭 뒤 새뜰에 있는 崔秉大 선생의 글방에 다녔다. 그후 윤봉길은 인근의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수학하다가, 14살 때인 1921년부터는 옆 마을 인 둔지미 梅谷 成周錄 선생이 차린 烏峙書塾이라는 서당에 들어갔다. 윤봉길은 어릴 때부 터 청소년기까지인 적어도 17세까지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그후에도 그가 직접 서당 을 차려 아동들을 가르쳤다. 다시 말해, 그는 소시 때부터 서당에서 유교적 사상이 깊이 젖어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17 세까지 윤봉길이 받은 교육은 유교에서 발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그가 받아 들인 유교사상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윤봉길의 유교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던 분은 성주 록 선생이었다. 성주록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윤봉길도 자연스럽게 유교적 ‘정의’를 숭상하여 옳은 길을 가야만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이 깊이 자리를 잡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주지하다시 피 윤봉길의 아호는 ‘梅軒’이다. 아호 ‘매헌’은 성주록 선생이 지어 주었다. 성주록 선생의 호 ‘梅谷’에서 ‘梅’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죽음에 이른 ‘성삼문’의 호 ‘梅竹軒’에서 ‘軒’을 따 서 아호를 지어 주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윤봉길은 17세 때 성주록 선생부터 유교경전 공부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오치서숙을 나오게 되었다. 오치서숙을 나온 후 그가 지금까지 배운 것 은 서당에서 배운 한학뿐이었다. 오치서숙을 나오기 후인부터 그의 사랑방에 서당을 차리고 7~8세 아동들을 가르치는 훈장 노릇을 하였다. 그러면, 윤봉길이 덕산공립보통학교도 그만두고 서당에서 유교 교육을 받았지만, 유교가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수 있는 지도이념이 될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의 「이력서」에 의하면, “16세 되든 해 여러 선생의 충고를 不顧하고 日語速 成讀本을 사다가 일어를 자습하기로 果斷하였다. 1년간 無少間斷을 孜孜乞乞하였음으로 通 話는 能하였다”고 한다.4 이같은 기록으로 추측컨대, 성주록 선생은 그에게 일본어를 배우지 말라고 하였지만, 그는 독학으로 일본어를 완벽하게 말할 수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윤봉길이 일본어를 배운 것은 근대적인 학문을 받아들이기 위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한학 을 공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학문을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서 는 식민지 교육을 하는 학교에 다녀야만 했지만, 일제의 제도 학교에 다니기는 싫었다. 그래 4 「윤봉길의 이력서」, 31쪽.
윤봉길의사상과한국독립운동사적위상 3938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서 그는 독학으로 신학문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윤봉길은 홍구공원의거 이후 체포되어 일제 의 신문을 받을 때, “17~18세 때 신문과 책 등을 보고 조선에 일본인이 와서 조선을 통치하 는 것은 왜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후 우리나라는 우리가 다스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 다”고 하였다.5 17~18세 무렵 신문과 책을 통해 신학문을 독학하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면서 일제의 식민통치의 모순을 몸소 체득하였던 것이다. 윤봉길은 근대적인 학문을 접한 이후 철저한 ‘농촌계몽운동가’로 완전히 탈바꿈을 하였던 것이다. 오치서숙을 나온 이후 사랑방에 서당을 차리고 7~8세 아동들을 가르쳤지만, 19세 부터는 글을 모르는 아동과 어른들에게 한글과 신학문을 가르치는 야학운동을 시작하였다. 야학은 甲·乙반으로 나누어 갑반은 국문을 가르쳤고, 을반은 역사·산술·과학 그리고 농사 지식 등을 가르쳤다. 야학에서 가르치는 국문은 당시 보통학교에서 가르치는 일본어가 아니 라, 우리 한글이었다. 윤봉길의 야학에서는 절대로 한국어만을 사용하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리고 윤봉길은 야학에서 사용할 교재를 직접 만들기도 하였는데, 그것이 『農民讀本』 3 권이다. 윤봉길의 『농민독본』은 천도교계의 지도자인 이성환이 쓴 책과 글을 많이 활용하였 다. 그렇다고 하여 윤봉길이 천도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성 환이 쓴 책과 글은 당시 전국의 농민·농촌운동에 종사하고 있었던 청년들은 대부분 그에 공 감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윤봉길이 이성환의 것을 활용하여 『농민독본』을 만들 었다고 하여, 이를 곧바로 천도교에 크게 공감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가 천도교에서 발간한 책자에 심취한 것은 맞다고 본다. 『농민독본』에서 한국의 농촌이 진 정으로 잘 살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였다고 하면, 그 실천 방안으로 내세운 ‘復興院’을 건립 하였다. 부흥원은 일종의 농민조합과 같은 성격을 가진 것이다. 농민들이 주체가 되어 농민 들을 부흥시키는 농민들을 조합이었던 것이다. 농민들이 늘 모일 수 있는 모임장소가 필요하 였기 때문에, 윤봉길의 주도로 1928년 2월 덕산군 시랑리에서 부흥원 건물 상량식을 거행하 였다. 부흥원을 만든 이후 월진회를 조직하였으며, 마을 청년들의 체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修岩 體育會를 발족시켰다. 청년들의 체력을 연마하고자 냇가 편편한 자리에 운동장을 만들었다. 22살이 되는 1929년 2월에 爲親稧의 서기로 맡았다. 5 「상해폭탄범인 윤봉길 공소제기에 관한 건의 통첩 첨부 윤봉길 신문조서」(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매헌윤봉길전집』 제2권, 2012, 119쪽). 3. 농촌계몽운동 전개 윤봉길은 야학을 설립하고, 부흥원을 건립하였으며, 수암체육회 발족하는 등 농촌계몽운동 에 전력을 쏟았다. 그래서 그의 「이력서」에도 “피폐한 농촌 개척을 목적으로 동리 父老와 상 의하여 동내에 三間講堂을 세우고 돈없어 공부 못하는 아동을 모집하여 야학을 權權이 한 결과 성적이 매우 우수하였다”라고 하고 있다.6 그는 농촌계몽운동을 통해 조선의 농촌이 보 다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농촌의 현실은 더욱 피폐해져 가는 것에 대해 많은 회의를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윤봉길은 20세를 전후한 시기부터 일제 식민지 지배 때 문에, 더 이상 조선 농촌의 생활 수준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게 되었다. 그 러한 사실은 그가 각본을 쓴 ‘토끼와 여우’라는 寸劇에 잘 나타나 있다. 1928년 2월 부흥원 건물 상량식을 하고, 1년만인 다음해 2월 부흥원 낙성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부흥원 건립을 기념하여 윤봉길이 각본을 쓴 ‘토끼와 여우’라는 제목의 촌극을 공연하게 되었다. 윤봉길은 ‘여우와 토끼’ 공연으로 일제경찰에 불려가게 되었다. 공연이 있은 다음날 덕산주재소에서 불 려갔다. 이로부터 윤봉길은 일제의 감시를 받은 ‘요주의’ 인물이 된 것이다. 그후 1929년 4월 23일 38인이 모여 본격적인 농촌계몽단체인 月進會를 조직하였다. 월진회 결성 당시 윤봉길 을 직접 「취지서」를 작성하였다. 「월진회 취지서」 작성 당시 윤봉길이 일제의 감시를 심하게 받고 있었던 상황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식민지 지배에 저항과 민족독립에 대한 의지를 표 현할 수는 없었다. 월진회를 통해 농민운동에 몰두하고 있을 무렵인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윤봉길은 광주학생운동으로 큰 충격을 받았음에 틀림이 없다. 필자가 판단하기에 윤봉길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 대열에 참여해야만 한다고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광주학생운동 이후부터라고 보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가 남긴 『己巳年日記』 1929년 12월 5일자에는 “光 州高普 민족 충돌”고 하였고, 12월 10일자에는 “京城 普城高普 萬歲三唱”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만세 삼창을 했는데, “一 일본제국주의 打破 만세!, 二 약소민족 해방 만세!, 三 노예 적 교육(철폐) 만세!”라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7 윤봉길은 광주학생운동 직후부터 독립운동 대열에 참여해야만 한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 6 「윤봉길의 이력서」, 31쪽. 7 『己巳年日記』(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매헌윤봉길전집』 제1권, 2012, 798쪽).
윤봉길의사상과한국독립운동사적위상 4140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의 「이력서」에도 “23세.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우리 압박과 우 리의 고통은 증가할 따름이다”라고 하면서, “나는 여기에 한 가지 각오가 있었다”라고 하였 다.8 다시 말해, 광주학생운동 이후 윤봉길은 국내에서의 야학·월진회 등을 통한 농촌계몽운 동에 한계를 느끼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해야만 한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 1930년 3월 윤봉길의사는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어 전에는 결코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 의 ‘丈夫出家生不還’이라고 출사표를 썼다. 그의 나이 23살 때 중국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윤 봉길은 국내에서의 농촌계몽운동을 펼쳤지만 생활이 더 나아지지 않는다는데, 그 이유는 일 제의 식민지 지배 때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일제 식민지배를 끝내지 않는 한 한국민족의 경제적 고통은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를 끝내기 위해 국외에 망명하여 본격적인 독 립운동을 펼쳐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럼, 윤봉길의 국외로 망명할 때, 사상은 망명하기 전에 지은 일명 ‘離鄕詩’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9 「이향시」는 고국에 있는 한국민들은 일제로부 터 자유를 빼앗겨 벙어리가 되고 족쇄가 채워져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윤봉길은 일본제국주 의의 물리치기 위해 ‘정의의 길’로 가고자 하였고, 이를 통해 “오로지 사람다운 인류세계”를 건설하는 일군이 되고자 하였다. 4. 중국 망명과 독립운동 윤봉길은 23세 때인 본격적으로 독립운동 대열에 참여하기 1930년 3월 고향을 떠나 중국 으로 망명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가 중국으로 망명한 이유에 대해, 의거 직전 김구에서 써 준 「이력서」에 의하면, “여기에 覺悟는 별 것이 아니다. 나의 鐵拳으로 적을 즉각으로 부수 려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10 그의 망명 각오는 ‘철권’으로 적을 부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철권’ 즉, ‘무장투쟁’을 통해 일제를 타도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 철권을 棺 속에 들어가 면 無所用이다. 늙어지면 無用이다”라고 하였다. 무장투쟁을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고, 나이 가 더 들기 전에 무장투쟁 대열에 참가하여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무장투쟁을 하기 위해서 8 「윤봉길의 이력서」, 32쪽. 9 「離鄕詩」(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매헌윤봉길전집』 제1권, 2012, 54-55). 10 「윤봉길의 이력서」, 32쪽. 는 중국으로 가야만 했고, 그곳에서 독립군에 들어가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윤봉길은 1930년 3월 말 압록강을 건너 丹東으로 갔고, 3월 31일 일본 기선 廣利丸을 타고 우선 靑島 를 향했다. 윤봉길을 청도에서 1년 정도 세탁소에서 일을 하였기 때문에, 상해로 갈 돈을 마련할 수가 있었다. 그는 ‘철권’으로 일제를 물리치기 위해 상해의 임시정부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의거 이후에 작성된 윤봉길의 「신문조서」에 의하면, 그는 국내에서 신문을 보고 중국 상해에 독 립운동이 중심기관인 임시정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물론 국내에 있을 때, 『동아일 보』 등의 신문을 보고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윤봉길은 중국 상해에 임시정부와 같은 한국독 립운동 기관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구체적인 조직이나 활동상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 였던 것같다. 「신문조서」에 의하면, 상해에 가서 “군대조직이 있으면 군대에 들어가려는 생 각으로 온 것이다”라고 하였다.11 그가 상해에 온 것은 임시정부에 들어가 무장투쟁을 하려고 하였는데, 그가 추측하기에 임시정부내에 군대를 교육하는 기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윤봉길은 상해에 있는 군인양성기관에 들어가 군사훈련을 받고, 직접적인 독립전 쟁에 가담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상해에 와 보니, 군대를 양성하는 제도나 시설이 전 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 하기 위해, 상해에 있는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찾아 다녔을 것으로 추측된다. 윤봉길이 1931년 5월 8일 상해에 도착한 이후 바로 임시정부에서 김구를 만났다. 「신문 조서」에 의하면, 그가 霞飛路 1014弄 27호에 살 때, 같은 구역 30호에 흥사단 사무소가 있 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안창호를 한 두 번 만났다고 한다.12 윤봉길은 흥사단 사무소에 찾아 가서 안창호도 만났던 것이다. 그런데 윤봉길이 상해에 온 목적은 무장투쟁을 하기 위해서 였다. 그는 흥사단 사무소에 찾아갔지만 안창호는 직접적인 무장투쟁을 하는 독립운동 노선 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흥사단에 가입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그의 「신문조서」에서도 그는 ‘흥사단’을 ‘조선인 수양단’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있다. 윤봉길의 이력서가 적힌 수첩에는 안창호외에 “최동오·김의한·김두봉·이유필·박창세” 11 「상해폭탄범인 윤봉길 공소제기에 관한 건의 통첩 첨부 윤봉길 신문조서」, 120쪽. 12 「상해폭탄범인 윤봉길 공소제기에 관한 건의 통첩 첨부 윤봉길 신문조서」, 121쪽.
윤봉길의사상과한국독립운동사적위상 4342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등 임시정부 요인 명단이 적혀 있다.13 그가 상해에 온 이후로 가장 많이 만난 사람은 백범 김 구이다. 실제로 그가 홍구공원의거를 일으킬 수 있게 한 바로, 직접적인 사상을 심어준 분이 백범이었다. 「신문조서」에서 윤봉길은 청도에서 상해로 온 이후인 1930년 7월 경, 김구와 四海路와 馬浪路의 교차점에 있는 찻집에서 처음 만났다고 하였다.14 그리고 그후 위의 찻집 에서 매월 2회 내지 3회 만나 독립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앞의 「신 문조서」에 보았다시피, 그는 상해에 오자마자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김구’였고, 상해에 온 이후 정기적으로 한 달에 적어도 2~3차례 만났다고 하였다. 김구는 처음 만날 때부터 윤봉 길이 상해 온 목적이 분명히 독립운동을 하려고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윤봉길은 상해에 도착 직후 바로 김구를 만났고, 1931년 6월 박진이 경영하는 종품공사(鬃 品公司)에 취직한 이후 9월까지는 매월 1회 정도 김구가 찾아와서 시사문제를 이야기를 나누 었다고 한다.15 이때 윤봉길에서 김구가 가진 독립운동에 관한 견해를 충분히 들을 수가 있었 다. 아마도 윤봉길은 김구가 말하는 독립운동 노선과 방략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그는 김구에게 그가 상해 온 목적이 직접적인 무장투쟁에 있다고 말하였을 지도 모른다. 5. 한인애국단 참여 중국 상해로 온 윤봉길은 김구의 독립운동 노선에 대해 상당한 신뢰가 있었다. 종품공사를 나와 소채를 지고 홍구방면으로 돌아다닌 것도 무슨 기회를 기다렸던 것이다.16 앞에서 언급 한 바와 같이, 상해에 온 이후 윤봉길은 매월 2~3차례 백범 김구를 만나 그의 독립운동 사 상에 크게 공감을 하게 되었다. 김구는 현재 우리 민족이 일제와 맞서 싸워서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세계전쟁이 일어나면 독립전쟁을 일으켜야만 한다고 윤봉길에게 설파하였다. 무장 투쟁을 하려고 상해로 온 윤봉길은 군대조직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가 원했던 직접적인 13 「윤봉길 수첩」(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매헌윤봉길전집』 제2권, 2012, 35쪽). 14 「상해 홍구공원에서의 폭탄투척사건 관련 상해총영사 보고」, 91쪽. 15 「상해폭탄 범인 윤봉길 공소제기에 관한 건의 통첩 첨부 윤봉길 신문조서」, 122쪽. 16 김구 지음, 도진순 탈초 ·교감, 『정본 백범일지』, 돌베개, 2016, 406쪽. ‘무장투쟁’의 일환인 ‘의열투쟁’ 노선에 적극 찬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윤봉길은 상해에 온 이후 김구를 만나면서 그의 사상과 독립운동 방략에 깊은 감화를 입었 다. 김구는 이봉창의 동경의거에 이어 홍구공원의거를 결행한 이유를, “인도와 정의의 이름 으로, 또는 우리 친구를 일본의 침략정책 분쇄 임무에 불러들이려는 희망”에서 결행하게 되 었다고 하였다.17 홍구공원의거를 통해 ‘우리 친구’ 즉 ‘중국’을 일제와 맞서 싸우게 하려고 하 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일본은 한국을 강제병탄하고 이어서 만주를 정복하고, 또 중국 상해 를 침입함으로써 동양과 세계의 평화를 파괴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한국의 적인 동 시에 동양과 세계의 평화를 파괴자며, 인도와 정의의 파괴자이기 때문에 이를 응징해야만 한 다고 하였다. 윤봉길은 중국 상해로 김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그가 일제에게 붙잡혔을 때 받은 「신문조서」에 의하면, 한국이 독립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대해 윤봉길은 “현재로서는 조선은 실력이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일본에 반항하여 독립하 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렇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르비아나 폴란드가 독립하였던 것처럼 “세계에 커다란 전쟁이라도 일어나서 강대국이 피폐하면 그때 각 국민이 독립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하였다. 이같은 윤봉길의 답변은 김구가 가 진 독립운동 방략과 완전히 일치하는 견해였다. 이어서 윤봉길에게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가 없으면 독립운동가는 쓸모 없는 것이 아닌가” 라는 질문에 받게 되었다. 이에 대해 “우리들 독립운동가는 나무에 비료를 주거나 물을 주어 자연적인 발육을 돕는 것처럼 국가 성쇠의 순환을 앞당기는 것이 역할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즉, 독립운동가는 비록 당장 일제와 맞서 독립전쟁을 전개할 수는 없지만, 일제의 폐망을 앞 당기기 위해 투쟁을 해야만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홍구공원의거’와 같은 거사를 일으켜 일 제에게 타격을 가하여, 일제의 폐망에 한 발자국 다가가게 하고자 하였다. 그러면 윤봉길이 김구의 한인애국단과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어느 때부터였는가에 대해 살 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윤봉길은 1931년 5월 상해로 온 이후 자주 만났지만 실질적인 독립운동에는 가담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 동경의거는 일왕의 처단하는 데는 실패를 하였지만, 이로 인해 상해사변이 발발하면서 김구가 바라던 중일전쟁 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윤봉길은 이봉창과 같은 또 한번 의거를 자신이 결행할 기회를 17 「홍구공원 폭탄사건의 진상」(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매헌윤봉길전집』 제2권, 2012, 97쪽).
윤봉길의사상과한국독립운동사적위상 4544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기다리고 있었다. 윤봉길은 이봉창을 만난 적은 없다. 두 사람은 같은 시기 상해의 홍구지역 에서 있었지만 만나지는 못하였다. 이는 김구가 이봉창을 철저하게 비밀리에 준비를 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윤봉길이 김구의 한인애국단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된 것은 시기는 언제부터였을 까. 윤봉길이 김구의 한인애국단과 관계를 맺은 것은 그의 친구인 兪鎭植을 통해서였을 것으 로 추측된다. 유진식과 가깝게 지내던 윤봉길은 그의 소개로 김구가 추진하던 특무공작에 동 참하게 되었다. 이봉창의거로 말미암아 터진 상해사변의 추이를 전망하고 있던 김구는 계속 해서 일제에게 타격을 줄 특무공작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김구는 이봉창의 ‘동경의거’ 이후 프랑스공무국의 도움을 받으면서 몸을 숨기며, 또 다른 특무활동을 준비하였다. 『백범일지』 에 의하면 상해사변으로 虹口 방면에 한인 노동자를 고용함을 계기로 이들을 군용창고에 몰 래 들여 보내 炸彈庫·飛機庫 등을 폭파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김구는 김홍일에게 烟燒彈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고 기다리고 있는 동안 상해정전협정이 추진되면서 계획이 실행되지 못하였다고 한다.18 윤봉길은 홍구공원의거 전부터 김구의 특무활동에 동참하고 있었다. 이봉창의 동경의거 이후 상해사변이 일어나는 등 독립전쟁의 기회를 모색하고 있던 윤봉길은 이봉창과 같은 의 거를 일으켜 중일전쟁으로 발전시켜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江灣飛行場 무 기고 폭파계획에도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윤봉길은 이봉창으로 하여금 동경의거를 일으키게 한 배후에는 김구가 있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김구를 찾아가서 채소 바구니를 들고 날마다 홍구 방면으로 다니는 것은 큰 일을 할 기회를 모색하고 있었다 고 고백하였다. 김구는 윤봉길에게 다음에 좋은 계획이 있으면 반드시 기회를 주겠노라고 약 속을 하였다. 그후 윤봉길은 김구에게 “앞으로 이봉창의사 의거와 같은 계획이 있으면 반드 시 나에게 맡겨 주십시요”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윤봉길의 ‘홍구공원의거’는 그 혼자 일으킨 것이 아니라 그의 뒤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었고,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특무조직인 ‘한인애국단’이라는 조직이 있었던 것이 다. 한인애국단은 임시정부의 직속기관으로 단장인 백범 김구의 전담하에 의열투쟁을 수행 하였던 조직이다. 1920년대 중반 이후 부진했던 임시정부는 1931년 일제가 만주침략을 단 행하면서 독립전쟁의 분위기가 성숙되어 가자 이를 적절히 이용하기 위해 의열투쟁의 방략 18 김구 지음, 도진순 탈초 ·교감, 『정본 백범일지』, 돌베개, 2016, 405-406쪽. 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로 하였다. 그 대표적인 단체가 ‘한인애국단’이라고 할 수 있다. 한인 애국단은 1930년대 들어 계속된 침체와 위기에 처해있던 임시정부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하 여 김구의 책임아래 결사대원 80여 명을 모아 조직한 것이다. 한인애국단은 임시정부 국무회 의의 의결을 거쳐 특무대로서 별도의 기구를 조직한 것이다.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인 김구를 한인애국단의 책임자로 임명하고 단의 활동이나 인물선정 등 모든 권한을 일임하고 다만 그 결과를 보고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한인애국단은 절대 비밀결사로서 파괴와 암살과 같은 의열투쟁을 통해 독립운동을 추구하 는 단체이며, 단장은 ‘김구’라는 점을 명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문서에서 “금년 1월 8일 에 동경에서 일황을 저격한 이봉창의사도 애국단의 일원이다”라는 것도 분명히 언급하고 있 다. 「홍구공원 폭탄안의 진상」은 김구와 윤봉길의 만남에 대해 매우 감상적으로 표현하고 있 다. 윤봉길은 “상해에 온 뒤에 그의 맘에 기쁨은 형언(形言)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6. 홍구공원의거 거행 윤봉길이 홍구공원의거를 거행한 근본적 이유는 중국과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조건 을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김구는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 모든 사항을 임시정부 국무회의에 사전에 보고를 했다. 이봉창의거를 준비하는 동안 김구 는 1931년 12월 6일 밤에 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이봉창이 일왕을 폭살시킬 계획을 보고하였던 것이다.19 다음으로 윤봉길의 홍구공원의거 직전에 김구는 임시정부 국 무령으로서 4월 26일 국무회의를 급히 소집하였다. 이 국무회의에서 김구는 “오는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 일본 육군의 열병식이 거행되므로 윤봉길의사를 이용하여 폭탄을 투척케 하여 재차 日支戰爭(중일전쟁–필자)을 발발시키도록 계획을 진행하였다”라고 보고하였다.20 앞에서도 약간 설명한 바와 같이, 김구는 이봉창의거로 인해 일본이 상해를 침략하는 ‘상 해사변’이 일어났듯이, 윤봉길의 홍구공원의거를 통해 본격적으로 중일전쟁을 일으킬 수 있 는 계기를 만들고자 하였던 것이다. 당시 김구는 우리 민족이 독립을 쟁취할 수 있기 위해서 19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2)』(임정편Ⅱ), 1971, 257쪽. 2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2)』(임정편Ⅱ), 258쪽.
윤봉길의사상과한국독립운동사적위상 4746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는 세계적인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그 기회를 포착하여 독립전쟁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그 래서 김구는 의열투쟁을 통해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간다는 독립운동 방 략을 구사하였다. 즉, 백범의 독립운동 방략은 이봉창의 동경의거로 ‘상해사변’을 일으킬 수 있었고, 윤봉길의 홍구공원의거를 통해서는 중국과 일본 사이의 본격적인 전쟁을 유발시키 고자 하였던 것이다. 김구의 이같은 독립운동 방략에 대해, 윤봉길도 크게 동감을 하였기 때문에 홍구공원에서 일제 침략 원흉에 대한 투탄의거를 일으켰다. 일제의 윤봉길에 대한 「신문조서」에 보면, 홍 구공원의거가 독립운동에 크게 효과가 없다 것이 아니냐고 질문을 하였다. 그러자 윤봉길은 “한 두 명의 상급 군인을 죽여서 독립이 쉽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의 폭탄 투척이 독립에 직접적인 효과는 없지만, 단지 조선의 각성을 촉구하고 더 나아가 세계 사람 들에게 조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이다”라고 분명히 답변하였다. 그래서 “조선이라는 관 념을 세계 사람들의 머리에 새겨두는 것도 독립운동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윤봉길은 이같은 독립운동에 대한 생각은 나의 생각이기도 하지만 김구의 생각이 기도 하다고 말하였다.21 윤봉길의 「판결문」에서도, “이에 두 장군(白川義則과 植田謙吉-필자) 을 살해했다고 해서 조선 독립을 위해서는 직접 효과가 없을 것이나 조선인의 각성을 촉진하 고, 세계 사람들에게 조선의 존재를 알 수 있게 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드디어 두 장군을 살해 하기로 결의하였다”라고 하고 있다.22 앞에서 본바와 같이, 윤봉길은 중국 상해에 와서 군사양성기관에 들어가 군사교육을 받고 직접 일제와의 직접적인 전쟁을 벌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군인양성기관이 없기 때문에, 당시 독립운동계의 노선에 따라 ‘독립당’에 들어가 운동을 시작하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김구를 만 나, 직접적인 무장투쟁인 ‘의열투쟁’을 통해 세계대전, 즉 ‘중일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계기 를 마련하려고 하였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윤봉길은 이봉창의거 이후 계속해서 직접적인 무장투쟁을 할 기회 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김구를 만난 윤봉길은 “이제는 중일간의 전쟁도 끝이 났으니 아 무리 보아도 죽을 자리를 구하기가 어렵다고 한탄 뒤에 내게 동경사건과 같은 계획이 있거든 21 「상해폭탄범인 윤봉길 공소제기에 관한 건의 통첩 첨부 윤봉길 신문조서」, 120~121쪽) 22 「윤봉길의 상해 일본파견군 군법회의 판결문」(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매헌윤봉길전집』 제2권, 2012, 103쪽). 자기를 써 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23 김구는 “내가 마침 그대와 같은 인물을 구하던 중이니 안심하시오”하면서, 윤봉길에게 다음에 좋은 계획이 있으면 반드시 기회를 주겠노라고 약속 을 하였다. 사실 김구는 ‘동경의거’ 이후 일제의 검거를 피해 다니면서도 일왕의 생일인 天長 節 기념식이 거행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국을 위해 언제라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윤봉길의 결심을 확인한 김구는 자신도 오랫동안 제2의 이봉창과 같은 인물이 출현하기를 기다렸다. 김구는 윤봉길을 몇 차례 만나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그의 결연한 의지를 확인하고 한인 애국단에 가입시키기로 하였다. 얼마후 김구는 일본어 신문인 『上海日日新聞』에서 “4월 29 일 홍구공원에서 天長節 축하식을 거행하는 터이니 그날에 식장(式場)에 參禮하는 데는 水囊 (물통) 1개와 점심 辨當(도시락), 國旗 한 장씩을 가지고 입장하라”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24 김 구는 윤봉길에서 4월 29일 천장절 기념식 행사식장에서 거사를 결행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를 물어 보았다. 이에 윤봉길은 “저는 이제부터는 胸中에 一點 煩悶이 없어지고 安穩하여 집니 다”라고 쾌히 승낙하였다.25 그리고 백범은 상해 병공창 주임으로 근무하는 김홍일을 찾아가서 홍구공원에서 사용할 폭탄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는 김홍일과 상해병공창 책임자 宋式鬃에게 물통형 폭탄과 도 식락형 폭탄 각 1개씩 만들어 3일 이내에 보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백범의 부탁을 받은 상해 병공창에서는 중국인 폭탄 제조기술자인 王伯修의 지도하에 폭탄의 뇌관 20개를 모두 실험 하여 성공 여부를 확인한 후 도시락형 폭탄과 물통형 폭탄에 장착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만 들어진 폭탄은 김홍일의 집으로 운반되었고, 김구는 이를 다시 한 두 개씩 프랑스조계내에 거주하는 믿을만한 동포집에 “주인도 모르도록 귀한 약품이니 불만 조심하라”고 부탁하며 숨겨 두었다. 윤봉길은 4월 29일 아침 6시 숙소를 나와 김구와 아침식사를 마쳤고, 김구가 건내 준 2개 의 폭탄 중 도시락 폭탄은 보자기에 쌌고, 물통형 폭탄은 어깨 매었다. 그는 오전 7시 45분경 에 홍구공원에 도착하여 50분경 공원 정문으로 들어갔고 일반 관람객들과 함께 행사를 지켜 보면서 폭탄을 던질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홍구공원 행사에는 상해에 거주하는 일본 23 김구 지음, 도진순 탈초 ·교감, 『정본 백범일지』, 406쪽. 24 김구 지음, 도진순 탈초 ·교감, 『정본 백범일지』, 407쪽. 25 김구 지음, 도진순 탈초 ·교감, 『정본 백범일지』, 407쪽.
윤봉길의사상과한국독립운동사적위상 4948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인 1만 여명이 동원되었으며 일본군인들과 각국 외교관·무관 등이 초청되어 2만 여명이 참관 하고 있었다. 윤봉길은 일본국가가 끝날 무렵인 11시 50분경 도시락 폭탄을 땅에 내려놓고 어깨에 맨 물통형 폭탄을 오른손에 쥐고 왼손으로 발화 끈을 잡아당겨 뽑았다. 그리고 2~3명을 어깨로 밀면서 약 4m 앞으로 나아가 19m 거리에서 폭탄을 단상을 향해 던졌다. 폭탄은 단상의 중 간에 떨어져 굉음을 내면서 폭발하였고, 시라가와 육군대장 등 일본 군부·정계 수뇌 7명은 그 자리에서 모두 쓰러졌다. 7. 윤봉길의거의 역사적 위상 윤봉길은 어려서부터 선생과 이웃 어른들로부터 ‘才童’26 혹은 ‘神童’27이라고 칭송을 들을 정 도 영득하였다. 그리고 홍구공원의거 이후인 1932년 10월 11일 일제 상해 파견 헌병대 본부 에서 신문을 받을 때, 「청취서」에서도 취조를 담당한 취조관도 “군은 참으로 素養이 있구나” 라고 감탄할 정도로 지적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28 윤봉길은 제도권의 학교 교육을 받지는 않 았음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영득함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상당한 높은 수준의 지식을 습득하 였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배운 한학은 사서오경을 모두 통달하였고, 그가 지은 대부분의 한 시는 모두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윤봉길은 홍구공원의거 당시 25살의 나이임에 도 불구하고 지적 수준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견해도 매우 분명한 청년이었다. 윤봉길은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에서 홍구공원의거를 일으켜 한국독립운동의 물줄기 를 바꾸었다. 그가 의거를 결행하게 된 것은 일본에 대한 반제국주의적인 굳건한 사상이 있 었기 때문이다. 윤봉길은 담대한 성격을 갖고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부터 가정에서부터 매우 독립적인 교육을 받았다. 일곱 살 때부터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우고, 오치서숙에서 성주록 선생에게 유교사상을 전습받았다. 서당에서부터 17세까지 받은 유교교육은 그의 성장기에, 26 「윤봉길의 이력서」, 30쪽. 27 「홍구공원 폭탄사건의 진상(한국애국단)」, 64쪽. 28 「청취서」(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매헌윤봉길전집』 제2권, 2012, 151쪽). 성주록 선생으로부터 전통적인 유교사상을 배웠다. 그러면서도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일본 어를 독학하였으며, 당시의 신문과 잡지를 통해 상당한 수준의 근대적 학문을 습득하였다. 그리고 윤봉길은 야학을 설립하고, 부흥원을 건립하였으며, 수암체육회 발족하고, 월진회 를 조직하여 농촌계몽운동에 전력을 쏟았다. 월진회를 통해 농민운동에 몰두하고 있을 무렵 인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고, 농촌계몽운동만으로는 근본적으로 조선 농촌의 생활이 나아질 수 없다는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일제 식민지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직접적 인 무장투쟁을 전개해야만 한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을 통해 독 립운동 참여하기 1930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후 1931년 5월 중국 상해에서 윤봉길은 매 월 2~3차례 백범 김구를 만나 그의 독립운동 사상을 전습받게 되었다. 김구는 현재 우리 민 족이 일제와 맞서 싸워서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세계전쟁이 일어나면 독립전쟁을 일으켜야만 한다고 윤봉길에게 설파하였다. 김구의 독립운동 방략에 적극 찬동한 윤봉길은 세계전쟁이 발발하면 우리의 독립을 앞당길 수 있다는 희망하에 홍구공원의거를 일으키게 되었다. 그는 일제의 군부 수뇌 몇 명을 처단함으로써 당장 독립을 이루지는 못하지만, 의거를 통해 한국 민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고 우리의 독립을 앞당기기 위해 거사를 결행하였던 것이다. 윤봉길의 1932년 4월 29일 중국 홍구공원에 거행한 의거는 형태상 일제 침략자들을 응징 한 투탄의거라고 보일지 모르겠지만, 실상 윤봉길의거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으로 인한 식민 지 지배의 모순을 국제적으로 알리고, 온 인류가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는 정의로운 세상 을 보다 앞당기기 위해 실행한 거사였던 것이다. 홍구공원의거는 윤봉길과 같은 독립운동가 의 개인적 희생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독립운동의 물줄기를 바꾼 대사건으로 우리민족 의 역사 발전에 크게 공헌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1930년대 초반 김구의 한인애국단을 통한 독립운동 방략은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 다. 한국독립운동계의 시종일관한 염원은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 방략 은 크게 세계대전이 일어나면 필연적으로 일본은 세계 열강들과 전쟁을 하게 될 것으로 전망 하였다. 세계전쟁, 미국과 일본 혹은 중국과 일본이 맞붙어 싸우게 될 때, 한국민들은 일본과 맞붙은 국가와 더불어 독립전쟁을 벌여 일제로부터 승리를 거두어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이 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때에도 그같은 희망을 걸었지만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으며, 그후 미국과 일본 간의 전쟁이 일어날 것으로 전망했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한국독립운동계에서 는 국제적인 전쟁이 일어날 기회만을 기다리게 되었으나 전쟁은 발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세계전쟁을 일으킬 기회를 만들고자 하였으며, 일제가 1931년 9월 18
50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尹奉吉の思想と韓国独立運動史的な位置(要約) 51 일 만주침략을 단행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중일전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였지만 중국 민과 중국정부는 일제의 침략을 용인하고 말았다. 그러던 차에 1932년 1월 8일 김구는 이봉 창을 일본의 수부인 도쿄에 파견하여 의거를 일으키게 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일제는 중국 을 침략하는 ‘상해사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상해사변은 더 이상 중·일 간에 전쟁이 확대되 지 못하고 중국의 일방적인 패배로 결말이 나고 있었다. 그러자 김구는 이에 일본과 중국 간 의 전쟁을 확대시키기 위해 윤봉길로 하여금 ‘홍구공원의거’를 일으키게 하였던 것이다. 윤봉 길의 ‘홍구공원의거’로 인해 중국정부로 하여금 본격적으로 대일항쟁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 이다. 이 의거는 우리 독립운동사의 커다란 물줄기를 바꾼 대사건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윤봉길의 홍구공원의거는 중국과 일본 간의 본격적인 전쟁을 유발시켜, 한국독 립운동의 기회를 포착하려는 독립운동 계획하에 진행된 거사였다. 그러한 계획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할은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투탄의거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중국과 일본이 전 쟁을 벌이게 만드는 것이다. 윤봉길의 의거는 역사적으로 중·일 간의 직접적인 전쟁은 유발 시키지는 못하였지만, 그동안 소극적이었던 중국민과 중국정부로 하여금 항일투쟁에 적극 나서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1. はじめに この報告は、中国上海の虹口公園における尹奉吉の義挙の思想的な背景と、歴史的な位 置づけについて検討したものである。これを調べるために、まず尹奉吉の成長過程において どのような思想的な影響があったのか、彼と関わった人物とその影響にいて探ってみる。そ して韓国独立運動史において尹奉吉義挙がどのように歴史的に位置づけられるかについて 検討したい。 2. 青少年期の修学過程 『千秋義烈尹奉吉』という伝記によると、尹奉吉の母親は息子に対する教育熱が強かったよ うである。とくによく昔話を用いて尹奉吉を教育した。なかでも世祖(1417-1468)の王位簒 奪を最後まで反対し端宗(1452~1455)の復位を計らったが、死に追い込まれた成三問(1418― 1456)の物語が、幼い奉吉に強い印象を与えたという。このような教育の面も重要だが、生 まれつきの氣質もより重要であると思う。尹奉吉が虹口公園義挙の二日前の1932年4月27 日の夜、金九に提出した「履歴書」にその性格の一端を伺うことができる。それによると、 幼い時のあだ名が‘山猫(狸)’だったという。体つきは小柄だが、とても敏捷で山猫のように勇 ましい性格であったことが伺える。また「履歴書」には、同年輩と喧嘩をして負けたことがな 尹奉吉の思想と韓国独立運動史的な位置(要約) 金度亨 | 韓国独立運動史研究所首席研究委員
52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尹奉吉の思想と韓国独立運動史的な位置(要約) 53 く、書堂(日本の寺小屋)の先生からふくらはぎを打たれても、おじける様子もなく、びりっとし ていたということからみて、幼い頃から太っ腹な子供だったようである。 7歳の時に伯父が教えていた書堂で天字文の勉強をし、11歳になった1918年の春、徳山 公立普通学校に入学したが、日本人による教育に失望し、学校を辞めて柿梁里にある崔秉 大先生の書堂に通った。14歳の1921年からは隣の村の屯里に梅谷成周錄の烏峙書塾に入 学した。このように尹奉吉は少なくとも17歳までは書堂で漢学を学び、その後は直接書堂を 運営し、児童たちを教えていた。 したがって、尹奉吉の教育環境は基本的に儒教であると言って過言ではない。彼に大き な影響を及ぼした人物は成周錄である。周知のように尹奉吉の雅号は「梅軒」である。雅号 を付けてもらった人物が恩師の成周錄である。成周錄の号の「梅谷」から「梅」を、 成三問の 号の「梅竹軒」から「軒」を取り、雅号を付けてくれたという。 ところが、尹奉吉は17才頃から儒教について疑問を持ちはじめたようである。彼の「履歴 書」によると、「16歳になった年に、多くの先生の忠告を顧みず、日語速成読本を買って、 独学を決心した。1年間一生懸命にやったので、会話はよくできた。」という。奉吉にとっ て、日本語を習うということは近代的な学問を受け入れることであった。ただ、植民地的教 育制度の中での学校には通いたくなかったので、独学で新学問を修めたのである。尹奉吉 は虹口公園義挙の後、日本側から尋問を受けたときに、「17~18歳の頃、新聞と本を通じ て日本人が朝鮮に来て統治を行うのはなぜか、という疑問が生じ、その後、わが国は私た ち朝鮮の人が治めることが望ましいと思うようになった。」と述べた。彼は新学問を独学する うちに、日本帝国主義の植民統治の矛盾を深く感じたのである。 これにより、尹奉吉は「農村啓蒙運動家」として生まれ変わるようになった。19歳から夜 学を開き、文字が解せない児童と大人にハングルと新学問を教えた。夜学は甲·乙組に分 け、甲組は国文を教え、乙組は歴史·算術·科学 農業知識などを教えた。ここで教える国文 とは当時の普通学校で教える日本語ではなく、ハングルであった。尹奉吉は夜学のハングル 教育に携わったのである。 夜学で使う教材を直接著述するのだが、それが『農民読本』3冊である。尹奉吉の『農民 読本』は天道教の指導者の李晟煥が書いた本の文章を多く引用している。当時、 李晟煥が 著述した著作や文章は農民農村運動を行っていた青年たちに愛されていた。『農民読本』で 朝鮮の農村が発展できる方向を提示したとすれば、その実践方法として設立したのが「復興 院」である。「復興院」は一種の農民組合のような組織である。尹奉吉の主導で、1928年2 月、徳山郡柿梁里で「復興院」の建物の上棟式が行われた。 3. 農村啓蒙運動の展開 続けて、尹奉吉は農村の青年たちの体力を向上させるために修岩体育会を結成した。川辺 の平坦な場所に運動場も設けた。22歳になる1929年2月に為親稧の書記を勤めた。 「履歴書」には「疲弊した農村を開拓する目的で村の元老と相談し、三間講堂を建て、貧 乏で教育が受けられない児童を募集し、夜学を指導した結果、成績がとても優秀だった。」 とある。農村啓蒙運動を通して朝鮮の農村がよりよくなるだろうと考えた。ところが、農村の 状況はより悪くなるばかりで、彼は懐疑を抱きはじめる。 その思いは彼が書いた「ウサギとキツネ」という寸劇の脚本によく現れている。復興院の建 立を記念して上演されたこの演劇のために、尹奉吉は翌日、徳山駐在所に呼び出される。 このときから尹奉吉はに当局の監視を受ける「要注意人物」になったのである。 1929年4月23日には、38名が集まり月進会を組織した。創立当時、尹奉吉は自ら「趣旨 書」を作成した。当局の監視を受けていたので、自分の植民地支配に対する抵抗の意志を ありのまま盛り込むことはできなかった。そのごろ、11月初めに全羅南道光州で学生運動が 起きた。尹奉吉は大きな衝撃を受ける。彼の『己巳年日記』1929年12月5日には、「光州高 普民族衝突」とメモし、 12月10日には、「京城普城高普万歳三唱」とし、その内容は「一 日 本帝国主義打破万歳! 二 弱小民族解放万歳! 三 奴隷的教育撤廃万歳!」とあった。 光州学生運動の直後、尹奉吉は独立運動の隊列に参加すべきだという決心を固めたと 見える。また「履歴書」には「23歳、日が経ち、年が変わっても私たちがうける圧迫と苦痛は 増すばかりだ」と言い、「私はここにおいて一つ覚悟したことがあった」と書いてあったのであ る。 ついに、1930年3月、尹奉吉は日本を朝鮮から追い出すまでにはけっして戻ってこないと いう意志を込めて、「丈夫出家生不還」という出師の表を書きとどめた。彼の歳、23歳の時 であった。当時尹奉吉が亡命を決心した時の思想は、亡命する前に書いた「離鄕詩」にその まま盛られている。そこには故国の民は日本から自由を奪われ、鎖に縛られていると見てい
54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尹奉吉の思想と韓国独立運動史的な位置(要約) 55 た。だからこそ、日本帝国主義を倒すために「正義の道」へ進もうとしており、それによって 「ひたすら人間らしく生きる人類世界」を築いていく担い手になろうとした。 4. 中国亡命と独立運動 義挙の直前、金九に出した「履歴書」によると、 中国亡命の理由については「ここで覚悟とい うものはほかでもない、自分の鉄拳で直ちに敵をに倒すというものである」とある。亡命覚悟 は「鉄拳」で敵を倒すためであるという。「鉄拳」、すなわち「武装闘争」を通じて日帝を打倒 しようとしたのである。ところが、「この鉄拳は棺の中に入ると、無所用である。老いたら無 用なのだ」。すなわち、武装闘争をしなければ何にもならないし、歳を取る前に武装闘争の 隊列に参加すべきだと考えた。武装闘争のためには、中国へ乗り込み、そこから独立軍に 入って行こうとしたのである。だから尹奉吉は1930年3月末、鴨緑江を渡って丹東に行き、3 月31日、日本の汽船廣利丸に乗って靑島に向かった。 青島で1年ほど洗濯屋で働き、上海に行く資金を用意することができた。「鉄拳」で日帝を 倒すために、上海の臨時政府を尋ねていった。義挙後作成された尹奉吉の「尋問調書」によ ると、国内で新聞を読み、中国の上海に独立運動の中心機関である臨時政府があることが わかったという。国内で『東亜日報』などの新聞を見て知ったのであろう。ところで、尹奉吉 は上海に臨時政府のような韓国の独立運動組織があるということは知っていたが、具体的な 組織や活動像については、全く知らなかったようである。「尋問調書」によると、上海に行っ て「軍隊組織があれば、軍隊に入りたいという考えで来た」という。上海に来たのは、臨時政 府内に軍隊を教育する機関があると考えていたからである。 そこで尹奉吉は上海の兵士養成機関に入って軍事訓練を受け、身を投じて独立戦争に加 担しようとしたのである。しかし、上海に来てみると、軍隊を養成する組織や施設が全くな いことに気づいた。したがって自分の力でできる独立運動の方法を模索し、上海の独立運 動の指導者たちを探し回ったと推測される。 まず1931年5月8日、上海に到着してすぐ臨時政府の金九に会った。「尋問調書」による と、霞飛路1014弄27号で住んでいたとき、同じ区域の30号に興士団事務所があったので、 そこで安昌浩に一、二回会ったという。上海に来た目的は武装闘争のためである。ところ が、 安昌浩の興士団事務所を訪ねてみると、直接武装闘争をする独立運動路線ではなか ったので、興士団に加入しなかったと推測される。「尋問調書」で彼は「興士団」を「朝鮮人修 養団」と表現している。 一方、「履歴書」が書かれた手帳には、安昌浩のほか、崔東旿、金毅漢、金枓奉、李裕 弼、朴昌世などの臨時政府要人の名前が書かれている。上海に来て以来、最も多く会った 人は白凡・金九である。実際虹口公園義挙を可能にし、彼に直接的に思想の影響を与えた 人物が白凡である。「尋問調書」で青島から上海に来て1930年7月頃、四海路と馬浪路の交 差点にある喫茶店で金九に初めて会ったという。その後、毎月2、3回会って独立運動につ いて議論したとしている。 1931年6月、鬃品公司に就職してから9月までは毎月一回程度、金九を訪ねて時事問題 について語り合ったという。この時、金九の独立運動に関する認識を十分交流した。おそら く尹奉吉は金九の独立運動路線と戦略に深く共感したと推測される。 5. 韓人愛国団参加 上海に来た尹奉吉は、金九の独立運動路線を深く信頼していた。鬃品公司を出て虹口方 面を行商して廻っていたのも、ある機会を待っていたからである。金九は、今わが民族が日 帝に対抗し勝ち抜くことができないため、世界戦争が起きたら独立戦争を起こさなければな らないと説いた。武装闘争のために上海に来た尹奉吉は、軍隊組織には入れなかったが、 望んでいた直接「武装闘争」の一環である「義烈闘争」路線に積極的に賛同するようになっ た。 そもそも金九は李奉昌義挙に次ぎ、虹口公園義挙を決行した理由を、「人道と正義の名 で我が友を日本の侵略政策の粉砕任務に呼びかけるために」行ったという。虹口公園義挙を 通じて「我が友」、すなわち「中国」を日本に対抗させようとしたのである。日本は韓国を強制 併呑し、さらに満州を征服し上海を侵略することにより、東洋と世界の平和を破壊した。つ まり日本は韓国の敵であると同時に、東洋と世界の平和の破壊者であり人道と正義の破壊 者であるゆえ、制裁を加え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 逮捕された 尹奉吉は「尋問調書」によると、韓国が独立できる方法は何かという質問を受
56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尹奉吉の思想と韓国独立運動史的な位置(要約) 57 けている。それに対して「現時点で朝鮮は実力がないので、積極的に日本に対抗し独立する ことは不可能だと考える」と答えた。しかしながら、第1次世界大戦後、セルビアやポーラン ドが独立したように「世界に大きな戦争でも起きて超大国が疲弊すると、そのとき各国民が 独立できると考える」という。その内容は金九の独立運動戦略と完全に一致する見解であっ た。 続けて「世界大戦を引き起こすことができない場合、独立運動家は役に立たないのではな いか」という質問に対して、「私たちの独立運動家は、木に肥料を与え、水を与え、自然な 発育を助けるように国家盛衰の循環を早めることがその役目である」と答えた。つまり、独立 運動家はたとえ直ちに日本に対抗して独立戦争を展開することはできなくても、早期に日帝 の破滅させるために闘争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だから「虹口公園義挙」のような偉業を 起こし、日帝に打撃を加えようとしたのである。 さて、尹奉吉が金九の韓人愛国団との関係を持ったのはいつかについて調べる必要があ る。なぜなら1931年5月、上海に来て頻繁に会っているが、実質的な独立運動には加担し ていなかった。そうするうちに、1932年1月8日、李奉昌の東京義挙があり日王処断は失敗 したが、その後、上海事変が勃発し、金九が予言した日中戦争が起きたのである。尹奉吉 は李奉昌のような義挙を決行する機会を待っていた。尹奉吉は李奉昌に会ったことはない。 二人は同じ時期上海の虹口地区にいたが、会うことはなかった。金九は李奉昌の義挙を徹 底して秘密裏に準備をさせていたからである。 ところで、尹奉吉が金九の韓人愛国団と直接接触するようになったのは、いつだろうか。 それは尹奉吉の友人である兪鎭植を通して関係を結んだとみえる。兪鎭植の紹介で金九が 推進した特務工作に参加するようになったのである。李奉昌義挙以来、上海事変の推移を 見据えていた金九は、引き続き日本に打撃を与える特務工作を推進していた。金九は李奉 昌の「東京義挙」以降、フランス公務局の助けを受けながら身を隠し、別の特務活動を準備 していた。『白凡逸志』によると、上海事変で虹口方面に韓国人労働者を雇用することを契 機に、かれらの軍用倉庫に送り込み、炸彈庫、飛機庫などを爆破しようとした。そこで金九 は金弘壹に烟焼弾を製造させ待っている間に上海停戦協定が結ばれたため、その計画は実 行されなかったという。 一方、尹奉吉は虹口公園義挙以前から金九の特務活動に参加していた。李奉昌の東京 義挙以降、上海事変が起こるなど独立戦争の機会を模索していた尹奉吉は、李奉昌のよう な義挙があり、日中戦争に発展させたいという考えを持っていた。そこで江湾飛行場武器 爆破計画にも参加することになる。当時尹奉吉は李奉昌の東京義挙の背後に金九がいたこ とを承知していた。そこで金九を訪ね、野菜行商をしながら日々虹口方面を廻ったことは大 きな事を図っていたからであると告白するのである。金九は尹奉吉に次の計画には必ず機会 を与えると約束した。尹奉吉も「今後李奉昌義士の義挙のような計画があれば、必ず私に任 せてください」と何度も頼み込んだという。 尹奉吉の「虹口公園義挙」は、一人で行ったものではなく、その背後に大韓民国臨時政府 があり、臨時政府国務会議で議決された特務組織「韓人愛国団」という組織があった。韓人 愛国団は臨時政府の直属機関として団長である白凡・金九の責任下で義烈闘争を行った組 織である。1920年代半ば以降、活動不振に落ちた臨時政府は、1931年に日本が満州侵略 を断行し、独立戦争の条件が成熟していくと、これを適切に利用するために義烈闘争の戦 略を積極的に推進することにした。その代表的な団体が「韓人愛国団」である。1930年代に 入っても続いた低迷と危機に悩んでいた臨時政府の活路を模索するために、金九の責任下 で決死隊員80名を集めて組織したものである。それは臨時政府の国務会議の議決を経て、 特務隊として別の機構を設けた。臨時政府の国務委員である金九を韓人愛国団の責任者に 任命して団の活動や人物選定など、すべての権限を一任し、結果のみ報告することにした のである。 このように韓人愛国団は絶対秘密結社として破壊、暗殺のような義烈闘争を通じて独立運 動を追求する団体であり、団長は「金九」である点を明示していた。そしてこの文書に「今年1 月8日に東京で日王を狙撃した李奉昌義士も愛国団のメンバーである」ということも明らかに 触れている。「虹口公園爆弾件の真相」では、金九と尹奉吉の出会いを非常に感傷的に表現 しているが、尹奉吉は「上海に来てから彼の喜びは言葉で表演できないものである」という。 6. 虹口公園義挙の実行 尹奉吉が虹口公園義挙を実行した根本的な理由は、中国と日本が戦争を起こす契機を作 るためであったといえる。金九は李奉昌と尹奉吉の義挙を準備する過程において、すべて の事情を臨時政府の国務会議に事前報告している。まず李奉昌義挙を準備していた時は、
58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尹奉吉の思想と韓国独立運動史的な位置(要約) 59 1931年12月6日の夜、臨時政府庁舎で開かれた国務会議で、日王爆殺の計画を報告し た。次に尹奉吉の虹口公園義挙の直前には臨時政府の国務領として4月26日の会議を急い で招集した。この国務会議で金九は「くる4月29日虹口公園で日本陸軍の列兵式が行われる ので、尹奉吉義士に爆弾を投擲させ再度の日支戦争(日中戦争―筆者)を勃発させる計画を 進めた」と報告した。 先述したように、李奉昌義挙から日本が上海を侵略する「上海事変」が起きたように、尹 奉吉の虹口公園義挙を通じて本格的に日中戦争が起こる契機を作ろうとした。当時金九は わが民族が独立を勝ち取るためには、世界戦争が勃発したとき、その機会を逃さず独立戦 争を起こすべきと考えていた。そこで義烈闘争を通じて世界大戦の条件を作っていくという 独立運動戦略を駆使したのである。つまり、白凡の独立運動方略というのは、李奉昌の東 京義挙で「上海事変」を引き起こし、尹奉吉の虹口公園義挙で中国と日本の間に本格的な 戦争を誘発させることである。 こうした独立運動方略については、尹奉吉も大いに共感していたため、虹口公園で日帝 侵略の元凶を向かって爆弾投擲義挙を起こしたのである。尹奉吉の「尋問調書」によると、 虹口公園義挙が独立運動にあまり効果がないのではないかという質問を受けていた。する と、尹奉吉は「一人二人の上級兵士を殺して独立が容易になるとは思っていない。今回の爆 弾投擲が独立に直接の効果はないのだが、ただし朝鮮の覚醒を促してさらに世界の人々に 朝鮮の存在を知らせるのだ」と明確に答えた。そして「朝鮮という観念を世界中の人々に記 憶させることは独立運動に役立つと考えている」と言った。それとともに尹奉吉は、このよう な独立運動の認識は、私の考えでもあるが、金九の考えでもあると言った。「判決文」におい ても、「この二将軍(白川義則と植田謙吉―筆者)を殺害したからといって朝鮮の独立のために 直接効果はないだろうが、朝鮮人の覚醒を促し、世界の人々に朝鮮の存在を知らせること ができると判断し、ついに両将軍を殺害することを決意した」とある。 『白凡逸志 』によると、尹奉吉は李奉昌義挙以降、ずっと直接武装闘争の機会をうかがっ ていた。そうするうちに金九に会い、「今は日中間の戦争も終わり、いくら決死の場を望んで もなかなか難しいと嘆き、東京事件のような計画があれば、自分を使ってくれといった」とあ る。金九は「ちょうど君のような人物を探していたので心配ない」といい、 次の計画を立てた ら必ず尹奉吉に任せるとの約束をした。実は当時金九は「東京義挙」以後も、日本の検挙を 避けながら日王の誕生日である天長節記念式が挙行されるという事実を聞いた。祖国のた めにいつでも犠牲になる覚悟ができているという尹奉吉の決意を確認した金九は、やはり第 二の李奉昌のような人物が出現することを期待していたのである。 金九は尹奉吉を数回会って会話を交わすなかで決然とした意志を確認し、韓人愛国団に 加入させることにした。しばらくして金九は日本語新聞である『上海日日新聞』で「4月29日虹 口公園で天長節祝賀式を挙行するので、その日に式場に参例するには水桶1個と弁当、國 旗を一枚ずつを持って入場するように」という記事を読んだ。そして尹奉吉に4月29日の天長 節記念行事式典で義挙を決行するのはどうだろうかと聞いた。すると、尹奉吉は「私はもう 胸中に一點の煩悶さえなくなり、ほっとしています」と快諾した。 それから白凡は上海兵工廠主任として勤務する金弘壹を訪ねて虹口公園で使う爆弾が必 要だと伝える。金弘壹と上海兵工廠の責任者宋式驫に水桶型爆弾と弁当型爆弾を各一個 製造し3日以内に送ってくれるように頼む。白凡の依頼を受け、上海兵工廠では中国人爆 弾製造技術者である王伯修の指導の下で爆弾の雷管20個を実験し、すべて成功するかど うかを確認したうえ、水桶型爆弾と弁当型爆弾に装着した。こうして製作された爆弾は金 弘壹の家に運ばれ、金九はこれを再び2つずつ、フランス租界内に居住する信頼できる同 胞の家に「主人に気づかれないように、貴重な薬だから火だけは用心しなさい」と頼んで隠 しておいた。 尹奉吉は4月29日朝6時、宿泊先を出て金九と朝食を終え、渡された2個の爆弾のなか弁 当型爆弾は風呂敷に包みもち、水桶型爆弾は肩に掛けた。午前7時45分頃虹口公園に到着 して50分頃公園の正門に入り、一般観覧客と一緒に行事を見ながら爆弾を投げる機会を待 っていた。この日、虹口公園の行事には上海居住日本人一万余り、日本の軍人、各国外 交官、武官などが招待され、およそ2万人が参加していた。尹奉吉は、日本の国歌が終わ る11時50分頃、弁当型爆弾を地面に置いて肩に掛けた水桶型爆弾を右手に取って左手で 発火紐を引っ張って取り出した。そして二、三人肩で押しながら約4m前進し、19mの距離 で爆弾を壇上に向かって投げた。爆弾は壇上の真ん中に落ち、轟音を出して爆発し、白川 陸軍大将など日本軍部、政界首脳の7人全員がそのまま倒れた。
60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尹奉吉の思想と韓国独立運動史的な位置(要約) 61 7. 尹奉吉義挙の歴史的位相 尹奉吉は虹口公園義挙後の1932年10月11日、上海に派遣した日本憲兵隊本部で尋問を受 けたが、当時の「聴取書」によると、取り調べを担当した取調官は「君は確かに素養がある」と 感心したという。尹奉吉は学校教育を受けなかったにも関わらず、生来の鋭敏さと弛まぬ努 力で、高いレベルの知識を習得していた。また幼い頃から漢学を学び四書五経に堪能で彼 が書いた漢詩も秀作である。 尹奉吉は1932年4月29日、中国上海で虹口公園義挙を起こし韓国独立運動の流れを変え た。義挙を決行したのは、日本に対抗する反帝国主義の強固な思想があったからである。 尹奉吉の義挙は、日帝侵略者に制裁を加える爆弾投擲の義挙であるが、実際日本帝国 主義の侵略による植民地支配の矛盾を国際的に知らせ、全人類が自由と平等を享受できる 正義の世界を早期に達成するために実行したのである。虹口公園義挙は尹奉吉のような独 立運動家の犠牲に支えられたものであるが、結局独立運動の流れを変え、わが民族の歴史 的発展に大きく貢献したことは厳然たる事実である。 1930年代初頭、韓人愛国団を指導した金九の独立運動方略は、成功的であるといえよ う。当時、韓国独立運動界において始終の念願は日帝との独立戦争を起こすことであっ た。その戦略によると、世界大戦が起こり、必然的に日本と世界列強との戦争になると展望 した。世界戦争、米国と日本、あるいは中国と日本が対戦し、韓国民は日本と対戦した国 とともに、独立戦争を広げることによって日本から勝利を収め独立を勝ち取るということであ る。しかし、第一次世界大戦時にその希望をかけたが、機会をつかむことができず、その 後、米国と日本の間に戦争を予想したが、思う通りに行かなかった。韓国独立運動界は国 際的な戦争が起こる時を待っていたが、戦争は勃発しなかったのである。 そこで、積極的に世界戦争が起こる契機を作り、1931年9月18日満州侵略をきっかけ に、本格的に「日中戦争」が勃発すると期待したが、中国人民と中国政府は日本の侵略を容 認してしまった。そのなかで1932年1月8日、李奉昌を日本の首都東京に派遣し義挙を実行 させ、これを境に日本が中国を侵略する「上海事変」が起きた。しかし、上海事変は日中間 の戦争に拡大されず、中国の一方的な敗北に終わろうとしていた。すると、金九は日本と中 国の間の戦争を拡大させるために、尹奉吉の「虹口公園義挙」を決行させたのである。その 結果、中国政府は本格的に対日抗争に参加するようになった。この義挙こそ、わが独立運 動史のなかで大きな流れを変えた大事件であったのである。 このように尹奉吉の虹口公園義挙は、中国と日本の間の本格的な戦争を拡散させ、韓国 独立運動の機会を得ようとした独立運動の計画の下で行われたものである。その計画の中 で最も重要な役目は、中国上海虹口公園で義挙を成功に完遂し、中国と日本が戦争を繰 り広げるようにするということである。しかし、歴史的にみると、尹奉吉の義挙は日中間の直 接的な戦争を触発してないが、消極的だった中国人民と中国政府が抗日闘争に積極的に乗 り出すようにした起爆剤になったことを評価することができる。
尹奉吉義擧にたいする観観外メディアの反観-観観と観米メディアを中心に- 63 제3 주제 第三主題 윤봉길의거에 대한 국내외 언론의 반응 - 국내와 구미 언론을 중심으로 - 尹奉吉義擧にたいする国内外メディアの反応 - 国内と欧米メディアを中心に - 홍선표(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洪善杓(韓国独立運動史研究所責任研究委員)
윤봉길의거에대한국내외언론의반응-국내와구미언론을중심으로- 6564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1. 머리말 尹奉吉(1908.6.21.∼1932.12.19.) 의거는 한국독립운동사에 있어서 3·1운동만큼이나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 큰 파장과 영향을 미쳤다. 윤봉길 의거는 일본이 만주침략을 단행한 직후 상 해사변까지 일으켜 본격적인 대륙 침략에 돌입하려는 때에 발생해 국제적으로 큰 주목을 받 았다. 1919년 설립 때부터 프랑스 조계에서 활동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윤봉길 의거로 일본군의 탄압을 받아 상해를 떠나 유랑의 시기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이 의거는 중국의 국 민당정부와 국민으로부터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인식을 긍정적으로 전환시키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한국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윤봉길 의거는 1930년대 초 중국 관내 지역 한 국독립운동의 전환점이자 새로운 도약의 발판이었다. 윤봉길 의거에 대한 각국 언론의 반응에 대해선 그동안 중국과 일본의 신문을 중심으로 깊 이 연구 되어 왔다.1 중국과 일본은 윤봉길 의거와 밀접하게 연결된 나라란 점에서 중일 신문 의 분석은 윤 의사 의거의 전모를 이해하는 많은 도움을 준다. 본 글은 기왕에 연구된 중국과 일본의 언론을 제외하고 식민지 조선, 즉, 국내의 언론과 미 1 여기에 대한 연구 성과는 다음과 같다. 김상기, 「윤봉길의 상해의거에 대한 일본 언론의 보도」,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2, 2009. 한시준,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의거에 대한 중국신문의 보도」,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2, 2009. 윤봉길의거에 대한 국내외 언론의 반응 - 국내와 구미 언론을 중심으로 - 홍선표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국과 유럽의 언론 속에 나타난 윤 의사 의거 보도 내용들을 분석해 정리하였다. 이를 통해 관 련국의 입장에 따라 언론들이 윤봉길 의거를 어떻게 바라보고 기술하였는지, 그리고 그것이 가지는 성격과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려 했다. 국내 언론의 경우 민족지인 『동아일보』·『조선일보』·『중앙일보』와 총독부 기관지인 『매 일신보』·『경성일보』로 한정했고 기사 분석은 의거 초기와 중·후기의 시기로 나누어 고찰했 다. 국내 언론의 경우 기사 내용에 따른 구분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민족지와 총독부의 기 관지의 보도 내용을 비교해 고찰했다. 구미 언론의 경우 미국, 영국, 프랑스, 스위스의 외국 인 언론으로 국한했다. 구미 언론에 대한 분석은 제삼자인 외국인의 시각에서 윤봉길 의거와 한국독립운동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윤봉길 의거의 영향 과 파장, 그들의 주된 관심사 등을 분석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본 글에서 분석한 언론 기사의 모든 자료는 매헌윤봉길기념사업회가 2012년 발행한 『매헌윤봉길전집』(제5권 국내 및 구미자 료)에서 나온 것으로 한정했다. 2. 국내 언론의 반응 1) 의거 발발 초기(4.29∼30)의 보도와 반응 국내에서 4월 29일과 30일 윤봉길 의거 초기 상황을 가장 신속히 보도한 신문은 『동아일보』 와 『경성일보』이다.2 두 신문은 1932년 4월 29일과 30일 양일간 「호외」를 발행하며 윤봉길 의거를 ‘상해폭탄사건’이라 부르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호외」라는 특성 때문에 주로 사실 관계 위주로 보도하여 기사 내용이 서로 유사한 편이지만 약간의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동아일보』는 4월 29일자 「호외」에서 “白川사령관과 重光공사에게 수류탄을 투척”이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상해29일발 전통지급보] 본일 오전 11시 반 신공원에서 천장절축하식 「국가」 합창 중 돌연 식대상 2 『조선일보』의 경우 해당 일자(4.29, 4.30)에 신문이나 「호외」에서 윤봉길 의거를 보도를 한 것으로 보이나 현재까지 당일 신문 자료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동아 ·경성 두 신문만 가지고 논한다.
윤봉길의거에대한국내외언론의반응-국내와구미언론을중심으로- 6766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의 重光 공사 급 白川 군사령 등을 목표하고 수류탄을 투한 자가 있었다. 백천 대장은 안면에 , 중광 공사는 부상한 곳이 어딘지 불명하나 혼○하게 공히 중상을 負하고 식장은 대혼란에 陷하였다. 이어서 상해 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과 주중공사 시게미쓰 마모루 (重光葵)의 부상 외에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요시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과 상해총영사 무라 이(村井), 상해 일본인거류민단장(행정위원장) 가와바타 사다쓰구(河端貞次)도 부상했다는 사실 을 알렸고 그 가운데 시게미쓰 공사가 가장 심한 중상을 입었다고 했다. 상해의 북사천로에서 新공원 일대에 임시계엄령이 발표되었고 범인 공범에 대한 수색에 나섰다고 했다. 범인 1명을 체포한 사실을 보도하면서 이를 ‘조선인’이라 밝혔다. 『동아일보』는 4월 29일자 첫 「호외」의 기사를 오후 ○시 40분 받은 것임을 명시했다. 이것 은 의거 발발 직후 상해 내 통신원과 직접 교류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동아일보』의 두 번째 「호외」는 처음과 같은 4월 29일에 또 다시 발행되었다. 두 번째 「호 외」 1면에는 “상해폭탄사건속보” 라는 제목으로 현행범으로 잡힌 ‘조선인 윤봉길’이란 이름 을 처음으로 밝혔다. 즉, 폭탄 현행 범인은 조선인 윤봉길(25세)로 판명되었고 조선공산당원 또는 국제공산당원이라 하며 신분은 현재 취조중인데 연루자로 27명을 체포했다고 했다. 그 가운데 2명은 폭발 현장에서 체포한 것이라 했다. 상해 일본 헌병대에 따르면 범인 피의자 2 명을 체포했는데 한 명은 신사복에 부연 빛의 스프링코트를 입고 식대상의 바로 뒤에서 두 사람의 범인이 각 1개씩 2개의 폭탄을 투척했고 범인을 체포할 때 부근에 있던 전등상자에서 또 다른 한 개의 폭탄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리고 범인 1명은 폭탄 파편으로 중상을 입었다 고 전했다. 「호외」는 폭탄 범인으로 조선인 외에 중국인, 러시아인 등 8명이 헌병대에 체포 되었음을 알렸다. 『동아일보』 4월 29일자 두 번째 「호외」 2면에는 상해 군사령관의 발표 내용을 상세히 보 도했다. 시라카와 사령관, 노무라 해군제독, 시게미쓰 주중공사, 우에다 제9사단 사령관, 무 라이 총영사 그밖에 중앙석에 앉은 來賓들의 부상 소식을 알렸다. 그 중에 중상을 입은 시라 카와와 무라이는 福民병원에 입원 중이라 했다. 『동아일보』는 4월 29일에 이어 4월 30일에도 「호외」를 발행했다. 「호외」 1면에 “상해축하 식장에 일 청년이 돌연 투척”과 “폭탄 현행범인 조선인으로 판명”이란 제목으로 4월 29일자 「호외」 내용을 반복 게재했다. 「호외」 2면에는 “국제공산당원? ○○○○의 일파?”라는 제목 으로 보도했는데 4월 29일자 「호외」 내용의 반복이다. 그리고 “수류탄사건의 파동”이란 제 목으로 중일 간의 정전교섭이 무기 연기될 것이라는 전망과 이번 사건과 별개로 정전협정이 추진될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보도했다. 제네바의 국제연맹측은 이번 사건은 일본군 주둔지 에서 조선인에 의해 발생한 것이므로 중국측에 그 책임을 지울 수 없다는 반응을 전했다. 『동아일보』는 29일과 30일 이틀간에 걸쳐 세 번의 「호외」를 발행했다. 사실 5월 1일자 「호 외」를 포함하면 총 네 번이 된다. 「호외」 발행을 통해 『동아일보」가 즉각 알리고 싶었던 것 은 윤봉길 의거로 부상당한 일본인의 근황이 아니라 ‘조선인 윤봉길’의 의거 성공 소식이었 을 것이다. 때문에 『동아일보』는 「호외」 머리 기사에서 ‘조선인 윤봉길’을 크게 부각시키고 그 내용을 최대한 상세하게 보도하려 했다. 윤봉길 의거가 국제사회에 미칠 영향을 생각해 국제연맹의 반응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다만 윤봉길 의거에 대한 주관적인 견해를 담은 논평 은 단 한 줄도 없다. 이것은 「호외」라는 특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국내 언론을 감시하고 통 제하는 총독부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의 기사에도 윤봉길 의거에 대한 논평 부분은 『동아일보』는 물론 여타의 다른 국내 언론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로 일문으로 발행되는 『경성일보』는 윤봉길 의거 소식을 듣고 4월 29 일 즉각 「호외」를 발행했다. “백천대장 중광공사 던진 폭탄을 맞고 모두 중상을 입음, 상해 천장절 축하식장에서”라는 제목으로 시라카와 사령관과 시게미쓰 공사가 부상당한 사실을 집중 보도하고 그들의 얼굴 사진을 게재했다. 두 사람 외 노무라와 우에다 사령관, 무라이 총 영사, 가와바타 상해거류민단장도 부상당했다고 했다. 범인인 듯한 자가 군중에게 몰매를 맞 고 체포되어 헌병대로 인도되었고 상해에는 임시계엄령이 선포되었다고 했다. 상해 군사령부 의 발표에 의거 ○○인[조선인] 외 중국인, 러시아인 등 범인으로 7명이 체포되었고 그 가운 데 폭탄 범인은 ○○인[조선인] ○○○(25세)이며 신원 및 연루자는 현재 조사 중이라 했다. 『경성일보』의 첫 「호외」는 부상당한 일본인과 그들의 부상 정도에 대해 집중하였다. 범인 으로 판명된 사람은 ‘조선인’ ‘윤봉길’로 인쇄했다가 삭제해서 발행했다. 『경성일보』는 4월 30일 “상해의 폭탄사건”이란 제목으로 두 번째 「호외」를 발행했다. 첫 번째 「호외」에 비해 폭탄 폭발상황과 일본인 부상 정도를 상세히 보도하였고 일본 외무장관, 주중 영국 공사, 리튼조사단 등에서 유감을 표명한 사실을 게재했다. 윤봉길 의거의 초기 상황에 대해 두 신문은 모두 「호외」를 발행해 속보로 알렸으나 조금 다른 보도 성향을 보였다. 『동아일보』는 폭탄 투척으로 일어난 일본인의 부상 소식을 신속하 게 알렸으나 그에 못지않게 ‘조선인 윤봉길’의 의거를 조심스럽게 부각시키는 것에도 중점을 두었다. 반면 『경성일보』는 ‘조선인 윤봉길’에 대한 보도를 애써 지우려 하면서 대신 폭탄 폭
윤봉길의거에대한국내외언론의반응-국내와구미언론을중심으로- 6968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발 상황과 일본인 부상자의 피해 사실, 그리고 이번 사건에 대한 국제사회의 동정에 보다 무 게를 두고 보도하였다. 2) 중·후기 시기(5.1∼12.21)의 보도와 반응 국내 언론은 의거 발발 초기(4.29∼30) 「호외」로 속보를 전한 이후인 5월 1일부터 윤 의사 순 국(12.19) 때까지 윤봉길 의거를 지속적으로 보도하였다. 그 가운데 5월 1일부터 8일까지와 5월 9일부터 순국 직후인 12월 21일까지를 편의상 두 시기로 나누어 전자를 중기로, 후자를 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 중기 기간 국내 언론은 초기 때와 마찬가지로 윤봉길 의거에 대해 집 중적으로 보도했다. 5월 8일을 기점으로 전후를 구분한 것은 일본 육군성이 5월 6일 언론 통 제를 풀고 홍구공원 폭탄투척사건의 전모를 밝힌 것을 이 때 보도한 때문이다. 5월 8일을 기 점으로 그 이후부터 윤 의사 순국 때까지 즉, 후기에 들어서면 윤봉길 의거에 대한 보도 분량 은 급격히 줄어든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5월 1일부터 8일까지 윤 의사의 의거 직후 일어난 상해의 근 황에 대해 집중 보도했다. 5월 1일 『동아일보』는 네 번째 「호외」를 발행했다. 제네바의 국제 연맹 총회가 19개국위원회가 제안한 결의안을 일본 대표의 기권 속에 만장일치로 통과시켰 다는 사실을 속보로 알렸다.3 윤봉길 의거에도 불구하고 상해의 정전협상은 계속 될 것이라 는 점을 알린 「호외」였다. 『동아일보』는 같은 날짜의 본 신문에서 윤봉길 의거로 한국인을 비롯해 미국인, 중국인, 러시아인 등 24∼25명이 체포되었고 상해 교민단장 李裕弼의 집에서 안창호가 체포된 사실 을 크게 보도했다.4 『조선일보』는 5월 1일 “폭탄사건의 波紋”이란 제목으로 거의 전체면을 기사화 했다. 윤봉길이 거사의 주역이라는 사실도 알렸으나 대부분 국제연맹을 비롯해 각 방 면의 반응과 일본인의 부상 근황에 대한 기사 위주로 보도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거사의 주역인 ‘조선 청년’ 윤봉길에 대한 사진을 게재하였다. 5월 3일자 『동아일보』는 처음으로 윤봉길과 그의 가족사진을 게재했고 윤봉길이 체포되는 3 『동아일보』, 1932년 5월 1일, 「호외」:“19개국 결의안 연맹총회 통과”. 4 『동아일보』, 1932년 5월 1일, 「상해폭탄사건 속보」. 안창호 체포 사실에 대해 『조선일보』는 5월 7일자에 보도했다. 사진은 5월 4일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나란히 실었다. 그런데 『동아일보』의 윤봉길 체포 장면 사진은 도쿄와 오사카에 발행된 『朝日新聞』의 왼쪽 얼굴 모습이고 『조선일보』의 것은 『東京日日新聞』에 게재된 윤 의사의 오른쪽 얼굴이 찍힌 사진이다. 5월 7일자 『동아일보』는 윤봉길과 그의 가족, 그가 살던 집 사진과 함께 윤봉길과 그의 가 족 근황을 자세히 보도했다. 대신 부상당한 시게미쓰 주중공사의 부상 근황에 대해선 아주 짧게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같은 날짜에 윤봉길의 생애와 독립운동의 이력을 간단히 정리 해 알렸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부상 근황에 대해선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5월 6일 일본 육군성이 언론 통제를 풀고 홍구공원 폭탄투척사건의 전모를 밝히자 이를 토 대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5월 8일자에 상해의 한국독립운동 근황을 상세히 보도했 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상해수류탄사건 詳報”와 “상해폭탄사건 續聞”이란 제목으 로 윤봉길의 배후 인물로 지목된 이유필과 ‘假政府(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령 김구와 부수령 격인 조소앙, 배후 세력으로 조선공산당과 중국항일구국회 또는 19로군의 비호 세력을 집중 보도했다. 그러면서 일본군 당국은 그러한 배후 세력에 대한 물증을 아직까지 확보하지 못한 것 같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윤봉길과 윤봉길 의거에 대한 소식을 총독부의 검열과 통제 때문에 마음대로 기술하지 못했지만 연속해서 보도했다. 이는 이렇게 함으로써 윤봉길 의거 가 한국 독립을 위한 일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이나마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5월 8일 이후부터 윤 의사 순국 때까지 동아·조선의 두 신문과 『중앙일보』는 단발성으로 윤 의사의 근황을 보도했다. 주요 보도 내용을 보면 체포된 안창호의 국내 압송(『동아일보」 5 월 23일자), 윤봉길에 대한 군법회의 개정(『동아일보』·『조선일보』 5월 27일자), 윤봉길의 일본 호 송(『동아일보』 11월 21일자), 윤봉길의 사형 집행(『동아일보』 11월 22일자, 12월 20일자;『조선일 보』·『중앙일보』 12월 21일자) 등이다. 5월 9일 김구가 상해에서 「虹口公園炸彈案의 眞相」을 발표했다는 기사는 국내 언론 어디 에도 실리지 않았다. 총독부의 언론 통제 때문으로 보인다. 대신 근 두 달이 지나 『조선일보』 는 5월 27일자에 「상해 폭탄범 윤봉길 군법회의 遂開廷」이란 제목으로 그 내용과 거사 직전 의 윤 의사 사진을 게재했다. 가슴에 「선서문」을 붙이고 태극기를 배경으로 왼손에는 수류 탄, 오른손에는 권총을 든 윤 의사의 인물 사진을 3단으로 크게 실었다. 이같은 사진과 기사 는 국내 언론에서는 처음 보도된 것으로 중국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한국독립운동의 실 상을 국내 한인들에게 알리는데 좋은 선전 효과를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윤봉길의거에대한국내외언론의반응-국내와구미언론을중심으로- 7170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조선총독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매일신보』와 『경성일보』는 윤봉길 의거를 5월 1일부터 8 일까지 휴간일을 제외하고 거의 매일 보도했다. 기사의 주 관심과 내용은 일본인의 피해상황 과 정전협정의 진행 상황이었다. 5월 6일 오후 3시 일본 육군성이 사건 전모를 공개 발표한 직후인 5월 8일자 『매일신보』 와 『경성일보』는 처음으로 상해 지역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의 면모를 상세히 보도했다. 윤 봉길을 비롯해 용의자 12명을 체포한 사실을 비롯해 안창호, 이춘산[이유필], 김구, 조소앙 등 한국독립운동가의 항일활동 내력을 집중 보도했다. 이같은 보도는 일본측의 본래 의도 와 달리 오히려 중국 내 한국독립운동의 현황을 국내 한인들에게 알리는 효과를 낳았을 것 으로 보인다. 홍구공원 폭탄투척사건을 둘러싸고 국내 언론은 많은 기사를 쏟아 냈으나 주로 관련 사실 에 대한 보도에 집중하였다. 이런 가운데 『경성일보』는 상해 주재 ‘KS生’이라는 모 일본인의 기고문 실었다. 이 기고문은 당시 상해 지역 일본인들의 심정을 담은 글인데 윤봉길 의거 상 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좋은 사례이다. 주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상해에서 이전에 없던 육군 대관병식이 위풍당당하게 거행되고 마침내 축하회 식전이 열려 기미가 요 제창이 끝나는 순간, 한 명의 흉한이 던진 폭탄으로 시라카와 상해 파견 사령관 …… 일곱 명이 남김없이 중경상을 입고 쓰러졌다. 탄편 사백 수십 개가 박힌 가와바타 행정위원장은 다음날 안타 깝게도 서거했다. 너무나도 큰 참사이다. 그리고 너무나도 큰 희생이다. 육해군도 거류민도 극도의 ○○와 분개와 통한으로 온 몸에 피가 끓어올랐다. “또 다시 전쟁이다. 철저하게 복수하라” 라는 소 리는 거류민뿐만 아니라 육해군 장병까지도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정전회의인지 개똥인지 필요 없 다. 전쟁이다 전쟁.”5 필자의 표현에 따르면 민간인이든 군인이든 상해 내 일본인들은 윤봉길 의거를 ‘대참사’로 생각하고 극도로 분개하고 통한해 했다. 그리고 이 일의 배후를 중국인으로 보고 상해의 일 본인들은 중국과 계속 전쟁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후에 밝혀진 대로 범인으로 지목된 자는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었다. 이런 사정 을 모른 일본인 필자는 폭탄사건과 별개로 일본 정부가 중국과 정전교섭을 추진해 최종 타결 5 『경성일보』 1932년 5월 11일, 「宙に迷った爆彈事件の行方(上)」. 까지 간 것을 매우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이번 폭탄사건을 단순한 테러의 광란으로 보 고 폭탄사건과 정전교섭을 분리해 대응하는 일본 정부의 태도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6 상해 거주 한 일본인의 기고문이 전체 일본인을 다 다변할 수 없겠지만 윤봉길 의거가 정 전협정을 타결하려는 일본 정부와 일본 군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듯이 ‘대참사’라고 표현할 정도로 전체 일본인의 심리에도 매우 충격적이고 극도의 분노를 자아냈음은 분명하다. 이는 그만큼 윤봉길 의거가 일본 사회에 미친 파장이 컸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5월 27일부터 윤 의사 순국 때까지 『매일신보』와 『경성일보』는 일본인 부상자의 근황과 귀국, 윤봉길의 일본 호송과 사형 집행을 중심으로 간간히 보도했다. 국내 언론 중 조선총독부의 입장을 대변한 『매일신보』와 『경성일보』는 윤봉길 의거를 발 발 초기부터 순국 때까지 보도하였으나 두 신문의 성격상 철저히 일본과 일본인의 입장을 대 변하는데 주력하였다. 윤봉길과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상을 보도한 기사는 5월 8일자 기사로 한정할 만큼 미미했다. 그런 면에서 비교할 때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보도는 일 제의 억압적인 식민통치 상황에서도 윤봉길 의거와 의거를 둘러싼 한국독립운동의 상황을 지속적이고 구체적으로 알리는데 힘을 다했다. 3. 구미 언론의 반응 1) 윤봉길 의거에 대한 보도 분량과 기간 상해 윤봉길 의거 발생 소식을 접한 미국 언론은 거의 대부분 4월 29일자 1면에 신속히 보도 하였다. 미국은 상해 보다 15∼18시간 늦은 시차를 감안할 때 미국 일간지로선 즉각 보도한 셈이다. 4월 30일 또는 5월 1일까지 보도한 경우가 많은데 그 이상으로 보도한 신문은 5월 10일자 The New York Times 와 5월 9일자 Honolulu Star-Bulletin이다. 두 신문이 늦게 까지 보도한 것은 5월 9일 김구가 「홍구공원작탄안의 진상」이란 제목으로 작성한 영문 서한 을 상해 내 주요 기관과 각 언론에 배포한 것을 알고 게재한 때문이다. 윤봉길 의거 소식과 관련해 가장 많은 보도를 한 곳은 『뉴욕 타임즈』 였다. 『뉴욕 타임즈』 6 『경성일보』, 1932년 5월 12일, 「宙に迷った爆彈事件の行方(下)」.
윤봉길의거에대한국내외언론의반응-국내와구미언론을중심으로- 7372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는 4월 29일부터 총 5번이나 보도했다.7 윤봉길의 폭탄투척 의거 상황을 다섯 차례나 연속 보도한 것은 미국 내 다른 어떤 언론보다 많은 분량이었다. 그만큼 이번 상해 사건에 관심을 갖고 상세히 보도하였다. 유럽의 경우 시차가 상해 시간보다 빠르기 때문에 사건 발생 즉시 보도한 날짜가 4월 30 일부터다. 영국과 프랑스의 언론 경우 4월 30일 1면에 집중 보도하고 있고 그 외 5월 1일 과 5월 2일에서 한 두 차례 더 보도하였다. 이들 언론 가운데 가장 많이 보도한 곳은 영국 언 론 『더 타임즈(The Times)』이다. 총 여섯 차례나 보도했다.8 상해 사건을 가장 늦게까지 보 도한 신문은 영국의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Illustrated London News)』인데 상해 사 건 관련 사진 5장과 함께 5월 28일에도 보도했다. 영국 언론 『데일리 텔레그라프(The Daily Telegraph)』는 4월 30일과 5월 2일 두 차례에 불과하지만 4월 30일자 신문에서 거의 신문 전 체를 상해 사건으로 도배할 정도로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프랑스 언론의 경우 1면 전면을 거 의 다 사용할 정도로 집중 보도하였지만 대체로 5월 1일까지 한 차례 더 보도하는 정도였다.9 제네바에 국제연맹 본부를 두고 있던 스위스 언론은 상해 사건에 깊은 관심을 갖고 집중 보 도하였다. 『르 주르날 주네브(Le Journal de Geneve)』은 총 일곱(4.30, 5.1, 5.2, 5.3, 5.4, 5.5, 5.7) 번이나 보도하였고, 『라 스위스(La Suisse)』는 다섯(4.30, 5.1, 5.3, 5.4, 5.6) 번이나 보도했다. 그런데 이들 스위스 언론은 상해 폭탄투척사건에 대한 관심보다 이것이 당시 국제연맹에서 추진하고 있는 중일 간의 정전협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에 대한 분석과 전망에 주력하였다. 2) 윤봉길 의거와 ‘윤봉길’에 대한 기술 윤봉길 의거에 대해 미국 언론은 주로 ‘상해 폭탄 투척사건’ 또는 ‘상해 폭탄사건’으로 표현했 고 윤봉길에 대해선 ‘폭탄 투척자’ 또는 ‘폭탄 투척범’으로 불렀다. 미국 언론 어느 곳에서도 윤봉길을 ‘테러리스트’ 라든가 윤봉길 의거를 ‘테러’라고 명명하지 않았다. 간혹 일본측 시각 에서 ‘테러’ 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아주 특별한 경우였다. 예컨대 『시카고 데일리 트 리뷴(The Chicago Daily Tribune)』은 5월 1일자 기사에서 ‘테러당’ 이란 말을 썼는데 이는 일 7 『뉴욕 타임즈』는 4월 29일을 시작으로 4월 30일, 5월 1일, 5월 3일, 5월 10일에 보도했다. 8 『더 타임즈』는 4.30, 5.2, 5.4, 5.6, 5.24, 5.26 총 여섯 번 보도했다. 9 프랑스 언론 중 『르 주르날 데 데바(Le Journal des debats)』는 드물게 세 차례(4.30, 5.1, 5.2)나 보도했다. 본측에서 한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10 유럽 언론 가운데 영국 언론은 ‘상해 만행’이나 ‘상해 폭탄 만행’,11 또는 ‘상해의 잔인한 폭 거’, ‘상해 폭거’12 등으로 표현했다. 특히 『데일리 텔레그라프(The Daily Telegraph)』는 윤봉길 의거를 ‘반 평화 범죄’로 간주하고 아래와 같이 평가했다. 우리 시대에 1914년 퍼디난드(F. Ferdinand) 대공 암살을 제외하고는 어제 상해에서 발생한 잔학 행위 만큼 참담한 가능성을 내포한 정치적 폭력행위는 없었다.13 그밖에 영국 언론 중 『데일리 익스프레스(he Daily Express)』는 ‘사악한 범죄’로 표현하기도 했다.14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Illustrated London News)』는 윤봉길을 ‘암살자’로 표현 했다.15 프랑스와 스위스 언론은 대부분 윤봉길 의거를 ‘테러’로 규정하였고 윤봉길 의사를 ‘테러리 스트’로 보도해 미국 언론과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구미 언론 가운데 의거의 주역인 윤봉길의 이름을 제대로 보도한 곳은 『샌프란시스 코 크로니클(San Francisco Chronicle)』 뿐이다. 이 신문에서 정확히 ‘윤봉길’이라고 언급 했다.16 대체로 폭탄 투척자의 나이와 국적을 표기할 때 25세의 ‘한국인’임을 밝혔다. 그 런데 그 이름에 대해선 ‘김풍기(Kim Fung-kee)’17, ‘인기수’18, ‘이노키츠(Yinhokitsu)’19, ‘인 10 The Chicago Daily Tribune은 5월 1일자 기사 제목에 “12 Coreans Held by Japan in Hunt for Terror Ring” 이란 표현을 썼다. 11 영국 언론 The Times(4.30;5.2), The Manchester Guardian(4.30), The Irish Times(4.30) 기사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12 영국 언론 Sunday Times(5.1)와 The Overseas(5.1)가 이렇게 표현했다. 13 “A Crime Against Peace”, The Daily Telegraph, April 30, 1932. 14 “Japan`s Chance”, The Daily Express, April 30, 1932. 15 “The Boming of Japanese Leaders at Shanghai:Moments Before and After the Outrage”, Illustrated London News, May 28, 1932. 16 “Shanghai Bomb Victim Expires”, San Francisco Chronicle, April 30, 1932. 17 “One Dies in Shanghai:Peace Talks Halt”, The New York Times, April 30, 1932;“Japan:Birthday Surprise”, Time, May 9, 1932. 18 “Peace Hope Set Back”, The Los Angeles Times, April 30, 1932. 19 “L’enquȇte L`attentat de Changhai”, Le journal des debats, May 1, 1932.
윤봉길의거에대한국내외언론의반응-국내와구미언론을중심으로- 7574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층기(Yinstsuengkee)’20, ‘인췡기(Yintsuengkee)’21, ‘인코히쯔(Yinkohitsu)’22, ‘지우호키츠 (Jiuhokitsu)’23, ‘지노키츠(Jinokits)’24 등으로 기술했다.25 그렇지 않은 신문은 이러한 이름조차 명기하지 않고 보도했다. 구미 언론은 윤봉길의 신상에 대해 짤막하게 소개했다. 미국 언론 가운데 『뉴욕 타임즈』는 4월 3일자에 윤봉길을 프랑스 조계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련 있는 인물이라 했다. 그리고 최근 산동성 청진에서 상해로 와 세탁소에서 일한 적 있으며 만주에서 온 한국혁명단 원이자 중국 혁명단체의 일원이라고 소개했다. 『로스엔젤레스 타임즈』(4.30)와 『워싱턴 포스 트』(4.30)는 만주에서 온 중한혁명당원 또는 만주에서 온 한국인 혁명가라 했다. 프랑스 언론 가운데 「루에스테 크레르(L`Ouest Eclair)』(4.30)와 『르 마탱(Le Matin)』(4.30) 은 윤봉길을 한국 독립을 위한 단체의 일원이라 기술했다. 『르 주르날 데 데바(Le journal des debats)』(5.1)는 중한협회에 관련되어 있는 중국 광동 출신 정치인의 비서로 활동했고 지난 1 월 8일 일황에게 폭탄을 던진 범인 중 한 사람으로 추정했다. 『르 피가로(Le Figaro)』(4.30)는 러시아 과격주의의 영향을 받은 한국인 혁명단체 소속의 인물로 소개했고, 『르 프티 주르날 (Le Petti Journal)』(4.30)은 대한독립군의 일원이고 8개월 전 만주에서 상해로 와서 중국인 세 탁소에 일했고 광동 출신 정치인의 비서였다고도 했다. 영국 언론 중 『더 타임즈』(4.30)는 혁명성과 공산주의 경향이 짙은 한국독립당의 현지 지부 에 소속된 인물로 보았다. 『더 데일리 텔레그라프』는 일본 군당국의 발표를 인용해 8개월 전 만주에서 상해로 왔으며 프랑스 조계의 한 중국인 세탁소에서 8개월 간 일한 적 있다고 했 다.26 이어서 일본측 보도를 인용해 그는 소위 중한협회라는 조직의 지도자이며 저명한 광동 정치가의 비서의 친구라고 했다. 20 “Une bombe est lancée contre l’éta-major japonais á Shanghai”, Le echo de paris, April 30, 1932;“Un Attentat Anti-Japonais est Commis a Changhai”, L`Ouest Eclair, April 30, 1932. 21 “A Changhai:Un attentat contre les Japonais”, Le Figaro, April 30, 1932. 22 “Terror Grips Huge Crowd”, The Daily Telegraph, April 30, 1932. 23 “Un attentat á Shangaï”, La Suisse, April 30, 1932. 24 “L’attentat de Shanghai On découvre une nouvelle bombe Le meurtrier”, Le Journal de Geneve, May 1, 1932. 25 25세 한국인 ‘이노키츠’, 또는 ‘인층기’ 두 가지로 기술한 곳은 『르 마탱』이다.(“L′attentat de Changhai ne compromettrait pas les pourparlers de paix entre le Japan et la Chine”, Le Matin, April 30, 1932) 26 “Second Bomb Found was Korean in League with Other?”, The Daily Telegraph, April 30, 1932. 이렇게 보면 구미의 언론은 폭탄을 투척한 윤봉길은 한국인이고 한국 혁명, 즉 한국 독립 과 관련된 인물이라는 점을 알았다. 하지만 한국인 윤봉길이 거사를 단행하게 된 동기와 목 적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선 아무 언론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김구의 진상 발표 사실을 보도한 『뉴욕 타임즈』(5.9.)와 『호놀룰루 스타불리틴』(5.9.)에서 한국인의 입장을 일부 보도한 것 외에 구미의 언론은 한결같이 그 동기와 목적에 대해 침묵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했 다. 의거를 일으킨 윤봉길의 체포 과정에 대해 구미 언론들은 폭탄 폭발 직후 군중들이 폭탄 투척범을 붙잡아 마구잡이로 구타하였고 그런 중에 일본군이 그를 체포했다고 보도했다.27 일본 군인들이 윤봉길을 체포하여 심하게 구타했다고 기술한 곳은 영국 언론 4월 30일자 『더 타임즈』와 의거 발생이 한참 지난 5월 28일자 영국 언론 『일러스트레이트 런던 뉴스』다. 여 기서 군중이란 행사장에 참여한 일본 군인과 일반 시민들을 다 포함한다고 볼 때 의거 직후 윤봉길은 일본 군인과 일반 시민이 합세한 군중들에 의해 붙잡혀 한동안 거의 실신될 정도로 심하게 구타당했고 그런 중에 일본군 당국의 개입으로 체포돼 이송된 것으로 보인다. 윤봉길의 두 번째 폭탄 발견을 두고 구미 언론은 서로 달리 보도하였다. 많은 신문들은 연 단 주변에서 폭발하지 않은 나머지 1개를 발견했다고 보도했다.28 그런데 몇 신문은 윤봉길 의 옷 속에서 터뜨리지 않은 폭탄 1개를 발견했다고 보도했다.29 이렇게 볼 때 아마 던지지 못한 폭탄 1개는 윤 의사가 옷 속에 갖고 있었지만 의거 직후 군중들에게 붙잡혀 구타당하는 과정에서 나머지 폭탄이 연단 근처로 흘러들어간 것이 아닌지 추측된다. 구미 언론은 체포될 때 윤봉길 의사의 모습에 대해 거의 보도하지 않았는데 일부 매체에서 만 소략하게 언급하는 수준이었다. 프랑스 언론 『르 프티 파리지앵(Le Petti Parisien)』은 “그 는 키가 크고 말랐으며 밝은 회색 옷을 입고 있었으며 중국인보다는 일본인에 가까운 모습이 27 미국 언론 중 『뉴욕 타임즈』(4.29), 『시카고 데일리 뉴스』(4.29), 『뉴욕 헤럴드 트리뷴』(4.29), 『워싱턴 포스 터』(4.29), 『로스엔젤레스 익제미너』(4.29), 「호놀룰루 애드버타이즈』(4.29), 『호놀룰루 스타불리틴』(4.29), 『타임』(5.9), 프랑스 언론 중 『뤼마니테(Humanite)』(4.30), 『르 마탱(Le Matin)』(4.30), 『르 프티 파리지앵 (Le Petti Parisien)』(4.30), 『르 피가로(Le Figaro)』(4.30), 영국 언론 중 『데일리 미러』(4.30), 『데일리 텔레그 래프』(4.30)에서 이렇게 보도했다. 28 미국의 『뉴욕 타임즈』(4.30), 영국의 『더 타임즈』(4.30), 『일러스트레이트 런던 뉴스』(5.28), 『데일리 텔레그 라프』(4.30), 프랑스의 『르 프티 주르날(Le Petti Journal)』(4.30), 『레코드 파리(Le echo de paris)』(4.30), 『르 마탱(Le Matin)』(4.30)에서 이렇게 보도했다. 29 이러한 보도는 프랑스 언론 『뤼마니테(Humanite)』(4.30), 「루에스테 크레르(L`Ouest Eclair)』(4.30)이다.
윤봉길의거에대한국내외언론의반응-국내와구미언론을중심으로- 7776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었다. 그의 얼굴은 피로 덮혀 있었고 사건 공범자 중 한 명으로 추정된다”30고 했다. 『뉴욕 타 임즈』는 “그는 상처를 입고 피를 흘렸지만 부상당한 관리들이 응급치료를 위해 병원으로 후 송되는 동안 웃으면서 반항의 기색을 보였다”31고 했다. 이로 보면 윤 의사는 체포될 때 많은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고 있었으나 당당하고 의젓한 모습이었다. 3) 한국인과 한국 독립문제에 대한 인식과 보도 상해 폭탄 투척 사건을 언급하면서 미국 언론 중에는 한인들에 대한 동정 기사를 심심치 않 게 보도하였다. 먼저 『뉴욕 타임즈』는 4월 29일과 30일 기사에서 일본인 고위 관리의 부상 소식을 많이 전하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 한인들의 체포와 수색 그리고 탄압에 대해서도 적지 않게 보도하였다. 예컨대 5월 1일자 1면에 일본 비밀 경찰은 일본에 항거에 혁명활동을 전개 했다는 혐의로 한국인 가택을 수색해 많은 한국인들을 체포했다고 했다.32 이로 인해 한국인 거류지에 불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다수의 한국인들이 떠나거나 일부 한국인들은 학대를 받 았다고 했다. 「뉴욕 타임즈』는 겉으로는 부상당한 일본인들의 입장을 동정해 주면서도 다른 한편 식민지 한국인들의 처지도 은연중에 이해하려는 조심스런 보도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뉴욕 타임즈』는 5월 10일 자체 특약 기사로 홍구공원에서 일어난 폭탄 사건처럼 중국에 있는 일본 관리들을 처단하겠다는 협박이 오늘 한국인 거류지역에서 나왔다고 했다.33 이것 은 김구의 진상 발표 내용을 보도한 기사다. 『뉴욕 타임즈』는 김구는 발표한 성명서에서 한 인애국단 단장임을 밝히고 홍구공원 폭탄사건의 배후 조정자라고 했다. 이러한 기사는 『뉴 욕 타임즈』가 처음으로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보인 기사였다. 『호놀룰루 스타 불리틴(Honolulu Star-Bulletin)』은 5월 9일자에 한인애국단 수령이 일본에 대한 추가 공격을 언명했다는 내용으로 김구의 성명서 내용을 전했다. 요컨대 한인애국단 단 장 김구는 홍구공원 폭탄투척을 자신이 지시하였고 윤봉길은 그 목적을 달성했다고 보도했 다. 체포된 이후 윤봉길의 생사 여부에 대해선 모르나 한인애국단은 일본의 정부와 군사 지 30 “Un Terrible Attentat Anti Japonais a Changhaï”, Le Petti Parisien, April 30, 1932. 31 “Shanghai Bombing Halts Peace Talks”, The New York Times, April 30, 1932. 32 “Japanese Seize Koreans”, The New York Times, May 2, 1932. 33 “Our Consulate Fired By Bomb in Nagasaki”, The New York Times, May 10, 1932. 도자들을 살해할 것이고 홍구공원 폭탄사건과 비슷한 사건들이 일본인과 만주인을 상대로 곧 일어날 것이라고 전했다.34 이처럼 김구가 폭탄투척사건의 배후 조정자였다고 밝힌 것은 『뉴욕 타임즈』와 Honolulu Star-Bulletin을 제외한 여타의 다른 구미 언론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특별한 보도이다.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The Chicago Daily Tribune)』은 상해 폭탄투척사건은 그동안 중국 인에게 향했던 일본인들의 적개심이 갑자기 상해의 한국인으로 옮기게 했다고 하면서 한인 들에 대한 동정 기사를 실었다.35 수색을 피한 한인들은 대부분 미국인 또는 영국인의 집으로 피신했고 미국 선교사들의 경우 “일본인에 의한 학대를 피하기 위해” 많은 한국인 기독교인 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고 했다. 상해 거주 미국 여성 선교사의 말을 빌어 일본인 형사들 은 한국인들의 은신처를 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국인 여성을 폭행했다고 전했다. 이같은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의 기사는 구미의 다른 언론들과 비교할 때 한인들의 체포와 피신, 그리고 학대 문제에 보다 많은 관심을 보인 특별한 보도였다. 『호놀룰루 스타 불리틴(Honolulu Star-Bulletin)』은 5월 3일자에 윤봉길 의거에 대한 미주 한인들의 반응을 처음으로 보도했다. 이 신문은 호놀룰루의 대한인교민단이 베이징 주재 프 랑스공사관과 상해 주재 프랑스 총영사에게 청원서를 보내 윤봉길 의거로 인해 체포된 20여 명의 무고한 한인들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전했다.36 이같은 기사는 구미의 외국인 언 론 중에 윤봉길 의거 이후 해외 한인들의 대응을 보도한 첫 번째 사례다. 미국 언론의 보도는 식민 통치를 받고 있는 한국인들에 대한 동정 기사로 볼만하지만 식민 지 한국의 독립 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 나온 것으로 보기 어렵다. 식민지 한국인들의 사 정을 공감하고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한 흔적을 보인 곳은 영국 언론 『맨체스터 가디언(The Manchester Guardian)』이다. 이 신문은 다음과 같이 한국인의 처지를 설명했다. 반일 감정은 수세기 동안 한국에 존재했으며 이따금 혁명 행위로 나타났다. 일본은 현재 만주를 지 배하기 위해 매우 성공적으로 구사하고 있는 것과 같은 수단으로 조선 통치권을 장악했으나 경제 적, 행정적 혜택을 한국인에게 주지 않았다. 한국인은 지금도 불만을 품고 있으며 만주의 현 사태가 34 “Korean Claims He Instigated Hongkew Bomb”, Honolulu Star-Bulletins, May 9, 1932. 35 “Japanese Raid Corean Homes Within Shanghai”, The Chicago Daily Tribune, May 2, 1932. 36 “Koreans in Hawaii Ask Peking French to Aid Countrymen”, Honolulu Star-Bulletin, May 3, 1932.
윤봉길의거에대한국내외언론의반응-국내와구미언론을중심으로- 7978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영구화 된다면 만주에 거주하는 3천여 만 중국인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37 일본의 식민 통치로 나타난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이 혁명 행위로 분출되고 있다고 했다. 정 작 한국인의 열망인 독립문제로까지 확대시켜 설명하지 않았지만 왜 상해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해 『맨체스터 가디언』은 그 본질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와 반대로 영국 언론 『데일리 텔레그라프(The Daily Telegraph)』는 “일본의 감정을 가장 위험한 수준으로 자극하는데 이번 범죄만큼 교묘히 계산할 수 없다” 하고 “이 잔악 행위를 일황의 생일 축하식에 거행했다는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다” 했다. 그러면서 한국인의 독립 운동을 동정하고 지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를 비판하는데 열을 올렸다. 폭탄 투척자가 한국인이라는 것은 사실이며 그는 1910년 일본의 한국 합병 후 한국독립운동에 가담 해 테러행위에 적극 참가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 가운데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 일본 당국은 중국이 한국혁명운동을 앞잡이로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본지 특파원은 어제 보 도했다. 그리고 소위 대한민국 공화국 임시정부가 상해에 본부를 두고 있다는 사실도 상기했을 것 이다.38 『데일리 텔레그라프』는 일본이 영국과 같은 식민 제국을 건설하고 운영하는 제국주의 국 가라는데 인식을 같이 하고 식민지 민족의 독립을 거론한다는 것은 반국가적인 행위이고 국 제적으로 볼 때도 반평화적이다라는 입장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였다. 이로 보면 구미의 언론은 상해 사건에서 나타난 한국인의 열망, 즉 한국 독립문제에 대해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들 언론들은 강대국의 제국주의 논리에 빠져 있어서 한국 독립 문제에는 안중에도 없었다. 대체로 철저히 침묵하였고 무관심하게 대했다. 그들에게 관심이 란 만주침략 이후 계속해서 상해를 침략한 일본이 중국과 어떻게 정전협상을 마무리 하느냐 에 있었다. 37 “The Shanghai Bomb Outrage”, The Manchester Guardian, April 30, 1932. 38 “A Crime Against Peace”, The Daily Telegraph, April 30, 1932. 4) 구미 언론의 주 관심 상해에서 폭탄 투척으로 일본인 고위 관료와 장성들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접한 구미 언론은 즉각 이를 1면의 전면에 보도하였다. 그러면서 윤봉길 의거는 일순간 전 세계의 톱 뉴스가 되었다. 그러나 윤봉길 의거에 대한 구미의 언론의 주된 관심은 폭탄을 투척한 윤봉길이 아 니었다. 폭탄 폭발로 심각하게 부상당한 일본 수뇌부와 일본 정부의 대응, 향후 중일 간에 미 칠 정전협상에 대한 파장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비중을 두고 주의 깊게 바라본 것은 중일 간 의 정전협상이 이번 의거로 향후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였다. 영국 언론 『더 타임즈』는 4월 30일자 첫 기사에 한국인 폭탄 투척과 정전협정에 미치는 영 향을 보도했다. 『더 타임즈』는 폭탄 폭발로 일본 대표들이 부상당한 것과 “임박했던 상해 정 전협정 조인이 가증할 만행으로 연기” 됐다는 사실에 경악했다.39 그리고 “범죄는 중일 관계 를 파괴하기 위해 계획됐을지 모르나 중요한 것은 이 범죄가 마일스 램프슨(Miles Lampson) 이 중국과 일본이 만족하는 해결방안을 찾아 상해 사태가 개선될 순간에 발생했다”고 했다. 그러나 폭탄 투척자가 정전협상 체결을 방해하기 위해서라면 본지 도쿄 특파원이 전하는 최 신 보도에 따르면 그는 실패했다고” 보았다. 『데일리 미러(The Daily Mirror)』와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는 폭탄 폭발로 부상당 한 일본인과 사건 현장을 사진으로 중점 보도했다. 먼저 『데일리 미러』는 4월 30일자에 부상 당한 무라이 총영사의 이송 사진을 크게 싣고 폭탄 참사 직후 상해 일황 생일 축하식 연단 사 진을 실었다. 체포되고 있는 윤봉길의 사진은 아주 작게 실었다.40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는 5월 1일자에 부상당한 일본인 수뇌부 4인의 사진을 실었고 5월 28일자에는 일황 생 일 축하식 행사 모습부터 폭탄 폭발과 윤봉길의 체포 때까지 총 다섯 장의 사진을 시간 순으 로 배치하며 혼란스러운 홍구공원의 현장을 보도했다.41 두 신문은 모두 일본인의 피해 상황 에 중점을 두고 보도했다. 런던에서 발간되는 주간지 『업저버(The Observer)』는 5월 1일자에 폭탄 투척을 비극으로 39 “Outrage at Shanghai”, The Times, April 30, 1932. 40 “Five Japanese Chiefs Badly Insured, Korean's Arrest”, The Daily Mirror, April 30, 1932. 41 “The Boming of Japanese Leaders at Shanghai:Moments Before and After the Outrage”, Illustrated London News, May 28, 1932.
윤봉길의거에대한국내외언론의반응-국내와구미언론을중심으로- 8180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묘사하고 향후 관심은 조인을 앞두고 있던 중일 정전협상의 장래라고 전망했다. 『데일리 텔레그라프」는 “중일 정전협상이 잔인한 상해 폭탄투척 폭거로 비참하게 중단됐 다”라는 논지로 일본인의 피해상황을 보도하였다. 그러면서 이번 ‘폭거’에 대한 영국 관계의 반응은 첫째는 혐오감이고 둘째는 중일 외교관계에 미칠지 모르는 악영향에 대한 불안감이 라 전했다. 영국 외무부가 일본 정부에 위로 전문을 발송했다는 사실도 알렸다. 『데일리 텔 레그래프』는 일본의 처지를 비호하는 입장에서 이번 사건은 중일 정전협상에 지장을 초래해 향후 평화를 위태롭게 할 것으로 전망했다. 충격적인 이번 폭거가 중일 적대심이 가장 첨예할 때 중국 영토 안에서 발생했다는 단순한 사실 이 일본에 미치는 영향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군과 민간 당국자 모두 아마도 고립된 이 범죄행 위로 말미암아 지난 2개월 동안 중재와 평화를 위해 쌓은 정열적인 업적을 헛되게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바라마지 않는다.…… 평화를 위해 쌓아올린 기반을 잃는다는 것은 지대한 비 극일 것이다.42 영국 언론 특히 『데일리 텔레그라프」가 윤봉길 의거를 ‘폭거’이자 ‘반 평화적인 범죄’ 행위 로 규정하며 윤봉길 의거를 규탄한 것은 영국 정부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상해 평 화 중재안이 무산된 때문이었다. 영국 정부는 상해사변 직후부터 중일 간의 정전협상을 주도 하였다. 특히 상해 주재 영국 공사 램프슨(Miles Lampson)의 활약으로 4월 28일 마침내 중일 간의 정전협상안을 조정하는데 성공했다. 정전 협상안은 제네바의 국제연맹에 통보되었고 4 월 30일 영국을 비롯해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4개국 대표와 중일의 대표가 상해에서 조 인함으로써 타결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4월 29일 윤봉길 의거로 이 모든 일이 무산되고 말았 던 것이다. 프랑스 언론은 윤봉길 의거를 테러로 규정하고 일본인 부상자에 대한 정황과 중일 간에 추 진 중인 정전협상 문제에 집중하였다. 『레코 드 파리』는 “상해가 여덟 명의 일본 고위 관료들 의 목숨을 위협한 테러의 무대가 되었다”고 한 후 “이 테러는 중일협약에 중대한 영향을 끼 칠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43 프랑스 언론의 주 관심은 홍구공원 사건으로 정전협상이 중단 42 “A Crime Against Peace”, The Daily Telegraph, April 30, 1932. 43 “Une bombe est lancée contre l’éta-major japonais á Shanghai”, Le echo de paris, April 30, 1932. 될 것인지 아니면 계속될 것인지의 여부였고 이에 대한 일본 정부의 대응에 주목했다. 「루에스테크레르(L`Ouest Eclair)』는 5월 1일자에 “상해 테러로 일본이 평화 협정을 깨지 않을 것이다”라는 기사에서 일본정부가 중일 간 휴전협정계획과 상해 테러를 연관 짓지 않기 로 결정한 것과 일본군은 사실상 휴전협정이 체결되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44 대신 신문은 거사를 일으킨 윤봉길이나 한국인의 식민 상황에 대해선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프랑스는 자신들이 관할하는 조계 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해 한국인 독 립운동가의 활동을 배려해 왔었다. 그런데 상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 조계의 프랑스 경찰은 일본측의 요구에 응해 한국인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는데 앞장섰다. 프랑스 언론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테러 집단’으로 표현하는 등45 의거 직후 한국 독립운동에 냉정하고 무관심한 태 도로 일관했다. 스위스 언론은 폭탄 폭발로 부상당한 일본인의 동향을 잠시 보도하였지만 주 관심은 제네 바 국제연맹 회의에서 추진되는 정전협정의 타결 여부였다. 『르 주르날 드 주네브(Le Journal de Geneve)』는 5월 1일자에 “홍구공원에서 일본의 군사연회 중에 일어난 테러가 극동의 상황 을 복잡하게 만들고 늘 일어나듯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켜 또 한 번 물의를 일으켰다”고 기술 했다.46 스위스 언론은 윤봉길 의거를 ‘상해 테러’로 기술하면서 다행히 일본 정부가 이번 사 건과 중일 관계를 연관 짓지 않기로 한 것을 매우 다행으로 여겼다.47 전체로 볼 때 스위스 언 론은 국제연맹 회의에서 타결된 협상안과 상해에서의 정전협정 조인, 향후 중일 분쟁 해결을 위해 노력 중인 리튼조사단의 활동상에 큰 관심을 보였다. 미국 언론은 폭발사건으로 일본인 고위 인사들이 부상당한 것과 폭탄을 투척한 한국인 윤 봉길에 대한 체포, 배후 인물 체포를 둘러싼 한국인들에 대한 체포 소식 등을 비교적 골고루 보도했다. 그리고 이번 사건이 중일 간의 정전협상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었는데 이러한 관심은 『뉴욕 타임즈』와 『뉴욕 헤랄드 트리뷴』의 보도에 한한다. 『뉴욕 타임즈』는 4월 29일 특보로 일본의 장성과 주중 공사 등 4명이 부상했고 그 중에 가 44 “Les Japonais Ne Rompront Pas Les Pourparlers De Paix”, L`Ouest Eclair, May 1, 1932. 45 “L’un des blessés le Dr. Kawabata a succombé”, Le Petti Parisien, May 1, 1932 46 “Chine et Japon:L’attentat De Shanghai”, Le Journal de Geneve, May 1, 1932. 47 “Japonais et Chinois vont conclure un armistice sans tenir compte de l’attentat de vendredi”, La Suiss, May 1, 1932.
윤봉길의거에대한국내외언론의반응-국내와구미언론을중심으로- 8382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장 심하게 다친 사람은 상해 정전협상 대표 시게미쓰 주중 공사와 무라이 총영사로 두 사람 의 생명은 위독하다고 전했다. 4월 30일자에는 일본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가 사망했고 중 일 간의 정전협상은 연기되었다고 알렸다. 이어서 미 국무성의 관리들의 말을 빌어 폭탄사 건을 개탄했다는 것과 불행한 희생자들을 위해 미국 정부가 일본 외무성에 위로 전문을 보낸 사실을 보도했다.48 다른 미국 언론에서 볼 수 없는 미국 정부의 반응은 『뉴욕 타임즈』만의 보도였고 그 내용은 단지 희생자에 대한 위로 정도였다. 『뉴욕 헤랄드 트리뷴』은 폭발사건과 관계없이 상해에서 추진 중인 정전협상은 계속하기로 결정했다는 것과 조속히 정전협상을 끝내도록 하겠다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실었다.49 이같 은 결정 배경은 이번 폭발사건이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에서 일본군의 보호 하에서 일 어났고 범인은 한국인이지만 일본 신민이라는 점 때문에 일본 정부가 중국을 비난할 수 없고 중국 정부에 항의할 의사가 없다는 사유 때문이라 했다. 전반적으로 볼 때 미국 언론은 폭발사건이 일어난 그 자체에 관심을 두었다. 그리고 사실 보도 위주로 전했고 미국 정부의 입장을 반영한다거나 일본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보도 또 한 하지 않았다. 4. 맺음말 국내와 국외 언론에 비친 윤봉길 의거는 관련 국가의 정치적 견해나 민족적 처지에 따라 보 도의 내용과 질이 약간씩 다르게 나타난다. 국내 언론의 경우 민족지인 『동아일보』와 『조선 일보』는 일제의 간섭과 통제 때문에 충분하진 않지만 ‘조선인’ ‘조선 청년’ 윤봉길의 근황과 그를 둘러싼 상해 지역 한국독립운동의 상황을 알리는데 노력했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 신보』와 『경성일보』는 일본 정부와 일본인의 입장을 대변하여 피해자의 입장에서 여론의 동 정을 얻는데 주력했다. 구미 언론의 경우 미국 언론을 제외한 영국, 프랑스, 스위스의 언론은 윤봉길 의거를 테러 사건으로 규정했고 윤봉길을 테러리스트로 취급했다. 윤봉길이란 인물이 어떤 인물이고 무 48 “One Dies in Shanghai:Peace Talks Halt”, The New York Times, April 30, 1932. 49 “Shanghai Bomb No Peace Bar;Japan Decides”, New York Herald Tribune, May 1, 1932. 엇 때문에 이런 거사를 단행했는지에 대해선 애써 모른 채 했다. 따라서 한국인, 한국 독립문 제에 대한 구미 언론의 인식은 매우 박약했다. 윤봉길 의거는 상해사변을 일으킨 일본이 중국과 수차례 정전협상을 추진하다 마침내 4월 30일 상해에서 타결을 눈앞에 둔 때에 일어났다. 이로 인해 구미 언론의 주된 관심은 부상당 한 일본인에 대한 동정과 함께 중일 간에 추진 중이던 정전협상의 추이였다. 일본 정부는 윤 봉길 의거로 인한 혼란에도 불구하고 정전협상을 속개할 것이라는 방침을 신속히 공표했다. 이것은 일본 정부 또한 정전협상을 하루 빨리 타결 짖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국제 상황을 비추어 볼 때 윤봉길 의거는 일본 정부나 국제사회에 매우 충격적이고 당혹스런 사건이었다. 그러한 점으로 인해 구미 언론은 오히려 윤봉길 의거의 발발 소식을 거의 1면 톱 뉴스로 보도하였다. 덕분에 윤봉길 의거는 전 세계의 화제 거리가 되었고 애써 드려내고 싶지 않았던 한국의 독립문제까지 간접적이나마 보도하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이 되 었다. 언론을 통해서만 바라본 때문에 윤봉길 의거에 대한 외형적인 모습과 상황에만 치중할 수 밖에 없었다. 언론의 반응만 갖고 개인별 입장이나 견해를 밝혀내기가 쉽지 않았다. 언론을 통해서가 아닌 외국인의 눈에 비친 윤봉길 의거는 어떠했는지, 해방 이전까지 한국인과 한국 독립운동가의 눈에 비추어진 윤봉길 의거는 어떠했는지에 대한 검토도 필요한 것으로 보인 다. 이러한 검토는 추후 과제로 남겨 두어야 할 것 같다.
84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尹奉吉義擧にたいする国内外メディアの反応 - 国内と欧米メディアを中心に - 85 1. はじめに 尹奉吉(1908.6.21.~1932.12.19.)義擧は、韓国独立運動史において、3 ·1運動のように国内外 に大きな反響と影響を及ぼしたものである。それは、尹奉吉義挙は、満州侵略と上海事変 が勃発し、日本が本格的な大陸侵略へ突入していた時期において実行されたので、国際的 に大きな注目を集めたのである。大韓民国臨時政府は、1919年の設立当時からフランス租 界地で活動していたが、尹奉吉義擧後、日本軍の弾圧によって上海を離れ流浪を余儀な くされていた。一方、国民党政府や中国国民にとっては韓国独立運動にたいする認識が肯 定的に変わる決定的な契機となった。さらに韓国独立運動史において尹奉吉義擧は、1930 年代初期、中国管内地域の独立運動において転換点であり、更なる跳躍の足掛かりであっ た。 尹奉吉義擧にたいする各国メディアの反応については、これまで中国と日本の新聞を中心 に多く研究されてきた。1中国と日本は尹奉吉義擧と密接に関わっているので、両国新聞の 分析は義擧の全貌を理解するために役に立つ作業である。 1 主な研究成果は、以下の通りである。ギムサンギ、「尹奉吉の上海義擧に関する日本メディアの報道」、『韓 国独立運動史研究』32、2009。ハンシジュン、「尹奉吉義士の虹口公園義擧に関する中国新聞の報道」、 『韓国独立運動史研究』32、2009。 尹奉吉義擧にたいする国内外メディアの反応 - 国内と欧米メディアを中心に - 洪善杓 | 韓国独立運動史研究所責任研究委員 本稿は従来研究してきた中国と日本のメディア以外に、植民地朝鮮の国内メディアと欧 米メディアにおける尹義士義擧の報道内容を分析した。そこで各国のメディアがそれぞれの 立場から尹奉吉義挙をどのように捉えたか、またそれぞれの性格や意味について探ってみた い。 国内メディアの場合、民族紙である『東亜日報』 ·『朝鮮日報』 ·『中央日報』と総督府機関 紙である『毎日申報』 ·『京城日報』に限定し、分析対象は義擧の初期と中·後期に分けて考 察したい。国内メディアの場合は、記事内容による区分ではなく、時間の流れに沿って民族 紙と総督府機関紙の報道内容を比較分析する。欧米メディアの場合は、米国、英国、フラ ンス、スイスのメディアに限定した。欧米メディアの分析においては、第三者の外国の視点 から尹奉吉義擧と韓国独立運動をどう捉えたかに焦点を当て、尹奉吉義擧の影響と反響、 主要関心などを分析することに重点を置いた。本稿で分析したメディアの記事資料はすべて 梅軒尹奉吉記念事業会が発行した『梅軒尹奉吉全集』(第5巻、国内および欧米資料、2012)に よるものである。 2. 国内メディアの反応 1) 義擧勃発初期(4.29∼30)の報道と反応 国内において4月29日と30日、尹奉吉義擧の初期の状況を最も迅速に報道した新聞は、 『東亜日報』と『京城日報』である。2両新聞は1932年4月29日と30日、二日間「号外」を発行 し、尹奉吉義挙を「上海爆弾事件」と大々的に報道した。「号外」の性格からおもに事実関係 を中心に報道し、記事内容は類似していたが、若干の異なる特徴も見られる。 『東亜日報』は4月29日「号外」で「白川司令官と重光公使に手榴弾を投擲」という題目で以 下のように報道した。 2 『朝鮮日報』は4月29日、30日、「号外」でも尹奉吉義挙を報じたが、現在新聞資料が見つからないので、東 亜·京城の二つの新聞に限って論じる。
86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尹奉吉義擧にたいする国内外メディアの反応 - 国内と欧米メディアを中心に - 87 [上海29日発 電通至急報]本日午前11時半、新公園における天長節祝賀式で「国歌」合唱中、 突然式台上の重光公使及び白川軍司令などを標的に手榴弾を投げた者がいた。白川隊長は顔面 に、重光公使は負傷の位置が不明だが、○に共に重傷を負い、式場は大混乱に陥った。 続けて上海派遣軍司令官の白川義則隊長と駐中公使の重光葵の負傷、また、第3艦隊司 令官の野村吉三郞中将、上海総領事の村井、上海日本人居留民団長(行政委員長)の河端 貞次が負傷したことを報じ、そのなかで重光公使が最も深刻な重傷を負ったとある。 さらに上海の北四川路の新公園一帯に臨時戒厳令が発布され、犯人と共犯の捜査に乗り 出したと報じ、逮捕された犯人が「朝鮮人」であることを明らかにした。 『東亜日報』は、4月29日付の一回目の「号外」記事を午後○時40分に受信したことを明示 した。それは義擧勃発の直後、上海通信員と直接交流していたことを意味する。 『東亜日報』の二回目の「号外」は、同じ日の4月29日に再び発行された。二回目の「号外」 一面には「上海爆弾事件速報」という題目で、現行犯で逮捕された「朝鮮人尹奉吉」という名 前が初めて明かされた。すなわち、爆弾の現行犯は朝鮮人尹奉吉(25歳)であることが判明 し、朝鮮共産党員あるいは国際共産党員であり、その身柄については只今取り調べ中で共 犯者27人が逮捕されたとある。その中で二人は爆発現場で逮捕された。上海の日本憲兵隊 によると、犯人と被疑者を逮捕したが、一人は紳士服に淡い色のスプリングコ トーを着てお り、式台のすぐ後ろから二人の犯人が一個ずつ、二つの爆弾を投擲した。犯人を逮捕した 際に近所にあった電灯ボックスからもう一個の爆弾が発見されたという。犯人の一人は爆弾 の破片で重傷を負ったと伝えた。「号外」は爆弾犯人である朝鮮人のほかに、中国人、ロシ ア人などの8人が憲兵隊に逮捕されたことを報道している。 『東亜日報』4月29日付二回目の「号外」2面には、上海軍司令官の発表内容が詳細に報 じられた。白川司令官、野村海軍提督、重光駐中公使、上田第9師団司令官、村井総領 事、ほかに中央席に座った來賓たちの負傷にかんする内容が報道されている。その中で重 傷を負った白川と村井は、福民病院に入院中であるという。 『東亜日報』は4月29日に引き続き、4月30日にも「号外」を発行している。「号外」1面に「上 海祝賀式場に一青年が突然投擲」と「爆弾現行犯は朝鮮人に判明」という題目で報道してい るが、4月29日の「号外」内容が繰り返されている。「号外」2面には「国際共産党員?○○○ ○の一派?」という題目でやはり4月29日付「号外」と同じ内容である。そして「手榴弾事件の 反響」という題目で、中日間の停戰交渉が無期延期されると予測し、今回の事件とは別に 停戦協定が推進されるという見通しが報じられた。ジュネーブの国際連盟側の立場に関して は、日本軍駐屯地のなかで朝鮮人によって起きた事件なので中国側にその責任を負わせる ことはないとする反応を伝えた。 さらに『東亜日報』は29日と30日の二日間にわたって三回目の「号外」を発行している。5月 1日の「号外」を含めると、合計4回である。『東亜日報』が「号外」を配布し迅速に報道しよう としたのは、日本人の負傷近況より「朝鮮人尹奉吉」義擧の成功ニュースであったに違いな い。『東亜日報』の「号外」のトップ記事に「朝鮮人尹奉吉」を大きく浮彫りにし、その内容の 詳細を報道しようと努めた。また尹奉吉義擧が国際社会に与える影響を考え、国際連盟の 反応にも注目している。ただし、尹奉吉義擧に関する主体的な見解を示した論評は一行も なかった。「号外」という特徴もあるが、国内メディアを監視、統制した総督府を意識せざる を得なかったのであろう。以後も尹奉吉義擧に触れた論評は、『東亜日報』はもちろん他の 国内言論には見当たらない。 朝鮮総督府の機関紙として日本語で発行する『京城日報』も、尹奉吉義擧の一報から即 時、4月29日の「号外」を発行した。「白川大将、重光公使は爆弾で重傷を負う。上海の 天長節祝賀式典で」という見出しで白川司令官と重光公使が負傷した事実を集中的に報道 し、顔写真も掲載した。二人のほか、野村、上田司令官、村井総領事、川端上海居留民 団長の負傷も報じた。犯人たる人物が群衆に殴られて逮捕され、憲兵隊に引き渡され、上 海に臨時戒厳令が宣布されたと報じた。上海軍司令部の発表によると、○○人[朝鮮人]の ほか、中国人、ロシア人などの7人が犯人として逮捕された。その中で爆弾犯は○○人[朝 鮮人]○○○(25歳)で犯人の身柄や共犯者は現在調査中であると伝えた。 『京城日報』の最初の「号外」は負傷日本人と怪我の程度について詳細に報道している。 犯人と判明した人は「朝鮮人」、「尹奉吉」と印刷されたはずが、その部分は削除し発行され た。 『京城日報』は4月30日「上海の爆弾事件」という見出しで、二回目の「号外」を発行した。 最初の「号外」に比べて爆弾の爆発状況と日本人の負傷程度を詳細に報道し、日本の外務 大臣、駐中英国公使、リットン調査団などが遺憾を表明したことを掲載した。 尹奉吉義擧の初期状況について両新聞ともに「号外」を発行して速報を伝えたが、多少異 なる傾向が指摘できる。つまり、『東亜日報』は爆弾投擲で生じた日本人負傷のニュースを
88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尹奉吉義擧にたいする国内外メディアの反応 - 国内と欧米メディアを中心に - 89 迅速に報道しているが、「朝鮮人尹奉吉」義擧を強調することに重点を置いていた。一方、 『京城日報』は「朝鮮人尹奉吉」にかんする報道は削除しようとし、その代り爆弾爆発の状況 や日本人負傷者の被害状況、当事件に関する国際社会の様子などに重点を置いて報道し ていたのである。 2) 中·後期(5.1∼12.21)の報道と反応 国内メディアは義挙の初期(4.29~30)、「号外」として速報を報道し、5月1日から尹義士の殉 国(12.19)まで継続的に報道してきた。5月1日から8日までと、5月9日から殉国直後の12月21 日までを便宜上、二つの時期に分け、前者を中期、後者を後期に分けて述べる。国内メデ ィアは、中期において初期と同様に尹奉吉義擧について集中的に報道した。5月8日を境に 前後に分けたのは、5月6日日本陸軍省が言論統制を緩めて虹口公園爆弾投擲事件の全貌 を明らかにし、それを報道したからである。5月8日を起点にしてその後の尹義士殉国までの 後期になると、尹奉吉義擧に関する報道量は急激に減少する。 『東亜日報』と『朝鮮日報』は5月1日から8日まで尹義士義挙の直後における上海の状況に ついて集中的に報じた。『東亜日報』は5月1日4、回目の「号外」を発行している。ジュネー ブの国際連盟総会が19カ国委員会の提案した決議案を、日本代表の棄権のなか、満場一 致で通過させたという事実を速報で伝えた。3尹奉吉義擧にもかかわらず、上海の停戰交渉 は継続されると伝えた「号外」であった。 『東亜日報』は同じ日の記事で尹奉吉義擧によって韓国人をはじめ、米国人、中国人、ロ シア人などの24~25人が逮捕されたこと、上海僑民団長李裕弼の家で安昌浩が逮捕された ことを大きく報道した。4『朝鮮日報』は5月1日、「爆弾事件の反響」という見出しでほぼ全面 記事を載せた。尹奉吉が擧事の主役であることを知らせたが、国際連盟をはじめ、各方面 の反応、日本人の負傷状況にかんする記事を中心に報道されていた。 ところで、『東亜日報』と『朝鮮日報』には擧事の主役である「朝鮮青年」尹奉吉の写真が掲 3 『東亜日報』、「号外」「19カ国決議案連盟総会通過」、1932年5月1日。 4 「上海爆弾事件速報」、『東亜日報』、1932年5月1日。安昌浩逮捕事実について『朝鮮日報』は5月7日報じ た。 載された。5月3日『東亜日報』には初めて尹奉吉と家族の写真が掲載され、尹奉吉が逮捕 される写真は5月4日の『東亜日報』と『朝鮮日報』に掲載された。ところが、『東亜日報』の尹 奉吉の逮捕場面の写真は、東京と大阪で発行された『朝日新聞』の左側の顔であり、『朝鮮 日報』の写真は『東京日日新聞』に掲載した尹義士の右側の顔が写った写真である。 5月7日『東亜日報』は尹奉吉と家族や家の写真とともに家族の近況について詳しく報じ た。しかし重光駐中公使の負傷記事は短く扱っている。『朝鮮日報』は同じ日に尹奉吉の生 涯と独立運動の履歴を簡単にまとめて伝えたが、日本人の負傷状況については一行も掲載 していない。 5月6日、日本陸軍省が言論統制を緩め虹口公園爆弾投擲事件の全貌を明らかにする と、『東亜日報』と『朝鮮日報』は5月8日、上海の韓国独立運動の近況を詳細に報道した。 『東亜日報』と『朝鮮日報』は「上海手榴弾事件詳報」と「上海爆弾事件の續聞」という見出し で尹奉吉の背後として目された李裕弼、「假政府(大韓民国臨時政府)」の首領金九、副首領 の趙素昂、それから背後勢力としての朝鮮共産党、中国抗日救國會、19路軍の庇護勢力 について集中的に報道した。それとともに、日本軍当局は背後勢力についてはまだ証拠を 確保してないと報じた。 『東亜日報』と『朝鮮日報』は尹奉吉と尹奉吉義挙に関する記事を総督府の検閲と統制のた めに十分掲載す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にもかかわらず、連続して報道していた。尹奉吉義挙 が韓国独立のためであることを間接的にでも伝えようとしたのである。 5月8日以後から尹義士の殉国まで東亜·朝鮮の二新聞と『中央日報』は、単発的に尹義士 の近況を報道した。おもな報道内容を見ると、逮捕された安昌浩の国内押送(『東亜日報』5 月23日)、尹奉吉に対する軍法会議開廷(『東亜日報』 ·『朝鮮日報』5月27日)、尹奉吉の日本護 送(『東亜日報』11月21日)、尹奉吉の死刑執行(『東亜日報』11月22日、12月20日;『朝鮮日報』 · 『中央日報』12月21日) などである。 5月9日金九が上海で「虹口公園炸彈案の眞相」を発表したという記事は、国内言論にはど こにも報道されなかった。総督府の言論統制のためであるとみえる。その代わり、二ヶ月ほ ど過ぎてから『朝鮮日報』5月27日に「上海爆弾犯尹奉吉軍法会議遂開廷」という題目でその 内容が擧事直前の尹義士の写真とともに掲載された。その胸に「宣誓文」を下げて太極旗を 背景に左手には手榴彈、右手には拳銃を持った尹義士の顔写真が3段にかけて大きく報道さ れた。その写真と記事は国内メディアでは初めて報道されたものであり、中国で旺盛に展開
90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尹奉吉義擧にたいする国内外メディアの反応 - 国内と欧米メディアを中心に - 91 されていた韓国の独立運動の実体が国内の韓国人たちに知らされる絶好の宣伝効果があっ たと思われる。 朝鮮総督府の立場を代弁する『毎日申報』と『京城日報』は、5月1日から8日まで休刊日を 除いてほぼ毎日尹奉吉義挙について報道した。記事の主な内容は日本人の被害状況と停戦 協定の進捗状況であった。 5月6日午後3時、日本陸軍省が事件全貌を公開発表した直後、5月8日『毎日申報』と『京 城日報』は初めて上海地域の韓国人独立運動家たちの様子を詳細に報道した。尹奉吉をは じめ12人の容疑者の逮捕、安昌浩、李春山[李裕弼]、金九、趙素昂などの韓国の独立 運動家の抗日活動の経緯を集中的に紹介した。その報道は日本側の本来の意図とは異な り、むしろ中国内の韓国独立運動の現況を国内の韓国人たちに知らせる効果があったように 思われる。 虹口公園爆弾投擲事件をめぐり、国内メディアは多くの記事を生産したが、おもに事実 関連の報道に集中していた。そのなか、『京城日報』は上海駐在「KS生」という某日本人の寄 稿文を掲載した。その寄稿文には、当時の上海地域居住の日本人たちの心情がよく現われ ており、尹奉吉義擧の状況を如何に受け止めていたかを示す重要な例である。おもな内容 は次のとおりである。 上海空前の陸軍大観兵式が威風堂々と挙行されて愈々祝賀会の式典に移り君が代斉唱が終った瞬 間一兇漢の投じた爆弾によって白川上海派遣軍司令官、…… 七氏は残らず重軽傷を負って倒れ た。弾片四百数十箇を受けた河端行政委員会長は翌日痛ましくも長逝した。余りにも大事変であ る。そして余りにも大きい犠牲である。陸海軍人も居留民も極度の激昂と憤慨と痛恨とに全身の血 をたぎらした。「もう一度戦争だッ、徹底的に復讎しろ」という声は居留民のみならず陸海軍将兵ま でも異口同音に叫んだ。「停戦会議も糞もあるものか、戦争だ、戦争だッ」5 この表現によると、民間人も軍人も上海の日本人たちは尹奉吉義挙を「大事変」と見、憤 慨と痛恨を覚えていた。上海の日本人たちは、擧事の背後に中国人がいると考え中国との 戦争を続けるべきだと主張した。 5 「宙に迷った爆弾事件の行方(上)」、 『京城日報』、1932年5月11日。 ところが、後日明らかになったように犯人に目されたのは、中国人ではなく韓国人であっ た。その事情を知らない日本人筆者にとって爆弾事件と裏腹に日本政府が中国と停戰交渉 を進めて最終的に締結まで進めたことは、不満に思えることであった。今回の爆弾事件を単 なるテロの狂乱にすぎないとみて、爆弾事件と停戰交渉を分離して対応する日本政府の態 度を辛辣に批判しているのである。6 この上海居住日本人の寄稿文が日本人全体を代表しないにしても、尹奉吉義擧は停戦協 定を締結する日本政府と日本軍部を困惑させたように、「大事変」と表現されるほど日本人 の心理に非常に衝撃的で極度の怒りを醸し出したことは違いない。尹奉吉義擧が日本社会 に及ぼした反響が如何に大きかったかがうかがえる。 5月27日から尹義士の殉国まで『毎日申報』と『京城日報』は、日本人負傷者の近況と帰 国、尹奉吉の日本護送と死刑執行を中心に時折報道していた。 国内メディアの中で朝鮮総督府の『毎日申報』と『京城日報』は、尹奉吉義挙を発生初期 から殉国まで報道しているが、両新聞の性格から徹底的に日本と日本人の立場を代弁する ことに集中していた。尹奉吉と韓国人の独立運動家たちの活動像を報じた記事は、5月8日 付のものくらいで非常に少なかった。それに比べると、『東亜日報』と『朝鮮日報』の報道は、 日帝の抑圧的な植民地統治状況の下においても、尹奉吉義擧とそれをめぐる韓国独立運動 の状況を継続的かつ具体的に伝達することに力を注いでいたのである。 3. 欧米メディアの反応 1) 尹奉吉義擧に関する報道量と期間 上海の尹奉吉義擧の一報が伝わった米国のメディアは4月29日の1面に迅速に報道した。上 海より15~18時間遅れる時差を考えると、米国の日刊紙としては即時に報道したのである。 4月30日と5月1日までの報道が多かったが、それ以上に報道した新聞は、5月10日の『ニュ ーヨーク·タイムズ(The New York Times)』と5月9日の『ホノルル·スター·ブレティン(Honolulu 6 「宙に迷った爆彈事件の行方(下)」、『京城日報』、1932年5月12日。
92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尹奉吉義擧にたいする国内外メディアの反応 - 国内と欧米メディアを中心に - 93 Star-Bulletin)』である。この両新聞が長く報道したのは、5月9日、金九の作成した「虹口公園 炸弾案の真相」という題目の英文書簡が上海の主要機関と各メディアに配布されたものを掲 載したからである。 尹奉吉義擧の関連ニュースを最も多く掲載したのは、『ニューヨーク·タイムズ』である。 『ニューヨーク·タイムズ』は4月29日から総5回に渡って関連記事を掲載した。7米国で尹奉 吉の爆弾投擲義擧の状況が5回連続して報道されたのは、他のメディアに比べて最多の報 道になる。それほど今回の上海事件に関心があり、詳細に報道していた。 欧州の場合、時差が上海より早いので、事件発生から一番早く報道されたのが、4月 30日である。英国とフランスのメディアには、4月30日の1面に集中的報道され、5月1日 と5月2日にも報道された。その中で最も頻繁に報道したメディアは、英国の『タイムズ(The Times)』である。総6回にわたって報道している。8上海事件を最も遅れて報道した新聞 は、英国の『イラストレイテッド·ロンドンニュース(Illustrated London News)』である。上海 事件の関連写真5枚を載せた5月28の記事である。英国の『デイリー·テレグラフ(The Daily Telegraph)』は、4月30日と5月2日、二回報道に過ぎないが、4月30日の新聞では上海事件 を紙面のすべてを埋め尽くすほど集中的に報道していた。フランス·メディアの場合、1面全 体を使い切るほど、集中して報道したが、5月1日までもう1回の報道に終わっている。9 ジュネーブに国際連盟本部があったスイスのメディアは、上海事件に深い関心を持って 集中報道した。『ルジュルナル·ジュネーヴ(Le Journal de Geneve)』は総7回(4.30、5.1、5.2、 5.3、5.4、5.5、5.7)、『ラ スイス(La Suisse)』は総5回(4.30、5.1、5.3、5.4、5.6)報道した。と ころで、スイス言論は、上海爆弾投擲事件への関心より、当時、国際連盟で推進していた 中·日停戰交渉にどんな影響をおよぼすかにかんする分析と展望に焦点が当てられていた。 7 『ニューヨーク·タイムズ』には4月29日、4月30日、5月1日、5月3日、5月10日に報じられた。 8 『タイムズ』は4.30、5.2、5.4、5.6、5.24、5.26、全6回にわたって報道した。 9 フランスの『ルジュルナルデディー ヴァ(Le Journal desdebats』はめずらしく三回(4.30、5.1、5.2)にわたって報 道した。 2) 尹奉吉義擧と「尹奉吉」にかんする記述 米国のメディアにおいて尹奉吉義擧はおもに「上海爆弾投擲事件」または「上海爆弾事件」と 表現され、尹奉吉は「爆弾投擲者」または「爆弾投擲犯」と称された。米国メディアはすべて 尹奉吉を「テロリスト」、尹奉吉義挙を「テロ」と記述していなかった。日本側の視点から「テ ロ」という言葉をまれに使用することもあったが、特別な例であった。例えば、『シカゴ·デイ リー ·トリビューン(The Chicago Daily Tribune)』は、5月1日の記事で「テロ党」という言葉を用 いたが、日本側からの言葉をそのまま移したものであった。10 英国メディアでは「上海蛮行」や「上海爆弾蛮行」11、または「上海の残忍な暴挙」、「上海 暴挙」12などという言葉で表現した。特に『デイリー ·テレグラフ(The Daily Telegraph)』は、尹 奉吉義擧を「反平和犯罪」と見なし、次のように評価した。 われわれの時代に1914年ㅜㅐポディナンドゥ(F. Ferdinand)大公暗殺を除いては、昨日上海で発生 した残虐行為ほど惨憺たる可能性を内包した政治的暴力行為はなかった。13 そのほか、英国の『デイリー·エクスプレス(he Daily Express)』は「邪悪な犯罪」と表現し た。14 『イルロストゥレイティドゥ·ロンドン·ニュース(Illustrated London News)』は尹奉吉を 「暗殺者」と表現した。15 フランスとスイスの言論は尹奉吉義擧を「テロ」、尹奉吉義士を「テロリスト」と報じ、米国 の言論とは相当異なっていた。 欧米メディアの中で義擧の主役である尹奉吉の姓名を正確に報道していたのは、『サン 10 『シカゴ·デイリー ·トリビューン(The Chicago Daily Tribune)』は5月1日記事のタイトルは「12 Coreans Held by Japan in Hunt for Terror Ring」であった。 11 英国の『タイムズ(The Times)』(4.30;5.2)、『マンチェスター·ガーディアンThe Manchester Guardian)』(4.30)、 『アイリッシュ タイムス (The Irish Times)』(4.30)。 12 英国の『サンデー·タイムズ (Sunday Times)』(5.1)と『ジオーバーシ (ーThe Overseas)(5.1)。 13 “A Crime Against Peace”, The Daily Telegraph, April 30, 1932. 14 “Japan`s Chance”, The Daily Express, April 30, 1932. 15 “The Boming of Japanese Leaders at Shanghai: Moments Before and After the Outrage”, Illustrated London News, May 28, 1932.
94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尹奉吉義擧にたいする国内外メディアの反応 - 国内と欧米メディアを中心に - 95 フランシスコ·クロニクル(San Francisco Chronicle)』のみである。16爆弾投擲者の年齢と国籍 を25才、「韓国人」と表記した。しかし、姓名については「キム·プンギ(Kim Fung-kee)」17、 「イン·ギス」18、「イノキツ(Yinhokitsu)」19、「インチュンキ(Yinstsuengkee)」20、「インチェン キ(Yintsuengkee)」21、「インコヒツ(Yinkohitsu)」22、ジウホキツ(Jiuhokitsu)」23、「ジノキツ (Jinokits)」24など様々に表記されていた。25名前の明記さえない報道もあった。 欧米メディアには尹奉吉の身柄ついて簡単な文章で紹介されていた。米国の『ニューヨー クタイムズ』4月3日付にはフランス租界地にある大韓民国臨時政府と関わる人物として報じ られていた。また最近中国山東省清津から上海に渡ってきて洗濯屋の仕事をしたことがあ り、満州から来た韓国革命団員また中国革命団体の一員であると紹介した。『ロサンジェル ス·タイムズ』(4.30)と『ワシントン·ポスト』(4.30)は満州から来た中韓革命党員または、満州か ら来た韓国人革命家であると報じた。 フランス言論のなか、『ルエステクレル(L’Ouest Eclair)』(4.30)と『ル マテン(Le Matin)』(4.30) は、尹奉吉を韓国独立のための団体の一員であると記述した。また『ル ジュルナル·デ·デバ (Le journal des debats)』(5.1)は、中韓協会に所属している中国広東出身の政治家の秘書とし て活動したことがあり、去る1月8日、日王に爆弾を投げた犯人の一人である推定した記事 を出している。『ル フィガロ(Le Figaro)』(4.30)は、ロシア過激主義の影響を受けた韓国人革 16 “Shanghai Bomb Victim Expires”, San Francisco Chronicle, April 30, 1932. 17 “One Dies in Shanghai: Peace Talks Halt”, The New York Times, April 30, 1932; “Japan: Birthday Surprise”, Time, May 9, 1932. 18 “Peace Hope Set Back”, The Los Angeles Times, April 30, 1932. 19 “L′enquȇte L`attentat de Changhai”, Le journal des debats, May 1, 1932. 20 “Une bombe est lancée contre l’éta-major japonais á Shanghai”, Le echo de paris, April 30, 1932; “Un Attentat Anti-Japonais est Commis a Changhai”, L`Ouest Eclair, April 30, 1932. 21 “A Changhai: Un attentat contre les Japonais”, Le Figaro, April 30, 1932. 22 “Terror Grips Huge Crowd”, The Daily Telegraph, April 30, 1932. 23 “Un attentat á Shangaï”, La Suisse, April 30, 1932. 24 “L’attentat de Shanghai On découvre une nouvelle bombe Le meurtrier”, Le Journal de Geneve, May 1, 1932. 25 25歳 韓国人「イノキツ」或は「インチュンギ」と二つ表記したのは『ル マティン』である。“L′attentat de Changhai ne compromettrait pas les pourparlers de paix entre le Japan et la Chine”, Le Matin, April 30, 1932) 命団体に所属していると紹介した。『ル·プチ·チュルナル(Le Petti Journal)』(4.30)は、大韓独 立軍の一員であり、8ヶ月前満州から上海にきて中国人洗濯屋で働き、広東出身政治家の 秘書であったと紹介している。 英国の『ザ·タイムズ』(4.30)は、革命性と共産主義の傾向の韓国独立党の現地支部に所属 した人物であると報じた。『デイリー ·テレグラフ』は日本軍当局の発表を引用して8ヶ月前満 州から上海にきてフランス租界のある中国人洗濯屋で8ヶ月仕事をしたと報じた。26引き続 き、日本側の報道を引用していわゆる中韓協会という組織の指導者であり、著名な広東政 治家の秘書の友人である報道した。 すると、欧米のメディアは、爆弾を投擲した尹奉吉という人物が、韓国人であり韓国革 命·韓国独立と関係があるという点を知っていた。しかし、韓国人尹奉吉が義挙を断行し た動機と目的については、どんな言論も注目しなかった。金九の真相発表を報じた『ニュー ヨーク·タイムズ』(5.9.)と『ホノルル スターブレティン』(5.9.)が一部韓国人の立場を報道して いるが、そのほか欧米言論は義擧の動機と目的について沈默し、無関心の態度で一貫して いた。 義擧を起こした尹奉吉の逮捕過程について欧米のメディアでは、爆弾爆発直後、群衆が 爆弾投擲犯を捕まえて殴ったことと、その過程で日本軍により逮捕されたことを報じた。27 日本軍兵士が尹奉吉を逮捕して殴打したと伝えたのは、英国の『タイムズ』(4月30日)、それ から5月28日にそれを報じた『イラストレ トー·ロンドンニュース』である。ここでいう群衆とは 行事に参加した日本軍兵士と一般市民たちが含まれているとみえる。すると、義擧直後、 尹奉吉が日本軍兵士と一般市民の群衆に捕まえ、しばらく失神するほど殴打された、それ から日本軍当局の介入によって逮捕され移送されたと思われる。 尹奉吉の二番目の爆弾の発見については、欧米メディアの報道が異なっていた。多くの 26 “Second Bomb Found was Korean in League with Other?”, The Daily Telegraph, April 30, 1932. 27 アメリカの『ニューヨーク·タイムズ』(4.29)、『シカゴデイリー ニュース』(4.29)、『ニューヨーク·ヘラルド· トリビューン』(4.29)、『ワシントンポスター』(4.29)、『ロサンゼルス翌ジェミニ君』(4.29)、「ホノルルアド バタイズ』(4.29)、『ホノルルスターブリティーン』(4.29)、『タイム』(5.9)、フランスの『リューズマニて (Humanite)』(4.30)、『ルマテン(Le Matin)』(4.30)、『ルプティパリジャン(Le Petti Parisien)』(4.30)、『ルフ ィガロ(Le Figaro)』(4.30)、英国の『デイリー ·ミラー』(4.30)、『デイリー ·テレグラフ』(4.30)
96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尹奉吉義擧にたいする国内外メディアの反応 - 国内と欧米メディアを中心に - 97 新聞は、演壇の周辺に爆発していない爆弾一個があったと伝えた。28しかし、いくつかの新 聞は尹奉吉の懐で爆発してない爆弾一個を発見したと報道した。29すると、おそらく投擲で きなかった爆弾が尹義士の懐の中に残っていたが、義擧直後、群衆に捕まえ殴打される途 中、その爆弾が演壇の所に入り込まれたのではないかと推測される。 欧米メディアでは尹奉吉義士の逮捕される際の姿についてほとんど報道されることなく、 一部のメディアに極めて短く言及される程度であった。フランスの『ル·プチ·パリジャン(Le Petti Parisien)』は「彼は背が高くてやせていて明るい灰色の服を着ていた。中国人より日本人 に近い容貌であった。顔に血が流れており、共犯者の一人であると推定される」30と報じた。 『ニューヨーク·タイムズ』では「彼は傷を負って血を流していたが、負傷した官吏たちが応急 治療のために病院へ移送される間、笑いいながら反抗した」31と伝えた。これによると、尹義 士は逮捕される際、酷い傷を負い血を流していたが堂々たる姿であった。 3) 韓国人と韓国独立問題に関する認識と報道 上海爆弾投擲事件を言及した米国メディアのなかには韓国人を同情する記事が多少見られ た。まず『ニューヨーク·タイムズ』は4月29日と30日の記事で日本人高官の負傷について多く 報じたが、韓国人の逮捕、捜索と弾圧についての報道も少なくなかった。例えば、5月1日 の1面には、日本に抵抗し革命活動を展開した疑いで日本の秘密警察が韓国人の家宅を捜 索し、多くの韓国人が逮捕されたという記事を掲載した。32それによって韓国人居留地に不 安感が漂い、多くの韓国人が当地を離れたり、また残った一部の人々は虐待されることもあ ったと伝えた。『ニューヨーク·タイムズ』の報道は、負傷した日本人たちの立場に同情を見 28 アメリカの『ニューヨーク·タイムズ』(4.30)、英国の『よりタイムズ』(4.30)、『イラストレ トーロンドンニュース』 (5.28)、『デイリー テレグラフ』(4.30)、フランスの『ルプティジュルナル(Le Petti Journal)』(4.30)、『レコ ドーパ リ(Le echo de paris)』(4.30)、『ルマテン(Le Matin)』(4.30) 29 フランスの『リュマニテ(Humanite)』(4.30)、 『ルーエステクレール(L`Ouest Eclair)』(4.30)。 30 “Un Terrible Attentat Anti Japonais a Changhaï”, Le Petti Parisien, April 30, 1932. 31 “Shanghai Bombing Halts Peace Talks”, The New York Times, April 30, 1932. 32 “Japanese Seize Koreans”, The New York Times, May 2, 1932. せつつも、一方では植民地韓国人の境遇を暗に理解しようとする慎重な態度を取ったと見ら れる。 『ニューヨーク·タイムズ』では5月10日、虹口公園で起きた爆弾事件のように中国滞在の 日本官吏を処断するという脅迫が当日韓国人居留地から出されたという特約記事が報道さ れた。33それは金九の真相発表を報じた記事である。それは金九の発表した声明書による と、韓人愛国団団長であり、虹口公園爆弾事件の背後であることを明らかにしたという。こ の『ニューヨーク·タイムズ』の記事は初めて韓国人の独立運動に関心を示したものである。 『ホノルル·スターブレティン(Honolulu Star-Bulletin)』は5月9日、韓人愛国団の首領が日本 への追加攻撃を表明したという内容で、金九の声明書を伝えた。要するに、韓国人愛国団 団長である金九が虹口公園爆弾投擲を指示し、尹奉吉はその任務を果たしたとの報道であ る。また、逮捕後の尹奉吉の生死については不明だが、今後も韓人愛国団による日本政府 の軍指導者の殺害など、日本人と満州人を相手に虹口公園爆弾事件のような事件がまもな く起こるだろうと伝えた。34爆弾投擲事件の黒幕の背後に金九がいたことを明らかにしたの は、『ニューヨーク·タイムズ』と『Honolulu Star-Bulletin』だけであって、欧米の他のメディア では見られない特別な報道であった。 一方、『シカゴ·デイリー ·トリビューン(The Chicago Daily Tribune)』は、今まで中国人に向 かっていた日本人の敵愾心が上海爆弾投擲事件によって急に上海の韓国人に向かった、と 韓人に同情する記事を掲載した。35そこには、捜索から逃れた韓国人のほとんどが、米国人 や英国人の家に避難し、とくに米国宣教師が「日本人の虐待を避けようとする」多くの韓国キ リスト教徒に避難場所を提供したとある。上海滞在の女性の米国宣教師によると、日本人 刑事たちは隠れ家を突き止めようとし、韓国人女性を暴行した。この『シカゴ·デイリー ·トリ ビューン』の記事は、他の欧米メディアに比べて韓人の逮捕や逃避、虐待問題について特別 な関心を持って報道している。 『ホノルル·スター·ブレティン(Honolulu Star-Bulletin)』では5月3日、尹奉吉義擧にたいする 米国滞在の韓国人たちの反応が初めて報じられた。ホノルルの大韓人交僑民団が北京駐在 33 “Our Consulate Fired By Bomb in Nagasaki”, The New York Times, May 10, 1932. 34 “Korean Claims He Instigated Hongkew Bomb”, Honolulu Star-Bulletins, May 9, 1932. 35 “Japanese Raid Corean Homes Within Shanghai”, The Chicago Daily Tribune, May 2, 1932.
98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尹奉吉義擧にたいする国内外メディアの反応 - 国内と欧米メディアを中心に - 99 フランス公使館と上海駐在フランス総領事に請願書を送り、尹奉吉義擧で逮捕された20余 人の無辜の韓国人を保護することを要請したと伝えた。36この記事は欧米メディアのなかで 尹奉吉義擧以後、海外韓国人の対応を報道した最初の例である。 米国メディアの報道には、植民地統治に置かれた韓国人にたいする同情が見られるが、 植民地朝鮮の独立問題にたいする深い関心があったとは言えない。植民地朝鮮の事情に 共感し最も理解を示したメディアは、英国の『マンチェスターガーディアン(The Manchester Guardian)』であった。この新聞は次のおうに韓国人の境遇を説明している。 反日感情は数世紀の間、韓国に存在し、時折革命行為として現われた。日本は現在、満州を支 配する際の非常に成功に駆使した手段で朝鮮統治権を掌握しているが、経済的·行政的恩恵を韓 国人に与えなかった。今でも韓国人は不満を抱いており、満州の現事態が永久化されるなら、満 州に居住する3千余万の中国人も同じくするあろう。37 日本の植民統治によって生じた韓国人の反日感情が革命行為に噴出していると伝えた。 韓国人の熱望である独立問題に拡大させて説明してはないものの、なぜ上海事件が起きた かについて『マンチェスター·ガーディアン』は、事件の本質を掴んでいたと思われる。 その反面、英国の『デイリー ·テレグラフ(The Daily Telegraph)』は「最も日本人の感情を危 険なレベルまで刺激したのは、今回の犯罪ほど巧みに計算されたものはない」とし、「この極 悪行為が日王誕生の祝賀式に実行されたのは、決してただ事ではない」と報じた。韓国人の 独立運動への同情や支持ではなく、むしろ批判する傾向が強かった。 爆弾投擲者が韓国人であることが事実であり、彼は1910年日本の韓国合併後、韓国独立運動に加 担してテロ行為に積極的に参加した死を恐れない人物であると見える。……中国が韓国革命運動 を手先として利用している、という日本当局の見解を昨日、本紙特派員が報じた。そしていわゆる 大韓民国共和国臨時政府が上海に本部を置いていることも思い起こしたに違いない。38 36 “Koreans in Hawaii Ask Peking French to Aid Countrymen”, Honolulu Star-Bulletin, May 3, 1932. 37 “The Shanghai Bomb Outrage”, The Manchester Guardian, April 30, 1932. 38 “A Crime Against Peace”, The Daily Telegraph, April 30, 1932. 『デイリー ·テレグラフ』では日本が英国のように植民帝国を建設し運営する帝国主義国家 であるとの認識を共有し、植民地民族の独立を取り上げるのは、反国家行為であり国際的 にも反平和的であるという立場を露骨に表現されている。 以上のように、欧米メディアは上海事件で浮彫りにされた韓国人の熱望、すなわち韓国独 立問題についてはほとんど無関心であった。それら欧米のメディアは列強国の帝国主義論理 にしたがい、韓国独立問題には無頓着な態度を取った。大体徹底した沈黙と無関心であっ た。最大関心は満州侵略後、引き続き上海を侵略した日本が、中国との停戦交渉にどう向 き合うかにあったのである。 4) 欧米メディアの主要関心 上海の爆弾投擲で日本人高位官僚と将軍が倒れたというニュースが伝わると、欧米メディ アは、即時それを新聞1面に報道した。すると、尹奉吉義擧は一瞬全世界のトップニュース になった。しかし尹奉吉義擧をめぐる欧米メディアの主要関心は、爆弾投擲者の尹奉吉で はなかった。爆発で重傷を負った日本首脳部や日本政府の対応、今後の日中停戦協議へ の影響である。最も注目しているのは、今回の義擧が日中間の停戦協議に今後どんな影響 を及ぼすかということである。 英国の『タイムズ』は4月30日トップ記事に韓国人爆弾投擲と停戦協定に及ぼす影響につい て報道した。爆弾爆発で日本代表が負傷したこと、また「差し迫った上海停戦協定の調印 が卑劣な蛮行で延期」されたことに驚きを示した。39「犯罪は日中関係を破壊するために計画 されたかも知れないが、重要なのはマイルス ランプ(Miles Lampson)が中国と日本の満足す る解決方案を模索して上海事態が改善される瞬間にこの犯罪が発生した」と報じた。ところ で「爆弾投擲者が停戦協議締結を妨害するためなら、本紙の東京特派員の最新報道による と、彼は失敗した」と伝えた。 『デーリー ·ミラー(The Daily Mirror)』と『イルロストゥレイティドゥ·ロンドン·ニュース』では 爆弾爆発で負傷した日本人と事件現場を写真で重点的に報道された。『デーリー ·ミラー』は 4月30日に負傷した村井総領事の移送写真を大きく載せ、また爆弾惨事直後の上海の日王 39 “Outrage at Shanghai”, The Times, April 30, 1932.
100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尹奉吉義擧にたいする国内外メディアの反応 - 国内と欧米メディアを中心に - 101 誕生祝賀式の演壇写真も掲載している。一方、逮捕された尹奉吉の写真が小サイズで載っ ている。40『イルロストゥレイティドゥ·ロンドン·ニュース』の5月1日付に負傷した日本人首脳 部4人の写真を掲載、5月28日には日王誕生祝賀式行事、爆弾爆発、尹奉吉の逮捕に至る 合計五枚の写真が時間順に配置され、混乱していた虹口公園の現場を報じた41。両新聞は 日本人の被害状況に重点を置いて報道した。 ロンドン発刊の週刊誌『オブサーバ(The Observer)』の5月1日付には、爆弾投擲を悲劇と描 写し、今後の関心は、調印を控えていた日中停戦協議の見通しであると報道している。 『デイリー·テレグラフ』は「日中停戦協議が残虐な上海爆弾投擲暴挙によって悲惨にも中 断された」という論旨で日本人の被害状況を伝えた。それとともに今回の「暴挙」にたいする 英国の反応は、一は嫌悪感、二は日中外交関係に及ぼす悪影響への不安感であると伝え た。 英国外務省が日本政府に慰労電文を発送したことも伝えた。『デイリー ·テレグラフ』は 日本を庇う立場からこの事件が日中停戦協議に支障を招き、今後の平和を脅かすだろうと 展望した。 衝撃的な今回の暴挙が日中敵対心が最も尖鋭な時、中国の領土内で発生したという単純な事実が 日本に及ぼす影響は理解できる。軍と民間当局者皆はおそらく孤立した犯罪行為によって去る2ヶ 月の間仲裁と平和のために積んできた情熱的な業績が無駄にならないように最善を尽くすことを期 待する。…… 平和のために積み上げた基盤を失うことは多大な悲劇であろう。42 英国の『デイリー ·テレグラフ』は、とくに尹奉吉義擧を「暴挙」であり「反平和的な犯罪」行 為であると規定し尹奉吉義擧を糾弾したのは、英国政府が精魂を注いで推進してきた上海 平和仲裁案が失敗に終わったためである。英国政府は上海事変の直後から日中間の停戦協 議を主導してきた。4月28日ついに上海駐在英国公使ランプスン(Miles Lampson)の働きで 日中停戦協議案を調整することに成功した。停戰協議案はジュネーブの国際連盟に通知さ 40 “Five Japanese Chiefs Badly Insured, Korean`s Arrest”, The Daily Mirror, April 30, 1932. 41 “The Boming of Japanese Leaders at Shanghai: Moments Before and After the Outrage”, Illustrated London News, May 28, 1932. 42 “A Crime Against Peace”, The Daily Telegraph, April 30, 1932. れ、4月30日英国をはじめ米国、フランス、イタリアの4ヶ国代表と日中代表が上海で調印 することによって締結する予定であった。ところが、4月29日の尹奉吉義擧で全部が消えて しまったのである。 フランス言論は、尹奉吉義擧をテロと規定して日本人負傷者にかんする情況と日中間に 推進中の停戦協議問題に集中していた。『レコ·トゥ·パリ』は「上海が八人の日本高位官僚ら の命を威嚇したテロの舞台になった」とした述べ、「当テロは日中協約に重大な影響を及ぼ すと予想される」とした。43フランス言論の主な関心は虹口公園事件で停戦協議が中断され るのかそれとも続くのかであり、それにかんする日本政府の対応に注目していた。 『ルエステクレル(L’Ouest Eclair)』は5月1日「上海テロのために日本が平和協定を破ることは ないだろう」という記事で、日本政府が日中休戦協定計画と上海テロは関係ないと決めたこ と、日本軍は休戦協定が締結されることを期待していることを伝えた。44それに比して義挙 を起こした尹奉吉や韓国人の状況については少しも関心を示せなかった。 これまでフランスが管轄する租界地内においては、大韓民国臨時政府をはじめ韓国人独 立活動家の活動が配慮されてきた。ところが上海事件を契機にフランス租界地のフランス 警察は日本側の要求に応じて韓国人独立活動家を弾圧することに率先するようになった。フ ランス言論は大韓民国臨時政府を「テロ集団」であると表現するなど45、義擧直後の韓国独 立運動にたいして冷淡で無関心な態度を一貫して取った。 スイス言論は爆弾爆発で負傷した日本人の動向をしばらく報道したが、主要関心はジュ ネーブ国際連盟会議で推進されている停戦協定の締結である。『ル チュルナル トゥ ジュネ ーブ(Le Journal de Geneve)』5月1日に「虹口公園で日本の軍事宴会中に起きたテロが極東の 状況を複雑にさせ、いつものように罪のない人々を犠牲にさせてさらに物議を醸した」と伝え た。46スイス言論は尹奉吉義擧を「上海テロ」と記述し、日本政府が今回の事件と日中関係 を関連付けないことにしたのは、望ましいことと報じた。47全体的にスイス言論においては、 43 “Une bombe est lancée contre l’éta-major japonais á Shanghai”, Le echo de paris, April 30, 1932. 44 “Les Japonais Ne Rompront Pas Les Pourparlers De Paix”, L`Ouest Eclair, May 1, 1932. 45 “L’un des blessés le Dr. Kawabata a succombé”, Le Petti Parisien, May 1, 1932 46 “Chine et Japon: L’attentat De Shanghai”, Le Journal de Geneve, May 1, 1932. 47 “Japonais et Chinois vont conclure un armistice sans tenir compte de l’attentat de vendredi”, La Suiss, May 1, 1932.
102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尹奉吉義擧にたいする国内外メディアの反応 - 国内と欧米メディアを中心に - 103 国際連盟会議で締結した協議案、上海での停戦協定調印、今後の日中紛争解決のために 努力しているリトゥン調査団の活動に大きな関心が集まっていた。 米国メディアは爆発事件で日本人高位要人の負傷、爆弾を投擲した韓国人尹奉吉の逮 捕、背後人物の逮捕と関係する韓国人の逮捕など、比較的に広く報道していた。またこの 事件が日中停戦協議に及ぼす影響にも関心を示したが、それは『ニューヨーク·タイムズ』と 『ニューヨーク·ヘラルドゥ トリビューン』の報道に限られている。 『ニューヨーク·タイムズ』は4月29日の特報で、日本の将軍や駐中公使が4人負傷したこ と、最も重傷負った人は上海停戰交渉の代表重光駐中公使と村井総領事で、二人状況が 危篤であることを伝えた。続けて4月30日に、日本人居留民団長川端が死亡し、日中停戰 交渉は延期されたことを伝えた。米国務省管理の言葉で爆弾事件を嘆いたことを伝え、ま た米国政府が日本の外務省に無辜の犠牲者に慰労電文を送ったことを伝えた。48米国の他 のメディアにはない米国政府の対応を、『ニューヨーク·タイムズ』が唯一報道して、それは 被害者慰労程度の内容であった。 『ニューヨーク·ヘラルドゥ·トリビューン』は爆発事件と関係なく上海で推進していた停戦協 議の継続が決まったこと、早期に停戦協議を終了するという日本政府の立場を掲載した。49 今回の爆発事件が日本軍占領地で起きたこと、犯人が韓国人であるが日本の臣民であるこ とから、日本政府が中国を非難できないし、中国政府に抗議する意思がないという理由が その背景にあったという。 全体的に米国メディアは、爆発事件そのものに注目していた。事実報道中心に伝え、米 国政府の立場を反映したり、日本政府の立場を代弁するような報道はなかった。 4. おわりに 国内と国外のメディアに映った尹奉吉義擧は、関連国の政治的見解や民族的立場によって 報道の内容や質が多少異なって現われていた。国内メディアの場合、民族紙『東亜日報』と 48 “One Dies in Shanghai: Peace Talks Halt”, The New York Times, April 30, 1932. 49 “Shanghai Bomb No Peace Bar; Japan Decides”, New York Herald Tribune , May 1, 1932. 『朝鮮日報』は日帝の干渉と統制のために十分ではなかったが、「朝鮮青年」である尹奉吉の 近況や上海地域の韓国独立運動の状況を伝達することに努力した。総督府の機関紙である 『毎日申報』と『京城日報』は、日本政府と日本人の立場を代弁し被害者の立場から世論の 同情を得ることに努めた。 一方、欧米メディアの場合、米国メディアを除いた英国、フランス、スイスのメディア は、尹奉吉義挙を単にテロ事件と規定し、テロリストとして取り扱っている。尹奉吉という 人物がどんな人でなぜこのような大事件を断行したのかに対しては全く無関心であった。 したがって韓国人、韓国独立問題にかんする欧米メディアの認識は非常に薄弱なものであ った。 尹奉吉根拠は上海事変を起こした日本が中国と数回停戦協議を推進し、ついに4月30日 上海で協定締結を目前にする時に起きた。これによって欧米メディアは、おもに負傷した日 本人の動静と中日の間に推進中の停戦協議の推移に集中していた。日本政府は尹奉吉義 挙による混乱にもかかわらず、停戦協議を継続させる方針を迅速に公表した。日本政府も 停戦協議を早期に締結に運びたいという希望があったからである。 このような国際状況からみると、尹奉吉義挙は日本政府や国際社会にとって非常に衝撃と 当惑を与える事件であった。そこで欧米メディアは、尹奉吉義挙のニュースを大体1面トッ プ記事として報道した。その結果、尹奉吉義挙は世界のニュースになり、浮彫りにしたくな かった韓国独立問題まで間接的にでも報道せざるを得ない事情になった。 以上、新聞メディアに限って検討したため、尹奉吉義挙に関する外的様子や状況に重点 を置くしかなかった。メディアの反応を通して個々の立場や認識を明らかにすることはなかな か容易ではない。メディアのみに頼るのではなく、外国人の眼差しから見た尹奉吉義挙はど んなものだったか、また解放以前まで韓国人と韓国独立運動家の眼差しから見た尹奉吉義 挙はどんなものだったかについての検討も必要だろう。それは今後の課題にしたい。
尹奉吉義士の金観での殉観と観彰事業 105 제4 주제 第四主題 윤봉길 의사의 가나자와 순국과 현양사업 尹奉吉義士の金沢での殉国と顕彰事業 김상기(충남대학교 교수·매헌연구원 원장) 金祥起(忠南大学教授·梅軒研究院院長)
윤봉길의사의가나자와순국과현양사업 107106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1. 머리말 윤봉길은 ‘無知’가 국가 패망의 한 원인임을 깨닫고 야학을 열었으며 농촌계몽운동을 펼쳤 다. 학예회 사건과 광주학생운동을 겪고 민족적 차별을 처절하게 느꼈으며 이를 타개하기 위 해 망명하여 상해의거를 감행하였다. 60여년에 걸친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상해의거 만큼 큰 성과를 거둔 활동을 찾기가 쉽지 않다. 윤봉길은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뒤 가나자와의 일본군 제9사단 영내의 산기슭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일제는 그 유해를 육군묘지 관 리소 아래의 길 위에 암장하였다. 이 글은 윤봉길이 사형선고를 받은 후 일본으로 이송되어 오사카 위수감옥을 거쳐 가나자 와에서 순국하기까지의 과정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어서 해방 후 김구의 지시로 실시된 유해 봉환과정을 살피고자 한다. 그리고 해방 후 상해의거 기념행사와 일본에서 전개된 암장지적 의 보존과 기념사업 등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으로의 이송과정과 순국지, 그리고 현양사업에 대하여는 일부 검토된 바 있다.1 그러 나 이 글에서는 암장지적 보존과 관리에 대해 집중적으로 밝히고자 한다. 金澤 지역의 朴仁 1 김상기, 「윤봉길의 金澤에서의 순국과 순국지」, 『한국독립운동사연구』41, 2012. 김희곤, 「윤봉길의사 현양자료를 통해 본 상해의거의 역사적 의미」, 『매헌학보』3, 2014. 田村光彰, 「윤봉길 의거에 관한 일본 측의 수용양상」, 『매헌학보』3, 2014. 윤봉길 의사의 가나자와 순국과 현양사업 김상기 | 충남대학교 교수·매헌연구원 원장 祚를 비롯한 교포들과 일본 시민단체에서는 ‘윤봉길의사암장지적보존회’를 조직하여 암장지 적을 관리해 왔다.2 이들은 이곳이 윤봉길을 암장했던 곳이면서 동시에 윤봉길의 유해 일부 가 남아 있는 묘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최근 이 자리를 찾는 한국인이 급증하고 있는데 이는 이들의 정성어린 보존 노력의 결과라 할 수 있다. 2. 가나자와 이송과 순국 상해의 일본 헌병대에 구금되어 있던 윤봉길은 1932년 5월 25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이어서 상해파견군사령관(대리)은 5월 28일 당분간 사형 집행을 연기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김구의 은신처를 자백 받기 위한 때문이었다. 이시이 이타로(石射猪太郞) 일본 총영사가 우치다 고사이(內田康哉) 외무대신에게 9월 21일 보낸 공문에서 그 이유를 자세히 말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일본 총영사는 “김구 체포를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 면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지금까지 집행을 연기해 온 목적을 잃는 것”이라면서 윤봉길 사형 을 집행하는 데 찬성하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상해 헌병대의 유치장 시설이 불 완전하니 일본으로 이송하여 구금하기를 요청하고 있다. 윤봉길은 상해헌병대에서 구금되어 있으면서 김구의 은신처에 대한 자백을 강요받음은 물 론 계속된 취조를 받았다. 10월 11일에는 상해파견헌병대 육군사법경찰관 육군헌병군보 須 藤貞一郞의 취조를 받았다. 이 내용이 적혀있는 문서명 ‘청취서’를 보면 주로 유서를 쓴 내력 이 적혀 있다. 누구의 요구로 썼으며, 유서의 내용이 무엇이고, 유서 속의 이력은 사실과 맞 는지, 유서 속에 쓴 ‘시량리가’는 누구의 의뢰를 받아서 쓴 것이냐는 등을 묻고 있다. 며칠 후 인 10월 19일에 상해총영사는 외무대신에게 ‘윤봉길열사의 자서 약력과 유촉’이란 문서가 등 사판으로 인쇄되어 한인들에게 배부된 사실을 보고하면서 윤봉길을 심문한 ‘청취서‘를 첨부 해서 보고하고 있다.3 2 윤봉길의사암장지적보존회에서는 『겨레통신』이라는 잡지를 1994년 12월부터 간행하면서 암장지적 관 리, 보존 사업과 동시에 윤봉길의거 사실을 알리는 사업을 전개해 왔다(4호부터는 발행인이 매헌연구회 로 바뀌었으며, 8호까지 간행되었다). 최근 이 모임은 ‘윤봉길과 함께 하는 모임’(회장:田村光彰)으로 개 칭하여 활동하고 있다. 3 『육군성 만밀대일기』(소화 8년 12월 23일), 「윤봉길에 관한 소송 기록 반려의 건」.
윤봉길의사의가나자와순국과현양사업 109108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상해 일본 총영사는 헌병대가 장교 28명만을 남기고 11월 28일 전원 귀국하기로 함에 따 라 윤봉길을 본국으로 이송했음을 외무대신에게 보고하였다4. 일제는 상해헌병대가 철수하 게 되자 결국 윤봉길을 일본으로 이송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윤봉길은 헌병대 철수 직전인 11월 18일 일본 우편수송선 大洋丸에 실려 상해를 출발하여 고베(新戶) 항 바깥의 와다미사 키(和田岬) 水上署 대기소에 오후 2시 40분경 도착하였다. 윤봉길은 3시경 배에서 내려와 인 접한 의무실에서 간단한 건강진단을 받았다. 이어서 수갑을 찬 채로 사복 헌병에 둘러싸여 미리 준비한 쾌속선 마야마루(摩耶丸)에 태워졌다. 마야마루는 와다미사키로 향하는 척 하다 가 방향을 바꿔 미쓰비시 조선소 도크로 들어갔다. 이곳에는 미리 비밀리에 자동차 세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윤봉길은 그 중에 ‘효고 1422’호에 스기야마 조장과 함께 태워지고 10여명 의 헌병이 분승한 두 대가 앞뒤를 경계하면서 고베 시내를 종단하여 한신 국도를 통해 초고 속으로 오사카로 향했다.5 4 『외무성경찰사 支那의 部 재상해총영사관 조선민족운동 미정고 제4책』(『매헌윤봉길전집』 권2, 434쪽). 5 『대판조일신문』 1932년 11월 21일, 「창백한 얼굴의 범인 론치에서 자동차로, 사람 눈을 피한 날랜 솜씨」. 『대판조일신문』1932년 11월 21일 윤봉길을 태운 자동차는 오사카성 후문인 다마즈쿠리(玉造)문을 통해 오후 5시경 육군 위 수감옥 비상문에 도착하였다. 곧이어 위수감옥의 미결감 중앙 건물의 독방에 수용되었다. 윤 봉길은 황색으로 된 죄수복을 입었다. 식사는 군인들에게 주는 것이 제공되었다. 그는 이곳 에서 한달 가까이 독방생활을 하였다. 미야이(宮井) 형무소장의 말에 의하면, ‘고분고분했다’ 고 하니 윤봉길이 정서적으로 불안한 상태는 아니었던 듯하다. 윤봉길은 12월 18일 오사카 위수감옥에서 가나자와로 이송되었다. 윤봉길이 오사카에 구 금되어 있을 때 오사카 시내에 윤봉길 총살을 반대하는 삐라가 뿌려졌다 한다.이 활동은 일 본반제동맹의 관서위원회의 大阪泉南地區위원회에서 주도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들은 1) 8.1 반전투쟁의 국제적 캄파(カンハ ,゚ Kampa, 필자)에 대한 在大阪 혁명적 조선노동자는 선두에서 決起하자. 2) 조선인이 낳은 반제국주의자 윤봉길의 총살에 대한 반대투쟁을 일으키자.6 6 박인조, 「윤봉길의사 처형 전후의 공문서 등으로 미혹의 추리 眞相에 이르다」, 『겨레통신』제3호, 윤봉길 의사암장지적보존회, 일본, 1996.4, 126쪽. 오사카 위수감옥 터(현, 도요쿠니신사)
윤봉길의사의가나자와순국과현양사업 111110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라고 쓴 인쇄물을 각지에 배 포하였다. 따라서 일제는 오 사카에서 윤봉길의 사형을 집행하는데 부담감을 갖게 되었으며, 상해파견군의 주 력 부대였던 9사단이 있는 가나자와로 이송한 것으로 보인다. 가나자와로의 이송에 오사 카 위수감옥 미야이 소장과 스즈키(鈴木) 제5사단 검찰관 을 비롯하여 사복 헌병 4명 이 동행하였다.7 오사카에서 기차를 타고 가나자와의 모 리모토(森本) 역에 도착한 때 가 오후 5시 29분이었다. 가 나자와시에서는 헌병대는 물 론이고 히로사카(廣坂)와 다 마가와(玉川) 경찰서의 경찰 이 총동원되어 경계하였다. 윤봉길이 도착하자마자 수 갑을 채운 채 군용차에 실었 다. 오후 6시경 제9사단 법 무부에 도착하였다.8 육군 일등 군의 세가와(瀨川吉雄)로부터 건강진단을 받았으나 심신 모두 이상 없었다고 보고되어 있다. 제9사단장 아라마키(荒蒔義勝)는 육군대신 아라키(荒木貞夫)가 보낸 윤봉길의 사형명령서를 받아 군법회의 검찰관 네모토(根本莊太郞)에게 명령서를 전달하 7 『북륙매일신문』 1932년 12월 19일 석간, 「윤봉길 호송되어 오늘 아침 사형 집행」. 8 『북국신문』 1932년 12월 19일, 「사람 시선을 피하여 가나자와 역에서 도중 하차」. 였다. 사단장은 검찰관으로 부터 19일 오전 7시에 사형 을 집행할 것이라는 보고를 받고 사형장 경계를 위해 보 병 1개 소대(장교 이하 19명)의 차출을 보병 제7연대장에게 명령하고 검찰관에게는 경 계 등을 위해 가나자와 헌병 대장과 연계하도록 지시하였 다. 또한 사형장 예정지에 검 찰관과 막료들을 보내 윤봉길과 사수, 그리고 입회자 등 입장 허가자의 위치를 정하게 하였 다. 형장은 이시카와현 이시카와군(石川郡) 우치가와무라지(內川村字) 미쓰고지(三小牛地)에 있 는 가나자와 육군작업장의 서북쪽 골짜기였다. 이곳은 산속에 위치해 “公衆에 해를 입힐 위 험이 없으며 교통이 희박하고 또 동쪽의 斷崖는 높이가 약 7미터로서 총받이에 적합한 곳”이 기 때문에 형장으로 적지로 본 것이다. 윤봉길은 다음 날 아침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 간수의 말에 의하면,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그도 그날 밤은 한 숨도 자지 못했다 한다. 윤봉길은 다음 날인 12월 19일 아침 6시 30분 간 수장과 간수 2명, 헌병 3명의 호위 하에 법무부를 나와 오전 7시 15분 형장인 미쓰고지(三小 牛)산 육군작업장에 도착하였다. 이때 윤봉길은 ‘쥐색 중절모’에 ‘양복’을 착용하였다 한다. 검 찰관이 사격을 명령한 시각이 7시 27분이었다. 윤봉길의 순국시간에 대하여 11시 40분으로 나와 있는 연구물도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사수는 정, 부 2명으로 軍曹 나카노 (中野吉三郞)와 군조 요코이(橫井外吉)였다. 이들은 검찰관의 신호에 따라 형틀로부터 10미터 떨어진 위치에서 엎드린 자세로 사격하였다. 정사수가 쏜 한발이 윤봉길의 미간부를 명중시 켰다. 의관이 총상을 조사하고 절명했음을 확인하고 검찰관에게 보고하였다. 이때 시각이 시 라가와(白川義則)가 죽은 시각과 거의 같은 시간인 7시 40분이었다. 일본군 9사단 군의인 세 가와는 사체검안서에 ‘병명’을 ‘頭蓋穿透性 貫通銃創’이라고 적었다.9 9사단장은 당일 10시 7 분에 “본일 7시 40분 윤봉길에 대한 사형 집행을 무사히 마침”이라는 전보를 육군대신에게 9 『육군성 만밀대일기』(소화 8년 12월 23일), 「윤봉길 사형집행 전말 보고」(『전집』2, 398-416쪽). 윤의사 사형 집행 현장 원경(만밀대일기) 오사카성 내의 衛戌監獄圖(新谷宏 제공) 오사카성 주변 구글지도
윤봉길의사의가나자와순국과현양사업 113112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보냈다. 일본 방위청 도서실에 소장되어 있는 『만밀대일기』(1933년)에 윤의사의 순국 장면을 촬영 한 사진이 있다. 윤의사의 양쪽 눈썹 사이 중심부에 콩알 만한 핏자욱이 선명하게 보인다. 십 자가 형틀에 묶었으며 거적대기 위에 무릎을 꿇린 채 사형을 시킨 것이다. 윤의사의 유해는 일본의 감옥법에 의하면, 가족에게 인계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유해 를 관에 넣고 형장에서 약 3키로 떨어진 노다산(野田山) 육군묘지 인접한 가나자와시 공동묘 지의 서쪽 한 구석에 6척의 깊이로 매장하였는데, 종료한 시각이 10시 30분이었다. 안내소 에서 감시하기가 쉬운 곳으로 공동묘지의 통로에 평장하고 아무런 표시도 하지 않고 흔적조 차 없앴다. 윤봉길의 사형집행을 마친 검찰관은 당일 오전 11시 검찰부에서 가나자와 신문기 자단에게 윤봉길의 사형을 19일 오전 7시 40분 가나자와시의 교외에서 총살로 집행하였음을 공표하였다. 윤봉길의 유해는 신문에 의하면, 화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보도된 것과는 달리 화장하지 않았다. 육군형법에 따라 육군묘지에 묻히지도 않았다. 육군묘지 아래에 일반인이 왕래하는 통로에 암장한 것이다. 일본 육군성의 소화8년 『만밀대일기』에 의하면, “요주의자 특히 鮮人 좌경분자 또는 불령분자의 책동에 관해 헌병과 경찰의 밀접한 연계를 유지하여 엄중 경계 중 임”이라고 하여 총살형을 집행한 후 철저하게 도굴을 감시했음을 알 수 있다. 윤봉길의 유해 는 그로부터 13년 후 발굴되기 전까지 지나는 사람들에 의해 밟히고 밟혔다. 이는 유해에 대 해 모욕을 가하고자 한 일본군의 의도로 보인다. 또한 통로에 매장함으로 혹시 모르는 도굴 을 감시하기 위한 뜻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봉길의사가 순국한 바로 그 시각, 윤의사의 어머니는 아들이 안마당으로 달려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외마디 소리로 자기를 부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반가워 두 팔을 벌려 허우적대 면서 꿈에서 깨어났다. 그날 사랑방 대문 띠장〔帶杖〕이 천둥 벼락 소리에 부러져 나갔다. 며 칠 후 시량리 고향집에 윤의사의 순국 소식이 전해졌다. 국내의 모든 신문이 윤의사의 순국 사실을 앞 다투어 실었다. 배씨 부인은 베틀에 올라 베를 짜던 중에 남편의 비보를 들었다. 비보를 접한 배씨 부인은 베틀에서 내려올 줄 모르고 울음마저 삼킨 채 꿈인가 생시인가, 그 저 멍청해 있을 뿐이었다.10 윤봉길의 순국 후에도 일제의 가족에 대한 감시는 여전했다. 친일배들의 차별과 학대도 이 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유품이 집에 전달되었다. 핏자국 묻은 얼룩진 흰 손수건에 거사 당시 에 차고 있던 회중 시계와 중국 중앙은행 발행의 2角 짜리 지폐 한 장, 그리고 은전 아홉 개 가 인장과 함께 싸여 있었고, 알이 없는 안경집이 있었다. 회중시계는 거사 직전에 김구와 교 환한 것이었다. 가족들은 유품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부친 尹鬃은 아들이 사형당했다 는 소식을 듣고 1933년 2월 7일 예산경찰서에 가서 ‘유골이라도 보내주기를 간곡히 아비의 입장에서 부탁한다’면서 가나자와 위수구금소 앞으로 유골 인도신청서를 제출하였다. 일제 는 감옥령에 의해 화장한 후 묘지에 매장한 후로는 유골을 제공할 수 없다면서 유골 신청을 무시하였다.11 윤봉길은 화장을 안하고 매장되었다. 일제의 거짓된 처사를 분명히 알 수 있 다. 오히려 유골봉환을 요구하였다고 하여 부친은 덕산주재소에 불려 다니며 심문을 받았으 며 더욱 삼엄한 감시를 받았다. 모친은 아들의 순국 이후에도 괴롭히는 경찰들이 오자 ‘나마 저 죽여다오’하며 안간 힘을 쓰기도 했다. 시량리의 본가는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에 일제의 탄압으로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다행히 일제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뜻있는 이들의 위로와 격 10 배용순, 「영원한 남편 윤의사」, 『나라사랑』25, 1976, 157-160쪽. 11 『조선일보』 1933년 2월 13일, 「폭탄범 윤봉길 유해 下附 불능」. 순국지 원근, 도로 왼쪽 끝 숲
윤봉길의사의가나자와순국과현양사업 115114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려가 있었다. 미국의 켄터키주에 거주하는 韓一眞이 순국한 12월 19일자로 편지와 함께 25 불의 성금을 보냈다. 그는 편지에서 윤의사로부터 빌린 돈을 갚지 못하다가 이제 수입이 있 어 이전의 부채를 갚는 것이라 하였다. 그 후에도 한일진은 150불을 보내주었다. 한일진은 청도에서 미국으로 갈 때 윤의사로부터 여행비를 빌린 적이 있었다. 윤의사는 남은 여비를 모두 그에게 주고 자신은 세탁소에서 여비를 마련하여 상해로 갔던 것이다. 3. 유해봉환 및 효창원 안장 윤봉길의 유해 발굴과 봉환은 해방된 다음 해인 1946년 3월에 유해봉환단에 의해 추진되었 다. 해방이 되자 그해 11월에 예산군 덕산에서는 ‘윤봉길선생유골봉환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위원장에는 鄭寅英이 선임되었으며, 200여명으로 참여하였다. 이 위원회의 대표로서 金寬 龍이 1945년 11월 29일 상경하여 김구에게 그 취지를 전달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윤봉길 을 포함한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의 유해봉환과 기타 비석 건립 등 현양 사업을 정부 차원에 서 시행하겠다면서 지방 위원회의 동의를 받았다. 이에 따라 예산에서 건립된 위원회는 해소 되었다. 유해봉환단은 동경에 있던 朴烈(1902-1974)을 비롯하여 신조선건설동맹과 재일본한 인건국청년동맹의 중심 인물인 李康勳(1903~2003)과 徐相漢(1901-1967) 등에 의해 조직되 었다. 유해봉환단은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의사의 유해를 봉환하기로 하고 묘지 위치를 확 인하였다. 이봉창의사는 1932년 10월 10일 동경의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하고 사이타마현 우라와(浦和)시에 있는 우라와형무소에 매장되었다. 봉환단은 우라와형무소에서 敎誨師로 일했던 일본인을 찾아 이봉창의사가 우라와형무소의 부속묘지에 묻혀있다는 것을 확인하여 유골을 수습할 수 있었다. 백정기의사의 유골은 이강훈이 같은 감옥에서 옥고를 치 렀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윤봉길의사의 유골을 찾아야 하는데, 장소를 확인할 수 없었다. 서상한과 이강훈을 비롯한 4명의 ‘임시정부유해발굴단’이 가나자와에 도착한 것은 3월 2일 오전 10시경이었다. 3월 3일부터 위치를 고증받기 시작하여 육군묘지 경내에 묻혔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가나자와에 거주하는 청장년들은 역할을 분담하고 작업 도구를 준비하는 등 발 굴을 시작하였다. 徐城民이 발굴본부장을 맡았으며, 朴甚燮, 金昌律, 朴東祚, 朴聖祚, 盧慶 洙, 具範植, 金基億 등 여러 명이 발굴에 참여하였다. 본격적인 발굴 작업은 3월 4일부터 시 작하였으나 찾을 수 없었다. 3월 6일 박성조씨가 매장할 때 독경을 했다는 覺尊院의 야마모 토 료도(山本了道)라는 여승의 도움으로 매장지를 확인하여 발굴할 수 있었다. 드디어 피 묻 은 옷이 보이고, 유골이 나타났다. 모든 이가 하던 일을 멈추고 묵념을 올렸다. 의대생이었던 朱鼎均 등 2인이 들어가 유골을 수습해서 ‘殉國義士尹奉吉之柩’라고 쓰여진 새 관에 옮겼다. 유해는 가나자와 재일본조선인연맹 본부 사무실에 옮겨졌다가 3월 8일 아침 가나자와 역 을 떠나 다음 날 아침 도쿄의 우에노역에 도착하였다. 먼저 발굴한 이봉창 백정기의사의 유 해는 동경의 神田 오키쿠보(荻규)에 있는 전 일본육군대학 건물 내의 신조선건설동맹 사무실 에 모셔져 있었다. 윤의사의 유해가 우에노역에 도착하자 이미 사무실에 안치되어 있던 李 奉昌, 白貞基의사의 유해를 앞세우고 나가 윤의사의 유해를 맞이했다. 그리고 청년동맹원 3 천여명이 3의사의 유해를 앞세우고 이봉창의사가 폭탄을 던졌던 앵전문 안으로 들어가 이봉 창의사를 기리는 연설을 하고 애국가 제창을 하며 일본 왕이 있는 황궁안을 떠들썩하게 만세 삼창을 하고 다시 본부 사무실에 안치했다. 박열을 비롯한 수많은 동포들과 학생들의 참배가 있었다.12 윤봉길의 유품 중에 자색 양복, 중절모자, 검정 구두는 1946년 4월 25일 신조선건설동맹 중앙본부 부위원장을 맡고 있던 이강훈이 외무 부장 劉虎一, 차장 金正柱, 金基成 등과 함께 가지고 서울로 왔다. 이 유품들은 서울 죽첨동의 김구의 숙소에 안치하였다. 윤봉길을 비롯 한 3의사의 유해는 맥아더 사령부의 군함 편으로 5월 15일 아침 9시 부산에 도착하여 대창동 남선고녀에 봉안하였다. 김구의 지시에 따라 일본에 있는 교포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순 국열사유골봉안회’의 대표인 서상한은 건국촉성청년동맹의 朴根世, 재일본상공회의 趙春美, 학생동맹의 白相弼 등과 함께 윤봉길을 비롯한 이봉창, 백정기, 金淸光, 金錫水, 洪性周, 朴 尙祚 등 7인의 유해를 모셔왔다. 이들 유골은 5월 17일 부산 중구의 大倉町(현, 중앙동)에 있 는 부립유치원에 차려진 빈소에 옮겨 봉안되었다. 그리고 5월 31일 오후 6시부터 대한독립 촉성회 주최로 추도회를 개최하였다.13 윤봉길을 비롯한 3의사의 유해는 6월 16일 서울로 옮겼는데, 그 전날인 6월 15일 부산공 설운동장에서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추도식을 하기 전에 김구는 부산에 도착하여 빈소에 가 서 분향하고 참배하였다. 이어서 추도식은 15일 정오 崔碑鳳의 사회로 거행되었다. 식은 국 12 이강훈, 『민족해방운동과 나』, 제3기획, 1994, 208쪽 13 『부산일보』 1946년 6월 2일.
윤봉길의사의가나자와순국과현양사업 117116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기배례, 애국가합창, 독립기원의 묵상, 추도주악, 식사가 있은 다음, 서상한으로부터 3의사 약력 보고가 있었다. 이어 각 단체 대표의 분향을 마치고 김구의 훈화와 金相淳의 답사가 있 었다. 그리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여 폐회하였다.14 다음 날인 6월 16일 아침 윤봉길의사는 동생인 윤남의의 품에 안겨 김구 일행과 함께 특급 열차 ‘해방자’호로 부산을 떠나 오후 5시 40분경에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서울 역 프래트홈에 는 金奎植 박사를 비롯하여 元世勳, 趙琬九, 咸尙勳 등 정당 단체와 신문사 대표 등이 도열 하여 삼의사의 유해를 봉영하였다. 마침 소낙비가 내렸다. 요란하던 전차 소리와 자동차 소 리도 빗소리에 묻히고 청년단체들의 조기 앞에서 소년단의 주악소리에 맞춰 마중 나온 이들 은 일제히 머리를 숙이고 감격과 비통의 눈물을 흘리며 3의사의 봉영식을 거행하였다. 봉영 식이 끝난 후 유해는 봉영차에 모셔져 지금의 조계사인 태고사에 안치되었다. 윤봉길을 비롯한 3의사의 국민장은 처음에는 6월 30일로 예정되었다. 연일 조문객이 태고 사를 찾아왔으며, 6월 21일까지 수납된 부의금이 12,475원 50전이라고 하였다. 30일 거행 하기로 한 장례식은 갑작스런 폭우로 연기되어 7월 6일 거행되었다. 오전 10시에 태고사에 서 발인식을 거행한 후 유해를 실은 운구차는 효창원을 향했다. 태극기를 선두로 소년군악 대, 각 정당 단체의 화환과 조기, 그 뒤에 무장결찰대가 경호하고 이어서 태극기로 쌓인 큰 달구지 모양의 운구마차를 남학생들이 인도하고 여학생들이 뒤를 따랐다. 윤봉길의사의 운 구마차 앞에는 영정과 함께 십자가 모양의 사형틀을 모셨으니 길옆에 늘어서 있는 시민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였다. 운구차는 남대문을 지나 12시에 효창원에 도착하였다. 추도식에 는 김구와 이승만을 비롯하여 李始榮, 呂運亨, 嚴恒燮을 비롯하여 5만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 하였다. 오후 1시부터 이강훈의 사회로 시작한 추도식은 조완구의 식사에 이어 김구를 비롯 한 여러 명의 제문 낭독이 있었다. 이어서 삼의사의 유족을 시작으로 영전에 분향을 하고 오 후 3시반경에 하관식을 거행하여 장례식은 끝을 맺었다.15 14 『동아일보』 1946년 6월 17일. 『조선일보』, 1946년 6월 17일. 15 『서울신문』 1946년 7월 7일, 「추도! 삼열사의 국민장」. 『자유신문』 1946년 7월 7일, 「백만 시민의 오열 속에 삼열사의 국민장 종료」. 4. 현양사업 1) 상해의거 및 순국 기념행사 윤봉길이 순국한 뒤 김구를 비롯하여 임시정부 요인들은 상해의거일인 4월 29일과 윤의사의 순국일인 12월 19일이 되면 매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미주에서도 한인들은 윤의사가 순국했 다는 소식을 듣고 추도회를 개최하였다. 1932년 12월 26일 오후 8시에 로스엔젤레스의 흥사 단소에서 국민회 주최로 추도식이 있었다. 이 추도회에서는 LA 여자애국단의 현신성 단장과 흥사단 김성권 이사부 대표의 추도사가 있었다. 또 샌프란시스코 지방회도 같은 날 7시 30분 에 한인예배당에서 추도회를 개최하였다. 홍언의 윤의사의 약력 발표가 있었으며, 김훈의 추 도사가 있었다. 또한 중가주 지방의 한인들도 같은 날 오후 2시에 교회에서 80여명이 모여 추도식을 거행하였다.16 해방과 함께 임시정부 요인들은 속속 환국하였다. 김구는 개인 자격으로 1945년 11월 26 일 귀국하였다. 김구는 귀국 직후 신문을 통하여 윤봉길의사의 유가족을 만나고 싶다고 광고 하였다. 김구가 유가족을 찾는다는 소식에 윤봉길의 둘째 동생 尹璿儀는 12월 2일 조카 윤종 을 데리고 상경하여 오전 11시 반에 경교장에서 김구를 만났다. 윤종은 당시 서산농림학교 3 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 자리에서 김구는 尹淙의 손을 잡고 유족의 상황을 묻고 격려하였 다. 그리고 13년전 윤봉길을 만난 이야기부터 홍구공원 의거의 진행 과정에 대하여 상세한 전말을 설명해 주었다. 윤종은 김구를 만나고 나와 웬일인지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아서 김구 선생을 바로 뵈옵지도 못했습니다. 소학교 때에 세곡(細谷) 이란 일인 교원은 나를 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아이라고 전교에 선전을 하고 구박을 받던 생각을 하 면 이가 갈립니다.17 라고 말했다. 김구는 1946년 4월 27일 趙素昻, 金昌淑, 安在鴻, 權泰錫 등과 함께 덕산 윤봉길 고택을 16 『신한민보』 1933년 1월 12일, 「윤봉길의사 추도회」. 17 『자유신문』 1945년 12월 3일, 「윤의사 遺兒 淙君 김구 선생과 마침내 대면」.
윤봉길의사의가나자와순국과현양사업 119118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찾아갔다. 정거장에서 고택까지는 황토를 깔아 국왕의 예우를 하였다. 김구는 윤의사의 부모 를 비롯하여 미망인 裵用順여사, 그리고 아들 윤종 등 유족을 예방하고 위로하였다. 고택 앞 에서 김구를 비롯한 안재홍 민정장관 등 각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의거 14주년 기념식 을 거행하였다. 예산군의 인사들이 거의 참석하였고, 다른 지역에서도 부인회, 청년회, 경찰 서, 학교 등지에서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인근의 주민들도 참석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식은 기념준비회장 김병욱의 개회사에 이어 김구의 기념사, 그리고 조경한의 보고가 있었다. 오후 4시에 식을 마친 김구는 조성환 전 임시정부 군무부장과 함께 윤의사의 집에서 하루 밤 을 묶었다. 그날 밤 김구는 ‘어디서 장례식을 치르면 좋겠소?’라고 부친과 유해 봉안과 영결 식에 이르는 절차까지 상의했다. 부친은 온 가족을 모아놓고 가족회의를 열었다. 그리하여 ‘중앙에 일임하도록 하자. 고향이든 어디든 그분들의 의사에 일임하자’고 결론짓고 그 뜻을 김구에게 전달하였다. 김구는 배씨부인을 만나 ‘친딸과 같이 생각하겠다. 살기가 어려울테니 서울로 올라오라’고 권했다.18 김구는 틈틈이 배 여사에게 생활비를 부쳐주었다. 송금 명목은 ‘백범이 집주인 윤봉길씨에게 오래전에 진 채무를 갚아주는 형식’이었다 한다. 배씨부인은 백 범의 배려로 서울대병원에서 부인병을 치료받았는데, 퇴원하기 전날에 백범은 암살을 당했 으니 부인은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1946년 4월 29일 해방 후 처음 맞이하는 상해의거일이었다. 서울운동장에서 상해의거를 추모하는 기념대회가 열렸다. ‘윤열사의거기념회’의 주최로 열렸는데, 이 기념회를 발기한 이들은 이승만과 김구를 비롯하여 조소앙, 김창숙, 金奎植, 權東鎭, 洪震, 安在鴻 등 각계 인 사 83명에 달했다. 기념식은 4월 29일 오후 1시부터 엄숙히 개최되었다. 식장의 중앙에 제 단을 차리고 윤의사의 영정을 모셨으며, 각 정당과 단체 대표, 유가족, 내빈과 학생 등 수만 명이 참석하였다. 기념식은 국기게양과 애국가 합창에 이어 김구의 기념사가 있었다. 조경 한의 약력보고와 엄항섭의 의거 상황 보고가 있고, 2분간 묵념이 있었다. 경기고녀와 이화 대학 합창대의 합창에 이어 이승만의 축사가 있었다. 이어 홍진과 러취 군정장관의 축사를 뉴맨 공보국장이 대독하였으며, 중국교민대표 丁元幹과 조소앙의 축사에 이어 공산당대표 洪南杓, 한민당 대표 金性洙, 인민당 대표 申敬哲, 신민당 대표 白南雲, 재미한족연합회 대 표 韓始大 등 여러 내빈의 간곡하고 정중한 축사가 있은 후 김구로부터 유가족에게 위문품 18 『주간여성』 273호, 1974년 4월 14일, 85-92쪽. 증정이 있었다.19 1949년 4월 29일 고향인 예산군의 옛 호서은행 앞에 윤봉길 열사비를 건립하였다. 이 비 는 상의의거 16주년 기념으로 예산군 교육회와 충청남도선열유적보전회가 건립하였다. 비문 은 위당 정인보가 짓고 김충현이 썼다. 제막식에는 김구도 참석하여 이를 축하하였다. 정부 에서는 1962년 3월 1일 윤봉길에게 건국공로훈장 중장을 추서하여 공적을 기렸다. 2) 일본 암장지적비와 순국비 건립 윤봉길의 유해가 고국에 안장된 지 오래 지난 1990년 가나자와에 거주하는 박인조는 시민의 모임을 만들어 암장되어 있던 곳에 기념비를 세우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1946년 발굴시 현 장책임자였던 박동조의 동생인 박인조는 유해 발굴 작업에도 참여했는데, 가나자와에 살면 서 암장지 근처에 자주 왕래했다 한다. 그는 태평양전쟁 때 ‘소학교’를 다녔는데 매년 춘추로 육군묘지에서 전몰자위령제 행하기 전날마다 대청소에 동원되었다 한다. 청소 후 모은 쓰레 기를 선생의 지시에 따라 윤의사가 매몰되어 있던 곳 바로 위에서 소각했다 한다. 윤의사가 암장되어 있던 곳이 소각장이었던 것이다. 박인조는 3년간 6회에 걸쳐 소각 작업을 했다 한 다. 당시 그 사실을 몰랐지만, 발굴 후에 생각하니 너무나 비참했고, 끔찍했다고 한다. 그는 일제의 윤의사에 대한 ‘2중 3중의 처형’은 진실로 나쁜 소행으로 여겼다. 민족 영웅을 짐승보 다도 더 열등한 대우인 암장한 것에 분노했고 자신도 반성하게 되었다 한다.20 그는 암장지에 아무런 표시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같은 민족으로서 중대한 사실을 영원히 기념해야 할 의무가 있고, 또 재일의 자손들에게 전해야만 한다”21고 생각하고 암장지를 영구 보존하기로 결심했다. 유체 발굴 사진 15매를 재일동포들에게 증거 로 보여주며 보존운동을 개시했다.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난 1987년 발굴 사진과 유해발굴자 의 생존이 한국 측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88년 3월 윤의사의 동생인 尹南儀와 尹 炳奭 교수가 가나자와를 방문하여 암장지적을 보존하는 문제를 협의했다. 1991년 11월 ‘매헌윤봉길의사의거60주년기업사업회’(회장, 김영삼)가 조직되어 윤의사 현 19 『조선일보』 1946년 4월 29일, 「숭고한 이 애국의 혈조(血潮) 흐르라 끊임없이 수 만대에」. 20 박인조, 「영원히 빛나는 윤봉길」, 『겨레통신』제4호, 1993.4, 21쪽. 21 박인조, 「제4장 암장적지보존운동」, 『겨레통신』창간호, 1992.12, 37쪽.
윤봉길의사의가나자와순국과현양사업 121120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창사업을 추진하였는데, 그 일환으로 가나자와에 윤의사 순국기념비 건립을 추진하였 다. 이에 따라 암장지적의 남 남서쪽 200미터 위 30평 정 도의 대지 위에 윤봉길의사 순국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순국기념비는 우리나라 돌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에 따라 서울 망우리의 한양석재공업 에서 만들었다. 기념사업회 에서는 한국식 거북 모양의 받침돌인 龜趺와 碑身, 龍冠 을 조각하여 金澤항까지 보 냈다. 용두는 거북이 형태로 했으며, 비신은 세로 9자 1 치, 가로는 3자, 폭은 2자로 했다. 비의 본체는 한국에서 조각하였으며, 난간은 한국의 원석을 가나자와에서 가공하였다. 기념비는 한국을 향해 세워 졌다. 기념사업회와 재일민단에서 4월 21일 오전 11시에 개최한 제막식에는 李康勳 광복회 장, 朴永錫 국사편찬위원장, 尹南儀 유족대표, 丁海龍 재일거류민단장 등 2백여 명이 참석 하였다. 한편 박인조 등 교포들과 일본 시민단체는 1990년 이후 암장지 정비보존운동을 펼쳐왔다. 순국기념비를 건립한 뒤 박인조는 암장지에 비석을 건립하여 후세의 교육장으로 만들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따라 ‘指紋押捺問題를 함께 생각하고 공부하는 金澤市民의 모임’을 비롯한 ‘眞宗大谷派’, ‘가톨릭金澤교회 정의와 평화위원회’,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전쟁희생자를 생 각하고 가슴에 새기는 金澤주선인회’ 등 일본 시민 단체가 참여하여 1991년 1월 ‘윤봉길암장 지적을 생각하는 모임’(이하 暗葬會라 약칭, 회장:鶴圓裕)이 조직되었다. 암장회에서는 1992년 4월 13일 가나자와시에 영구보존공사계획서를 제출하였다. 이들은 신청서에 이 사업은 ‘양 윤봉길의사 암장지적의 석실도 윤봉길의사 암장지적 민족의 우호관계에 절대 도움’이 되고, ‘국제적 상호 이해의 구체적인 증거’이며, ‘과거 역사 에 대한 반성과 미래에의 전망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면서 매장지를 조속히 정비, 보존할 것을 요청하였다.22 암장회에서는 공사 설계안을 확정하여 가나자와 시에 제출한 뒤 공사비 200만원 확보를 위한 시민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그해 9월 16일 가나자와시로부터 설계 안의 승인을 받았으며, 동시에 6.6㎡의 암장지적을 영구히 무상 대여받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10월 16일 착공식을 거행하였다. 비석은 기후현의 金相基가 기증한 자연석이다. 제막 식은 12월 19일 거행하였는데, 제막식 하루 전인 12월 18일 비석 아래에 석실을 만들어 윤 봉길의사의 약력을 적은 誌石과 影幀, 그리고 발굴 당시의 遺體 사진을 넣어 두었다. 약력 에는 출생과 의거일, 순국일, 발굴일, 그리고 비석 건립일을 적었다. 암장지적의 석실을 다 음과 같다. 제막식은 서거 60주년을 기려 1992년 12월 19일 거행하였다. ‘尹奉吉義士暗葬之跡’이라 쓴 題字는 재일서예가 申仁弘의 작품이다. 암장지적 제막식에 대한 일본 언론의 보도가 이 어졌다. 제막식 다음 날인 12월 20일자의 『朝日新聞』은 「‘抗日義士’비를 제막」 , 『每日新聞』 은 「戰前의 조선의 ‘義士’ 매장적지를 정비, 보존」, 『中日新聞』은 「조선독립운동의 英雄 윤 봉길 足跡 찾는 석비 완성」, 『北國新聞』은 「金澤에서 처형한 한국 義士 尹團員 매장지에 석 비」등의 제호 아래 상세히 윤의사의 행적과 제막식 내용을 보도했다. 공사를 추진하는데 총 25회에 걸친 관련 회의가 있었으며, 연인원 200여명이 참가했다. 구 성원의 민족의 차이, 연령의 차이, 생각과 감각의 차이 등으로 시행착오가 많았다. 그러나 시 민단체 구성원들의 단결로 훌륭한 성과를 낼 수 있었다. 공사를 마친 뒤 암장회는 해산하고 ‘암장지적보존회’를 조직하여 신임 회장에 전 국회의원 이도오 마사도시(習+元正敏)을 선임했다. 공사를 감독했던 박인조(보존회 부회장)는 1993년 3월 자료함을 설치하여 팜프레트와 앙케트 용지 등을 보관하도록 하였다. 그해 4월에는 보존회 가 金澤시로부터 암장지적의 유지 관리를 인계받았다. 그리고 5월에는 수납장을 만들어 청 소도구를 상비할 수 있게 하였다. 보존회에서는 윤의사 순국 65주년을 맞이하여 1997년 암 장지 입구에 윤의사가 집을 떠날 때 지은 글인 ‘丈夫出家生不還’이라고 새긴 비를 세우고 주 변에 무궁화를 심어 성역화하였다.23 22 『겨레통신』창간호, 「市側에 제출한 요망서(92년 4월 13일)」, 1994.12, 40-42쪽. 23 『매일신문』 1997년 4월 22일, 「조선의 항일운동가 윤봉길의 시비가 완성」.
윤봉길의사의가나자와순국과현양사업 123122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졌다. 윤의사가 순국한 뒤 김구를 비롯하여 임시정부 요인들은 상해의거일인 4월 29일과 순국 일인 12월 19일이 되면 매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해방 후 환국한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윤의사 고택을 예방하고 위로하였다. 1946년 4월 29일에는 서울운동장에서 상해의거 기념 식을 거행하였다. 1990년 가나자와의 박인조를 비롯한 지역인들은 윤의사의 암장을 추모하는 기념비 건립 운동을 펼쳤다. 1991년 한국에서도 매헌윤봉길의사의거60주년기념사업회가 조직되어 윤의 사 현창사업을 진행하였다. 이에 따라 1992년 4월 암장지 위쪽에 윤봉길의사순국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가나자와의 ‘指紋押捺問題를 함께 생각하고 공부하는 金澤市民의 모임’ 등 4개 시민단체에서는 1991년 1월 ‘윤봉길암장지적을 생각하는 모임’을 조직하고 1992년 4월 가나 자와시에 암장지의 영구보존공사계획서를 제출하여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시민 모금운동으 로 공사비를 확보하여 1992년 12월 19일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윤의사가 암장되어 있던 자 리에는 석실을 만들어 지석과 사진을 넣었다. 발굴 당시 윤의사의 머리카락과 일부 뼈를 수 습하지 못했으니, 암장지는 윤의사의 암장을 추모하는 의미 이외에 윤의사의 묘라고 해도 과 언이 아니다. 암장지적비를 건립한 이후 지금까지 월진회 일본지부와 일본인으로 구성된 ‘윤봉길의사와 함께 하는 모임’은 암장지적을 보존, 관리하고 윤의사의 업적을 현창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는 한일 간의 우호와 협력, 나아가 동아시아의 평화 구축에 크게 기여해 나갈 것으로 믿는다. 향후 윤의사의 순국지도 확인하여 이를 기념하는 사업도 진행해 나갈 수 있기를 기 대한다. 그러할 때 한일 간의 민족적 화해의 계기가 될 것이다. 암장지적은 위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발굴에 참여했던 朴基東의 증언에 의하면 윤의사의 두발이 흙에 얽혀있어 수집할 수 없었다 한다. 그래서 동경에서 온 발굴 요원들과 협의한 끝에 암장지에 그대로 묻었다. 또 유골 수습을 한 朱鼎均도 뼈 7쪽을 수습하지 못했다 한다. 암장지적 공사를 추진한 박인조가 “영구보존 공사를 한 암장지적은 윤의사의 묘라고 해도 틀림없다고 생각한다”24라고 말한 바 있는데,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 어 보인다. 박인조는 비석이 건립된 이후 2009년 작고할 때 까지 암장지적을 관리하는 데 정 성을 다했다. 예산의 월진회에서는 박인조를 월진회 일본지부장으로 임명하고 매년 공동으 로 행사를 진행하였다. 박인조가 갑자기 작고하게 됨에 따라 그의 조카인 박현택이 유지를 받들어 암장지적을 관리하고 있다. 또한 일본인들로 구성된 ‘윤봉길의사와 함께 하는 모임’ (회장;田村光彰)이 결성되어 월진회 일본지부와 함께 윤봉길의사의 업적을 현창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5. 맺는말 윤봉길은 사형 집행이 연기된 채 일본으로의 이송이 결정되었다. 1932년 11월 18일 고베항 의 미쓰비시 조선소 도크로 이송된 윤봉길은 준비한 자동차로 오사카 위수감옥에 이송되어 독방에 감금되었다. 오사카에서 일본반제동맹원들의 윤의사 총살형 반대 운동이 벌어지자, 일제는 한달 뒤인 12월 18일 가나자와 9사단 사령부 법무부로 윤의사를 이송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7시 40분경 육군작업장의 산기슭에서 시라가와가 죽은 시간에 맞춰 사형을 집 행하였다. 윤의사의 유해는 가족에게 인계되어야 함에도 노다산 육군묘지 관리소 옆의 통로 에 암장하였다. 혹시 모를 도굴을 감시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고 하나 이는 유해에 대한 분 명한 모욕이었다. 해방 후 김구의 지시에 의해 1946년 3월 ‘삼의사 유해봉환단’이 조직되었다. 윤의사의 유 해 발굴은 徐城民 등 가나자와 거주 청년들에 의해 3월 2일부터 시작되었으나, 매장지 확인 이 늦어 3월 6일에야 이루어졌다. 유해는 도쿄를 거쳐 5월 15일 부산항에 도착하였으며, 6월 16일 서울로 옮겨 태고사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7월 6일 성대한 국민장으로 효창원에 모셔 24 박인조, 위 글, 23쪽.
124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尹奉吉義士の金沢での殉国と顕彰事業 125 1. はじめに 尹奉吉は、<無知>というのが国家敗亡の一原因であると考え、夜学を開き、農村啓蒙の運動を 起す。学芸会事件と光州学生運動の経験から民族的差別のことを深く感じ、これを打開すべ く亡命し、上海義挙を敢行する。60年あまりの独立運動の歴史の中で上海義挙ほど大きい成 果を成し遂げた活動は見受けられない。尹奉吉は逮捕され死刑宣告を受けた後、金沢の日本軍 第9師団の領内の山の麓で銃殺刑で殉国した。日帝はその遺骸を陸軍墓地管理所の下の道路 の上に暗葬した。ここでは尹奉吉が死刑宣告を受けた後、日本に移送され大阪衛戍刑務所を 経て、金沢で殉国するまでの過程を検討したい。さらに解放後、金九の指示で実施された遺骸 奉還の過程をも探ろる。そして、解放後の上海義挙の記念行事と日本で展開された暗葬之跡 の保存と記念事業などについて明らかにする。 日本への移送過程と殉国地、それから顕彰事業については一部の検討がある。1 ここでは 主に暗葬之跡の保存と管理に対して明らかにしたい。金沢地域の朴仁祚を始め在日同胞た ちと日本の市民団体では<尹奉吉義士暗葬之跡保存会>を組織し、暗葬之跡を管理して 1 김상기 「尹奉吉の金澤での殉国と殉国地」 『韓国独立運動史研究』41、2012 김희곤「尹奉吉義士の顕彰資料を通してみた上海義挙の歴史的意味」, 『梅軒学報』3、2014 田村光彰「尹奉吉義挙に関する日本側の受容の様相」『매헌학보』3、2014 きた。2 彼らはここが尹奉吉を暗葬した所であると同時に尹奉吉の遺骸の一部が残っている墓 でもあるという認識を持っている。最近この場所を訪れる韓国人が急増しており、これは彼 らが保存のために尽くしてきた努力の結果であると言える。 2. 金沢への移送と殉国 上海の日本憲兵隊に拘禁されていた尹奉吉は1932年5月25日軍法会議で死刑宣告をうけ る。その後、上海派遣軍司令官(代理)は5月28日、暫く死刑の執行を延期するという命令を 下すのだが、これは金九の隠れ場を自白させる為であった。日本総領事である石射猪太郞 が外務大臣の內田康哉に9月21日送った公文書の中でその理由を詳細に述べている。それ によれば、日本総領事は<金九を逮捕するため努力してきたことを考慮すれば、死刑を執 行することは、執行を延期してきた目的を失う>と述べ、尹奉吉の死刑執行について賛成 し難いと言っている。一方で上海憲兵隊の留置場の施設が不完全であることを理由に尹奉 吉を日本に移送して拘禁することを要請する。 尹奉吉は上海憲兵隊に拘禁、金九の隠れ場を自白するように尋問され取り調べを受け る。10月11日には上海派遣憲兵隊の陸軍司法警察官である陸軍憲兵軍保の須藤貞一郞に 取り調べを受けた。その内容を書き留めた文書名<聴取書>には遺書を書くまでの来歴が 書かれている。誰の要求で書いたのか、遺書の内容は何であるか、遺書の中の履歴は事実 と合っているかどうか、遺書の中に書いた<柿梁里歌>は誰の依頼によるものか等である。 数日後の10月19日上海総領事は外務大臣に<尹奉吉烈士の自書略歴と遺嘱>という文書 が謄写版で印刷され韓国人に配布されたことを報告する一方、尹奉吉を尋問した<聴取 書>を添付している。3 上海日本総領事は、憲兵隊の将校28人を残し11月28日全員帰国することになり、尹奉吉 を本国に移送していることを外務大臣に報告した。4 日帝は上海憲兵隊が撤収することによ 2 尹奉吉義士暗葬之跡保存会では『キョレ通信』という雑誌を1994年12月から刊行し暗葬之跡管理及び保存事 業と同時に尹奉吉義挙を知らせる事業を展開してきた(4号からは発行人が梅軒研究会に変更、8号まで刊行 された)。この会は最近"尹奉吉と共にいる集い"(회장:田村光彰)に改称して活動している。 3 『陸軍省万密大日記』(昭和8年12月23日) 「尹奉吉に関する訴訟記録返戻の件」 4 『外務省警察史 支那の部 在上海総領事館朝鮮民族運動 未定稿第4冊』(『梅軒尹奉吉全集』 巻2、p434) 尹奉吉義士の金沢での殉国と顕彰事業 金祥起 | 忠南大学教授 ·梅軒研究院院長
126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尹奉吉義士の金沢での殉国と顕彰事業 127 り尹奉吉を日本に移送することを決めた。尹奉吉は憲兵隊の撤収の直前である11月18日日 本郵便輸送船の大洋丸に乗せられ上海を出発し午後2時40分ごろ神戸港の外の和田岬の水 上署の待機所に着いた。尹奉吉は3時頃船から降り、隣接した医務室で簡単な健康診断を 受ける。それから手錠がかけられたまま私服憲兵に囲まれて予め準備されていた快速船の摩 耶丸に乗せられた。摩耶丸は和田岬に向かう振りをして方向を変え、三菱造船所のドックに 入る。前もって密かに車3台が準備されていた。尹奉吉は<兵庫1422>号に杉山組長ととも に乗せられた。10名くらいの憲兵が分乗して乗った2台の車が前後を警戒する中、神戸市内 を縦断して阪神国道を通り超高速で大阪に向かう。5 尹奉吉を乗せた車は大阪城の後門である玉造を通り、午後5時頃陸軍衛戍刑務所の非常 口に到着する。尹奉吉は直ちに衛戍刑務所の未決監中央建物の独居房に収容された。尹 奉吉は黄色の囚人服を着た。食事は軍人と同じものが提供された。彼はここで一ヶ月近く 独居房での生活をする。宮井刑務所長によると、尹奉吉は<すなおだった>と言い、情緒 的に不安に状態ではなかったようである。 尹奉吉は12月18日大阪衛戌刑務所から金沢に移送された。尹奉吉が大阪に拘禁されて いた時、大阪の市内に尹奉吉の銃殺を反対するチラシが撒かれたと言う。この活動は日本 反帝同盟の関西委員会の大阪泉南地区委員会が主導したと知られている。彼らは 1) 8.1 反戦闘争の国際的カンパ(カンパ, Kampa)に対する在大阪革命的朝鮮労働者は先頭で決起す る。 2) 朝鮮人が産んだ反帝国主義者尹奉吉の銃殺に対して反対闘争を起こす。6 と書いた印刷物を各地に配布した。これで日帝は大阪で尹奉吉の死刑を執行することに 負担を感じ、上海派遣軍の主力部隊であった第9師団のある金沢に移送したと考えられる。 金沢への移送に大阪衛戍刑務所のみやい所長と鈴木第5師団の検察官を初め、私服憲 兵4名が同行した。7大阪から汽車に乗って金沢の森本駅に着いた時間が午後5時29分はだっ た。金沢市では憲兵隊は勿論、廣坂と玉川警察署の警察が総動員になって警戒にあたる。 5 『大阪朝日新聞』 1932年11月21日「蒼白な顔の犯人、ランチから自動車に、人の目を避けた素速い実力」 6 朴仁曹「尹奉吉義士処刑前後の公文書によると疑惑の推理、眞相に迫る」 『ギョレ通信』第3号、尹奉吉義士 暗葬之跡保存会、日本、1996年4月 p126 7 『北陸毎日新聞』1932年12月19日夕刊 「尹奉吉 護送されて今朝死刑執行」 『大阪朝日新聞』1932年11月21日 大阪衛戍刑務所の跡(現, 豊国神社)
128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尹奉吉義士の金沢での殉国と顕彰事業 129 尹奉吉が到着すると手錠を かけ軍用車に乗せ、午後6 時頃第9師団の法務部に到 着した。8 陸軍一等軍医の 瀨川吉雄から健康診断を受 け、心身共異常なしと報告 された。第9師団長の荒蒔 義勝は陸軍大臣の荒木貞夫 が送った尹奉吉の死刑命令 書を受け取って軍法会議の 検察官である根本莊太郞に 命令書を渡した。師団長は 検察官から19日午前7時に 死刑を執行するという報告 を受け、死刑場の警戒のた めに歩兵1個小隊(将校以下 19名)の派遣を歩兵第7連隊 長に命令し、検察官には警 戒のため金沢憲兵隊長と連 携するように指示した。な お、死刑場の予定地に検察 官と幕僚を送り尹奉吉と打 手、それから入会者など入 場許可者の位置等が決められる。刑場は石川県石川郡內川村字三小牛地にある金沢陸軍 作業場の西北部の谷であった。ここは山の中に位置し<衆に害をおよぼす危険がなく、交 通が不便でなお東の断崖は高さ約7メ トールであるので銃を発射しても安全な適切な所>で あるので刑場として適地と考えられたのである。 8 『北陸新聞』1932年12月19日「人の目を避け、金沢駅で途中下車」 尹奉吉は翌日の朝まで睡 眠をとることが出来なかっ た。刑務官の話によると、 自信満々であった彼もその 夜は一睡もできなかったとい う。尹奉吉は翌日の12月19 日の朝6時30分刑務長と刑 務官2名、憲兵3名の護衛の 下、法務部を出て午前7時 15分刑場である三小牛山陸 軍作業場に着いた。この時尹奉吉は<ネズミ色の中折れ帽>に<スーツ>を着ていたとい う。検察官が射撃を命令した時刻は7時27分であった。尹奉吉の殉国時間が11時40分だと いう研究もあるが、これは間違いと考えられる。打手は正、副2名で軍曹中野吉三郞と軍曹 橫井外吉であった。彼らは検察官の指示により刑台から10メ トール離れた位置から四つんば いの姿勢で射撃した。正打手が射った一発が尹奉吉の眉間に命中した。医官が銃傷を調査 し絶命したことを確認してから検察官に報告した。この時の時刻が白川義則が死んだ時刻と ほぼ同じ時間である7時40分だった。日本軍9師団の軍医である瀬川は屍体検案書に病名を <頭蓋穿透性 貫通銃創>と書いた。9 9師団長は当日10時7分に<本日7時40分尹奉吉に 対する死刑執行を無事終了>という電報を陸軍大臣に送った。 日本防衛庁図書室に所蔵している『滿密大日記』(1933年)に尹義士の殉国場面を撮影した 写真がある。尹義士の両眉毛の間の中心部に豆サイズの血の跡が鮮やかに見える。十字架 の刑台に縛り、筵の上で跪かせたまま死刑を執行したのである。 尹義士の遺骸は日本の監獄法により、家族に引き渡されるべきであった。しかし、彼らは 遺骸を棺に入れて刑場から約3キロメ トール離れた野田山陸軍墓地に隣接した金沢市共同 墓地の西側の一隅に6尺の深さで埋葬した。終了した時刻は10時30分であった。案内所か ら監視しやすい所、共同墓地の通路に平土葬し、何の印もせず痕跡さえ無くしている。尹 奉吉の死刑執行を終えた検察官は当日午前11時検察府で金沢新聞記者団に尹奉吉の死刑 9 『陸軍省万密大日記』(昭和8年12月23日)「尹奉吉死刑執行顛末報告」(『全集』2、p398-416) 大阪城内の衛戌刑務所図 (新谷宏 提供) 大阪城周辺のグーグル地図 尹義士死刑執行現場の遠景(滿密大日記)
130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尹奉吉義士の金沢での殉国と顕彰事業 131 を19日午前7時40分金沢市の郊外で銃殺で執行したと公表する。 尹奉吉の遺骸については新聞には、火葬したとある。しかし報道とは異り火葬しなかっ た。陸軍刑法により陸軍墓地に埋葬されることもなかった。陸軍墓地の下、一般人が往来 する通路に暗葬したのである。日本陸軍省の昭和8年 『満密大日記』によると、<要注意者 特に鮮人左傾分子或は不逞分子の策動に関して憲兵と警察の密接な連携で厳重警戒中で ある>としたことから銃殺刑を執行した後徹底的に盗掘を監視したことが分かる。尹奉吉の 遺骸はその13年後発掘されるまで往来する人々によって踏まれた。これは遺骸を侮辱しよう とした日本軍の意図が読み取れる。なお、通路に埋葬することによって万が一あるかも知れ ない盗掘を監視しようとしたことも分かる。 尹奉吉義士が殉国したその時刻、尹義士の母親は息子が中庭に走ってくる夢を見た。高 い声で母を呼んでいたので、母親は嬉しくて両手を慌ててふっていた。当日は客間の門の 横木材が雷で折れ、その何日か後、柿梁里の故郷の実家に尹義士の殉国の便りが届いたと いう。国内の全新聞には尹義士の殉国の事実を載せた。婦人の裴氏は織機の上で機を織っ ていたところで、主人の悲報を聞く。悲報を聞いた裴氏婦人は織機から降りもせず、号泣を 飲み込み夢であってほしいと呆けていたという。10 尹奉吉の殉国後も家族に対する日帝の監視は変ることがなかった。親日派の差別と虐待 も続いた。そんなある日家に遺品が家に届く。血のついた染みだらけの白い手ぬぐいに挙事 当日に着けていた懐中時計と中国中央銀行発行の2角の紙幣一枚と銀銭9個が印章と共に 包まれていた。家族は遺品を受取って泣く。父親の尹堭が息子の死刑の消息を聞いてから 1933年2月7日禮山警察署に行って<遺骨でも送ってくれることを父親として切に願う>と金 沢と衛戌拘禁所宛に遺骨引き渡し申込所を提出した。日帝は監獄令により火葬、墓地に埋 葬した後は遺骨を提供しないと遺骨引き渡し申請を無視した。11 尹奉吉は火葬ではなく埋葬 であり、日帝の嘘の対応がはっきりと分かる。むしろ遺骨奉還を要求する父親に徳山駐在所 で尋問をし、厳しく監視する。母親は息子の殉国後にも警察が来て苦しめることに<私をも 殺せ>といいながら耐えたという。柿梁里の実家は厳しい生活に置かれ、日帝の弾圧に苦 しまれた。幸に日帝の監視にも関わらず志のある人々からの慰労と激励があった。アメリカ のケンタッキー州で暮す韓一眞は殉国した12月19日付けで手紙と共に25ドルの寄付金を送 っている。彼は手紙に尹義士から借りたお金を返せないままでいたが、最近収入が入り以 前の負債を返上するのだという。その後も韓一眞は150ドルを送る。青島からアメリカに行く 時に尹義士から旅費を借りたことがあったからだという。尹義士は残った旅費を全部彼にあ げ、自分は洗濯屋で旅費を稼いで上海に行っていたのである。 3. 遺骸奉還及び孝昌園への埋葬 尹奉吉の遺骸発掘と奉還は解放された翌年である1946年3月に遺骸奉還団により推進され た。解放された年の11月に禮山郡徳山では<尹奉吉先生遺骨奉還委員会>が組織され た。委員長には鄭寅英が選任され、約200名が参与した。この委員会を代表して金寬龍 が1945年11月上京し金九にその主旨を伝えた。臨時政府では尹奉吉を含め李奉昌、白貞 10 裴用順 「永遠な主人尹義士」『ナラサラン』25、1976年 p157-160 11 『朝鮮日報』1933年2月13日 「爆弾犯 尹奉吉遺骸 下附 不能」 殉国地の遠近, 道路の左端の森
132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尹奉吉義士の金沢での殉国と顕彰事業 133 基の三義士の遺骸奉還と碑石建立などの顕彰事業を政府の主導で施行すると地方委員会 の同意を得た。これにより禮山で建立された委員会は解消される。遺骸奉還団は東京にい た朴烈(1902-1974)と新朝鮮建設同盟と在日本韓人建国青年同盟の中心人物である李康勳 (1903~2003)と徐相漢(1901-1967)などにより組織される。遺骸奉還団は尹奉吉、李奉昌、白 貞基の三義士の遺骸を奉還することにし、墓地の位置を確認した。李奉昌義士は1932年10 月10日東京の市谷刑務所で死刑を受け、埼玉県浦和市にある浦和刑務所に埋葬される。 奉還団は浦和刑務所で敎誨師として働いた日本人をさがして李奉昌義士が浦和刑務所の付 属墓地に埋葬されていることを確認し、遺骨を収拾することになった。白貞基義士の遺骨は 李康勳と同じ監獄で収監されていたので簡単に探すことができた。最後に尹奉吉義士の遺 骨を探さ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が、場所の確認ができなかった。 金沢に徐相漢と李康勳を始め4名による<臨時政府遺骸発掘団>が着いたのは3月2日午 前10時頃であった。3月3日から位置の考証をし始め、陸軍墓地の境内に埋葬されているこ とを確認する。金沢に居住する青壮年たちは役割を分担し作業道具を準備するなど発掘を 始めた。徐城民が発掘本部長を担い、朴甚燮, 金昌律, 朴東祚, 朴聖祚, 盧慶洙, 具範植, 金 基億など数名の人が発掘に参与している。本格的な発掘作業は3月4日から始まったが探せ なかった。3月6日朴聖祚氏が埋葬する時に読経を読んだという覚尊院の山本了道という尼 僧の助力で埋葬地を確認でき発掘する。血のついた服を掘り出し、遺骨が現われた。全 員が仕事を止め、黙念を捧げた。医科大生であった朱鼎均など2名が入って遺骨を収拾し <殉國義士尹奉吉之柩>と書いた新しい棺に移した。 遺骸は金沢在日本朝鮮人連盟本部の事務室に移され、3月8日の朝、金沢駅を離れ翌日 の朝東京の上野駅に着く。先に発掘された李奉昌、白貞基義士の遺骸は東京の神田(荻窪) にある前日本陸軍大学建物の中の新朝鮮建設同盟事務室に安置されていた。尹義士の遺 骸が上野駅に着くと既に事務室に安置されていた李奉昌、白貞基義士の遺骸を先頭にし尹 義士の遺骸を迎えた。それから青年同盟員3千余名は、三義士の遺骸を先頭にし李奉昌義 士が爆弾を投げた櫻田門の中に入り、李奉昌義士を記念する演説をし愛国歌の提唱をしな がら皇居の中に響くように万歳三唱をしてから再び本部の事務室に安置する。朴烈と多数の 同胞と学生が参拝した。12 12 李康勳『民族開放運動と私』第3企画、1994、p208 尹奉吉の遺品の中で紫色の背広、中折れ帽子、黒い靴は、1946年4月25日新朝鮮建設 同盟中央本部副委員長であった李康勳が外務部長劉虎一、次長金正柱、金基成らと共 に、ソウルに持ち帰った。この遺品はソウル竹添洞の金九の宿所に安置される。尹奉吉を 始め三義士の遺骸はマッカーサー司令部の軍艦で5月15日朝9時に釜山に到着して大昌洞ナ ムセン女学校に奉安する。金九の指示により日本にいる同胞を中心に組織された<大韓殉 国烈士遺骨奉安会>の代表である徐相漢は建国促成青年同盟の朴根世、在日本商工会議 の趙春美、学生同盟の白相弼らと共に尹奉吉を始めとする李奉昌、白貞基、金淸光、金 錫水、洪性周、朴尙祚ら7人の遺骸を迎えた。この遺骨は5月17日釜山中区の大倉町(現、 中央洞)にある府立幼稚園に設けられた殯所に移され奉安される。それから5月31日午後6時 から大韓独立促成会主催で追悼会を開催した。13 尹奉吉を始め三義士の遺骸は6月16日ソウルに移送する。その前日の6月15日釜山公設 運動場で追悼式が行われ、追悼式の前に金九は釜山に着いて殯所に行って香を立て参拝し ている。追悼式は15日正午崔碑鳳の司会で行われた。式は国旗拝礼、愛国家合唱、独立 祈願の黙想、追悼奏楽、式辞の後、徐相漢から三義士の略歴報告があった。続いて各団 体代表の香立てを終え金九の訓話と金相淳の答辞があった。それから大韓独立万歳を斉唱 して閉会する。14 翌日6月16日の朝、尹奉吉義士は弟である尹南義に抱かれ、金九一同と共に特急列車 <解放者>号で釜山を立ち、午後5時40分頃ソウル駅に着く。ソウル駅プラットホームには 金奎植博士を始め元世勳, 趙琬九, 咸尙勳など政党団体と新聞社代表らが堵列して三義士 の遺骸を迎えた。その時夕立が降った。電車の騒音も自動車の音も雨の音に消される中、 青年団体が掲げた弔旗の前に少年団の奏楽に合わせて人々は一斉に頭を下げ、感激と悲 痛の涙で三義士の奉迎式を行う。奉迎式が終った後、遺骸は現在曹溪寺である太古寺に 安置される。 尹奉吉を始めとする三義士の国民葬は最初は6月30日に予定されていた。連日弔問客が 太古寺を訪れ、6月21日まで収納された弔慰金が12,475ウォン50銭であった。30日の葬式 は急な暴雨で延期され7月6日に行われた。午前10時に太古寺から出棺式の後、遺骸を載 13 『釜山日報』1946年6月2日 14 『東亜日報』1946年6月17日 『朝鮮日報』1946年6月17日
134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尹奉吉義士の金沢での殉国と顕彰事業 135 せた車は孝昌園に向かう。太極旗を先頭に少年軍楽隊、各政党団体の花輪と弔旗、その 後ろを武装警察隊が警護し続いて太極旗に囲まれた大きい霊柩馬車を男子の学生らが導 き、女子学生らがその後を追った。尹奉吉義士の霊柩馬車の前には影幀と共に十字架形の 死刑台を載せていて、これを道端で見送る市民たちは悲痛感に泣く。霊柩車は南大門を過 ぎ、12時孝昌園に着いた。追悼式には金区と李承晩を始め李始榮、呂運亨、嚴恒燮など 約5万人の市民が集まった。午後1時から李康勳の司会で始まった追悼式は趙琬九の式辞に 続いて金九を含め数人の祭文の朗読があった。三義士の遺族から霊殿に香を立て始め、続 いて午後3時半頃下棺式までの葬式が終る。15 4. 顕彰事業 1) 上海義挙及び殉国記念行事 尹奉吉が殉国した後、金九を始め臨時政府の要員らは、毎年上海義挙日である4月29日及 び尹義士の殉国日である12月19日に記念行事を行っている。アメリカにおける韓国人たちは 尹義士の殉国のことを聞いて追悼会を開催した。1932年12月26日午後8時にロサンゼルス の興士團所で国民会主催で追悼式が行われた。この追悼会ではLA女子愛国団のヒョンシン ソン(현신성)団長と興士團キムソンクォン(김성권)理事部代表の追悼辞が行われる。又センフ ランシスコ地方会も同日の7時30分に韓国人礼拝堂で追悼会を開催した。洪焉による尹義 士の略歴発表があり、キムフン(김훈)の追悼辞があった。又、中部カリフォニア地方の韓人 も同日の午後2時、教会で80人ほど集まり追悼を捧げる。16 国が解放されると共に臨時政府の要員が続々と帰国した。金九は個人の資格で1945年11 月26日に帰国する。金九は帰国直後新聞を通して尹奉吉義士の遺族に会いたいと広告を出 した。金九が遺族を探しているということを知り、尹奉吉の二番目の弟尹璿儀は12月2日甥 15 『ソウル新聞』1946年7月7日 「追悼! 三烈士の国民葬」 1946年7月7日「百万市民の号泣の中で三烈士の国 民葬終了」 16 『新韓民報』1933年1月12日 「尹奉吉義士追悼会」 の尹淙をつれて上京、午前11時半に京橋荘で金九に会う。尹淙は当時瑞山農林学校の3年 生であった。金九は尹淙の手を握り遺族の状況を聞き激励する。13年前尹奉吉に会った話 から虹口公園での義挙の進行過程について詳細な顛末を説明してあげる。尹淙は金九に会 ったことを次のように記している。 何だか感きわまって金九先生を見上げ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小学校の時、細谷という日本人 の教員が私がこの世の中で一番悪い子であると全校に宣伝、侮辱されたことを思い出すと悔しいで す。17 金九は1946年4月27日趙素昻, 金昌淑, 安在鴻, 權泰錫らと共に徳山の尹奉吉の古宅を訪 れる。停留場で古宅までは黄土を敷いて国王の禮でもてなす。金九は尹義士の両親を始め 未亡人裵用順女史、それから息子の尹淙など遺族を訪問し慰労した。古宅の前で金九と安 在鴻民政長官など各界の人士が出席した中義挙14周年記念式を挙行する。禮山郡の人士 がほぼ出席し、他地域からも婦人会、青年会、警察署、学校などの代表が参席した。隣の 住民も参席して人の群れが出来た。式は記念準備会長のキムビョンウク(김병욱)の開会辞に 続き、金九の記念辞、それから趙擎韓の報告があった。午後4時に式を終えた金九は曹成 煥元臨時政府軍務部長と共に尹義士の家で一泊した。その夜金九は<どこで葬式をすれば いいか>と尹義士の父親と奉安と告別式の手続きも相談した。父親は家族を集めて家族会 議を開いた。それ結果は<中央に任せることにしよう。故郷であれどこであれ一任する>と いう旨を金九に伝えた。金九は裵氏婦人に会い<実の娘のように思う。生活に困るだろうか らソウルに来なさい>と勧めた。18 金九は時々裵女史に生活費を送った。送金の名目は<白 凡が家主の尹奉吉氏に昔からの債務を返す形式>であったという。裵氏婦人は白凡の配慮 でソウル大病院で婦人病の治療を受けるが、退院する前日に白凡が暗殺されたことで胸が 押し潰される思いであったという。 1946年4月29日、国が解放されて始めて迎える上海義挙日であった。ソウル運動場で上 海義挙を追慕する記念大会が開かれた。<尹烈士義挙記念会>の主催で開かれ、この記 17 『自由新聞』1945年12月3日 「尹義士 遺兒 淙君 金九先生とようやく対面」 18 『週間女性』273号、1974年4月14日、p85-92
136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尹奉吉義士の金沢での殉国と顕彰事業 137 念会を発起した人々は李承晩と金九を始め趙素昻、金昌測、金奎植、權東鎭、洪震、安 在鴻など各界の人士83名に達する。記念式は4月29日午後1時から厳粛に開催された。式 場の中央に祭壇を拵え、尹義士の影幀を置き、各政党と団体の代表、遺族、内殯と学生 など数万人が参席した。記念式は国旗掲揚と愛国歌の合唱につづいて金九の記念辞があっ た。趙擎韓の略歴報告と嚴恒燮の義挙状況の報告があり、2分間の黙祷する。京畿女高と 梨花大学合唱隊の合唱に続いて李承晩の祝辞があった。洪震とArcher L. Lerch軍政長官の 祝辞をニューマン広報局長が代読し、中国同胞代表丁元幹と趙素昻の祝辞に続いて共産 党の代表洪南杓, 韓民党の代表金性洙, 人民党の代表申敬哲, 新民党の代表白南雲, 在米 韓族連合会代表韓始大など、多くの内殯の丁寧な祝辞に続き、金九から遺族への慰問品の 贈呈があった。19 1949年4月29日故郷の禮山郡の前湖西銀行前に尹奉吉烈士碑を建立した。この碑は上海 義挙16周年記念で禮山郡教育会と忠清南道烈士遺跡保全会による。碑文は爲堂鄭寅普が 作り、金忠顯が書いた。除幕式には金九も参席し祝賀した。政府では1962年3月1日尹奉 吉に建国功労勲章重章を授け、功績を称えた。 2) 日本の暗葬之跡碑と殉国碑の建立 尹奉吉の遺骸が故国に安置されてから長い時間が続いた。1990年、金沢に居住する朴仁 曹は市民の集まりを組織して暗葬されていた所に記念碑を立てる運動を展開する。1946年 発掘の際の現場責任者であったパクドンジョの弟である朴仁曹は遺骸発掘作業にも参加して いる。彼は金沢で暮しており暗葬地の周辺をよく往来したという。彼は太平戦争の時、小学 校に通っていたが、毎年春夏陸軍墓地で戦没者慰霊祭が行われる前日は、毎回大掃除に 動員されたと言う。掃除で集められたごみを先生の指示に従い尹義士が埋没されていた所 の真上で焼却したという。尹義士が暗葬されていたところが焼却場でもあったのである。朴 仁曹は3年間6回にかけて焼却作業をしたという。当時はその事実を知らなかったが、発掘 後それを思い出すとあまりにも悲惨で、残酷な気がしたという。彼は日帝の尹義士に対する <2重3重の処刑>は本当に悪いことだという。民族の英雄を獣よりも劣等に扱い暗葬したこ 19 『朝鮮日報』1946年4月29日「崇高なこの愛国の血潮よ流れ、絶え間なく数万代に」 とに怒りを覚えると同時に、自分も省み反省するようになったという。20 彼は暗葬地に何の記しもないことを不憫に思い、“<同じ民族として重大なる事実を永遠 に記念すべき義務があり、又在日の子孫にも伝えるべきである>21と考え、暗葬地を永久保 存することを決めた。遺体発掘写真15枚を在日同胞に証拠として見せながら保存運動を開 始する。それから40年あまり経過した1987年、発掘写真と遺骸発掘者の生存が韓国側に知 られるようになる。これにより1988年3月尹義士の弟である尹南儀と尹炳奭教授が金沢を訪 問し暗葬之跡を保存するべく提案を協議する。 1991年11月<梅軒尹奉吉義士義挙60周年記念事業会>(会長, 金英三)が組織され尹義 士顕彰事業を推進、その一環として金沢での尹義士の殉国記念碑の建立が推進される。 これによって暗葬之跡の南南西側200メ トール上30坪くらいの大地に尹奉吉義士殉国記念 碑が建てられる。殉国記念碑は韓国の石で作るべきだとし、ソウルの忘憂里のハンヤン石 材工業で製作する。記念事業会では韓国式亀形の台石である亀趺と碑身、竜冠を彫刻し て金沢港まで送る。竜冠は亀の形にし、碑身は縦9尺1寸、横は3尺、幅は2尺にした。碑 の本体は韓国で彫刻し、塀は韓国の原石を金沢の工場で加工した。記念碑は韓国に向か い立てられた。記念事業会と在日民団で4月21日午前11時に開催した除幕式には李康勳 光復会長、朴永錫国史編纂委員長、尹南儀遺族代表、丁海龍在日居留民団長など200 名が参席した。 一方、朴仁曹等同胞と日本の市民団体は、1990年以後暗葬地の整備保存運動を行って きた。殉国記念碑を建立した後、朴仁曹は暗葬地に碑石を建立し後世への教育の場とする ことを提案した。これにより<指紋押捺問題を共に考え、勉強する金澤市民の集い>が始 められ<眞宗大谷派><カトリック金澤教会の正義と平和委員会><アジア太平洋地域の 戦争犠牲者を思い、心に刻む金沢주선인会>など日本市民団体が参加し、1991年1月<尹 奉吉暗葬之跡を考える会>(以下 暗葬会と略称、会長:鶴圓裕)が組織される。暗葬会では 1992年4月13日金沢市に永久保存工事計画書を提出する。彼らは申請書にこの事業は<両 民族の友好関係に大きな力>となり、<国際的な相互理解の具体的な証拠>であり、<過 去の歴史に対する反省と未来への展望に繋がる>とし、埋葬地の早急な整備と保存を要請 20 21 朴仁曹「第4章 暗葬跡地保存運動」『ギョレ通信』創刊号、1992.12 p37
138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尹奉吉義士の金沢での殉国と顕彰事業 139 する。22 暗葬会では工事の 設計案を確定し、金沢市に 提出した後、工事費200万 ウオン確保のための市民募 金運動を展開した。その年 9月16日金沢市から設計案 の承認を受け、同時に6.6㎡ の暗葬之跡を永久無償貸与 することができた。これによ り10月16日起工式が行われ た、碑石は岐阜県の金相基 が寄贈した自然石である。 除幕式は12月19日挙行され る。除幕式の前日である12 月18日碑石の下に石室を作 って尹奉吉義士の略歴を書 いた誌石と影幀、それから 発掘当時の遺体の写真を入 れておいた。略歴には出生と義挙日、殉国日、発掘日、それから碑石の建立日を書いた。 暗葬之跡の石室は次の通りである。 除幕式は殉国60周年を記念して1992年12月19日に挙行された。<尹奉吉義士暗葬之 跡>と書いた題字は在日書芸家の申仁弘の作品である。暗葬之跡除幕式に関する日本言 論の報道が続いた。除幕式の翌日である12月20日付の 『朝日新聞』は 「<抗日義士碑>を 除幕」、『每日新聞』は 「戦前の朝鮮の<義士>埋葬跡地を整備、保存」、『中日新聞』は 「朝鮮独立運動の英雄尹奉吉の足跡を探す石碑完成」、 『北國新聞』は 「金澤で処刑した韓 国義士尹團員埋葬地に石碑」等の題号の下詳細に尹義士の行跡と除幕式の内容などを報道 した。 22 『ギョレ通信』創刊号 「市側に提出した要望書(92年4月13日)」 1994年12 p40-42 尹奉吉義士暗葬之跡の石室図 尹奉吉義士暗葬之跡 工事を推進するために総25回の関連会議があり、延べ人員約200名が参加した。構成員 の民族の差、年齢の差、思いと感覚の差などで試行錯誤も多かった。しかし、市民団体の 構成員たちは団結し見事な成果を成し遂げた。 工事後、暗葬会は解散し<暗葬之跡保存会>を組織して新会長に前国会議員 이도 마 사도시(習+元正敏)を選任する。工事を監督した朴仁曹(保存会副会長)は、1993年3月資料官 函を設置しパンフレットとアンケ トー用紙等を保管する。4月には保存会が金沢市から暗葬 之跡の維持管理を引き受けた。5月には収納家具が作られ、掃除道具を常備できるようにし た。保存会では尹義士殉国65周年を迎え1997年暗葬地の入り口に尹義士が自宅を離れる 時書いた文である<丈夫出家生不還>と刻んだ碑を立て、周辺にムクゲの花を植え、聖域 化した。23 暗葬之跡は上の写真から分かるように墓の形が整えっている。発掘に参加した朴基東の 証言によると尹義士の二つの足は土と絡んでいて収拾できなかったという。それで東京から 来た発掘要員と協議した結果、暗葬地にそのまま埋めることにした。又、遺骨を収拾した 朱鼎均も骨7片を収拾できなかったという。暗葬之跡の工事を推進した朴仁曹が<永久保 存工事をした暗葬之跡は尹義士の墓であるといっても間違いないと思う>24と言ったことがあ り、彼の主張は説得力がある。朴仁曹は碑石が建立されてから、2009年亡くなるまで暗葬 之跡の管理に誠を尽くしている。禮山の月進会では朴仁曹を月進会日本支部長に任命し、 毎年共同で行事を行った。朴仁曹が急に亡くなってからは、彼の甥であるパクヒョンタクが 暗葬之跡を管理している。又、日本人で構成された<尹奉吉義士と共にいる集い>(会長; 田村光彰)が結成され、月進会の日本支部と共に尹奉吉義士の行跡を顕彰する事業も進めら れている。 23 『毎日新聞』1997年4月22日 「朝鮮の抗日運動家尹奉吉の詩碑完成」 24 朴仁曹、前掲書 p23
140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尹奉吉義士の金沢での殉国と顕彰事業 141 5. 終りに 尹奉吉の死刑執行が延期されたまま日本への移送が決まった。1932年11月18日神戸港の 三菱造船所のドックに移送される。そこで用意されていた車で大阪の衛戍刑務所に移送さ れ、独居房に監禁された。大阪で日本反帝同盟員らの尹義士銃殺刑反対運動が起ると、 日帝は一ヶ月後である12月18日に金沢9師団司令部法務部に尹義士を移送した。それから 翌日の朝7時40分頃陸軍作業場の山の麓で白川が死んだ時間に合わせて死刑を執行した。 尹義士の遺骸は家族に引き渡されるべきであったが、野田山の陸軍墓地管理所の横の通路 に暗葬された。盗掘を監視するためであったと言うが、これは遺骸に対する侮辱であった。 国の解放後、金九の指示により1946年3月<三義士の遺骸奉還団>が組織された。尹義 士の遺骸発掘は徐城民など金沢居住の青年らによって3月2日から始まったが、埋葬地の確 認が遅れて3月6日ようやく始まった。遺骸は東京を経って5月15日釜山港に到着し、6月16 日ソウルに移送後、太古寺に安葬された。それから7月6日盛大な国民葬をあげ孝昌園に安 置された。 尹義士が殉国した後、金九を始め臨時政府の要員らが上海義挙日である4月29日と殉国 日である12月19日に毎年記念行事を行った。解放後、帰国した金九など臨時政府要員らは 尹義士の古宅を礼訪し慰労した。1946年4月29日にはソウル運動場で上海義挙記念式を挙 行した。 1990年金沢の朴仁曹を始め地域の人々は尹義士の暗葬を追悼する記念碑建立運動を起 した。1991年韓国でも梅軒尹奉吉義士義挙60周年記念事業会が組織され、尹義士顕彰事 業を進めた。これにより1992年4月暗葬地の上に尹奉吉義士殉国記念碑を建立した。金沢 の<指紋押捺問題を共に考え、勉強する金澤市民の会>等、4つの市民団体では1991年1 月<尹奉吉暗葬之跡を思う会>を組織し、1992年4月金沢市に暗葬地の永久保存計画書 を提出し承認された。それから市民募金運動で工事費を確保して1992年12月19日除幕式 を挙行した。尹義士が暗葬されていた場所には石室を作って誌石と写真を入れた。発掘当 時尹義士の髪の毛と一部の骨は収拾できなかった。暗葬地は尹義士の暗葬を追悼すると同 時に墓になるわけである。 暗葬之跡碑を建立した以後、月進会の日本支部と日本人で構成された<尹奉吉義士と 共にする会>は暗葬之跡を保存、管理し尹義士の行跡を顕彰する事業を進めている。これ は韓日間の友好と協力、それから東アジアの平和構築に大きく寄与できるだろう。今後、尹 義士の殉国地も確認できたことで、これを記念する事業も進めていけることを願う。これこ そ韓日の両国の民族的な和解を開く切っ掛けとなるだろう。
「세계사적인저항운동의관점에서본윤봉길의거」에대한검토문 143142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본 보고는 나치스·독일의 침략에 대한 유럽 각지의 저항운동와 윤봉길을 비롯한 식민지 조 선의 항일운동을 비교검토하면서 조선인 항일독립운동을 20세기 유럽에 있어서의 반나치즘 레지스탕스활동와 동질인 레지스탕스 활동이라고 평가하며 윤봉길의 의거를 「제국주의 열 강에 저항한 세계적인 독립운동사에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라고 평가한다. 2차대전후 일본사회는 일찌기 일본 자신이 파시즘 깃발밑에 나치스 독일와 동맹을 맺어 2차대전에 참전,패배했다는 파시즘 국가 일본의 이력서와 거기에 부수 되어야 할 자기 성찰 를 간단히 내팽개친 채 반나치 레지스탕스에 관련된 역사 (나치스 고급장교 암살행동등)를 좋아 하고 그 역사를 주제로 한 구미산 문학·영상 작품들을 「감동」하면서 받아 들여 왔다. 한편, 일본군 고급장교한테 폭탄을 던진 윤봉길의거등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식민지 조선의 레지 스탕스운동은 일본 사회속에서는 역사 사실 그 자체가 오랫동안 계속 무시되어 근년에 이르 러서는 「어리석은 반일 테러」행위라하는 저열한 비방언설의 대상으로까지 돼버리고 있다. 안이한 더블 스텐다드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다무라 보고는 식민지 조선의 레지스탕스운동을 세계사속에 자리 매기면서 레지스탕스운 동을 「점령군에게 타격을 주는 모든 활동」이라고 규정하는 것으로, 윤봉길의 궐기가 가지는 「권리이며 의무」인 저항의 보편적 의미를 명확하게 부각시킨다. 역사를 돌아보는 행의를 거 절한 난잡한 언설이 횡행하는 오늘의 일본에서 본 보고와 같은 이론적이고 침착한 고찰은 국 경을 넘어 시민적 대항축 형성의 핵이 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수정주의적 언설의 횡행하는 일본 사회나 자국 제일 주의를 외치는 미국 현정권 뿐만 아니 토론문 「세계사적인 저항운동의 관점에서 본 윤봉길의거」에 대한 검토문 정아영 | 리츠메이칸대학교 교수 라, 헌법에다가 저항권을 명기한 현대 독일국가조차 지금 반이민을 내건 우익 레이시즘 정당 이 약진하고, 레지스탕스의 본거지였던 프랑스에서도 중도파가 극우정권 실현을 간신히 억 제하는 등, 민주주의와 인권 같은 본질적인 사회가치는 현대 사회에서 다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한편 한국에서는 과거 1년 동안에 정권교대까지 실현시킨 대중적인 촛불집회의 조류는 집회 참가자의 관점에서는 촛불집회가 윤봉길 등의 항일 독립운동 연장선 위에 있다고 인식 될 것이다.한국 전정권은 「위안부」문제 한일 「합의」에 상징되는 듯이 1945년 이후도 살아남 은 식민지 지배 협력자=친일파의 계보에 있다고 보여졌기 때문이다.일본과 한국 사이의 역 사인식의 낙차는 더욱 더 크다. 이런 상황밑에서 저항의 역사와 그 정신을 계승하면서 평화· 인권·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동아시아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현대 일본 사회에 사는 모든 시민은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 것인가.여러가지 의견을 기대되지만 먼저 보고자 다무라 교수 님께 묻고 싶다. 마지막으로 보고 최종 부분에 있는 윤봉길의 「목숨을 건 거사는 일본에 대한 중국·조선군 의 협동 투쟁에 공헌했다」라는 부분에 관해서 한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싶다. 1930년대 중국사회의 대조선인 감정은 윤봉길의거를 계기로 개선되어 그것은 중국 국민 당정권의 후원 밑에 재중조선인 독립운동가를 결집한 조선의용대의 결성(1938년, 무한)으로 연결된다.조선 의용대의 주력은 후에 북상하고 화북의 중국공산당 해방구로 이동해 팔로군 과 함께 항일전쟁을 싸우게 된다. 1980년대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자전소설 『격정 시 대』의 작자인 중국조선족작가 김학철은 중학생시절 라디오 뉴스로 들었던 윤봉길의거에 충 격을 받아서 3년 후 서울로부터 중국 상해로 탈출, 후에 조선 의용대에 입대해 항일전을 싸 웠다.김학철의 또 하나의 대표작 『항전 별곡』에 의하면, 조선의용군 장교로 활약한 김학무 (1916~1944)는 1932년 상해 프랑스조계에 잠입한 당시 윤봉길과 친하게 사귀었다고 한다. 민족주의자 윤봉길과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한 김학무는 사상적인 거리가 있었지만 김학무는 연상의 윤봉길을 존경해 후에 북경 체재중 일본 「마이니치신문」으로 윤봉길 처형 기사를 봐 통곡 했다고 한다.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했을 때 김학무는 김학철한테 「윤봉길에 비하면 어 림도 없어.난 담이 너무 작아서……. 김학무가 열이라도 윤봉길이 하나를 당하지 못 해. 정말 이야」라고 말했다. 윤봉길의 궐기가 당시 조선인 젊은이에게 준 영향 뿐만 아니라, 사상의 벽을 넘은 국제주 의적 저항운동으로 연결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44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世界史的な抵抗運動の観点からみた尹奉吉義挙」へのコメント 145 本報告では、ナチス·ドイツの侵略に対するドイツ国内を含めた欧州各地でのレジスタンス 活動と、日本の朝鮮植民地支配下における尹奉吉はじめ朝鮮人抗日運動を比較検討しな がら、朝鮮人抗日独立運動を20世紀ヨーロッパにおける反ナチズム·レジスタンス活動と同 等同質のレジスタンス活動と位置づけ、尹奉吉の行動を「帝国主義列強に抗した世界の独 立運動史に大きな意義を持っている」と評価している。 戦後日本社会は、かつて日本自身がファシズムの旗のもとにナチス·ドイツと同盟関係を 結び第二次世界大戦に参戦·敗北したというファシズム国家日本の履歴書と、それに付随さ れるべき自己省察の努力をいとも簡単に忘却の彼方に投げ捨てたまま、反ナチ·レジスタン スに関わる歴史事象(例えばナチス高級将校の暗殺)を快く称揚し、それらを取り上げた 欧米製の文学·映像作品の数々を一種の「感動」さえ伴って大いに受け入れてきたのだった。 一方で、日本軍高級将校に爆弾を投じた尹奉吉をはじめ帝国主義日本に対する植民地朝 鮮のレジスタンス運動は、日本社会の中では歴史事実そのものが長年無視され続け、近年 に至っては「愚かな反日テロ」行為などとする低劣な誹謗言説の対象にまで貶められている。 安易なダブルスタンダ ドーと言うしかない。 田村報告は、植民地朝鮮のレジスタンス運動を世界史の中に位置付け、かつレジスタン ス運動を「占領軍に打撃を与えるあらゆる活動」と規定することで、尹奉吉の決起の持つ「権 利であり義務である」抵抗の普遍的意味を明確に浮き彫りにしている。歴史の振り返り自体 を拒んだ乱暴極まる言説のはびこる今日の日本において、本報告のような理論的で冷静な コメント 「世界史的な抵抗運動の観点からみた 尹奉吉義挙」へのコメント 鄭雅英 | 立命館大学教授 指摘の積み重ねこそが国境を超えた市民的対抗軸形成の核になるものと信じる。 修正主義的言説の横行する日本社会や自国第一主義を叫ぶアメリカ合衆国政権だけでな く、憲法に抵抗権を明記した戦後ドイツでさえ今や反移民を掲げた右翼レイシズム政党が 躍進し、レジスタンスの本拠地だったフランスでも中道派が極右政権の実現をかろうじて制 するなど、民主主義や人権といった本質的な価値は現代社会で再び危機に瀕している。一 方韓国において、過去1年間に結果として政権交代を実現させた大衆的なロウソク集会の 潮流は、集会参加者の主観に立てば尹奉吉らの抗日独立運動の延長線上にあると認識され ていただろう。韓国の憲法原理さえ踏みにじろうとする前政権は、「慰安婦」問題の日韓「合 意」に象徴されるように1945年以降も生き延びた植民地支配協力者=親日派の系譜にあると 見なされたからである。日本と韓国の間の認識の落差はますます大きい。抵抗の歴史とその 精神を汲み取りながら、平和·人権·民主主義を基盤にした東アジア社会を築くために、現 代の日本社会に生きる市民は何をなすべきなのか。様々な意見が期待されるが、報告者田 村先生のご意見からうかがいたい。 最後に、報告最終部分に尹奉吉の「命をかけた義挙は日本に対する中国·朝鮮軍の協同 闘争に貢献した」と触れられた部分に関して、蛇足ながらエピソ ドーを紹介したい。 中国社会の対朝鮮人感情は尹奉吉義挙を契機に改善され、中国国民党政権の後ろ盾に よる在中朝鮮人独立運動家を結集した朝鮮義勇隊の結成(1938年、武漢)につながる。 朝鮮義勇隊の主力は後に北上して華北の中国共産党解放区に移動し八路軍とともに抗日線 を戦うことになる。1980年代韓国でもベストセラーになった自伝小説『激情時代』の作者で中 国朝鮮族作家·金学鉄は、中学生の時ラジオニュースで知った尹奉吉義挙に衝撃を受け、 3年後にソウルから上海に脱出、後に朝鮮義勇隊に入隊し抗日戦を戦った。金学鉄代表作 『抗戦別曲』によれば、朝鮮義勇軍の指揮官クラスとして活躍した金学武(1916~1944) は、1932年上海フランス租界に潜入していて尹奉吉と親しく付き合っていたという。民族主 義者の尹奉吉とマルクス主義に心酔した金学武は思想的な距離があったが、金学武は年上 の尹奉吉を尊敬し、後に北京滞在中、日本の毎日新聞で尹奉吉処刑の記事を見て号泣し たという。朝鮮義勇隊で活動時に金学武は金学鉄に「尹奉吉に比べれば自分は足下にも及 ばない。私は胆力が小さくて……。金学武が10のことを成し遂げても尹奉吉のした1にも相 当しない。本当だ」と語っている。尹奉吉の決起が朝鮮人の若者に与えた影響ばかりでな く、思想の壁を超えた国際主義的抵抗運動につながったことを確認できよう。
コメント 147146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윤봉길의사 순국 85주년 한·일공동학술회의 윤봉길의거와 세계평화운동 반전평화운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과제 공동주최: 독립기념관, 가나자와 준비위원회(윤봉길의사친우회, 월진회 일본지부), 리츠메이칸대학교 코리아연구센터, 히도츠바시대학교 한국학연구센터 일 시:2017년 12월 3일(일) 13:00~17:30 장 소: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가나자와대학교 새터라이트 프라자 3층 회의실 | 프로그램 순서 | 사회 : 윤소영(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선임연구위원) 통역 : 배영미(오사카대학교 준교수) 제1주제 | 1930년대 가나자와의 센류(川柳) 작가 쓰루 아키라의 반전평화운동 발표 가츠무라 마코토(리츠메이칸대학교 코리아연구센터 센터장) 토론 히라노 요시유키(정혜사(浄専寺) 주지, 가나자와 쓰루 아키라를 현창하는 모임) 제2주제 | 인권변호사 후세 다츠지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발표 이규수(히도츠바시대학교 한국학연구센터 교수) 토론 임동현(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제3주제 | 일본에서의 반전평화운동의 현재적 의미 발표 모리 가즈토시(가나자와 시 의원) 토론 박민영(한국독림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제4주제 | 동아시아 평화운동과 한국 민주화운동의 현재와 과제 발표 서승(리츠메이칸대학교 전 교수) 토론 이우재(한국월진회) 종합토론 좌장 다무라 미츠아키(가나자와 준비위원회 대표) 尹奉吉義士殉国85周年日·韓共同学術会議 尹奉吉義挙と世界平和運動 反戦平和運動の過去と現在そして課題 共催:韓国独立紀念館·金沢準備委員会(尹奉吉義士共の会·月進会日本支部) 立命館大学コリア研究センタ ·ー一橋大学韓国学研究センター 日時:2017年 12月 3日(日) 13:00~17:30 場所:金沢大学サテライト·プラザ3階集会室 | プログラム | 司会 : 尹素英(韓国独立運動史研究所先任研究委員) 通訳 : 裵玲美(大阪大学準教授) 第一主題 | 1930年代の川柳作家鶴彬の反戦平和運動 報告 勝村誠(立命館大学コリア研究センター長) コメンテータ ー 平野喜之浄専寺住職, 鶴彬を顕彰する会幹事) 第二主題 | 布施辰治の反戦平和運動と韓国の独立運動家たち 報告 李圭洙(一橋大学韓国学研究センター教授) コメンテータ ー 林東賢(韓国独立運動史研究所研究員) 第三主題 | 日本における反戦平和運動の現在的な意味 報告 森一敏(金沢市議員) コメンテータ ー 朴敏泳(韓国独立運動史研究所責任研究委員) 第四主題 | 東アジア平和運動と韓国民主化運動の現在と課題 報告 徐勝(元立命館大学教授) コメンテータ ー 李佑宰(韓国月進会) 総合討論 座長 田村光彰(金沢準備委員会代表)
1930年代における鶴彬の反観平和運動 149 제1 주제 第一主題 1930년대의 쓰루 아키라의 반전평화운동 1930年代における鶴彬の反戦平和運動 가츠무라 마코토(리츠메이칸대학교 코리아연구센터 센터장) 勝村誠(立命館大学コリア研究センター長)
1930년대의쓰루아키라의반전평화운동 151150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1. 머리말 1874(메이지7년)년의‘타이완 출병’이후 일본은 아시아의 각지에서 연달아 군사력 행사, 침략 전쟁, 식민지 지배의 확대를 반복해 왔는데, 1937년(쇼와 12년) 7월 7일에 일어난 노구교(蘆溝 橋) 사건을 계기로 중일이 전면 전쟁에 돌입하여 전시 국민총동원 체제로 이행되어 갔다. 이미 1933년(쇼와 8년) 2월 20일에는 프롤레타리아 작가인 고바야시 다키지(小林 多喜二) 가 쓰키지(築地)경찰서내에서 고문을 당해 학살됨에 따라 문단에는 무거운 공 기가 감돌고 있 었는데 전면적으로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이미 반전적인 문학을 창작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한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젊은 센류 작가 쓰루 아키라(鶴彬, 1909년 출생~1938년 사망)는 그러 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곡필(曲筆)을 하기는커녕 대표작이 자 유작이 된“손과 발 떼어내어 통 나무로 만들어 돌려보내고”(출병했던 병사가 전 투에서 손발을 잃자 <국가는> 손발을 떼어낸 통나무 와 같은 모습의 병사를 고향으로 돌려보낸다1), “태동을 느낄 즈음 뼈가 도착하네”(출정한 병사의 아 1 본 발표에서는 국제학술회의에서의 발표임을 배려하여 인용하는 센류의 구에 의미가 문자 그대로 명료 한 구 이외에는 가능한 한 뒤에 ( )를 붙여 발표자 나름의 대의나 해석을 첨가해 보았다. 일본어 사용자 의 경우에는 다소 번거롭게 느껴지겠지만 이해 해 주시길 바란다. 물론 대의나 해석은 다양할 수 있기 때 문에 이론이나 의문도 있을 것이고, 발표자의 해석이 적절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미리 양해의 말씀을 드린다. 또한 센류 작품 그 자체의 직역은 달지 않는 것으로 한다. 1930년대의 쓰루 아키라의 반전평화운동 가츠무라 마코토 | 리츠메이칸대학교 코리아연구센터 센터장 내의 태내에서 태아가 건강하게 움직이게 되었을 즈음 전사한 남편의 유골이 아내에게 도착한다)2와 같이 정면에서 전쟁을 비판하는 센류를 계속해서 토해냈다3.“통나무로 만들어 돌려 보내고”라는 구에서는 병사가“돌아오는”것이 아니라 국가가 병사를“돌려보낸 다”고 표현하고 있는 점이 강렬하다. 2. 쓰루 아키라와 센류에 대한 평가에 관하여 쓰루 아키라의 센류는 공개적이면서도 강렬하게 권력을 비판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쓰루 아 키라는“반전 센류 작가” “프롤레타리아 센류가” “센류 혁신의 기수”라 불 리면서 1960년대에 “재발견”된 이래로 4차에 걸쳐 주목을 받아왔다. 쓰루 아키라를 본격적으로 처음 논평한 것은 시인 아키야마 기요시(秋山清)이다4. 이를 계 기로 센류가와 하이쿠(俳句) 시인들에 의한 쓰루 아키라 의“재발견” “재평가”가 조금씩 진행 되었다(1차). 다음으로 쓰루 아키라 연구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1977년 에 발행된 잇코 진(一叩人) 편집『쓰루 아키라 전집(鶴彬全集)』 다이마 쓰사(たいまつ社)(이하 『全集』이라고 한다) 에 힘입은 바가 크다. 잇코진은 이듬해인 1978년에 역시 다이마쓰사에서 『반전 센류가·쓰 루 아키라ー작품과 시대(反戦川 柳人·鶴彬ー作品と時代)』와 『新興川柳選集』을 발표했다(2차). 이어서 쓰루 아키라 사망 60년에 해당하는 1998년을 전후하는 시기에 쓰루 아키라 의 전 기적 연구가 크게 진전되었다(3차)5. 그리고 쓰루 아키라 탄생 100년에 해당하 는 2009년 전 후에는 영화 『쓰루 아키라 마음의 궤적(鶴彬 こころの軌跡)』제작·상영 운동을 주축으로 학술 2 木村哲也[編]『手と足をもいだ丸太にしてかえし 現代仮名遣い版 鶴彬全川柳』邑書 林, 2007년, 133쪽. 초출 은 『川柳人』281호(1937년11월15일 발행). 3 센류에서는 구를 읊는 것을“토하다(吐く)”라고 한다. 尾藤三柳[監 修]尾藤一泉 [編]『川柳総合大事典 第三 巻 用語編-新古·川柳関連用語·ことばの宝庫』(雄山閣·2007년)에 의하면「시간적 율동을 거부하는 형식 상의 특질과 遺悶(카타스트로피)라는 본성을 직각적으로 파악한 것이 토하다(吐く)”인데, 이것이“吐”라는 형태로 메이지 신센류 이후의 구회(句會) 등에서 용어화되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4 秋山清「ある川柳作家の生涯-反戦作家·ツルアキラ」『思想の科学』1960년 9월호. 후에 秋山『近代の漂泊― わが詩人たち』(現代思潮社·1970년)에 수록. 5 岡田一杜·山田文子『川柳人·鬼才「鶴彬」の生涯』(日本機関紙出版センター·1997년), 深井一郎『反戦川柳作 家 鶴彬』(日本機関紙出版センター·1998년)등.
1930년대의쓰루아키라의반전평화운동 153152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기획과 출판 기획도 다수 전개되었고6, 계속해서 2011년 이후 에는 심화되고 있는 일본의 격 차사회와 호응하는 형태로 구루미사와 켄(楜沢健)을 필 두로 쓰루 아키라를 “다시 읽는”움직 임이 나타났다7(4차). 그러나 쓰루 아키라는, 그리고 센류는 일본문학사에서 충분한 평가를 받아오지 못 했다. 그래서 간단하게 센류에 대해 설명을 하겠다. 센류란「5·7·5」17음 형식을 빌어 세태를 묘사 하고 풍자하는 정형단시인데, 그 기원은 에도시대의 고센류(古川柳) 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 센류란 가라이 센류(柄井川柳)가 편찬에 참여하여 직접 평을 하고 있는『하이후야나기다루(誹 風柳多留)』를 시작으로 하는 작품군의 총칭이다. 일 본에서는 현재에도 쉽게 즐길 수 있는 고 전 입문 교재로 에도 센류가 사용되는 경우 가 있다. “기면 서라고 하고 서면 걸으라 하는 부모 마음”(사랑하는 아이가 기게 되면 빨 리 일어서 주기 를 바라고, 일어서면 빨리 걷기를 바라며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효도하고 싶을 때면 부모는 없네”(효도를 해야겠 다는 생각이 들 즈음에는 이미 부모는 돌아가셔서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명월을 따 달라며 우는 아이로구나”(밤하늘에 떠 있는 아름다운 달을 본 아이가 그것을 따 달라며 부모에게 울면서 조른다.)등,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구 가 많 다. 또, “마을에서 모르는 사람은 남편뿐”(아내가 남편 이외의 남성과 성적 관계에 있는 것을 주변 주민들은 모두 알고 있는데 모르는 것은 남편뿐이다.)로 대표되듯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아 알 수 없는 성적 내용을 그린 구도 많다. 고센류는 알기 쉽 고 서민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 서 속담이나 격언으로서도 정착되어 있다. 한편 메이지 30년대 이후에는 신문이 보급되면서 신시대의 문예정신에 눈뜬 신센 류(新川 柳)가 등장하여 구라키샤(久良岐社)8, 류손지(柳樽寺)9, 요미우리센류연구회 (読売川柳研究 6 전게, 木村[編](2007년), 吉橋通夫『小説 鶴彬―暁を抱いて』(新日本出版社·2009년), 尾藤一泉『鶴彬の川柳 と叫び』(新葉館出版·2009년)등. 7 楜沢健, 『だから,鶴彬―抵抗する17文字』(春陽堂書店·2011년). 8 구라키샤(久良岐社)는1904년(메이지 37년) 6월에 사카이 구라키(阪井久良岐)를 주 간으로 하여 창립된 결사. 기관지로서『五月鯉』(1905년 창간), 『獅子頭』(1909 년 창간)이 있으며, 『電報新聞』에 투고했다. 尾藤 三柳[編]『川柳総合事典』(雄山閣出 版·1974년)97, 324쪽. 9 류손지(柳樽寺)는1903년(메이지 36년)7월 3일자 신문 『日本』에 개설된 센류란(川 柳欄)「新題柳樽」을 풍자적으로 비꼬아아 표현하여1905년7월3일에 이노우에 겐카 보(井上剣花坊) 집에 창립된 결사. 기 관지로서『川柳』(1905년 창간), 『大正川柳』(1 912년 창간), 『川柳人』(1927년 창간)이 있다. 전게,『川柳総 合事典』333쪽. 会)10 3파에 의해 발전해 나간다. 후술하겠지만 쓰루 아키라는 이 중 류 손지 유파에 속한다. 신센류는 자기혁명을 계속해 예술성을 높여가지만 그럼에도 불 구하고 소설, 시, 와카(和歌), 하이쿠 등에 비하면 일본문학사에서 가볍게 여겨져 왔다. 쓰루 아키라는 시나 문예평론에도 능해서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으나 그래도 센류인 임에 구애되어 센류의 예술성을 높이는 일 과 전투성을 갖춘 프롤레타리아 문예로 단 련하는 일을 양립시키고자 했다. 센류에 구애되었 던 것이 쓰루 아키라가 제대로 평가 받지 못했던 이유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이번 국제학술회의에 즈음하여 저에게 주어진 과제는 ①1930년대를 대상 시기로 하여 ②쓰루 아키라의 “반전 평화운동가”로서의 측면에 빛을 비추는 일이다. 그래서1934년 이후의 쓰루 아키라의 창작 활동 자체를“반전 평화운동”으로 간주하 기로 한다. 그리고 쓰루 아키라의 센류와 평론에 담긴 메시지를 실마리로 쓰루 아키 라의 정치적 사고의 특징을 그려 보고자 한다. 그를 위해 쓰루 아키라의 창작 활동을, ①「北国柳檀」에 구를 발표하던 시기부터 오사카(大 阪)로 나와서 다나카 고로하치(田中五郎八)와 모리타 이치니(森田一二)의 논 쟁을 만나기까지 (1924년 10월~1926년 여름경), ②모리타 이치니와 만나 프롤레타 리아 센류가에 뜻을 둔 이후 부터 입대까지(~1930년1월), ③제대 후에 주로 이노우에 겐카보(井上剣花坊)의「川柳人」에서 프롤레타리아 센류의“창조적 발전”에 힘을 기 울이기 시작한 이후부터 치안유지법으로 검거 되기까지(1934년 1월~1937년 12월) 3기로 나누어 ①, ②를 전사(前史)로 하고, ③을 중심으로 논하고자 한다. 3. 센류가로서의 발자취 1) 출생부터 센류 작구(作句)에 이르기까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쓰루 아키라의 종군까지의 발자취를 정리해 보기로 하자. 쓰루 아키 라는 1909년(메이지42년) 1월 1일에 이시카와현(石川県) 가와기타군(河北郡) 다카타쓰초(高松 10 요미우리센류연구회(読売川柳研究会)는1905년6월 7 일에 구보타지 쇼지(窪田而笑 子) 등 『読売新聞』에 센류를 발표하던 작가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전게,『川柳総合事典』323-4쪽.
1930년대의쓰루아키라의반전평화운동 155154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町) 다카마쓰소(高松ソ) 32번지(현재의 이시카와현(石川県) 가호쿠시(かほく市) 다카마쓰(高松))에 죽세공 장인인 아버지·기타 마쓰타로(喜多松太郎)와 어머 니· 스즈(寿 )々의 둘째 아들로 태 어났다. 본명은 기타 가쓰지(喜多一二)이며, 실제로 태어난 것은 1908년 연말이었다고 한다. 1915년에 당시 아이가 없었던 백부·기타 기 타로(喜多喜太郎)의 양자가 되었으며, 이듬해에 는 아버지·마쓰타로가가 사망하고 어 머니·스즈가 동향의 다키이 요시타로(瀧井芳太郎)와 재혼했기 때문에 육친의 따뜻함을 느끼지 못하는 유년 시절을 보냈던 것으로 생각된다. 쓰루 아키라는 공부를 좋아해서 심상소학교 때의 성적이 남학생 67명중 1등을 할정도로 우수했으 며 사범학교에 진학 하여 교원이 되기를 희망했으나 양부는 가업을 잇기를 기대했기 때문에 그 꿈을 허락 받지 못한 채 쓰루 아키라는 고등소학교에 진학했다. 작가 다나베 세이코(田辺 聖子)는 이러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쓰루 아키라가 문학을 좋아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추 측하고 있다. 좀 길지만 인용하겠다. 소년은 향학심이 꺾여 울적하면서도 닥치는 대로 책과 신문을 읽었다(이렇다할 교육을 받지 못한 쓰 루였으나 선천적으로 혜민한 자질과 노력, 호학(好學)정신 으로 독학을 하며 교양을 쌓은 듯하다). 누구에게 받은 것인지 문학 취미가 있었 다.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는 멀리 떨어져 다른 가정의 사 람이 되고 말았다. …… 그런 환경이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을 문학을 좋아하게 만들었을 지도 모 른다.11 기타 가쓰지는 1923년(다이쇼 12년)에 고등소학교를 졸업하고 백부·기타로가 경 영하는 베 짜는 공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다. 그 무렵 책 대여점을 운영하는 그 지역 지식인·오카다 조스이(岡田澄水)와 만나 문학적 영향을 받았으며, 애독하고 있던 『北 国新聞』의「北国柳檀」 란에서 후쿠무라(福村無一路)의 작품에 자극을 받는다. 그리고 동년 10월 25일에는 이미 「北 国柳檀」에 “다카마쓰 기타 가쓰지”라는 아호로 3구가 뽑혀 게재되고 있다12. 그 중 1구가 “불 타는 성냥개비를 닮은 목숨”이다. 만 15세 소년이 지은 시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애 수 넘치는 구이다. 이 시기의 기타 가쓰지 소년의 창작 초기를 본고에서는 1기라고 한다. 이 구에 대해서는 구루 미사와 켄의 해석이 상징적이기 때문에 인용해 두겠다. 11 田辺聖子『道頓堀の雨に別れて以来なり-川柳作家·岸本水府とその時代(中)』中公文庫, 2000년, 411쪽. 12 전게, 木村[編], 8쪽. 이 기념할 만한 데뷔 구는 아이러니하게도 관헌의 고문에 의해 이질에 걸려 죽 은 쓰루 아키라 자신 의 불과 29년 8개월이라는 “불타는 성냥개비를 닮은”짧고 장렬한 삶을 암시하는 예언적인 작품이 되었다. 억울하게 목숨을 빼앗긴 것을 생 각하면 온전히 다“불타”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 다. 한참 활활“불타 는”도중에 억울하게도 그 불꽃을 관헌이 불어 껐던 것이다13. 물론 15살의 기타 가쓰지 소년이 자신의 너무 이른 마지막을 예견했을 리는 만무 하기 때 문에 상기의 해석은 사후에 이루어진 과도한 의미 부여라고 생각될 지도 모 른다. 그러나 이 구가 쓰여진 것이 관동대지진 직후였다는 사실, 기타 가쓰지가 태어 난 1909년부터 이 해까 지 15년간은 일본이 부국강병과 식민지 제국화에 여념이 없었 던 시기이며, 민중의 생명이 업신여겨졌던 시대였다는 것을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면 기타 가쓰지에게 있어서 죽음은 아 주 가까이에 있는 것이었기에 자신도 원통하고 분하게 죽어가는 무명의 백성 쪽에 있다는 사 실을 자각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이 구 직후에 발표된 구 중에“스러져가는 생명을 향한 스러질 자들의 울음”14(죽음이 다가와 있는 생명에게 결국 죽을 운명에 있는 자들이(죽어 주었으면 하 는 자들)이 울고 있다)는 구가 있다. 쓰루 아키라는 센류를 읊기 시작한 무렵부터 “스러져가 는” 모든 자들을 애처로워하며 “스러져가는”생명 쪽에 서서 살아가려고 했다. 그것이 작 풍 의 분위기로서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2) 센류인으로서의 데뷔 기타 가쓰지는 그 후에도「北国柳檀」에 정력적으로 구를 발표하여 1925년(다이쇼 14년) 5월 5 일 센류 작가로서 류단(柳檀) 데뷔에 이르기까지15, 1년반 동안에 34회 198구가 게재되어 있 다16. 이 시기에 베 짜는 공장 주인의 양자였던 가쓰지 소년이 베 짜는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 에 대해 읊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소년기의 쓰루 아키라는 양부의 베 짜는 공장에서 일 하는 여공들로부터“공장장”이라고 불리며 사 랑을 받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여공들이 열 13 楜沢健『だから,鶴彬-抵抗する17文字』春陽堂, 2011년, 23쪽. 14 전게, 木村[編], 9쪽. 초출은「北国柳檀」1923년11월 4일. 15 1925년4월 28일자「北国柳檀」(7句가 선구(選句))까지를 가르킨다. 16 전게, 木村[編], 8-24쪽을 참조하여 카운트했다.
1930년대의쓰루아키라의반전평화운동 157156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건강을 해쳐 버 림받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억압받는 약자의 목소리 를 담아내려고 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새장의 새 노래하며 여공 집으로 돌아가네 「北国柳檀」1924년 11월 30일자 (당시 유행했던 가요곡 「새장의 새(籠の鳥)」를 부르면서 여공이 일을 마치고 귀가한다. 「새장의 새」 는 사랑하는 남성을 만나고 싶을 때 만나지 못하는 첩의 슬픔을 노래한 곡이다.) 오그라들어 여공 어둑 새벽길을 간다「北国柳檀」1924년 12월 18일자 (몸을 움츠리고 여공이 밤거리를 걸어간다. 심야 근무의 고달픔을 읊은 구인가?) 여공들 소리 맞춰 노래 하네「北国柳檀」1924년 12월 18일자 (여공들이 누구부터라고 할 것도 없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해 어느새 목소리를 맞춰 노래를 부르게 된다.) 구루미사와 켄은“부국강병의 그늘에서 버려진 채 잇따라 결핵으로 죽어가는 『여 공』을 응 시하는 것에서부터 쓰루 아키라의 센류는 시작되고 있다”17고 평가를 하고 있는데 정곡을 찌 르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정토진종 신앙이 깊은 사람들이 많은 이시카와현에서 자란 쓰루 아키라가 “불상을 손가락으로 집어보니 가벼웠다.”18(대 의는 생략)와 같이 불교 신앙을 풍자한 구를 읊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1925년 봄에 쓰루 아키라는 마침내 동경하던 후쿠무라(福村無一路)를 만나는데 이것이 인 생의 전환점이 된다. 후쿠무라는 당시 한창 상승세를 타고 있던 신흥 센류의 여러 센류 잡지, 오타루(小樽) 다나카 고로하치의「氷原」, 나고야(名古屋) 후루야 유 메무라(古屋夢村)의「影像」, 나고야 모리타 이치니(森田一二)의 「新生」등을 소개하 는데 쓰루 아키라는 그것을 후쿠무라 에게 빌려 열심히 공부하여 구를 투고했다. 그리고 이미「影像」의1925년 4월호에 “이시카와 기타 이치지(石川 喜多一児)”라는 필명으로 8구가 게재되어 있다. 그 중 2구째가「폭풍과 바다 의 사랑을 보았습니까”(대 의는 생략)이다. 쓰루 아키라가 자란 다카마쓰초는 일본해의 거센 바다에 면해 있는 작은 마을인데 바다가 폭풍과 만나는 것을 사랑으로 비유해 바다가 폭풍을 애타게 기다리고 폭풍과의 만남을 기뻐하고 있다고 보고 있는 약동적인 구이다. 이 구로 쓰 17 楜沢健『だから, 鶴彬-抵抗する17文字』春陽堂書店, 2011년, 90쪽. 18 전게, 木村[編], 24쪽. 초출은「北国柳檀」1925년4월 28일자. 루 아키라는 센류계에 데뷔했다. 3) 프롤레타리아 센류로 기타 가쓰지(喜多一二)는 다나카 고로하치(田中五郎八)가 주재하는「氷原」에도 구 를 투고하여 1925년(다이쇼14년)10월 20일에 발행된 16호에“기타 가쓰지(이시 카와)”라는 필명으로 “연분 홍색 꽃의 호흡이 흐트러졌다”(대의는 생략)등 5구가 채 택되어 실려 있다. 이토록 조숙한 센 류인으로서 순조로운 행보를 시작한 쓰루 아키라 였다. 쓰루 아키라는 다나카 고로하치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열정적인 지도를 받는다. 쓰루 아키라는 다나카 고로하치의 부고를 접했을 때 그 무렵의 다나카 고로하치와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당시의 나는 아직 열 일곱 여덟의 문학소년이었는데 마침 이 무렵 누구나 한번은 걸리는 인생과 우 주의 문제에 대한 철학적 회의에 한창 사로잡혀 있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다나카 고로하 치의 신비주의적인 철학적 평론과 작품이 나타 났다. 나는 이유도 없이 쇠약해졌던 것이다. 그것은 「氷原」 15 호 무렵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여하튼 이 즈음부터 다나카 고로하치이즘의 신 봉자로서의 나의 센류 생활이 시작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氷原」에 등장한 나는 첫째는 아직 스무살도 되지 않은 소 년이라는 것이 그 이 유 중에 하나이기도 했겠지만 이윽고 다나카 고로하치의 주목 을 받게 되었다. 아니 그것은 주목이 라기 보다도 지도라고 말하는 편이 맞을 지도 모를 정도로 일일이 나의 작품과 문장을 거론하며 멋 쩍을 정도로 극구 칭찬하기도 하고, 또 직접 한 달에 서너 번씩이나 편지와 엽서를 보내 격려를 하 기도 하고 주의를 주기도 하는 열성적인 애정에 넘쳤던 것이다.19 기타 가쓰지가 창작을 계속하면서 깊이 연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다나카 고로하치 의 덕 분이었다. 「氷原」에는 1928년 11월 10일 발행된 35호까지 기타 가쓰지의 구가 게재되어 있다. 그런데 1926년(다이쇼15년) 초에 쓰루 아키라에게 커다란 전기가 찾아왔다. 양부의 베 짜는 19 鶴彬「田中五郎八と僕」一叩人[編]『鶴彬全集』たいまつ社, 1977년, 365쪽(이하, 『全集』라고 약기한다. 『全 集』에서의 인용은 일부 표기를 수정한다.
1930년대의쓰루아키라의반전평화운동 159158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공장이 도산하여 기타 가쓰지는 사촌형인 기타 이치로(喜多市郎)를 의지하여 오사카로 나왔 으나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일을 구하는데 완전히 지쳤을 무렵 “친구의 하숙집에서… 지저분 한 이불을 뒤집어쓰면서”「氷原」지상에서 모리타 이치니가 다나 카 고로하치에게 도전한 논 쟁을 탐독했다. 신비냐 과학이냐, 현실이냐, 초현실이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 위장은 그 야말로 오늘의 현실 에 굶주려 있었던 것이다. 빵 없이 무슨 사색이 있으랴. 직업 없이 무슨 문학이 있으랴. 나는 오히려 두뇌로 생각하기 보다도 위장으로 직감했던 것이다20. 논쟁은 1926년 5월부터 8월에 걸쳐 있었던 일이다. 기타 가쓰지는 다나카 고로하 치와 결 별하고 모리타 이치니를 지지하기로 결심했다. 머지 않아 나는 한 지저분한 공장에 들어갔다. 시골의 작은 부르조아 가정에서 바람을 맞지 않고 자 란 내가 처음으로 맛본 도회 생활의 풍파에 시달리고 공장 생 활이 뼛속까지 스며들게 하는 자본주 의의 모순에 상처를 받으며 이미 이 세상에 초 현실적인 것은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음을 체감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얼마 후 도쿄로 나옴과 동시에「川柳人」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글 을 써서 모 리타의 현실주의를 지지하는 태도를 밝힘으로써 왕년의 지도자 다나카 고로 하치를 향 해 반역의 깃발을 내걸었던 것이다21. 본 발표에서는 이리하여 신비주의 센류로부터 벗어나 노동자의 현실을 도려내는 자 세를 명확하게 했던 시기를 기타 가쓰지의“제2기의 시작”으로 파악한다. 전술한 다 나카=모리타 논쟁이 있고 난 후 상당히 시간이 흘렀으나 모리타 이치니는 1927년 12월 1일 발행된 「川柳 人」82호에 발표한 평론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아마도 레닌의『무엇을 할 것인가』를 모방한 제 목일 것이다)를 이런 선언으로 맺고 있다. 앞으로의 센류는 고센류 속에 무가정치에 대한 반역에서 태어난 것이 있었던 것 처럼(복자14자:인 20 同前, 367쪽. 21 同前, 367쪽. 용자) 환언하면「〇〇〇〇」의 단시로서 문단보다도 사회로 진출 해야 한다. 오늘날 민중이 굶주리 고 있는 것은 실은 센류와 같은 가두의 예술이자, 비판의 예술이니까.22 다나카=모리타 논쟁이 시작된 1926년 5월부터 이 무렵까지의 기타 가쓰지의 구를 보면 자본주의 와 종교를 비판하는 사회주의적인 구가 서서히 늘어나고 있다. 일부 를 소개해 두겠다. 자본주의 공장 니힐리스트 굴뚝 「氷原」1926년 5월 5일 (자본주의의 상징인 공장에는 니힐리스트와 같은 굴뚝이 서 있다) 처자 주려서 파업 못하네 「影像」1926년 9월 5일 (가족이 생활이 되지 않게 되면 노동자는 스트라이크에 돌입할 수 없다) 감옥 벽에 쓴 노예사 넘쳐나네 「影像」1927년 5월 5일 (감옥 벽에는 수감된 사람들이 쓴 낙서가 너무 많아 노예사(奴隸史)의 기록같다) 아아 귀하여라 성서를 팔면 내일의 빵 「影像」1927년 5월 5일 (아주 귀하게도 성서를 팔면 내일 먹을 빵을 살 수 있다) 이와 같이 기타 가쓰지는 사회적 약자가 억압받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 현실을 센류 로 토 해내는 프롤레타리아 센류 작가가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기타 가쓰지에게는 중 요한 만남 이 있었다. 1927년 5월 이후 일시는 특정할 수 없으나 서신을 통해 친해진 모리타 이치니와 만나 모리타와 함께 상경한다. 이 때 모리타에 의해 류손지(柳樽寺) 의 이노우에 겐카보(井上 剣花坊), 이노우에 노부코(井上信子) 부부와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23. 쓰루 아키라와 이노우에 겐카보의 관계에 대해서는 후술하겠다. 4) 다카마쓰 프롤레타리아 센류연구회 이듬해인 1928년 2월에 고향 다카마쓰초로 돌아온 기타 가쓰지는“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22 同上, p.80. 23 전게, 田辺, 425쪽. 단, 坂本幸四郎『井上剣花坊·鶴彬-川柳革新の旗手たち』(リブロポ トー·1990년)234쪽 에는 모리타(森田)가 쓰루 아키라를 이노우에 겐카보 집으로 데리고 간 것은1928년이후라고 기록되 어 있다.
1930년대의쓰루아키라의반전평화운동 161160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의 선언대로 행동에 옮긴다. 3월에는 친구들과 다카마쓰 프롤레타리아 센 류연구회를 결성 하고 이어 NAPF(전일본 무산자 예술 연맹전일본 무산자 예술 연맹전일본 무산자 예술 연맹(全日本無 産者藝術聯盟전일본 무산자 예술 연맹(全日本無産者藝術聯盟)) 다카마쓰 지부를 조직하여 프롤레 타리아 문예운동의 실천에 나선다. 센류의 작풍도 명쾌하고 전투적인 것으로 변 해간다. 착취당하는 생활 백치아가 번식한다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생활하에서는 아이들에게 교육을 시킬 수 있는 여유 같은 것이 없어 서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이 늘어간다) 작열의 군중, 철문을 부수고 (투쟁으로 불타오른 군중이 닫혀진 철문을 부수고 몰려들어간다) 정어리처럼 민중의 눈이 꿰뚫려 (마치 눈을 꿰뚫어 통째로 말린 정어리처럼 민중은 억지로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이상, 「다카마쓰 센류연구회(高松川柳研究会)」1928년3월23일에서 인용] 불상의 봉인 뜯으니 개 뼈다귀 (불상 아래의 봉인을 뜯어 보니 안에는 개 뼈가 들어 있었다) 결국 동맹파업 짓밟는 군대 (마지막에는 스트라이크를 진압하는 것은 군대이다) 로봇 늘리고 모두 자르네 (공장내에 로봇을 많이 도입하여 노동자를 모두 해고하다) 노예들 모아 병기 만들게 하네 (노동자=임금노예들을 모아 병기를 만들게 하고[그것으로 전쟁에 나간다]) 중세(重稅)에 쫓겨 어촌에 물고기 마른다 (무거운 세금 부담에 쪼들려 가고 있는 사이에 어촌에는 물고기가 사라져) [이상,「다카마쓰프롤레타리아센류연구회초(高松プロレタリア川柳研究会抄)」1928 년 4월 8일에서 인용] 그러나 기타 가쓰지의 고향에서의 실천은 오래가지는 못했다. 동년 4월 30일 아침 7시 기 타 가쓰지 등 센류연구회 4명은 이시카와현 고등경찰에 검거되어 가택 수색 을 당한다. 이로 써 다카마쓰초에 뿌리를 내리고 시도했던 프롤레타리아 문예운동은 짧은 역사속에 막을 내 렸다. 5) 반군 활동에서 제대까지 1928년 가을에 석방된 기타 가쓰지는 특별고등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겐카보·이노우에 노부코 부부를 의지하고 상경하여 잠시 기숙을 한 후 10월경에 생모·다키이 스즈(瀧井寿 )々 의 집에서 지내게 된다. 11월부터 필명을 쓰루 아키라로 바꾸고 이노 우에 겐카보가 주재하 는 「川柳人」에 센류와 평론을 발표하게 된다. 이 무렵의 구는 “피 흘리는 역사의 내일 맑으 리”,“바다 건너 세계의 친구들과 손을 잡고”,“대중 의 손에 뒤집히는 한 페이지”, “감옥 벽 계 속 두드려 결국 부수고”, “군중의 사태 사체를 넘어 타오른다”24(이상은 대의 생략)등, 프롤레타 리아 단결과 승리를 읊은 구가 눈에 띈다.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실천의 길이 끊긴 제2기 기타 가쓰지는 석방 후에 한층 더 전투적인 작풍으로 전환되었다. 이노우에 겐카보는“센류왕도론 (川柳 王道論)”을 주창하는 보수적인 센류가였으나 쓰루 아키라의 인품과 재능을 사랑하여 이 와 같은 계급적 작품에 지면을 제공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1930년 1월 10일, 갓 21살이 된 기타 가쓰지는 제9사단 보병 7연대 제9중대에 입대했으 나, 7월에는「가나자와 제7연대 적화 사건(金沢第七連隊赤化事件)」이 일어 났다. 기타 가쓰지 가 부대내에 몰래 가지고 들어간 일본공산청년동맹(日本共産青年同 盟) 기관지 『무산청년(無産 青年)』이 쓰루 아키라 등 2명의 사물함에서 발견된 사건 이었다. 1931년 6월 13일에 열린 군 법회의에서 쓰루 아키라는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2년의 판결을 받고 가나자와에서 오사 카로 이송되어 오사카 에이주(衛戌) 감옥 에서 1년 8개월에 걸쳐 형을 복역했다. 1933년 2월 에 석방되어 가나자와의 원대로 복귀한 후 쓰루 아키라는 12월에 제대하여 고향인 다카마쓰 초로 돌아와 왕년의 동지 이자, 목공품을 만드는 목수였던 오키노 에이키치(沖野栄吉)의 집에 몸을 의탁했다. 24 전게, 木村[編], 71-72쪽. 초출은「川柳人」193号, 1928년11월 1일.
1930년대의쓰루아키라의반전평화운동 163162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4. 제대 후의 창작과 반전평화운동 쓰루 아키라는 제대 후 곧바로 창작을 재개했다. 제대 후 처음으로 발표한 작품을 소개한다. 자유 깃발 아래에 (自由旗の下に) 탄환이 오지 않는 곳에서 (弾丸の来ぬところで) □□의 (□□の) 시가 나왔다(詩が出来た)(감옥 속에서 전쟁을 제재로 한 시를 작시했다는 뜻인가?) × 헤겔의 변증법을 (ヘーゲルの弁証法を) 거꾸러 뒤집어 (逆さにして) 감옥창의 봄! 가을! (獄窓の春! 秋!) × 눈가리개를 당한 채 (目かくしされて) 억지로 쓰고 만다 (書かされてしまう) □□서 (□□書) × 지하로 빠져나가 (地下にくぐって) 봄으로, 봄을 향한 (春へ、春への) 도화선이 되리라 (導火線とならう) × 주린 위장이(缼食の胃袋が) 손을 잡으라고 부추긴다(手をつなげとけしかけ)25 이 구는 ①5구 연작에 제목을 붙이고 ②센류를 3행으로 읊는 새로운 수법에 도전 하여 ③ 25 전게, 木村[編], 86쪽. 전게, 『全集』174쪽. 초출은「川柳人」 255호, 1934년 1월 1일.『全集』편자인 잇코진(一 叩人)은 5구째가 2행 쓰기로 되어 있는 것은 “지폭(紙幅(편집)의 편의”라고 추측하고 있다. 기무라 데쓰야 (木村哲也)는 3구째의 복자를 “전향(転向)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쓰루 아키라의 3행 쓰기 센류의 시도는 1935년 1월까지 계속되는데 그 후는 보이지 않는다. 두 번째 구가 나타내듯이「5·7·5」의 정형음율을 크게 일탈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또한 세 번째 구에서는 복자로 가려져 있기는 하나 공공연한 경찰 비판임이 명료하다. 쓰루 아키 라는 오사카 에이주 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로 인해 자세를 굽히지 않고 한층 더 센류의 혁신에 도전했다. 더욱이 쓰루 아키라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투쟁·운동이었다. 본고에서는 이 제대 후 의 시 기를 제3기로 보고 이 시기의 쓰루 아키라의 삶을“반전평화운동”으로 정리 한다. 센류를 읊 는 일과 투쟁으로서의 운동과는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분위기도 있 으나 쓰루 아키라는 그 것을 통일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쓰루 아키라에게는 센류와 시의 창작과 평론을 쓰는 일 자체가 운동이었다. 다음에 소개하는 쓰루 아키라의 선언 은 1937년에 쓰여진 것인데,“짚신 을 바꿔신고 전진하는 것이 낫다”, 즉 투쟁적인 센류를 쓸 정도라면 실제로 운동에 참가하면 되지 않느냐고 센류 평론가 시나가와 진 쿄(品川陣居)26에게 냉소적으로 야유를 당했을 때 의 연히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나 스스로도 나의 청춘기를 어려운 정치 투쟁에 걸고 어쩔 수 없이 □□생활의 고뇌까지 짊어져 왔 기 때문에 정치를 따르는 것이 문학을 따르는 것보다도 직접적 이고 효과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현재의 곤란한 정세는 그리 호락 호락 우리들이 정치를 따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다.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환경, 육체, 의사, 재능 등이 정치로 향할지 문학 으로 향할지 까지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문학이라고 해도 훌륭한 문화적 실천임을 알고 있기 때문 에 시대에 무너져 먹는 것조차 힘든 몸을 채찍질 해가며 싸우고 있는 것이다.27 다카마쓰초에서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정치 투쟁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문예운동을 전개 하고자 했다가 좌절한 쓰루 아키라는 실천으로서의 창작에 뜻을 두었던 것이다. 또한 1930 년 1월의 입대부터 1934년에 창작을 재개하기 까지 4년간에 걸쳐 센류가 로서의 인생을 중 단할 수 밖에 없었던 쓰루 아키라는 그 중단 기간에 지금까지의 자 신의 프롤레타리아 센류 26 시나가와 진쿄(品川陣居)는 1895년에 도쿄 ·니호나시(日本橋)에서 태어났다. 구를 읊는 구작(句作) 보 다도 센류평론으로 유명하며 도요게자이신포(東洋経済新報)의 출 판국원으로 조선, 중국 주재원을 역임했다. 1959년 사망. 尾藤三柳[監修]尾藤一泉[編]『川柳総合大事典 第一巻 人物編-近世·近代·現代 川柳家·関連人物』(雄山閣·2007년)127쪽. 27 전게, 『全集』401쪽. 초출은 鶴彬「川柳は一つの武器である」『火華』 29호, 1937 년8월1일.
1930년대의쓰루아키라의반전평화운동 165164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의 한계를 돌이켜 살펴보며 새로운 센류의 방향성을 구상하고 있었다. 쓰루 아키라의 평론 “정형율 형식 및 도식주의를 향한 투쟁(定型律 形式 及び図式主義への闘争)」28”에 그런 점이 명 료하게 적혀 있다. 쓰루 아키라는 프롤레타 리아 센류의 발전 과정에서는 5·7·5음의 정형 율 형식이“프롤레타리아 센류에 가장 적합한 유일한 형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29으나 그 것은 오류였다고 하며 이하와 같이 호되게 자기비판을 하고 있다. 야마무라 히로시(山村浩)가 5·7·5조는 일본어가 가지는 일정 불변의 리듬이라고 한 것은 옳지 않 다. 또한 정형율 형식의 인상성, 가요성을 가지고 대중적이라고 하 는 내 의견도 별로이다. 우리는 정형율적인 일본의 노동가보다 자유율적인 프롤레 타리아 서정시가 보다 노농대중의 의식이나 감 정을, 심각하게, 시가(詩歌)에 가락 을 붙여 소리 높이 읊듯이 묘사한 실례를 알고 있다.30 그리고 “피를 토하며 갱도를 올라오니 해고되네”(광산 노동 현장에서 피를 토했기 때문에 갱도 에서 지상으로 나오자 해고 당했다)등, 쓰루 아키라 자신의 작품을 14점 이나 들어 이하와 같이 혹평하고 있다. 이들 작품의 과반수는 공식적인 정치적 분노의 외침이나 이데올로기에 빈약한 살을 붙인, 관념적인 보고에 불과할 것이다. 때로는 프롤레타리아의 눈이 아니라 쁘띠 브루조아 인텔리겐치아의 히로이 즘의 눈이 작동하고 있다.31 4년의 중단을 거쳐 창작을 재개한 쓰루 아키라는 5·7·5조라는 슬로건적인 센류를 초월해 자유율 형식을 발전시키는 것을 시도했던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센류는 그 새로운 리얼리즘을 위해 고센류나 통속 센류가 가지는, 사물을 확정적으로 그리는 세련된 기술을 배움과 함께 복잡한 내용을 간이하게 표상화 하거나 추상적 방법에 의해 표 28 『川柳人』261호(1934년7월 1일) ·263호(동년 9월1일)에 분할 게재. 29 전게, 『全集』197쪽. 30 전게,『全集』198쪽. 31 전게,『全集』208쪽. 현하는 신비 센류의 상징적 기술도 소화해 내어야만 한다. 이 과거의 센류가 가지고 있는 기술을 우 리들의 잘 준비된 소화 와 지양에 의해 우리의 센류는 모든 과거의 센류 중 최고의 자리에 설 수 있 을 것이다. 그것은 작가의 개성과 재능과 기술에 가장 적합한 내용과 형식에 대한 창조적 탐구 및 창조적 발전에 의해 관철되어야만 한다. 자유율 형식의 발전은 이 길을 통해 창조의 날개짓을 하게 하라.32 쓰루 아키라는 ①“고센류”의“세련된 기술”을 배우고, ②“신비주의 센류”의 상 징적 기술도 소화하고 ③그들을 소화·지양하여 “작자의 개성과 재능과 기술”에 맞 는“내용과 형식에 대 한 창조적 탐구 및 창조적 발전”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선언했다. 한때는 프롤레타리 아 센류와는 대립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신비주의 센 류”에 대하여 여기서는 배제해야 할 것 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소화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점은 흥미롭다. 쓰루 아키라는 1935년이 되면 3행 쓰기는 그만두고 ①타이틀을 붙이고, ②자유율 형식의 구를 섞어, ③복 수의 구로 구성하는 단시와 같은 센류 작품을 창작하는데 도전했다. 그 최초의 작품을 소개 하겠다. 난카쓰의 고동(南葛の鼓動) 겨우 먹을 정도의 노동가에 마굴의 등불이여 (やっと食うだけの労働街に魔窟の灯よ) 낮의 사이렌은 허탕친 배(腹)의 정원에 울린다 (ひるのサイレンはあぶれた腹の庭に鳴る) 야간 작업의 창에 아니꼬운 긴자의 불빛 (夜業の窓にしゃくな銀座の空明り) 매립의 비참함을 찌부러진 광차의 폐선(埋め立てのむごさをひしゃげたトロッコの廃線) 불을 품은 굶주림과 불평의 톱니바퀴여(火をはらむ飢えと不平の歯車よ)33 이제는 이것이 센류냐 하는 의문의 여지도 있으나 마치 르포르타주 문학과 같이 난 카쓰로 발을 옮겨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 현장을 영상으로 찍어낸 듯한 작품이 다. 뛰어난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는 듯이 현장의 모습이 떠오른다. 굶주린 노동자의 실태를 극명하게 고발하는 듯한 필치는 센류 작가로서의 작구 활동이 정말로 쓰루 아키라에게 있어 32 전게,『全集』210-211쪽. 33 전게, 木村[編], 86쪽. 초출은『川柳人』267号, 1935년1월 1일.
1930년대의쓰루아키라의반전평화운동 167166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서 투쟁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는 이미 한 구만을 뽑아 낼 수 없이 5구가 세트로 시 적인 작품을 구성하고 있다. “우리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구체적 현실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34” 고 앞 장서서 외치는 쓰루 아키라에게 있어서는 1934년(쇼와 9년)의 동북대기근은 정면에 서 주시하지 않 으면 안되는 참사였다. 흉작 지대 -와타나베 준조(渡辺順三)에게 보낸다- 마른 유방에서 기근을 빨고 있다 (枯れた乳房から飢饉を吸うている) 반작(半作)의 벼 말려죽이고 지주의 라디오 체조 (半作の稲枯らせて地主のラジオ体操) 흉작을 구하지 못하는 부처를 팔다 남기고 있다 (凶作を救えぬ仏を売り残している)(기도해도 흉작을 구하지 못하는 불단은 팔래야 팔 수 없어서 남겨 두고 있다) 먹는 입을 줄이기 위해 기르던 고양이부터 먹기 시작하고 (食う口を減らすに飼猫から食べはじめ) 한톨도 거두지 못하는데 소작료 5할 인하 (一粒も獲れぬに年貢の五割引)35 소작의 딸(小作の娘) 온마을 딸들 팔려도 여학교에 갈 수 있는 지주의 따님 (村中の娘売られて女学校に行ける地主のお嬢さん) 모두 폐병으로 죽는 여공 모집 문서 (みな肺で死ぬ女工の募集札) 사랑하면 해고되는 규정으로 완전히 착취당하는 젊음 (恋すればクビになる掟で搾りつくされる若さ) 34 전게, 『全集』209쪽. 35 전게, 木村[編], 105-6쪽. 초출은『川柳人』268号, 1935년 2월1일. 시집가는 화려한 옷을 만드는데 속을 썩이고 있다 (お嫁にゆく晴衣こさえるのに胸くさらせている) 핏덩이 토해 고향으로 가는 나들이 옷이 되었습니다 (ふるさとへ血へど吐きに変える晴衣となりました) 갈라진 손의 피를 짜넣은 인견의 투매 (あかぎれの血を織り込んだ人絹の捨て売り) 정조를 환으로 청산하고 고향으로 (貞操を為替に組んでふるさとへ) 마시러 간다 -누나를 죽인 솜부스러기를 (吸いにゆく-姉を殺した綿くずを) 후지산 솟아 있는 하늘을 저임금의 그을음 연기 (富士がそびゆる空を低賃銀のすすけむり)36 이렇게 쓰루 아키라의 센류는 한 행인 5·7·5=17음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고발 문학으 로 발전해 갔던 것이다. 그리고 쓰루 아키라의 고발의 시선은 조선인 차별을 향한 내재적 비 판으로 나아간다. 반도 출생 (半島の生まれ) 반도 출생이라 헐값 쇠붙이의 생매장이 된다 (半島の生まれでつぶし値の生き埋めとなる) 내지인에게 져서는 안되는 땀으로 시세 반값의 토롯코(광차)를 민다 (内地人に負けてはならぬ汗で半定歩のトロ押す) 시세 반값어치만 일하면 게으름 피우지 말라고 소리친다 (半定歩だけ働けばなまけるなとどやされる) 요보라고 모욕을 당하여 분노가 치미는 조선어가 된다 (ヨボと辱しめられて怒りこみ上げる朝鮮語となる) 철판을 등에 짊어지는 젊은 인간 기중기로 굽는 등뼈 36 전게, 木村[編], 116-7쪽. 초출은『詩人』1936년4월호.
1930년대의쓰루아키라의반전평화운동 169168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鉄板背負う若い人間起重機で曲る背骨) 모국을 훔친 나라의 역사를 복습하는 큰 목소리 (母国掠め盗った国の歴史を復習する大声) 갈 곳이 없는 겨울을 쫓겨나는 조선인 숙소의 무리들 (行きどころのない冬を追っぱらわれる鮮人小屋の群れ)37 “헐값 쇠붙이(つぶし値)”는 염가에 거래되어 세공품의 재료로 쓰이는 금속류를 말 하며, “시 세 반값(半定歩)”은 “반도인”의 노동임금이 “내지인”의 절반이었던 것을 가르 킨다.” “토롯코 (トロ)”란 광차를 말하며,“요보”는 당시의 일본인이 조선인을 가르 켜 사용했던 경멸적 호칭 이다. 자유노동자로서 조선노동자와 함께 현장에서 일했던 적이 있는 쓰루 아키라였기에 가 능했던 리얼리티 넘치는 작품이다. 노동현장의 묘사는 물론이거나와 5구째에서는 이 해(1936년)부터 본격화되었던 조 선인에 대한 황민화 교육에서 신사숭배, 궁성요배, 교육칙어 암송을 강요하는 것의 잔 혹함을 비판 하고 있다.“황국신민의 서사(誓詞)”가 발표·강요되는 것은 1937년이 지만 이에 앞서 일찍이 읊고 있는 점에 쓰루 아키라의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와무라 미나토(川村湊)는 다른 센류작가가 조선인을 묘사할 때의 조선인관(냉소적 이고 조소적인 태도, 혹은 표면적인 이해와 배려)과 비교하여 이하와 같이 평가하고 있다. 쓰루 아키라 센류 작품의 시선이 얼마나 조선인 노동자에게 있어서 드물게 보이 는 동정 적, 공감적, 이른바 동지적인 친근감이 넘치는 것인지가 재인식되는 것이다. 사회학적인 인 식과 역사학적인 시선으로 보지 않으면 조선인 노동자의 진정한 모 습을 볼 수 없다. 쓰루 아 키라의 예가 그야말로 예외적이었던 것은“혁신 센류”조 차 인간과 항간의 표면만을 기지적 으로 포착해 그것을 흥미위주로 전달하는 유희 성에서 한발짝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 회성, 비판성, 서민성, 현실성, 풍자 성에 의해 센류가 하이쿠나 단가(短歌) 등의 다른 단시형 문학과 괴리되어 있다는 자각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쓰루 아키라의 프롤레타리아 센류에서 37 전게, 木村[編], 123쪽. 초출은『火華』1936년 12 월호.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38. 쓰루 아키라가 권력과 전쟁을 향해 들이대는 칼은 더욱더 그 칼날이 날카로와져 갔 다. 모 두에도 소개했던 바와 같이 1937년 여름 중일전쟁이 전면화 되면서 빨간 종이 (소집영장) 한 장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전선으로 동원되었고, 보도는 연일 연승을 알 리는 중에도 쓰루 아 키라는 정면에서 반전 센류를 발표했다. 수수 열매로 전차와 구두의 징 (高梁の実りへ戦車と靴の鋲) 시체 없는 뉴스 영화에서 용감하다 (屍のいないニュース映画で勇ましい) 출정이라는 문패가 있고 텅비어 넓은 작은 가게 (出征の門標があってがらんどうの小店) 만세를 부르며 올리고 갔던 손을 대륙에 두고 왔다 (万歳とあげて行った手を大陸において来た) 손과 발 떼어내어 통나무로 만들어 돌려보내고 (手と足をもいだ丸太にしてかえし) 태동을 느낄 즈음 뼈가 도착하네 (胎内の動き知るころ骨がつき)39 2구째에「뉴스영화」라고 되어 있지만 이 6구 전체가 뉴스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정경 묘사 로 되어 있다. 용감한 전차와 보병의 진군 장면을 보면서 쓰루 아키라는 그 이면에서 영화에 는 그려지지 않은 짓밟힌 옥수수밭과 겹겹으로 쓰러져 나가는 시체를 상상한다. 일손을 잃은 상점, 부상자, 그리고 전사자, 남겨진 가족, 태어나게 될 아빠 없는 갓난 아기의 울음 소리… 전쟁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생생한 모습을 쓰루 이키 라는 선명하게 그려낸다. 모두에도 제 시했던 “통나무로 만들어 돌려보내고”라는 부 분에서 구루미사와 켄은 이렇게 평한다. 38 川村湊「鶴彬とプロレタリア川柳」『国文学』2007년 8월호, 124-5쪽. 39 전게, 木村[編], 133쪽. 초출은『川柳人』281호, 1937년 11월15일.
1930년대의쓰루아키라의반전평화운동 171170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만들어 돌려보내고(してかえし)”라는 5글자에 담긴“인민의 원망과 탄식.”갈 곳 이 없는, 어디에 내 뱉고 터트리면 좋을지 모르는“뱃속 저 밑에서 올라오는”분노, 슬픔, 자조, 냉소가 이 구에는 넘치고 있다. 웃으면서 분노하고, 분노하면서 울고, 울며서 웃고, 웃으면서 원망할 수 밖에 없는“원망과 탄 식”의 소용돌이가 불과 17 글자의 정형율 속에 간신히 담겨 봉인되어 있다. 정형과 정형이 되지 않 는 것, 17 자와 17자가 되지 않는 것이 격렬하게 서로 부딪혀 금방이라도 그 균형이 깨질 것 같은 분 위가 감돌고 있는 구라고 해도 좋다.40 이와 같이 민족차별과 전시동원을 근본적으로 비판한 쓰루 아키라. 이 젊은 센류가 를 이 세상에서 없애 버린 것은 같은 편인 센류계로부터의 보신(保身)을 위한 공격 이 었다. 오사카 의 센류 잡지『샤미센소(三味線草)』가 쓰루 아키라의“통나무”라는 구 를 논하면서“얼마나 비 국가적 작품인지 섬뜩하여 소름이 돋는다.”41라고 誌上에서 비판을 하고 있는데, 이미 이전 호에서“반성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다른 수단으로 선처할 것이다”42 라는 협박성 예고도 있었 다. 동 잡지의 편찬자인 겐규시(鶏牛子)가 쓰루 아키라와 『川柳人』의 주재사(主宰社)인 이노우 에 노부코를 특별고등경찰에 밀 고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쓰루는 유치소에서 이질에 감염되 어(강제로 감염당해) 수갑 이 채워진 채 병원에서 숨을 거둔다. 일본군국주의는 성전을 방해하 는 자의 존재를 용 납하지 않았고, 일본 민중은 성전을 공격하는 자를 잃었다. 5. 결론을 대신하여 여기까지 그려온 바와 같이 나는 쓰루 아키라가 센류의 창조적 발전을 시도하고, 프 롤레타 리아 센류가, 반전 센류가로서의 신경지를 개척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신경 지야말로 전 시에는 센류에서 불거져 나오는 자로서 센류계로부터 위험시 되었고, 센 류계에 의해 찔린 것이다. 이미 서술한 바와 같이 쓰루 아키라 자신은 5·7조를 뛰어넘은 센류를 구상하고 있었다. 40 전게, 楜沢『だから, 鶴彬-抵抗する17文字』86-87쪽. 41 전게, 『全集』444쪽. 초출은『三味線草』1937년11월 15일. 42 전게, 『全集』444쪽. 초출은『三味線草』1937년10월 15일. 한편, 최근 정력적으로 쓰루 아키라를 재평가하고 있는 구루미사와 켄은 쓰 루 아키라의“숨 막히는 연기 아래 결핵의 날”(분진이 날리고 연기에 숨이 막히는 듯한 노동환경의 공장에“결핵의 날” 이라는 슬로건이 쓰여 있다)이라는 센류 등을 예로 들어“쓰루 아키라의 센류는 가두를 점거하는 음율을 띤 5·7조의 슬로건과 표 어와 광고 문구의 두려움, 그 거짓과 사기와 강요의 교묘한 레토릭을 환골탈태시킴 으로써 성립된 표현이자 방법이었다”43라고 평가하고 있다. 쓰루 아 키라가 한때 정 치적 슬로건을 패러디하여 작품을 만들었던 것은 분명히 틀림이 없는 사실 이지만 1934년 단계에서는 쓰루 아키라 자신이 그와 같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엄격하게 자 기비판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4년의 중단을 거쳐 창작을 재개한 쓰루 아키라는 5·7조의 슬로건적인 센류를 극복하여 자유율 형식을 발전시키려는 시도를 한 것 이다. 5·7조야말로 센류의“가쿠신(핵심)”인 것인지, 5·7조를 극복하는 데에 센류의 “가쿠신(혁 신)”이 있는 것인지 언어유희가 되고 말았는데(일본어로“핵심”과“혁신”은 둘 다 “가쿠신”이다-역자 주), 나에게 있어 풀리지 않는 물음을 던지며 본고 를 마친다. 43 楜沢健「スローガンとプロレタリア川柳―鶴彬と川柳の一九三〇年代」『社会文学』37호, 2013년, 49쪽.
172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1930年代における鶴彬の反戦平和運動 173 1. はじめに 1874(明治7年)年の「台湾出兵」以来、日本はアジアの各地において連続的に軍事力の行 使、侵略戦争、植民地支配の拡大を繰り返してきたが、1937年(昭和12年)7月7日に引き起 こされた盧溝橋事件をきっかけに日中全面戦争に突入し、戦時国民総動員体制へと移行し ていった。 すでに1933年(昭和8年)2月20日にはプロレタリア作家の小林多喜二が築地警察署内で拷 問により虐殺されており、文壇には重苦しい空気が漂っていたが、日中全面戦争が開戦す ると、もはや反戦的な文学を紡ぎ出すことは、ほぼ不可能な状況になっていた。しかし、若 き川柳作家·鶴彬(1909年生~1938年没)は、そんな時代にも筆を曲げるどころか、代表作で 遺作ともなった「手と足をもいだ丸太にしてかえし」(出征した兵士が戦闘で手足を失うと、[国家 は]手足をもぎ取ったまるで丸太のような姿の兵士を故郷に返す1)、「胎内の動き知るころ骨がつ 1 本発表では、国際学術会議における発表であることに配慮して、引用する川柳の句に、意味が文字通り明 瞭な句以外は、できるだけ後ろに()を付けて、私なりの大意や解釈を添えてみた。日本語使用者にとっては 些か煩瑣であると思われるが、ご理解いただきたい。もちろん、大意や解釈は多様にあり得るから異論や疑 問もあるであろうし、私の解釈が適切でない可能性も大いにあることは、あらかじめお断りしておく。なお、 川柳作品そのものの直訳は付さないようにする。 1930年代における鶴彬の反戦平和運動 勝村誠 | 立命館大学コリア研究センター長 き」(出征兵士の妻の胎内で胎児が元気よく動くようになった頃、戦死した夫の遺骨が妻の元に届く)2 のように正面から戦争を批判する川柳を吐き続けた3。「丸太にしてかえし」の句では、兵士 が「かえる」のではなく、国家が兵士を「かえす」と表現しているところが強烈である。 2. 鶴彬と川柳の評価をめぐって 鶴彬の川柳は公然かつ強烈に権力を批判するものであったが故に、鶴彬は「反戦川柳作家」 「プロレタリア川柳家」「川柳革新の旗手」と呼ばれ、1960年前後に「再発見」されて以来、4 次に亘り注目を集めてきた。 鶴彬を初めて本格的に論評したのは詩人の秋山清である4。これを契機として川柳家や俳 人による鶴彬の「再発見」「再評価」が少しずつ進んでいった(1次)。次に鶴彬研究が飛躍的に 発展したのは、1977年に発行された一叩人[編]『鶴彬全集』たいまつ社(以下、『全集』とする) に帰するところが大きい。一叩人は翌1978年に同じくたいまつ社から『反戦川柳人·鶴彬ー作 品と時代』と『新興川柳選集』を発表した(2次)。 続いて、鶴彬の没60年にあたる1998年を前後する時期に鶴彬の伝記的研究が大きく進展 した(3次)5。そして鶴彬生誕100年にあたる2009年の前後には、映画『鶴彬 こころの軌跡』の 制作·上映運動を柱として学術企画や出版企画も数多く展開され6、引き続き2011年以降に は日本における格差社会の進行と呼応する形で、楜沢健を筆頭として鶴彬を「再読」する動 2 木村哲也[編]『手と足をもいだ丸太にしてかえし 現代仮名遣い版 鶴彬全川柳』 邑書林、2007年、133ページ。初出は『川柳人』281号(1937年11月15日発行)。 3 川柳では句を詠むことを「吐く」と言う。尾藤三柳[監修]尾藤一泉[編]『川柳総合大事典 第三巻 用語編-新 古·川柳関連用語·ことばの宝庫』(雄山閣·2007年)によれば「時間的律動を拒否する形式上の特質と遺悶(カ タストロフィ)という本性を直覚的にとらえたのが『吐く』で、それが『吐』という形で明治新川柳以降の句会など から用語化された」と説明されている。 4 秋山清「ある川柳作家の生涯-反戦作家·ツルアキラ」『思想の科学』1960年9月号。後に秋山『近代の漂泊― わが詩人たち』(現代思潮社·1970年)に収録。 5 岡田一杜·山田文子『川柳人·鬼才「鶴彬」の生涯』(日本機関紙出版センター·1997年)、深井一郎『反戦川柳 作家 鶴彬』(日本機関紙出版センター·1998年)など。 6 前掲、木村[編](2007年)、吉橋通夫『小説 鶴彬―暁を抱いて』(新日本出版社·2009年)、尾藤一泉『鶴彬の 川柳と叫び』(新葉館出版·2009年)など。
174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1930年代における鶴彬の反戦平和運動 175 きが現れた7(4次)。 しかしながら、鶴彬は、そして川柳は、日本文学史において充分に高く評価されてきたわ けではない。ここで簡単に川柳について説明を加えておこう。川柳とは「五·七·五」の17音に 託して世相を描き風刺する定型短詩であるが、その起源は江戸時代の古川柳に溯る。古川 柳とは柄井川柳の評になる『誹風柳多留』をはじめとする作品群の総称である。日本では現 在でも、親しみやすい古典の入門教材として江戸川柳が用いられることがある。 「這へば立て立てば歩めの親心」(愛児が這うようになれば早く立ってくれ、立つようになれば早 く歩んでくれと子どもの健やかな成長を願うのが親というものの気持ちである)、「孝行のしたい時 分に親はなし」(親孝行をしたいと思う頃には、親はもう亡くなってこの世にいない)、「名月をとつ てくれろと泣く子かな」(夜空に浮かぶ美しい月を見た子どもが、「あれを取ってちょうだい」と親に 泣いてせがむ)など、今でも多くの人びとに親しまれている句は多い。また、「町内で知らぬは 亭主ばかりなり」(妻が夫以外の男性と性的関係にあることを近所の住民はみな知っていて、知らな いのは夫だけである)に代表されるような隠微な性的内容を描いた句も多い。古川柳は、その わかりやすさ、庶民性ゆえに、ことわざや格言としても定着している。 一方、明治30年代以降には、新聞の普及にも助けられながら、新時代の文芸精神に目覚 めた新川柳が登場し、久良岐社8、柳樽寺9、読売川柳研究会10の三派に寄って発展してい く。後述するが、鶴彬はこのうち柳樽寺の流れを汲む。新川柳は自己革新を続け、芸術性 を高めていくが、それでも小説、詩、和歌、俳句などに比べると、日本文学史において軽 んじられてきた。鶴彬は詩も文芸評論も得意であり、多くの作品を残しているが、それでも 川柳人であることにこだわり、川柳の芸術性を高めることと、戦闘性を備えたプロレタリア文 芸に鍛え上げることを両立しようとした。川柳にこだわったことが、鶴彬が評価を得にくかっ 7 楜沢健『だから、鶴彬―抵抗する17文字』(春陽堂書店·2011年)。 8 久良岐社は1904年(明治37年)6月に阪井久良岐を主幹として創立された結社。機関誌として『五月鯉』(1905 年創刊)、『獅子頭』(1909年創刊)があり、『電報新聞』を投句先とした尾藤三柳[編]『川柳総合事典』(雄山閣 出版·1974年)97、324ページ。 9 柳樽寺は1903年(明治36年)7月3日付の新聞『日本』に開設された川柳欄「新題柳樽」をもじって、1905年7月 3日に井上剣花坊宅に創立された結社。機関誌として『川柳』(1905創刊)、『大正川柳』(1912年創刊)、『川柳 人』(1927年創刊)がある。前掲、『川柳総合事典』333ページ。 10 読売川柳研究会は1905年6月7日に窪田而笑子ら『読売新聞』の投句家により設立された。前掲、『川柳総合 事典』323-4ページ。 た理由のひとつであろう。 さて、このたびの国際学術会議にあたって私に与えられた課題は、① 1930年代を対象 時期として、② 鶴彬の「反戦平和運動家」としての側面に光を当てることである。そこで、 1934年以降の鶴彬の創作活動自体を「反戦平和運動」とみなすことにする。そして、鶴彬の 川柳や評論に込められたメッセージを手がかりとして、鶴彬の政治的な考え方の特徴を描い てみようと思う。 そのために、鶴彬の創作活動を、① 「北国柳檀」に投句していた時期から大阪に出て田中 五郎八と森田一二の論争に出会うまで(1924年10月~1926年夏頃)、② 森田一二と出会いプ ロレタリア川柳家を志してから入隊するまで(~1930年1月)、③ 除隊後に主に井上剣花坊の 「川柳人」でプロレタリア川柳の「創造的発展」に取組み始めてから治安維持法で検挙される まで(1934年1月~1937年12月)の3期に分け、①、② を前史とし、③ を中心に論じてみる。 3. 川柳家としての歩み(前史) 3-1 出生から川柳の作句に至るまで 本題に入る前に、鶴彬の従軍までの歩みを整理しておくことにする。鶴彬は1909年(明治42 年)1月1日に石川県河北郡高松町字高松ソ32番地(現在の石川県かほく市高松)に、竹細工職 人の父·喜多松太郎と母·寿々の二男として生まれた。本名は喜多一二(かつじ)で、実際の 出生は1908年の年末であったと言われている。1915年に当時子供がいなかった伯父·喜多 喜太郎の養子となり、翌年には父·松太郎が亡くなり、母·寿々が同郷の瀧井芳太郎と再婚 したため、肉親との温もりには恵まれない幼少年時代であったと思われる。鶴彬は勉強が好 きで、尋常小学校での成績は男子67人中1番と優等であり、師範学校に進学して教員にな ることを望んだが、養父は家業を継ぐことを期待してその夢を許さず、鶴彬は高等小学校に 進学した。作家の田辺聖子は、そんな家庭環境が鶴彬を文学好きにさせたのかもしれない と推察している。少し長くなるが引用しておく。 少年は向学心を阻まれて鬱屈しながら、手当たり次第に本や新聞を読んでいた(大した教育は受け
176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1930年代における鶴彬の反戦平和運動 177 なかった鶴だが、生来の慧敏な資質と努力、好学精神で、独学の教養を積んだらしい)。誰から 享けたのか、文学趣味があった。父は死に、母は遠く離れて別の家庭の人となってしまった。…… そんな環境が感受性強い少年を文学好きにしたのかもしれない。11 喜多一二は1923年(大正12年)に高等小学校を卒業し、伯父·喜太郎が経営する機屋で働 き始める。その頃、貸本屋を営む町内のインテリ·岡田澄水と出会い文学的影響を受け、 愛読していた『北国新聞』の「北国柳檀」欄で福村無一路の作品に触発される。そして、同年 10月25日には早くも「北国柳檀」に「高松 喜多一二」の柳名で3句が選句されている12。そのう ちの1句が「燐寸の棒の燃焼にも似た生命」である。満15歳の少年が吐いたとはとても思えぬ 哀愁漂う句である。ここからの喜多一二少年の創作初期を本稿では第一期とする。この句 については楜沢健の解釈が象徴的であるので引用しておこう。 この記念すべきデビュー句は、皮肉なことに、官憲の拷問により赤痢に罹り殺された鶴彬自身の、 わずか29年8ヶ月という、「燐寸の棒の燃焼にも似た」短く壮絶な一生を暗示する予言的な作品とな った。理不尽に生命を奪われたことを考えれば、「燃焼」をまっとうできたわけではなかった、と 言った方が正しいだろう。まだまだ燃え盛る「燃焼」の中途で、理不尽にもその炎を官憲に よって吹き消されたのだ。13 もちろん、15歳の喜多一二少年が自らの早すぎる最期を予見していようはずはないから、 上記の解釈は事後的になされた過剰な意味づけだと思われるかもしれない。しかし、この句 が書かれたのが関東大震災の直後であったこと、喜多一二が生まれた1909年からこの歳ま での15年間は日本が富国強兵と植民地帝国化に明け暮れた時期であり、民衆の生命が軽ん じられた時代であったことを考え合わせるならば、喜多一二にとって死は身近にあるものであ り、自らも無念のまま死にゆく無名の民の側にあることを自覚していたのかもしれない。この 11 田辺聖子『道頓堀の雨に別れて以来なり-川柳作家·岸本水府とその時代(中)』 中公文庫、2000年、411ページ。 12 前掲、木村[編]、8ページ。 13 楜沢健『だから、鶴彬-抵抗する17文字』春陽堂、2011年、23ページ。 句の発表直後の句に「滅びゆく生命へ滅ぶ可きが泣き」14(死が迫っている命に、いずれ死ぬ運 命にある者たち[死んでもらいたい者たち]が泣いている)という句がある。鶴彬は川柳を吐き始め た頃から「滅びゆく」すべての者たちを愛おしみ、「滅びゆく」生命の側に立って生きようとして いた。それが作風のトーンとして一貫して流れている。 3-2 川柳人としてのデビュー 喜多一二はその後も「北国柳檀」に精力的に投句し、1925年(大正14年)5月5日の柳檀デビュ ーに至るまで15、1年半に34回198句が掲載されている16。この時期に、機屋の主人の養子で あった一二少年が機屋で働く女工のことを吐いていることに注目したい。少年期の鶴彬は養 父の機屋で働く女工たちから「工場長」と呼ばれて可愛がられていたようであるが、そんな女 工たちが厳しい労働環境の中で健康を害して使い捨てられていく姿を目の当たりにして、虐 げられる弱者の声をすくい取ろうとしていたことが伺われる 籠の鳥歌って女工帰るなり 「北国柳檀」1924年11月30日付 (当時流行した歌謡曲「籠の鳥」を歌いながら女工が仕事を終えて帰る。 「籠の鳥」は愛する男性に会いたいときに会えない妾の悲しさを歌った曲である) 縮まって女工未明の街を行く 「北国柳檀」1924年12月18日付 (体を縮こまらせて女工が深夜の街を歩いて行く。深夜勤務の厳しさを詠んだ句か) 女工達 声を合せて唄い出す 「北国柳檀」1924年12月18日付 (女工達が誰からともなく唄い始め、いつか声を合わせて唄うようになる) 楜沢健は「富国強兵の影で使い捨てにされ、つぎつぎと結核で死んでいく『女工』を見つ 14 前掲、木村[編]、9ページ。初出は「北国柳檀」1923年11月4日。 15 1925年4月28日付「北国柳檀」(7句が選句)までを指す。 16 前掲、木村[編]、8-24ページを参照してカウントした。
178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1930年代における鶴彬の反戦平和運動 179 めることから、鶴彬の川柳ははじまっている」17と評価しているが、正鵠を射ているだろう。 また浄土真宗の信仰に厚い人々が多い石川県で育った鶴彬が「仏像を爪んで見ると軽かっ た」18(大意は省略)のように、仏教信仰を皮肉った句を吐いている点も興味深い。 1925年の春に鶴彬は、ついに憧れの福村無一路に会うのだが、それが人生の転機とな る。福村は当時登り坂の勢いであった新興川柳の柳誌の数々、小樽の田中五郎八の「氷 原」、名古屋の古屋夢村の「影像」、名古屋の森田一二の「新生」などを紹介し、鶴彬はそれ を福村から借りて猛勉強し、投句した。そして早くも、「影像」の1925年4月号に「石川 喜多 一児」の柳名で8句が掲載されている。その内の2句目が「暴風と海との恋を見ましたか」(大意 は省略)である。鶴彬が育った高松町は日本海の荒々しい海に面した小さな町であるが、海 が暴風と出会うことを恋に見立て、海が暴風を待ち焦がれ、暴風との出会いを悦んでいると 捉える躍動的な句である。この句で鶴彬は川柳界へのデビューを遂げた。 3-3 プロレタリア川柳へ 喜多一二は田中五郎八が主宰する「氷原」にも投句し、1925年(大正14年)10月20日号発行の 16号に「喜多一二(石川)」の柳名で「薄桃色の花の呼吸の乱れたり」(大意は省略)など5句が選 句されている。ここまで早熟の川柳人として順調に歩み始めた鶴彬であった。鶴彬は田中五 郎八に才能を認められ熱心な指導を受ける。鶴彬は田中五郎八の訃報に接した折りにその 頃の田中五郎八との関係について次のように回顧している。 当時の僕はまだ一七、八歳の文学少年であり、そして丁度この年頃だれでも一度はかかる人生や宇 宙の問題に対する哲学的懐疑にとりつかれている最中であった。そこへいきなり田中五郎八の神秘 主義的な哲学的評論や作品があらわれてきたのである。僕はわけもなくまいってしまったのである。 それは「氷原」十五号あたりからだとおぼえているが、とにかくここに田中五郎八イズムの信奉者とし ての僕の川柳生活がはじまっている。 さてこのようにして「氷原」に登場した僕は、ひとつにはまだ二十歳にもならない少年であるということ 17 楜沢健『だから、鶴彬-抵抗する17文字』春陽堂書店、2011年、90ページ。 18 前掲、木村[編]、24ページ。初出は「北国柳檀」1925年4月28日付。 がその原因の一つでもあったろうが間もなくして田中五郎八の注目をうけるようになった。いやそれ は注目というよりも指導と言った方が適当かも知れないほどことごとに僕の作品や文章をとりあげて きまりの恥しいほどほめそやしたり、また直接に一ヶ月に三四回も手紙やハガキをくれて激励したり 注意したりする熱誠的な愛情にあふれたものであった。19 喜多一二が創作を続け研鑽を重ねることができたのは田中五郎八のおかげであった。「氷 原」には1928年11月10日発行の35号まで喜多一二の句が掲載されている。 ところで、1926年(大正15年)の初めに、鶴彬に大きな転機が訪れた。養父の機屋が倒産 し、喜多一二は従兄の喜多市郎を頼って大阪に出たが、働き口が見つからず、仕事探しに 疲れ果てた頃、「友人の下宿で…汚い蒲団にくるまりながら」「氷原」誌上で森田一二が田中 五郎八に挑んだ論争を読みふけった。 神秘か科学か、現実か超現実か、こう考えている僕の胃袋は、まさに今日の現実を飢えていたので ある。パンを得なくして何の思索があろう。仕事につかなくて何の文学があろう。僕はむしろ頭脳で 考えるよりも胃袋で直感したのである。20 論争は1926年5月から8月にかけてのことである。喜多一二は田中五郎八と決別して森田 一二を支持することを決心した。 間もなく僕はある汚い工場に入った。田舎の小ブルジョアの家庭に風あたらずで育った僕は、はじめ て味わった都会の生活の嵐に吹きまわされ、工場の生活が骨身にしみこませる資本主義の矛盾に痛め つけられ、もはやこの世に超現実的なものは何ほども実在しないことを体感したのである。そして僕は しばらくして東京に出ると同時に「川柳人」に「僕らは何をなすべきか」という一文を書き、森田の現実 主義を支持する態度をあきらかにし、かつての指導者田中五郎八へ反逆の旗を掲げたのである。21 19 鶴彬「田中五郎八と僕」一叩人[編]『鶴彬全集』たいまつ社、1977年、365ページ(以下、『全集』と略記する。 『全集』からの引用は一部の表記を修正する。 20 同前、367ページ。 21 同前、367ページ。
180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1930年代における鶴彬の反戦平和運動 181 本発表文では、こうして神秘主義川柳から離れて労働者の現実を切り取る姿勢を明確に した時期を喜多一二の「第二期の始まり」と捉えてみる。先の田中=森田論争からはかなりの 日数が経っているが、森田一二は1927年12月1日発行の「川柳人」82号に発表した評論「僕 らは何をなすべきか」(おそらくレーニンの『何をなすべきか』をなぞった題名なのであろう)をこんな 宣言で結んでいる。 来るべき川柳は古川柳の中に武家政治へ反逆して生まれ出たものがあった如く(伏字14文字:引用 者)換言すれば「〇〇〇〇」の短詩として文壇よりも社会へと進出せねばなるまい。今日民衆の飢え ているものは実は川柳の如き街頭の芸術であり、批判の芸術であるから。22 田中=森田論争が始まった1926年5月からこの頃までの喜多一二の句を見ると資本主義 や宗教を批判する社会主義的な句が徐々に増えている。一部を紹介しておく。 資本主義の工場ニヒリストの煙突 「氷原」1926年5月5日 (資本主義の象徴である工場にはニヒリストのように煙突が立っている) 妻子飢ゆればストライキに不入 「影像」1926年9月5日 (家族が生活できなくなると労働者はストライキに突入できない) 監獄の壁にどれい史書きあまり 「影像」1927年5月5日 (監獄の壁には収監された人々が書いた落書きが余りあり、奴隷史の記録のようだ) あな尊うと聖書を売れば明日のパン 「影像」1927年5月5日 (とても尊いことに、聖書を売れば明日食べるパンが買える) このように喜多一二は社会的弱者が虐げられる現実を直視し、その現実を川柳によって 吐き出すプロレタリア川柳家となった。また、この時期に喜多一二には重要な出会いがあっ た。1927年の5月春以降、日時は特定できないが、文通を通じて親しくなった森田一二と出 会い、森田に伴われ上京する。このときに森田によって柳樽寺の井上剣花坊、井上信子夫 22 同上、p.80. 妻に引き合わされたのである23。鶴彬と井上剣花坊の関係については、後述する。 3-4 高松プロレタリア川柳研究会 翌1928年の2月に郷里の高松町に戻った喜多一二は、「僕らは何をなすべきか」の宣言通り 行動に移す。3月には友人たちと高松プロレタリア川柳研究会を結成し、続いてナップ高松 支部を組織してプロレタリア文芸運動の実践に踏み出す。川柳の作風も明快で戦闘的なも のに変化していく。 搾られる生活白痴の子が殖る (資本家に搾取される労働者の生活の下では子どもに教育を付けされる余裕などなく、勉強が苦 手な子どもが増えていく) 灼熱の群衆、鉄の門を破り (闘争に燃え上がった群衆が、閉ざされた鉄の門を破ってなだれ込む) 鰯の如く民衆眼を貫かれ (まるで目を貫かれた鰯の丸干しのように、民衆は現実から目を背けさせられている) [以上、「高松川柳研究会」1928年3月23日より] 仏像の封印切れば犬の骨 (仏像の下の封印を切ってみたら中には犬の骨が入っていた) 遂にストライキ踏みにじる兵隊である (最後にはストライキを鎮圧するのは兵隊である) ロボットを増やし全部を馘首する (工場内にロボットをたくさん導入して労働者をみな解雇する) 奴隷ども集めて兵器こさえさせ (労働者=賃金奴隷たちを集めて兵器を作らせて[それで戦争に向かう]) 23 前掲、田辺、425ページ。ただし、坂本幸四郎『井上剣花坊·鶴彬-川柳革新の旗手たち』(リブロポー ト·1990年)の234ページには、森田が鶴彬を井上剣花坊宅に連れてきたのは1928年以降と書かれている。
182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1930年代における鶴彬の反戦平和運動 183 重税に追われ漁村に魚尽きる (重税の負担に追いつめられているうちに漁村には魚がいなくなってしまう) [以上、「高松プロレタリア川柳研究会抄」1928年4月8日より] しかし、喜多一二の故郷における実践は長くは続かなかった。同年4月30日の朝7時、喜 多一二ら川柳研究会の4人は石川県高等警察に検束され家宅捜索を受ける。こうして高松 町に根を張って試みたプロレタリア文芸運動は短い歴史に幕を下ろした。 3-5 反軍活動から除隊まで 1928年の秋に釈放された喜多一二は特高警察の監視を逃れるため剣花坊·井上信子夫妻 を頼って上京して暫く寄宿したのち、10月頃に実母·瀧井寿々の家で暮らすようになる。11 月から筆名を鶴彬に変え井上剣花坊が主宰する「川柳人」に川柳や評論を発表するように なる。この頃の句には「血を流す歴史のあした晴れ渡る」、「海こえて世界の仲間手をつな ぎ」、「大衆の手に翻る一頁」、「獄壁を叩きつづけて遂に破り」、「群衆のなだれ屍を超えて 燃ゆ」24(以上は大意省略)など、プロレタリアの団結と勝利を吐いた句が目立つ。治安維持法 違反で実践の道を断たれた第2期の喜多一二は、釈放後にいっそう戦闘的な作風に転換し た。井上剣花坊は「川柳王道論」を主唱する保守的な川柳家であったが、鶴彬の人柄と才 能を愛し、このような階級的作品に誌面を提供することを恐れなかった。 1930年1月10日、21歳になったばかりの喜多一二は金沢の第九師団歩兵七連隊第九中 隊に入隊したが、7月には「金沢第七連隊赤化事件」が起こった。喜多一二が隊内に密かに 持ち込んだ日本共産青年同盟機関誌『無産青年』が鶴彬ら二人の私物入れから発見された という事件であった。1931年6月13日に開かれた軍法会議で鶴彬は治安維持法違反で懲役 2年の判決を受け、金沢から大阪に移されて大阪衛戌監獄で1年8ヶ月に亘り刑に服した。 1933年2月に釈放されて金沢の原隊に戻ったあと、鶴彬は12月に除隊し、故郷の高松町に 戻り、かつての同志であり指物大工であった沖野栄吉宅に身を寄せた。 24 前掲、木村[編]、71-72ページ。初出は「川柳人」193号、1928年11月1日。 4. 除隊後の創作と反戦平和運動 鶴彬は除隊後すぐさま創作を再開した。除隊はじめて発表した作品を紹介しておく。 自由旗の下に 弾丸の来ぬところで □□の 詩が出来た (監獄のなかで戦争を題材にした詩を作詩したという意味か?) × ヘーゲルの弁証法を 逆さにして 獄窓の春! 秋! × 目かくしされて 書かされてしまう □□書 × 地下にくぐって 春へ、春への 導火線とならう × 缼食の胃袋が 手をつなげとけしかける25 25 前掲、木村[編]、86ページ。前掲、『全集』174ページ。初出は「川柳人」255号、1934年1月1日。『全集』編 者の一叩人は5句目が2行書きになっているのは「紙幅(編集)の都合」と推測している。木村哲也は3句目の伏 せ字を「転向」と推定している。鶴彬の三行書き川柳の試みは1935年1月まで続くが、その後は見られない。
184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1930年代における鶴彬の反戦平和運動 185 この句は、① 5句の連作にタイトルを付け、② 川柳を三行で吐くという新しい手法に挑戦 し、③ 2つ目の句が示すように「五·七·五」の定型音律を大きく逸脱して点が注目される。ま た、3つ目の句では、伏せ字で隠しているとはいえ、公然とした警察批判であることは明瞭 である。鶴彬は大阪衛戌監獄で厳しい拷問を受けたとも言われているが、それによって姿勢 を曲げることなく、川柳の更なる革新に挑んだ。 しかも、鶴彬にとってはそのことが闘争·運動であった。本稿ではこの除隊後の時期を第 三期と捉え、この期の鶴彬の生き方を「反戦平和運動」として整理する。川柳を吐くことと、 闘争としての運動とは別のものであると考える向きもあるが、鶴彬はそれを統一的に捉えて いた。鶴彬にとっては川柳と詩の創作や評論を紡ぎだすこと自体が運動であった。次に紹 介する鶴彬の宣言は1937年に書かれたものであるが、「わらじを履きかへて、前進した方が いい」、つまり、闘争的な川柳を書くぐらいなら実際に運動に参加すればいいじゃないかと川 柳評論家の品川陣居26に冷ややかに揶揄されたとき、敢然とこう宣言している。 僕自身といえども僕の青春期を困難な政治闘争に賭け、□□生活の苦悩をまで背負わされてきて いるのだから、政治につく方が文学につくよりも直接的効果的であることはわかっている。わかって いるが、現在の困難な状勢はそうやすやすとわれわれが政治につくことをゆるさないのだ。問題はそ ればかりではない。一人の人間がもっている環境、肉体、意思、才能等が、政治にむくか文学にむ くかをも決定しているのだ。だから僕ははじめ文学から出発し、政治に入り、その政治にやぶれてま た文学へかえってきたのだ。文学といえども立派な文化的実践であることを知っているが故に、時 代にやぶれ、食うことすらむずかしいからだを鞭うって闘っているのだ。27 高松町で地域に根を張って政治闘争としてのプロレタリア文芸運動を展開しようとし、そ れに挫折した鶴彬は、実践としての創作を志したのである。また、1930年1月の入隊から 1934年に創作を再開するまで、4年間に亘り川柳家としての人生の中断を余儀なくされてい た鶴彬は、その中断期間に、これまでの自分のプロレタリア川柳の限界を内省し、新しい川 26 品川陣居は1895年に東京·日本橋に生まれる。句作よりも川柳評論で有名で、東洋経済新報の出版局員と して朝鮮、中国駐在員を務めた。1959年死亡。尾藤三柳[監修]尾藤一泉[編]『川柳総合大事典 第一巻 人 物編-近世·近代·現代川柳家·関連人物』(雄山閣·2007年)127ページ。 27 前掲、『全集』401ページ。初出は鶴彬「川柳は一つの武器である」『火華』29号、1937年8月1日。 柳の方向性を構想していた。鶴彬の評論「定型律形式及び図式主義への闘争」28にそのこと が明瞭に綴られている。鶴彬はプロレタリア川柳の発展の過程では五七五音の定型律形式 が「プロレタリア川柳に最も適した唯一の形式だと思い込んでしまった」29がそれは誤謬であっ たとして、以下のように厳しく自己批判している。 山村浩が、五七五調は、日本語のもつ一定不変のリズムだと言ったのは正しくない。また、定型律 形式の、印象性、歌謡性をもって大衆的だとする僕の意見もあまりである。われわれは定型律的な メーデー歌より、自由律的なプロレタリア抒情詩が、より労農大衆の意識や感情を、深刻に、朗詠 的に描いた実例を知っている。30 そして、「血を喀いてシキをあがればくびになり」(鉱山の労働現場で血を吐いたため坑道から地 上に出たら解雇された)など、鶴彬自身の作品を14点も挙げて、以下のように酷評している。 これらの作品の過半は、公式的な政治的怒号や、イデオロギイに貧弱な肉づけをした、観念的な 報告にすぎないであろう。ときにはプロレタリア トーの眼ではなく、小ブルインテリのヒロイズムの眼 がはたらいている。31 4年の中断を経て創作を再開した鶴彬は、五七五調のスローガン的な川柳を乗り越えて自 由律形式を発展させることを試みたのである。 プロレタリア川柳は、その新しいレアリズムのために、古川柳や通俗川柳のもつ、事物を確定的に 描くという洗練された技術を学ぶと共に、複雑な内容を簡易な表象化や、捨象的方法によって表 現する神秘川柳の象徴的技術をも消化せねばならぬ。この過去の川柳が持つ技術の吾々の備えの 正しい消化と止揚とによって、吾々の川柳は、一切の過去の川柳の最高に立つことが出来るであろ 28 『川柳人』261号(1934年7月1日)·263号(同年9月1日)に分割掲載。 29 前掲、『全集』197ページ。 30 前掲、『全集』198ページ。 31 前掲、『全集』208ページ。
186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1930年代における鶴彬の反戦平和運動 187 う。それは作者の個性や才能や技術にもっともふさわしい内容や形式への創造的探究および創造的 発展によって貫かねばならぬ。自由律形式の発展はこの道を通じて創造の翼を羽ばたきさせよ。32 鶴彬は、①「古川柳」の「洗練された技術」に学び、②「神秘主義川柳」の象徴的技術も消 化し、③それらを消化·止揚して「作者の個性や才能や技術」に応じた「内容や形式への創造 的探究および創造的発展」を図らねばならないと宣言した。かつてはプロレタリア川柳とは対 立的にとらえていた「神秘主義川柳」について、ここでは排除するべきものと捉えるのではな く、消化するものと捉えている点は興味深い。鶴彬は、1935年になると三行書きは止めて、 ①タイトルを付して、②自由律形式の句を交えて、③複数の句で構成する短詩のような川 柳作品の創作に挑戦した。その最初の作品を紹介しておこう。 南葛の鼓動 やっと食うだけの労働街に魔窟の灯よ ひるのサイレンはあぶれた腹の庭に鳴る 夜業の窓にしゃくな銀座の空明り 埋め立てのむごさをひしゃげたトロッコの廃線 火をはらむ飢えと不平の歯車よ33 もはやこれが川柳なのかという疑問の余地もあるが、まるでルポルタージュ文学のように、 南葛に足を運んでそこに暮らす人びとをインタビューし、その現場を映像で切り取ったかの ような作品である。優れたドキュメンタリー映像を見るかのように現場の有様が浮かび上が る。飢えたる労働者の実態を克明に告発するかのような筆致は、川柳作家としての作句がま さに鶴彬にとって闘争であったことを示す。この作品からはもはや、一句だけを抜き出すこと はできず、5句がセットで詩的な作品を構成している。 「われわれは、何よりもさきに、具体的現実から出発せねばならぬ」34と唱道する鶴彬にと 32 前掲、『全集』210-211ページ。 33 前掲、木村[編]、86ページ。初出は『川柳人』267号、1935年1月1日。 34 前掲、『全集』209ページ。 っては1934年(昭和9年)の東北大飢饉は正面から見据えねばならない惨事であった。 凶作地帯-渡辺順三におくる- 枯れた乳房から飢饉を吸うている 半作の稲枯らせて地主のラジオ体操 凶作を救えぬ仏を売り残している (祈っても凶作を救えない仏壇は売ろうにも売れないので残している) 食う口を減らすに飼猫から食べはじめ 一粒も獲れぬに年貢の五割引35 小作の娘 村中の娘売られて女学校に行ける地主のお嬢さん みな肺で死ぬ女工の募集札 恋すればクビになる掟で搾りつくされる若さ お嫁にゆく晴衣こさえるのに胸くさらせている ふるさとへ血へど吐きに変える晴衣となりました あかぎれの血を織り込んだ人絹の捨て売り 貞操を為替に組んでふるさとへ 吸いにゆく-姉を殺した綿くずを 富士がそびゆる空を低賃銀のすすけむり36 こうして鶴彬の川柳は一行の五七五=17音では収まらない告発文学へと発展していったの である。そして、鶴彬の告発の眼差しは朝鮮人差別への内在的批判に突き進む。 半島の生まれ 半島の生まれでつぶし値の生き埋めとなる 35 前掲、木村[編]、105-6ページ。初出は『川柳人』268号、1935年2月1日。 36 前掲、木村[編]、116-7ページ。初出は『詩人』1936年4月号。
188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1930年代における鶴彬の反戦平和運動 189 内地人に負けてはならぬ汗で半定歩のトロ押す 半定歩だけ働けばなまけるなとどやされる ヨボと辱しめられて怒りこみ上げる朝鮮語となる 鉄板背負う若い人間起重機で曲る背骨 母国掠め盗った国の歴史を復習する大声 行きどころのない冬を追っぱらわれる鮮人小屋の群れ37 「つぶし値」は地金の安値で買われた金属類のこと、「半定歩」は「半島人」の労働賃金が 「内地人」の半分であったこと、「トロ」とはトロッコのこと、「ヨボ」は当時の日本人が朝鮮人 を指して使った軽蔑的呼称である。自由労働者として朝鮮人労働者とともに現場で働いた ことがある鶴彬ならではのリアリティに満ちた作品である。 労働現場の描写もさることながら、5句目ではこの年(1936年)から本格化した朝鮮人に対す る皇民化教育において神社参拝、宮城遙拝、教育勅語の暗誦を強いることの残酷さを撃っ ている。「皇国臣民の誓詞」が発表·強制されるのは1937年であるが、それに先んじていち早 く吐いている点に鶴彬の先見性があると言えよう。 川村湊は、他の川柳作家が朝鮮人を描くときの朝鮮人観(冷ややかで嘲笑的な態度、あるいは表 面的な理解や配慮)と比較して、以下のように評価している。 鶴彬の川柳作品の視線が、朝鮮人労働者にとって、稀に見るほどの同情的、共感的、いわば同 志的な親愛感に満ちたものであるかが、再認識されるのである。社会学的な認識と、歴史学的な 視線によって見なければ、朝鮮人労働者の真の姿を見ることはできない。鶴彬の例が、まさしく 例外的であったのは、「革新川柳」でさえ、人間や世間の表面だけを機知的にとらえ、それを面白 おかしく伝えるという遊戯性から、まだ何歩も出ていなかったからである。社会性、批判性、庶民 性、現実性、風刺性によって、川柳が俳句や短歌などの他の短詩型文学から隔てられているとい う自覚が持てるようになったのは、まさに鶴彬のプロレタリア川柳の出発からといっても過言ではな 37 前掲、木村[編]、123ページ。初出は『火華』1936年12月号。 いのである。38 鶴彬が権力や戦争に向けて突きつける刃はますます切れ味を鋭くしていった。冒頭にも 紹介したとおり、1937年夏の日中戦争の全面化により、赤紙(召集令状)一枚で多くの若者 が戦線に駆り出され、報道は連戦連勝を告げるなか、鶴彬は真っ正面から反戦川柳を発 表した。 高梁の実りへ戦車と靴の鋲 屍のいないニュース映画で勇ましい 出征の門標があってがらんどうの小店 万歳とあげて行った手を大陸において来た 手と足をもいだ丸太にしてかえし 胎内の動き知るころ骨がつき39 2句目に「ニュース映画」とあるが、この6句全体がニュース映画を思わせる情景描写になっ ている。勇ましい戦車と歩兵の進軍シーンを見て鶴彬はその裏で、映画には描かれない踏 みつけられたトウモロコシ畑や、累々と横たわる屍に思いを馳せる。働き手を失った焦点、 戦傷者、そして戦死者、残された家族、生まれてくるであろう父なき乳飲み子の泣き声… 戦争によって痛み付けられるものどもの生々しい姿を、鶴彬はくっきりと描き出す。冒頭にも 提示した「丸太にしてかえし」のくだりについて楜沢健はこう評す。 「してかえし」の5文字に込められた「人民の怨嗟」。行き場のない、どこに吐き出し、ぶつければよ いのかわからない「腹の底からの」怒り、悲しみ、恨み、自嘲、冷笑がこの句にはあふれている。笑 いながら怒り、怒りながら泣き、泣きながら笑い、笑いながら恨むしかない「怨嗟」の渦が、わずか 一七文字の定型律のなかにかろうじておさめられ、封印されている。定型と定型にならないもの、 一七字と一七字にならないものが、激しくぶつかりあい、いまにもその均衡が破れそうな気配を漂わ 38 川村湊「鶴彬とプロレタリア川柳」『国文学』2007年8月号、124-5ページ。 39 前掲、木村[編]、133ページ。初出は『川柳人』281号、1937年11月15日。
190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1930年代における鶴彬の反戦平和運動 191 せている句といってよい。40 このように民族差別や戦時動員を根本的に批判した鶴彬。この若き川柳家をこの世から 葬り去ったのは、身内である川柳界からの保身のための攻撃であった。大阪の柳誌『三味線 草』が鶴彬の「丸太」の句をあげつらい「いかに非国家的作品であるかに慄然たらざるを得な い」41と誌上批判をしているが、その前号ではすでに「反省せざる場合は、吾人は別の手段に よって善処したいと思ふ」42と脅迫的予告もされていた。同誌の編集者である鶏牛子が鶴彬 と『川柳人』主宰社の井上信子のことを特高に密告したものと推測される。鶴は留置所で赤 痢に感染し(感染させられ)、手錠をかけられたまま病院で命を落とす。日本軍国主義は聖戦 の妨害者の存在を許さなかったし、日本民衆は聖戦を撃つ者を失った。 5. むすびにかえて ここまで描いてきたように、私は鶴彬が川柳の創造的発展を試み、プロレタリア川柳家、 反戦川柳家としての新境地を切り拓いてきたと考えている。その新境地こそが、戦時にお いては川柳からはみ出すものとして川柳界から危険視され、川柳界によって刺されたわけで ある。 すでに述べたように鶴彬自身は五七調を超える川柳を構想していた。一方で、近年精力 的に鶴彬を再評価している楜沢健は、鶴彬の「息づまる煙りの下の結核デー」(粉塵が舞い煙 に息づまるような労働環境の工場に「結核デー」のスローガンが書かれている)という川柳などを例 に挙げて、「鶴彬の川柳は、街頭を占拠する韻律を踏まえた五七調のスローガンや標語や 広告コピーの恐ろしさ、その嘘と詐欺とやらせのレトリックを換骨奪胎させるところに成立し た表現であり、方法であった」43と評価している。確かに、鶴彬が一時期は政治的スローガ 40 前掲、楜沢『だから、鶴彬-抵抗する17文字』86-87ページ。 41 前掲、『全集』444ページ。初出は『三味線草』1937年11月15日。 42 前掲、『全集』444ページ。初出は『三味線草』1937年10月15日。 43 楜沢健「スローガンとプロレタリア川柳―鶴彬と川柳の一九三〇年代」『社会文学』37号、2013年、49ペー ジ。 ンのパロディとして作品を作っていたことは間違いないが、1934年の段階では鶴彬自身がそ のような自分の作品に対して厳しく自己批判していたことは確認しておくべきであろう。4年 の中断を経て創作を再開した鶴彬は、五七調のスローガン的な川柳を乗り越えて自由律形 式を発展させることを試みたのである。 五七調こそが川柳の「核心」なのか、五七調を乗り越えるところに川柳の「革新」があるの か、語呂合わせになってしまったが、私にとっての解けない問いを吐き出して本稿を閉じる ことにする。
人観弁護士布施辰治と韓観の観立運動家たち-韓観メディアの報道を中心に- 193 제2주제 第二主題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 한국 언론의 보도를 중심으로 - 人権弁護士布施辰治と韓国の独立運動家たち - 韓国メディアの報道を中心に- 이규수(히도츠바시대학교 한국학연구센터 교수) 李圭洙(一橋大学韓国学研究センター教授)
인권변호사후세다쓰지와한국의독립운동가들-한국언론의보도를중심으로- 195194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1. 들어가는 말 한국 정부는 건국에 공로가 있거나 직·간접적으로 기여한 유공자에게 국민훈장을 수여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훈장수여자는 삶을 바쳐 독립운동에 기여한 한국인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건국훈장을 수여받은 인물 가운데 일본인이 있다. 후세 다쓰지(布施辰治)이다. 그는 2004년 일본인 최초로 건국훈장(애족장)을 수여받은 변호사이자 사회운동가이다.1 후세 다쓰지라는 법조인은 누구인가? 어떻게 그는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의 구축에 기여 한 모범적인 인물로 언급되게 되었을까? 사람들은 그를 독일 나치 치하에서 죽어가던 유대 인들을 도왔던 쉰들러(Schindler)에 비유해 ‘일본인 쉰들러’라고도 일컫는다. 일제강점기 사회 운동가들은 각종 홍보 인쇄물에서 후세를 ‘우리 변호사 포시진치(布施辰治)’라 지칭하며 그에 대한 연대감과 애정을 아낌없이 보냈다. 후세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일본인으로서 건국 1 후세의 공적 개요는 다음과 같다. “일본인 변호사로서 1923년 義烈團員 金始顯 등이 總督府 관공서 폭 파를 계획하다 체포되자 이의 변론을 담당하여 공정한 판결을 촉구했으며 1924년 二重橋投彈義擧를 거 행한 金祉燮의 변론을 맡았고 1926년 일제 왕과 왕족을 爆殺하려는 거사로 인해 체포된 朴烈 등의 변론 을 맡아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를 주장하며 변론했고, 동년 羅州 宮三面民들이 東拓에 拂下된 토지 의 회수를 위해 전개한 장기간의 토지분쟁 및 농민항쟁의 조사를 맡아 활동했으며 1927년 朝鮮共産黨 활 동으로 체포된 權五卨, 姜達永 등이 日警의 고문 만행을 폭로하고 告訴를 제기할 때 이의 수행을 담당했 고 사회단체와 언론기관 주최의 강연회에서 사회문제를 演題로 강연하는 등의 사실이 확인됨(관리번호 960641, 운동계열:독립운동 지원, http://e-gonghun.mpva.go.kr/)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 한국 언론의 보도를 중심으로 - 이규수 | 히도츠바시대학 한국학연구센터 교수 훈장을 수여받을 정도로 한국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을까? 후세는 다양한 형태로 조선과 관계를 맺었다. 후세는 1923년 7월 북성회(北星會)와 동아일 보사가 기획한 ‘하기순회강연단’을 계기로 조선을 처음으로 방문했고, 의열단 사건의 변호를 비롯해 조선공산당 등 치안유지법 관련 변호단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또 관동대지진이 발생 했을 때는 조선인 학살사건에 대한 조사와 항의 활동에 나섰고, 각 언론사에 ‘학살의 책임을 통감한다’는 서한을 발송하는 등 양심적 법조인으로서 활동했다. 이 밖에도 후세는 박열(朴烈)의 대역사건 변호를 맡았을 뿐 아니라,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대 표적인 토지수탈 사례인 궁삼면(宮三面) 사건조사와 이재조선인구원회(罹災朝鮮人救援會) 고 문, 미에현(三重縣) 기노모토쪼(木本町)의 조선인 학살사건에 대한 진상조사활동, 수해 이재자 의 구원활동에도 참여했다. 조선인이 주최한 각종 강연회에서 연설하고, ‘재일조선인 노동산 업희생자구원회’ 결성, 형평사 대회에서 강연하는 등 후세의 활약상은 ‘일본 무산계급의 맹 장’이라는 평가에 걸맞게 다방면에 걸쳐있다. 이를 반영하듯 후세 다쓰지에 대한 연구는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저작 등 자료집의 복간을 계기로 그의 변호활동과 사회활동을 규명한 논저도 다수 출간되었다.2 일본 국내에서 는 후세와 조선인들과의 관계는 한일 연대투쟁의 본보기로 간주되며, 양국에서 후세는 식민 지 민중의 ‘벗’이자 ‘동지’로서 기억되고 있다. 인도주의에 바탕을 둔 실천적인 변호활동과 식 민지 민중에 대한 높은 관심을 고려하면 후세에 대한 이런 평가는 당연하다. 한국에서의 관심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제국과 식민지의 관계 속에서 “후세 다쓰지라는 일본인도 존재했다”는 사실은 한국인의 역사인식에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진다. 일본인 에 대한 인식이 침략의 선봉에 선 이른바 ‘악의의 일본인’으로 각인되는 사례가 많지만, 일본 인 중에도 후세 다쓰지와 같은 ‘선의의 일본인’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한일 양국이 추구해야 2 대표적인 자료집과 단행본은 다음과 같다. 자료집은 石卷文化センター所藏·布施辰治資料硏究準備會編, 『植民地關係資料集 1, 朝鮮編』(三協印刷, 2002);石卷文化センター所藏·布施辰治資料硏究準備會編,『植 民地關係資料集 2, 朝鮮·臺灣編』(三協印刷, 2006);布施辰治 著·明治大學史資料センタ ー監修,『布施辰 治著作集 全16卷·別卷1』(ゆまに書房, 2008) 등이 있고, 전기 ·평전으로는 本多久泰, 『布施辰治:全民衆 の味方吾等の弁護士』(火花社, 1930);生夢坊·本多定喜, 『涙を憤りと共に:布施辰治の生涯』(学風書院 1954);布施柑治,『ある弁護士の生涯』(岩波書店, 1963);布施柑治,『布施辰治外傳』(未來社, 1974);高史 明·大石進·李熒娘·李圭洙,『布施辰治と朝鮮』(高麗博物館, 2008);大石進,『弁護士布施辰治』(西田書店, 2010);明治大學史資料センタ ー監修, 山泉進·村上一博編, 『布施辰治硏究』(日本經濟評論社, 2011;森 正, 『評傳 布施辰治』(日本評論社, 2014) 등을 참조.
인권변호사후세다쓰지와한국의독립운동가들-한국언론의보도를중심으로- 197196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할 ‘공생을 위한 역사적 교훈’을 제공한다.3 이러한 문제의식 위에서 아래에서는 당시 조선에서 발행된 신문기사를 중심으로 조선인은 후세 다쓰지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살펴본다. 그의 조선 방문을 전후로 보도된 기사를 중심 으로 후세와 조선과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당시 그에 대한 사회운동 진영의 인식과 평가에 주목하겠다. 먼저 기존 연구에서 관심을 보였던 식민지 조선에 대한 후세의 현실인식을 살펴 보고, 이어 조선인은 후세와 어떻게 만나 어떻게 연대했는지 확인하면서 후세의 활동에 대해 평가해 보겠다. 2. ‘자기혁명의 고백’과 ‘하기 순회강연회’ 후세는 1880년 미야기현(宮城縣) 오시카군(牡鹿郡) 헤비타무라(蛇田村)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1902년 메이지법률학교를 졸업, 같은 해에 판검사 등용시험에 합격하여 사법관시보(試補)가 되었다. 다음 해 4월 우쓰노미야(宇都宮) 지방법원에 검사 대리로 부임했지만, 8월 검사라는 직책은 ‘범과 이리(虎狼)와 같은 일’이라며 사임하고 도쿄에서 변호사 명부에 등록했다. 후세가 변호사로서 첫걸음을 내딛던 시기는 러일전쟁의 전운이 감돌던 시기였다. 후세는 각종 민·형사 사건을 수임하면서 톨스토이의 ‘러일비전론(露日非戰論)’에도 깊이 공감하여 휴 머니즘 입장에서 사회문제에 관심을 표명했다.4 1906년에는 도쿄시 전차인상반대시민대회 3 후세 다쓰지의 건국훈장 수여를 계기로 한국의 주요 언론들은 앞 다투어 특집방송을 편성했다. 한국의 공 중파 방송인 KBS, MBC, SBS는 각각 특집 다큐멘터리를 방영했고, 최근에는 역사교육 자료로 활용되는 EBS의 ‘EBS 지식채널 e’에서도 관련 영상이 제작되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대학 입시에서도 후세에 관 한 논술시험이 출제되었고, 특히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는 『인물로 본 문화』라는 교재 안에 후세의 일 생을 주제로 ‘방송대학 TV’를 통해 일반 사회인을 향한 교육프로그램도 제작되었다. 또 高史明·大石進· 李熒娘·李圭洙,『布施辰治と朝鮮』(高麗博物館, 2008)은 『조선을 위해 일생을 바친 후세 다쓰지』(지식여 행, 2010), 후세 다쓰지의 장남인 후세 간지(布施柑治)가 집필한 『ある弁護士の生涯―布施辰治』(岩波新書, 1963)는 『나는 양심을 믿는다-조선인을 변호한 일본인 후세 다쓰지의 삶』(현암사, 2011), 布施辰治· 張祥 重· 鄭泰成,『運命の勝利者朴烈』(世紀書房, 1946)은 『운명의 승리자 박열-내 곧 일본의 권위, 천황의 권위 를 부정해 보이겠네』(현인, 2017)로 각각 번역 출간되었다. 4 후세의 기록에 따르면, 1918년과 1919년에 취급한 사건 건수는 1918년 형사 190건 ·민사 26건, 1919년 형 사 192건 ·민사 27건에 달했다. 여기에 취하된 사건까지 포함하면 1년에 취급한 사건 수는 250건이 넘었다. 1개월간의 출정회수는 많을 때는 135건, 적을 때에도 90건을 상회하는 것으로 1일 평균 4건 정도였다(『法 廷より社會へ』 1-1, 1920년 6월호, 14쪽). 사건을 변호했는데, 이것이 사회운동에 관여한 첫 사건이었다. 1910년에는 고토쿠 슈스이(幸 德秋水) 등의 대역사건(大逆事件)에서 간노 스가(管野スガ)의 변호를 자청했지만, 주임변호사로 부터 법정 발언으로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며 거절당했다. 이후 후세는 각종 노동쟁의 와 쌀소동 등의 재판에 관여하는 한편 보통선거운동과 공창(公娼)폐지운동도 전개했다. 후세 는 일본을 대표하는 인권변호사의 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후세는 언제부터 조선에 관심을 지니기 시작했을까? 후세는 메이지법률학교 재학 시절에 조선 유학생들과 긴밀한 유대를 지녔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그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였는지 는 명확하지 않다. 후세 자신의 언급에 따르면, 그는 1911년 일본에 의한 한국강점을 비난하 고 조선인과 조선독립에 대해 논의했다. 이때 작성한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문장 때문에 검사국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5 그러나 이 문장 역시 아직까지 소재를 확인 할 수 없고 작성된 연대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후세가 조선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드러낸 것은 3·1운동을 전후한 시기로 보인다. 그는 이 른바 ‘성공’한 변호사의 길을 포기하고, 1920년 5월 ‘사회운동에 투졸(鬪卒)한 변호사로서 살 아나갈 것을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민중의 권위를 위해 선언한다’는 ‘자기혁명의 고백’을 공 표했다.6 1921년에는 고베(神戶)의 미츠비시(三菱)·가와사키(川崎) 조선소 쟁의 지원을 계기로 야마사키 게사야(山崎今朝彌) 등과 함께 자유법조단(自由法曹團)을 결성했다. 이후 활동영역을 더욱 확장해, 후세는 노동운동, 농민운동, 무산정당운동, 수평운동 등에 조직적으로 관여하 기 시작했다. 후세는 일본 국내의 사회운동 관련 사건만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에도 관심의 폭을 넓혀 나갔다. 1922년 박열(朴烈)이 발행한 잡지 『불령선인(太い鮮人)』 제2호에 ‘프롤레타리아의 친 구, 변호사계의 반역자 후세 다쓰지’7라는 광고도 게재했다. 후세의 ‘자기혁명의 고백’은 신선 한 충격과 희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에게는 일본 국내의 부조리만이 아니라, 조선과 대만 5 布施辰治·張祥重·鄭泰成,『運命の勝利者朴烈』(世紀書房, 1946), 1쪽. 6 후세는 ‘자기혁명의 고백’을 통해 “인간은 누구든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 좋은가에 대해 진 정한 자신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는 양심의 소리이다. 나는 그 소리에 따라 엄숙히 ‘자기혁명’을 선언한 다. 사회운동의 급격한 조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종래의 나는 ‘법정의 전사(戰士)라고 말할 수 있는 변 호사’였다. 하지만 앞으로는 ‘사회운동에 투졸(鬪卒)한 변호사’로서 살아나갈 것을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민중의 권위를 위해 선언한다. 나는 주요 활동장소를 법정에서 사회로 옮기겠다”(『法廷より社會へ』 創刊 號, 1920년 5월)고 선언했다. 7 『太い鮮人』제2호, 1922년 12월.
인권변호사후세다쓰지와한국의독립운동가들-한국언론의보도를중심으로- 199198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등 식민지 문제도 해결해야 할 과제의 하나였다. ‘자기혁명의 고백’을 전후로 후세는 2·8 독립선언으로 검거된 최팔용(崔八鏞)과 백관수(白 寬洙) 등 조선인 유학생 9명에 대한 ‘출판법 위반사건’ 변호인으로 참여했다. 식민지 민중을 위한 인권변호사의 첫 등장무대였다. 당시 후세의 변론에 대한 구체적 정황은 앞으로 규명 할 필요가 있는데, 김도연(金渡演)의 회고에 따르면, 후세는 법정에서 “학생들의 신분으로 자 기 나라의 독립을 부르짖은 것이 어찌하여 일본 법률의 내란죄에 해당되느냐.……민족자결 의 사조가 팽창함에 비추어 학생들의 주장은 정당한 것이니 죄를 줄 수 없는 것 아니냐”는 논 조로 변론했다고 한다.8 일본인으로서 조선인 독립운동사건의 변론이 결코 쉽지 않은 사회적 분위기에서 그의 행동은 용기 있는 결단이었다. 재판 결과는 징역 9개월 이하의 유죄 판결로 끝났지만, 조선인들은 무료로 변호를 담당한 후세에 대해 큰 신뢰를 갖게 되었다. 조선인들 은 후세 다쓰지라는 양심적인 일본인을 발견한 것이다. 조선의 언론에 후세의 이름이 등장한 것은 1922년 6월 전후다. 『매일신보』는 1922년 6월 15일 신부인협회(新婦人協會)가 일본 도쿄 중앙불교회관에서 개최한 치경수정축하강연회(治 警修正祝賀講演會) 상황을 보도했다. 신부인협회는 당일 오쿠 무메오(奧むめお) 등을 중심으로 부인참정과 여성해방을 주장하는 강연회를 개최했다. 후세는 이 자리에 축하 연설을 위해 참 석했지만 강연회는 관할 경찰서의 제지로 해산되었다.9 이 보도는 ‘자기혁명의 고백’을 선언 한 변호사이자 2·8 독립선언 관계자를 변호한 후세의 동정을 직·간접적으로 접한 언론사의 당 연한 반응이었다. 또한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앞서 보도한 것은 장차 그의 활동이 조선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판단에서 그의 동정에 주목했기 때문일 텐데, 후세를 ‘일본 현대사상계에 명성이 자자한 학자’10라고 소개했다. 8 金渡演, 『나의 人生白書-常山回顧錄』(康友出版社, 1967), 81~82쪽. 후세가 변호에 가담한 정황에 대해 백 남훈(白南薰)은 당시 변호인을 정하기 위해 청년회 이사인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를 찾았으나 거절 당하고, 도교제대 학생회 간사인 후지타(藤田進男)과 교섭하여 이마이 요시유키(今井嘉幸), 사쿠마 고죠 (作間耕造)를 소개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우자와 후사아키(鵜澤聽明)의 허락도 받았으며 후세 이외에도 하나이 다쿠조(花井卓藏) 등의 변호인들이 변론을 담당했다고 한다(白南薰,『나의 一生』(新現實社, 增補 3 版, 1973), 86~88쪽). 9 「東都閑話- 婦人의 政治運動」, 『每日申報』1922년 6월 1일자. 신부인협회는 1920년 히라쓰카 라이초(平塚 らいてう), 이치카와 후사에(市川房枝) 등이 결성한 여성단체로 여성의 정치활동을 금지한 치안경찰법(治 安警察法) 제5조 철폐 운동을 추진했지만 1922년 해산되었다. 10 「北星會의 全鮮 巡廻 講演, 내월 1일부터」, 『每日申報』 1923년 7월 25일자. 후세에 관한 보도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조선 방문을 전후한 시기였다. 후세는 1923 년 7월 31일에 처음으로 조선을 방문했다. 그는 유학생 사상단체인 북성회(北星會)가 주관하 고 동아일보사가 후원한 ‘하기순회강연회’에 참가하기 위해 북성회원인 김종범(金鍾範), 백무 (白武), 정태신(鄭泰信)과 함께 서울에 왔다. 북성회는 후세의 활약상을 높이 평가하고 조선에 서 강연회를 개최함으로써 식민지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신사조를 확산시키고자 강연단을 조직했다. 조선 내 11단체 60여 명은 서울역에서 단체 깃발을 내걸고 강연단을 환영했다.11 후세는 조선에서의 첫 담화를 통해 총독부가 주장하는 ‘개발’은 조선인의 행복과는 무관하다 며 조선 방문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12 내가 이번에 조선에 온 것은 가장 굶주린 사람이 가장 절실하게 먹을 것을 구하듯이, 가장 비참한 생활을 한다는 조선 사람들을 만나 보면 인간생활이 개조되지 않으면 안 될 이상(理想)에 대해 깨닫 게 될 것이 많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궁경(窮境)에 빠진 조선에 와서 조선 사람과 만 나보는 것은 가장 의미가 깊습니다. 조선의 경치를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기분에 접 촉하고자 한 것이 내 방문의 주요한 목적입니다. 후세의 방한에 사회운동단체는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동아일보』는 서울역에 도착한 후세 의 사진과 천도교회당에서의 첫 강연에서 열변을 토하는 후세의 사진을 게재하고, 사설을 통 해 “후세가 조선을 보고 발표한 감상담 중에는 극히 작은 부분이지만은 조선인적 감정으로 조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13며 후세의 방문을 환영했다. 처음으로 눈앞 에서 후세를 대면한 조선인들은 ‘극히 작은 부분’이지만 후세가 조선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 11 서울역에서 거행된 환영회에는 무산자동맹회, 경성무산청년회, 조선노동연맹회, 토요회, 노동대회, 조선 양복기공조합, 여자고무직공조합, 서울청년회, 노동공제회, 경성금물조합, 동아일보가 참가했다.(「北星會 巡廻講演會入京ノ件」(京本高第5163號), 1923.7.31) 12 「表面의 開發은 其實 朝鮮民族의 幸福은 아니라는 것을 늣겼소:入京한 布施辰治氏談」 『동아일보』 1923 년 8월 3일자. 13 「新人의 朝鮮印象:布施辰治氏의 感想談」 『동아일보』 1923년 8월 3일자. 후세는 조선인 활동가들이 주 최한 환영석상에서 “조선인은 총독정치를 비판하거나 총독부의 정책을 논하는 등 조선통치에만 구애받 고 있다. 현대의 적(敵)은 부분의 문제에 있지 않다. 세계개조를 외치는 시대에 접어들었고 이러한 세계개 조에 따라 조선 문제도 해결될 것”(「北星會巡廻講演會入京ノ件」(京本高第5163號), 1923년 7월 31일)이라 고 발언했다.
인권변호사후세다쓰지와한국의독립운동가들-한국언론의보도를중심으로- 201200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보려 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순회강연회는 8월 1일 서울에서의 강연을 시작으로 12일까지 남부 각지에서 10여 회에 걸쳐 개최되었다. 강연회는 정치와 사회문제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허가를 받았지 만,14 당국은 강연단에 앞서 입국하여 강연회 실무를 준비하던 북성회 김약수(金若水)를 공갈 협박죄의 명목으로 구인했다. 후세는 이에 항의하여 경무국장과 동대문경찰서장을 방문하여 석방을 요구했다.15 이틀째 강연은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되었다. 후세의 강연 제목은 ‘약소민족의 비 애냐! 세계인의 환희냐!’였다.16 8월 4일에는 광주에서 광주노동공제회 후원으로 북성회 강연 회가 개최되었고, 강연 주제는 ‘조선 문제와 사상대책’이었다.17 8일에는 종로청년회관에서 여자고학생상조회와 서울청년회 주최로 ‘부인문제와 해방운동’이라는 주제로 부인문제강연 회가 개최되었다.18 9일에는 진주에서 강연회가 개최되었지만 ‘과격하다’는 이유로 중지 당했 다.19 10일과 11일에는 김해에서 김해청년회와 여자청년회, 형평사 김해분사 후원 아래 강연 회가 열렸다. 후세는 10일에는 ‘조선청년에 고함’, 11일에는 ‘세계 대세 상으로 본 조선 문제’ 를 강연할 예정이었지만 후자는 중지 당했다.20 『동아일보』는 ‘인간생활의 개조운동과 조선민족의 사명’이라는 제목의 강연기록을 일요판 특집으로 전면 게재했다.21 후세는 강연활동을 통해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조선인들에 게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강연단이 갈 수 없었던 마산에서는 후세가 단독으로 강연회를 개최했다. 강연회는 조선 남부 주요 지역에서 개최되었다. 강연 일정만 보더라도 연일 강행 군이었다. 조선 사회운동가에게 후세의 강연은 ‘신사조’를 확인하고 받아들이는 창구 역할을 했다. 후세는 앞으로 조선을 위한 연대투쟁이 가능한 일본인 ‘친구’로 받아들여졌다. 14 「북성회 강연, 오늘 저녁부터 천도교당에서」, 『每日申報』 1923년 8월 1일자. 15 「김약수의 인취내용, 부호 임종상을 전화로 협박하고 금품을 강청한 사실로」, 『每日申報』 1923년 8월 4 일자. 16 「북성회 뎨이일 강연, 종로긔독교청년회관에서」, 『동아일보』 1923년 8월 2일자. 17 「北星會講演, 光州에서 盛況」, 『동아일보』 1923년 8월 11일자. 18 「婦人문뎨대강연회」, 『동아일보』 1923년 8월 8일자. 19 「북성회의 강연, 진주에서 중지」, 『每日申報』 1923년 8월 9일자. 20 「金海에 北星會講演 演士無非中止」, 『동아일보』 1923년 8월 18일자. 21 「新人의 主義講演, 八月一日夜 天道敎堂에서 北星會主催 講演會 記錄」, 『동아일보』 1923년 8월 5일자. 또 후세는 조선 체제기간 중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의열단원 김시현(金始顯)의 재판을 변호했다.22 후세와 김시현은 메이지대학 동문이었기 때문에 서로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컸 다. 후세는 공판 과정에서 경기도 경부 황옥(黃玉)과 김시현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증인의 환문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3 강연일정 때문에 김해(金海)에 머물러야 했던 후 세는 담당변호사였던 이인(李仁)에게 “사법 재판의 권위를 위하여 독립운동을 초월한 인격독 립의 사상대책을 기대한다”24는 변론 요지를 보내고, 김시현에게는 위문 전보를 보냈다. 이처럼 후세의 첫 방문은 강연회만이 아니라 의열단 사건을 변호하기 위해서 였다는 사실 이 드러났다. 당시의 교통수단을 감안하면 결코 쉽지 않은 강행군이었다. 조선인에게 명성으 로만 알려져 있던 후세의 모습이 처음으로 생생하게 알려진 순간이었다. 『동아일보』는 서울 역에 도착한 후세의 사진을 게재하면서, “조선 사람에게 많은 동정을 가진 이로써 동경에서 독립운동 사건으로 아홉 사람이 입옥되었을 때와 최근에 김익상(金益相) 사건에도 무료로 변 론했다”25고 소개했다. 후세의 김익상 변호는 그동안 알려져 있지 않은 일이었다. 김익상은 1920년 의열단에 가 입하여 1921년 폭탄과 권총을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 왜성대(倭城臺)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져 국내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22년 3월에는 상하이 세관부두에서 시찰차 방문한 일 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암살하기 위해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했다. 그는 체포 되어 나가사키(長崎)로 호송되어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26 조선인 사회운동가들은 ‘자기혁명의 고백’을 선언한 일본인 변호사에 대한 기대감이 매우 컸다. 조선의 민족 해방 운동에 협조하거나 도울 수 있는 일본인을 발견한 것이다. 2·8 독립 22 김시현은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 1919년 3 ·1운동 이후 만주 길림으로 망명하여 의열 단에 입단했다. 1922년 김규식(金奎植)·여운형(呂運亨) 등과 같이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혁명단체대 표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1923년 의열단의 밀령으로 국내에 잠입하여 일제 식민통치기관의 파괴, 일제 요인의 암살 등을 계획하고 경기도 경찰부의 황옥(黃鈺)과 제휴하여 거사하려다가 붙잡혀 징역 10 년을 언도받았다. 23 「황옥의 범행내용, 의열단 공판 계속, 이왕 경기도 경부로 이 사건에 중심인물 황옥의 진술한 내용」, 『每 日申報』 1923년 8월 9일자. 24 「布施辯護士의 電報」, 『동아일보』 1923년 8월 12일자. 25 「布施氏 義烈團辯護, 이왕부터 조선 사람에게는 동정이 만타」, 『동아일보』 1923년 8월 1일자. 26 김익상의 활동에 대해서는 김영범, 『의열투쟁Ⅰ-1920년대(한국독립운동의 역사 26)』(독립기념관 한국독 립운동사연구소, 2009) 참조.
인권변호사후세다쓰지와한국의독립운동가들-한국언론의보도를중심으로- 203202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선언 사건의 변론에 참여한 후세의 언행은 조선인의 기대에 크게 부응했다. 후세의 말대로 ‘프롤레타리아의 친구, 변호사계의 반역자 후세 다쓰지’는 일본인이지만 누구보다 조선인의 입장을 깊이 이해한 인물이었다. 북성회의 ‘하기순회강연회’는 후세와의 공동 투쟁을 향한 첫 걸음이었다. 북성회는 후세의 강연을 통해 식민지 현실을 왜곡·선전하는 총독부에 대한 비판 을 조선 청년에게 확산시켰다. 후세 또한 이러한 기대에 부응했다. 그의 강연과 성실한 태도 는 조선인에게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후세가 ‘일본 무산운동의 맹장’임을 직접 확인함으 로써 앞으로 전개될 법정투쟁에 후세의 지원을 요청할 수 있다는 희망과 확신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3. 관동대지진과 인권옹호활동 일본에 귀국한 후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관동대지진이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후세는 조선인 학살사건을 조사·고발하기 위해 자유법조단의 선두에서 활약했다. 자유법조단은 후세의 제창으로 1923년 9월 20일 제1회 진재 선후책 회의를 개최했다. 후세 는 조선인 학살문제와 관련해 “죽은 조선인 수는 몇 천 명인가? 죽은 원인은 무엇인가? 단 지 조선인이라는 것만으로 죽었는가 아니면 무슨 혐의가 있어 죽었는가? 하수인은 누구인 가? 군인인가 경찰인가 자경단 민중인가? 살해방법은 어떠했는가? 잔인 가학한 살해, 학살 이 아니었는가? 사체는 어떻게 했는가? 하수인의 책임에 관한 수사, 검거 처벌의 실정은 어 떤가?”27 등의 문제를 제기했다. 후세의 현실인식은 적확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유법조단은 당국의 방해공작으로 학살의 진상을 정확히 규명할 수 없었다. 후세는 유학생들이 10월에 결성한 ‘도쿄지방이재조선인후원회(東京地方罹災朝鮮人後援會)’ 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2월에는 ‘피살동포추도회’에서 조선인 학살에 대한 당국의 태도를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나도 무서운 인생의 비극입니다. 너무나도 가혹한 비극이었습니다. 특히 그 중에는 조선에서 온 동포의 마지막을 생각할 때, 저는 애도할 말이 없습니다. 또 어떤 말로 추도 27 「震災中における朝鮮人殺害の眞相およびその責任に関する件」(大石進, 앞의 책, 2010, 168쪽에서 재인용). 하더라도 조선동포 6천의 유령은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을 슬퍼하는 천만 개의 추도의 말을 늘어놓더라도 그 사람들의 무념에 가득 찬 마지막을 추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 학살은 계급투 쟁의 일단이었습니다. 우리의 동지가 죽음을 당한 것도 6천의 동포가 그러한 처지에 직면한 것도 우 리가 계급투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졌습니다. 너무나도 억울합니다. 왜 우리가 졌는 지 생각해보기 바랍니다.28 후세의 연설문은 당시 조선인 학살을 규탄하는 문장 중에서 가장 격렬한 것이었다. 학살 에 대한 분노와 아쉬움이 추도사 전문에 담겨 있다. 일본인으로서 조선인에게 절절한 사죄를 표명한 흔치 않은 내용이었다. 후세는 조선인 학살문제를 인재(人災)로 인식했다. 후술하듯 이 1926년 3월 두 번째로 조선을 방문했을 때, 후세는 관동대지진에 대한 ‘사죄문’을 『조선일 보』와 『동아일보』에 우송했다.29 일본 귀국 이후 후세와 조선과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다. 언론은 조선 방문 이후 후세의 일 본에서의 발언과 동정에 민감하게 주목했다. 첫 방문 이후 일본에서의 후세의 활약상이 국내 에 속속 알려졌다. 1923년 11월 경남 창원 진해소작회는 소작쟁의와 관련하여 후세에게 변 호를 맡아줄 수 있는지 교섭했다.30 소작회는 후세에 대해 ‘일본 법조계에 명성이 있을 뿐 아 니라, 무산자해방운동에 가담한 후세 다쓰지’라고 평가하며, 그에게 소작쟁의 관련 사건의 변호를 요청했다. 후세는 자신이 직접 변호하지 못한다면 다른 변호사를 파견하겠다는 내용 28 『大東公論』 2-2, 1924년 11월. 29 『朝鮮旅行記』. 후세가 신문사에 우송한 사죄문은 다음과 같다. “조선에 가면 모든 세계의 평화와 모든 인 류의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들 무산계급해방 운동자는 설령 일본에 태어나 일본에 활동의 근거를 두고 있 어도 일본 민족이라는 민족적 틀에 빠져들지 않으며, 또 실제 운동에 있어서도 민족적 틀에 빠져 있지 않 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진재 직후의 조선인 학살문제에 대한 솔직한 나의 소신과 소감을 모든 조선 동 포에게 말하려고 합니다. …… 일본인으로서 모든 조선 동포들에게 조선인 학살문제에 대해 마음으로부 터 사죄를 표명하고 자책을 통감합니다.” 30 진해는 러일전쟁 이후 1906년 일본 해군 용지로 점탈되었다. 1922년 4월 조선총독부는 군용으로 그다지 소용이 없는 일부 지역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실제 경작자에게 매각하게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에게 매각하는 불법을 저질렀다. 1923년 6월 18일 주병화(朱炳和), 김종건(金鍾健), 배효면(裵孝眠), 주병 헌(朱炳憲) 등이 발기인이 되어 ‘진해소작회’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소작회에서 결의한 내용은 소작료는 3 할로 인하하고, 보리는 전부 소작인 몫으로 하며, 일본인들의 농간으로 소작인이 바뀌는 것을 막고, 관리 자로서의 횡포를 막기 위해 마름도 철폐할 것 등이었다(「鎭海小作爭議事件의 判決, 피고는 모두 방면 후 벌금형」, 『동아일보』 1924년 8월 6일자).
인권변호사후세다쓰지와한국의독립운동가들-한국언론의보도를중심으로- 205204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의 서한을 보냈다.31 후세의 각종 사회단체에서의 활약상도 소개되었다. 『매일신보』는 1924년 2월 10일 개최 된 제2회 일본노동총동맹 전국대회에 후세가 참가했다는 소식을 전했다.32 6월 28일에는 무 산계급정당의 모체인 정치연구회 창립총회에서 “우리는 무산계급의 이해에 입각한 정당의 수립을 도모한다”는 결의와 함께 후세가 총회에 출석했다고 보도했다.33 9월 11일에는 반(半) 노동총동맹의 기계노동조합, 전기철공자동차조합 등이 ‘투쟁주의’를 초방하며 관동노동조합 연합회를 창립했고 후세도 총회에 참석했다는 소식도 보도했다.34 사회운동가들은 앞으로 전 개될 연대투쟁에 기대감을 가졌고, 이를 위한 관련 정보가 언론보도를 통해 공유되었다. 후세는 1924년 10월에는 김지섭(金祉燮) 사건을 변호했다. 후세는 공판과정에서 폭발물 감 정을 신청했으나 각하되었고, 김지섭에게는 국가에 대한 반역죄로 사형이 구형되었다. 후세 는 김지섭을 대신해 법정에서 최종 변론을 했다.35 1925년 7월 2일자와 3일자 신문에는 김지 섭 사건에 대한 공판 기피신청서를 게재했고, 후세는 비밀재판의 부당성과 법관의 태도를 문 제 삼았다.36 후세는 사건과 관련해 배경으로서의 조선 문제를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37 변호인은 대외적으로 영토침략의 시시(猜視)를 민망히 알고, 대내적으로는 피정복자 압박의 저주에 고민하는 일본의 조선병합 통치문제를 배경으로 한 이 사건을 중대시함과 동시에 조선병합 통치의 잘못임을 절규한다. 피고 김지섭이 니쥬바시(二重橋)에 폭탄을 던졌다는 본 건의 심리 판결은 소위 조선 문제 해결을 위하여 극히 중대한 의의를 가진 사건이라 생각하여 매우 치밀하고 신중한 재판 소의 심리를 바란다. 31 「소작쟁의에 무료변호. 창원군 진해소작회에서 활동, 일본에 유명한 포시진치씨에게 청한바 자기가 못가 면 다른이가 가게 하겠다고」, 『조선일보』 1923년 11월 12일자. 32 「노동총동맹 전국대회」, 『每日申報』 1924년 2월 13일자. 33 「정치연구회의 창립총회와 결의」, 『每日申報』 1924년 7월 1일자. 34 「關東聯合創立 맹렬한 분자가 만타고 당국측은 주목하는 중」, 『時代日報』 1924년 9월 21일자. 35 「김지섭에게 사형을 구형, 국가에 대한 반역죄라고, 제이회 공판 오후속보」, 『시대일보』 1924년 10월 13 일자. 36 「金社燮 事件 公判, 忌避申請理由」, 『동아일보』 1925년 7월 2일자와 3일자. 37 「金社燮 事件 公判, 忌避申請理由」, 『동아일보』 1925년 7월 2일자. 후세는 이 사건의 배경이 ‘조선병합 통치의 잘못’라는 점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변호사로 서 법정에서의 투쟁 보도는 이어졌다. 1923년 12월 27일에는 무정부주의자 난바 다이스케 (難波大助) 등에 의한 황태자 히로히토를 저격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와 관련해 후세는 1924 년 11월 15일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사형 집행당한 난바의 시체가 방치되자, “사상범인 의 시체를 그렇게 냉혹히 하고 그대로 공동묘지에 묻는 것은 일본 국민의 사상발달을 저해하 는 일”이라며 시체를 찾아 매장했다.38 후세의 이런 태도는 가네코 후미코의 시신을 수습한 것으로 이어졌다. 1925년 1월에는 무라키 켄지로(村木源次郞)의 보석 신청 소식을 게재했다. 무라키는 1923 년 9월 관동대지진 당시 군부에 의해 학살당한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이토 노에(伊藤野枝) 등 의 보복투쟁을 목표로 와다 규타로(和田久太郞) 등과 함께 당시 계엄사령관 후쿠다 마사타로 (福田雅太郞)를 살해하려는 사건에 관여했다. 사건은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는데, 후세는 무라키가 예심 도중 옥중에서 폐병을 앓자 그의 보석을 신청했다.39 치안유지법 반대투쟁에 앞장선 후세의 모습도 보도되었다. 1925년 2월 개최된 민중대회에 서 정치연구회의 후세 다쓰지는 치안유지법을 반대하면서 “여러분이 이곳에서 논의하는 것 보다 들고일어나 중의원으로 가야한다”고 외쳤다.40 1925년 5월 10일에는 도쿄의 유학생 사 상단체인 일월회(一月會)가 주최한 강연회가 개최되었다. 후세는 여기서 ‘치안유지법에 대해 서’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참가자는 천 명이 넘었다.41 또 후세는 일월회가 간행한 잡지에 치 안유지법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42 제54회 제국의회의 산물로 새롭게 제정 실시된 보통선거법[과 치안유지법-인용자 주]은 과연 어떠 한 것인가를 고찰하니, 전자인 보통법은 일본 내지에만 적용하고 조선, 대만에는 적용하지 않는다. 후자인 치안법은 일본 내지와 마찬가지로 조선과 대만에도 적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법치국가로서 너무나도 불평등한 것이다. 같은 국가의 통제 하에 두는 것, 그리고 같은 국민의 생활규범을 공평한 법률에 따라 정하는 것이 입헌법치의 근본이다. 그렇다면 불완전하더라도 국민의 정치능력을 믿는 38 「絞者臺上의 이슬이 된 難波大助의 屍體」, 『時代日報』 1924년 11월 17일자. 39 「重大犯人獄死, 폐병으로 인하여」, 『每日申報』 1925년 1월 25일자. 40 「民衆大會의 騷亂 遂히 鮮散命令」, 『每日申報』 1925년 2월 21일자. 41 「在東京思想團體 一月會講演, 성황중에 폐회」, 『동아일보』 1925년 5월 18일자. 42 布施辰治,「治安維持法の實施に就て」, 『思想運動』1-5, 1925년 6월, 62쪽.
인권변호사후세다쓰지와한국의독립운동가들-한국언론의보도를중심으로- 207206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데 입법의 표준을 둔 보통선거법을 조선과 대만에 실시하지 않고, 반면 국민의 치안 침해 가능성이 의심되는 입법 표준을 둔 치안유지법만을 조선과 대만에 실시한다고 한다. 즉, 이는 현재 정부 당국 이 조선과 대만 국민을 보통선거법을 실시할 정도로까지는 믿지 않고 있고, 치안유지법을 실시해야 한다고 의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무엇보다 증오해야 할 정치의 상서롭지 못한 모습이며 동시 에 법치의 불평등이다. 요컨대 후세는 일본정부가 식민지의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식민지에도 치안유 지법을 시행하려드는 모순 구조를 비판한 것이다. 당시 일본 국내에서는 치안유지법의 시행 과 관련해 다양한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식민지 조선의 문제를 거론하며 치안유지법의 적용을 비판한 것은 후세가 유일했다고 말할 수 있다. 『조선일보』는 후세의 박열 사건의 변호에 대해 ‘침식을 잊고 진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재 판 과정에 대한 보도와 함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옥중결혼 문제에 대해 “옥중결혼이라 함은 물론 형식문제이겠지만 당장 두 사람이 자기 주장상 불필요하다고 반대함으로 결혼한 다 함은 허설에 지나지 못하다. 다만 만약 두 사람이 만약의 경우를 당할 때에는 박열로 말하 면 자기 가족이 있음으로 조치하겠지만, 후미코는 뒷일을 인수할 사람이 없음으로 그 두 사 람의 일을 박열 가족이 인수하기 위하여 원래 본의는 아니더라도 호적상 신고하게 될 뿐이 다”고 말했다.43 후세는 박열과 각별한 관계를 맺었고 누구보다 그를 이해하고 있었다. 1926년 1월, 후세는 미에현 조선인 피살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흑우회의 장상중(張詳重)과 함께 조사단에 참여했다.44 도쿄의 조선인 사회운동단체는 사건조사를 위해 1월 29일에 신태 악(辛泰嶽)과 신재용(辛載鏞)을 현지에 파견했고 이들의 방문에 후세도 동행했다.45 1926년 2 월 4일자 『동아일보』에는 사건의 보고서 전문이 게재되었는데, 검열에 저촉되어 복자(伏字) 상태로 발행되었다. 후세는 학살에 대해 ‘인도상의 대문제’라며, 감정을 조장한 현 당국의 실 태를 고발하고 당사자의 검거를 주장했다.46 43 「朴烈의 兄弟 七年만에 獄中에서. 박렬부부와 그의 친형 한자리에서 상대하얏다 朴烈은 本是正直 精神鑑 定거절도 자유이오 시행도 자유이다, 布施변호사의 談」, 『조선일보』 1925년 12월 14일자. 44 「三重縣事件 조사원파견, 흑우회에서」, 『시대일보』 1926년 1월 20일자. 45 「三重縣事件과 各國體奮起」, 『時代日報』 1926년 1월 29일자. 46 「在住同胞를 殺害한 三重縣事件眞相報告, 人道上의 大問題(日自由法曹團 特派員, 布施辰治)」, 『동아일 보』 1926년 2월 4일자. 이처럼 후세는 조선 방문 이후 발생한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문제 규명에 누구보 다 적극적이었다. 이는 후세 자신의 신변에도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후세는 학살 의 본질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일 뿐만 아니라 조선인에게 사죄하는 마음도 커서, 조선의 언 론과 사회운동가들에게 학살의 책임문제를 공식적으로 사죄했다. 또 후세는 김지섭과 박열 의 변호인으로 재판에 관여하고, 치안유지법을 비판하면서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 등의 이 념과는 무관하게 조선과 관련된 모든 사건을 변론했다. 후세에게 조선의 문제는 식민지배라 는 반인도주의 정책에 대해 사죄하고 철폐 운동을 실천하는 과정이었다. 4. 궁삼면과 농촌문제 1926년 3월 후세는 두 번째로 조선 방문의 길에 나선다. 전남 나주군의 궁삼면(宮三面) 토지 회수운동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 조선방문은 조선인과 농촌문제에 대한 후세의 인 식을 잘 보여준다. 궁삼면 토지회수운동은 조선 후기부터 식민지기에 걸쳐 봉건지배층과 동 척을 상대로 전개된 토지탈환투쟁이었다.47 궁삼면 농민들은 동척의 불법적인 토지매수에 맞서 ‘토지소유권 확인소송’과 ‘토지소유권 청구소송’을 제기하는 등 재판을 통해 토지소유권을 찾으려했다. 그러나 ‘토지조사사업’기에 이루어진 일련의 재판은 동척의 토지소유권을 법적으로 확정하는 절차에 불과했다. 농민들 은 일본에 대표를 파견하여 후세에게 토지문제의 상담과 소송을 의뢰했다. 농민 대표자들은 이미 진해소작회의 사례를 알고 있었고 각종 언론 보도를 통해 후세의 활약상을 높이 평가하 고 있었다. 후세는 농민대표의 의뢰를 받아들여 1926년 3월 2일부터 11일까지 조선을 방문했다. 농민 들이 작성한 ‘서약서’와 ‘토지회수불납동맹혈서’를 본 후세는 농민들의 열정에 감격했다고 한 다. 후세는 토지문제를 조사하면서 식민지 농촌문제의 심각성을 직접 체험하는 계기를 마련 47 동척의 궁삼면에서의 토지집적과 법적 토지소유권의 획득과정은 일본인 지주의 토지집적과정의 특질 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權寧旭, 「東洋拓植株式會社と宮三面事件」,『朝鮮硏究』 78, 1968;安秉珆, 「東洋拓植株式會社の土地收奪について」, 『龍谷大學社會科學硏究年報』7, 1976;이규수, 「전남 나주군 ‘궁삼면’의 토지소유관계의 변동과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집적」,『한국독립운동사연구』 14, 2000;이규수, 「일제하 토지회수운동의 전개과정」,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6, 2001을 참조.
인권변호사후세다쓰지와한국의독립운동가들-한국언론의보도를중심으로- 209208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했다. 후세는 “조선 무산계급 농민의 생활고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또 소위 식민지 정책의 피지배 계급에 대한 압박에 분개할 수밖에 없다. 사회문제 중의 사회문제이고 인도문 제 중의 인도문제”48라며 감회를 토로했다. 후세의 두 번째 조선 방문은 ‘조선인의 이익을 위 해 투쟁하는 사건’을 변호하겠다는 자기실천과정이었다. 각 언론은 후세의 조선 방문 사실을 보도했다.49 도중 후세는 대구에서 강연회를 개최했지 만 불허되어 각 공장의 노동 상황을 조사했다. 후세는 대구에서 『시대일보』 기자와의 대담을 통해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학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50 내가 조선 땅을 밟기는 이번이 두 번째인데 이번 온 중요한 용무는 궁삼면 사건의 조사와 해결 노력 에 있습니다. …… 조선 소감을 말하기 전에 우선 제일 조선 민족에게 말하지 아니치 못할 소감이 있습니다. 그것은 즉 3년 전에 일어난 진재 변란 중에 생긴 소위 ○○○○○○ 문제의 사죄입니다. …… 나는 이번 조선에 와서 친히 조선 문제에 헌신함에 있어 조선 전토에 독자를 갖고 있는 귀지를 통해 우선 제일로 한 사람의 일본인으로서 소위 ○○○○○○ 문제 사죄의 성의를 표명하는 바입니 다. …… 저 사건이 있은 이래 처음으로 조선에 온 나는 소위 ○○○○○○ 문제에 대한 사죄의 성의 를 표명할 자책을 통절히 느끼는 바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후세에게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문제는 하나의 멍에였다. 기사 에서의 ‘○○○○○○’는 ‘조선인 대학살’이다. 일본인 후세에게 일본 당국과 자경단이 저지 른 학살 사건에 어떻게 대응할지는 하나의 역사적 과제였다. 조선인에게 ‘사죄의 성의를 표 명할 자책을 통절히 느낀다’는 발언에는 그의 진실함이 전달되었을 것이다. 대구에서는 3월 8일 시대일보사 주최 강연회가 개최되었다.51 그의 환영식은 ‘가슴을 헤치 고 환희하다’라고 보도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52 사회운동가들은 관동대지진 학살문제에 48 『朝鮮の産業と農民運動』, 6쪽. 49 「羅州事件調査로 布施辰治氏 渡來, 경성에도 들러간다」, 『동아일보』 1926년 3월 3일자;「布施辰治씨 5 일 경성 着. 4일 대구를 떠났다」, 『조선일보』 1926년 3월 5일자. 50 「一日本人으로서 全朝鮮兄弟에 謝罪 大邱에서 布施辰治氏談」, 『時代日報』 1926년 3월 6일자. 51 「布施辰治氏「朝鮮所感」大講演」, 『時代日報』 1926년 3월 6일자;「朝鮮所感 布施辰治氏大講演會」, 『時代 日報』1926년 3월 7일자;「本社主催布施氏講演 八日午後七時半」, 『時代日報』 1926년 3월 7일자. 52 「布施辰治씨 환영연」, 『조선일보』 1926년 3월 7일자. 대해 ‘사죄의 성의를 표명할 자책’을 말한 후세에 대한 무한한 신뢰감을 보냈다. 대표자의 소송 요청을 받아들인 후세는 1926년 3월 2일에 동경을 출발하여 5일 영산포에 도착했다. 나주 경찰서는 후세에게 ‘올 필요 없다’는 전보를 보내53 한국 방문을 방해했다. 또 총독부는 후세의 조사가 농민을 자극하고 동척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며, 방문하면 경찰 권력 을 동원해 면민에 대한 압박을 가중시키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후세는 3월 5일 농민 대표 자들의 환영을 받으며 영산포에 도착했다. 후세는 곧바로 개별조사와 실지답사를 실시했다. 조사방법은 후세가 준비한 두 종류의 조사표에 의한 것이었다. 조사표 내용은 먼저 실지면적 을 조사하고 민유지라는 근거, 동척으로의 편입과정, 앞으로의 토지문제 해결방안 등을 묻는 것이었다.54 후세의 조사활동에는 장애가 많았다. 후세의 방문으로 당시 궁삼면은 경계가 엄중했기 때 문에 후세는 농민과 자유롭게 만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55 관헌은 농민 대표를 경찰부에 호출 하여 총독부 조정안에 동의할 것을 강요했다. 이에 대해 후세는 도쿄 출장 중이던 사이토 마 코토(齊藤實) 총독과 유아사 구라헤이(湯淺倉平) 정무총감에게 “궁삼면 소송 용무로 온 나에게 조사하기 위한 언어행동의 자유를 뺏고자하는 경무국의 조치에 항의한다”는 항의 전보를 보 냈다.56 후세는 산책을 가장해 농민과 접촉하면서 토지문제의 조사 결과는 서울 또는 도쿄에 돌아가 공개하겠다고 약속했다.57 후세는 농민에게 “저의 기분이 바로 조선 무산계급의 기분 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지금 조선을 떠나면서 이 말을 모든 무산계급에게 알린다”58는 말을 남겼다.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후세는 각종 강연과 조사활동도 전개했다. 대구, 대전, 광주, 전 주, 서울 등지에서 조선인 활동가의 주최로 시국강연회를 개최했다. 광주노동연맹 등이 주최 한 강연회에서는 “용이하게 듣지 못하는 기회에 오라! 왔다! 왔다! 후세씨! 또 왔다! 일본 무 53 布施辰治, 앞의 책, 11쪽. 54 布施辰治, 앞의 책, 13~15쪽. 55 布施辰治, 앞의 책, 21쪽. 56 「宮三面問題의 調査와 總督府의 調停案 榮山浦에서 布施辰治」, 『時代日報』 1926년 3월 8일자. 57 布施辰治, 앞의 책, 22쪽. 귀국 후인 4월 5일에, 布施辰治는 東京 上野公園 自治會館에서 「朝鮮の産業と農 民運動」이라는 조선문제 연설회 형식을 통해 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58 『朝鮮旅行記』, 26쪽.
인권변호사후세다쓰지와한국의독립운동가들-한국언론의보도를중심으로- 211210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산계급의 맹장!”59이라는 선전벽보를 통해 후세의 강연회를 홍보했다. 1926년 3월 8일에는 시대일보사 주최로 서울에서 강연회가 개최되었다. 강연 제목은 ‘조 선 사상대책을 평함’이었다. 『시대일보』는 후세를 소개하면서 “후세는 항상 노동운동에 진력 을 하는 중에 더욱 조선동포의 사상문제에 대해 자기의 힘이 미치는 대로 전력으로 후원하여 연전 니가타 현 사건을 비롯하여 얼마 전에 일어난 아직까지도 우리의 기억에 새로운 미에 현 사건과 이번 박열의 공판 등에 전부 무모수임은 물론이고 자기의 물질까지 허비하여 정신 적으로 동정을 표해온 것만으로 보아 씨가 우리에게 어떠한 뜻을 가지고 있음을 추측하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60 『조선일보』는 후세를 ‘일본 운동선상의 투장이요 법조계의 맹장’이라 고 소개했다.61 『시대일보』는 후세를 ‘동경에서도 유명한 좌경 변호사’이자 ‘거구(巨軀)’라 평 했다.62 서울역에는 한양청년연맹 등 사회주의 단체의 성대한 환영이 이루어졌다.63 그러나 강연회는 금지되었다. 후세는 경무국장에게 금지 조치와 관련해 “개인으로서 후세 를 불온하다고 하는 것인가. 강연문제가 불온하다고 하는 것인가. 강연내용에 들어가서 궁 삼면 사건, 미에 현 사건, 박열 대역사건, 진재 상황과 같은 불온한 말이 있을 것을 염려함인 가”64라고 질의했다. 이에 대해 후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65 내가 조선 사람과 인연이 깊은 것만큼 조선 사람을 대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 것만큼 관헌은 싫어 하고 방해합니다. 이번 강연을 금지하는 것도 경무국장의 말을 들으면 그저 막연하고 시기가 좋지 못하다고만 하고 더 설명이 없습니다. 내가 추측컨대 내가 연단에 올라서는 동시에 조선사회운동 노동운동에 어떠한 자극을 줄까? 또는 진재 상황, 미에현 사건과 같은 것에 대한 연상(緣想) 자극을 일으킬 우려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여간 나는 조선 여러분을 만나지 못했으나 친절한 정도는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만나는 것보다 만나지 않고 친절한 것이 더욱 무서운 것입니다. 59 『朝鮮旅行記』 부록에 첨부된 선전삐라. 60 「來하라! 公會堂에! 布施氏大講演은 今夜 朝鮮思想對策批評」, 『時代日報』 1926년 3월 8일자. 61 「布施辰治씨 대강연. 동업시대보 주최로 8일 밤 공회당에서」, 『조선일보』 1926년 3월 8일자. 62 「布施氏 講演會 오날밤 팔시에 공회당 안에서」, 『每日申報』 1926년 3월 8일자. 63 「各團體 盛大出迎 새벽의 경성역」, 『每日申報』 1926년 3월 9일자. 64 「『時期不好』口實로 布施氏講演絕對禁止」, 『時代日報』 1926년 3월 9일자. 65 「親切을 妨害하는 官憲」, 『每日申報』 1926년 3월 9일자. 후세는 이동하면서 각지의 상황을 면밀히 조사하는 성실함을 보였다. 전주지역의 이도전 주청년회, 전주신문배달인조합, 전주양화직공조합, 전주철공조합, 전주여자청년회, 금요회, 전주인쇄공조합, 전북청년연맹의 회원 수와 간부 등을 직접 조사했다.66 강연회는 ‘안녕을 방 해한다’는 이유로 중지되었지만, 전북청년연맹 등 7단체는 환영회를 개최하고 ‘가슴을 열고 격의 없는 환담’이 이루어졌다.67 일본에 귀국한 후세는 1926년 4월 ‘조선문제강연회’를 통해 토지문제의 조사결과를 밝혔 다. 식민지와 농촌문제에 대한 후세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강연이었다. 먼저 그는 식민지 조 선 문제를 조선 국내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인 문제로 인식했다. 즉 “조선 문제는 국제적 인 분규를 일으키는 사건이다. 조선 문제는 결코 조선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조선 문제 는 동양의 발칸문제이다. 조선은 세계평화와 혼란을 좌우하는 열쇠이다. 전 세계의 문제이면 서 전 인류의 문제이다”68라고 지적했다. 이어 후세는 일본 제국의회에서 이루어진 조선 문제 관련 질의응답을 조사하여 경제적인 측면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려는 논조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69 일본 제국의회 등에서는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명하고 있으나, 산업 관계에 대해서는 통계숫자를 들면서 치적을 선전하고 있다. 식민지 산업에 대한 근본적인 의혹은 아무리 산업이 발 달하고 농업시설이 개선되어도 그것이 식민지동포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총독부의 정치 는 경찰력을 동원한 일본 본위의 정치이기 때문에 식민지 산업의 수확은 본국으로 이송되고 있다. 나는 소위 식민지 정책이란 것에 대해 반대함과 동시에 식민지 동포와 함께 해방을 바라고 있다. 후세가 이처럼 정치적인 문제와 경제적인 문제를 구분하여 식민지 통치를 적절하게 비판 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농업문제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후세는 비록 관헌 측 문헌이지 만 각종 간행물을 통해 조선농업의 문제를 상세히 파악했다. 농업지대, 기후, 주요농산물 등 66 『朝鮮旅行記』, 27-28쪽. 67 「布施辰治씨 환영연 전주」, 『조선일보』 1926년 3월 11일자;「전주경찰의 布施辰治 강연 금지. 안녕을 방 해할 염려라고」, 『조선일보』 1926년 3월 11일자. 68 『朝鮮の産業と農民運動』, 6쪽. 「조선문제연구회, 조선의 실정 조사 연구 발표, 1日 동경에서 창립」, 『시대 일보』 1926년 5월 7일자. 69 『朝鮮の産業と農民運動』, 7-8쪽.
인권변호사후세다쓰지와한국의독립운동가들-한국언론의보도를중심으로- 213212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에 대한 사전 지식을 겸비했고, 토지소유관계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지녔다. 후세의 식 민지 정책에 대한 지적은 식민지 일반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근거에 의거한 비판이 었다. 예를 들어 후세는 경작면적이 증가에도 불구하고 소작면적이 확대되는 구체적인 통계 를 제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70 그들이 자랑하는 조선농업의 발달이 과연 조선무산계급을 위한 것이라면, 농업의 발달을 위해 땀 흘린 조선 무산계급 농민의 생활이 차츰 좋아져야 한다. 하지만 실제 생활이 더 어려워지는 연유는 무엇인가? 또 수많은 조선농민이 조선에서 살 수 없게 된 연유는 무엇인가? 조선 무산계급 농민의 피와 땀으로 일구어진 조선의 경작지가 그들의 손으로 경작되지 못하고 조선을 버리고 일본이나 만 주로 나아가 유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조선의 산업이 관헌 당국이 자랑하듯이 통계적 으로는 발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무산계급 농민의 생활은 더더욱 어렵게 되었다. 조선 무 산계급 농민의 노력으로 생산된 쌀과 보리, 기타 잡곡이 그들을 배불리 하지 못하고 굶주려 자살하 거나 자포자기하여 범죄자를 만들어내는 연유는 무엇인가? 또 후세는 조선을 방문하고 귀국하면서 일본으로 건너가는 조선인의 상황과 그들이 소지 한 금액까지도 면밀히 조사했다. 그의 조사기록에 의하면 승선인원 760여명 중 조선인은 640여명이고 나머지는 일본인이었는데, 조선인 중 유학생은 10명, 나머지는 모두 노동자였 다. 노동자 중에서 150여명은 일시 귀국자이고 나머지 500여명은 처음으로 일본에 건너간 사람들이었다.71 조선농민의 해외로의 유출구조를 정확히 파악하려는 자세가 돋보인다. 후세 는 이러한 조사의 결과 “도항 노동자는 조선 농촌에 살 수 없게 된 무산계급 농민이 어쩔 수 없이 도항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헌 측은 도항자에 대해 준비금을 철저히 조 사하고 부족한 자에 대해서는 도항 금지를 내리는 등 엄격한 취체(取締)를 실시하고 있다. 조 선 노동자는 조선에 있어도 아무 것도 먹을 수 없고, 살아나갈 수 없는 생활고에 찌들고 있다 는 것을 알았다”72고 밝히고 있다. 후세의 인식은 현장조사를 통해 습득된 생동감 있는 인식 이었다. 70 『朝鮮の産業と農民運動』, 9-10쪽. 71 『朝鮮旅行記』, 5-8쪽. 72 『朝鮮の産業と農民運動』, 36쪽. 5. 조선공산당 변호사 1927년에 후세는 세 번째로 조선을 방문했다. 방문 목적은 박헌영(朴憲永) 등 조선공산당사 건을 변호하기 위해서였다.73 공산당 사건의 변호단은 이인(李仁), 김병로(金炳魯), 허헌(許憲) 등을 중심으로 일본으로부터 후세와 후루야 사다오(古屋貞雄)가 가세했다. 후세는 자유법조 단, 후루야는 노동농민당(勞動農民黨)으로부터의 파견 형식이었다.74 그때까지의 행보를 고려 하면 후세는 조직의 결정이 아니더라도 사건의 변호를 의무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후세는 서울에 도착하면서 “비밀재판은 불법이다. 공산당 재판에 힘쓰겠다. …… 조선공산 당 공판은 일부 민중만이 중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전 일본의 각 계급에서 다 같이 중대시하 는 것이다”75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변호사단과 사상단체 대표는 후세를 서울역에서 ‘개선 장 군’처럼 환영했다. 『조선일보』는 환영행사 사진을 게재하고 그를 ‘법조계의 거성’이라고 소개 했다.76 공판 개시를 앞두고 후세는 사건관련자 101명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발송했다.77 금년은 무척이나 덥습니다. 더위를 피해 시원한 곳을 찾을 자유도 없고 여유도 없는 자에게는 신문 보도처럼 정말로 살인적인 더위입니다. 여러분의 옥중에서의 근황을 그저 상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공산당사건은 재일 조선동포의 의뢰도 있었고, 저번 조선에 갔을 때 잘 아는 친구로부터 변호 요청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뢰가 없더라도 여러분이 왜 이번 공산당사건에서 검거되었는 지를 생각했습니다. 저는 공산당사건의 중대한 의의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도저히 잠자코 있을 수 없습니다. 설령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더라도 법정투쟁과 항의에 협력하는 것이 저의 의무라 73 「조선 공산당 6월 상순 공판. 일본에서 포시씨와 다수한 변호사가 와서 변호를 한다」, 『조선일보』 1927년 4월 3일자;「共產黨事件과 辯護士 일본에선 포시씨래경 三十名이상 이나될 듯」, 『中外日報』 1927년 4월 19일자. 74 노동농민당도 자유법조단과 같이 대표를 조선에 파견하는 등 지원활동을 전개했다. 후루야는 조선공산 당 변호만이 아니라 당시 사회문제로 비화되었던 전남 무안군 하의도(下衣島)의 토지문제에도 관여했다. 후루야의 조선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이규수, 「일제하 토지회수운동의 전개과정-전남 무안군 하의도의 사례-」,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9, 2002 참조. 75 「『秘密裁判은 不法』, 朝鮮공산당공판에는 힘쓰겟소, 入京한 辯護士 布施辰治 氏談歡迎盛況」, 『동아일 보』, 1927년 10월 10일자. 76 「공산당 사건과 布施辰治씨 장문성명. 입경하자 발표한 장문성명. 변호일을 앞두고서」, 『조선일보』 1927 년 10월 10일자. 77 「東京と京城との間」, 『解放』 6-21, 1927년 12월.
인권변호사후세다쓰지와한국의독립운동가들-한국언론의보도를중심으로- 215214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는 것을 통감합니다. 따라서 저는 여러분의 공판법정에 서서 저의 성의를 피력하겠습니다. 이 편지와 함께 후세는 ‘변호참고사건조서’를 동봉하여 기재를 요청했는데, 변호를 위한 철 저한 준비와 성실함을 엿볼 수 있다. 공판은 9월 13일부터 일반인 방청이 금지된 상태에서 파행적으로 진행되었다. 공판 진행 과정은 지리멸렬했다. 체제 기한이 촉박해 후세는 일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후세는 그동안 도쿄에서 대기하면서 재일조선인이 개최한 ‘조선총독 폭압정치비판연설회’에 연사로 참가했다. 공판이 절정에 달하던 10월 8일 후세는 다시 조선 에 건너왔다. 후세는 조선에 오기 직전 다음과 같이 말했다.78 공산당사건의 변호는 단순한 형사사건이나 재판사건의 변호가 아닙니다. 사건의 내용과 사실은 밝 히지 않겠지만, 대강을 이야기하면 공산당사건의 진상은 총독정치의 폭압에 대한 일종의 반항투쟁 입니다. 이 사건은 총독정치의 폭압에 반항할 수밖에 없는 조선동포 전체의 사건입니다. 현재 법정 에 서있는 100여명의 피고만의 사건이 아닙니다. 따라서 법정에 서있는 피고는 총독정치의 폭압에 반항하는 조선동포를 대표한 최전선의 투사가 적의 포로가 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후세는 공산당사건을 ‘조선동포 전체의 사건’으로 간주하여 조선의 독립운동을 정당한 것 으로 바라보았다. 정치적 입장에 공감하는 사회주의자의 사건이기 때문에 위와 같이 말한 것 은 아니었다.79 후세의 연이은 방문에 『조선일보』는 ‘예리한 논봉(論鋒)의 도도(滔滔)한 열변’ 이라며 그의 방문 소식을 알렸다. 후세는 환영회 석상에서 “조선공산당 공판이 개정되자 자 기는 한 변호사로서 또는 101명 피고에 대한 동지로서 즉시 내경(來京)고자 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늦게 와서 미안하기 짝이 없다. 피고인 가족들이나 일반 사회에서 자기에 대한 기 대와 촉망이 여간 많지 않을 터인데 과연 자기의 노력이 그에 부당할는지 알 수 없으나 그러 78 「問題の朝鮮に就て聲明す」『解放』 7-1, 1928년 1월. 79 후세는 공산당사건 변호뿐 아니라, 대구의 아나키스트 단체인 진우연맹(眞友連盟) 사건의 변호도 담당할 예정이었다. 후세는 정치적 노선이나 사상적 차이를 초월하여 조선인의 운동을 옹호하고자 했지만, 진우 연맹 관계자들은 후세와 ‘사상과 주의가 맞지 않는다’면서 “후세가 공산당 사건으로 이번에 조선에 건너 온 것이다. 후세가 변론한다고 저들이 유죄로 판결할 것을 무죄로 할리 만무하고 또한 변론하지 않는다고 무죄가 될 것이 유죄로 될 리 만무하다”며 변호를 사양했다(「大邱眞友聯瑥員布施氏의 辯論을 謝絕 사상 과 주의가 안맛는다고 被吿等獄中에서 討議决定」, 『中外日報』 1927년 6월 14일자). 나 어디까지 힘껏 싸우겠다”80고 말했다. 조선공산당 사건의 공판은 피고에 대한 고문이 폭로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후세는 재 판 공개 금지 문제를 둘러싸고 10월 11일에는 『조선일보』를 통해 다음과 같이 항의문을 발 표했다.81 재판소의 공개금지 결정의 이유인 안녕질서 문란의 염려는 단연코 없다. 그러면 재판소가 공개를 금지한 것은 왜인가? 답변의 자유를 갖지 아니한 경찰 관헌의 횡포를 공중(公衆)에게 공개법정에서 폭로함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의 종래의 경험으로 말하면 피고의 사상을 재판하는 재판장의 사상 내용이 너무 빈약한 위신의 환멸을 우려한 것이 아닐런지! 우리는 믿는다. 올바른 것은 언젠가 밝혀 지고 밝혀진 것은 올바르다. 그러므로 나는 재판소에 힐문한다. 공산당 사건의 재판관으로 진정으 로 조선일반 대중 앞에 올바른 것을 보이려는 재판이라면 왜 이를 공개하지 않는가? 진리 앞에 명 백한 재판을 진행하려면 왜 공산당 사건의 재판을 공개하지 않는가? 후세는 일주일 정도 조선에 머물다 일본에 귀국했다. 그동안 후세는 공판이 없는 날에는 각지를 방문해 강연회를 개최했다. 개성송도청년회는 후세를 초청해 강연회와 환영간담회를 개최했다.82 일본 귀국 이후에도 후세의 공판 활동은 이어졌다. 재일조선인과 함께 총독부 정 무총감 유아사 구라헤이(湯淺倉平)를 방문하여 경찰의 고문 사실에 항의의 뜻을 전달했다. 여 기에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대표 김한경(金漢卿)·신간회 도쿄지회 대표 조헌영(趙憲泳)·대중 신문사 대표 박낙종(朴洛鍾)이 함께 했다.83 12월에는 네 번째로 조선을 방문하여 공판의 최후 변론을 맡았다. 최종판결은 12명을 제외하고 전원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법정에서의 후세의 활약은 많은 조선인들에게 기억되었다. 80 「銳利한 論鋒. 한 滔滔 열변으로 변호사 諸씨들의 대기엄. 布施辰治, 古屋 양씨 환영」, 『조선일보』1927년 10월 13일자. 81 「공산당 공판 공개. 금지부당을 규탄. 변호사 布施辰治」, 『조선일보』 1927년 10월 12일자. 82 「兩氏를 청해다 개성에서 강연. 布施辰治, 古屋貞雄」, 『조선일보』1927년 10월 17일자. 83 「정무총감 면회하고 엄중한 항의, 동경에 있는 4단체 대표, 포시씨와 함께 엄중 항의, 공산당 피고 고문으 로」, 『중외일보』1927년 11월 6일자.
인권변호사후세다쓰지와한국의독립운동가들-한국언론의보도를중심으로- 217216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6. 나가는 말 후세는 “옳고 약한 자를 위해 나를 강하게 만들어라. 나는 양심을 믿는다”며 일생동안 자유· 평등·민권이라는 이념을 실천한 변호사였다. 그의 묘비명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살아야 한 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하여”라는 좌우명에 바탕으로 두고 활동한 후세 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민중의 마음을 움직였다. 조선인 운동가들은 후세를 가장 신 뢰할 수 있는 일본인으로 평가하고 존경했다. 그가 발행한 『법률전선』 등의 저작물은 조선에 서 광범한 독자층을 형성했다. 후세는 ‘자기혁명의 고백’ 이후 자유법조단, 해방운동희생자구원변호단, 일본노농변호사 단을 거점으로 전투적이고 파란만장한 활동을 전개했다. 후세는 1928년 합법적으로 가장 좌 익이었던 노동농민당(勞動農民黨)에 입당한다. 해방운동희생자구원변호단의 법률부장으로서 일본의 ‘3·15 공산당사건’과 1929년의 ‘4·16 공산당사건’의 변호인으로 활약했다. 당시는 치 안유지법에 따라 공산당 탄압사건이 이어지던 시기였다. 후세는 이들 재판의 변호를 위해 분 주히 활동했는데, 이것은 후세가 추구하는 인도주의, 인권옹호, 사상의 존중이라는 정치노선 의 실천 과정이었다. 후세는 1932년 법정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징계재판에 회부되어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한 다. 그리고 1933년 후세는 신문지법, 우편법 위반으로 기소 당하여 금고 3개월의 실형을 언 도받았다. 또 출옥 직후 일본노농변호사단 일제 검거사건에 연루된 것도 치안유지법관련 재 판에서의 격렬한 변호활동 때문이었다. 후세에게 이 시기는 고심에 찬 나날들이었다. 후세는 일제히 검거된 동료 변호사 중 홀로 법정투쟁을 지속했다. 하지만 1939년에는 결국 노농변 호사단 사건의 상고심이 기각되어 징역 2년의 실형을 언도받았다. 일본의 패전과 더불어 후세는 다시 웅대한 모습으로 민중들 앞에 나타났다. ‘출옥 자유전 사 환영 인민대회’에 참가하여 연설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다시 알렸다. 그리고 다 시 자유법조단을 결성하여 변호사로 재기했다. 이후 평화헌법의 보급과 계몽에 힘쓰고 GHQ 와 일본정부의 횡포로부터 재일조선인의 권리를 획득하려는 투쟁에 매진했다. 후세는 1946 년에 조선인들과 공동으로 「조선건국헌법초안사고(朝鮮建國憲法草案私稿)」를 집필했다. 재일 조선인의 의견을 수렴하여 집필된 것이었다. ‘해방’ 이후 민족독립의 상징인 신헌법을 구상할 수 있는 일본인은 후세 이외에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후세는 1953년 만 72세로 세상을 떠났 다. 장례식에는 많은 조선인이 고별식 장의위원으로 참가했다. 조선인들의 평가대로 후세는 ‘일본무산운동의 맹장’이었다. 후세와 조선인의 관계는 한일연대투쟁의 거울과도 같은 모습 이다. 후세는 식민지 민중의 ‘벗’으로서, 때로는 ‘동지’로서 영원히 각인되었다. 후세는 식민 지 민중을 발견했고, 조선인들은 후세를 발견했다.
인권변호사후세다쓰지와한국의독립운동가들-한국언론의보도를중심으로- 219218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부표] 후세의 주요활동 연도 활동 비고 1880 미야기현(宮城縣)에서 태어남 1899 메이지법률학교(明治法律學校) 입학 1902 메이지법률학교 졸업 판사검사등용시험(判事檢事登用試驗)에 합격. 사법관시보(司法官試補) 1903 ‘사직의 글(挂冠の辭)’을 발표. 검사대리를 사직하고 변호사 등록 1906 도쿄시 전차(東京市電) 소요사건의 야마구치 요시죠(山口義三)를 변호 1911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을 집필하여 검사국의 조사를 받음 불기소처분 1915 수즈카모리오하루(鈴ケ森お春) 살인사건 변호 1917 단독으로 보통선거운동을 시작 시마쿠라 기헤이(島倉儀平) 사건의 변호인 1918 쌀소동 관련사건의 변호인 시베리아출병선언에 대해 반전 삐라를 작성. 경시청은 배부 금지 1919 오오스키 사카에(大杉榮) 등 아나키스트사건의 변호인 가마이시(釜石)·야하타(八幡) 제철 파업사건의 변호인 최팔용(崔八鏞)·백관수(白寬洙) 등의 출판법위반사건의 제2심 변호 1920 《법정에서 사회로(法廷より社會へ)》 창간 ‘자기혁명의 고백(自己革命の告白)’ 발표. 이와테현(岩手縣)의 입회권(入會權)사건 변호 1939년까지 1921 고베미츠이(神戶三菱)·가와사키조선소(川崎造船所)의 파업사건 변호 자유법조단(自由法曹團) 결성 1922 차가인동맹(借家人同盟) 결성 《생활운동(生活運動)》 창간 1923 관동대지진시의 조선인학살사건을 조사·고발하기 위해 활동 후루타 다이지로(古田大次郞) 등의 아나키스트 사건 변호 후세키(伏石)·키자키(木崎) 소작쟁의사건 변호 도쿠가와공(德川公) 암살예비사건 변호 ‘노동농민당’(勞動農民黨) 결성 참가 고문 ‘도쿄지방이재조선인후원회(東京地方罹災朝鮮人後援會)’에 참가 고문 조선인 유학생 주최 ‘피살동포 추모회’에서 추모연설 박열(朴烈)·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사건 변호 1926년까지 북성회(北星會) 주최 ‘하기순회강연회’에 참가. 의열단원 김시현(金始顯)의 변호 연도 활동 비고 1924 의열단원 김지섭(金祉燮)의 폭발물취체벌칙위반사건 변호 1925 조선수해이재민구원운동을 제기 오타루고등상업학교(小樽高等商業學敎) 사건 항의운동 전개 1926 일본노동조합(日本勞動組合) 총연합회장 ‘조선사정연설회(朝鮮事情演說會)’ 강연 미에현 기노모토쪼(三重縣木本町)의 조선인살해사건 진상조사 전남 나주군 궁삼면(宮三面)의 토지사건 조사 1927 《생활운동》을 《법률전선(法律戰線)》으로 개명 타이완 이림자당(二林蔗糖) 농민조합 소요사건 변호 조선공산당사건 변호 조선인들이 주최한 ‘조선총독부 폭압정치 비판 연설회’에서 연설 1928 제1회 보통선거에 노동농민당으로 입후보 낙선 ‘해방운동희생자후원회(解放運動犧牲者救援會)’의 법률부장 3·15 공산당 사건과 1929년의 4·16 공산당 사건의 변호인 1929 도쿄공소원(東京控訴院)의 징계재판소에 기소 당함 최승만(崔承晩)과 ‘재일조선인 노동산업 희생자 구원회’를 결성. 1930 신문지법·우편법 위반으로 기소 당함. 1931 ‘해방운동희생자구원변호단(解放運動犧牲者救援辯護團)’의 간사장 ‘전농전국회의변호사단(全農全國會議辯護士團)’의 간사장 공산당재판 중앙통일공판투쟁의 실질적인 변호단장 김한경(金漢卿) 등의 치안유지법 위반사건의 변호인 1932 대심원(大審院)의 징계재판 판결로 변호사 제명이 확정 1932 유종환(劉宗煥)·유녹종(劉祿鐘) 형제의 경찰관 살해사건 변호 1933 신문지법 사건으로 상소기각이 확정되어 복역 금고 3개월 출옥기념회를 계기로 ‘자유간담회(自由懇談會)’를 발족 ‘일본노농변호사단(日本勞農辯護士團)’ 일제검거사건에 연루 1934 일제검거사건으로 기소되어 동료 변호사중 홀로 법정투쟁을 속행 1935 석방 이와테현(岩手縣)의 농촌과 산촌을 조사 1939 노농변호사단사건의 상고심이 기각되어 징역 2년 복역 변호사 등록 말소 1940 출옥. 고향에서 법회 운영
220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人権弁護士布施辰治と韓国の独立運動家たち - 韓国メディアの報道を中心に - 221 연도 활동 비고 1944 치안유지법위반용의로 3남 모리오(杜生) 교토형무소에서 옥사 1945 ‘출옥자유전사환영인민대회(出獄自由戰士歡迎人民大會)’ 개최 자유법조단의 재결성 고문 ‘후세 다츠지씨 변호사 재개업 기념축하회’ 개최 1946 ‘헌법개정사안(憲法改正私案)’ 발표 플래카드사건의 변호인 ‘조선건국헌법초안사고(朝鮮建國憲法草案私稿)’를 발표 『운명의 승리자 박열(運命の勝利者朴烈)』 출간 1947 미야기현(宮城縣) 지사 선거에서 노농단체의 추천으로 입후보 낙선 1948 일본노농구원회(日本勞農救援會)(이후 日本國民救援會)의 중앙위원장 한신(阪神) 교육투쟁사건의 변호 국기게양사건의 변호 1949 미타카(三鷹)사건과 마츠가와(松川)사건의 변호 ‘후세 다츠지씨 탄생 70년 축하 인권옹호 선언대회’ 개최 후카카와(深川)사건, 조련(朝連)·민청(民靑) 해산사건 변호 도쿄 조선고등학교 사건, 타이토우(台東)회관사건 변호 1951 공안 조례 폐지운동 전개 1952 조선인도 연루된 메이데이사건, 수이타(吹田)사건의 변호인 1953 파리의 ‘프랑스희생자구원대회’에 초청받음 ‘세계평화평의회’ 연락위원으로 추천 5월부터 자택 요양 중 9월 13일 서거(만 72세) 1.はじめに 韓国政府は建国に直·間接的に貢献した功労者に国民勲章を授与してきた。当然のことな がら勲章の受章者は独立運動に一生を捧げた韓国人がほとんどである。ところが、建国勲 章が授与された人物の中に日本人がいる。布施辰治である。彼は2004年韓国政府から日本 人としてははじめて建国勲章(愛族章)が授与された弁護士であり、社会活動家である。1 布施辰治という法律家はいかなる人物であろうか。なぜ未来志向の日韓関係の構築に寄 与した人物として評価されたのだろうか。ナチス支配下のドイツで死んでいくユダヤ人を助 けたシンドラー(Schindler)に喩えて「日本人シンドラー」と呼ばれ、日帝支配下の朝鮮の社会 1 布施の功績概要は以下の通りである。「日本人弁護士として1923年義烈團員金始顯などが總督府役所爆破 を計画、逮捕されると、異議弁論を担当し公正な判決を求めた。1924年二重橋投彈義擧を行った金祉燮の 弁論を引き受けた。1926年日本皇室暗殺擧事により逮捕された朴烈たちの弁論を引き受け、証拠不十分を 理由に無罪を主張する弁論を行った。同年羅州宮三面民が東拓に拂下された土地の回収のために展開した 長期間の土地紛争や農民抗争の調査を引き受けて活動し、1927年朝鮮共産黨活動で逮捕された權五卨、 姜達永などが日警の拷問蛮行を暴露し告訴を提起したときに異議申し立てを担当し、社会団体とメディア主 催の講演会で社会問題の演題で講演したという事実が確認された(管理番号960641、運動系列:独立運動 支援、http://e-gonghun.mpva.go.kr/) 人権弁護士布施辰治と韓国の独立運動家たち - 韓国メディアの報道を中心に - 李圭洙 | 一ツ橋大学韓国学研究センター教授
222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人権弁護士布施辰治と韓国の独立運動家たち - 韓国メディアの報道を中心に - 223 運動家たちはいろいろな広報印刷物に「私たちの弁護士である布施辰治」と称え、彼への連 帯感や愛情を惜しまなかった。一体布施はどんな人生を歩み、日本人でありながら建国勲 章を授与されるほど、韓国社会で高い評価を受けたのだろうか。 布施は多方面で朝鮮と深い関わりを持っていた。1923年7月、北星會と東亜日報社が企 画した「夏期巡回講演団」をきっかけにはじめて朝鮮を訪問し、義烈団事件の弁護をはじ め、朝鮮共産党など治安維持法関係の弁護団の一員として活躍した。また、関東大震災 の時、朝鮮人虐殺事件の調査や抗議活動に乗り出し、各報道機関に「虐殺の責任を痛感す る」という書簡を送るなど、良心的な法律家として活動したのである。 一方、朴烈の大逆事件の弁護を引き受けただけではなく、東洋拓殖株式会社の代表的な 土地収奪事件である宮三面事件の調査、罹災朝鮮人救援會の顧問、三重県木本町の朝鮮 人虐殺事件の真相調査、水害被災者の救援活動などにも参加していた。また朝鮮人主催 の講演会の演説、「在日朝鮮人労働産業犠牲者救援会」の結成、衡平社大会の講演など、 「日本無産階級の猛將」という評価にふさわしく多岐にわたって活躍していた。 それを反映するかのように布施辰治にかんする研究が盛んである。著作の資料集復刻を きっかけに彼の弁護活動や社会活動を明らかにした著作も多数出版された。2日本国内にお いて布施と朝鮮人たちの関係は日韓連帯闘争の手本とみなされ、両国において布施は植民 地民衆の「友」であり「同志」であると記憶されている。そのような評価は、人道主義に基づい た実践的な弁護活動や植民地民衆への深い理解を考慮すると、当然のものであろう。 韓国における布施への関心もさらに高まっている。帝国と植民地の間に「布施辰治という 日本人が存在した」という事実は、韓国人の歴史認識に「新鮮な衝撃」を与えた。そもそも日 本人に対する認識というものが、侵略の先鋒すなわち「惡意の日本人」として印象づける例が 2 代表的な資料集と単行本は以下の通りである。資料集は石卷文化センター所藏·布施辰治資料硏究準備會 編、『植民地關係資料集 1、 朝鮮編』(三協印刷、 2002);石卷文化センター所藏·布施辰治資料硏究準備 會編、『植民地關係資料集 2、 朝鮮·臺灣編』(三協印刷、 2006);布施辰治 著·明治大學史資料センタ ー 監修、『布施辰治著作集 全16卷·別卷1』(ゆまに書房、 2008) 等があり、傳記·評傳としては本多久泰、 『布施辰治:全民衆の味方吾等の弁護士』(火花社、 1930);生夢坊·本多定喜、 『涙を憤りと共に:布施辰 治の生涯』(学風書院 1954);布施柑治、『ある弁護士の生涯』(岩波書店、 1963);布施柑治、『布施辰治外 傳』(未來社、 1974);高史明·大石進·李熒娘·李圭洙、『布施辰治と朝鮮』(高麗博物館、 2008);大石進、 『弁護士布施辰治』(西田書店、 2010);明治大學史資料センタ ー監修、 山泉進·村上一博編、 『布施辰治 硏究』(日本經濟評論社、 2011;森正、『評傳 布施辰治』(日本評論社、 2014) などを参照。 多いのだが、その中で布施辰治のような「善意の日本人」が存在したという事実は、日韓両 国が追求すべき「共生のための歴史的教訓」を与えてくれる。3 このような問題意識から朝鮮で発行された新聞記事などを中心に、同時代の朝鮮人は布 施辰治をどのように受け止めていたかを探ってみたい。朝鮮訪問前後の報道記事を中心に 布施と朝鮮の関係について述べ、当時の社会運動陣営の認識や評価に注目したい。従来 の研究が注目してきた植民地朝鮮にたいする布施の現実認識を浮彫りにし、さらに朝鮮人 は布施とどう向き合い、どう連帯したかを確認したうえで布施の活動について検討したい。 2. 「自己革命の告白」と「夏期巡回講演会」 布施は1880年宮城県牡鹿郡蛇田村の農家で生まれた。1902年明治法律学校を卒業し、同 年判事検事登用試験に合格、司法官試補になった。翌年4月検事代理として宇都宮地方裁 判所に赴任したが、8月に検事という仕事は「虎狼の為なる我が職」であると辞任し、東京で 弁護士名簿に登録した。 弁護士として第一歩を踏み出した当時、日本には日露戦争の戦雲が漂っていた。布施は 様々な民事·刑事事件を受任しながら、トルストイの「露日非戰論」に深く共感しつつヒュー マニズムの立場から社会問題への関心を抱いていた。41906年、東京市の電車運賃値上げ 3 布施辰治の建国勲章授与を契機に韓国の主なメディアは争って特集番組を編成した。韓国の地上波放送 KBS、MBC、SBSはそれぞれ特集ドキュメンタリー を放映し、最近では、歴史教育資料として活用されてい るEBSの「EBS知識チャンネルe」においても関連映像が制作され反響を呼んだ。大学入試でも布施の論述試 験が出題された。特に韓国放送通信大学では、「人物で見た文化」という教材の中に布施の一生をテーマに 「放送大学TV」を通じて一般社会人に向けた教育プログラムも制作された。また、高史明·大石進·李熒娘· 李圭洙、『布施辰治と朝鮮』(高麗博物館、2008年)、『朝鮮のために一生を捧げた布施辰治』(知識旅行、 2010)、布施辰治の長男である布施柑治が執筆した『ある弁護士の生涯-布施辰治』(岩波新書、1963)、『私 は良心を信じる-朝鮮人を弁護した日本人布施辰治の一生』(玄岩社、2011)、布施辰治·張祥重·鄭泰成、 『運命の勝利者朴烈』(世紀書房、1946)、「運命の勝利者朴烈-私がこれから日本の権威、天皇の権威を否定 して見せる」(ヒョンイン、2017)がそれぞれ翻訳出版された。 4 布施の記録によると、1918年と1919年に取り扱った事件の件数は、1918年の刑事190件·民事26件、1919 年の刑事192件·民事27件に達した。ここで取り下げられた事件まで含めると1年間取り扱った事件数は250件 を超える。1ヶ月間の出廷回数は多いときは135件、少ない時にも90件を上回る、1日平均4件程度であった (『法廷より社會へ』1-1、1920年6月号、14頁)
224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人権弁護士布施辰治と韓国の独立運動家たち - 韓国メディアの報道を中心に - 225 反対市民大会事件を弁護することになったが、これが社会運動に関わった最初のことであ る。1910年、幸德秋水などの大逆事件で管野スガの弁護を申し出たが、主任弁護士から 法廷発言で問題を引き起こしかねないと断わられた。その後、様々な労働争議や米騒動な どの裁判に関与する一方、普通選挙運動や公娼廃止運動にも参加した。布施は代表的な 人権弁護士となったのである。 布施はいつから朝鮮に関心を持っていたのだろうか。明治法律学校在学中、朝鮮の留学 生たちと親密な関係を持ったと言われている。しかし、具体的に誰であったかは明確でな い。布施自らの言及によると、1911年日本による韓国強制占領を批判し、朝鮮人と朝鮮独 立について議論していたという。またこの時、「朝鮮独立運動に敬意を表す」という文章を作 成したために検事局から取り調べを受けたという。5しかし、その文書はまだ確認されず、作 成した時期も特定できていないのである。 さて、布施が本格的に朝鮮に関心を寄せたのは、3·1運動前後の時期とみえる。まさに 「成功」する弁護士の道を放棄し、彼は1920年5月、「社会運動の闘卒に他ならない弁護士 として生きていくことを民衆の一人として民衆の権威のために宣言する」という「自己革命の 告白」を公表した。61921年神戶の三菱·川崎造船所争議の支援をきっかけに山崎今朝彌な どと共に自由法曹団を結成した。その後活動領域を拡張し、労働運動、農民運動、無産 政党運動、水平運動などに組織的に関与しはじめた。 こういった日本国内の社会運動関連事件だけではなく、植民地朝鮮への関心を広げてい く。たとえば1922年朴烈が発行した雑誌『太い鮮人』第2号には「プロレタリア トーの友、弁護 士界の反逆者布施辰治」7という広告が掲載されている。おそらく布施の「自己革命の告白」 が新鮮な衝撃として受け入れられたに違いない。布施にとって日本国内の不条理だけでな く、朝鮮と台湾などの植民地問題は解決すべき課題のひとつになっていたのである。 5 布施辰治·張祥重·鄭泰成、『運命の勝利者朴烈』(世紀書房、1946)、1頁。 6 布施は「自己革命の告白」で「人間は誰でも、自分がどのように生きていくかを本当の自分の声で聞かなけれ ばならない。これは良心の音である。私はその声に基づいて厳粛に「自分革命」を宣言する。社会運動の急 激な流れを感じざるを得ない。従来、私は「法廷の戰士という弁護士」であった。しかし、今後は「社会運動 の鬪卒な弁護士」として生きていくことを民衆の一人として民衆の権威のために宣言する。私は主な活動場所 を法廷から社会へ移す」(『法廷より社會へ』創刊號、1920年5月)と宣言した。 7 『太い鮮人』第2号、1922年12月。 「自己革命の告白」を前後に布施は、2·8独立宣言で検挙された崔八鏞と白寬洙などの9 人の朝鮮人留学生が起こした「出版法違反事件」の弁護人となった。植民地民衆のための人 権弁護士としての初登場である。当時の弁論に関する具体的な情況は今後究明すべきであ るが、金渡演の回顧によると、「学生の身分で自国の独立を唱えることがどうして日本法律 の内乱罪になるのか......民族自決の思潮が膨張することに照らし、学生たちの主張は正当な ものだから、罰を与えることはできないのではないか」という論調で弁論したという。8日本人 として朝鮮独立運動事件の弁論が決して容易ではない社会的雰囲気の中で、布施の行動は 勇気ある決断だった。裁判は、懲役9ヶ月未満の有罪判決で終わったが、無料弁護をした 布施に大きな信頼を持つようになった。朝鮮の人々は布施辰治という良心的な日本人を発 見したのである。 朝鮮メディアに布施の名前が登場したのは、1922年6月前後である。1922年6月15日新婦 人協会が東京中央仏教会館で開催した治警修正祝賀講演會の状況が『毎日申報』に報じら れた。新婦人協会は当日奧むめおを中心に婦人参政と女性解放を主張する講演会を開い た。布施も祝賀演説のために参加したが、講演会は管轄警察署の制止によって解散された という。9「自己革命の告白」を宣言した弁護士であり、2·8独立宣言の関係者を弁護した布 施の状況に直·間接的に触れたメディアにとっては、当然の反応である。また、総督府機関 紙『毎日申報』の報道を見ると、将来、布施の活動が朝鮮に影響をおよぼす可能性があると の判断から注目したわけであり、「日本の現代思想界に名の知れた学者」と紹介していた。10 さて、布施に関する報道が本格化したのは、朝鮮訪問の前後である。1923年7月31日最 初に朝鮮を訪問している。留学生思想団体である北星会が主催し、東亜日報社が後援した 「夏期巡回講演会」に参加するために、北星会員金鍾範、白武、鄭泰信とともにソウルを訪 8 金渡演、『私の人生白書-常山回顧錄』(康友出版社、1967)、8~82頁。布施が弁護に加担した情況につい て白南薰は当時弁護人を定めるため青年会理事である新渡戶稻造を訪ねたが断られた。東京帝国大学の 生徒会の幹事の藤田進男と交渉して今井嘉幸、作間耕造を紹介することができた。そして鵜澤聽明の許可 も得て、花井卓藏などの弁護人と共に弁護を担当したという(白南薰、『私の一生』(新現實社、增補3版、 1973)、86~88頁) 9 「東都閑話-婦人の政治運動」、『每日申報』1922年6月1日。新婦人協会は、1920年平塚らいてう、市川房 枝などにより結成された女性団体で、女性の政治活動を禁止した治安警察法第5条の撤廃運動を推進した が、1922年解散された。 10 「北星會の全鮮巡廻講演、来月一日から」、『每日申報』 1923年7月25日.
226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人権弁護士布施辰治と韓国の独立運動家たち - 韓国メディアの報道を中心に - 227 れた。布施の活躍を高く評価した北星会は、朝鮮での講演会を企画し、植民地の現実を打 破する新思潮を拡散させようと組織した。朝鮮の11団体の60余名の人々がソウル駅で団体 の旗を掲げ講演団を向かえた。11朝鮮における初の演説で総督府の「開発」は朝鮮民族の幸 福とは無縁であると言い、朝鮮訪問の目的を語った。12[引用省略] 朝鮮の社会運動団体は布施の訪韓を歓迎し、『東亜日報』にはソウル駅に到着した布施の 写真、天道教会堂での熱弁の姿が掲載された。社説に「布施が朝鮮に来て発表した感想を 見ると、僅かな部分にすぎないが、朝鮮人の心で朝鮮を眺めていることがかわる」13と書かれ ている。初めて布施に対面した朝鮮人たちは「僅かな部分」であるが、朝鮮の立場から問題 を見つめようとする布施を認めていた。 8月1日ソウル講演を皮切りに巡回講演会は、12日まで南部地方の各地で10回以上開催 された。政治·社会の問題について言及しないという条件で許可をもらったが14、先に入国し 実務の準備をしていた北星会の金若水が当局に恐喝脅迫罪で拘引されてしまう。その時、 布施が警務局長と東大門警察署長を訪問し、釈放を要求していたという。15 二日目の講演は鐘路基督教青年会館で開かれ、講演題目は「弱小民族の悲哀か!世界 人の歓喜か!」である。168月4日には光州労働共済会の後援で北星会講演会が開催され、 講演題目は「朝鮮問題と思想対策」である。178月8日には鍾路青年会館で女子苦学生相助 会とソウル青年会主催の「婦人問題と解放運動」というテーマで婦人問題の講演会が開かれ 11 ソウル駅で行われた歓迎会には、無産者同盟会、京城無産青年会、造船労働連盟会、土曜会、労働大 会、朝鮮洋服技工組合、女性ゴム職工組合、ソウル青年会、労働共済会、京城金物組合、東亜日報が参 加した(「北星會巡廻講演會入京ノ件」(京本高第5163號)、1923.7.31) 12 「表面の開發は実に朝鮮民族の幸福ではないことを知りました。:入京した布施辰治氏談」、『東亜日報』 1923年8月3日. 13 「新人の朝鮮印象:布施辰治氏の感想談」『東亜日報』1923年8月3日。布施は朝鮮人の運動家たちが主催 した歓迎席上で、「朝鮮人は総督政治を批判したり総督府の政策を論じるなど、朝鮮統治のみこだわってい る。現代の敵は部分の問題ではありません。世界の改造を叫ぶ時代に突入し、これらの世界改造によって、 朝鮮問題も解決されるだろう」(「北星會巡廻講演會入京ノ件」(京本高第5163號)、1923年7月31日)と発言し た。 14 「北星会講演、今日の夕方から天道教堂で」、『每日申報』1923年8月1日。 15 「金若水の引取内容、富豪林宗相を電話で脅迫して金品を強要した事実で」、『每日申報』1923年8月4日。 16 「北星会 第二日講演、鐘路基督敎青年会館にて」、『東亜日報』 1923年8月2日。 17 「北星會講演、 光州で盛況」、『東亜日報』 1923年8月11日。 た。18つづけて9日には晋州で開催されるが、「過激」だとして中止される。1910日と11日には 金海で金海青年会、女子青年会、衡平社金海分社などの後援による講演会が開かれた。 10日に「朝鮮青年に告げる」、11日に「世界の大勢から見た朝鮮問題」という講演の予定だ が、後者は中止となった。20 「人間生活の改造運動と朝鮮民族の使命」という題目の講演記録が『東亜日報』の日曜版 の特集に掲載されている。21布施の講演は大きな反響を呼び、朝鮮人に誠実な態度で接し ていた。朝鮮の社会運動家にとって布施の講演は「新思潮」を知り、受容できる窓口のよう な役割を果たしていた。そして布施は将来の朝鮮のための連帯闘争ができる日本人の「友 人」として受け入れられた。 一方、朝鮮滞在中、京城地方法院で開かれた裁判で義烈団員金始顯を弁護した。22布 施は金始顯と明治大の同門だったので、互いに知っていた可能性が高い。公判過程で京畿 道警部の黃玉と金始顯の関係を明らかにするために証人喚問を要求したが、受け入れられ なかった。2324 以上のように、最初の朝鮮訪問は、講演会だけでなく義烈団事件を弁護するためであっ たことがわかる。朝鮮人の間で名前が知らていれた布施は、この時、実際の姿が生々しく 伝わったのである。実際『東亜日報』は「朝鮮人に多大な同情を持つ人物であり、東京で独 立運動事件の九人が監禁された時や最近の金益相事件にも無料弁論した」25と紹介したの である。 18 「婦人問題大講演会」、『東亜日報』 1923年8月8日。 19 「北星会の講演、晉州で中止」、『每日申報』 1923年8月9日。 20 「金海の北星會講演演士無非中止」、『東亜日報』 1923年8月18日。 21 「新人の主義講演、八月一日夜 天道敎堂で北星會主催講演會記錄」、『東亜日報』 1923年8月5日. 22 金始顯は日本明治大学法学部を卒業、1919年3 ·1運動以降満州吉林へ亡命して義烈団に入団した。1922 年金奎植·呂運亨と共にモスクワで開催された極東革命団体代表大会に韓国代表として参加した。1923年 義烈団の密令で国内に潜入して日本の植民地統治機関の破壊、日本要人の暗殺などを計画して京畿道警 察部の黃鈺と提携して擧事しようとしたが、逮捕されて懲役10年が言い渡された。 23 「黃鈺の犯行内容、義烈団公判継続、京畿道警部へ当事件の中心人物である黃鈺の陳述内容」、『每日 申報』、 1923年8月9日。 24 「布施辯護士の電報」、 『東亞日報』、 1923年8月12日。 25 「布施氏義烈團辯護、 以前から朝鮮人には同情が多い」、『東亜日報』 1923年8月1日。
228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人権弁護士布施辰治と韓国の独立運動家たち - 韓国メディアの報道を中心に - 229 この金益相弁護は、まだ十分知られてない布施のことである。金益相は1920年義烈団に 加入し1921年爆弾と拳銃を携帯してソウルに潜入、倭城臺朝鮮総督府に爆弾を投げ、国 内外の注目を集めた。1922年3月上海税関の埠頭で視察に訪れた日本陸軍大将田中義一 を暗殺するために爆弾を投げたが、失敗に終った。逮捕され長崎へ護送されるが、1審で無 期懲役、2審で死刑を宣告された。26 朝鮮の社会運動家たちにとって「自己革命の告白」を宣言した日本人弁護士への期待感 は、非常に大きかった。朝鮮の民族解放運動に協力し、助力できる日本人を発見したから であろう。2·8独立宣言事件の弁護側に立ったこと、それは朝鮮人の期待に大きく応えるも のがあった。「プロレタリアトの友、弁護士界の反逆者布施辰治」は日本人であったが、誰よ りも朝鮮人の立場を深く理解したのである。北星会の「夏期巡回講演会」は、まさに布施と の連帯闘争に向けた第一歩である。北星会は布施の講演を通じて植民地の現実を歪曲·宣 伝する総督府にたいして批判し、それを朝鮮青年に拡散させようとした。また布施もその期 待に応えた。布施の講演会に臨む誠実な態度は、朝鮮人に十分な信頼を与えた。それは布 施が「日本無産運動の猛將」であることを直接確認し、今後展開される法廷闘争において布 施の支援を要請す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希望や確信を与えてくれたと思われる。 3. 関東大震災と人権擁護活動 帰国後の布施を待っていたのは、関東大震災であった。1923年9月関東大震災が発生する と、布施は朝鮮人虐殺事件を調査·告発するために自由法曹団の先頭に立って活躍した。 自由法曹団は布施の提唱によって1923年9月20日、第一回震災善後策会議を開催した。布 施は朝鮮人虐殺問題と関連して「死亡した朝鮮人は何千人であるか、死亡の原因は何であ るか。ただ朝鮮人である理由で死んだのか、それとも何の嫌疑があって死んだのか。下手 人は誰なのか。軍人であるか、警察であるか、自警団であるか。殺害方法はどうであった か。残虐な殺害、虐殺ではなかったか。遺体はどう処理したのか。下手人の責任に関する 26 金益相の活動については金ヨンボム、『義烈闘争Ⅰ-1920年代(韓国独立運動の歴史26)』(独立記念館韓国独 立運動史研究所、2009)を参照。 搜査、検挙処罰の実情はどうなったか」という問題を提起した。27布施の現実認識は正確な ものであった。にもかかわらず自由法曹団は当局の妨害工作で虐殺の真相を究明することが できなかった。 布施は10月朝鮮留学生たちが結成した「東京地方罹災朝鮮人後援會」の顧問に推戴さ れ、12月の「被殺同胞追悼会」で朝鮮人虐殺に対する当局の態度を批判した。28[引用省略] 当時、朝鮮人虐殺を批判する言説の中で布施の演説は最も過激であった。追悼の辞には虐 殺にたいする憤りと無念さが含まれていた。日本人として朝鮮人に深い謝罪を表明した、貴 重なものである。布施は朝鮮人虐殺問題を人災であると認識し、後述するように1926年3月 二回目の朝鮮訪問の際、関東大震災に関する「謝罪文」を『朝鮮日報』と『東亜日報』に郵送 している。29 帰国後、布施の朝鮮との関わりはさらに深まった。朝鮮訪問の後、朝鮮のメディアは日本 における布施の発言や動靜に注目した。また、1923年11月慶南昌原鎮海小作会は小作争 議の弁護を依頼してきた。30小作会は「日本法曹界の名声だけでなく、無産者解放運動に 加担した布施辰治」と評価し、小作争議関連事件の弁護を依頼したのである。布施は自分 が弁護できない場合でもほかの弁護士を派遣するという返答を送った。31 27 「震災中における朝鮮人殺害の眞相およびその責任に関する件」(大石進、 前掲書、2010、168頁から再 引用) 28 『大東公論』 2-2、 1924年11月. 29 「朝鮮旅行記」布施が新聞社に郵送した謝罪文は次の通りである。 「朝鮮に行けば世界中の平和と全人類の 幸福を追求する私たち無産階級解放運動家は、たとえ日本に生まれ日本での活動の根拠を置いていても日 本民族という民族的枠組みに陥っていないで、また、実際の運動においても民族的枠組みに陥っていないこ とを証明するために震災直後の朝鮮人虐殺問題に対する率直な私の所信と所感をすべての朝鮮同胞に言お うとしています。…… 日本人として、すべての朝鮮同胞に朝鮮人虐殺問題について心から謝罪を表明して 自責を痛感します。」 30 鎮海は日露戦争後の1906年、日本海軍の用地に占奪された。1922年4月朝鮮総督府は軍用にはあまり役に 立たない一部の地域を売却する過程で、実際の耕作者に売却すべきにもかかわらず、日本人に売却する不 法を犯した。1923年6月18日朱炳和、金鍾健、裵孝眠、朱炳憲などが発起人となって「鎮海小作会」の創立 総会を開催した。小作会で決議した内容は小作料は3割に引き下げ、大麦はすべて小作人の分け前とし、 日本人の手練で小作人が変わるのを防ぎ、管理者の横暴を防ぐために地頭の撤廃することなどであった(「鎭 海小作爭議事件の判決、被告はすべて放免の後、罰金刑」、『東亜日報』1924年8月6日)。 31 「小作争議に無料弁論。昌原郡鎮海小作会での活動、日本で有名な布施辰治氏に頼んだが、自分が行けな ければ、他の人を行かせると」、『朝鮮日報』1923年11月12日。
230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人権弁護士布施辰治と韓国の独立運動家たち - 韓国メディアの報道を中心に - 231 様々な社会団体における布施の活躍が紹介されたが、『毎日申報』は1924年2月10日第2 回日本労働総同盟全国大会の参加を伝えた。326月28日、無産階級政党の母体である政治 研究会創立総会で「我々は無産階級の理解に立脚した政党建設を図る」という決意とともに 布施の総会出席を報道している。339月11日半労働総同盟の機械労働組合、電気鉄工自動 車組合が「闘争主義」を標榜し設立した関東労働組合連合会の総会に出席したというニュー スも報じられた。34このようなメディア報道によって朝鮮の社会運動家たちは今後展開される 連帯闘争に期待感を抱き、そのための関連情報を共有していた。 1924年10月には金祉燮事件の弁護を引き受けるが、この公判過程で爆発物の鑑定を 申請し却下される。金祉燮は国家反逆罪に問われ死刑を求刑され、布施が最終弁論をし た。351925年7月2日、7月3日日付の新聞に金社燮事件の関する公判忌避申請が掲載され ているが、それによると布施は秘密裁判の不当性や裁判官の態度を問題にしていた。36また 事件の背景に朝鮮問題があると主張した。37[引用文]布施は「朝鮮併合統治の誤り」が事件 の背景に横たわっていることを明らかにした。 法廷における弁護士としての布施の闘争は続けられた。1923年12月27日、無政府主義者 難波大助による皇太子裕仁狙撃事件が発生した。1924年11月15日市ヶ谷刑務所で死刑を 執行され、難波の遺体が放置された。布施は「思想犯の遺体を冷酷に扱い墓地に埋めるの は、日本国民の思想発達を阻害すること」と主張し、難波の遺体を探し埋葬した。38このよ うな姿勢は金子文子の遺体を収拾することにも繋がった。 1925年1月、村木源次郞の保釈申請が報道された。村木は1923年9月関東大震災の際に 軍部に虐殺された大杉榮、伊藤野枝などの報復戦のために和田久太郞などと共に当時の戒 厳司令官の福田雅太郞を殺害しようとした事件に関わっていた。事件は事前に発覚し逮捕 32 「労働総同盟全国大会」、『每日申報』1924年2月13日。 33 「政治研究会の創立総会と決意」、『每日申報』1924年7月1日。 34 「關東聯合創立猛烈な分子が多い当局側は注目する中」、『時代日報』1924年9月21日。 35 「金祉燮に死刑を求刑、国家の反逆罪と、第二回公判午後速報」、『時代日報』1924年10月13日。 36 「金社燮事件公判、忌避申請理由」、『東亜日報』1925年7月2日、3日。 37 「金社燮事件公判、忌避申請理由」、『東亜日報』1925年7月2日。 38 「絞者臺上に露と消えた難波大助の屍體」、『時代日報』1924年11月17日。 され、予審期間中、村木が獄中で肺病に苦しんでいたので保釈申請を行ったのである。39 以上のように治安維持法反対闘争の先頭に立つ布施の姿が詳細に報道された。1925年2 月の民衆大会で政治研究会の布施辰治は、治安維持法を反対し「皆さんがここで議論する より、立ち上がって衆議院へ行くべきである」と訴えた。401925年5月10日、東京留学生の 思想団体である一月会が講演会を開催したとき、布施は「治安維持法について」という題目 で講演しているが、参加者が千人を超えている。41一月会が刊行した雑誌に治安維持法に ついて、42[引用文]布施は日本政府が植民地の参政権は認めないのに治安維持法だけは施 行しようとするのは矛盾していると指摘した。当時治安維持法の施行にたいしてさまざまな 反対運動が展開されていたが、とくに布施は唯一植民地朝鮮の問題として取り上げて治安 維持法の適用を批判したのである。 『朝鮮日報』によると、布施は朴烈事件の弁護に「寢食を忘れて力を尽くして」いた。この 裁判過程の報道とともに朴烈と金子文子の獄中結婚問題について「獄中結婚は形式の問題 で、二人はそれぞれの主張には不要だと反対し、結婚は嘘に過ぎない。ただ二人にもしも のことがあった場合、朴烈は自分には家族がいるから措置できるが、文子には引き受ける人 がいないから、二人のことを朴烈家族に引き受けてもらうために、戸籍を届けることにした」 と述べた。43朴烈と格別な関係を持った布施は、誰よりも彼を理解していたのである。 1926年1月三重県朝鮮人殺害事件を調査するために布施は、黒牛会の張詳重と調査団に 参加した。44東京の朝鮮人社会運動団体が事件調査のために1月29日辛泰嶽と辛載鏞を現 地に派遣し、布施も同行していた。451926年2月4日の『東亜日報』には事件の報告書全文が 掲載され、検閲によって伏字の状態で発行された。この虐殺事件について布施は「人道上の 39 「重大犯人獄死、肺病により」、『每日申報』1925年1月25日。 40 「民衆大會の騷亂遂ひ鮮散命令」、『每日申報』1925年2月21日。 41 「在東京思想團體 一月會講演、 盛況のうちに閉会」、『東亜日報』 1925年5月18日. 42 布施辰治、「治安維持法の實施に就て」、『思想運動』1-5、1925年 6月、 62頁 43 「朴烈の兄弟七年ぶりに獄中で。朴烈夫婦と彼の兄が同じ場所で会った。朴烈は精神鑑定の拒絶も自由で あり、施行も自由である。布施弁護士の談」、『朝鮮日報』1925年12月14日。 44 「三重縣事件 調査員派遣、黒友会にて」、『時代日報보』 1926年1月20日。 45 三重縣事件と各國體奮起」、 『時代日報』 1926年1月29日。
232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人権弁護士布施辰治と韓国の独立運動家たち - 韓国メディアの報道を中心に - 233 大問題」と捉え、感情を煽った県当局の実態を告発し事件当事者の検挙を主張した。46 以上のように朝鮮訪問以後、布施は関東大震災当時の朝鮮人虐殺問題を究明するために 誰よりも積極的に立ち向かった。それは身の上の危険を甘受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であっ た。さらに布施は虐殺の本質を正確に認識しただけでなく、謝罪したい気持ちが大きく、朝 鮮のメディアや社会運動家たちに虐殺責任問題を謝罪した。また金祉燮と朴烈の弁護人と して裁判に立ち治安維持法を批判した。さらに社会主義や無政府主義といった理念とは別 に、朝鮮関連事件のすべての弁護を引き受けていた。朝鮮問題において布施は、つねに反 人道主義政策を謝罪し植民地支配の撤廃運動を実践したのである。 4.宮三面と農村問題 1926年3月、布施は二回目の朝鮮訪問に出た。全羅南道羅州郡宮三面の土地回収運動を 支援するためである。二回目の朝鮮訪問では朝鮮人と農村問題への布施の認識がよく現れ ている。宮三面の土地回収運動は、朝鮮後期から植民地期にかけて封建支配層と東洋拓 殖会社を相手に展開した土地奪還闘争である。47 宮三面の農民たちは東拓の不法的な土地買収に対して「土地所有権の確認訴訟」と「土地 所有権の請求訴訟」を提起し、裁判を通して土地所有権を取り戻そうとした。しかし、「土 地調査事業」期間に行われた一連の裁判は東拓の土地所有権を法律的に確定する手順に過 ぎなかった。農民たちは日本の布施に代表を派遣して土地問題の相談や訴訟を依頼した。 農民代表者たちは鎭海小作会の事例を知り、メディアの報道を通して布施の活躍を高く評 価していた。 布施は農民代表の依頼を受け入れ、1926年3月2日から11日まで朝鮮を訪問した。農民 46 「在住同胞を殺害した三重縣事件眞相報告、 人道上の大問題(日自由法曹團特派員、布施辰治)」、『東亜 日報』 1926年2月4日。 47 東拓の宮三面での土地集積と法的土地所有権の獲得過程は日本人地主の土地集積過程の特質を克明に示 している。これについては權寧旭、「東洋拓植株式會社と宮三面事件」、『朝鮮硏究』78、1968;安秉珆、「東 洋拓植株式會社の土地收奪について」、「龍谷大學社會科學硏究年報」7、1976;李圭洙、「全羅南道羅州君 「宮三面」の土地所有関係の変動と東洋拓殖株式会社の土地集積」、『韓国独立運動史研究』14、2000;李圭 洙、「日帝下の土地回収運動の展開過程」、『韓国独立運動史研究』16、2001年を参照。 が作成した「誓約書」と「土地回収不納同盟血書」を見た布施は、彼らの情熱に感動したとい う。土地問題の調査をきっかけに、布施は植民地農村問題の深刻さを体験することができ た。「朝鮮無産階級の農民の生活苦に涙を流す。また植民地政策の被支配階級に対する圧 迫に憤慨するしかない。社会問題の中の社会問題であり人道問題の中の人道問題である」48 としみじみと回顧した。二回目の朝鮮訪問は「朝鮮人の利益のために闘争する事件」を弁護 したいという布施の実践であった。 当時の各メディアに布施の朝鮮訪問が報道されている。49 訪問中、大邱で講演会を計画 したが、許可されなく、工場の労働状況を調査することにした。大邱で『時代日報』記者と の対談で関東大震災当時の朝鮮人虐殺問題について語った。50布施にとって関東大震災の 朝鮮人虐殺問題は、つねに重荷になっていた。報道記事の伏せ字「○○○○○○」は「朝鮮 人大虐殺」である。日本当局と自警団が犯した虐殺事件に日本人布施がどう対応すべきか は、歴史的な課題であった。朝鮮人に「謝罪の意を表明すべく自責を痛切に感じる」という 発言に布施の真摯な心が伝わる。 3月8日大邱で時代日報社主催の講演会が開催された。51歓迎式は「心を開き歓喜する」と 報道されるほど盛況であった。52朝鮮の社会運動家たちは関東大震災虐殺問題について「謝 罪の意を表明すべく自責」を感じる布施に無限の信頼を送った。 代表者の訴訟の要求を受け入れた布施は、1926年3月2日東京を出発、5日榮山浦に到 着した。羅州警察署は布施に「来る必要はない」という電報を送って53韓国訪問を妨害し た。また、総督府は布施の調査が農民を刺激し、東拓を危険にさらすことになるだろうと、 もし訪問すると警察権力を動員し住民に圧力をかけると脅迫した。しかし、布施は3月5日 農民代表者たちに歓迎され榮山浦に到着した。布施は直ちに個別調査と実地踏査に踏み切 48 『朝鮮の産業と農民運動』、 6頁. 49 「羅州事件調査のため布施辰治氏渡來、 京城にも立ち寄る」、『東亜日報』1926年3月3日;「布施辰治氏5日 京城着。4日大邱を発った」、『朝鮮日報』1926年3月5日。 50 「一日本人として 全朝鮮兄弟へ謝罪、大邱にて布施辰治氏談」、『時代日報』 1926年3月6日。 51 「布施辰治氏「朝鮮所感」大講演」、 『時代日報』 1926年3月6日;「朝鮮所感 布施辰治氏大講演會」、 『時代 日報』1926年3月7日;「本社主催布施氏講演 八日午後七時半」、『時代日報』 1926年3月7日。 52 「布施辰治氏歓迎宴」、『朝鮮日報』 1926年3月7日。 53 布施辰治、前掲書、 11頁。
234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人権弁護士布施辰治と韓国の独立運動家たち - 韓国メディアの報道を中心に - 235 った。調査方法は布施が用意した二種類の調査票によるものである。調査票の内容は実地 面積を調査し、民有地という根拠、東拓への編入過程、今後の土地問題の解決策などを 問うものであった。54 布施の調査活動には障害が多かった。布施の訪問で当時の宮三面は警戒が厳重だったの で、布施は農民と自由に会うことができない状況であった。55農民代表は官憲により警察部 に呼び出され総督府調停案に同意を強いられた。それに対して布施は東京出張中の斉藤実 総督や湯浅倉平政務総監へ「宮三面訴訟のために来た私から調査行動の自由を奪おうとす る警務局の措置に抗議する」という抗議電報を送った。56布施は散歩を装って農民と接触し 土地問題の調査結果はソウルや東京に戻ってから公開すると約束した。57布施は農民に「私 の心情が朝鮮無産階級の心情であることを確信する。今、朝鮮を離れてこの言葉を無産階 級の皆に知らせる」58という言葉を残した。 以上のような多忙な日程のなか布施は様々な講演と調査活動を行った。大邱、大田、光 州、全州、ソウルなどで朝鮮人活動家の主催で時局講演会が開催された。光州労働連盟 などが主催した講演会では「容易に聞けない機会に來い!、来た!、来た!、布施さん! また来た!日本の無産階級の猛將!」59という宣伝ポスターで案内されていたのである。 1926年3月8日、時代日報社の主催でソウルで講演会が開催された。講演題目は「朝鮮思 想対策を評す」である。『時代日報』は布施を紹介しながら、「布施は常に労働運動に尽力 する中に、さらに朝鮮同胞の思想問題について自分の力が及ぶ限り全力で後援して連戦新 潟県の事件をはじめ、いまだに私たちの記憶に新しい三重県の事件と今回の朴烈の公判な ど、すべて無報酬で受任したのはもちろんのこと、自分の物質まで費やして精神的に同情を 表してきたことをみると、氏が私たちに如何なる意志を持っているかが十分推測できる」とい 54 布施辰治、前掲書、13~15頁。 55 布施辰治、前掲書、21頁。 56 「宮三面問題の調査と總督府の調停案 榮山浦での布施辰治」、『時代日報』 1926年3月8日。 57 布施辰治、前掲書、22頁。帰国後の4月5日に布施辰治は東京上野公園自治會館で「朝鮮の産業と農民運 動」という朝鮮問題の演説会を通して調査結果を公開した。 58 「朝鮮旅行記」、26頁。 59 『朝鮮旅行記』 付録に添付された宣伝ビラ。 う。60また『朝鮮日報』は布施を「日本の運動上の闘将であり、法曹界の猛將である」と紹介 した。61『時代日報』は「東京でも有名な左傾弁護士であり「巨軀」である」と評した。62 ソウル 駅で漢陽青年連盟などの社会主義団体からは盛大に歓迎された。63 しかし講演会は禁止された。禁止措置と関連して警務局長に「個人としての布施が不穏で あるのか、講演問題が不穏であるのか。講演内容に入って宮三面事件、三重県事件、朴 烈大逆事件、震災の状況のような不穏な言葉に懸念があるためか」64という質疑を送った。 これに際して布施は次のように語っている。65 [引用文] 布施は各地を移動しつつその状況を綿密に調査する誠実さを見せた。全州地域の離島全 州青年会、全州新聞配達組合、全州洋靴職人組合、全州鉄工組合、全州女子青年会、 金曜会、全州印刷工組合、全北青年連盟の会員数と幹部などを直接調査した。66講演会 は「安寧を妨害する」という理由で中止されたが、全北青年連盟などの七個団体は歓迎会を 開催し、「心を開いて隔てない歓談」を交し合った。67 日本に戻った布施は1926年4月「朝鮮問題講演会」を通じて土地問題の調査結果を発表し た。植民地と農村問題にかんする布施の認識を垣間見ることができるのである。まず、植民 地朝鮮の問題を朝鮮国内だけの問題ではなく、国際的な問題として認識していた。つまり 「朝鮮問題は国際的な紛糾を引き起こした事件である。朝鮮問題は決して朝鮮のみに限られ た問題ではない。朝鮮問題は東洋のバルカン問題である。朝鮮は世界平和と混乱を左右す る鍵である。全世界の問題であり、全人類の問題である」68と指摘した。 同時に、日本帝国議会で行われた朝鮮問題に関する質疑応答を調査し、経済的な側面 60 「来い! 公會堂へ! 布施氏大講演は今夜朝鮮思想對策批評」、『時代日報』1926年3月8日。 61 「布施辰治氏大講演、同業時代報の主催で8日夜公会堂にて」、『朝鮮日報』 1926年3月8日。 62 「布施氏 講演會 今日夜八時公会堂の中で」、『每日申報』 1926年3月8日。 63 「各團體盛大出迎夜明けの京城駅」、『每日申報』1926年3月9日。 64 「『時期不好』口實に布施氏講演絕對禁止」、『時代日報』1926年3月9日。 65 「親切を妨害する官憲」、『每日申報』1926年3月9日 66 「朝鮮旅行記」、27-28頁。 67 「布施辰治氏 歓迎宴 全州、 『朝鮮日報』 1926年3月11日;「全州警察の布施辰治の講演禁止。安全を 妨害することを懸念して」、『朝鮮日報』 1926年3月11日。 68 『朝鮮の産業と農民運動』、6頁。「朝鮮問題研究会、朝鮮の実情調査研究発表、1日東京で創立」、『時代 日報』1926年5月7日。
236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人権弁護士布施辰治と韓国の独立運動家たち - 韓国メディアの報道を中心に - 237 において日本の植民地支配を合理化する論調を批判した。69[引用文] 布施が政治問題と経済問題を区分して植民地統治を適切に批判できたのは、朝鮮の農業 問題への関心があったからである。官憲側の文献ではあるが、様々な出版物を介して朝鮮 の農業問題を詳細に把握し、農業地帯、気候、主要農産物などの事前知識を備え、土地 所有関係についても豊富な知識を持っていた。布施の植民地政策に対する指摘は、植民地 一般のものだけではなく、具体的な根拠に基づいた批判である。たとえば布施は耕作面積 の増加にもかかわらず、小作面積が拡大している具体的な統計を提示し、70[引用文]日本 に戻る時、渡航朝鮮人の状況や所持金まで詳細に調査した。調査記録によると、乗船人員 760余名のうち、朝鮮人640余名、残りは日本人であるが、朝鮮人留学生が10人、あとは労 働者であった。労働者の中で150余名は一時帰国者であり、残りの500余名は初めての渡航 者であった。71朝鮮農民の海外流出構造を正確に把握しようとする姿勢が目立つ。調査結 果、「渡航労働者は朝鮮の農村で暮せなくなった無産階級の農民がやむを得ず渡航するの である。それにもかかわらず官憲側は渡航者に対して引当金を徹底的に調査して不足した 者は渡航を禁止するなど、厳しい取り締りを実施している。朝鮮の労働者は朝鮮にいても食 べることができず、生きていくことができない貧困に苛まれていることを知った」72と明らかに している。こういった布施の認識は現場調査を通じて習得した生き生きとしたものである。 5. 朝鮮共産党の弁護士として 1927年、布施は三回目の朝鮮を訪問した。訪問の目的は朴憲永などの朝鮮共産党事件を 弁護するためであった。73共産党事件の弁護団は李仁、金炳魯、許憲などを中心に日本か らは布施と古屋貞雄が加わっている。布施は自由法曹団から、古屋は労働農民党からの派 69 『朝鮮の産業と農民運動』、7-8頁。 70 『朝鮮の産業と農民運動』、9-10頁。 71 『朝鮮旅行記』、 5-8頁。 72 『朝鮮の産業と農民運動』、36頁。 73 「朝鮮共産党6月上旬公判。日本で布施氏と多数の弁護士が来て弁護する」、『朝鮮日報』1927年4月3日; 「共產黨事件と辯護士 日本では布施氏が来京、三十名以上になりそう」、『中外日報』1927年4月19日。 遣形式であった。74それまでの歩みを考えると、組織の決定がなくても布施は事件の弁護を 義務として受け入れたに違いない。 布施はソウルに到着して「秘密裁判は不法である。共産党の裁判に努める。......朝鮮共産 党公判は一部の民衆だけが重視するものではなく、日本中の各階級の人たちが重視するも のである」75という声明を発表した。弁護士団と思想団体の代表たちはソウル駅で「凱旋将 軍」のように布施を歓迎した。『朝鮮日報』は歓迎行事の写真を掲載し布施を「法曹界の巨 星」と紹介している。76公判開始を控えて布施は事件関係者101人に手紙を送った。77[引 用文] この手紙には「弁護参考事件調書」が同封され、記載を要請したが、弁護人としての徹底 した準備と誠実さが垣間見られる。公判は9月13日から一般傍聴が禁止された状態で跛行 的に進行された。公判の進行状況は支離滅裂であった。滞在期限が迫って一時的に帰国す るしかなかった。布施は東京で待機しながら在日朝鮮人が開催した「朝鮮総督暴圧政治の 批判演説会」に演者として参加した。公判がピークに達した10月8日、再び朝鮮に渡った布 施は、朝鮮に来る直前、次のように語った。78[引用文] 布施は共産党事件を「朝鮮同胞全体の事件」として見なし、朝鮮の独立運動を正当なもの だと考えていた。政治的立場に共感する社会主義者の事件であるからそのように言ったわけ ではない。79布施の相次ぐ訪問について『朝鮮日報』は「鋭い論鋒の滔滔たる熱弁」といい、 74 労働農民党も自由法曹団と共に代表を朝鮮に派遣するなどの支援活動を展開した。古屋は朝鮮共産党の弁 護だけでなく、当時の社会問題に飛び火になった全羅南道務安郡下衣島の土地問題にも関与した。古屋の 朝鮮での活動については李圭洙、「日帝下の土地回収運動の展開過程-全羅南道務安郡下衣島の事例-」、 「韓国独立運動史研究」19、2002を参照。 75 『秘密裁判は不法』、朝鮮共産党の公判には頑張ります。入京した辯護士布施辰治氏の談歡迎盛況」、『東 亜日報』、 1927年10月10日。 76 「共産党事件と布施辰治氏の長文の声明。入京直後に発表した長文の声明。弁護日を控えて」、『朝鮮日 報』1927年10月10日。 77 「東京と京城との間」、『解放』 6-21、1927年12月。 78 「問題の朝鮮に就て聲明す」、『解放』 7-1、1928年1月。 79 布施は共産党事件の弁護だけでなく、大邱のアナーキスト団体である眞友連盟事件の弁護も担当する予定 だった。布施は政治的な路線や思想の違いを超越して朝鮮人の運動を擁護しようとしたが、眞友連盟の関 係者は布施の「思想と注意が合わない」とし「布施が共産党事件のために今回朝鮮に渡ってきたものである。 布施が弁論しても有罪が無罪に判決されるわけではない、また弁論しなくても無罪が有罪になるはずはない」 と弁護を断った(「大邱眞友聯瑥員布施氏の辯論を謝絕思想と合わないと被吿等獄中で討議决定」、『中外日
238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人権弁護士布施辰治と韓国の独立運動家たち - 韓国メディアの報道を中心に - 239 彼を紹介した。布施は歓迎会の席上で、「朝鮮共産党公判が開廷されると、自分は弁護士 としてまた101人の被告の同志としてすぐに來京しようとしたが、色々な事情で遅れたので申 し訳ない。被告の家族や一般社会が自分への期待と望みが相当多いだろうが、自分の努力 がそれに相当するかは知らないが、精一杯戦う」80と述べた。 朝鮮共産党事件の公判は被告に対する拷問が暴露されるなど紆余曲折を経た。裁判の公 開禁止問題を巡って、布施は10月11日『朝鮮日報』を通して抗議文を発表した。81[引用文] 一週間朝鮮に滞在してから布施は日本に戻った。滞在期間中、布施は公判がない日に各 地を訪問して講演会を開催した。開城松島青年会は布施を招待して講演会と歓迎懇談会 を開催した。82日本帰国後も公判活動は続いた。在日朝鮮人と一緒に総督府政務総監湯 浅倉平を訪問し、警察の拷問について抗議の意を伝えた。そこには在日本朝鮮労働総同 盟代表の金漢卿·新幹会東京支部代表の趙憲泳·大衆新聞社代表の朴洛鍾が参加してい た。8312月には四回目に朝鮮を訪問し、公判の最後弁論を引き受けた。最終判決は12人を 除いて全員有罪判決が下された。法廷における布施の活躍は多くの朝鮮人に記憶された。 6.おわりに 布施は「弱いが正しい者のために私を強く作りなさい。私は良心を信じる」と一生をかけて自 由·平等·民権という理念を実践した弁護士である。「生きべくんば民衆と共に、死すべくん ば 民衆の為に」と墓碑銘にも記録されているように活動をしてきた布施は、日本人だけでな く東アジアの民衆の心を動かした。朝鮮人の運動家たちは布施を最も信頼できる日本人とし て評価し、尊敬したのである。布施が発行した「法律戰線」のような著作物は、朝鮮で多く 報』1927年6月14日)。 80 「銳利な論鋒. ある滔々たる烈弁で弁護士諸氏の驚き。布施辰治、古屋、二人歓迎」、『朝鮮日報』1927年 10月13日。 81 「共産党公判公開。禁止不当を糾弾。弁護士布施辰治」、 『朝鮮日報』 1927年10月12日。 82 「二人を招聘して開城で講演。布施辰治、古屋貞雄」、 『朝鮮日報』1927年10月17日。 83 「政務総監に面会し、厳重な抗議、東京の4団体の代表布施氏と一緒に厳重抗議、共産党被告拷問で」、 『中外日報』1927年11月6日。 の読者層を持っていた。 布施は「自己革命の告白」以来、自由法曹団、解放運動犠牲者の救援弁護団、日本労 農弁護士団を拠点に戦闘的で波乱万丈な活動を展開してきた。布施は1928年合法組織の なか最も左翼の政党であった勞動農民黨に入党する。解放運動犠牲者救援弁護団の法律 部長としてまた日本の「3·15共産党事件」や1929年の「4·16共産党事件」の弁護人として活 躍した。当時は治安維持法に基づいて共産党弾圧事件が相次いで起こった時期である。そ れらの裁判の弁護のために慌ただしく活動してきたが、それは布施が追求する人道主義、 人権擁護、思想の尊重という政治路線の実践過程であった。 布施は1932年、法廷侮辱という理由で懲戒裁判に回付され、弁護士資格を剥奪される。 そして1933年新聞紙法、郵便法違反で起訴され、禁固刑3ヶ月という実刑を言い渡され た。また、出獄直後日本労農弁護士団一斉検挙事件に関与したことも治安維持法関連の 裁判での激しい弁護活動のためであった。布施にとってこの時期は苦心に満ちた日々であっ た。布施は一斉に検挙された弁護士の中、独りで法廷闘争を続けた。しかし、1939年最終 的には労農弁護士団事件の上告審が棄却され、懲役2年の実刑が言い渡された。 敗戦後、布施は再び壮大な姿で民衆の前に現れた。「出獄自由戦士歓迎人民大会」に参 加した布施の演説は、再び存在感を示した。再び自由法曹団を結成し弁護士としても再起 した。その後、平和憲法の普及や啓蒙に力を入れ、GHQや日本政府の横暴から在日朝鮮 人の権利を守る闘争に全力を尽くした。1946年に朝鮮人たちと共同で「朝鮮建國憲法草案 私稿」を執筆した。在日朝鮮人の意見を収斂して執筆したものである。「解放」以後、民族 独立の象徴である新憲法を構想できる日本人は、布施以外はなかっただろう。布施は1953 年、72歳でこの世を去った。葬儀には多くの朝鮮人が告別式葬儀委員として参加した。朝 鮮人の評価通り、布施は「日本無産運動の猛將」であった。布施と朝鮮人の関係は日韓連 帯闘争の鑑ともいえる。布施は植民地民衆の「友」として時には「同志」として永遠に刻印さ れた。布施は植民地の民衆を発見し、朝鮮人たちは布施を発見したのである。
240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人権弁護士布施辰治と韓国の独立運動家たち - 韓国メディアの報道を中心に - 241 [表] 布施の主な活動 年度 活動 備考 1880 宮城県で生まれる 1899 明治法律学校入学 1902 明治法律学校卒業 判事檢事登用試驗合格. 司法官試補) 1903 辞職の文書「挂冠の辭」を発表。検事代理を辞職、弁護士登録 1906 東京市電騷擾事件の山口義三を弁護 1911 「朝鮮の独立運動へ敬意を表する」を執筆して検査局の取り調べを受ける 不起訴処分 1915 鈴ケ森お春の殺人事件の弁護 1917 独りで普通選挙運動を始める 島倉儀平事件の弁護人 1918 米騒動関連事件の弁護人 シベリア出兵宣言に対する反戦ビラを作成。警視庁からの配付禁止 1919 大杉榮などアナキスト事件の弁護人 釜石·八幡製鉄ストライキ事件の弁護人 崔八鏞·白寬洙等の出版法違反事件の第二審弁護 1920 《法廷より社會へ》 創刊 「自己革命の告白」発表 岩手県の入会權事件弁護 1939年まで 1921 神戶三菱·川崎造船所のストライキ事件弁護 自由法曹團の結成 1922 借家人同盟の結成 《生活運動》創刊 1923 関東大学地震の朝鮮人虐殺事件を調査·告発のための活動 古田大次郞などのアナーキスト事件の弁護 伏石·木崎小作争議事件の弁護 德川公暗殺予備事件の弁護 勞動農民黨の結成、参加 顧問 「東京地方罹災朝鮮人後援会」に参加 顧問 朝鮮人留学生主催の「被殺同胞追悼会」での追悼演説 朴烈·金子文子事件の弁護 1926年まで 北星会主催の夏期巡講演会に参加 義烈団員 金始顯の弁護 年度 活動 備考 1924 義烈団員 金祉燮の爆発物取締罰則違反事件の弁護 1925 朝鮮水害罹災民救援運動を提起 小樽高等商業學敎事件の抗議運動展開 1926 日本勞動組合総連合会長 「朝鮮事情演說会」講演 三重縣木本町の朝鮮人殺人事件真相調査 全羅南道羅州郡宮三面土地事件の調査 1927 《生活運動》を 《法律戰線》に改名 台湾二林蔗糖農民組合騷擾事件の弁護 朝鮮共産党事件の弁護 朝鮮人たち主催した「朝鮮総督府暴壓政治批判演説会」での演説 1928 第1回普通選挙で労働農民党として入候補 落選 「解放運動犧牲者救援會」の法律部長 3·15共産党事件と1929年の4·16共産党事件の弁護人 1929 東京控訴院の懲戒裁判所へ起訴される 崔承晩と「在日朝鮮人労働産業犠牲者救援会」を結成 1930 新聞紙法·郵便法違反で起訴される。 1931 「解放運動犧牲者救援辯護團」の幹事長 「全農全國會議辯護士團」の幹事長 共産党裁判中央統一公判闘争の実際的な弁護団長 金漢卿などの治安維持法違反事件の弁護人 1932 大審院の懲戒裁判判決で弁護し除名が確定 1932 劉宗煥·劉祿鐘兄弟の警察官殺害事件の弁護 1933 新聞紙法事件で上訴棄却が確定され服役 禁錮3ヶ月 出獄記念会を契機に「自由懇談會」を発足 「日本勞農辯護士團」一斉検挙事に連累 1934 一斉検挙事件で起訴され同僚弁護士の中で独りで法廷闘争を続行。 1935 釈放 岩手縣農村と山村を調査 1939 労農弁護士団事件の上告審が棄却され懲役二年服役 弁護士登録取消 1940 出獄、故郷で法会運営
日本における反観平和運動の現在的な意味-観史認識を基礎とした東北アジア平和連観の観みと今- 243242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年度 活動 備考 1944 治安維持法違反容疑で三男杜生が京都刑務所で獄死 1945 「出獄自由戰士歡迎人民大會」開催 自由法曹団の再結成 顧問 「布施辰治弁護士再開業記念祝賀会」開催 1946 「憲法改正私案」発表 プランカド事件の弁護人 「朝鮮建國憲法草案私稿」を発表 『運命の勝利者朴烈』刊行 1947 宮城縣知事選挙で労農団体の推薦で入候補 落選 1948 日本勞農救援會」(後の「日本國民救援會」)の中央委員長 阪神教育闘争事件の弁護 国旗掲揚事件の弁護 1949 三鷹事件と松川事件の弁護 「布施辰治」誕生70年祝賀人権擁護宣言大会」開催 深川事件、朝連·民靑解散事件の弁護 東京朝鮮高等学校事件、台東会館事件の弁護 1951 公安 條例廃止運動の展開 1952 朝鮮人が連累されたメイデイ事件、吹田事件の弁護人 1953 パリの「フランス犠牲者救援大会」に招聘される。 『世界平和評議会」連絡委員として推薦 5月から自宅で療養中 9月13日逝去(満72才) 제3주제 第三主題 일본에서의 반전평화운동의 현재적 의미 -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한 동북아 평화연대의 발자취와 현재 - 日本における反戦平和運動の現在的な意味 - 歴史認識を基礎とした東北アジア平和連帯の歩みと今 - 모리 가즈토시(가나자와 시 의원) 森一敏(金沢市議員)
일본에서의반전평화운동의현재적의미-역사인식을바탕으로한동북아평화연대의발자취와현재- 245244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1. 들어가는 말: 우리들이 확인해온 역사인식 먼저 이번 학술회의에 임하면서 저희 가나자와 준비위원회의 역사인식을 말씀 드리고자 한 다. 저희 가나자와는 역사도시로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공습을 받지 않아서 전쟁의 화마를 면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하여 평화도시라는 평가도 있지만, 과연 가나자와가 동북아에서 어떤 도시였는지를 시민들 스스로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선언한 1867년의 메이지 근대화에 이어 6년 후에는 병역제가 실시 되었고 징병제도가 도입되었다. 같은 해 1873년 가나자와의 성내에는 나고야 진대(鎮台)의 분영(分營)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1874년 이 분영의 분대는 첫 해외 출병인 대만 출병에 참 가하였다. 이듬해 1875년 3월 보병 제7연대 사령부가 설치되었고, 후에 ‘향토의 명예’로 이름을 알리 는 정예부대가 되었다. 1894년에는 동학농민전쟁의 진압을 위해 출병하여 청일전쟁에 참전 한다. 당시 충청도와 전라도 등 각지에서 봉기한 항일의병을 대량 살상하였다. 그리고 11년 후 1896년(원문 그대로–역자) 설치된 제9사단 사령부는 1898년 가나자와 성내로 이전한다. 그 후 제9사단은 1904년 러일전쟁 뤼순해전(旅順海戰)에 참전, 러일전쟁 후 2년간, 1914년 이후 3년 간,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계기로 한국에 주둔하였고 한일합방 이후에는 무단통치를 담당하였다. 이어 1921년 러시아혁명에 간섭하는 시베리아출병에도 참전한다. 그리고 1932년 제1차 상하이사변(上海事變)에 참전하였는데 이때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폭탄 일본에서의 반전평화운동의 현재적 의미 -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한 동북아 평화연대의 발자취와 현재 - 모리 가즈토시 | 가나자와 시 의원 사건에 조우한다. 그 후에도 1935년 3년간 위만주국(僞滿洲國) 파병, 1937년 중일전쟁으로 연결되는 제2차 상하이사변 파병까지 이어진다. 중지나(中支那) 방면군의 난징공략전, 난징성내 국제난민 구 역에서의 패잔병 소탕 등의 난징학살사건의 당사자가 되었다. 1940년 다시금 위만주국 파 병, 1944년 오키나와 주둔 후 타이완에서 패전을 맞이하였다. 이처럼 가나자와는 전쟁의 참화를 피했지만, 식민지 지배와 대륙 침략의 거점으로서 역할 을 한 도시이다. 역사에 대한 책임은 가나자와가 이러한 역사를 인식하고, 아시아의 교류와 평화 외교를 지자체 주민이 협력하여 추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2. 깊은 신뢰와 연대 의식 윤봉길 의사의 평화정신 계승과 관련하여 이우재(李佑宰) 월진회(月進会) 회장의 “가나자와야 말로 한국 시민에게 성지(聖地)”라는 말에 우리들은 엄숙함을 느낀다. 그 의미를 다음에서 언 급하고자 한다. 1992년 암매장지가 사적으로 보존되었을 당시, 박인조(朴仁祚) 씨와 제휴한 ‘윤봉길 암매장 지를 생각하는 모임’은 ‘테러리스트’ ‘의사(義士)’ 논쟁을 넘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일본 의 식민지지배를 인정하지 않았던, 거리에 유해가 매장된 윤봉길을 그저 ‘비극적 인물’로 남 기는 것이 아니라, 독립을 위한 윤봉길의 ‘의거’가 민족해방운동과의 연대로 이어지도록 일본 인만이 아니라 재일한국인, 재일조선인과의 공동 작업이라는 의미를 담아.” 암매장지의 사적비 설치는 일본 지역사회에서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한 역사인식과 책 임의식을 자각하는 시대적인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아울러 고 윤규상(尹圭相) 월진회 명예 회장, 고 히라타 세이치(平田誠一) 가나자와 시의회 의원이 함께 하였고, 그리고 2008년 12월 19일 영구사용의 허가는 야마데 다모츠(山出保) 전 가나자와 시장이 ‘한일친선 기여’를 위하 여 정치적 판단을 내렸기에 가능해졌다는 점을 밝혀둔다. 오늘날 동북아 평화연대의 행보는 이시카와에서 이렇게 시작되었다. ‘윤봉길 의사와 함께하는 모임’은 14년 동안 이어온 선배들의 역사를 계승하여 2006년 사 회민주당과 제휴하는 시민단체로 출범했다. 이후 한일관계가 삐걱거리거나 남북관계가 긴 장할 때에도 끊이지 않고 상호 방문을 지속시키고 양쪽 지역 시민들의 신뢰와 자치단체 간의
일본에서의반전평화운동의현재적의미-역사인식을바탕으로한동북아평화연대의발자취와현재- 247246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제휴를 통하여 평화연대의 기반을 다질 수 있다는 뜻을 공유해 왔다. 지난해 5월 황선봉(黄善奉) 예산군수가 처음 해외시찰로 가나자와에 와서 지자체 간의 신뢰 구축에 열정을 보여주어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우재 회장이 한국인들이 암매장지 사적비 앞 에서 절을 하고 우리들의 활동을 접하고 “가나자와는 한국 시민에게 성지다”라고 표현해 준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다. 어려운 투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우리들은 지금까지 지지 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다. 우리들은 진정으로 ‘마음의 친구’이자 뜻을 같 이한 동지이다. 그러나 지자체와 시민이 쌓아 온 신뢰와 평화를 향한 길은 오늘날 전례 없는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3. 직면한 어려운 상황 1) 일본의 정치 상황 아베 정권은 식민지 지배가 초래한 남북분단의 고착화에 적극 가담하고, 종속적인 대미관계 하에 북한을 적대시하고 ‘혐한(嫌韓)’ 감정을 선동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는 데 이용해 왔다. 북한 핵미사일 위기로 인해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아베 정권은 2015년 9 월 19일 강행 통과시킨 안보관련법에 의거하여 집단적 자위권의 일환으로, 5월에는 북한을 위협하고자 일본의 태평양 연해를 해양 중인 미국 보급함과 나란히 해상자위대의 호위함을 배치시켰다. 또 6월에는 동해에서 미사일 경계 중인 미국 이지스함에 보급함이 급유를 실시 하였다. 한편, 지자체 주민에게 J-알럿(J-ALERT) 정보로 불안을 부추겨 미사일 낙하를 상정 한 피난 훈련을 시키는 등 시대착오적인 전시체제로 국민들을 몰아가고 있다. 아베 총리는 9월 유엔 총회에서 “대화는 무기력하며 압박만이 위기 해결의 수단”이라고 연 설하였다. 제3차 세계대전을 막기 위하여 냉정한 대화를 통한 해결을 호소하는 각국 정상들 사이에서 그의 호전적인 입장이 두드러졌다. 방위성은 내년도 예산을 위하여 사상 최대인 5 조 2천억 엔을 요구하여, 이지스·어쇼어(Aegis Ashore)와 사드(THAAD) 배치를 검토하고 있 다. 북한에 대한 선전포고로 해석될 수 있는 아베의 유엔 연설은 결코 국민들의 총의가 아니 며 일본이 취해야 할 안전보장정책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런데 아베내각은 역사수정주의의 동지인 모리토모(森友)학원, 가게(加計)학원에 대한 편 의제공 의혹과 이나다(稲田) 전 국방장관의 거듭된 불상사 등으로 구심력이 급락했다. 9월 28 일 이를 극복하고 재임 중 개헌(2018년 가을 국민투표)을 달성하고자 ‘보신·편의’를 위한 국회 해산을 단행하였다. 아베 총리가 목표하는 헌법 개정은 9조 3항을 신설하여 자위대를 추가 기입함으로써 집단적 자위권의 전면 행사를 가능하게 하는 국방군 창설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틈타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쿄 도지사가 대표로 취임한 ‘희망의당(希 望の党)’은 아베 독점 타파를 내걸고 설립되었고, 제1야당인 민진당(民進党)은 사실상 분열하 였다. 고이케 유리코 대표를 비롯하여 ‘희망의당’ 간부들은 일본회의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으 며,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 피해자에 대한 추도문을 거부하거나 재일외국인의 지방참정 권에 반대하는 민족배외주의 개헌파들이다. 사민당(社民党)은 호헌 자유주의 야당과 시민의 공동투쟁을 발전시켜 아베 개헌저지의 선거전을 모색했으나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이렇게 맞이한 10월 22일 중의원 총선거에서 아베 자민당은 ‘북한위협’을 연호하며 ‘일본 을 지키고 싶다’는 캐치프레이즈로 284석을 획득하여 연립여당 공명당(公明党)을 합하면 개 헌발의에 필요한 3분의 2를 넘는 313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개헌문제에 이견은 있지만 희망 의당과 일본유신회(日本維新の会)를 포함하면 개헌 세력의 의석은 8할에 달하는 상황이다. 한 편, 호헌자유주의의 대항축이 되고자 급거 설립한 입헌민주당(立憲民主党)은 국민의 위기감을 흡수하여 제1야당으로 약진했다. 선거 결과는 소선거구제의 왜곡된 결과이자 동시에 선거후 여론조사에서 드러난 국민의식은 아베개헌을 반대하는 의견이 6할 이상으로 나타났다. 향후 입헌민주당을 중심으로 같은 입헌야당인 공산당과 사민당이 함께 투쟁하고 거대한 개헌세력과 대치하여 개헌의 흐름을 막는 국민운동을 전개시키는 것이 급선무이다. 2) 가나자와(金沢)·이시카와(石川)의 정치 상황 가까이에 눈을 돌려 야마노(山野) 가나자와의 시정을 살펴보면, 2015년 일본의 과거를 정당 화하는 이쿠호샤(育鵬社) 중학교 역사교과서를 채택하였고, 또 월진회(月進会) 일본지부가 실 시한 매장지 사적 재정비에 대해서도 우익단체의 항의를 우려하여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 고 있다. 그 밖에도 가나자와 시는 본인이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이시카와현 헌법을 지키는 모임’이 5월 3일 호헌집회를 위해 시청 앞 광장 사용의 신청에 대해서 “특정한 주의주장에 기초하여
일본에서의반전평화운동의현재적의미-역사인식을바탕으로한동북아평화연대의발자취와현재- 249248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찬반을 표명하는 정치활동, 시위행위는 개정관리규칙의 금지사항에 해당하기 때문에 허가할 수 없다”라는 이유로 불허 처분을 하였다. 헌법 제21조 ‘집회·표현의 자유’는 자치와 민주주 의의 토대이며 기본적인 인권의 핵심을 이룬다. 불허 처분은 묵과할 수 없기에 9월 29일 헌 법위반으로 가나자와 지방재판소에 제소한 상태이다. 한편, 다니모토(谷本) 이시카와현 지사는 북한이 미사일 발사실험을 거듭하는 상황에서 “김정은 정권을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북한주민을 군량미 공격으로 아사시킬 필요가 있다”는 발언을 하여, 현민에게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지사는 인권경시로 받아들여질 부적절한 발언 이었다고 철회했으나 북한주민에 대한 사죄는 하지 않았다. ‘윤봉길 의사와 함께하는 모임’의 회원이 다수 참여하는 성전대비 철거모임(聖戰大碑撤去の会)과 조총련 등의 단체가 잇따라 항 의하고 사죄 요구를 신청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발언이 역사를 돌아보지 않는 조선 멸시가 밑바닥에 있음을 지적하고, 남북 분단 이후 미국의 북한에 대한 군사 경제적 봉쇄가 이러한 사태의 배경에 있음을 인식하고 지자체장으로서 정부에 대화에 통한 해결을 촉구하도록 요구해왔다. 이는 아베 정치의 지방 으로 파급된 일례에 불과하다. 4. 한국 촛불집회에서 용기를 얻은 우리들의 투쟁 우리는 지난 1년간 현의 여러 단체와 공동으로 집단적 자위권을 용인하는 전쟁법률인 ‘보안 관련법’의 폐지와 ‘공모죄법’의 입법 저지를 위해 전력투구해 왔다. 공모죄는 일본의 형법체 계를 근본적으로 뒤집는, 즉 범죄 실행 이전의 모의 단계에서부터 수사 대상으로 처벌할 수 있는 치안입법이다. 이것이 확대 적용되면 정당한 정부비판과 헌법개악 반대 등의 시민운동 이 탄압을 받을 위험성에 대해 주장했지만, 결국 6월 국회에서 강행 처리되어 입법 성립을 막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입헌 민주주의를 붕괴시키는 아베 정권의 ‘전쟁할 수 있는 나라 만들기’에 대항 하여 지난 5년간 쉼 없이 저항하는 시민운동에 진력해 왔다. 이러한 고난의 투쟁이라 할 우 리의 운동에 대하여 용기를 주고 정신적으로 지탱해준 것은, 다름 아닌 오키나와 현민의 불 굴의 반미기지투쟁이자 한국시민의 끓어오르는 민주화운동이었다. 특히 작년 부패와 권력주 의에 물든 박근혜 전 대통령을 규탄하고 청소년을 비롯한 수백만 명이 거리에서 퇴진을 요구 하며 들고일어난 촛불집회의 광경에 깊은 경의와 감명을 받았다. 이 민중운동이 발전한 작년 4월 말, 방한 중이던 우리 방문단은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용집회에 참가하고 일본정부에 의 한 ‘위안부’문제의 역사수정주의와 피해자를 무시한 ‘한일합의’에 대해서 함께 항의의 목소리 를 높였다. 저 역시 연일 가나자와 시내의 가두와 집회에서 동료들과 함께 민주주의 후퇴를 용서하지 않는 한국 시민의 의연한 투쟁을 배우고, 악정에 문제제기하는 책임을 다하자고 호소하였다. 선거에서의 입장차를 뛰어넘어 문재인 대통령을 탄생시킨 민주화운동의 위대한 업적은 역 사에 깊이 새겨질 것이다. 저는 6월 가나자와 시의회의 월 정기의회에서 야마노(山野) 가나자 와 시장에게 타이완의 식민지 시대에 대한 역사 인식을 묻고, 문재인 대통령의 “저와 정부는 애국의 역사를 존중하고 지키지만, 이를 통치에 이용한 불행한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현충일’연설을 인용했다. 내셔널리즘을 고취시키려고 역사를 수정하는 측에 가담해서는 안 된다고 요구하는 것이다. 오늘날 복잡하고 엄중한 국제 정세 속에서 한국 정부는 어려운 리 더십을 요구받고 있다고 알고 있지만, 민주화와 평화를 추구하는 민중의 의지를 실천하고 전 진하리라 확신한다. 5. 향후 평화 연대의 활동을 전망하며 2010년 이우재 월진회 회장의 제안이 있고 7년이 지났다. 상호 연대와 교차 심포지엄, 청소 년교류 등의 활동을 쌓아오며 일본 측의 과제 인식과 전망을 정리하고자 한다. 1) ‘저항의 문화’ 윤봉길 의거의 교훈 호쿠리쿠주니치신문 (北陸中日新聞)(도쿄신문東京新聞)은 새해 벽두에 일본 사회의 상황을 우려 하는 도쿄대 철학자 다카하시 데쓰야(高橋哲哉) 교수의 말을 게재하였다. “지금이 다음에 일 어날 전쟁의 ‘전전(戰前)’은 아닌가. 아베 정권의 전체주의적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제멋대로 해도 국민들의 저항이 거의 없다. 9조 개헌까지 치달아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는 또 “메이지 이래 군주에게 맡길 수밖에 라는 뿌리 깊은 의식”을 지적하고, 벨라루스 작가 알렉 시예비치(Alexievich) 씨의 발언 ‘일본에는 저항 문화가 없다’를 인용하였다.
일본에서의반전평화운동의현재적의미-역사인식을바탕으로한동북아평화연대의발자취와현재- 251250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이러한 심각한 과제에 직면한 우리는, 월진회가 제창하는 ‘윤봉길 의사의 평화정신을 현 대 동북아시아의 평화실현에 되살린다’는 의미를 ‘테러리스트로 취급되어온 윤봉길’에서 ‘정 당한 저항권을 직접 실천한 윤봉길’로, 민족을 넘어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심화시키는 것 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올 6월 월진회가 방문했을 때 개최한 ‘평화연대 를 위한 의견교환 모임’에서 다무라 미츠아키(田村光彰) 회장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통해 알 수 있다. “일본 국내에서의 테러리스트 인식을 극복하기 위해서 억압에 대항하는 저항은 정 의이자 인권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세계 저항운동에서 윤봉길의 위치를 높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본 학술회의에서의 다무라 미츠아키의 보고는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2) 동북아평화 구축의 핵심이 되는 남북분단 극복을 위한 우리들의 연대에 대하여 한국 월진회(月進会)가 주도하는 한국 내 평화연합, 남북 평화통일의 토양마련을 위한 활동 에 대해서 우리들도 보고를 받았다. 위에서 언급한 의견교환 모임에서 이우재 회장은 “패전 국 일본이 분단되지 않고 한국이 분단된 것을 일본은 부담으로 짊어져야할 것이다. 이 문제 는 한반도의 남북통일을 원하지 않는 6개국에 의해서는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아시아의 시 민운동이 필요하다”라고 지적하였다. 이에 답하듯 일본 정부가 북한에 대한 배외주의에 나서 서 군사적 위압에 쏠리는 것에 위기감을 느낀 뜻있는 시민이 이시카와·가나자와에서도 새로 운 북일우호운동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3) 작년 가을 방한을 계기로 시작된 예산군, 충청남도, 전주시와의 제휴에 대해서 지난 2015년 11월 심포지엄에서 저와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정책연구회가 기초한 ‘가나 자와 국제 지방정부 선언’을 일부 소개한 바 있다. 당시 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마무리하였다. “이 선언은 지자체가 시민의 편에 서서 국경을 넘어 평화와 인간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도록 국경을 초월하여 연대하고 정부와 대등한 입장에서 이를 실현하기 위해 분투해야 한 다는 것을 기반으로 있다. 우리들의 지방정부선언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현재 국제연대활 동을 해 온 월진회를 중심으로 동북아의 모든 지역인민들이 공동행동이 더욱 절실하다고 생 각한다.” 작년 11월 박현택(朴賢澤) 월진회 일본지부장과 함께 한국을 방문하였다. 이우재 월진회 회 장의 안내로 예산군, 충청남도, 전주시를 방문하고, 각 지의 군수, 의장, 의원들과 회담하는 기회가 있었다. 당시 황선봉(黃善奉) 예산군수, 권국상(權國相) 예산군 의회 의장, 월진회와 사 적 재정비에 관한 의견을 교환한 후, 윤주경(尹柱卿) 독립기념관 관장과의 간담회에서 가나자 와에서의 공동 심포지엄 개최 가능성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었다. 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충청남도 의회를 방문하여 김기영(金奇泳) 전 의장, 윤석우(尹錫雨) 의장을 예방하고 평화를 위한 협력에 공감을 얻었다. 또 월진회 전주지부 발족대회에 참석하 고 자매도시의 의회 전주시의회 김 의장과 간담회를 가졌다. 전주시장과의 간담회에서는 동 학농민전쟁에 대한 재평가, 전몰자 유골조사에 관한 동향에 대해서 듣고 가나자와와 제휴하 는 것에 대한 긍정적인 의견을 주셨다. 그리고 올해 여름 예산군의 의원, 충청남도 의원이 가나자와를 방문하였다. 이때 의견교환 모임에서는 “충청남도는 동북아 5개국 지방자치단체가 교차 개최하는 포럼에 참가해왔는데, 앞으로는 문화와 산업뿐 만 아니라 평화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한다.” 또 “일본의 서구화에 의해 한국의 근대화는 좌절했다. ‘한(恨)’을 품고 있는 한국인들과 공적인 교류만으로는 무리 다. 일본에 오고 싶지 않았지만 이번에 가나자와에 와서 여러분을 만나니 매우 감동하였다. 시민들 간의 교류가 매우 중요하다”라는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지자체 간 나아가 시민들 간 의 연대활동을 위한 행보로 기록되리라 확신한다. 4) ‘아시아역사 공동연구센터’를 향하여 윤봉길 의사의 매장 사적지에서의 자료관 정비는 일본 및 가나자와의 정세로 보아 어려운 상 황에 있지만, 가나자와시와 전주시가 창조도시 네트워크에 가맹하여 유네스코의 헌장이 주 장하는 ‘교육문화에 있어 도시의 평화에 대한 책임’에 기초하여 예산군을 비롯하여 관계 지자 체가 연계하여 ‘아시아 역사 공동연구 센터’를 가나자와에 설치한다는 취지를 시간이 걸리더 라도 실행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의 일환으로 이번 한국독립기념관과의 한일 공동학술회의가 개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개최목적인 ‘윤봉길의거의 세계사적 의미와 반전 평화운동의 가치를 밝히고 그 정신을 현재에 계승한다’는 것을 가나자와 시민들과 공유할 수 있도록 지속되었으면 한다.
일본에서의반전평화운동의현재적의미-역사인식을바탕으로한동북아평화연대의발자취와현재- 253252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6. 나가는 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 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 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본고를 집필하는 가운데 이 한국헌법의 전문에서 선언하고 있듯이 3.1독립운동으로 시작 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계보에서 탄생하고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의 민주화 운동을 지지해 왔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일본국 헌법전문 또한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 일본국민은 항구적인 평화를 염원하고 인간 상호 관계를 지배하는 숭고한 이상을 깊이 자각하여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국민이 공정 과 신의를 신뢰하여 우리들의 안전과 생존을 유지하려고 결의하였다. 우리는 평화를 유지하 고 전제와 예종, 압박과 편협을 지상에서 영원히 제거하고자 노력하는 국제사회에서 명예로 운 지위를 차지하고자 한다. 우리들은 전 세계의 국민이 한결같이 공포와 결핍으로부터 해방 되고 평화롭게 생존할 권리가 있음을 확인한다 …… 일본국민은 국가의 명예를 걸고 전력을 다해 이 숭고한 이상과 목적을 달성할 것을 맹세한다. ” 저에게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과감히 저항한 윤봉길 의사를 비롯한 한국 민중의 숭고한 뜻이 양국의 헌법으로 이어지고 평화 연대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 자신은 이러한 계보로 이어지는 윤규상(尹圭相) 명예회장, 이우재(李佑宰) 회장을 비롯한 한국의 여러분과의 15년에 걸친 상호교류를 통해서 윤봉길 의사의 평화정신의 근본에는 농 업 혁명가로서의 ‘생명창고’ 사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북아에서 전쟁의 피해와 전쟁의 불씨를 제거하여, 즉 국가·민족을 초월한 평화적 생존 권을 실현하려면 편협한 민족주의와 군사적 긴장의 배경에 있는 빈곤·격차의 시정이 필요하 다고. 저는 이것을 사회민주주의적 사상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생명의 존중과 인간다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 공통의 바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윤봉 길 의사는 대립의 존재가 아니라 인류 화합의 존재인 것이다. 일본에 사는 사람들과 이를 공 유할 수 있도록 평생을 바칠 것을 결의한다. 보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린다.
254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日本における反戦平和運動の現在的な意味 - 歴史認識を基礎とした東北アジア平和連帯の歩みと今 - 255 1. はじめに: 私たちが確認してきた歴史認識 本学術会議に当たり、まず、私たち金沢準備委員会としての歴史認識を申し述べたい。 当地金沢は、第二次世界大戦中に空襲等の戦禍を免れた歴史都市であり、これをもって 平和都市とする評価もなされているが、東北アジアにとって金沢とは如何なる都市であった のか、市民自身が認識を新たにしておく必要がある。 大政奉還が宣言された1867年に始まる明治の近代化に伴い、早くも6年後に兵制が敷か れ、徴兵制度が導入された。この1873年に金沢城内に名古屋鎮台の分営が設置された。 翌1874年、初めての海外出兵である台湾出兵にこの分営の部隊が参加している。 明けて1875年3月には、歩兵第七連隊司令部が設置され、その後、「郷土の誉れ」の精鋭 部隊として名を馳せることになる。1894年、東学農民戦争の鎮圧に出兵し、日清戦争に従 軍する。その際に、忠清道や全羅道をはじめ各地で蜂起した抗日義兵を大量に殺戮した。 それから11年後の1896年に設置された第九師団司令部は、1898年に金沢城内に移設され る。 この第九師団は、その後、1904年日露戦争の旅順会戦に従軍、日露戦争後の二年間に 続き、1914年以降三年間、第一次世界大戦参戦を背景に併合後の韓国に駐留し武断支配 を担った。さらに、1921年ロシア革命に干渉するシベリア出兵にも従軍している。 そして、1932年に第一次上海事変に従軍し、ここで尹奉吉義士による上海爆弾事件に遭 日本における反戦平和運動の現在的な意味 - 歴史認識を基礎とした東北アジア平和連帯の歩みと今 - 森一敏 | 金沢市議員 遇する。 その後、1935年以降三年間、偽満州国への派兵、1937年日中戦争開戦に係る第二次上 海事変にも派兵され、中支那方面軍として南京攻略戦、南京城内国際難民区での敗残兵 の掃討など南京大虐殺事件の当事者となった。1940年に再び偽満州国への派兵、1944年 沖縄移駐の後、台湾にて敗戦を迎えた。 このように、金沢は非戦災都市ではあるが、植民地支配と大陸侵略の拠点としての役割 を果たした都市である。金沢の歴史に対する責任とは、この歴史を認識し、アジアの交流と 平和外交を自治体、住民が協働して推進することであると考えている。 2.深まる信頼と連帯意識 さて、尹奉吉義士の平和精神の継承に関して、李佑宰月進会会長が述べた「金沢は韓国市 民にとっての聖地である。」との言葉に、私たちは背筋伸びる思いがする。その意味を以下 に述べる。 1992年に暗葬之跡が史跡として保存された際に、当時朴仁祚氏と連携したユン·ボンギル 暗葬地跡を考える会は、「テロリスト」「義士」論争を超えてこう記している。「日本の植民地 支配を肯定することなく、また遺体を通路に埋められた尹奉吉を単なる『悲劇の主人公』にす るのではなく、尹奉吉の独立のための「義挙」と、総体としての民族解放運動との連帯につ なげていくために、日本人だけのものではなく、在日韓国·朝鮮人との共同作業であることの 意味を込めて。」 暗葬之跡碑の設置は、日本の地域社会で植民地支配と侵略に対する歴史認識と責任意 識が覚醒する時代背景を伴っていた。これに随伴した故尹圭相月進会名誉会長、故平田 誠一金沢市議会議員に加え、2008年12月19日の永代使用許可に当たり、山出保元金沢市 長の「日韓親善に寄与する」との政治判断があったことは永遠に銘記されねばならない。今日 の東北アジアの平和連帯の歩みは、石川の地でこの時から始まっていたのである。 私たち尹奉吉義士共の会は、そうした14年に及ぶ先達の歴史を引き継ぎ、2006年に社会 民主党と連携する市民団体として発足した。以来、日韓関係がギクシャクした時も南北関 係が緊張した時も、途切れることなく相互訪問を続け、両地域市民の相互信頼と自治体間
256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日本における反戦平和運動の現在的な意味 - 歴史認識を基礎とした東北アジア平和連帯の歩みと今 - 257 の連携によって、平和連帯の基礎を築くことは可能であるとの意思を共有してきた。 昨年5月には、黄善奉禮山郡郡守初の海外視察に来沢頂き、自治体間の信頼醸成の熱 意に感銘を受けた。李佑宰会長が、韓国の人々が暗葬之跡碑にひざまずき、私たちの活動 に触れることを「金沢は韓国市民にとっての聖地である。」と表現されることは、極めて光栄 なことである。同時に、苦闘を強いられてきた私たちが今日まで支えられていることに感謝 の念を表明したい。私たちは真の「腹心の友」であり一衣帯水の同志である。 しかしながら、自治体、市民が積み上げてきた信頼と平和への道は、今日、かつてない 困難に直面している。 3.立ち塞がる困難な状況 1) 日本の政治状況 安倍政権は、植民地支配が招いた南北分断の固定化に積極的に加担し、対米従属の下、 朝鮮(「北朝鮮」)敵視と「嫌韓」感情を煽動して自身の政治基盤強化に利用してきた。「北朝 鮮」核ミサイル危機として緊張が高まる中、安倍政権は、2015年9月19日に強行成立させた 安保関連法に基づく集団的自衛権の一環として、5月には「北朝鮮」威嚇のために太平洋側 の日本近海を進む米補給艦に海上自衛隊護衛艦を併走させた。また、6月には、「日本海」 でミサイル警戒中の米イージス艦に補給艦が給油を行った。その一方で、自治体住民にJ アラ トー情報で不安を煽り、ミサイル落下を想定した避難訓練を促すなど、時代錯誤の戦 時体制に国民を巻き込んでいる。 安倍首相は、9月の国連総会で「対話は無力であり圧力のみが危機解決の手段だ。」と演 説した。第3次世界大戦回避のために、冷静な対話による解決を訴える各国首脳の中にあ って、その好戦的な姿勢が際立った。防衛省は、来年度予算に向け過去最大である5兆2 千億円余の要求を行い、イージス·アショアやTHAADの配備を検討している。「北朝鮮」に 対する宣戦布告と受け取られかねない安倍国連演説は国民の総意ではないし、日本の取る べき安全保障政策では断じてないことを申し上げたい。 ところで安倍内閣は、歴史修正主義の盟友である森友学園、加計学園への便宜供与疑 惑や稲田元防衛大臣の度重なる不祥事などでその求心力が急速に低下した。この9月28 日、これを乗り切り、悲願である在任中の改憲(2018年秋国民投票)を果たすため、「自己保 身·自己都合」解散に打って出た。安倍首相の目指す憲法改正は、9条に3項を新設し自衛 隊を書き加え、集団的自衛権を全面行使できる国防軍の創設へと道を開くものである。 この状況に乗じ、小池百合子東京都知事が代表に就任した「希望の党」が安倍一強打破 を掲げて設立され、野党第1党であった民進党は事実上の分裂に追い込まれた。小池百合 子代表をはじめ「希望の党」幹部もまた、日本会議の思想的影響を強く受け、関東大震災時 の朝鮮人虐殺被害者への追悼文を拒否したり、在日外国人の地方参政権に反対するなど民 族排外主義の改憲派揃いである。社民党は、護憲リベラルの野党 ·市民共闘を発展させ、 安倍改憲阻止の選挙戦を模索してきたが、くさびを打たれる状況に陥った。 こうして迎えた10月22日の衆議院議員総選挙では、安倍自民党は「朝鮮の脅威」を連呼 し、「日本を守りたい」とのキャッチフレーズで284議席を獲得し、連立与党の公明党と合わ せて改憲発議に必要な3分の2を超える313議席を占めることとなった。改憲課題に違いはあ るものの、希望の党や日本維新の会などを含めると、改憲勢力の議席は8割に達する状況で ある。一方、護憲リベラルの対抗軸となるべく急遽設立された「立憲民主党」は、国民の危 機感を吸収し、野党第一党へと躍進した。選挙結果は小選挙区制度のもたらしたいびつな 結果であると共に、改憲に対する国民の意識は、選挙後の世論調査での安倍改憲不賛成6 割超に表れている。 今後は、立憲民主党を軸に、同じく立憲野党である共産党、社民党が共闘し、巨大化し た改憲勢力と対峙し、改憲の流れを食い止める国民運動を創り出すことが急務である。 2) 金沢·石川における政治状況 私たちの足元に目を転ずれば、山野金沢市政は、2015年に日本の過去を正当化する育鵬 社中学校歴史教科書を採択したことに加え、月進会日本支部が行う暗葬之跡再整備につい ても、右翼団体からの抗議行動の懸念を理由に、消極的な姿勢に終始している。 これに加え金沢市は、私が事務局長を務める石川県憲法を守る会が、5月3日に行う護 憲集会に市庁舎前広場を使用する申請を行ったのに対し、「特定の主義主張に基づいて賛 否を表明する政治活動、示威行為は改正管理規則の禁止事項に当たり許可できない。」と
258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日本における反戦平和運動の現在的な意味 - 歴史認識を基礎とした東北アジア平和連帯の歩みと今 - 259 不許可処分を行ってきた。憲法第21条の「集会 ·表現の自由」は自治や民主主義の土台であ り、基本的人権の核心をなす。不許可処分は看過できず、9月29日、憲法違反であると金 沢地方裁判所に提訴したところである。 他方、谷本石川県知事は、「北朝鮮」がミサイル発射実験を繰り返す状況下で、「金政 権を転換させるには、北朝鮮国民を兵糧攻めにして餓死させる必要がある。」と述べて、 県民から厳しい批判を受けた。知事は人権軽視と受け取られる不適切発言だったと撤回し たが、「北朝鮮」人民への謝罪は行ってはいない。尹奉吉義士共の会会員も多く参加してい る聖戦大碑撤去の会や朝鮮総連などの団体が相次いで抗議し謝罪を求める申し入れを行っ た。 私たちはこの発言を、歴史を顧みない朝鮮蔑視が根にあることを指摘し、南北分断以後 アメリカによる「北朝鮮」の軍事的経済的封じ込めが事態の背景にあることの認識と、自治体 の長として国に対話による解決を求めるよう要求してきた。 これらは、安倍政治の地方への波及のほんの一例に過ぎない。 4.韓国ろうそく集会に勇気づけられた私たちのたたかい 私たちは、この一年、県内諸団体と共同し、集団的自衛権を容認する戦争法たる「安保関 連法」の廃止と「共謀罪法」の成立阻止に全力を挙げてきた。共謀罪は、日本の刑法体系 を根底から覆し、犯罪実行以前の相談の段階から捜査の対象とし処罰できる治安立法であ る。私たちは、これが拡大適用され、正当な政府批判や憲法改悪反対などの市民運動が弾 圧される危険性を訴えてきたが力及ばず、6月、国会の強行採決により成立を許した。 このように、立憲民主主義を破壊する安倍政権の戦争のできる国づくりに対し、私たちは この5年間休むことなく抵抗の市民運動に明け暮れてきた。この苦闘とも言える運動を勇気 づけ、精神的に支えてくれたのは、沖縄県民の不屈の反米軍基地闘争であり、韓国市民の 波打つ民主化運動であった。とりわけ、昨年来、腐敗と権力主義にまみれた朴槿恵前大統 領を糾弾し、青少年を含んで数百万人が街頭から退陣要求に立ち上がったろうそく集会 ·デ モの姿に深い敬意と感銘を覚えた。この民衆運動が大きく発展した昨年4月末、訪韓中の 私たち訪問団は日本大使館前の水曜集会に参加し、日本政府による「慰安婦」問題への歴 史修正主義と被害者頭越しの「日韓合意」に対し、共に抗議の声を上げた。 私も連日金沢市内の街頭や集会に仲間と立ち、民主主義の後退は許さない韓国市民の 敢然としたたたかいに学び、悪政に対する異議申し立ての責任を共に果たそうと呼びかけ た。 選挙戦での立場の違いを超えて、文在寅大統領を誕生させた民主化運動の偉大な成果 は、歴史に深く刻まれるものと思う。私は、6月の金沢市議会定例月議会で、山野金沢市 長に台湾の植民地時代に関する歴史認識を問う中で、文在寅大統領が「顕忠日」に行った 演説「私と政府は、愛国の歴史を尊重して守るが、それを統治に利用した不幸な過去を繰 り返さない」を引用した。ナショナリズムを鼓舞するために歴史を修正する側に与してはなら ないことを求めるものであった。今日、複雑で厳しい国際情勢の中で、韓国政府は難しい 舵取りを強いられていると受け止めているが、民主化と平和を求める民衆の意志を体現し、 前進するものと確信している。 5.これからの平和連帯の活動を展望して 2010年李佑宰月進会長の提案から7年。相互連携と双方でのシンポジウム、青少年交流な どの共同活動の積み上げに立ち、日本側の課題意識と展望を整理したい。 1) 「抵抗の文化」としての尹奉吉義挙からの学び 北陸中日新聞(東京新聞)は、年明け早々に日本社会の状況を危惧する東大の哲学者高橋哲 哉教授の言葉を載せている。「いまは次に起こる戦争の『戦前』ではないか。安倍政権の全 体主義的傾向は強まっている。やりたい放題やっても国民から抵抗がほとんど無い。九条改 憲まで突っ走っても不思議ではない。」彼は「明治以来のお上に任せるしかないという根強い 意識」と指摘した上で、ベラルーシの作家アレクシエービッチ氏の発言「日本には抵抗の文 化がない」を引用する。 この深刻な課題に向き合わねばならない私たちは、月進会が提唱する「尹奉吉義士の平和 精神を現代の東北アジアの平和実現に蘇らせる」の意味を、日本に於いては、「テロリストと
260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日本における反戦平和運動の現在的な意味 - 歴史認識を基礎とした東北アジア平和連帯の歩みと今 - 261 して扱われてきた尹奉吉」から「正当な抵抗権を身をもって実践した尹奉吉」へと、民族を超 えて歴史的意義付けを転換深化させることであると受け止め直している。この課題意識は、 本年6月の月進会来訪時に開催した「平和連帯のための意見交換会」で、当会田村光彰会 長の次の発言に代表されている。「日本国内での『テロリスト』認識を乗り越えていくために、 抑圧に対する抵抗は正義であり、人権であることを明らか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世界の抵 抗運動の中で、尹奉吉の位置を高めていく必要がある。」 本学術会議に於ける田村光彰報告もこの文脈から生まれたものである。 2) 東北アジアの平和構築の鍵となる南北の分断克服への私たちの連帯について 韓国月進会が主導する韓国内平和連合、南北平和統一の土壌づくりの活動について、私 たちも報告を受けてきた。上記の意見交換会で李佑宰会長は、「敗戦国日本が分割され ず、韓国が分割されたことを日本は背負っていかねばならない。この問題は、朝鮮半島の 南北統一を願っていない「6カ国」では解決できないだろう。アジアの市民運動が必要だ。」 と厳しい指摘を行った。これに応えるかのように、日本の政府が「北朝鮮」への排外主義に 立ち、軍事的威圧に傾斜することに危機感を持つ市民有志が、石川·金沢に於いても新た な日朝友好運動を模索する動きが現れている。 3) 昨秋の訪韓から動き出した禮山郡、忠清南道、全州市との連携について 私は、2015年11月のこのシンポジウムで、私と協働する市民の政策研究会が起草した「金 沢国際地方政府宣言」の一部を紹介した。その報告は次の一節で締め括っている。「この宣 言は、国境を越えて人々が平和のうちに人間の尊厳をもって生き続けられるよう、自治体は 市民の側に立ち、国境を越えて連携し、政府と対等の立場からその実現に奮闘しなければ ならないとの考えを基礎にしている。私たちの地方政府宣言を実現するには、今、国際連 帯活動の一環として積み上げられている月進会を中心とする東北アジア諸地域人民のさらな る共同行動が不可欠だと考えている。」 そのため、私は、昨年11月に朴賢澤月進会日本支部長と共に訪韓し、李佑宰月進会 会長の導きにより、禮山郡、忠清南道、全州市を訪問して、それぞれの首長、議長、議 員諸氏との会談の機会を得た。そこでは、黄善奉禮山郡郡守並びに権国相禮山郡議会議 長、月進会との史跡再整備に関する意見交換を行った後、尹柱卿独立紀念館館長との懇 談で、金沢での共同シンポジウムの可能性について意見を交わした。 さらには、初めて忠清南道議会を訪問し、金奇泳前議長、尹錫雨議長を表敬し、平和 のための協力について賛同を得た。また、月進会全州支部発足大会に出席すると共に、姉 妹都市議会である金全州市議会議長とも懇談した。金全州市長との懇談では、東学農民 戦争の再評価、戦没者遺骨調査に関する動向を伺い、金沢との連携に前向きな発言を頂 いた。 これを受け、今夏、複数の禮山郡議員、忠清南道議員が金沢を訪れた。その際の意見 交換会では、「忠清南道は、東北アジア五か国の地方自治体持ち回りによるフォーラムを開 催してきたが、これからは、文化や産業に加えて平和にも触れていかねばならない。」また 「日本の西欧化により韓国の近代化は頓挫させられた。「恨」を抱いている韓国の人々とは公 的な付き合いだけではだめだ。今回来たくなかった日本、金沢に来て皆さん方と出会い、と ても感動している。市民同士の交流がとても大切だ。」といった意見を伺うことができた。自 治体間、さらには市民同士の連携活動に向け、大きな一歩が記されたと確信する。 4) 「アジア歴史共同研究センター」に向かって 尹奉吉義士暗葬之跡での資料館整備は、日本及び金沢の情勢から困難な状況にあるが、 金沢市、全州市が創造都市ネットワークに加盟するユネスコの憲章が謳う「教育文化におけ る都市の平和への責任」に基づき、禮山郡をはじめ関係自治体が連携する「アジア歴史共同 研究センター」を金沢に設置するという道筋を時間はかかっても歩みたい。この歩みに、韓 国独立紀念館との本韓日共同学術会議が位置付いている。 開催目的である、「尹奉吉義挙の世界史的意味と反戦平和運動の価値を明らかにし、 その精神を現在に継承する。」ことが、金沢市民の共有意識となるよう引き続き取り組み たい。
262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日本における反戦平和運動の現在的な意味 - 歴史認識を基礎とした東北アジア平和連帯の歩みと今 - 263 6. 終わりに 「悠久な歴史と伝統に輝く我々大韓国民は3.1運動で建立された大韓民国臨時政府の法統 と、不義に抗拒した4 ·19民主理念を継承し、祖国の民主改革と平和的統一の使命に立脚 して、正義·人道と同胞愛で民族の団結を強固にし、全ての社会的弊習と不義を打破し、 自律と調和を土台に自由民主的基本秩序をより確固にし、政治·経済·社会 ·文化のすべて の領域において各人の機会を均等にし、能力を最高度に発揮してもらい、自由と権利に拠 る責任と義務を完遂するようにし、国内では国民生活の均等な向上を期し、外交では恒久 的な世界平和と人類共栄に貢献することで我々と我々の子孫の安全と自由と幸福を永遠に 確保することを確認しつつ、」 本稿を執筆するに当たり、この貴韓国憲法が、その前文で宣言するように、3.1独立運 動にはじまる大韓民国臨時政府の系譜から生まれ、屈することのない人々の民主化運動を 支えてきたことを深く認識したところである。 日本国憲法前文もまた、こう謳っている。「…… 日本国民は、恒久の平和を念願し、人 間相互の関係を支配する崇高な理想を深く自覚するのであつて、平和を愛する諸国民の公 正と信義に信頼して、われらの安全と生存を保持しようと決意した。われらは、平和を維 持し、専制と隷従、圧迫と偏狭を地上から永遠に除去しようと努めている国際社会におい て、名誉ある地位を占めたいと思う。われらは、全世界の国民が、ひとしく恐怖と欠乏から 免かれ、平和のうちに生存する権利を有することを確認する。…… 日本国民は、国家の名 誉にかけ、全力をあげてこの崇高な理想と目的を達成することを誓う。」 私には、日本の植民地支配に敢然と抵抗した尹奉吉義士をはじめとした韓国民衆の遺志 が、両国憲法を繋ぎ、平和連帯の基礎を形作っているように思えてならない。 私自身、その営々とした系譜に連なる尹圭相名誉会長、李佑宰会長をはじめとする韓国 の皆様との15年に亘る相互交流を通じ、尹奉吉義士の平和精神の根本には、農業革命家 としての「生命倉庫」の思想があることを教示された。 東北アジアから戦禍とその火種を取り除く、即ち国·民族を超えた平和的生存権を実現 するには、偏狭なナショナリズムと軍事的緊張の背景にある貧困·格差の是正が必要である と。私は、これを社会民主主義的思想であると受け止める。 生命の尊重と人間らしい幸福の希求は、人間共通の願いであろう。ならば、尹奉吉義士 は対立の存在ではなく、人類融和の存在であるはずである。日本に生きる人々にそれが共 有されるよう、生涯をかけてとりくむ決意である。報告の機会を頂き深く感謝申し上げる。
東アジア平和運動と韓観民主化運動の現在と課題 265 제4 주제 第一主題 동아시아 평화운동과 한국민주화 운동의 현재와 과제 東アジア平和運動と韓国民主化運動の現在と課題 서승(리츠메이칸대학교 전 교수) 徐勝(元立命館大学教授)
동아시아평화운동과한국민주화운동의현재와과제 267266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1. 동아시아의 평화운동 1) 평화운동 평화란 “모든 사람이 온전히 명대로 살고 생을 마치는 것이다.1”라고 한다면 평화를 막는 장 애는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다. 최근에는 빈곤과 기아, 차별과 격차, 질병과 건강, 기후·환 경·자원 문제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평안을 해치는 모든 요인인“구조적 폭력”(Y. Galtung)을 해소한“적극적 평화”라는 개념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그 개념은 너무나도 광범위하여 현 실적 실효성보다는 미래를 위한 프로그램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종래 평화로 여겨져 왔던 것은 폭력과 전쟁이 없고 인간의 생명과 안전이 지켜지고 있는 상태였는데, 이는 지금도 실 제로 유효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평화운동은 주로 반전과 국가 폭력 반대운동으로 집약되어왔다고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평화운동 자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권력과 권위로부터 상대적으로 자립한 인민의 등장을 전제로 전쟁을 독접자본간의 필연적 대립·모순으로 보는 제2 인터내셔널이 “모든 침략전쟁을 내전으로!”라는 슬로건 하 에 싸운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일어난 반전운동에서 시작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1 평화란…… “한솥 밥을 먹는다”즉, 모두 솥 하나를 가운데 놓고 둘러 앉아 차별없이 밥을 먹는 것을 의미 한다. …… 평화의 파괴는 불평등에서 기인한다. 김동춘(金東椿), 『韓国の平和主義』 2011年 12月. 동아시아 평화운동과 한국민주화 운동의 현재와 과제 서승 | 리츠메이칸대학교 전 교수 톨스토이안과 기독교적인 신조에 근거하는 인도주의(Humanism)적, 박애주의적 내지는 종교 적 반전 평화운동도 일정한 역할을 다했으나, 근대의 전쟁을 제국주의간의 전쟁으로 보는 사 회주의운동과 연계한 반제평화운동이 20세기 전반의 대중운동으로서의 평화운동의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제국주의침략에 의해 근대사회로 끌려들어간 동아시아의 경우에 평화란 제국주의의 침략과 전쟁과 위협에 의한 노예화, 식민지 지배 등의 직접 폭력 이 없는 상태, 즉 민족해방·독립을 의미했다. 반파시즘·반제국주의 전쟁인 제2차세계대전에서의 연합국의 승리, 특히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제국주의가 패망함에 따라 동아시아 제민족이 해방으로의 희망을 실현하는 듯했으나 냉 전의 시작이 그 희망을 유린하고 각 지역에서 분단과 대립, 민족해방 세력에 대한 탄압·학살 을 낳았을 뿐 아니라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이라는 대규모 열전(熱戰)이 펼쳐졌다. 아시아 ·태평양전쟁의 전범국가, 일본군의 무모하고 부조리한 전쟁과 원폭투하의 타격 으로 피폐해지고 염전(厭戰) 사상이 만연해 있던 일본에 군국주의 해체라는 사명을 띤 미군 이 진주했다. 미군에 의한 “전후 개혁”의 일환으로서 헌법이 개정되고 국민주권, 인권, 평화 주의라는 가치가 부여되어 일본의 대중 속에 반군적인 분위기가 확산되어 갔으나 동시에 냉 전 시작으로 의한 GHQ의 반공산주의 노선이 추진되는 가운데 군국주의 해체의 중절, 구 천 황제국가의 주요한 인적 물적 자원의 부활이 이루어져 과거의 침략전쟁·가해에 대한 반성과 근린 피해국가에 대한 과거청산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오히려 피해의식, 즉 가해자로서의 전쟁의 기억으로부터의 도피라는 형태로 일본의 평화의식이 형성되었다. 그래서 미국으로부 터 강요된 평화주의(불전(不戰)·비무장)에 의해 원폭을 투하한 미국에 대한 가해 책임 문제에 대한 봉인은 동시에 일본 스스로의 동아시아에 대한 가해 책임에 대한 봉인에 대해서도 관대 한 심리적 기제가 작동하여 (일본에 의한, 일본에 대한) 가해자 부재의 피해자들만의 반핵 평화 운동이 전후 일본의 평화운동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일본의 침략·전쟁의 가해자인 동아시아 인민의 주요 부분은 냉전의 벽에 의해 일본과 차단되어 피해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은 채 반공이라는 이름 아래 피해자가 가해자이고, 가해자가 피해자인 것처럼 전도 되어 과거 청산은 묵살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한 점에서도 “이노센트한(순진무구한) 전후 일 본”의 평화주의, 평화운동의 성격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평화운동과한국민주화운동의현재와과제 269268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2)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동아시아의 평화운동 동아시아의 평화운동은 그 사상과 양식 면에서 권력에 대한 반대와 요구가 권리로서 의식 되는 주권자 의식의 보급, 즉 서구 근대의 영향하에 형성되었는데, 동아시아의 평화운동에 보이는 가장 현저한 특징은 서구의 평화운동이 주로 전쟁의 참화에 대한 경종과 박애주의 를 기저로하는 비판이었던 것과는 달리 안중근 의사가 “모든 것이 자주독립할 수 있는 것이 평화이다”라고 갈파했던 것과 같이 우선 제일차적으로 반제민족해방투쟁으로서 싸워왔던 것이다. 아편 전쟁 이후 중국으로의 침략을 효시로 제국주의 침략은 동아시아 전체로 확대되어 갔 다. 침략을 받은 동아시아 인민은 격렬하게 저항하였고, 역시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에 직면 한 일본도 막부에 대해 “존황양이(尊皇攘夷)를 내걸고 극심한 배외주의적 반응을 보였으나 메 이지유신을 계기로 180도 태도를 바꾸어 “양이”는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서구 제국주의를 모 방하여 서구 “문명”신사 제군으로부터 그 폭력에 있어서도 어렷한 “문명국가”로 대접받는 것 을 목표로 “문명개화” “구화주의”에 대해 권력기관·군을 중심으로 위로부터 근대화를 추진 하는 천황제 군국주의의 길로 나아간 것이다. 즉, 후쿠자와(福澤)가 “중국과 조선을 대하는 법도 이웃 나라라는 이유로 특별히 인사할 필요 없다. 마땅히 서양인이 이들을 대하는 식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2”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한반도를 무대로 청일·러일전쟁을 하고, 홋카 이도(北海道), 오키나와(沖縄), 타이완(台湾),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따르게 하고, 1910년의 한 국병합에 의해 일본은 서구열강으로부터 어엿한 제국주의국가로서 인증을 받아 메이지 정부 의 최대 외교 과제였던 “조약 개정”을 이루어내게 된 것이다. 더욱이 서구로부터 침략·지배의 대상으로 타자화된 “아시아”라는 역사·정치적 지역개념 을 일본은“동아시아”라는 일본 중심의 지역 질서 개념으로 바꾸어 흥아, 대아시아주의, 대동 아공영권, 대동아성전 등의 명목하에 동아시아의 침략·지배를 추진해 나가면서 서구를 향 해서는“문명”, 동아시아를 행해서는 “야만”이라는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국가로 변모해 갔던 2 “우리나라는 이웃나라의 개명(開明)을 기다려 함께 아세아를 일으키는 것을 유예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 대오를 벗어나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進退)를 함께 하고, 중국, 조선을 대하는 법도 이웃 나라라는 이유 로 특별한 인사를 할 필요도 없다. 서양인이 이들을 대하는 식에 따라 처분할 따름이다. 악우(惡友)를 좋아 하는 자는 함께 악우를 면치 못할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아세아 동방의 악우를 사절하는 바이다.” 후쿠자 와 유키치(福澤諭吉)『脱亜論』 것이다. 아편전쟁이라는 가장 추악한 제국주의 침략에 직면한 중국인민은 거세게 저항했는데, 동 시에 중국의 운명을 자신들의 운명과 동일화한 동아시아 제민족의 연대·공동투쟁이 전개되 었다. 조선인과 중국인, 베트남인 등은 중국국민당의 황포군관학교에서 중국인과 함께 절차 탁마하였고,‘아리랑의 노래’의 김산은 중국혁명에 직접 참가했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사랑 이라는 폭탄”을 가슴에 품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의열단, 동방무산자연맹, 그리고 만주에서 의 항일연군(抗日聯軍) 등을 통해 조선인, 중국인, 베트남인 등은 공동으로 반제평화운동을 전개했다. 이 동아시아의 반제운동의 고양과 호응하는 형태로 연안에서의 일본인민반전동맹 과 같은 침략자 측에서의 반전·평화운동도 나타났다. 이 시기의 무산자운동은 인터내셔널한 것이었는데 각지의 정치 투쟁에서 문화 투쟁까지 민족과 국경을 넘어 투쟁이 전개되어 항일 투쟁으로 합류되어 갔다. 3) 제2차 세계대전 개전후의 동아시아의 평화운동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제가 패배함으로써 일본의 군국주의 해체는 반파시즘 전 쟁을 한 연 합국의 총의로 확인되어 카이로 선언·포츠담 선언이 실행에 옮겨졌 다. 1946년 맥아더 GHQ사령관의 지시로 대일본제국헌법이 개정되고, 일본국헌 법이 성립되어 이듬해부터 시 행되었다. 여기에는 주권재민, 상징천황제, 전쟁과 전력의 포기, 남녀평등권 등의 이념이 포 함되었다. 또한 개혁의 주요 내용으로 전쟁협력자의 공직 추방, 재벌 해체, 농지개혁 등이 포 함되었다. 맥아더가 주 도한 헌법개정에서 헌법 9조는 전쟁체험에 지친 일본인에게 내면화 되어 전후 일본 정치를 규정하는 중대한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냉전이 시작되면서 일본점령 군을 실질적으로 담당한 미국의 세계패권추구에 대한 욕망이 점령 정책을 크게 왜곡했다. 천 황의 전쟁책임 면제, A급전범의 사면과 등용, 레드 퍼지(공산주의자 추방), 한국전쟁에 따른 군 수공장의 재가동, 자위대 창설, 역코스라고 불리는 개혁정책 취소가 있었다. 그래서 기시 노 부스케(岸信介)로 대표되는 A급 전범 출신의 확신범적 군국주의자들은 반공을 내걸고 철저한 친미주의자로서 면종복배(面從腹背)하면서 정식으로 정치 표면에 복귀한 것이다. 미국의 두 터운 신임을 받은 기시는 마음속으로 대동아성전의 정당성과 도쿄 재 판과 미국정책의 부당 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자인 척 하면서도 내심은 매우 냉소적이 었다. 기시는 1946년 스가모(巣鴨) 전범형무소 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동아시아평화운동과한국민주화운동의현재와과제 271270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일본은)역겨운 민주주의, 자유주의에 물들어 …… 무엇 하나 스스로 사고하 고 스스로 창 조하고 스스로 일어서서 스스로 행하는 기백과 긍지를 지니고 있 지 않다.”(1946. 8. 10).3 전 후 일본은 기시에서 아베(安部)에 이르기까지 안으 로는 일본군국주의 부활의 야망을 품고 있 으면서도 밖으로는 역겨운 자유, 민주주의를 내세워 철저한 대미 추종을 가장한 분열증적 정 치가들에게 떠맡겨져 왔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율배반적인 행동은 미국을 배신하는 것이라 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자유,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밖을 향해서는 가장 난폭한 전쟁 국가로서 군림해 온 미국 자체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후 일본의 평화운동은 원폭 피폭 체험을 바탕으로 비핵을 주장하는 비핵 평화 운동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으며, 비핵 평화도시 선언을 한 지자체는 2016년 10월 10일 시점에서 1,741개 시정촌(市町村) 중에서 1,630개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일본은 평화로 가득해 보이고, 또한 일본인은 주관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 있지만 우선 일본국민의 대 다수는 거의 “두 번 다시 전 쟁은 질색이다.”라는 비전(非戰)의식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대다 수가 천황제, 야스쿠니신사, 오키나와 미군기지 존치에 찬성을 하고 있으며, 북조선핵·미 사 일 문제에 대한 무력 해결에 대한 지지가 세계에서 가장 높다.4 헌법 9조에 의한 착시현상 도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일반적으로 일본국민은 일본은 평화로 우며, 평화국가라고 생각 하고 있는데 일본은 미일안전보장조약과 주일미군과 핵 우산으로 감추어지고 안으로는 자위 대라는 “군이 아닌 세계 유수의 군사력”에 의해 채워져 있는 중무장국가이며, 전후 일관되게 아시아의 독재정권을 지지·지원해왔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일부 자각한 일본인은 재일조선 인과 함께 한 국전쟁 반대 투쟁으로 스이타·히라카타 사건(吹田·枚方事件)에 맞섰다. 일본의 반미·반미군 기지운동은 1950년대부터 공산당 등을 중심으로 맞서 전개되어 왔으나 원자 폭탄과 수소폭탄 금지 운동과 같이 중소논쟁의 영향으로 운동이 분열되어 동력을 잃어갔다. 또한 1960년대의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은 일본에서도 종래의 조직적 투쟁 양식과는 다른, 개 인을 단위로 하는 시민 운동으로 전개 되어 미국을 군사사(軍事史)상 첫 패배로 몰아넣은 세계 적 반전평화운동의 일 단을 담당했다. 3 原彬久『岸信介』岩波新書、1995、p. 126 4 갤럽이 9월 20일부터 10월 1일에 걸쳐 미국, 러시아, 한국, 일본 등 14개국에서 세계여론조사(GIA)를 실시 한 결과 가장 “평화적 해결”을 선호한 것이 러시아(96%)와 독일(92%)미국(75%)이나 한국(66%)에 서도 “평화적 해결”이 압도적이었으나 일본에서는 약 과반수가 군사적 해결을 선호하여 세계에서 단연코 선두에 섰다. https://jp.sputniknews.com/images/417/77/4177713.jpg 1960년대 중반부터 전개된 오키나와 반환운동(본토 복귀 운동)의 의도는 반기지·반전이었 으며, 미군기지화되고 있는 오키나와의 해방이었을 터인데 운동이 고 향 회복을 의도하는 우 익국가주의로 회수되어 주오키나와 미군기지와 핵병기는 유지되고 오키나와는 계속해서 태 평양의 중심 지역, “기지의 섬”으로서 오늘 날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에서 가장 첨예화된 반 기지·평화운동의 중심을 담당 하면서 과거 회귀를 의도하는 일본의 가시가 되고 있다. 그러 나 오키나와가 목 표로 하는 “평화의 섬” 실현은 일본정부의 확고한 미일안전보장조약 우선 정 책과 “섬의 문제”로서 일본국민 전체와는 문제의식이 공유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오키 나와 문제는 미일과 동아시아의 모순 대립의 접점에 위치하여 미일의 변혁과 대 동아시아 안 전보장정책의 전환이 없는 한 해결은 곤란하기 때문에 여전히 고난의 싸움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전후 일본평화운동에서 반핵 평화운동과 함께 중핵을 담당한 것은 헌법 9조를 지키는 호 헌운동 혹은 헌법 9조 운동인데, 최근의 “헌법 9조 운동”과 전쟁법 반대운동으로까지 이어지 는 것으로, 아베의 개헌·군사화 노선에 대한 강경한 저항 노선을 형성하고는 있다. 다만 상 술한 희망으로서의 9조 평화주의와 동아시아 현실의 괴리를 메우는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에 일본 국내에서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전망을 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일본의 평화 주의라는 픽션을 벗겨내고 리얼한 출발점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일본의 과거청산운동인 일본군 성노예 문제, 강제연행,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 야스쿠니 강제 합사, 역사교과서·역사 인식, 식민지 지배 책임 등은 모두 일본의 평화 세력 이, 매우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역할을 해온 운동 분야이다. 재일조선인 운동은 오랫동안 한 반도 통일·평화운동과 민족교육권리운동·차별반대운동으로 일본의 운동에도 커다란 영향 을 끼쳐왔으나 일본정부 및 국민의 우경화 속에서 상당히 어려운 소수자로서의 싸움을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동아시아는 상술한 바와 같이 냉전 가운데 열전이 강요되고, 반공이라는 이름 아래 각지 에서 독재정권이 권력을 장악하여 평화를 열망하면서도 평화로의 접근을 저지당해 왔으나 냉전이 붕괴됨에 따라 진영의 논리가 이완됨과 함께 각지에서의 민주화가 꽃피게 되었다. 1975년, 베트남 해방 전쟁의 승리가 냉전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이어 타이, 필리핀, 인도네시 아, 타이완 등에서의 군사독재의 붕괴와 민주화라는 진전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1980년, 광주사건을 분수령으로 한 한국의 민주화 과정은 매우 격렬한 것이었다.
동아시아평화운동과한국민주화운동의현재와과제 273272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2. 한국 민주화의 현재 1) 한국 민주화의 결정적 계기를 만든 광주학살 사건 1960년 4月의 학생봉기는 부정부패가 횡행한 독재정권 타도라는 점에서 현대 한국 민주화 의 원점을 새긴 사건이었는데 한국 군부의 민간인 학살인 광주사건은 한국사회에 큰 충격을 던짐과 동시에 “신성한 국방의 기둥인 한국 군부”와 “한국의 구세주 미국”이라는 신화가 붕 괴되는 계기를 열었다. 광주사건이 가져온 결과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지적할 수 있다. ① 외적(북조선)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방위해야 할 한국군이 국민에게 총을 들이대고 학 살함으로써 해방후 줄곧 국민에 대한 억압의 주체였던 군사독재의 중핵으로서의 군의 실상이 폭로되어 반독재운동에 윤리적 명분과 동력을 부여했다. ② 또한 군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광주학살 사건의 하수인인 전두환, 노태우가 몰락한 이후 군부의 정치 개입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③ 광주사건의 경험이 시민의 주권자 의식의 고양을 불러와 민주적 절차에 의한 민간정부 를 선출하는 룰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④ 구세주 미국이 배후에서 신군부를 조종하여 광주시민을 학살하게 만들었거나 적어도 묵인한 혐의가 있어 반미라는 터부가 무너져 빈발했던 학생들의 미국문화광보원 사건 을 통해 볼 수 있듯이 반미자주운동이 고양되었다. ⑤ 이를 통해“북조선을 바로 아는 운동”을 거쳐 자주적 평화통일 운동이 전개되었다. ⑥ 광주사건 진상규명운동(5월운동)이 “진상규명, 사죄, 책임자 처벌, 배상, 교육·기념”이 라는 과거 청산 5원칙을 수립하여 한국의 과거청산운동의 기선을 잡음으로써 제주4·3 사건,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 노근리 학살 사건,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상 규명·명예회복법 제정과 진상규명위원회로의 길을 열었다. 또한 실종·의문사, 수사 기관의 고문 문제, 군대 내부의 인권문제, 정보부의 조작·모략 의혹 사건, 삼청교 육대 문제 해명, 나아가 일본군 성노예, 강제연행, 친일파 문제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 인 과거 청산·진상규명 운동에 불을 붙였다. ⑦ 탄압당한 광주시민은 사건 직후부터 신속하게 정의회복 투쟁에 착수하여 “5·18광주민 주화운동 관계자 보장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진상규명에 착수하여 피해자 구제를 했을 뿐만 아니라 가해자인 전두환, 노태우를 법정에 세웠다. 대규모 국가 폭력에 의한 탄압 사건에서 10년이 되지 않아 정의가 회복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⑧ 전체적으로 반군부, 반국가 폭력, 정의 회복 운동으로서의 과거청산 운동, 국민주권과 정당정치의 활성화·민주화 등이 강력한 평화운동이 되어 그 후 김대중, 노무현의 개혁 정권 탄생과 남북화해·통일정책 전개의 전제를 만들어냈다. 2) 촛불 혁명과 촛불 정부 한국민주화의 과정은 4·19학생봉기, 광주민주화 항쟁이라는 새로운 기원을 여는 시기를 거 쳐 작년 연 1700만 시민을 집결시킨 촛불 행동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촛불 행 동은 대통령 탄핵·파면·투옥, 정권 교체에 이르는 정치 변동을 평화적으로 이루어내었다는 점에서 “촛불 혁명”이라고까지 평가되고 있다. 다만 아직 사회구조의 전면적 전환을 이룩했 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혁명”이라는 이름은 지나치게 성급한 감이 있으나 놀랄만한 변혁 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몇몇 특징을 정리해 보면 우선 무엇보다도 촛불 행동을 통해 민주주의의 근간인 “국민주권”내지는 “주권의식”이 체험적으로, 사상적으로 확인되고 참가 자들의 내면의 가치로 정착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기존의 조직과 정당에 의존하지 않고 참 가자들의 자발적 평화 질서 형성과 비폭력에 의한 시위·항의를 매우 성공적으로 이루었다는 것이다. 셋째로 남녀노소를 망라하여 아주 다양한 시민이 창의적으로 집회와 시위라는 정치 과정에 축제와 문화 표현으로 참가할 수 있음을 보여준 점이다. 마지막으로 촛불 항쟁을 통 해 대통령 탄핵뿐만 아니라 세월호 사건 규명을 비롯한 사회정의 회복에 관한 문제에 탄력을 돋운 것이다. 따라서 촛불 행동 결과 선출된 문재인 정부 자체가 민주주의의 표현이자 평화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기대되었다. 3) 문재인 정부와 한반도 전쟁 위기 대통령선거에서 문재인 후보가 승리함으로써 촛불 정권이 탄생했다. 문정부가 발족되자마자 청와대 개방, 대통령 경호의 파격적 간소화, 광주 사건 피해자에게 다가서는 행동, 신선한 인 재 발탁 등, 비권위주의적이고 신선한 행보에 많은 시민의 기대가 부풀었다. 그러나 때마침 집중적으로 연속된 북한의 핵 ·미사일 실험과 “미국 제일”을 내세우는 보수적인 포퓰리스 트, 트럼프 대통령, 나아가 일본의 군사화·대국화를 목표로 하는 아베 정권과의 사이에서 긴
동아시아평화운동과한국민주화운동의현재와과제 275274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장이 고조되어 전쟁 위기까지 현실화되고 있는 가운데 문정권의 입지는 매우 좁아졌다. 먼저 사드 문제에 있어서 대통령 선거전에는 설치 반대를 주장했다가 선거중에는 선거후 에 검토하겠다고 하여 환경평가를 포함한 적정한 절차를 준수할 것을 내세웠다. 지역주민의 격렬한 반대 운동을 무시하고 박근혜 정권이 고고도미사일방위시스템(THAAD) 2기를 기습 배치한 것에 비판적이었던 문정권은 6월의 방미에 앞서 급거 창고에 보관중이던 사드 4기의 “임시 배치”를 강행했다. 이에 대하여 해당 지역은 물론 사드 배치 반대 운동을 지지해 왔던 종교 단체와 평화운동 활동가들이 정면으로 반발하였고, 중국은 사드에 일체화되어 있는 밴 드 레이더가 동아시아의 군사 균형을 파괴하고 자국의 안전 보장에 중대한 위협을 주는 것이 라고 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문정권은 사드의 기습 배치를 강행함으로써 스스로의 지지 세력 인 평화운동 세력과의 사이에 대립을 불러왔고, 자주 외교의 중요한 요인인 중국과의 관계를 악화시켰으며, 나아가 북한과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는 의미에서 이 행동은 참신하고 파 격적인 국내정치의 행보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외교·안전보장·남북문제에서는 판에 박 힌 대미 종속적 행동밖에 취하지 못함을 시사하고 있다. 당초 문재인 정부의 외교·안전보장·남북관계는 노무현 정부의 정책을 계승하여 현재 주 한미군이 장악하고 있는 한국군에 대한 전시 작전지휘권 반환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으며, 대북한정책에서도 김대중 정권 이래의 화해·협력 정책 계승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전에는“대통령에 당선되면 먼저 평양부터 방문 하겠다.”라는 대담한 발언을 하여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 완전히 막혀 있던 남북관계를 타 개할 것으로 기대를 걸게 했다. 그러나 내외의 강력한 압력 하에 획기적인 남북 화해의 시나 리오는 맥없이 무너지고, 워싱턴을 먼저 방문했을 뿐만 아니라 트럼프의 대북한 무력 공격을 포함한“모든 카드”론을 지지하며 제재·“최대의 압력”으로 미일과 보조를 맞추었다. 북한에 대해서“핵 포기를 전제로 한 대화”를 제안하기도 하고,“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전쟁에는 반 대한다”고 표명하면서“한반도 문제의 핸들은 내가 잡겠다”고 미국에 대해 자립·자주를 어필 하기도 했으나 북한은 물론이거니와 미국이나 일본도 거의 상대해 주지 않는 상황이다. 먼저 북한은 그간의 핵·미사일 실험 성공을 빌미로 핵보유국으로서 인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거의 미국에 대한 핵억지력을 확보했다”고 표명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한국은 대북 카드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아 대 북한의 미일 공조 내지는 한미일동맹에 의한 최대 압력에 기대고 있는 실정이다. 북조선이 제재와 공갈로 핵개발을 포기할 것으로 예측하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원래 역사적으로 제재에 굴복하여 붕괴된 국가는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고 북한이 핵개발을 고집하는 것은 체재 유지, 안전보장을 걸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히 수 수방관하여 자멸을 선택할 리 만무하다. 근본적인 문제는 한국전쟁이 정전 협정으로 휴전된 상태로 남아 있어서 법·정치적으로 여 전히 종결되지 않았으니 불안정한 정전 상태에 종지부를 찍고 평화와 안전보장을 확보하기 위해서 미국과의 사이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하자는 것이 북한의 요구이다. “평화조약을 체결 하면 핵을 포기하겠다.”라는 고 김일성 주석의 유훈을 내세워 북한은 조용히 유언무언의 대 미 교섭을 추진하고 있다고 하겠다. 4) 동맹의 도착을 극복하고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으로 한미일동맹이라고 하면 3국이 자립적이고 대등한 동맹관계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3국은 그 정치·군사적은 물론이고 자원과 국력 면에서도 매우 비대칭적인 관계이다. 일본은 미일안전보장조약에서 4만 가까운 미군을 주둔시키고 있으며, 안전보장조약에 따 른 주일미군지위협정(행정협정)에 의해 주일미군에 대한 사법적 관할권을 보유하고 있지 않 다. 즉, 주일미군과 미군기지·시설, 미군함선은 치외법권을 누리고 있다. 한국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이 자국군의 지휘권을 미군에게 맡기고 있는, 세계에서도 유례가 드문 나라이 다. 즉, 한미일동맹(공조)는 대등한 주권국가간의 동맹이라고 할 수 없으며 미군의 군사패권 에 추종하는 군사주권 부재 국가들을 통솔하고 있는 미국의 동아시아 지역 군사지배시스템 이라고 할 것이다. 예를 들면 문대통령은 “한반도에서의 군사 행동은 한국만이 결정할 수 있 고, 누구도 한국의 동의 없이 군사 행동을 결정할 수 없다”(2017년 8월 15일)고 말하고 있지만 미국이 전쟁을 시작하는데 있어서 한국 정부의 말에 좌우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또 한 한반도 유사시에 일본군의 한반도 상륙에는 “한국 정부의 허가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이 미 한반도 주변의 미일군사 연습에 일본이 참가하고 있으며, 미국이 요구(명령)하면 일본이 한국의 승인을 물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8월초에 “(전쟁에서) 사람이 죽는 것은 저쪽이지 이쪽이 아니다”, 9월에는 국제연합총회에서 “북한을 파괴하겠다”고 국제연합헌장 및 세계인권선언 위반인 제노사이 드를 시사하는 인종주의적 발언을 하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전쟁은 “적의 전투력 파괴를 목 적으로 하는” 것이며, 민간인을 포함한 무한정적, 무차별적인 살상은 국제법이 금하고 있는 바이다. 무엇보다도 한국 정부가 자국민과 동족의 인종주의적 말살을 시사하는 트럼프의 발
동아시아평화운동과한국민주화운동의현재와과제 277276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언에 침묵하고 항의도 하지 않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며 촛불 정권이라는 아이덴티티가 의문 시되는 대목이다.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와 같은 우익·인종주의자, 여성차별 주의자, 예측불가능한 트럼프에 의존하는 것은 촛불 정신에 반할 뿐 아니라 한국 개혁 정권 의 전통적인 대북정책에도 어긋나는 것으로서 김대중 정부의 대북 화해·포용 정책의 중핵을 담당했던 인사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는 형편이다. 물론 소수 여당의 불안정한 정권 운용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과 강력한 부수 야당 및 보수 여론이 존재하기 때문에 현재는 보수 우익 이 격렬하게 저항하는 안전보장·미국 문제는 종전의 정책을 답습하고, 전 정권의 여러 적폐 를 정리하고 내년에 있는 지방자치선거에서 이긴 후에 본격적인 정책을 전개할 계획이라고 도 한다. 한국의 미국 숭배 내지는 한미동맹의 우상화는 비이성적 수준인데, 지난 9월 27일 문정인 대통령 특별보좌관은 때마침 수위를 높이는 트럼프의 전쟁위협에 대해 “한미동맹이 무너지는 일이 있어도 전쟁은 있어서는 안된다”라고 발언하여 한국의 보수 미디어·야당으 로부터 맹공격을 받았다. 원래 동맹이란 적의 공격으로부터 안전을 확보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한 것인데 동맹 자체가 홀로 독주함으로써 그로 인해 평화가 희생이 된다면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는 것이다. 반공친미가 절대화·우상화된 한국에서는 주권을 회복하고 자주외교를 전 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현재 한국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미일의 북한 이지메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을 동족 으로 대하고, 미국과 일본에게 북한을 국제사회의 정상적인 구성원으로서 대우하여 협박·군 사 훈련을 즉각 중단하고 대화를 개시할 것을 진언함으로써 몸과 마음을 다하여 한국전쟁의 완전한 종결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생겨나 는 북한과의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교류·화해·협력의 프로세스를 추진해 나아가 야할 것이다. 3. 한국의 평화운동 오랫동안 군사 독재 하에서 신음하고 친일파가 친미파로 바뀌어 모든 분야에서의 헤게모니 를 장악했기 때문에 한국의 평화운동은 매우 곤란한 일이었으나 민주화 과정에서 그 활동의 폭을 넓혀 나갔다. 한국에서 평화 운동은 무엇보다도 우선 학생·지식인 중심의 반독재 민주 화 운동으로 나타났는데 1970년대에 이르러 노동운동, 농민운동, 도시빈민 운동이 싹트게 되었다. 그간에 비합법적인 형태로 통일운동, 반미운동 등이 전개되었으나 박정희 암살로 유 신시대가 종언을 고하면서 각 분야의 운동이 일제히 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먼저 상기 광 주 사건을 계기로 한 반미 자주·통일운동이다. 구체적으로는 오키나와의 반기지운동(한평 반 전지주 모임(一坪反戦地主の会)과 연대한 평택의 미군기지용지 반환운동(오키나와 한국 연대), 미 군 범죄 근절 운동, 경기도 화성의 매향리 미국 사폭장 철폐운동, 평택의 대추리 미군기지건 설 반대 운동,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 반대 운동 등이 있으며, 상기 경상북도 성주·김천의 사드 기지 설치 반대 투쟁 등이 있다. 군관계의 평화·인권 문제로서 2010년 3월의 천안함 폭침 의혹, 병영내의 인권 유린·자살 사건, 양심적 병역 거부 사건 등이 있다. 반전 운동으로 는 1991년 이라크 파병 반전 투쟁, 한국군의 베트남 전쟁에서의 범죄를 사죄하는“미안해요! 베트남”운동이 있다. 통일 운동은 1950년대에는 이승만이“북진통일(北進統一)을 내세워 통일 운동을 “빨갱이” 운동과 동일시했다. 1960년의 4월 학생봉기에 의해 이승만이 추방되자 학생들의 남북학생 연석회의가 제안되었으나 판문접에서의 회합 이틀 전(5월 16일)에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켜 학생들을 탄압함과 동시에 김일성 수상이 제안한 “연방제 통일”을 지지했다고 하여 민족일 보 조용수 사장을 사형에 처했다. 박정희는 “멸공통일”을 내세워 “평화통일론”을 범죄시함과 함께 “선건설 후통일(先建設後統一)을내세워 민간에서 솟아오르는 통일 논의를 통일부에 가 두어넣고 탄압했다. 1971년 남북공동의 “7·4공동성명”을 발표하여 통일문제에 대한 획기적 인 이니셔티브를 기대하게 했으나 결국 중국과의 갑작스런 화해를 연출한 키신저의 밀사사 건에 대한 대응이자 영구 집권을 위해서 초헌법적, 파쇼적 독재체재인 “유신체재”를 실시하 기 위한 페인트 모션이었음이 밝혀졌다. 박정희 암살 후 재야 운동에서 담당했던 통일 운동 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전개되어 김대중 정부가 되어 남북 “6·15공동선언”으로 결실을 맺었 다. 1945년 민족 해방이 분단에 의해 왜곡되어 버린 남북한에게 있어서 통일이야말로 민족 해방·독립운동의 완성이다. 최근 한국인의 통일 의식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변화되었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한민족의 통일은 진정한 독립·민족해방이자 한국 평화운동의 핵이라 하 겠다. 인권운동은 국가 폭력의 자의적인 발동을 제약하는 것으로서 평화 운동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한국에서 인권이 일반적으로 의식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유신체제”하 에서 대량의 정치범이 투옥되고,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이 “인권외교”를 내세워 박정희 독 재 정권에 개입하기 시작한 후부터의 일이다. 국가보안법,반공법 등 정치형법이 존재하는
동아시아평화운동과한국민주화운동의현재와과제 279278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한 “정치적 신념에 의거한 행위가 실정법에 저촉되어 단죄되는”정치범은 없어지지 않으며, 1970년대, 80년대에서 민주화 실천 가족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정치범 석방, 고문 폐지, 의문 사 규명 요구 운동이 인권운동의 중심이 되어 추진되었다. 민주화 이후는 노동인권, 여성인 권, 병영내의 인권, 학생·아동의 인권 등으로 확대되어 차별·성희롱 문제를 중심으로 “일상 의 폭력”의 문제로 확산되고 있다. 민족해방·독립운동과 관련하여 중요한 과제는 친일파 청산이다. 이는 민족문제연구소가 1970년대부터 요구해 온 문제인데, 노무현 정권기에 정부 차원에서 친일행위조사위원회가 설립되어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간행한 일은 친일파 청산의 중요한 기원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보수파의 위기감을 불러일으켜 “친일의 어디가 나쁜가?”, “친일은 애국이다”라며 정면으로 정색하며 반문하고 나오는 등 해방후 70년이 지 나도 친일파 청산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문제로 남아있다. 일본군 성노예(위안부) 문제의 고발은 여성인권 문제뿐 아니라 동아시아를 침략한 일본군 의 야만·잔인함과 일제의 식민지 지배의 반인륜성을 폭로하여 세계적으로 놀라울 정도의 반 향을 불러일으켰다. 진정한 과거 청산을 거부하는 일본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은폐하기 위 해 열을 올리고 있으나 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역사 청산 방식의 모델을 만들어 왔으며 일본 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 및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여성연대회의”는 평화·인권을 위한 연 대 운동의 규범을 제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4. 동아시아의 평화운동 제2차 세계대전 후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찍이 식민지배를 받은 아시아 여러 민족은 독립·해 방의 희망에 가득차 있었으나 장기간의 항전 끝에 해방을 쟁취한 베트남을 예외로 하더라도 동남아시아와 같이 동서 양 진영의 대결 논리에 편입되어 좌절하 기도 하고, 인도와 같이 분 단과 내부 대립으로 극심한 고통을 경험했다. 중국은 제국주의의 아시아 침략사의 주무대로, 무시무시한 고난의 길을 걸어 어렵게 항일 전쟁과 국공내전에 승리하여 건국을 했으나 내정의 혼란과 중소 대립 등으로 인해 반제국주 의·항일전쟁 승리=평화의 성과를 정리하고 향유할 여유를 갖지 못 했는데 2015년 9월 3일 에서야 북경에서 항일 전쟁 및 세계 반파시즘 전쟁 승리 70주년 행사가 대대적으로 거행되었 다. 그 의의를 시진핑 주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① 근대 이후 외세의 침략에 반대하여 처음으로 쟁취한 완전 승리의 문제해방 전쟁 ② 근대 이후 중대한 위기에 빠져 있던 민족에게 위대한 부흥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전환점 을 확립했다. ③ 중국인민의 항일전쟁은 세계 반파시즘 전쟁의 중요한 부분이자, 동방의 주전 장(主戰場) 이었다. ④ 전세계 인민 앞에 약자가 강자에 승리하는 훌륭한 모델을 만들어냈다. ⑤ 세계평화의 위대한 사업 부분을 차지했다. 먼저, 아편전쟁의 치욕과 그 후 100년에 이르는 제국주의 침략을 이겨낸 것이 항일 전쟁 승리의 커다란 의의이며, 근대 이후 연속된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첫 승리였다. 다음으로 중 국이 강국으로 발전하는 출발점을 마련한 것이며 이것은 세계 반파시즘 전쟁의 동방 주전장 에서의 승리이기도 했다고 정리하고 있다. 중국이 강국으로 부 상하고, 일본이 중국을 의식 하고 경제대국뿐 아니라 군사대국도 목표로 하고 있는 오늘날, 일본은 파시즘 진영의 일원으 로서의 전범국가이고, 중국은 연합국의 일원 으로서 반파시즘 전쟁의 승리자이자, 전범국가 에 대한 심판자임을 상기시켜 역사의 정의와 보편성은 중국측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2014년 2월 27일, 전인대상무위원회(全人代常務委員會)에서 9월 3일을“중국인 민 항일전쟁 승리 기념일(中國人民抗日戰爭勝利記念日)”로 정하고 12월 13일을 “남경 대학살 희생자 추모일 (南京大虐殺犧牲者追慕日)”로 지정했다. 동시에 노구 교사건(盧溝橋事件)(1937년)이 있었던 7월 7일, 유조구사건(柳條溝事件)(1931년) 이 있었던 9월 18일을 일본제국주의 관련 4대 기념일로 지정했다. 2001년, 남아 프리카공화국 다반에서 개최된 국제연합 주최“반인종주의·차별 철 폐를 위한 세계 회의”에서 제기된“노예제와 식민지지배는 인도에 반하는 범죄(Crime against Hum anity)”라는 명제를 통해서도 동아시아에서의 일제의 범죄는“인도에 반하는 범 죄”임이 분명하다. 동아시아의 평화 과제는 무엇보다도 근대 이후의 제국주의 침 략·전쟁·식민지 지 배 잔재의 청산과 재발 방지이다. 자발적이고 비폭력적인 민중의 주권 행사에 의한 촛불 행동은 동아시아에서의 민주 주의 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러나 한반도·동아시아의 평화 실현은 아직도 도 달되어야만 하 는 목표이다. 동아시아 평화의 근본은 제국주의의 배격, 제국주의 지 배에 기인하는 모든 부
280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東アジア平和運動と韓国民主化運動の現在と課題 281 (負)의 유산·부의 기억을 청산하는데 있다. 동아시아 여러 민족은 근대사의 원점으로 돌아가 반제국주의의 평화연대를 추진하고 촛불 민주주 의와 평화주의의 상승 효과를 얻기 위한 운 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는 동아 시아 국제정치의 교차점이며, 동서남북 대립의 최 전선이다. 이를 돌파해야만 동아 시아의 해방, 평화가 가능하다. 장기간의 독재 통치와 이중 삼중의 억압이 촛불 행 동을 낳은 것처럼 여기에서 동아시아 평화가 태어날 가능성이 존재한 다. 그렇게 되 어야만 촛불 혁명이 완성되는 것이다. 1. 東アジアの平和運動 1) 平和運動 平和とは、「全ての人が十全に生を全うすることである」1 とするなら、平和に対する障碍は 極めて多岐であり、近年には、貧困や飢餓、差別や格差 、疾病や健康、気候·環境·資源 問題にいたるまで人間の平安をかく乱する全ての要因である「構造的暴力」(Y. Galtung)を解 消した「積極的平和」概念が提示されている。しかし、その概念はあまりにも広範であり、現 実的実効性よりは未来のためのプログラム的性格を持っている。そもそも従来、平和として 考えられてきたのは、暴力と戦争がなく、人の生命と安全が守られている状態であり、それ は今も実際に有効な概念であると言えよう。 したがって、これまでの平和運動は主に反戦と国家暴力反対運動に集約されてきたとい えよう。歴史的には平和運動自体が成立するためには、国家の権力や権威から相対的に自 立した人民の登場を前提とし、戦争を独占資本間の必然的対立·矛盾と見る第2インター ナショナルが『全ての侵略戦争を内戦に!』のスローガンのもとに闘った第1次世界大戦にお 1 平和とは… 「一つ釜の飯を食う」、 つまりみんな一つ釜を囲んで分け隔てなく飯を食うことを意味する。…平 和の破壊は不平等に起因する。 金東椿『韓国の平和主義』2011年12月。 東アジア平和運動と韓国民主化運動の現在と課題 徐勝 | 元立命館大学教授
282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東アジア平和運動と韓国民主化運動の現在と課題 283 ける反戦運動にはじまるとも言えよう。もちろん、トルストイアンやキリスト教的な信条に 根ざす人道主義(Humanism)的、博愛主義的ないしは宗教的反戦平和運動も一定の役割 を果たしたが、近代の戦争を帝国主義間の戦争と見る社会主義運動と連携した反帝平和 運動が20世紀前半の大衆運動としての平和運動の主宗をなしていた。なかんずく、帝国 主義侵略によって近代社会に引き込まれた東アジアにとって、平和とは、帝国主義の侵略 や戦争や威嚇による奴隷化、植民地支配などの直接暴力が無い状態、つまり民族解放· 独立を意味した。 反ファシズム·反帝国主義戦争である第2次世界大戦での連合国の勝利、特に東アジア においては、日本帝国主義の敗亡によって、東アジア諸民族は解放への希望を実現するか に思われたが、冷戦の始まりがその希望を蹂躙し、各地域で分断と対立、民族解放勢力 への弾圧·虐殺を生み出しただけでなく、朝鮮戦争とベトナム戦争という大規模の熱戦が行 われた。 アジア·太平洋戦争の戦犯国家、日本軍の無謀で不条理な戦争と原爆投下の打撃によっ て疲弊し、厭戦気分が蔓延していた日本に、軍国主義解体という使命を帯びた米軍が進駐 した。米軍による「戦後改革」の一環として憲法が改正され、国民主権、人権、平和主義と いう価値が付与され、日本の大衆の中に反軍的な雰囲気が拡散していったが、同時に冷戦 の始まりによるGHQの反共主義路線の推進の中で、軍国主義解体の中絶、旧天皇制国家 の主要な人的物的資源の復活が行われ、かつての侵略戦争·加害に対する反省や近隣被害 国に対する過去清算は胡散霧消し、むしろ被害意識、つまり加害者としての戦争の記憶か らの逃避という形で日本の平和意識は形成された。そこで、アメリカから強要された平和主 義(不戦·非武装)によって、原爆を投下したアメリカに対する加害責任問題の封印は、同時に 日本自らの東アジアに対する加害責任の封印にも寛容である心理的機制が作動して、(日本 による、日本に対する)加害者不在の被害者たちだけの反核平和運動が戦後日本の平和運動 の中心を占めることになった。それに加えて、日本の侵略·戦争の被害者である東アジア人 民の主たる部分は冷戦の壁によって日本と遮断され、被害者の顔が見えぬまま、反共の名 のもとに被害者が加害者であり、加害者が被害者であるかのごとき倒錯が行われ、過去清 算は押しつぶされざるをえなかった。そこからも「イノセントな戦後日本」の平和主義、平和 運動の性格が形成されたと言えよう。 2) 第2次世界大戦以前の東アジアの平和運動 東アジアにおける平和運動はその思想と様式において、権力に対する反対や要求が権利 として意識される主権者意識の普及、すなわち西欧近代の影響の下に形成されたが、東 アジアの平和運動のもっとも顕著な特徴は、西欧の平和運動が主に戦争の惨禍に対する 警鐘や博愛主義を基底とする批判であったのとは異なり、安重根義士が『全てが自主独立 できることが平和である』と喝破したように、第一義的に反帝民族解放闘争として戦われた ことである。 アヘン戦争以来、中国への侵略を嚆矢として帝国主義侵略は東アジア全体に拡大して いった。侵略を受けた東アジア人民は激しく抵抗し、同じく西欧帝国主義の侵略に直面し た日本も幕末において「尊皇攘夷」を掲げて激しい排外主義的反応を示したものの、明治 維新を契機に180度態度を変え、「攘夷」は弊履のごとく投げ捨てられ、西欧帝国主義を模 倣し、西欧「文明」紳士諸君から、その暴力においても一人前の「文明国家」として遇せられ ることを目指す「文明開化」「欧化主義」に就き、権力機関·軍を中心に上から近代化を進め る天皇制軍国主義の道へと歩を進めたのである。つまり、福澤が「其支那朝鮮に接するの 法も隣國なるが故にとて特別の會釋に及ばず、正に西洋人が之に接するの風に從て處分す 可き」2 と述べているように、朝鮮半島を舞台に日清·日露戦争を行い、北海道、沖縄、台 湾、朝鮮を植民地として切り従え、1910年の韓国併合によって、日本は西欧列強から一人 前の帝国主義国家として認証されて、明治政府の最大の外交課題であった「条約改正」をな しとげたのである。 さらに西欧から侵略·支配の対象として他者化された「アジア」という歴史·政治的地域概念 を日本は「東アジア」という日本中心の地域秩序概念に置き換え、興亜、大アジア主義、大 東亜共栄圏、大東亜聖戦などの名の下に、東アジアの侵略·支配を進めて行い、西欧に向 けては「文明」、東アジアに向けては「野蛮」のヤヌースの顔を持つ国へと変貌して行ったので ある。 2 「我國は隣國の開明を待て共に亞細亞を興すの猶豫ある可らず、寧ろその伍を脱して西洋の文明國と進退を 共にし、其支那朝鮮に接するの法も隣國なるが故にとて特別の會釋に及ばず、正に西洋人が之に接するの 風に從て處分す可きのみ。惡友を親しむ者は共に惡友を免かる可らず。我は心に於て亞細亞東方の惡友を 謝絶するものなり」 福澤諭吉『脱亜論』
284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東アジア平和運動と韓国民主化運動の現在と課題 285 アヘン戦争という最も醜悪な帝国主義侵略に直面した中国人民は激しく抵抗したが、同 時に中国の運命を自らの運命と同一化した東アジア諸民族の連帯·共同闘争が進められ た。朝鮮人と中国人、ベトナム人などは、中国国民党の黄浦軍官学校で中国人と共に切磋 琢磨し、「アリランの歌」の金山は中国革命に直接参加した。安重根義士の壮挙、「愛という 爆弾」を胸に抱いた尹奉吉義士の義挙、義烈団、東方無産者同盟、そして満州での抗日聯 軍などで、朝鮮人、中国人、ベトナム人などは共同で反帝平和運動を展開した。この東ア ジアの反帝運動の高揚と呼応する形で、延安における日本人民反戦同盟のような、侵略者 の側からの反戦·平和運動も現れた。 この時期の無産者運動がインターナショナルなものであり、各地の政治闘争から文化闘争 まで、民族と国境を越えて闘われ、抗日闘争へと合流して行った。 3) 第2次世界大戦開戦後の 東アジアの平和運動 第2次世界大戦における日帝の敗北で、日本の軍国主義解体は、反ファシズム戦争を戦っ た連合国の総意として確認され、カイロ宣言·ポツダム宣言は実行に移された。1946年、 マッカーサーGHQ司令官の指示で大日本帝国憲法が改正され、日本国憲法が成立し、 翌年から施行された。そこには主権在民、象徴天皇制、戦争と戦力の放棄、男女同権な どの理念を盛り込んだ。また改革の大きな柱として戦争協力者の公職追放、財閥解体、 農地改革などが含まれた。マッカーサーが主導した憲法改正で、憲法9条は戦争体験に倦 み疲れた日本人に内面化され、戦後日本政治を規定する重大なファクターとなった。しか し、冷戦の始まりで日本占領軍を実質的に担ったアメリカの世界覇権追求の欲望が占領政 策を大きく歪曲した。天皇の戦争責任の免除、A級戦犯の赦免と登用、レッドパージ、朝 鮮戦争にともなう軍需工場の再稼動、自衛隊の創設、逆コースと言われる改革政策の取 り消しがあった。そこで岸信介に代表されるA級戦犯出身の確信犯的軍国主義者たちは、 反共を掲げ徹底的な親米主義者として面従腹背しながら政治の表舞台に返り咲いたのであ る。アメリカの厚い信任を受けた岸は、心中、大東亜聖戦の正当性と、東京裁判とアメリ カの占領政策の不当性を疑わなかった。表面では自由民主主義者を取り繕いながら、内 心は極めて冷笑的であった。岸は1946年、巣鴨の戦犯刑務所で次のように記している。 『(日本は)歯の浮く様なる民主主義、自由主義にかぶれ …… 何一つ自ら思考し自ら創造し 自ら立ち自ら行うの気魄と矜持とを有せず』(昭21.8.10)3。戦後日本は岸から安部にいたる まで、内に日本軍国主義復活の野望を秘めながら、外には歯の浮くような(……)自由民主 主義を掲げ徹底した対米追従を装う分裂症的政治家たちによって担われてきたのである。 このような表裏背反した行動はアメリカを裏切るものだとも言えるかもしれないが、実は自 由、民主主義を掲げながら外に向かっては最も粗暴な戦争国家として君臨してきたアメリ カ自身の姿を映すものといえよう。 戦後、日本の平和運動は原爆の被爆の体験を基に非核を訴える非核平和運動が中心を 占めており、非核平和都市宣言をした自治体は、2016年10月10日の時点で、1,741個市町 村の中で1,630個に至っている。このように見れば、日本は平和に満ち溢れているかのよう に思え、また日本人は主観的にそのように考えている節があるが、まず日本国民の多数は、 「二度と戦争は御免だ」という非戦意識はあるかもしれないが、大多数が天皇制、靖国神 社、沖縄の米軍基地存置に賛成をしており、北朝鮮核·ミサイル問題に対する武力解決の 支持が世界で最も高い4。憲法9条による錯視現象もあると思うが、一般的に日本国民は日 本は平和であり、平和国家であると考えているが、日本は日米安全保障条約と駐日米軍と 核の傘によって覆われ、内には自衛隊という「軍ではない世界有数の軍事力」によって満たさ れている重武装国家であり、戦後一貫してアジアの独裁政権を支持·支援してきた。 このような中でも、一部の醒めた日本人は在日朝鮮人とともに朝鮮戦争反対闘争で吹田· 枚方事件を闘った。日本における反米·反米軍基地運動は、1950年代から共産党などを中 心として闘われて来たが、原水爆禁止運動のように中ソ論争の影響で運動が分裂して動力 を失っていった。また1960年代のベトナム戦争反対運動は、 日本においても従来の組織的 闘争様式とは異なる、個人を単位とする市民運動として闘われ、アメリカを軍事史における 初めての敗北へと追い詰める世界的反戦平和運動の一端を担った。 1960年代半ばから闘われた沖縄返還運動(本土復帰運動)の意図は、反基地·反戦であり、 米軍基地化されている沖縄の解放であったはずだが、運動が故土回復を意図する右翼国家 3 原彬久『岸信介』岩波新書、1995、p. 126 4 ギャラップが9月20日から10月1日にかけて米、露、韓、日など14カ国で世界世論調査(GIA)を行った 結果、最も「平和的解決」を選好したのがロシア(96%)とドイツ(92%)、アメリカ(75%)や韓国(66%)でも 「平和的解決」が圧倒したが、日本では約半数が軍事的解決を選好し、世界でダントツである。https:// jp.sputniknews.com/images/417/77/4177713.jpg
286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東アジア平和運動と韓国民主化運動の現在と課題 287 主義に回収され、駐沖米軍基地と核兵器は維持され、沖縄は引き続き太平洋のキーストー ン、「基地の島」として、今日にいたるまで、東アジアにおける最も先鋭な反基地·平和運動 の中心を担いながら、過去回帰を意図する日本の棘となっている。しかし沖縄が目指す「平 和の島」の実現は、日本政府の確固とした日米安全保障条約優先政策と「島の問題」として 日本国民全体とは問題意識が共有されない問題があり、沖縄問題は日米と東アジアの矛盾 対立の接点に位置し、日米の変革や対東アジア安全保障政策の転換がない限り解決は困難 であるので、なお苦難の闘いが続くものと予想される。 戦後日本平和運動において反核平和運動とともに中核を担ったのは憲法9条を護る護憲 運動あるいは憲法9条運動であり、最近の「憲法9条運動」や戦争法反対運動にまで連なるも のであり、安倍の改憲·軍事化路線に対する頑強な抵抗の戦線を形成してはいる。ただ、上 述した希望としての9条平和主義と東アジアの現実の乖離を埋める作業が必要であるので、 日本の中における勝利の展望が開けるとは限らないとしても、日本の平和主義のフィクショ ンを引き剥がし、リアルな出発点に立ち戻ることが必要である。 日本における過去清算運動である、日本軍性奴隷問題、強制連行、関東大震災での朝 鮮人虐殺、靖国強制合祀、歴史教科書·歴史認識、植民地支配責任などは、いずれも日 本の平和勢力が極めて重要で意味のある役割を果たしてきた運動分野であり、在日朝鮮人 運動は長い間、朝鮮半島統一·平和運動や民族教育権利運動·差別反対運動として、日本 の運動にも大きな影響を与えてきたが、日本政府ならびに国民の右傾化の中でかなり苦しい 少数者としての闘いを強いられている。 東アジアは上述のように冷戦の中で熱戦を強いられ、反共の名の下に各地で独裁政権が 権力を掌握し、平和を熱望しながら平和への接近を阻まれてきたが、冷戦の崩壊によって 陣営の論理が弛緩すると共に、各地における民主化が開花してきた。1975年、ベトナム解 放戦争の勝利が冷戦史に画期を記した。続いて、タイ、フィリピン、インドネシア、台湾な どにおける軍事独裁の崩壊と民主化という進展があったが、なかでも1980年、光州事件を 分水嶺とした韓国の民主化過程は極めてドラスティックなものであった。 2. 韓国の民主化の現在 1) 韓国民主化の決定的契機を作った光州虐殺事件 1960年の4月学生蜂起は、不正腐敗に汚濁した独裁政権の打倒という点で現代韓国の民主 化の原点を印した事件であったが、韓国軍部の民間人虐殺である光州事件は大きな衝撃を 韓国社会に投げかけると共に、「神聖な国防の柱である韓国軍部」と「韓国の救世主アメリ カ」という神話の崩壊の契機を開いた。光州事件のもたらした結果として次のような事柄を 指摘することができる。 ① 外敵(北朝鮮)の侵略から国を防衛すべき韓国軍が国民に銃を向け虐殺したことで、解 放後、国民に対する抑圧の主体であり続けた軍事独裁の中核としての軍の実相が暴 露され、 反独裁運動に倫理的名分と動力を付与した。 ② また軍の権威が地に落ち、光州虐殺事件の下手人、全斗煥、盧泰愚の没落以後、 軍部の政治介入はほとんど不可能になった。 ③ 光州事件の経験が市民の主権者意識の高揚をもたらし、民主的手続きによる民間政 府の選出のルールを作り出す契機をとなった。 ④ 救世主アメリカが新軍部を背後で操り、光州市民を虐殺させたか、少なくとも黙認し た疑いが持たれ、反米のタブーが打ち破られ、頻発した学生たちのアメリカ文化広報 院事件に見られるように反米自主運動が高揚した。 ⑤ そこから「北朝鮮を正しく知る運動」を経て、自主的平和統一運動が展開した。 ⑥ 光州事件真相解明運動(5月運動)は、「真相解明、謝罪、責任者処罰、賠償、教育· 記念」という過去清算5原則を打ち立て、韓国における過去清算運動の先鞭をつけ、 済州4 ·3事件、居昌民間人虐殺事件、ノグンリ虐殺事件、朝鮮戦争前後の民間人虐 殺事件の真相解明·名誉回復法制定と真相究明委員会への道を開いた。さらに失踪· 疑問死、捜査機関の拷問問題、軍隊内部の人権問題、情報部のでっち上げ·謀略疑 惑事件、三清教育隊問題の解明、さらに日本軍性奴隷、強制連行、親日派の問題 にいたるまで全方位的な過去清算·真相解明運動に火をつけた。 ⑦ 弾圧された光州市民は事件直後から神速に正義回復闘争に着手し、「5 ·18光州民主 化運動関連者保障などに関する法律」を制定し、真相究明に着手し、被害者の救済
288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東アジア平和運動と韓国民主化運動の現在と課題 289 を行っただけでなく、 加害者である全斗煥、盧泰愚を法廷に引き据えた。大規模な 国家暴力による弾圧事件で10年を待たずに正義の回復がなされたことは例を見ない。 ⑧ 全体として、反軍部、反国家暴力、正義の回復運動としての過去清算運動、国民主 権と政党政治の活性化·民主化などが強力な平和運動となり、その後の金大中、盧武 鉉の改革政権誕生と南北和解·統一政策展開の前提を作り出した。 2) キャンドル革命とキャンドル政府 韓国民主化の過程は、4 ·19学生蜂起、光州民主化抗争という画期を経て、昨年、延1700 万市民を結集した、キャンドル行動にいたると言えよう。中でもキャンドル行動は、大統領 弾劾·罷免·投獄、政権交代にいたる政治変動を平和的になしとげたという点で、「キャンド ル革命」とまで評価されている。ただ、まだ社会構造の全面的転換を成し遂げたとは言えな いので、「革命」の名は早計に過ぎると思われるが、驚くべき変革であったといえよう。その いくつかの特徴を整理してみると、まずなによりもキャンドル行動を通じて、民主主義の根 幹である「国民主権」ないしは「主権意識」が体験的に、思想的に確認され、参加者たちの内 面の価値として定着した点である。次に、既存の組織や政党に依拠せず、参加者たちの自 発的平和秩序形成と非暴力による示威·抗議を極めて成功的に行ったことである。三つ目 に、老若男女を網羅し、極めて多様な市民が創意的に、集会と示威という政治過程にお祭 りと文化表現で参加できることを示した点である。最後に、キャンドル抗争を通じて、大統 領弾劾のみならず、セウォル号事件の解明をはじめとする、社会正義回復の問題に大きな 弾みをつけたことである。したがってキャンドル行動の結果選出された文在寅政府自体が民 主主義の発現であり、平和そのものを意味するものとして期待された。 3) 文在寅政府と朝鮮半島戦争危機 大統領選挙で文在寅候補が勝利し、キャンドル政権が誕生した。文政府が発足するや、青 瓦台の開放、大統領警護の破格的簡素化、光州事件被害者に寄り添う行動、新鮮な人材 抜擢など、非権威主義的で、斬新な歩みに多くの市民の期待は膨らんだ。しかし折から 集 中的に 連続した北朝鮮核·ミサイル実験と、「アメリカ第一」を掲げる、超保守的ポピュリス ト、トランプ大統領、さらに日本の軍事化·大国化を目指す安倍政権との間で緊張が高ま り、戦争危機まで現実化する中で、文政権の立場は極めて狭められた。 まず、大統領選挙の前には設置反対を唱え、選挙中には選挙後に検討するとして、環境 評価を含めた適正な手続の遵守を掲げた。地元住民の激烈な反対運動を尻目に朴槿恵政 権が高高度ミサイル防衛システム(THAAD)2基を奇襲配置したことに批判的であった文政権 は、6月の訪米を前に急遽、倉庫に保管中の4基のサ ドーの「臨時配置」を強行した。これに 対して、地元はもちろんサ ドー配置反対運動を支えてきた宗教団体や平和運動活動家たち は正面から反発し、中国はサ ドーに一体化されているバンドレーダーが東アジアにおける軍 事均衡を壊し、自国の安全保障に重大な脅威を与えるものとして強く反発した。文政府は サ ドーの奇襲配置を強行することで自らの支持勢力である平和運動勢力との間に対立を持 ち込み、自主外交の重要なファクターである中国との関係を悪化させ、さらに北朝鮮との関 係をますます悪化させたという意味において、この行動は清新·型破りな国内政治での足取 りとは真逆の方向であり、外交·安全保障·南北問題では、紋切り型の対米従属的行動しか できていないことを示唆している。 そもそも文在寅政府の外交·安全保障·南北関係は盧武鉉政府の政策を引き継いで、現 在、駐韓米軍が掌握している韓国軍に対する戦時作戦指揮権の返還を最優先課題として掲 げており、対北朝鮮政策でも金大中政権以来の和解·協力政策の継承を目指すものと期待 されていた。文在寅大統領は大統領選挙前には、『大統領に当選すれば、まずピョンヤンか ら訪問する』と大胆な発言をし、李明博、朴槿恵政権で全く袋小路に陥った南北関係を打 開するものと期待を抱かせた。しかし内外の強力な圧力の下に画期的な南北和解のシナリ オは脆くも潰え、ワシントン訪問を先行させたのみならず、トランプの対北朝鮮武力攻撃を 含めた「全てのカ ドー」論を支持し、制裁·「最大の圧力」で日米と足並みをそろえた。北朝鮮 に対して「核の放棄を前提とした対話」を提案したり、「いかなる手段を尽くしても戦争には反 対する」と表明し『朝鮮半島問題のハンドルは自分が取る』と、アメリカに対して自立·自主を アピールしたりしたが、北朝鮮からはもちろん、アメリカからや日本からもほとんど相手にさ れていない状況である。 まず、北朝鮮はその間の核·ミサイル実験の成功を元手に、核保有国として認めることを 要求しており、「ほとんどアメリカに対する核抑止力を確保した」と表明している。これに対し て韓国は対北朝鮮のカ ドーをほとんど持っておらず、対北朝鮮の日米韓共助ないしは日米
290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東アジア平和運動と韓国民主化運動の現在と課題 291 韓同盟による最大の圧力に頼っている実情である。北朝鮮が制裁や恐喝で核開発を放棄す ると予測する専門家はほぼいない。そもそも歴史的に制裁で屈服し崩壊した国はかつて存 在しないし、北朝鮮が核開発に固執するのは体制の生存、安全保障を賭けたものであるの で、そう簡単に手を拱いて自死を選ぶはずはない。 根本的な問題は朝鮮戦争が停戦協定で停まったままになっており、法·政治的に未だ終結 していないので、不安定な停戦状態に終止符をうち、平和と安全保障を確保するために、 アメリカとの間で平和条約を結ぼうというのが北朝鮮の要求である。『平和条約を締結すれ ば、核を放棄する』という故金日成主席の遺訓を掲げて、北朝鮮は粛々と有言無言の対米 交渉を進めていると言えよう。 4) 同盟の倒錯を乗り越えて朝鮮半島平和体制の構築へ 韓米日同盟と言えば、三国が自立的で対等な同盟関係にあるかのような錯覚に陥りがちで あるが、三国は、その政治·軍事的力はもちろん、資源と国力の面でも極めて非対称的な関 係である。日本は日米安全保障条約で4万近い米軍を駐屯させており、安全保障条約に伴 う駐日米軍地位協定(行政協定)によって駐日米軍に対する司法的管轄権を有していない。 つまり、駐日米軍と米軍基地·施設、米軍艦船は治外法権を享受している。韓国の場合 は、言うまでもなく、自国軍の指揮権を米軍に委ねている、世界でも稀有な国である。つま り、日米韓同盟(共助)は、対等な主権国家間の同盟とは言えず、米軍の軍事覇権に追従す る、軍事主権不在の国々を束ねているアメリカの東アジア地域軍事支配システムだと言えよ う。例えば、文大統領は「朝鮮半島での軍事行動は韓国だけが決定できるし、誰も韓国の 同意なく、軍事行動を決定することはできない」(2017年8月15日)と言っているが、アメリカが 戦端を開くに当たって、韓国政府の言に左右されるとは考えにくい。また朝鮮半島有事に際 して、日本軍の朝鮮半島上陸には「韓国政府の許可が必要」だと言っているが、もうすでに 朝鮮半島周辺の日米軍事演習に日本が参加しており、米軍が要求(命令)すれば、日本が韓 国の承認を伺うとは考えられない。 トランプ大統領は、8月初に『(戦争で)人が死ぬのは、あちらであり、こちらではない』、9 月には国連総会で「北朝鮮を破壊する」と、国連憲章ならびに世界人権宣言違反のジェノサ イドを示唆する人種主義的発言している。言うまでもなく、戦争は「敵の戦闘力の破壊を目 的とする」ものであり、民間人を含めた無限定的、無差別的な殺傷は国際法が禁じるところ である。何よりも、韓国政府が自国民や同族の人種主義的抹殺を示唆するトランプの発言 に黙して、抗議もしないことは全く不適切であり、キャンドル政権のアイデンティティが問わ れる件(くだり)である。韓米同盟の重要性を強調しながら、このような右翼·人種主義者、女 性差別主義者、予測不可能なトランプに依存することは、キャンドル精神に反するだけでは なく、韓国改革政権の対北朝鮮政策の伝統にもとるものとして、金大中政府の対北朝鮮和 解·包容政策の中核を担っていた人士たちからの批判も浴びている有様である。もちろん、 少数与党の不安定な政権運用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や、強力な保守野党ならびに保守 世論が存在するので、今は保守右翼が激しく抵抗する安全保障·アメリカ問題は従前の政策 を踏襲して、前政権のさまざまな積弊を整理して、来年の地方自治体選挙で勝った後に本 格的な政策を展開するつもりだとも言われている。韓国におけるアメリカ崇拝ないしは韓米 同盟の物神化は非理性的水準であるが、さる9月27日、文正仁大統領特別補佐官は、折か ら水位を高めるトランプの戦争威嚇に対して『韓米同盟が壊れることがあっても、戦争はあっ てはならない』と発言し、韓国の保守メディア·野党から猛攻撃を受けた。そもそも同盟とは 敵の攻撃から安全を確保し平和を守るためのものであって、同盟自体が独り歩きし平和がそ のために犠牲になるなら、目的と手段の倒錯である。 反共親米が絶対化·仏神化した韓国 では主権を回復し自主外交を展開するのは至難の業である。 今、韓国政府のなすべきことは、米日の北朝鮮イジメに扈従(こじゅう)することではなく、 北朝鮮を同族として対し、米日に国際社会における正常な成員として遇し、脅迫·軍事訓 練の即時中止と対話の開始することを進言し、全身全霊を持って朝鮮戦争の完全な終結と 朝鮮半島平和体制の構築に努めるべきである。そこではじめて生まれる北朝鮮との信頼関 係を元手に本格的な交流·和解·協力のプロセスを進めるべきである。 3. 韓国の平和運動 長い間、軍事独裁の下で呻吟し、親日派が親米派に転化して全ての分野でのヘゲモニーを 掌握したので、韓国における平和運動は極めて困難なものであったが、民主化過程でその 活動の幅を広げていった。韓国において平和運動はなによりも、学生·知識人中心の反独裁
292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東アジア平和運動と韓国民主化運動の現在と課題 293 民主化運動として現れたが、1970年代に入り労働運動、農民運動、都市貧民運動が芽生 えてきた。その間、 非合法の形で統一運動、反米運動などが展開されたが、朴正𤋮暗殺 で維新時代が終焉し、各分野の運動が一斉に芽吹き始めた。まず、上記、光州事件を契 機とした、反米自主·統一運動である。具体的には沖縄の反基地運動(一坪反戦地主の会)と 連帯した平澤の美軍基地用地返還運動(沖韓連帯)、米軍犯罪根絶運動、京畿道華城の梅 香里米軍射爆場撤廃運動、平澤の大秋里米軍基地建設反対運動、2002年6月米軍装甲車 による少女(ヒョスン、ミソン)轢殺事件に伴う反米運動、済州江汀海軍基地建設反対運動な どが記憶され、上記、慶尚北道星州·金泉におけるサ ドー基地設置反対闘争などがある。 軍関係の平和·人権問題として、2010年3月の天安艦爆沈疑惑、兵営内の人権蹂躙·自 殺事件、良心的兵役拒否事件などがある。反戦運動としては、1991年イラク派兵反対闘 争、韓国軍のベトナム戦争での犯罪を謝罪する「ベトナムご免ね(미안해요! 베트남)」運動が ある。 統一運動は、1950年代には李承晩が「北進統一」を掲げ統一運動を「パルケンイ(アカ)」の 運動と同一視した。1960年の4月学生蜂起で李承晩が追い出されるや、学生たちの南北学 生連席会議の提案があったが、板門店での会合の二日前(5月16日)に朴正𤋮がクーデタを起 こし学生たちを弾圧する共に、金日成首相が提案した「連邦制統一」を支持したとして、『民 族日報』趙庸寿社長を死刑にした。朴正𤋮は「滅共統一」を掲げ「平和統一論」を犯罪視する とともに、「先建設後統一」を掲げて、民間で湧き上る統一論議を統一部に閉じ込め、弾圧 した。1971年、南北共同の「7 ·4共同声明」を出し統一問題への画期的イニシアティブを期 待させたが、結局、中国との突然の和解を演出したキッシンジャーの密使事件に対する対 応であり、永久執権のために超憲法的、ファッショ的独裁体制である「維新体制」を実施す るためのフェイント·モーションであったことが明らかになった。朴正𤋮暗殺後、在野運動に 担われた統一運動はすざましい勢いで展開し、金大中政府になって、南北「6 ·15共同宣言」 に結実した。1945年の民族解放を分断によって歪曲された南北朝鮮にとって統一こそが民 族解放·独立運動の完成である。最近、韓国人の統一意識が若者を中心に変化したと言わ れているが、どこまでも朝鮮民族の統一は、真の独立·民族解放であり、韓国平和運動の核 であると言えよう。 人権運動は国家暴力の恣意な発動を制約するものとして、平和運動の重要な部分をなし ている。韓国で人権が一般に意識され始めたのは、1970年代に「維新体制」の下で大量の政 治犯が投獄され、アメリカのジミーカーター大統領が「人権外交」を掲げて、朴正𤋮独裁政 権に介入し始めてからのことである。国家保安法、反共法など政治刑法が存在する限り、 「政治的信念に基づく行為が実定法に抵触して断罪される」政治犯は無くならないのであり、 1970年代、80年代において、民主化実践家族協議会を中心にした政治犯釈放、拷問廃 止、疑問死解明要求運動が人権運動の中心となって進められた。民主化以後は、労働人 権、女性人権、兵営内の人権、学生·子供の人権などへ広がり、差別·ハラッスメント問題 を中心に「日常の暴力」の問題へと拡散している。 民族解放·独立運動と関連して重要な課題は親日派清算である。民族問題研究所が1970 年代から追求してきた問題であり、盧武鉉政権で 政府次元で親日行為調査委員会が設立 され、2009年民族問題研究所が『親日人名事典』を刊行したことは親日派清算の重要な画 期になった。しかしそれが保守派の危機感を呼び起こし、『親日のどこが悪いのか?』、『親 日は愛国だ』と、正面から開き直り、解放後70年経っても、親日派の淸算は、未だ終わらぬ 問題となっている。 日本軍性奴隷(慰安婦)問題の告発は、女性人権問題だけでなく、東アジアを侵略した日 本軍の野蛮·残忍さや、日帝の植民地支配の反人倫性を暴露し、驚くべき世界的反響を呼 び起こした。真の過去清算を拒む日本は、日本軍慰安婦問題を隠蔽するために躍起になっ ているが、日本軍慰安婦運動は歴史清算の方式のモデルを作ってきたし、日本軍慰安婦被 害者支援ならびに問題解決のための「アジア女性連帯会議」は、平和·人権のための連帯運 動の模範を示していると言えよう。 4. 東アジアの平和運動 第2次世界大戦後、韓国と同じく、かつて植民地支配を受けたアジア諸民族は独立·解放の 希望に満ち溢れたが、長期の抗戦の末に解放を勝ち取ったベトナムを例外として、東南ア ジアのように東西両陣営の対決の論理に組み込まれ挫折したり、インドのように分断と内部 の対立で甚だしい苦痛を経験した。 中国は帝国主義のアジア侵略史の主舞台として、恐るべき苦難の道を歩み、ようやく抗 日戦争と国共内戦に勝利して建国したものの内政の混乱や中ソ対立などのせいで、反帝国
294 윤봉길의사순국85주년한·일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 東アジア平和運動と韓国民主化運動の現在と課題 295 主義·抗日戦争勝利=平和の成果を整理し享受する余裕が与えられなかったが、ようやく 2015年9月3日、北京で抗日戦争及び世界反ファシズム戦争勝利70周年行事が大々的に挙 行された。 その意義を習近平主席は次のように述べている。 ① 近代以降、外勢の侵略に反対して、初めて勝ち取った完全勝利の問題解放戦争。 ② 近代以降、重大な危機に陥っていた民族に偉大な復興につながる歴史的転換点を確 立した 。 ③ 中国人民抗日戦争は世界反ファシズム戦争の重要な部分であり、東方主戦場であっ た。 ④ 全世界人民の前に、弱者が強者に勝利する立派なモデルを作り出した。 ⑤ 世界平和の偉大な事業の部分を占めた。. まずアヘン戦争の恥辱とその後100年に亘る帝国主義侵略に打ち克ったことが抗日戦争勝 利の大きな意義であり、近代以降、連続する帝国主義侵略に初めての勝利であった。次に 中国の強国への発展の出発点を築いたのであり、それは、世界反ファシズム戦争の東方主 戦場での勝利でもあったと整理している。中国が世界の強国として浮上し、日本が中国を 意識し、経済大国だけではなく、軍事大国をも目指そうとする今、日本はファシズム陣営の 一員としての戦犯国家であり、中国は連合国の一員として、反ファシズム戦争の勝利者で あり、戦犯国家に対する審判者であることを想起させ、歴史の正義と普遍性は中国の側に あることを強調している。 2014年2月27日、全人代常務委員会で、9月3日を「中国人民抗日戦争勝利記念日」に定 め、12月13日を「南京大虐殺犠牲者追慕日」に指定した。同時に盧溝橋事件(1937年)のあ った7月7日、柳條溝事件(1931年)のあった9月18日を日本帝国主義関連4大記念日に指定し た。2001年、南アフリカ共和国ダーバンで開催された国連主催の「反人種主義·差別撤廃の ための世界会議」で提起された、「奴隷制と植民地支配は、人道に反する犯罪(Crime against Humanity)」だという命題から、東アジアにおける日帝の犯罪は「人道に反する犯罪」であるこ とが明らかである。東アジアにおける平和の課題は、何よりも近代以降の帝国主義の侵略· 戦争·植民地支配の残滓の清算と再発防止である。 自発的で非暴力の民衆の主権行使によるキャンドル行動は東アジアでの民主主義の新し い地平線を拓いた。しかし朝鮮半島·東アジアの平和の実現は未だに到達されねばならない 目標である。東アジアの平和の根本は帝国主義の排撃、帝国主義支配に起因する全ての負 の遺産·負の記憶の清算にある。東アジア諸民族は近代史の原点に立ち返り、反帝国主義 の平和連帯を進め、キャンドル民主主義と平和主義の相乗効果を得るための運動を展開す る必要がある。朝鮮半島は東アジア国際政治の交差点であり、東西南北対立の最前線であ る。ここを突破してこそ、東アジアの解放、平和が可能なのである。長期の独裁統治と二 重三重の抑圧がキャンドル行動を生み出したように、ここから東アジア平和がうまれる可能 性が存在する。それでこそキャンドル革命の完成になるのである。